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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젠장 이런 것도 시가 되네 ㅣ 황금알 시인선 229
이동재 지음 / 황금알 / 2021년 6월
평점 :
제목으로 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니 사랑해야하는 비극적인 이유'는 뒷표지에 실린 오태환 시인의 글에서 인용했다.
시를 읽으면서 큰소리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떠오르는 건 오탁번 선생님 뿐이다. 한국 역사를 돌이켜보면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독재체제, 산업화 등으로 연속되니 시는 당연히 진지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설사 웃음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건 쓴 웃음일수밖에 없다.
이동재 시인의 시를 읽을 때 처음엔 웃는다. 파안대소할 때도 많다. 그러다가 끝내 씁쓸해지고 만다. 이번 시집도 다르지 않았다.
시인의 술자리
김 이 박, 남자 시인 셋이서
양꼬치를 안주로 술을 마시다가
이 김형! 거, 양하고 해봤어?
김 으-음, 박 양이나 김 양하고는 해봤지.
박 이사람들 큰일 날 소리 하네.
당신들도 유명해지려고 그래.
그 노털상 후보처럼?
김 그래, 우린 역시 양보다는 질이지!
이 박 -!!
술자리에서의 농담을 그대로 옮긴 듯한 시를 보며 웃었다. 김, 박, 으로 표기된 시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말장난에 술맛이 좀 돌았을까? 이동재 시인이 술을 무척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어봤지만, 취한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소설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주인공의 불화를 다룬다. 시는 특히 서정시는 자기 자신과의 갈등을 다룬다. 그러나 시인이 다루는 자기 자신과의 갈등은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아니 너무나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시인도 생활인이므로 가정, 직장, 출판, 문단, 정치, 사회 등등 다양한 접점을 갖는다. 이 모든 접점에서 시인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특히 이동재 시인은 이 세계에 대한 모든 불화를 좌절과 분노, 심하게는 자해와 자학으로 혹은 자기연민으로 표현했다.
이런 젠장, 어머니
이런 젠장
막내아들 교수 만들고 큰 소리 좀 치려 했는데
교수 되지마자 해직되고
이런 젠장
며느리 앞에 기 좀 펴나 했는데
이런 젠장
염치없어 기도 못 펴고
이런 젠장
짜장면 하나도 입에 들어가는 거 죄스러워
이런 젠장
집 한편 구석에 찌그러져 구십 평생
이런 젠장
조상님 뵐 면목 없어 일찍 세상도 못 뜨고
이런 젠장
널 낳고 내가 미역국도 못 먹었다
이런 젠장
뭔 놈의 세상이 이 모양이냐
이런 젠장 할
어머니를 화자로 한 이 시는 어머니의 입을 빌려 당신의 한 생을 요약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한 행을 차지하고 있는 '이런 젠장'이라는 혼잣말 속에 계속 포개지고 있는 느낌이다.
생활의 발견-장수시대
어떤 사람과 오십 년 넘게 한 집구석에서 부딪히고 말을 섞는다는 거 어느 순간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고 싶지 않고 수십억을 물려준다고 해도 듣기 싫고 무슨 말을 해도 넌더리가 나고 화가 나고 한 둥지에서 백세를 바라보고 부자가 함께 늙어간다는 거 하루에도 골백번 축복이었다가 저주였다가 네안데르탈인도 에렉투스도 사피엔스도 수만 년 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인류 최후의 축복이자 저주 유교의 효는 악마의 경전이거나 백세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한 집에서 삼대가 사대가 늙어가는 걸 경험해보지 못한 겨우 삼사십 년 살다간 인간들의 목가적인 주문일 뿐 무기력하게 태어나 무기력하게 늙어가며 외양간의 소가 돼간다는 거 누구의 어떤 말도 듣기 싫다는 거 그냥 화가 난다는 거
장수 시대
하루에도 골백번
양아치모드에서 효자모드로
잡년모드에서 효부모드로
아버님 어머님
오래오래 사셔요
하루에도 또 수백번
효자모드에서 양아치모드로
효부모드에서 잡년모드로
꼰대들이 쓸데없이
목숨만 길어져서 뭐해
시인이 부모님을 모시고 한 집에서 사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아기 낳을 생각을 안 하고, 노인은 과학의 힘을 빌려 점점 더 오래 살게 되는 사회가 되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같은 산아제한 표어들이 사방에 걸려있었다. 지금은 각 지자제에서 출산장려금을 엄청나게 높여놓고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노령인구, 이것 역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시인은 이 시 외에도 <문제 부모>, <초고령 사회> 등의 시에서 이같은 문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시집에서 유난히 내 눈에 띈 것은 이렇게 가정의 단면을 거침없이 노출하면서 사회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me-too문제, 창비, 문지, 문동 등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출산사의 거절 편지를 그대로 옮긴 <출판 거절>이라는 5편의 시 역시 눈여겨 보았다.
근무일지
내가 시집이나 소설집을 낸다는 건
언감생심 베스트셀러는 고사하고
하찮은 상업적 유통도 아니고
사소한 국가기록물을 생산하는 일
꾸역꾸역 아무도 보지 않는
시집을 내고 소설집을 내는 건
그냥 이 세상 근무일지 같은 거
마음 아픈 시다. 나는 근무태만이라 근무일지를 쓸 주제도 못 되지만, 시인의 일이 남일 같지 않다. 다음 생애는 저 남미의 어느 나라처럼 시인이 되면 문화부 장관도 시켜주고, 또 이름도 잊어버린 어느 나라처럼 평생 먹고 사는 걸 보장해주는 나라에 태어나시길 바란다.
참고: 이 시집의 13쪽에 실린 <취중작시>에 내 이름이 나와서 당황했다. 몇년 전 송년회에 나갔던 날의 스캐치다. 송년회니 출판기념회니 하는 곳을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갔었던 것 같다. 그렇게 멀리하던 이런 모임도 코로나 시대를 살다보니 그리운 풍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