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가부장 - 여성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
시드라 레비 스톤 지음, 백윤영미.이정규 옮김 / 사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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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인간의 삶을 감싸는 거대한 봉투가 ‘문화’라고 말한다. 우리가 쓰는 문화라는 말의 의미는 아주 넓다. 전통문화, 대중문화, 음식문화, 기업문화, 청소년문화 등 ‘문화’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문화를 봉투로 비유한 것은 협소하다. 문화라는 이름의 산소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문화는 우리를 숨 쉬게 하는 산소와 같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는 문화가 존재한다. 우리는 문화로 숨을 쉬면서 자라고 문화생활을 영유하는 ‘인간’이 된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존재이다.

 

우리가 호흡하고 활동하는 동안 ‘활성산소’가 생긴다. 몸속으로 흡수되는 영양분과 산소는 활성산소를 만드는 주요 원료이다. 과도한 활성산소는 세포를 공격해 유전자를 변형시키고 암을 일으킨다. 나는 우리 삶을 지배하며 차별과 억압에 일조하는 가부장제 문화를 활성산소에 빗대어 ‘활성 문화’라고 부르고 싶다. 가부장제 문화는 오랜 세월 동안 전통과 관습이란 명목으로 여성을 남성의 말에 순종하고 보호받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게 했다.

 

우리는 가부장제라는 활성 문화를 산소 마시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자란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나고 자란 우리 중 가부장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을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들에게 가부장제는 내면화되어 있다. 우리 무의식의 그림자 속에는 ‘내면 가부장’이 있다. 《내 안의 가부장》은 가부장제 문화를 지속해서 유지하게 만드는 가부장적 자아의 실체를 보여주는 책이다. 심리학자인 이 책의 저자 시드라 레비 스톤(Sidra L. Stone)우리 안에 다양한 자아들이 있다는 관점을 전제로 하면서, 내면 가부장이라는 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관점을 제공한다.

 

융 심리학에서 그림자란 우리가 외면하거나 무의식 속에 숨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그림자는 때때로 통제를 따르지 않고, 내면 밖으로 드러낸다. 저자는 내면 가부장을 ‘그림자 왕(The Shadow King)이라고 부른다. 내면 가부장은 전통과 규칙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내면 가부장은 사회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데 필요한 규칙을 만든다. 내면 가부장이 좀 권위적이어도 생각보다 좋은 일을 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전통과 규칙을 어기면 내면 가부장은 초조해지는데, 이게 심해지면 문제가 발생한다. 전통과 규칙을 어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자신을 불신하도록 만든다. 내면 가부장에 지배당한 개인은 자신이 남들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인식한다. 특히 내면 가부장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남성은 남성과 관련된 특성을 여성의 특성보다 더 우위에 둔다. 여기서부터 여성 차별과 남성 중심주의가 형성되면서 가부장제 문화가 활성화된다. 활성 문화가 된 가부장제가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할수록 그 속에서 숨 쉬면서 자란 개인은 가부장제의 가치를 내면화한다.

 

이 책은 내면 가부장뿐만 아니라 내면 가모장도 다룬다. 내면 가모장은 내면 가부장과 상반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내면 가부장이 권력과 규칙을 좋아한다면, 내면 가모장은 감정, 사랑, 양육을 중시하며 관계 지향적인 가치를 선호한다. 그러나 내면 가모장이 ‘그림자 왕’이 되면 남성 그 자체를 싫어하고, 자신의 성별(gender)이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보는 몇몇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지만, 저자는 ‘그림자 왕’이 된 내면 가모장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여성 우월주의를 넌지시 경계한다.

 

이 책을 보지도 않고, 가부장제를 빌미로 남성을 공격하는 내용이 있다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저자는 내담자(상담을 의뢰한 사람)들이 들려준 경험담을 통해 내면 가부장과 내면 가모장의 장단점이 어떤 것이 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내면 가부장과 내면 가모장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듣고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파트너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자신의 그림자(왕)를 직접 만나면서 들여다보는 일은 불편하고 낯선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실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초조함, 분노, 우울로 인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면 가부장과 내면 가모장의 존재를 거부하면 그것은 ‘내 안의 적’이 된다. 그림자 왕은 타인에게 자신의 특징을 그대로 투사함으로써 차별과 갈등을 유발한다.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를 만나고, 자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과정은 단순히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 아니다. 사회 속에서 좀 더 생생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수행해야 하는 지속적인 성찰의 과정이다. 알면 달라진다.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타인에 대한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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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리뷰를 읽으니 ‘제도로 형상화된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9-06-06 14:06   좋아요 1 | URL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제도로 형상화되면, 또 다른 사회구성원들은 사회제도(관습, 규범)에 스며든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내면화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이 있어서 문화가 생기고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 - 우리의 인생과 음악심리학 이야기
빅토리아 윌리엄슨 지음, 노승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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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음악을 듣는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나 바쁜 일상의 자투리 시간이 주어질 때, 혹은 슬프고 지칠 때나 기쁘고 신이 날 때 말이다. 우리의 일상을 꾸며주는, 음악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수난의 시기를 지내온 우리 민족은 대대로 음악을 좋아했고 노래하기를 무척 즐겼다. 노래하며 위로받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밭에 김을 매면서, 논에 모내기하면서 노동요를 불렀다. 특별한 악기가 없어도 젓가락 장단에 맞춰 구성진 가락을 뽑아내 흥을 돋을 줄 알았다.

 

노랫가락의 흥을 즐기던 우리의 일상문화를 반영하듯 노래방에 자주 가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의 노래방은 친구들을 만날 때나 직장 회식 이후에 ‘제2차’로 가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즐기며 ‘우리’라는 공동체를 다시금 확인하기도 한다. 요즘같이 혼자 노는 게 익숙해진 시대에 혼자서 노래방을 즐길 수 있는 ‘코인 노래방’도 있다. 이렇듯 노래방은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곳이 아니라 노래를 잘 부르든 못 부르든 상관없이 노래를 부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놀이 공간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쓴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문명은 놀이 속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문화의 본질을 놀이에서 찾아낸 그는 삶의 의미와 행복 역시 놀이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했다. 호모 루덴스는 달리 말하면 ‘예술을 즐기는 인간’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음악 속에서 자라왔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음악이라는 ‘놀이’를 마음껏 누리면서 자라온 호모 루덴스에 관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이 책은 음악과 우리 삶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예리하게 고찰한 음악심리학 책이다.

 

저자는 태아기, 유아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애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음악의 힘을 알려준다. 그래서 이 책에 음악의 영향력을 증명해주는 최신 연구 결과들이 나온다. 평소에 음악을 즐기는 저자는 이 책에서 음악의 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표한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음악이 그처럼 우리 일상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고자 나는 내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중략] 내게 필요한 것은 음악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무척이나 알고 싶어하는 친구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이었다.

 

(프롤로그, 6~7쪽)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는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이들도, 음악을 어떻게 무엇부터 들어야 할지 막막하던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는 책이다. 독자는 우리가 살면서 음악을 꼭 들어야 하는 당연한 이유를 이 책에서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인간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음악을 만난다. 태아는 자궁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세상의 소리를 접하는데, 이때가 바로 인간이 처음으로 음악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궁 속으로 전달되는 다양한 소리에 자주 노출된 아기는 박자와 음높이를 감지하고 구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청소년기는 음악과 정체성이 서로 일치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질풍노도’를 겪는 청소년들은 기분 좋게 만드는 노래를 찾게 되고, 이 시기에 접했던 노래를 ‘최애 노래(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른이 돼서도 청소년기에 즐겨 듣던 노래를 잊지 못한다. ‘최애 노래’는 지나간 시간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소환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가수의 음악을 한 번 듣고 나면 그 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참 속상하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이르다. 좌절할 필요 없다. 우리는 음악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요즘은 가사 몇 마디만 검색창에 입력하면 그 가사가 나오는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생소한 멜로디의 음악이라도 자주 들으면 멜로디 일부가 고막에 콕 박혀 귓가에 맴돈다(이게 오래 지속되면 귀벌레 현상이 생긴다). 저자는 음악에 노출되는 과정을 ‘집짓기’에 비유한다.

 

 

 음악을 제대로 기억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출이 필요하지만, 일단 기억하기만 하면 잘 지어진 집처럼 튼튼하고 오래 지속된다. 실제로 집을 짓는 것과 달리 청취자한테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다. 마음이 원해서 하는 일이고, 당신은 그저 듣기만 하면 된다.

 

(7장 기억 속의 음악, 241쪽)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호모 루덴스’ 정신의 복원이다. 삶의 놀이인 음악은 가수, 작곡가, 연주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로서의 음악은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기에 직업과 연관 지을 일이 아니다. ‘영원한 가객’ 김광석은 “가수란 자기가 부른 노래대로 인생이 풀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대로라면 가수가 아니어도 노래를 즐기는 우리도 노래대로 인생이 풀리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음악이 관통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흐르는 음악은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서평을 다 쓰고 나니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고 노래하던 김광석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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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3 17:09   좋아요 0 | URL
세상 정말 좋아졌어요. 절판된 앨범에 들어있는 곡을 들으려면 그 앨범을 직접 구해야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
 

 

 

 

인간은 보면서 사유한다. 하지만 인간은 부분을 전체인 것으로 단정 지으면서 세상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eye)은 ‘열린 창’이 아니라 ‘구멍’이다. 어떠한 대상에 대한 인식이 근시안적 눈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의 눈, 식민지를 배척하는 제국주의의 시선, ‘다름’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정상성의 기준 등 ‘눈의 우월성(superiority)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 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한길사, 2004)

 

 

 

임철규 교수가 쓴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는 세계를 우뚝 세우고, 장악하고, 짓밟은 ‘서구인의 눈’을 검토한 책이다. 저자가 ‘서구인의 눈’에 주목한 것은 서양 문화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보는 것’은 ‘아는 것’이다. 눈으로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그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앎의 과정을 통해 발전된 서구의 이성은 시각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문명이 건설되면서 진보에 대한 믿음이 퍼지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이자 ‘눈의 시대’였다.

 

 

 

 

 

 

 

 

 

 

 

 

 

 

 

 

 

 

 

* 제러미 벤담 《파놉티콘》 (책세상, 2007)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생각한 원형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은 눈의 우월성으로 발전된 ‘이성의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파놉티콘은 한 곳에서 공간 내부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죄수 교화 시설이다. 원형감옥 중간에 감시자가 있는 공간이 있고, 그 바깥쪽 둘레에 죄수의 방을 둔다. 죄수의 방은 밝게, 중앙의 감시 공간은 어둡게 유지한다.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시선 때문에 규율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게 벤담의 생각이었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16)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감시와 처벌》(나남출판)에서 파놉티콘 개념을 이용해 근대체제를 ‘한 권력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만인을 감시하는 체계’라고 설명했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당시 영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실제로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파놉티콘이 설계도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푸코에 따르면 파놉티콘은 감금과 교정은 물론 훈련 · 노동 · 교육 · 치료 등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본 장치로 폭넓게 활용되었고, 이와 유사한 내부 구조를 갖춘 감옥 · 군대 · 공장 · 학교 등 전문기관들이 근대 이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푸코는 만인을 감시하는 눈의 우월성을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이라 명명했다. 푸코의 파놉티콘 안에 갇힌 개인은 언제나 감시당하고 불안과 공포를 겪게 되며, 결국 자신 스스로 감시하게 하는 권력의 효과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규율 권력이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는 것은 권력에 복종하는 개인을 생산하는 것이다.

 

다시 임철규 교수의 책으로 돌아가 보자. 이 책에서 말하는 ‘눈의 역사’와 ‘눈의 미학’은 서구 문화에 속하기 때문에 책은 당연히 ‘서구인의 눈’이 가진 우월성 분석에 초점에 맞춰져 있다. 임철규 교수는 ‘이미지의 문화’로 설명되는 서구 문화와 달리 동양 문화,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는 눈의 문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불교는 눈이 일으키는 ‘작란(作亂, 장난)’을 경계했다. 작란은 앞서 언급한 ‘좁은 구멍으로 보는 것’, 즉 대상의 부분만을 보고 그것을 전체라고 규정하는 반응을 뜻한다. 

 

 

 

 

 

 

 

 

 

 

 

 

 

 

 

 

 

 

 

 

 

 

 

 

 

 

 

 

 

 

 

 

 

 

* 스기우라 고헤이 《형태의 탄생》 (안그라픽스, 2019)

*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 편》 (김영사, 2010)

* 위앤커 《중국신화전설 1》 (민음사, 1998)

*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1994)

 

 

 

그러나 이 사례만 가지고 동양 문화는 눈의 문화가 아니라고 보기 어렵다. 동양 도상에서 묘사되는 좌우 두 개의 안구, 빛나는 눈은 ‘생명’이 있는 ‘형태’의 힘을 나타내는 신체 기관이다(스기우라 고헤이, 37쪽). 그리고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 창조 신화에도 태양과 달 이미지를 두 개의 눈과 연결하는 상징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반고(盤古)는 천지를 창조한 거인 신이다. 반고의 모습을 묘사한 중국 고대 그림에 보면 그의 왼쪽 눈에 태양, 오른쪽 눈에 달이 그려져 있다. 이렇듯 태양과 달이 새겨진 창조신의 두 눈을 ‘일월안(日月眼)이라고 한다. 일월안은 일본 신화와 인도 신화에도 나오는데, 외부세계(우주)의 빛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하는 영적인 힘이 넘치는 기관으로 묘사된다. 서양에도 일월안을 묘사한 도상이 전해지는데, 재미있게도 동양과는 반대다. 왼쪽 눈이 달이고, 오른쪽 눈이 태양이다. 그리고 왼쪽 눈은 ‘밤의 눈’, 즉 과거를 상징하며 오른쪽 눈은 ‘낮의 눈’, 미래를 상징한다(진 쿠퍼, 124쪽).

 

임철규 교수는 눈물을 흘리는 예수의 눈의 긍정적 속성(‘선한 눈’)이 눈의 우월성과 폭력성이 일으키는 파국의 위기를 유보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한다. 비관적인 전망이지만, 나는 ‘나쁜 눈’의 힘이 작동하는 세계를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쁜 눈 못지않게 경계해야 할 것이 가짜 눈물인 ‘나쁜 눈물’이다. 위선적인 사람이 흘리는 ‘악어의 눈물’은 진짜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가짜 뉴스가 무수히 나오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는 누구나 악어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탈눈물(post-tears)’의 시대이기도 하다. 가짜 눈물은 진실을 씻겨 내린다. ‘눈물을 흘리는 눈’이 ‘선한 눈’인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암울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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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5-08 17:01   좋아요 0 | URL
지금 나오는 CCTV에 인공지능을 더하면 정말 인간의 시력보다 더 뛰어난 기계 눈이 만들어질 거예요. 그러면 찍히면 빼도 박도 못할 것입니다. 기계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없어질 수 있겠어요.
 
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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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머릿속엔 죽을 때까지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있는 개 두 마리가 있다. 개의 이름은 편견직감이다. 두 마리 개는 주인의 이성적 사고력을 핥고 또 핥는다. 두 마리 개의 애정공세(?)에 헤어 나오지 못한 주인은 현상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인지심리학 용어로 인지 도식(recognition schema)이라는 것이 있다. 인지 도식이란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되고 견고해진 개인의 신념체계다. 인지 도식은 어떤 대상이나 관념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인지 도식에 따라 즉각적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신처럼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편견과 직감에 의지해서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해석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의 좁은 경험 세계의 한계가 너무 분명하므로 우리는 정확한 정보보다는 부정확한 남들의 말에 더 솔깃해진다. 문제는 내가 막연하게 믿고 있는 생각과 왠지 정확할 것 같은 남들의 말이 그렇게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팩트풀니스는 내가 그렇게 믿고 있었던 나의 경험과 확신, 그리고 우리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잘못된 정보를 어떻게 피해야 할지 지침을 주는 책이다. 책의 제목 팩트풀니스(Factfulness)는 우리말로 옮기면 사실충실성이다. 말 그대로 사실에 충실한 입장을 유지하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습관이다.

 

고정 관념은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점에서도 장점이 있다. 수많은 정보와 변화 속에 노출되어 판단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일정하고 고정된 틀에 의존할 수 있다면 안정된 삶을 사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고정 관념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뒤죽박죽일 것이다. 그러나 고정 관념의 이 같은 긍정적인 효과도 적정수준이어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고정 관념은 편견의 또 다른 말이 되어 우리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 고정 관념에 지나치게 매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해석하고, 언어로 말하면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무언가 불확실하고 무질서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좀 더 단순하고 일관된 생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전쟁, 자연재해, 테러, 범죄, 빈곤 등 인간에게 고통을 가중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이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다. 팩트풀니스의 저자인 스웨덴의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Hans Rosling)은 모든 대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고정 관념을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이 불안해하고 혼자서 속을 태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사람들은 왜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쉽게 믿고, 부조리한 편견과 직감에 의존하는 걸까. 사람들은 복잡한 정보를 찾아 나서지 않아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순한 정보를 선호한다. 사람들이 단순한 정보에 익숙해지고 나면, 나중에 그 정보가 옳지 않거나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도 쉽게 예전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익숙함과의 결별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저자는 잘못된 고정 관념과 믿음은 세상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이 만든 무지와 싸운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기관 갭마인더 재단(Gapminder Foundation)을 세웠다. 저자의 신념은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 즉 사실충실성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2017년에 사망할 때까지 명확한 데이터와 통계로 가지고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전 세계를 돌면서 강연을 했다.

 

팩트풀니스의 부제는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이다. 저자는 인간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이유를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편견이라고 말하고 있다. 편견은 지식이 빈곤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생기는 본능(instinct)이다. 저자는 세상이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다면서 10가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서 좀 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부정적인 고정 관념으로 채워진 세계관은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스스로 고통이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을 나열한 목록에 편견이라는 항목을 추가해야 한다.

 

세상이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려면 고정 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가듯이 내가 믿고 있는 지식도 함께 늙어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젊고 신선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처음에는 누구나 젊은 지식을 접하는 과정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새로운 정보와의 거리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겸손과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새로운 정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호기심이 생긴다고 말한다. 겸손과 호기심은 우리의 한계와 사고의 맹점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정신에 해로운 세계관이 불러일으키는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몰아내기도 한다. 세상은 천천히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데 부정적인 과거에만 얽매여 있다면 ‘긍정적인 미래’를 꿈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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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발명 - 사후 세계, 영생, 유토피아에 대한 과학적 접근
마이클 셔머 지음, 김성훈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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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말 못 하는 친구이자 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걸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말한다. 반려동물과의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한다. 사별하면 가장 안타까운 이는 반려동물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가족들이다. 그들은 궁금해한다. 떠나간 우리 아이 영혼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무지개다리는 천국(하늘나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다. ‘무지개다리는 사랑하는 동물과의 이별로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 단어이다. 누가 그랬던가. 자기를 보살핀 가족이 죽은 뒤 천국에 도착하면, 앞서간 반려동물이 반갑게 맞아준다고. 인간과 마찬가지로 반려동물 역시 죽은 후에도 그것으로 마지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되어 천국에서 가족들을 기다리며, 살아생전 함께한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무지개다리와 천국을 상상하는 건 기분 좋아지는 일이다. 영원히 살고, 항상 기쁘기만 하고 즐거움만 가득한 곳. 말 그대로 꿈의 이상향이다. 그런데 영원히 사는 것과 항상 기쁜 것이 당연한 세상에 살면 행복하다고 느낄까? 천국은 낙원의 동의어일까? 분명 천국은 좋은 곳이기는 하나 지루하고 단조로울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가면 신을 믿으면 천국, 믿지 않으면 지옥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전도하는 신도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다. 전도사들의 논리대로 라면 나는 지옥행 열차표를 이미 예매한 사람이 된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돌연 신의 부름을 받아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면 지옥행 열차표를 취소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내세관도 믿지 않는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천국이자 지옥이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곧 천국일 수 있고, 지옥일 수 있다. 좋은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니 그것이 천국이요, 반대로 나쁜 일을 하면 불안하고 괴로우니 그것이 지옥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Sartre)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했다. 인간들끼리 서로 자아가 부딪혀 지옥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정의가 무조건 옳은 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반대가 될 수도 있다. 타인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주체가 지옥일 수 있다. 타인과 더불어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에게 타인은 천국이다. 신을 믿든 신을 믿지 않든 간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다양하다.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천국의 발명의 원제는 지상의 천국들(Heavens on Earth)이다. 번역본 제목을 지상의 천국들이라고 정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사람은 천국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천국을 복수형으로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천국의 발명을 읽는다면 천국을 단수형으로 쓸 수 없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천국에 대한 믿음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발명은 이 다양한 믿음의 기원을 추적한 책이다. 회의주의자(Skeptics)인 저자는 천국이라는 심오한 주제에 끈질기게 질문을 던진다. 천국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곳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저자는 죽음 너머 세계가 어딘지 이해하기에 앞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감정을 분석한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아직 겪어보지 못한 죽음과 사후 세계를 상상한다. 사람들이 생명 연장의 꿈을 꾸거나 천국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과 사후 세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떨쳐내기 위해 천국을 발명했다. 천국은 삶이 고달플수록 더욱더 생각나게 되는 달콤한 유토피아(utopia)가 됐다. 중세 가톨릭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면죄부를 판매하여 신도들을 유혹했다. 유럽의 탐험가들은 지상 어딘가에 있을 천국, 즉 신대륙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건 항해에 나섰다. 천국에 대한 인류의 강렬한 믿음은 자신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하는 사이비종교와 유사 과학(대표적인 예로 임사 체험이 있다)을 만들어냈다.

 

죽지 않고 계속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후자는 죽음 너머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서도 생이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천국을 발명하려는 인간의 심리는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겪게 되는 역설이다. 역설이 주는 죽음의 의미,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교훈을 곱씹으면서 인류는 무언가를 창작하는 데 힘쓴다. 죽기 전에 불후의 걸작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서 인류가 창작 활동에 매달린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창작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충실하게 보내는 것. 이게 바로 저자가 생각하는 지상의 천국들이다. 천국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다.

 

유사 종교가 주장하는 지옥행 열차표는 없다. 그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장 찢어버려야 한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지옥행 열차표를 손에 쥔 채 아등바등 살아가는 건 괴로운 일이다. 천국행 열차표도 없다. 천국행 열차표를 받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면서 신을 믿는 신앙생활은 종교에 귀의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면서 천국행 열차표를 사라고 재촉하는 유사 종교는 신을 모욕하는 사이비다. 신과 천국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를 ()종교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무신론자와 회의주의자는 종교에 적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무신론자는 ()종교인이다. 회의주의자는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나 대상을 의심하는 사람이다. 비 종교인 중에서도 천국이나 무지개다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타인이 생각하는 천국을 믿지 않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타인이 믿는 천국을 틀렸다라고 강하게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우리 중에 천국이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천국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전제 없이 타인이 믿는 천국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천국은 아주 많다. 다만 우리는 그게 진짜로 있는지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천국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지옥이다.

 

셔머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mystery)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미스터리를 즐기자라고 말한다. 천국은 미스터리한 세계이다. 내가 믿고 있는 천국도, 당신이 믿는 천국도. 열심히 그리고 즐기면서 살다가 때가 되면 편안하게 떠나자. 지구라는 천국에 소풍 와서 즐겁게 지내다가 돌아간다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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