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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평점 :
행동하는 자는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 배운다.
- 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 중에서 -
니체, 생애 마지막 10년
한 중년의 남자가 마부로부터 가혹하게 채찍을 맞는 말을 끌어안고 광장 한가운데서 오열하고 있었다. 마부의 눈초리도, 웅성거리는 군중도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친구들에 의해 정신병 요양소로 옮겨진다.
정신병 요양소로 가게 된 그 중년 남자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 신은 죽었다 " 고 외친 남자는 이렇게 속세로부터 멀어져 갔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통해서 신에 의지했던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주인공, 즉 ' 위버멘쉬 ' (Uebermensch)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 위버멘쉬 ' 는 가치의 창조자로서 풍부하고 강력한 생(生)을 실현할 수 있는 ' 힘에의 의지 ' 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가 살았던 19세기에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자살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 신 ' 이라는 하나의 관념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시도를 해내게 된다. 니체에게서 신의 존재 부정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의지를 앗아가버린 모든 억압과 우상도 부정하는 것이다. 니체의 이 같은 선언은 인간의 개별적 주체성을 근간으로 한 20세기 실존철학의 전범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니체는 생애 마지막 10년은 자신을 둘러싼 두려움과 허무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했다. 평생을 질병에 시달렸고, 정신분열증에 걸려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았다. 10대 때부터 지독한 편두통을 호소했으며 왕성한 저작활동을 하던 3, 40대에는 극심한 조울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거대한 세계를 이해하고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이나 과학에 의존한다. 그러나 근원적인 지식의 토대를 파고든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때로 정신적인 부작용에 시달리곤 하였다.
러셀은 왜 미쳐버렸는가?
현대 수학의 금자탑이라고 불리고 있는 <수학원리>를 집필한 논리학자 버트런드 러셀 역시 정신분열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치열했던 지적 여정을 만화로 소개하고 있는 <로지코믹스>의 서론에는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 왜 유독 논리학자는 정신병에 잘 걸릴까? ”
앞에서 언급한 니체를 ' 논리학자 ' 로 규정되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 논리학 ' 이라는 학문 자체를 '철학 ' 과 비교해서 따져놓고 본다면 판단이나 개념의 내용이 진리인 것 같은 인식을 얻기 위한 사고의 경로나 그 형태를 이성적으로 연구한다는 점은 철학과 논리학은 서로 유사하다. 무엇보다도 논리학은 애초부터 철학에서 떨어져나온 한 핏줄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로부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논리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의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으며 그 후로 뛰어난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적 인식을 올바른 것으로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논리학 대신 모두 제각기의 입장에서 특징있는 인식론적 논리학을 설정하였다.
어쨌든 논리학자들이 보여주는 광기에 대한 이야기의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할 줄 아는 논리학자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 논리학자 ' 에 대한 인식과 정반대라서 흥미롭다.
특히 ' 러셀 ' 이라고 하면 대중들 사이에서는 영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손꼽히고 있다. <수학 원리>를 31살에 쓴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며 평생에 걸쳐 감옥도 두려워하지 않고 1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등을 반대한 반전 평화운동가이자 사회학자였다. 그런 그가 정신분열증의 고통에 남몰래 시달려야만 했던 것일까?
' 확실성 ' 이라는 이상과 모순된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러셀은 논리학을 통해 완전무결한 수학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평생을 바치게 된다. 처음에는 수학을 통해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 했던 러셀의 지적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따분한 계산에만 열중하는 수학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그 당시의 수학에 만족하지 못한 러셀은 본격적으로 철학에 열중하게 되고, 자신은 수학자가 아닌 논리학자라는 자각을 갖게 된다.
러셀에게 논리학자라는 자각을 심어준 결정적인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라이프니츠였다.
유클리드와의 첫 만남은 내 안에 씨가 뿌려진 것과 같았고 ,,, 라이프니츠의 꿈에 대해서 듣는 것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았다.
- <로지코믹스> p 100 -
어린시절 러셀은 세상의 확실성을 부여하고 증명해줄 수 있는 학문을 유클리드의 기하학이라고 반견하게 되지만 점차적으로 수학의 확실성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되면서부터 라이프니츠의 논리학에 심취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러셀보다 수백년 전부터 이미 철학에 확고한 토대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해서 탐구하였다.
러셀에게 라이프니츠의 만남은 유년시절의 유클리드의 만남 못지 않게 자신의 지적 영역을 한층 더 확장될 수 있었던 전환점이 되었다. 젊은 니체가 헌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게 되면서 ' 생(生)의 의지 ' 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부여되는, 예전부터 확신하고 지배하고 있었던 가치와 신념을 자신 스스로 타파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러셀은 수학을 연구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 곤경 ' 을 처하게 되는데 마음 속 깊이 품은 목표, 즉 세계에 대한 확실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예전부터 확고히 서 있는 토대의 기본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지적의 여정 속에는 ' 정신적인 ' 위험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러셀이 활동하던 당시 ' 무한 ' 이라는 개념은 수많은 수학자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셀은 수학에서 위치하고 있는 무한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지만 무한이라는 개념 역시 수학의 허약한 내면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 관념 ' 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로지코믹스> p 143
러셀의 꿈 속에서 ' 수학의 왕 ' 가우스가 나타나
무한의 수학적인 토대를 무너뜨렸다고 꾸짖고 있다.
<로지코믹스> p 144,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은 오랫동안 확고히 세워져 있었던 하나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수학자 가우스가 러셀의 꿈 속에 나타나는 장면은 관념적인 존재를 부정하려는 러셀이 겪게 되는 내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부터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상의 믿음, 가치 등이 한순간에 변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예측불가능한 변화의 시류 속에 자신이 직접 동참하고 주도하는 것 역시 쉽지가 않은 일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이 학계로부터 제대로 인정받기까지 이 두 사람은 생전에 종교적인 핍박에 시달려야 했으며 니체 역시 신을 부정한다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종교로부터 배척과 오해를 받아야만 했다. 러셀 역시 당시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학문적 신념의 틀을 깨부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 스스로도 그런 시도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내면 속에 존재하고 있던 ' 정신적인 '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나서야 화이트헤드와의 기나긴 공동 연구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는 <수학원리>를 완성하게 된다. 러셀은 평생 바치게 될 학문적 시도의 본격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일생 동안 천착해 온 무결점의 수학 원리는 끝내 도출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확실성의 진리에 이르는 왕도는 없다
학문의 가장 완벽한 기초, 토대를 찾기 위해서 수년동안에 걸쳐 오로지 수와 식, 기호로 가득찬 공식을 집착했던 러셀의 입장에서는 확실성의 토대에 대한 불확실성이라는 미제의 결론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여겼을 것이다. 영원하며 절대적인 확실성으로 이루어진 진리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러셀에게 오랜 논리학 연구를 통해서 남게 된 것은 정신적인 후유증, 그것이 바로 ' 확실하게 증명하고자 했던 ' 완벽한 실체에 대한 증명이 도출되지 못함에 대한 허무와 회의감뿐이었다. 그런 정신적인 공허감과 회의감 때문에 논리학자들은 정신분열증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러셀뿐만 아니라 확실한 토대의 논리를 추구하기 위해 시도했던 수학자, 논리학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프레게와 칸토어는 미쳐버렸고, 괴델은 우울증에 걸렸다. 그리고 러셀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이들 논리학자들의 광기를 향해서 손가락질할 이유가 없으며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남게 된 논리학의 토대에 대해서 쓸모 없는 연구에 불과한 실패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우리는 논리학자들의 말 못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런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다나오스의 딸들> 1904년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다나오스의 딸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결혼 첫날밤에 남편의 목을 베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서 지옥에서
구멍 뚫린 물통에다 물을 부어 채워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논리학자들의 고통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다나오스의 딸들처럼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다. ' 토대를 이루는 체계에 토대가 없는 ' 아이러니한 상황을 견디면서 혹은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 스스로 논리학의 광기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자처하였다.
러셀은 ' 인간사에서의 논리의 역할 ' 이라는 강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강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진리에 이르는 왕도는 없다. "
그리고 논리학에 완벽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면 오늘날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한 세상에서도 완벽한 확실성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국에는 확실성의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는 수많은 현실의 딜레마에 마주하게 되는 우리 인간들이 요구되어지는 것은 최소한 두 세번,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사에서 논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기도 하다.
이성적으로 여러번 판단하고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의 행동은 수많은 고민 끝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 행동하는 자는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 라고 말한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의 격언처럼 우리는 사유를 통한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을 이해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창조적인 생의 의지이다.
러셀과 수많은 논리학자들이 겪어야했던 고통과 비교하면 우리가 그동안 고수하고 있었던 삶의 가치와 신념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느끼게 되는 고통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결국 러셀은 확실성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토대를 찾기 위해서 스스로 ' 행동 ' 했으며 이를 위해서 ' 광기 ' 라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려면 뼈를 깎는 고통이 필요하고,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펭귄클래식코리아, p 159 -
러셀이 추구했던 논리학의 토대 구축은 확실성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무모하면서도 감히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지성사에서 영원히 남게 될 도전이었다. 어떻게 보면 러셀이야말로 니체가 수백년 안에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한 그 ' 위버멘쉬 ' , 자기 손으로 자기가 믿고 있던 가치를 스스로 극복할 줄 아는 초인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