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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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의 사회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김수철이 잡힌 지 한 달도 안 되어 같은 지역에서 7살 여자 아이가
성폭행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후 피해 여자 아이의 진술을 통해 성폭행범의
몽타주가 완성되어 지명수배중이다. 하지만 이 용의자가 또다시 제2의 범행을
저지를 수가 있다. 초등학생 자식을 둔 부모님들은 이들의 행각에 치를 떨면서도
자기 자식들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 
 

반면, 이런 흉악범들을 잡아야 할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들은
폭력 같지 않은 폭력(?)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경찰들이 피의자들에게 고문을 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가혹 행위라고 주장하지만
논란이 계속 커지자 관련 경찰 4명은 구속되고 경찰청장은 사퇴 요구에 압박당하고 있다.
20여 년 전, 독재 정권 시절의 저승사자였던 ‘고문경찰’이 사라졌건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두운 곳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폭행과 경찰 고문 사건의 소식이 알려짐과 동시에
또 다른 기사가 또 한 번 대중들을 분노케 했다.
이번에는 고양이가 무자비하게 학대를 당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고양이의 이름을 따서 일명 ‘고양이 은비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아침 시사 프로그램에서 가십거리의 하나로 소개되었지만
방송 이후 사건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 커져나갔으며  

결국 뉴스에서까지 비중이 있는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논란이 일어난 이유는 고양이를 잔인하게 학대한 점과 가해자의 변명이었다.
고양이를 무참하게 때리다가 고층 건물 밖으로 내던졌으나, 가해자는
자신이 그 때 술에 취해서 기억이 자세히 안 나며
왜 죄 없는 고양이를 죽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변명하고 있다.

요즘 사회는 폭력의 사회다. 정말 무시무시하다.  

같은 인간뿐만 아니라 이제는 동물까지도 거리낌없이 폭행을 가하고 있다.
동물도 인간과 같은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아무 죄 없는 고양이를
죽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런 잔인한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앞에서 소개된 사건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폭행 사건이 많다.
김길태와 조두순 같은 사람은 인간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성폭행과 살인을 저질렀으며,
괜히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청소부와 힘 없는 임산부에게  

폭행을 가한 사건들이 있다.
예전에는 폭력이란 조직 폭력배들과 같은 흉악범들의 전형적인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폭력배들의 생활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대중 매체 속의 폭력배들은 동료의 의리와 자신들만의 목표를 위해서
주먹질을 하는 왜곡된 이미지로 그려졌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폭력배의 모습을 보고 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조직 폭력배들의 전유물인줄만 알았던 폭력 행위는  

이제 일반인들도 폭력을 행사하여 종종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요즘은 폭력배들의 소식보다는 일반인들의 폭력 소식이 점점 눈에 띄고 있다. 
 

 

 

 죄와 벌

김수영의 모든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김수영 전집> 1권을 읽게 되면
지금 우리나라의 폭력의 사회를 그대로 표현하는듯한 시가 있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는 먼저
  아까운 것이
  지(紙)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김수영 전집 1>『죄와 벌』전문, p 296 - 
 

 

이 전집에는 김수영의 시 속의 단어들에 대한 각주만 있을 뿐 자세한 문학적 해설이 없다.
그래서 시의 내용에 대해 독자는 다양한 해석들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제목부터 보자마자 떠오르는 것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이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약육강식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시의 1연도 이와 비슷하다. 시 속의 화자가 살인을 하려는 행위를 암시를 주고 있다.
그리고 살인이란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오히려 화자는 살인 행위 후의 비난을 ‘희생’이라고 고상하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우산대로 폭행을 가한다.
그러자 그들의 주위에는 40명 정도의 취객들이 모인다.
하지만 시의 내용에는 취객들이 화자의 폭행을 말리는 장면이 없는 걸로 보아서는
폭행 행위를 그냥 묵묵히 지켜봤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시인은 폭행 및 살인 행위를 지켜보기만 하는 목격자들을  

‘취객’ 이라고 비유함으로써 이들의 안일한 태도들을 은근히 조롱하고 있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게 되면 인간의 뇌는 알코올로 인해서 취하게 되어
기억력과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시 속에 등장하는 40명의 취객들도 술에 취한 나머지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행위를 막지 못하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게 된다.
하지만 한 두 명이 아닌 40명이라는 적지 않은 취객들 중에서도
단 한 명이라도 살인 행위를 말리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40명이든 100명이 모여 있든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자신의 일이 아닌 살인 행위 앞에서는 평소답지 않게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방관자 효과’ 라고 한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것이다.
목격자들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는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나 성격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도움을 주겠지’하는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
즉,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취객이 알코올로 인해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것처럼
사건의 목격자들도 사건 현장 앞에만 서면 취객처럼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는 뜻으로
사건의 목격자들을 ‘40명 가량의 취객’과 동일시하고 있다.

결말에는 살인 행위를 저지르고 난 뒤의 화자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범행 현장을 지켜보던 취객 중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의 죄가 알려짐으로써 생기는 불안감보다는
범행 도구인 ‘지우산’을 현장에 놔두고 왔다는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화자의 인면수심적인 심리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화자가 지우산을 현장에 놔두고 왔다는 점을 통해서
사건 증거물인 지우산으로 인해 그의 범행이 밝혀질 것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시인은 인간으로서의 용서할 수 없는 를 저지른 자는 언젠가는 죄가 밝혀지며
죄의 대가로 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시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40명의 취객’들도 살인 행위들을 방관한 것도  

도덕상으로 보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말할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이들도 죄를 저지른 것이며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
시의 제목 ‘죄와 벌’이 살인자인 화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살인 행위를 그냥 지켜보는 취객들도 포함하게 된다.
시는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할 대상의 고정 관념을 무너뜨리고 있다.
결국 누가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할 지 알 수 없는 왜곡된 현실의 상황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죄와 벌’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폭력의 역사

김수영의 시를 폭력이라는 행위가 비일비재한 우리 사회를 투영해서  

독자적인 해석을 했지만
당시 시를 쓴 배경을 생각하면 시 속의 화자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들을 억압하고 비밀리에 고문을 가하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책감도 없으며
정당화하려는 독재 정권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리고 ‘지우산’을 통해 그들의 추악한 행위들이  

언젠가는 밝혀지고 무너지기를 암시하고 있다.
참된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시에서 내포되어 있다.
김수영의 시는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했으며 민주주의와 자유를 갈망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김수영이 살던 사회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독재 정권이 남긴 어두운 면이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다.
이번 경찰 고문 사건은 예전 독재 정권의 시대에 있을법한 일들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고 있는 폭력의 모습들도 모두 다
일제 강점기부터 비롯된 독재 정권 하의 사회와 교육이라는  

기이한 사회 구조가 낳은 악영향이다.
그 때 학교와 군대, 사회단체에서는 지도자가 모든 집단 인원들을 통솔하기 위한 방법에는
무조건적인 복종 강요와 이에 불응 시에 따르는 폭력뿐이었다.
복종과 폭력에 길들어진 대중들은 억압된 과거로 인한  

정서적 불안을 해소하고자 폭력이라는 행위를 하게 된다.
잘못된 사회 구조가 ‘남보다 자신’ 이라는 지나친 이기주의로 자리 잡게 되고,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다거나 마음에 안 들면 무조건 폭력으로 응징하려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이런 폭행 사건들이 또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대중들은 폭행을 일으킨 범죄자를 겨냥하여
‘패륜녀’, ‘패륜남’ 이나 일명 ‘발길질녀’ 처럼 별명을 갖다 붙이며  

마녀사냥식으로 욕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도 잠시 이성을 잃으면 마음속에 숨어있던 폭력의 본능이 나올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우리도 ‘패륜아’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이 김수영이 말하고자 했던 우리 사회의 ‘죄와 벌’의 양면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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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수영 전집 시집1

소장하고 있어요.

근데 옛날 판 이라서 한문 이 섞여 있는데 한자 까막눈 이라서

일일이 옥편 찾는게 귀찮아서 마음 가는데로 읽어요 ㅋ
 
역사가의 시간 - 강만길 자서전, 2010년 제25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강만길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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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 노병(老兵)과 한 대의 트럭

다음은 6.25 전쟁에 관한 신문의 특집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이 씨는 올해의 나이로는 78세다. 그에게는 특별한 동생이 있다.
동생은 바로 이 씨의 트럭. 트럭은 이 씨의 인생 절반과 함께 동고동락을 해왔다.
이들의 각별한 운명은 6.25 전쟁 때부터 시작되었다. 17세의 이 씨는 트럭을 몰고다니며
강원도 영월의 광업소에서 일을 하다가, 느닷없이 발생한 6.25 전쟁에
이 씨와 트럭은 함께 징용되었다. 어린 나이 때문에 부대에서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트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마음으로 장교에게 사정한 끝에
학도병 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본인은 우리나라 1호 학도병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에 증명하는 공식 기록이 없다.
그 뒤로 그는 트럭과 함께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제대를 원하였으나 당시 부대에는 운전병이 귀한 터라  

국방부 수송부에서 5년을 일했다.
그리고 1958년에 다시 그에게 영장이 날아왔다. 6.25 전쟁 학도병에다가
국방부 수송부의 경력까지 댔으나 증명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다시 입대하게 되어
1962년에 제대했다. 이 씨의 군 생활 합계 12년.  

그러나 그에게 주어지는 연금은 월 9만원뿐이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쳤지만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트럭이라는 소중한 동생을 얻었다.  

그리고 이 씨는 지금까지도 트럭을 닦고, 기름칠하고 있다.
언젠가는 트럭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아픈 과거의 역사가 관심을 받는 그 날을 위해서..... 

 
 

 어느 노(老) 학자와 한 권의 자서전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역사가의 시간>을 읽는 와중에  

신문 속의 이 씨에 관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
우연하게도 이 씨의 연세와 강만길 명예교수의 나이도 한 살 차이 밖에 안 나고,
이 두 사람은 험난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 속에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 씨가 트럭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리려고 하듯이
강 교수도 자신의 자서전을 통하여 자신이 겪었던 역사 속의 경험들을 알려주고 있다.
자서전이라고 해서 역사가 특유의 딱딱한 서술이 없어서  

술술 읽혀나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일제 강점기 말, 8.15 광복 후의 불안정한 국내, 6.25 전쟁, 4.19 혁명,
5.16 쿠데타, 유신 정권, 전두환 정권, 6.15 남북공동선언까지
우리나라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풀어가며   

살아오면서 느꼈던 역사의 감상(感想)을 말하고,
역사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역사책이라고 불러도 어색한 점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책 분량이 많은 만큼 내용 면에도
자신의 생애 위주로 풀어나가는 명사(名師)들의 자서전보다는
더욱 더 깊이가 있으면서도 무언가 엄숙하다.
강 교수가 겪었던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두웠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최대한 주관적인 감정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는 자신의 일생과 역사적 사건들을 담담히 표현하고 있다. 
 

 

 

 역사 앞의 인간도 변하고 만다

<역사가의 시간>들을 읽어보면 강 교수가  

지금까지 만나고 지내왔던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부분 인물들은 역사 앞에서 두 가지 극명한 갈림길에서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결정하게 된다.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변절을 해서라도 살아남아 기득권 행사를 한다거나,
이들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받거나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희생당하는 자들이다.
강 교수의 전작인 <역사는 변하고 만다>의 제목처럼  

역사 앞에 선 인간들도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새 나라의 첫 이승만 정권의 정치핵심과 행정요원은 전혀 재교육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세력이 그대로 눌러앉았고..... 김종원 등 일본군대의 지원병 출신이  

  가당찮게도 백두산 호랑이로 변신해서 ‘포효’하거나, 김창용 등 일본군대의  헌병  

 하사관 출신이 ‘염라대왕’이 되어 숙군이라는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는 주인이 되고  

 말았다..... 장준하 등과 같이 일본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목숨을 걸고 광복진영으로  

 탈출했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현실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역사가의 시간> p 93 중에서 -  

 

강 교수의 평을 통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역사에 의해서 변한 인물들에 대해서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게 되면
오히려 희생당한 인물들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고,
자손대대로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로 공부하게 된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기록들은 그 때의 사건들을 알 수 있는
하나하나 중요한 사료(史料)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록만으로 역사를 이해한다고해서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시험에서 몇 문제 더 맞추기 위해서 역사를 달달 외우듯이
단순히 기록으로 남아있는 역사적 사건 자체에 매달리면  

올바른 역사적 인식을 가질 수 없다.
역사 기록들은 대부분 가진 자들(지배층, 기득권자)의 관점이다.
그래서 다분히 주관적이면서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가진 자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못 가진 자들. 즉, 억압받던 소수층과
가진 자들에 의해서 말살당한, 역사와 이름이 없는 자들의 입장으로도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역사적 사건들의 변화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변하게 된 인물들의 행적과 내면을 파악하게 됨으로써  

과거사에 대해서  올바르고 균형 있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강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알려지고 있는 잘못된 역사가 

땅 속 깊숙히 박힌 뿌리처럼 대중들의 인식에 박혀 있다.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이라는 사설을 발표하여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던
언론인 장지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구실을 한 <매일신보>에 친일 경향의 시와 사설을 발표했다는
연구가 주장되면서 그의 친일 행적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하는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을 수록하여 논란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장지연의 후손들은 친일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결국, 다음 해 반민규명위원회에서는 장지연을 친일명단에서 제외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역사적 사건에만 치중한 고정적 역사 관점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해주고 있다.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쓴 활동 하나만으로 장지연은 독립운동가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알려져 역사의 진실과 숨겨진 이면들을 밝혀졌다.
하지만 더욱 더 염려가 되는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식이다.
젊은 세대를 포함해서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장지연이라고 하면 독립 운동가라고 생각이 깊게 인식되어져 있다.
학생들이 배우는 국사 교과서에는 장지연을 독립 운동가로 기재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에 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없다.
우리의 두뇌는 생체적으로 변화라는 것에 대해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래서 한 번 머릿속에 자리 잡은 고정된 인식은 바꾸기가 쉽지가 않다.
장지연 친일사전 수록 논란 이후에
장지연이 친일 행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만약 장지연이 친일 행적을 했다고 말하면 대부분 교육 받았던 사람들은
이 주장에 믿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오용(誤用)당하는 우리 역사

친일사전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한 장지연 후손뿐만 아니라
광복 후 강제 몰수당한 친일파 조상의 땅을 법으로 되찾으려는 후손들이 보여주듯이
특정인의 역사를 통해 조상에 의해서 대대로 누려왔던 명예를 지키거나  

되찾으려고 하는 것은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가문에 대해  

구차한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이며 우리나라 역사를 배워야하는 의미도 없게 된다.
이 책에서도 그런 유사한 내용의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하루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학교 연구실로 찾아와서.....  

  우리 현대사를 전공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생물학 석사가  

  왜 국사학 박사를 하려느냐고 물었더니.....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군대 내 좌익 숙청에 명성을 떨치다가 군인들에 의해 암살된 김창룡이  

  그의 아버지인데, 암살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우리 현대사를 전공하려 한다는 것이다..... 모든 학문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역사학이란 어느 특정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전공하는 학문이  

  아니라 하고 타일러 보낸 일이 있었다. 

                                                               - <역사가의 시간> p 92 중에서 -  

  

 

지금도 학계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역사가들의 연구뿐만 아니라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도  

잃어버린 조상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연구 활동을 한다거나  

여러 단체들을 통해 자비로 홍보를 펼치고 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굳이 남는 시간에 역사학 공부에 쏟아 붓고,
전국 곳곳에 홍보를 펼치면서까지 조상들의 명예 찾는 일에 매달려야하는지
후손들은 스스로 생각해봐야 한다.
단순히 조상의 명예를 되찾아서 역사의 숨겨진 진실을 공개하여  

올바른 역사 정립에 기여하려는지
아니면 조상 덕으로 자신의 명예를 얻어서 영달(榮達)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지
그 활동의 의도가 올바르며 명확해야 한다.
만약 후자의 의도로 조상 명예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면
훌륭한 공적이 있으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조상들을 욕보이는 짓이며
오히려 정작 받아야 할 진정한 역사적 평가를 후손들의 욕심으로 인해서  

영영 받지 못하게 된다. 
 

 

 

 젊은 세대들을 위한 역사책

이 씨에 관한 기사 옆에는 변화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전쟁 인식에 관한 기사가 소개되어 있다.
대학생들이 직접 전쟁이 벌어졌던 전쟁터나 전쟁 박물관에 찾아가서
6.25 전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확립하게 된다는 기사 내용이다.
6.25 전쟁에 관심을 가질 것을 트럭 앞에서 힘껏 역설(力說)하고 있는  

이 씨의 기사와 대조적이다.
대조적인 기사 배치 구조가 바로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백발이 성성하고 예전의 기력이 사라지고 없는 6.25 세대들은
자신들이 나라를 위해 바쳤던 일들을 자랑스러워하며
후손들에게 나라의 중요성과 애국심을 알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젊음의 힘이 왕성한 정보 통신 세대들은 관심이 없다.
내가 겪었던 일도 아니며 6.25 전쟁은 그냥 아주 오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6.25 전쟁이 몇 년에 일어나는지도 모르며
심지어 남한이 먼저 공격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북한과 전쟁이 나면 도망가는 것이 장땡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조건 남한이 이긴다고 주장한다.  
하필이면 6.25 전쟁 발발 50주년 기념식의 다음날이  

우라나라 축구 대표 팀의 8강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경기가 펼쳐지게 되어 6.25 전쟁 발발 50주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기념이 월드컵에 가려져 무색해졌다.

역사 관련 도서 판매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니 이 책이 상위권에 랭크되고 있다.
나는 이 책이 출간된 시기가 아주 좋았다고 생각된다.
6.25 전쟁 50주년을 맞추어 출간하게 되어
6.25 전쟁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해 큰 관심을 끌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아공 월드컵에 대한 관심의 열기 속에서도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그 중 6.25 전쟁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원로 역사가의 자서전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있다는 점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그만큼 예전보다 6.25 전쟁을 포함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약간의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을 사고 읽은 사람들 중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단순히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저명한 원로 역사가의 자서전으로만 읽혀지기 보다는
역사가의 생애를 통해 왜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통일이 되지 않고
분단국가로 지내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읽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갈 세대이기에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인용 기사 출처 및 링크

[전쟁 세대, 젊은 세대 6.25를 말하다] 중앙일보 6월 26일자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270607 

 

[“박정희·장지연 친일명단 빼달라”] 경향신문 2009년 11월 3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031804355&code=940100 

 

['친일사전' 속 박정희·장지연·안익태···친일행적 무엇이 담겼나]  

노컷뉴스 2009년 11월 9일 입력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309050 

 

[반민족 진상규명위 친일인사, 박정희·장지연·홍난파 '친일' 제외] 

한국일보 2009년 11월 27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11/h200911272203022195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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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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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광고

6월 23일, 16강 진출의 명운이 달렸던 한국 vs 나이지리아 전.
우리나라의 첫 원정 16강 진출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 새벽 3시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만 40만 명의 시민들이 밤샘 거리응원에 참여했다.
이에 힘입어 청와대도 시민들과 함께 응원을 하기로 공식 트위터에 알려 
청와대 직원들이 시민들과 함께 나이지리아 전에서 열띤 응원을 펼쳤다.
청와대 내에도 아닌, 그리고 청와대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대통령과 함께 하는
응원은 아니었지만, 이전에 청와대가 가졌던 엄중하고 폐쇄적인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시도였다. 
청와대의 행사는 그 이전에  먼저 몇 몇 네티즌들이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거리 응원을 제안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축구 거리 응원에 참여하는 시민 대부분이 젊은 층임을 감안하면
시민들의 제안에 청와대는 눈 감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젊은 층에 대한 정치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이번 6.2 선거가 젊은 층의 변수가 컸기에
이미지 쇄신이 필요했다. 결국 월드컵이라는 시기에 맞물려
청와대뿐만 아니라 정부가 시민들에게 보다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특별한 광고를 알린 것이다.  

  

 

 

 

 22년 전으로 회귀 

 

잠깐만, 월드컵 기간이 되고나니 뭔가 잊혀져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천안함 사건 진상 규명과 세종시 수정안 및 4대 강 사업, 그리고 나로호이다.
비록 세종시 수정안은 상임위에서 부결되었지만  

4대 강 사업에 대한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부는 월드컵 열기를 틈타 어떻게든 4대 강 사업을 강행하려는 눈치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과의 대립 긴장이 팽돌았던 몇 주과 비교하면 많이 시들해져 있다.
월드컵 개막 전에 천안함 사건은 북한이 저지른 국제 위반이라면서
UN 안보리에서 진상 규명을 각국에 설명하였지만 세계의 반응이 생각보다 미지근하다.
오히려 우리나라 내부에서는 정부의 천안함 사건 원인 발표가  

조작되었다는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반대 여론도 월드컵 열기에 가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로호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잊혀졌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충격적인 나로호의 발사 실패를 빨리 잊고 싶었던 것일까?
나로호 2차 발사 시도를 보기 위해서 나로호 우주센터에 모였던 사람들은
앞으로 열릴 월드컵 대표팀의 16강전에 집중하고 있다.
결국은 월드컵 때문에 중요한 국내 정치 여론이 묻히고 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22년 전, 제5공화국 시절의 전두환 정부 때와 유사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점점 선진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한국의 이미지를 한 단계 드높여주었다.
하지만 올림픽이라는 큰 행사 뒤에는  

독재 권력의 유지라는 어두운 속내도 있었다. 
남아공이 월드컵 유치 확정 이후에 가난한 나라의 티를 벗기 위해서
나라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빈민촌을 강제 철거하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올림픽 개최 전에 서울에 있는 노점상들을 단속하여 강제 철거를 단행하였다.
노점상을 비롯한 도시빈민들은 올림픽을 참관하는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에 올림픽 기간 중에 서울의 노점상들이 모여 정부에 반발하는 단결 집회를 열었으나,
서울 올림픽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다. 
 

모든 여론 수단을 동원하여 국민들에게
서울 올림픽이라는 자국에서 개최하는 국제적 행사를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결국 국민들은 여론이 전달하는 정보에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자신의 나라에서 개최하는 올림픽에 무조건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국제 스포츠 대회를 이용한 포퓰리즘을 보여주고 있다.

청와대의 행사는 분명 시민들과의 응원을 통해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의도이기는 하나,

22년 전처럼 월드컵으로 시끄러운 국민의 여론을 잠재우고 

국민의 인기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적 뉘앙스가 드는 것은 지울 수가 없다.   
 

국민들이 금메달을 따는 우리나라 선수들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동안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받은 힘없는 소수민들은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2년 뒤, 우리나라 대표팀의 16강 진출에 밤을 새며 기쁨의 열기를 만끽하고 있는 동안에
나로호 연구센터 관계자들은 보고 싶은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오늘도 발사 실패 원인에 대해 밤을 새며 머리를 싸매고 있으며,
어머니는 천안함 사고로 잃어버린 아들이 그리워서 

오늘도 밤을 새며 슬픔에 잠겨 있다.
  

 

 

 

 스키너의 유토피아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가 스키너가 꿈꿔왔던 세상일지도 모른다.
심리학자 스키너는 인간을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동물로 인식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은 단순한 반사 기계가 아닌 행동의 결과로  

자신의 행동까지도 바꿀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다.
즉, 인간은 보상과 처벌이라는 환경으로 인해 행동이 결정되며,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는 자동 장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키너는 자신의 실험을 세상에 적용시킨 이상(理想) 국가를 제시한다.
조건반사를 이용하여 시민들을 로봇처럼 제어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조건반사는 학습에 의해서 익히는 특정한 자극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삼겹살을 먹는다고 가정해보자.
삼겹살 고기 몇 점이 구워져가는 소리와 구우면서 생기는 고기 냄새로 인해
우리는 삼겹살이 맛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음에 삼겹살이 구워져가는 소리를 듣거나 냄새만 맡아도 우리는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대뇌피질의 자극으로 인해 우리는 맛있는 삼겹살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월드컵 조건 반사

우리나라는 이번 월드컵을 포함해서 7회 연속으로 진출했으며
연수로 따지면 24년 동안 월드컵에 얼굴을 비추었다.
우리나라 대표 팀이 세계 축구 강국들의 축제인 월드컵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국민들은 기뻐하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며
전 세계의 스타급 축구 선수들이 등장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다.
거기에다 2002년에는 4강 진출이라는 성적으로 대한민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월드컵 24년은 월드컵 참가라는 백(白)과
숨기고 싶고, 잊히고 싶은 흑(黑)이 공존하는 복잡기괴한 역사였다.
1986년 월드컵의 흑은 제5공화국 정부의 독재 정치,
1994년 월드컵의 흑은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전쟁 위기설 때문에 흔들렸던 민심,
1998년 월드컵의 흑은 IMF 외환 위기를 불러온 무능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냉랭한 민심,
2002년 월드컵의 흑은 월드컵 기간에 발생한 연평해전,
2006년 월드컵의 흑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 계획으로 인한 한반도 긴장 고조.
월드컵이 개최했던 해들을 되돌아보면 공통적으로 국내 정세는 어두웠다.

하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월드컵 때만 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듯이
국내의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거나 

전에 가지고 있었던 사회에 대한 감정과 정서들은 잊히곤 했다. 
역대 정부는 국내 정세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여론을 이용하여 월드컵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적인 정치적 무관심을 만들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의도적인 정치적 무관심은  

독재 정권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적 사회 현상의 원인을 정부 탓만 돌릴 수는 없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24년 동안 월드컵 기간의 즐거움을 학습하게 되어
월드컵 기간만 되면 무의식적으로 그 때 기억이 되살아나
온통 머릿속에는 월드컵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월드컵 이전에 관심 가졌던 것들은 머릿속에 사라지게 된다.
국민들의 뇌에는 온통 ‘월드컵’, ‘우리나라 16강 진출’ 밖에 없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월드컵이라는 조건 반사에 집단적인 반응을 하고 있는 셈이며
국민들은 월드컵이 주는 기쁨의 보상이라는 환경으로 인해
지나친 월드컵 관심이라는 행동의 결과가 드러난 것이다. 
 

 

  

 

 심리 실험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

스키너가 죽은 이후에, 심리학계에서는 그의 연구에 대한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인간을 기계처럼 동등하게 여겼으며, 인간의 자유 의지는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심리 실험이 비(非) 인간적이며 내용 자체가 잘못되더라도
스키너가 바라던 유토피아는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다. 

44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한 북한 대표 팀의 선전을 이용하여   

북한 정부도 뒤숭숭한 국내 민심을 추스르려고 하였다. 

월드컵 중계권도 없으면서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를 무단 중계하였으며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생중계까지 하여  

점점 위축되어져가는 북한 노동당과 김정일 선전 구축에 시도하였다. 

국민들의 감정을 로봇처럼 제어하려는 북한 정부가 스키너의 유토피아와 흡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스키너의 유토피아는 허구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  

그의 유토피아는 허구적인 토머스 모어와 비교하면 직접 실험에 기반을 둔 실증론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스키너의 실험이 무조건 비난만 하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다.
이 책의 실험 내용을 읽으면서 결과에 대해서
독자들은 단순히 비난과 칭찬이라는 고정된 사고로 결정하는 것보다는
먼저 이 실험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비춰보고
그 다음에 옳은지 그른지 결정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악명 높은 심리 실험들의 이야기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실험 결과들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비추어보면 

우리가 색안경으로 인해 보지 못했던 세상의 면면들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靑, 네티즌들과 월드컵 합동 응원] YTN 6월 22일 입력
http://www.ytn.co.kr/_ln/0101_20100622165242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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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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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공(=김득신)은 젊어서 노둔하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독서에 힘을 쏟아쓰니 그 뜻을 세운 자라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기를 억 번 만 번에 이르고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아! 어려서 깨달아 기억을 잘한 사람은 세상에 적지 않다.
날마다 천 마디 말을 외워 입만 열면 사람을 놀래키고,
훌륭한 말을 민첩하게 쏟아내니, 재주가 몹시 아름답다 하겠다.
하지만 스스로를 저버려 게으름을 부리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그만두어버리고, 늙어서는 세상에 들림이 없으니,
공과 견주어본다면 어떠하겠는가?

- 이서우의 <백곡집서> 중에서 김득신에 관한 글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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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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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레 이야기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 <변신> p 9 -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시작하는 첫 구절이다.
카프카는 첫 구절부터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물을 언급하는 동시에
이 인물이 벌레로 변해있음을 알려주면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벌레 그레고리에 관한 묘사는
서술자가 환상적인 사건을 지켜보고 있듯이 자세히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첫 구절의 당황함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그레고리 가족들의 소동을 보게 된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변한 모습으로 인해 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봐  

두려움에 떨게 된다.
평상시대로라면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고 있어야하지만,
그는 방에서 나올 자신감은 상실되었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도 그레고르가 나오지 않게 되자,
결국에는 그레고르가 일하는 회사의 지배인과 그에 대한 걱정을 느낀 가족들이
그의 방으로 모인다. 그레고르는 방문을 잠그고, 밖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가족들과 지배인은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잠근 문을 열쇠로 열리는 순간, 몇 시간 전에 자신을 걱정했던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보자 태도가 돌변한다. 소름 끼치는 벌레 보듯이
가족들은 그를 피하게 되며 이 집에서 쫓아내버리려고 한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 그레고르는 가족들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려 하지만,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을 위한 자기의 희생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고,
열등감, 고통에 시달리다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상처를 입은 채
자신의 방에서 쓸쓸히 죽고 만다. 그의 죽음 이후 가족들은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평온을 되찾았다고 생각하여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교외로 산책을 나간다. 
 

 

 

 방어기제의 환(環)

<변신>의 상징적 의미는 현대인의 소외 현상과 삶의 부조리이다.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과 변신한 후에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변신 전에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지만, 변신 후에는 그레고르를 구박하고 소외시킨다.
비록 소설은 짧고 우화적이지만 한 인간이 벌레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소외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레고르의 삶은 현재 우리 삶에도 그레고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작품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품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금 우리 삶이다.
물론 그레고르의 삶이 우리 현대인들의 삶과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소외는 그레고르의 경우와 다른 특수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옆집에 살던 이웃이나 친구, 그리고 한 집에 살던 가족이  

겉모습이 벌레로 변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벌레로 변하여 자신의 주관적이며 잘못된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들 스스로 상대방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서민으로 상징되는 세탁소의 딸인 금잔디가
부잣집 자식들만 모인다는 명문고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자 부잣집의 학생들은 집단적으로
금잔디를 왕따 시키며 날달걀과 밀가루를 쏟아 붓는다.
명문고 학생들은 명문고라는 사회 집단 속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자라왔다. 그런 사회 속에서 부자와 정 반대인 서민 학생이  

명문고에 들어왔다고 생각해봐라.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자신이 속한 조직에 들어옴으로써
금잔디는 자연스럽게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
그러나 금잔디가 세탁소의 딸로 태어나고 싶은 것도 아니며  

서민으로 자라고 싶은 것도 아니다.
금잔디가 명문고 왕따로 만들어버린 큰 원인은 명문고 학생들 자체에 있다. 
 

명문고 학생들 내면에 자리 잡은 ‘종족의 우상’ 이 그녀를 왕따 시킨 것이다. 
‘종족의 우상’ 은 인간 본성 속에 잠재하는 선입견이다.
서민의 이미지는 돈 없고 빈곤함이다. 부자의 이미자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금잔디=서민’ 이라는 감정으로 시작된
‘서민 ≠ 부자’ 라는 방어기제의 환(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고르의 소외도 ‘종족의 우상’ 의 희생양이다.
작품 속의 그레고르는 벌레 이전에 한 가족의 일원이었으며, 벌레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정신과 마음만은 그레고르라는 근본적인 주체성아 남아있어서
가족들에 대한 애정을 어필한다.
비록 모든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외면하였지만, 누이동생은 소설 중반부에서야
그레고르를 곤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누이동생만은 왜 다른 가족들보다 늦게 그레고르를 곤충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는가?
누이동생을 제외한 그레고리의 부모들은
벌레로 변한 아들을 보자마자 

뇌에서 벌레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바퀴벌레에 대한
불쾌감을 느끼게 되어 벌레를 기피하고 죽이려고 한다.
그레고르 부모의 심리에도 ‘벌레=무서움 & 불쾌감’
‘벌레가 된 그레고르 ≠ 자식’ 이라는 방어기제의 환이 작용하게 된 것이다.
단지, 누이동생은 방어기제의 환이 뒤늦게 작용되어 일시적이지만  

오빠 그레고르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작품 속 사과의 의미

그레고르를 죽음을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는 것이다.
사과가 몸에 박힌 채 그래도 놔두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죽게 된다.
왜 하필이면 그레고르는 사과에 맞아 죽게 되었을까?
그의 비극을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방에서 홀로 쓸쓸히 죽는 설정도 괜찮은데 말이다.

근본적으로 <변신>의 그레고르는 결국 작가 자신 프란츠 카프카이다.
그도 그레고리처럼 실제로 누이동생 3명과 어린 시절을 자라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카프카와 누이동생들과 나이 차가 많아
누이동생들과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래서 몹시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레고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소외를 느끼고 있었다.
성장하면서 문학을 좋아했으나,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을 공부하여 
좋은 직장에다가 결혼을 하는 성공적인 가장이 되기를 원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지만,
문학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글을 쓰느냐 아니면 아버지가 원하는 안정적인 삶을 사느냐.
그의 일기에는 삶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보인다. 

   조상도 없이, 결혼도 안하고, 자손도 없이.
  조상에 대한, 결혼에 대한, 자손에 대한 강렬한 욕망만을 지닌 채.
  조상, 결혼, 자손.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 1921년 1월 21일 일기 내용 중에서 - 
 


결국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문학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일기에 알 수 있듯이 카프카는 자신의 인생에 놓인 두 길 중에
어느 길에 가야할 지 꽤나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메모에는 자신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를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 즉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문학가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문학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카프카는 자신이 원하던 문학가가 되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기대감을 저버린 결과의 죄책감이 묻어난다.
카프카는 <변신>의 그레고르를 통해 죄책감에 대한 벌(罰)을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분신인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사과를 맞아 죽게 한 것이다.
비록 작품 안이지만 카프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음으로써 벌을 받게 되고,
자신의 몸에 박힌 사과는
<주홍 글자>에 등장하는 헤스터가 간통죄로 A라는 글자를 달고 살듯이
아버지를 어긴 죄의 대가를 평생동안 짊어지겠다는 자조적인 반성이다. 
 

 

 

 고독한 까마귀

‘카프카’ 의 체코 어로 직역하면 ‘까마귀’ 라는 뜻이다.
그만큼 카프카라고 하면 대표작인 <변신>뿐만 아니라
고독, 불행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그는 죽기 직전 2개월간의 요양 기간과 짧은 국외 여행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프라하에서 지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심하게 내면적이며 고독과 불행을 홀로 짊어진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카프카는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특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인해 그는 천성부터 극단적인 내면성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하여
평생 자신의 고향 프라하에서 지낸 프란츠 카프카.
그레고르가 흉측한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방문을 잠그듯이
카프카에게는 프라하라는 곳이 타인에 의한 두려움을 기피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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