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여성 시집 : 찬란한 숲을 그대와 - 봄날에 출판사 여성주의 문학
제인 오스틴 외 지음, 박영희 옮김 / 봄날에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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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앙증맞다. 이 책을 만든 출판사 이름이 예쁘다. ‘봄날에’다. ‘봄날’이 아니다. ‘봄날에’ 출판사는 1인 출판사다. 책 만드는 일, 번역, 홍보 등 모든 출판 업무를 한 사람이 전담한다. ‘봄날에’ 출판사 대표 박영희 님은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에 능통하다. 그녀는 2014년 네이버 포스트에 영어 회화 콘텐츠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 권의 영어 교재(《두근두근 이제 영어로 말해요》, 《겁 없이 잉글리시 20일 동사 편》)를 펴냈다. 박 대표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를 번역하기 위해 시를 공부한 대단한 노력파이다. 그 노력의 결과물이 ‘앙증맞은 책’이라고 부르고 싶은 《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여성 시집 : 찬란한 숲을 그대와》이다.

 

‘앙증맞다’가 주로 ‘깜찍하다’의 의미로 쓰이는데, 더 정확한 의미는 ‘작으면서도 갖출 것은 다 갖추어 아주 깜찍하다’이다. 내가 언급한 ‘앙증맞다’를 이해하려면 ‘갖출 것은 다 갖추다’에 중점이 돼야 한다. 이 시집에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열다섯 명의 여성 시인이 쓴 총 10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세 자매(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앤 브론테), 조지 엘리엇, 메리 셸리, 루이자 메이 올컷, 루시 몽고메리 등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들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낯설기만 하다. 그런데 소설가들도 생전에 시를 썼고, 시집을 출판한 적이 있다. 그녀들이 쓴 시는 작품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들은 ‘여성이 시를 쓸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 왜 19세기에 여성들은 시를 쓸 수 없었던 걸까. 남성 시인에 필적할 만한 여성 시인이 없어서였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여성의 문학적 재능은 남성보다 떨어지지 않는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제도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여성의 문학 활동을 제약했다. 19세기 문단은 여성에게 ‘작가’라는 지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출판사들은 여성이 쓴 글을 상품성이 높다고 보지 않았다.

 

이 부당한 상황은 제인 오스틴의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녀가 《오만과 편견》을 출간하여 출판사로부터 받은 인세가 110파운드였다. 19세기 영국 파운드 가치와 현재 파운드 가치를 비교하면 차이가 있지만, 110파운드를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6만 4천 2백 원 정도 된다. 오스틴은 기대에 못 미치는 수입 금액에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안타까운 건, 《오만과 편견》 2쇄가 나왔는데도 그녀는 인세를 받지 못했다. 에밀리 디킨슨과 브론테 세 자매는 가명으로 글을 발표했다. 특히 브론테 세 자매가 활동했던 영국 문단은 여성 작가의 글을 무시했고 조롱했다. 여성 작가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 중심 문단의 구태를 거부한 세 자매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기면서 글을 썼다.

 

이 시집에는 20세기에 활동한 여성 시인의 시도 있다. 사후에 퓰리처상을 받은 실비아 플라스의 시 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녀가 쓴 『거울』이라는 시를 읽어 보자.

 

 

나는 은색이고, 정확해. 나는 선입견이 없지.

내가 보는 건 뭐든지 바로 삼켜버려

있는 그대로, 사랑이나 증오로 부옇게 흐리지도 않아.

나는 잔인하지 않아, 그저 진실할 뿐.

자그마한 신의 눈, 모서리는 네 개.

나는 대개 맞은편 벽을 보며 명상하지.

벽은 분홍에 반점이 좀 있어. 오래도록 쳐다보니

마치 내 심장의 일부 같아. 하지만 점멸하지.

얼굴들과 어둠은 되풀이해서 우리를 갈라놓아.

 

지금은 나는 호수야. 한 여자가 내게로 고개를 숙여,

진짜 자신을 찾고자 내 범위를 조사하고 있지.

그리곤 거짓말쟁이들한테로 몸을 돌려, 촛불이나 달빛.

나는 그녀의 등을 봐, 그리고 진실하게 비추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불안한 손놀림으로 내게 보상해.

나는 그녀에게 중요해. 그녀는 왔다가 갔다가 하지.

아침이면 그녀의 얼굴이 어둠을 대체해.

내 속에 그녀는 소녀를 익사시켰고, 내 속에 늙은 여자가

하루하루를 향해 솟아올라, 꼭 끔찍한 물고기 같아.

 

 

(실비아 플라스 『거울』, 186쪽)

 

 

시의 화자인 ‘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다. 화자는 거울 속에 있고, 그녀는 거울 밖에 있는 ‘나’, 즉 실제 나의 모습을 편견 없이 그대로 바라보면서 묘사한다. 시인은 거울을 통해 진실 된 ‘나’를 보려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탐색한다. 『거울』은 ‘언어로 만들어진 자화상’이다. 플라스뿐만 아니라 여성 시인들은 자신의 재능과 정체성이 잘 드러나도록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에밀리 디킨슨은 ‘자기만의 방’에서 고독과 싸우며 고뇌의 진실을 체험했다. 그래서 그녀가 쓴 『상처받은 가슴 하나 위로할 수 있다면』은 외로운 날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상처받은 가슴 하나 위로할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쓰라린 삶의 고통을 덜어 주고

아픔을 가라앉힐 수 있다면

의식 잃어가는 울새 한 마리

둥지로 돌려보낸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에밀리 디킨슨 『상처받은 가슴 하나 위로할 수 있다면』, 41쪽)

 

 

시집의 후반부에는 열다섯 명의 시인들의 삶을 소개한 약전이 있다. 그녀들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및 사진 몇 점도 실려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앙증맞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인 출판사가 ‘앙증맞은 시집’을 만든 일은 아주 소중한 시도다. 남성 중심 문인들의 업적만으로 가득한 문학사에 가려질 뻔한 여성 시인들을 재발견하는 동시에 그녀들의 삶과 문학이 어떻게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어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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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3-03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1년도 안 돼서 절판이란 게 충격이다.
그나마 인터넷 교보는 파네.
알라딘에서 팔면 적립금으로 샀을 텐데...ㅠ

cyrus 2018-03-04 10:56   좋아요 0 | URL
마이리뷰, 100자평이 단 한 편도 없는 것도 놀라워요. 정말 잘 만든 책이에요. 다시 나왔으면 좋겠어요. ^^

겨울호랑이 2018-03-03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숨은 보물을 찾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정말 많은 노력?

cyrus 2018-03-04 10:58   좋아요 1 | URL
노력도 쪼금 있긴 하지만, 나머진 운입니다. ㅎㅎㅎ 이번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에요. 오스틴에 관한 책을 찾다가 운 좋게 절판된 시집을 만났어요. 제인 오스틴의 시를 소개한 책이 국내에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실 2018-03-04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증맞은‘ 표현 참 좋아해요.
봄날에~~ 굿!
봄을 맞이하는 준비로 이 시집을 구입하겠습니다.

세실 2018-03-04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절판이래요...

cyrus 2018-03-04 11:0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ㅠㅠ 시집에 수록된 시 작품들이 많고, 시인의 삶을 소개한 해설이 아주 충실했습니다.

스윗듀 2018-03-04 1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 저는 <오만과 편견>을 읽고 제인 언니한테 꽂혀서는 폭풍검색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알라딘 품절도서센터를 통해서 엄청 오래 기다려서 받았었어요ㅎㅎ 저도 cyrus님처럼 아니 이 책이 왜 리뷰도 없고 100자평도 하나도 없고 벌써 절판됐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알라디너분들께 소개해드려야겠다! 한게 벌써 한달 전인데.....게으름을 피우다가 그만 cyrus님한테 뺏겼네요😅 하하하ㅏ핫 그래도 cyrus님이 소개해주시는 게 더 신뢰감이 갈 것같긴해요 ㅋㅋㅋㅋㅋㅋ cyrus님 찌찌뽕!

cyrus 2018-03-05 00:17   좋아요 0 | URL
구하기 힘든 책을 얻게 돼서 정말 다행입니다. 좋은 시들을 소개하고 싶은데, 글이 길어질까 봐 참았어요. 사실은 시 한 편을 타이핑하는 게 귀찮았어요.. ㅎㅎㅎ

책 소개하는 데 순서가 중요하나요?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진심과 정성을 담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 됩니다. 스윗듀님의 시집 소개를 기대하겠습니다. 스윗듀님은 이 시집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해요. ^^

카알벨루치 2018-07-19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사요? 사고싶은데....

cyrus 2018-07-20 06:46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이라서 살 수가 없어요.. ㅠㅠ
 
새벽에 생각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6
천양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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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는 인생을 나이별로 정리했다. 10대는 충년(沖年), 20세는 약관(弱冠), 30세는 이립(而立), 40세는 불혹(不惑), 50세는 지천명(知天命), 60세는 이순(耳順), 그리고 70세는 고희(古稀) 또는 종심(從心)이라 했다. 고희는 시인 두보(杜甫)가 읊은 곡강(曲江)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이 시에서 두보는 인생 칠십에 이르는 삶은 드문 일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백 세 인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균수명이 길어졌다. 종심은 논어에 나오는 단어이다. 공자는 칠순이 되면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성숙해진다고 말했다. 그만큼 삶이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거칠 것이 없다는 얘기다.

 

청춘만이 아름답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칠순도 좋은 나이임이 분명하다. 천양희 시인을 보면 그렇다. 10대의 순수함과 20대의 열정을 품고 있는 시인의 글은 매력적이다. 간결한 문장에서 강력한 삶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아마도 시인의 나이에 대한 질문은 우문(愚問)일 수 있겠다. 나이가 많아서 무엇을 못 한다는 것은 핑계이다. 시가 잘 써지는 때는 있어도 시가 잘 써지는 나이는 없다. 시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맞춤법, 띄어쓰기는 틀려도 배짱 있게 시를 쓴 칠곡 할매들이 있다. 올해 구순을 맞은 김남조 시인은 열여덟 번째 시집 충만한 사랑(열화당)을 냈다.

 

일흔의 나이에 접어든 시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 나이에도 생에 대한 미련이 얼룩처럼 자잘하게 번져나, 아직도 쓰고 싶은 시나 못다 한 말들이 남아 있을까. 아니면 과거에만 매달린 채 허송세월하는 모습일까. 천양희 시인은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립해 나간다.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는 연륜에서 우러난 지혜와 성숙한 삶의 교훈으로 치장하고 있다. 시집에는 원로 시인의 권위나 위엄은 찾기 어렵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느낌을 허물없이 표현한 시인의 모습에서 공자가 말하는 종심의 경지, 즉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도 자기 스스로 돌아볼 줄 아는 원숙한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당신이 무엇이 되고 싶었냐고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며 파도며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했을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치며

마흔 살의 그가 말했습니다

떨어진 꽃잎 앞에서도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참 좋은 인터뷰였다고

 

 

(일흔 살의 인터뷰전문, 56~57)

 

 

모든 생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통과의례를 거친다. 여러 번의 통과의례를 거치고 나서야 최종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청춘의 시기를 평탄하게 넘어서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냥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 것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정점을 찍고 난 뒤에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곧 찍게 될 인생의 종점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시인은 달관의 자세로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일흔 살의 인터뷰)라고 말하는 시인의 유연한 고백은 세월의 흐름을 가벼운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안정된 문단의 원로의 그늘에 벗어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시작법) 시 쓰기에 몰입한다. 안주(安住)를 포기하고 외로운 마음으로 시 쓰기의 고단한 길을 걷는 셈이다. 그것은 곧 그녀가 아무 것에도 귀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생 동안 시 쓰기란 나에게는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이었고

삶을 철저히 앓는 위독한 병이었다

그래서 의연하게 고독을 살아내면서 나아가지만

 

시는 달리는 이들에게 멈추기를 요구하네

빠름보다는 느림을 준비하네 그러므로 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 것이네

그게 좋은 시를 읽어야 할 이유

이 세상에 눈물 가득한 예지는 이것뿐이네

 

 

(시작법(詩作法)부분, 100)

 

 

고독을 인내하는 의연함이 그녀의 시를 가능케 한다. 그녀의 시 쓰기는 창작을 위한 고통, ‘좋은 시를 얻기 위한 수고로움이다. 그녀의 시는 고단함에 매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살아야시를 써야할 이유를 찾는다.

 

 

잘못 자란 생각 끝에 꽃이 핀다지요 그것이 시()라지요

 

 

(이처럼 되기까지부분, 70)

 

 

쓸쓸한 영혼이나 편들까 하고

슬슬 쓰기 시작한 그날부터

왜 쓰는지를 안다는 말 생각할 때마다

세상은

아무나 잘 쓸 수 없는 원고지 같아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쓴다는 건

사는 것의 지독한 반복 학습이지

치열하게 산 자는

잘 씌어진 한 페이지를 갖고 있지

 

 

(시라는 덫부분, 88)

 

 

시는 시인의 마음에 난 상처에서 피는 이다. 문학은 인간의 불완전성, 불행과 실패에 맞서는 과감한 항변이다. 삶을 몸서리치게 체험한 시인은 남모르는 곳에 홀로 숨어, 남모르는 상처를 제 혓바닥으로 핥아 몰래 치료한다. 독자는 시를 써본 적이 없어도 천양희 시인의 시에서 공감 이상의 감동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불행과 실패를 경험한 사람만이 삶의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시인의 저항에 감동한다. 시인에게 고독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철저한 작문은 곧 문학에 대한 진지한 애정과 정신적 성숙을 의미한다. 나는 시를 위해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치열하게 시를 쓰려는 의지를 드러낸 시인의 ‘자기 선언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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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6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17 16:52   좋아요 0 | URL
그때 저는 뭐하고 있을까요? 70까지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sprenown 2017-11-16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는 시인의 마음에 난 상처에서 피는 ‘꽃’이다‘ 아주 훌륭한 표현입니다. 고독을 좀 더 견뎌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cyrus 2017-11-17 16:55   좋아요 1 | URL
나이가 들면 고독을 견디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젊었을 때와 비교하면 활동에 제약이 생기니까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마음이 통하는 지인과 친하게 지내는 일이 어려워요.

서니데이 2017-11-16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행과 실패를 만나도 역경을 이겨내고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늘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는 말을 듣더라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경험하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좋은 하루 되세요.^^

cyrus 2017-11-17 16:58   좋아요 1 | URL
살면서 미래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갑자기 찾아온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여기서부터 마음이 흔들리면 극복하기 힘들어져요. 그래서 역경을 이겨내는 사람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럽습니다. ^^

페크(pek0501) 2017-11-17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끝문장처럼 저도 박수를 보내고 싶군요...

cyrus 2017-11-20 11:08   좋아요 0 | URL
시인은 대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직업입니다. 우리나라가 시를 애독하는 사회가 아니라서 그런지 시인을 그저 그런 직업, 소설가보다 못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꽃은 바퀴다 실천시선(실천문학의 시집) 249
박설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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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독을 두려워한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고독’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스마트폰은 우리 삶을 바꿔 놓았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와 접속돼 있다는 데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고독’은 문학 속에서나 등장하는 언어가 되었다. 긴 겨울을 홀로 지낼 수 있는 인내심은 인간보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더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우리들은 집에 홀로 지내는 것보다 송년회를 통한 겨울나기를 더 선호한다.

 

고독은 눈물겨운 아픔이다. 모두가 다 내 곁을 떠나가고 홀로 된 느낌을 든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고독을 친구로 삼을 수만 있다면 고독처럼 좋은 친구는 없다. 고독을 아는 자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살아있는 존재의 상처를 사랑하는 시선도 갖게 된다. 박설희 시인『오후 네 시』는 우리가 늘 잊고 있던 거리낌 없는 연민의 감정을 되살려 낸다.

 

 

뒷다리를 끌며 걷던 흰 개가

웅크리고 앉아

아픈 제 발을 오래 핥고 간다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 물푸레나무도

날렵한 곤줄박이도

 

곰곰 생각하는 길

 

흔들리는 이파리

뾰족한 발끝

 

갸우뚱한 해가 매달아준 긴 그림자 끌고

 

 

 

- 『오후 네 시』 전문 (100쪽)

 

 

 

겨울에 사람만 쓸쓸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스산한 겨울바람을 맞아 앙상해진 나무도 외롭다. 지그재그로 하늘로 향한 나뭇가지는 잎도 열매도 없이 겨울을 견딘다. 시인은 『11월』이라는 시를 통해 겨울나무가 죽지 않았음을, 그리고 고갈되어가던 생명이 다시 소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석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중얼거리며 내다본

부연 창밖, 11월의 나무는

먼 여행을 떠나는 수도자를 닮았다

모든 것이 겹으로 보이는 내 나이를 닮았다

 

지금은 안으로 뜨거워질 때

어디라도 향하지만

어느 곳도 향하지 않는다.

 

 

- 『11월』 부분 (66~67쪽)

 

 

 

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는 삭막한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즉 고독을 받아들이는 길이다. 시인은 ‘먼 여행’과도 같은 고단한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겨울나무를 보면서 깨닫는 고독의 의미는 나 자신과 스스럼없이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된다. 이런 내적 대화는 고독을 견뎌내는 힘이 되며 몸과 정신을 뜨겁게 해준다.

 

 

시멘트 블록의 벽면이 서서히 기울었다

마지막으로 슬레이트 지붕이 털썩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 나무들이 모여 산다

리어카, 함지박, 깨진 항아리, 하늘에는 별자리

누군가는 어떻게든 가업을 잇기 마련

살은 내리고 뼈대만 남은 리어카를

참나무가 온몸을 들이밀어 꽉 껴안았다

공중으로 불끈 들어 올렸다

어린 오리나무는 가시철조망을 놓칠세라

꽉 다문 입이 철가시를 물고 붙어버렸다

쑥쑥 자라는 나무, 기억의 집

점점 높이 떠오르는 가계

공중을 들어 올린다

포탄이 떨어지고

홍수가 휩쓸어 가도

묵묵히 천문을 살펴가며

세상의 중심은 여기

그늘에 돋아난 무성한 입들을 위해

 

 

- 『이후』 전문 (32~33쪽)

 

 

『이후』 에 묘사된 장소는 사람이 떠나버린 ‘이후’의 텅 빈 곳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쑥쑥 자라는 나무’의 생명력은 폐허를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 내는 신비한 힘이다. 나무는 생존을 위해 날마다 위로 향해야만 한다. 이들의 역할은 실패한 공간의 상처와 흔적을 서서히 지워나가는 일이다. 이 시의 ‘나무들’은 궁극적으로는 희망과 재생에 대한 시인의 염원이 반영된 은유이다.

 

박설희 시인의 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절망과 단절’이 아닌 ‘희망과 재생’이다. 숙명적인 삶의 암흑 속에서도 시인은 부단히 상처를 치유하고 실존적 사유를 시도할 자신만의 시선을 추구한다. 그녀의 시집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시 한번 삶에 대해 진한 감동을 경험하며, 그러한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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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02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으~ 이젠 시집에 대한 리뷰까지... 전문가적 솜씨와 풍부한 감성.. 팔방미인 이네요..

cyrus 2017-11-03 20:03   좋아요 0 | URL
자꾸 저를 띄워주시니까 부담스럽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7-11-0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ㅎㅎ..

cyrus 2017-11-03 20:03   좋아요 0 | URL
시가 어렵지 않아서 좋습니다. ^^

임모르텔 2017-11-0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독하면서도 황홀한 고독에 중독되면 주기적으로 찾게되죠...고독은 마약같아요~^^
와~ 오후 네시.. 코가 찡하네요.

cyrus 2017-11-03 20:07   좋아요 0 | URL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방에서 혼자 책 읽으면 마음이 편해요. ^^

2017-11-02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03 20:08   좋아요 0 | URL
태양이 물러나기 전에 빛을 강렬히 내리쬐는 시간이기도 하죠. ^^

수연 2017-11-03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데~ 오랜만에 와서 시 읽으니 더 좋고 :)

cyrus 2017-11-03 21:17   좋아요 0 | URL
최근에 장문이 많은 책 위주로 읽어서 그런지 시가 읽고 싶어졌어요. ^^

나비종 2017-11-05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물체는 그 온도에 해당하는 복사에너지를 내보냅니다. cyrus님의 리뷰를 읽다보니 사람의 감성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기쁨이나 열정은 뜨거운 에너지를, 고독이나 슬픔은 보다 낮은 에너지를 뿜어낼 것만 같습니다.
고독의 에너지는 대체로 낮고 시리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인과 만나 글로 표출되었을 때 바라보는 이들을 토닥이는 따스함이 되나 봅니다. 깊고 담담한 시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마음의 온도를 조금 높이고 갑니다.^^

cyrus 2017-11-06 10:15   좋아요 0 | URL
이 시집에 딱 어울리는 좋은 평입니다. 나비종님의 댓글처럼 멋있는 문장으로 시집 리뷰를 써보고 싶군요. ^^

페크(pek0501) 2017-11-06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감상하는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와 관련한 님의 글도 좋습니다.
시집 리뷰라면 쓰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이런 형식 좋네요. 배워 갑니다.

cyrus 2017-11-07 08:53   좋아요 0 | URL
리뷰라기 보다는 독후감에 가까워요. 제 글에 배울 건 없어요. ^^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시인선 92
김상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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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가을비가 내렸다. 도시에 살면서 가을비의 정취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분주히 살아가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면 반사적으로 우산을 펼치거나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어제 내리는 비 때문이었을까? 문득, 김상미 시인의 『보헤미안 광장에서』라는 시가 떠올랐다.

 

 

 

갑자기 내리는 비

그 비를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 펼쳐지는 우산들

 

그러나 우산은 지붕이 아니다

아내 있는 남자가 남편 있는 여자가

몰래 잠깐 피우는 바람 같은 것이다

 

갑자기 내린 비가 멎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러니 사랑을 하려거든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하려거든

한 지붕 아래에서 하라

 

갑자기 내린 비는 금방 지나가고

적은 우산에 묻은 빗방울들은

우산을 접는 순간 다 말라버린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40쪽)

 

 

 

산 넘어 바다 건너 도시까지 왔을 저 가느다란 빗줄기. 우산 받쳐 들고 무언가에 쫓기듯 걷는 도시인들이 발 딛고 선 이 풍진세상 굽어보며 사선을 긋는다. 세상을 너무 건조하게 살지 말라며, 빗줄기는 광장을 축축이 적신다. 논에 물을 대는 농부처럼 먼지 자욱한 거리 구석구석까지 살며시 다가간다. 빗줄기는 피라미 떼처럼 스멀스멀 사람들 가슴으로 기어들어 와 잔잔한 물결이 되어 아름다운 동행자가 되어준다. 허공에서 빈 가슴으로 하얗게 반짝여 다가온 빗줄기는 어느새 서성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인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비를 피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비 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우산을 찾고, 그것은 비를 막아주는 사람들의 동행자가 된다. 그러나 우리와 동행하는 시간이 짧다. 시인은 ‘진짜 사랑’이라는 행복한 감정을 만드는 방법을 저 빗줄기의 움직임에서 읽는다. ‘진짜 사랑’은 누군가에게 다가가 적셔 드는 빗줄기와 같다. 내가 먼저 진실한 사랑으로 누군가의 가슴을 적실 수 있다면 그것이 순수하고 소박한 행복이다. 비에 젖은 땅에 언젠가 바람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흔적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워갈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곧 멈출 비처럼 행복했던 기억을 흙에 묻을 것이다. 그 위에 ‘추억’이라는 이름의 묘비명을 세우고. 비는 그렇게 슬픔의 상징어이면서, 생명과 행복을 약동하는 힘을 타고 내리는 위대한 자연 현상이다.

 

비가 금방 그친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 없다. 빗방울이 떠난 빈자리에 꽃잎 피는 소리가 남는다. 빗줄기가 이내 큰 강물을 이루어 철썩철썩 힘차게 흘러간다. 자연의 순리는 아무 일 없는 듯 그렇게 지나간다. 자연도, 우리 삶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 생긴다. 시인은 시든 오렌지를 먹는 행위에서 ‘인생의 참맛’을 느낀다.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김상미 『오렌지』,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10쪽)

 

 

 

시간은 우리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언제인가 우리는 이 모든 소중한 것들과 헤어질 것이다. 우리 삶은 많은 가변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 머물러야 할 것들이 떠나는 상황에 슬퍼한다. 하지만 삶의 슬픈 의미 앞에 마음을 움츠리는 것보다 두려움 속 멋진 행복을 찾는 것이 낫다. 한 사람의 인생에도 미각이 압축되어 있다. 내가 내 삶을 다스리는 태도에 따라 행복의 열매를 따기도 하고, 상실의 쓴맛을 본다. 그러니 산다는 일은 누굴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 아무 말 말고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사이에서

그 사이만큼만 서로를 사랑하고 즐겨요

얼룩투성이 심연 같은 긴 이별, 짧은 편지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잘 익어가는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사이에서 마음 놓고 우리들의 취향대로 아주 작은 왕국을 만들어요

두 켤레 신발이 뜨거운 햇볕 아래 반짝이는!

 

(김상미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사이에서』 중에서,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81쪽)

 

 

 

시인은 ‘현재’에 의미를 두고 있다.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서둘러 염려하느라 기진하기보다 내가 지나가고 있는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미래의 어느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아무 말 말고, 서로를 사랑하고 즐겨요. 이별 따위 저 멀리 던져버리고.’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글의 제목은 홍진영의 노래 '산다는 건' 노랫말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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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7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08 10:35   좋아요 1 | URL
두 사람이 우산 한 개를 써서 걸으면 불편해요. 이동이 불편하니까 옷 한쪽만 젖게 됩니다. 차라리 우산은 포기하고 냅다 뛰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번 주 일요일,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09-08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시에서는 피할 곳이 근처에 있어 피하게 되는 것 같네요. 시골 벌판에서 갑자기 비를 맞게 된다면? 피하기를 포기하고 비를 즐길 것 같습니다^^:

cyrus 2017-09-08 10:36   좋아요 1 | URL
비를 피하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도시 사람과 시골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겠어요. ^^
 
아무도 없어요 최측의농간 시집선 1
박서원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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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쯤은 있다. 어떤 이들은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기억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슬픔, 고통 등 온갖 부정적 현상들은 뇌리에서 영원히 지우고 싶어 하는 게 어쩌면 인지상정일 수 있다. 안 좋은 기억은 잊을수록 좋다. 아름다운 추억의 빛이 바래져서 희미해지면 서글프다. 달콤한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눈을 감자마자 사라질까 봐 두려울 때도 있다. 죽는 것보다 더 아픈 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힌다는 것이다. 그 누구로부터 잊힌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과 멀어지는 일이다.

 

시 속에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현실을 뛰어넘은 곳이다. 시인은 현실에 묶여 있어서 늘 그곳을 벗어나려 한다. 박서원 시인의 시 세계는 어두침침한 방과도 같다. 또한, 그러하면서도 늘 무언가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그 그리움때문에 시인은 온몸으로 현실과 철저하게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생명수가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시 밖의 세계인 현실에서 거침없는 언어를 토했다. 밖의 세계 이곳저곳 부유하는 그녀의 언어는 다시 시 세계로 편입되어야 한다. 언어는 시인의 피와 살이 녹아든 것들이다. 그런데 뱉어낸 언어를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시인의 시 세계, 즉 시인의 방은 공허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공기가 흐르는 어둠의 방이 된다. 정말 그곳에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어요.

원고지도 비어 있고

화병도 비어 있어요.

하루 종일 노딜다 간

햇살도

벌써 가고 없어요.

 

거울 속에는

내 얼굴만 있군요.

근데 얼굴은 없고

생각만 이리저리

굴려 다녀요.

 

약이 떨어진 볼펜은

권태롭고

약속해주지 않은 채

하루는 가고 있어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억제되어 박혀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걸까요.

 

벌써 불을 끌

시간이군요.

 

가만,

 

드디어 계단에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누군가 나를 채워주려

오나 봐요.

 

그러나 역시 아무도

안 와요.

나는 물만 마셔요.

차라리

그리움이 그리움을

삭발하고

거울 앞에 설레요.

 

(아무도 없어요, 61~63)

 

 

시인은 방 안에 홀로 서서 대체 무엇을 기다렸을까? 그녀의 세계, 즉 방 안에는 시인 자신의 지나온 삶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있다. 그 거울 속에는 사랑과 열정, 그리움과 후회, 상처 등이 흑백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시인은 거울 표면에 맺힌 그리움의 흔적을 응시한다. 그렇지만 바다 밑바닥 같은 어둠이 깔린 방에서는 볼 수 없다. 아무도 없어요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밤과도 같다. 밤은 공포의 시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검은 흔적을 두려워한다.[1] 그것은 악몽으로 재현된다.

 

 

밤에 잘 때

은순이는 눈을 뜨고 잔다

눈을 뜨고 꿈을 꾸면서

살아 있는 것들과

죽어나는 것들의 싸움을

풍랑이 이는 바다와

파선되는 고깃배를 본다

은순이는 꿈속에서,

꿈속에서 볼 수 있는 것만

보고도

10년 동안의 인생살이를 겪고

잊혀 가는 많은 일들을

제자리로 한 데 모아

길고 긴 상처를 만든다

 

(악몽중에서, 37)

 

 

은순이(시인의 분신으로 해석하고 싶다)가 그리워하는 것들은 쓸쓸한 상징이 되어 다시 아픔과 슬픔을 불러낸다. ‘잊혀 가는 많은 일들을 제자리로 한 데 모아만든 길고 긴 상처는 시인의 마음을 자극한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 단 한 줄의 시를 쓰는 것마저도 쉽지 않은데도, ‘잊혀 가는 많은 일을 부단히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시인을 자극하는 것이다.

    

 

  누구나가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지만 난 그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제기랄, 근데 실패하고 말다니 연습이 아니었는데도 그건 살아있는 파멸이었어 검은 밧줄, 괜찮은 유희였는데도 말야

 

(실패중에서, 22)

 

 

시인의 삶 역시 우리들의 보편적인 삶과 같다. 우리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고독을 앓고 있다. 시인은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실패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는 열정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생을 담보로 언어를 만들어냈고, 시인의 피와 살에서 떨어져 나간 것들은 시인의 방을 새롭게 구축하는 재료가 되었다. 시인의 방은 곧 시인의 의식이며 언어가 있는 곳이다. 시인이 그 방에 있다는 것은 그곳이 현실을 떠난 곳임을 말해 준다. 그곳은 시인의 도피처이면서 시인의 세계이다. 시인은 죽어서도 이 방에 남아 있다.[2] 시의 탄생은 시인의 죽음과 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떠난 지 5년 만에 그녀의 첫 시집이 다시 태어났다. 지금도 시인의 방은 열려 있다아무도 없어요는 시인의 세계를 통한 바깥세상 읽기다.

 

 

[1]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2]나비는 죽어서도 이 땅에 남는다.” (박서원 나의 나비,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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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9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12 13:40   좋아요 0 | URL
시집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이 시집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06-09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서원 시인의 시는 상당히 어둡고 외로운 느낌이 드네요... 밤에 혼자 읽기는 조금 싫을 것 같아요^^:

cyrus 2017-06-12 13:43   좋아요 1 | URL
박서원 시인이 1990년대에 활동했습니다. 201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부고 소식이 최근에서야 알려졌어요. 생전에 시인이 고독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시집의 분위기가 상당히 어둡습니다.

나와같다면 2017-06-10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기억.. 스티그마.. 누구나 깊고 어두운 기억을 갖고 있죠

‘행복해지기 위해 아픈 기억과 기꺼이 동행하겠습니다‘

이제는 이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cyrus 2017-06-12 13:48   좋아요 0 | URL
아픈 기억을 억지로 떼어내려고 하면 더 고통스럽습니다.

yamoo 2017-06-1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도 읽으시니 사이러스 님^^

저는 시집을 읽지 않습니다. 네, 그렇구말구요..^^;;

cyrus 2017-06-12 13:49   좋아요 0 | URL
시집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닙니다. 문제는 제가 시집을 많이 사는 독자가 아니에요. ^^;;

돌아온탕아 2017-06-11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은 제게 너무 어렵더군요. 그래도 이 글을 읽으니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7-06-12 13:50   좋아요 0 | URL
이 시집의 분위기가 상당히 어둡습니다. 시집을 읽기 전에 박서원 시인의 삶을 알아야합니다.

북깨비 2017-06-16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없어요 라는 시를 읽는데 우울함과 동시에 한글의 예쁨이 마구마구 쏟아져서 와아- 와아- 하면서 읽었어요. 아무도 없는거랑 원고지가 빈 거랑 화병이 빈 거랑 없는건 다 똑같은데 공간적인 차이가 주는 느낌때문에 어머 말이 정말 예쁘네 하고 있는데 햇살이 놀다가고 없다하지 거울을 보는데 이런저런 생각만 많아서 얼굴은 없다 그러지 또 와아- 엄청 반하고, 발소리가 들린다고 잔뜩 청각을 자극해놓고 나를 채워주려 오나 아무도 안 오네 하며 순식간에 다시 텅 빈 나, 텅 빈 내 공간에 스포트라이트가 가면서 정말 우울한데 그런데도 그 말들은 너무너무 예쁜거에요. 이런 때는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말을 하는게 너무 행운이구나 싶죠. 저 너무 일차원적으로 시를 읽지만 그래도 시 참 좋아요. ㅎㅎ 좋은 시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전체적으로 우울하다니 맘 단디 먹고 한 권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cyrus 2017-06-16 18:48   좋아요 1 | URL
<아무도 없어요>의 마지막 연이 애상적이었어요. ‘그리움이 그리움을 / 삭발하고 / 거울 앞에 설레요’ 시를 읽으면 생전에 시인이 느꼈을 고독감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져요.

임모르텔 2017-10-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그리움이 그리움을
삭발하고
거울 앞에 설레요.

(『아무도 없어요』, 61~63쪽)
.........

아~~~~~~~~~~~!!! 저는 시를 참 좋아하는데요.
이 시구절을 심상화하니.... 코끝이 찡!! 하니~양파까며 울던 그때 그 느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