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크래프트 :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
미셸 우엘벡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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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집 악의 꽃의 첫머리에 있는 독자에게는 시집의 서문에 해당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제일 흉하고 악랄하고 추잡한 놈이 있다면서 독자에게 경고한다. 그놈은 소리 없이 돌아다닌다. 하지만 그놈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는데 지구를 박살내고, 한 번의 하품으로 지구의 모든 인류를 집어삼킬 수 있다. 시인은 시의 마지막 연에 그놈의 정체를 밝힌다. 그것은 권태라는 괴물이다. 시인은 권태가 다루기 힘든 괴물이라면서 이것이 인류에게 주는 고통을 아는 소수의 독자를 위선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시인의 동지와 같은 존재. 악의 꽃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글에서 권태를 자주 언급했는데, 그가 내린 권태의 정의는 다양하다. 그는 현대인의 악과 천박함을 말하기 위해 권태라는 소재를 즐겨 썼다. 보들레르에게 권태란 덧없고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 품고 있는 불만감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유일한 시집을 공개하면서 부조리한 세상에 맞섰고, 천박한 대중을 향해 도발했다. 그러나 시인은 위선적인 독자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이러한 시인의 진심은 미국의 소설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염세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글쓰기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러브크래프트는 철저하게 대중과의 거리를 둔 채 글을 썼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소설은 작가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준다. 러브크래프트의 글쓰기는 단순히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세상에 알려서 인정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자신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맞서는 개인적인 분풀이다러브크래프트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으나 사후에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와 함께 미국 공포문학의 대가로 평가받았다.[주1] 


러브크래프트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독자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은 러브크래프트를 극단주의자라고 평가한다러브크래프트는 이 세상과 모든 존재는 악하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죽을 때까지 이 관점을 고수했다그는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인류를 경멸했다. 어쩌면 러브크래프트가 생각한 괴물은 이 세상 자체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괴물에 분풀이하기 위해 또 하나의 괴물을 창조한다. 그것이 바로 크툴루(Cthulhu)’를 비롯한 외계의 존재들이다. 러브크래프트의 괴물들은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게 하고, 그들을 눈앞에서 본 인간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괴물과의 조우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정신을 습격하는 악몽이 된다. 악몽에 점령당한 인간에게 희망은 없다. ‘nevermore(이젠 끝이야).’[주2]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이 앵글로색슨 혈통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혈통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세상을 향한 증오는 결합되어 극단적인 인종차별적인 사고를 잉태한다. 혼혈인과 이민자들에 대한 그의 경멸은 소설 속에 반영되어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는 이 사실을 놓치기 쉽다. 우엘벡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나타난 문제점을 언급하고 비판한다.


러브크래프트는 특이한 사람이다인류를 경멸하고,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던 그가 유독 좋아했던 일이 편지 쓰기다. 젊은 작가들은 편지를 통해 러브크래프트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초고 교정을 부탁했다. 편지를 받은 러브크래프트는 초고를 진지하게 봐주었으며 답장을 꼭 써서 보내줬다.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작가들은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작가의 역량을 주목한 몇 안 되는 러브크래프트의 동지들이다. 러브크래프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작가들을 가리켜 러브크래프트 서클(Lovecraft circle)’이라 한다러브크래프트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친절하고 상냥한 신사로 기억했다.


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러브크래프트 평전이라기보다는 작품 분석에 초점을 맞춘 문학 비평서에 가깝다.[주3] 그러므로 이 책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아직 안 읽은 독자에게 권할 수 없다. 러브크래프트 입문자를 위한 책이 절대로 아니다우엘벡이 러브크래프트의 대표작러브크래프트의 골수팬(Lovecraftian)들은 작가의 뛰어난 작품 일곱 편을 그랑 텍스트(grands textes, 뛰어난 걸작)’라고 부른다의 결말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는 러브크래프트라는 불가사의한 작가와 그랑 텍스트에 대한 주석서다러브크래프트의 추종자라 자부하는 독자는 우엘벡의 견해에 반박하는 주석을 쓸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을 쓴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킹(Stephen King)은 우엘벡의 핵심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도전적인 독서를 지향하는 러브크래프트 추종자라면 이 책을 단순히 작가를 향한 팬심을 유발하는 책정도로 봐서는 안 된다그들에게 제안한다소설과 신화로 남은 러브크래프트에 맞서라.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1] 포는 러브크래프트와 보들레르, 이 두 사람과의 인연이 깊은 작가다. 러브크래프트가 좋아하는 작가는 포였고, 그의 영향을 받아 소설을 썼다. 포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 본 보들레르는 포의 단편소설을 불어로 번역했다. 



[2] 포의 시 까마귀(The Raven)에 반복되어 나오는 말이다.



[주3] 히가시 마사오(東雅雄)크툴루 신화 대사전(AK커뮤니케이션, 2019)에 수록된 다른 차원의 인간-러브크래프트의 생애와 문학은 러브크래프트의 삶을 좀 더 상세하게 소개된 글이다이 글 속에 러브크래프트가 직접 쓴 개인 프로필이 있다.



* 37

 

 출간 기념 사인회를 열면 젊은 친구들이 책에 사인을 받으러 찾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롤플레잉 게임[3]이나 시디롬을 통해 러브크래프트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주3] 롤플레잉 게임(RPG: Role-Playing Game)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비디오, 컴퓨터, 모바일 게임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롤플레잉 게임은 원래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 Table-talk Role Playing Game)를 뜻하는 용어다TRPG는 여러 사람이 탁상에 모여 앉아 각자가 맡은 캐릭터 역할을 연기하는 게임이다우엘벡이 언급한 롤플레잉 게임TRPG일 것이다크툴루 신화를 소재로 만든 호러 TRPG1981년에 출시된 <크툴루의 부름>(Call of Cthulhu)이다. 이 게임은 현재까지 7판이 출시되었고, 국내 TRPG 전문 출판사 초여명이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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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 어떤 변화를 겪어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세창클래식 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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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   ★★★☆   B+






니체(Nietzsche)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약칭 차라투스트라’, Also sprach Zarathustra, 1885). 그다음은 니체가 남긴 말로 알려진 신은 죽었다가 있다. 이 말이 처음 나온 니체의 책은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이다. 니체의 철학을 알고 싶은(공부해보고 싶은) 독자들은 차라투스트라부터 읽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인지도가 높은 니체의 책인데다 니체가 독보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본인 스스로 그 책을 극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차라투스트라를 가장 먼저 읽는 것은 오히려 니체를 이해하는 데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니체에 입문하는 독자들에게 차라투스트라를 먼저 읽으라고 절대로 권하지 않는다.

 

니체는 아포리즘(aphorism), 잠언 형식의 문장으로 글을 썼다. 그는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메모를 남겼는데 어떻게 보면 니체의 글은 불친절하다. 아포리즘을 선호한 니체의 글쓰기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무턱대고 그의 글을 읽다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중도에 포기한다. 이 중에 어떻게든 끝까지 다 읽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짧은 글 속에 압축된 니체의 철학적 사유를 머리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문장을 눈으로 완독한 것에 만족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니체를 본격적으로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니체의 저서는 무엇일까. 니체 연구자들마다 니체를 막 이해하려는 독자에게 추천한 책이 다른데, 그중에 포함된 한 권이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이 책이 집필된 시기는 1888년이다. 이듬해 니체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190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을 쓰지 못했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의 대미를 장식할 두 개의 장에 각각 전쟁 선언망치가 말하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두 개의 장을 쓰지 못한 채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완성하지 못한 이 사람을 보라는 그의 마지막 책이 되고 말았다.

 

이 사람을 보라신약성서의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라틴어 구절 에케 호모(Ecce Homo)’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로마의 총독 빌라도(Pilatus)는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한 예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왕을 상징하는 자줏빛 옷을 입히도록 했다. 이때 빌라도는 초라한 몰골을 한 예수를 군중에게 보여주면서 에케 호모라고 말했다. 법정에 모인 유대인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조롱했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쳤다.

 

책 제목의 이 사람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걸까. 예수, ? 아니다. ‘이 사람은 니체 본인이다. 이 사람을 보라의 부제는 어떤 변화를 겪어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Wie man wird, was man ist)’. 니체는 이 책 한 권에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썼으며 자신이 쓴 책들의 주요 내용과 집필 의도를 밝혔다. 이 사람을 보라는 한마디로 말하면 문헌학자에서 철학자로 다시 태어난 니체의 이력서이다. 니체의 말년에 나온 마지막 책이지만, 니체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려면 이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

 

물론 이 사람을 보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의미를 단번에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문장은 니체의 생각에 쉬이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잘못 읽으면 니체를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를 비중 있게 다룬다.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 즉 바그너를 열렬히 찬양했던 니체가 바그너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된 배경을 모르면 바그너가 니체의 철학에 끼친 영향을 지나칠 수 있다. 혹자는 니체가 정신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이 사람을 보라를 썼기 때문에 니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유용하지 않는 책이라고 말한다. 책 곳곳에 있는 난해한 문장과 과대망상에 가까운 잠언은 니체의 정신 분열 증상의 징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혼돈 속의 질서라는 말이 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글을 꼼꼼하게 읽으면 니체가 살아오면서 축적해온 사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니체는 이성과 도덕, 그리고 기독교 교리를 진정한 삶을 사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우상 또는 허상으로 본다. 이성은 위험하고도 삶을 매장하는 폭력적인 힘(이 사람을 보라, 143)’이다. 이성은 자유를 억압한다. 도덕은 우리의 삶을 구속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우리 인생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다. 기독교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니체는 죄를 씻어내기 위해 거듭 반성하고, 신에게 매일 기도하는 기독교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부한다. 그런 삶은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며 고통을 주는 운명에 대처하지 못한다. 이러면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될 거대한 허무의 벽을 넘지 못한다. 니체는 허무에 맞서는 허무를 내세운다. 그는 낯설고 가혹한 운명에 직면할 때 극단적인 용기로 충만한 긍정(이 사람을 보라, 145)’의 힘을 가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삶에의 의지이며 그가 지향한 디오니소스적 삶


디오니소스(Dionysos)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이다. 우리는 그가 매일 입에 술을 달고 사는 신이며 질서정연한(올바른) ‘이성과 대조되는 무질서한(올바르지 않은) ‘광기를 상징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를 바라보는 니체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의 서문에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라고 밝힌다(13). 디오니소스는 여러 개의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폴리고노스(Polygonos)’. ‘폴리고노스거듭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니체는 우리 삶에 여러 번 오게 될 고비들을 넘어서려면 망치를 들어 깨부수고(우상의 황혼), ‘쟁기로 갈아엎어야 한다고 말한다(반시대적 고찰). 한계를 깨부술 수 있는 자는 거듭 태어난다. 다시 태어나면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강조하는 긍정의 철학이다.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에 입문하는 독자에게 적합한 책이다. 역자의 상세한 주석은 니체 철학에 도전하다가 어려워서 중도에 포기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필요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하지만 독자가 모를 수 있는 인명(니체의 지인이나 니체가 언급한 프랑스 작가들)을 소개한 주석이 없어서 아쉽다.

 

오자도 보인다. 36쪽에 에케 호로에케 호모의 오자. 119쪽 본문의 케사레 보르자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로 써야 한다. 119쪽의 94번 주석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영웅 숭배론을 설명한 내용이다. 영웅 숭배론에 언급된 인물 중에 존스가 있는데, 이는 오자다. 존슨이 맞다. ‘존슨은 영국의 문필가 겸 학자인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이다. 230쪽의 카글리오스트로칼리오스트로(Cagliostro)’라고 써야 한다. 칼리오스트로는 18세기에 칼리오스트로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연금술사다.

 





[] 아리아드네(Ariadne)는 크레타(Crete)의 공주다. 그녀는 크레타의 미궁으로 들어가는 테세우스(Theseus)를 위해 실타래를 건네준다. 테세우스는 그녀가 준 실타래 덕분에 미궁에 사는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를 죽이고, 미궁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낙소스(Naxos) 섬에 잠든 아리아드네를 놔둔 채 떠나고, 그녀는 디오니소스의 아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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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14 22: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유명해서 유명한 니체~! 저 한번 도전해보겠다고 <짜라투스트라> 구매했는데 Cyrus님 글을 보니 약간 무섭네요 ㄷㄷ 이 리뷰만 봐도 완전 어려울거 같아요ㅜㅜ 주말에 시간내서 한번 도전해 봐야겠어요🤔

cyrus 2021-07-15 22:26   좋아요 0 | URL
니체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한 연구자의 번역본이나 입문서를 읽으면 니체를 이해하는 데 수월합니다. 역자의 상세한 설명이 없는 니체의 저서는 피하는 게 좋습니다. ^^

페넬로페 2021-07-14 2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차라투스트라는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 책을 먼저 보는건 무리인듯 해요. 저는 cyrus님께서 적어주신 <디오니소스~~긍정의 철학이다>의 구절들이 좋아서 니체를 읽고 싶어요.
‘이 사람을 보라‘ 책부터 먼저 읽는게 좋겠네요^^cyrus님, 더운데 건강하게 잘 자내시나요? 오랜만에 뵈어 반갑습니다.
cyrus님의 리뷰는 언제나 감탄입니다**

cyrus 2021-07-15 22:32   좋아요 1 | URL
지난달부터 니체의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공장에 일하면서 독서량이 줄어들었고, 글 한 편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일상이 계속되니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독서와 글쓰기 없이 한 주 훌쩍 지나가버리니까 허무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다보니 삶의 의욕까지 떨어지게 되더라고요. 그러는 와중에 니체의 책을 읽었는데 처음으로 철학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어요. 허무에 맞서는 니체의 철학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

붕붕툐툐 2021-07-15 0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또 반가워요!!ㅎㅎ 니체 입문서로 괜찮은 거 같은데 3.5점이라 망설여지네요~ㅋㅋㅋㅋ 저 짜라투스트라 무려 1/3 읽음요!ㅋㅋㅋㅋㅋㅋ

cyrus 2021-07-15 22:33   좋아요 0 | URL
제가 부여한 책의 평점은 무시하도 됩니다... ㅎㅎㅎ 그리고 3.5점은 무난한 편입니다. ^^

2021-07-15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19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16 0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철학의 위로 - 불확실한 삶을 위한 단단한 철학 수업
윤재은 지음 / 현대지성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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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점  ★★  C






인간의 내면에는 반성이라는 무기가 있다. 


(윤재은, 철학의 위로》 중에서, 82쪽)




철학을 공부하려면 반성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철학자가 참된 진리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지적 허영에 불과하다. 내가 생각하는 철학자란 완벽한 지식을 가진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내 존재 이유는 물론, 내 주변에 있는 타인의 번민까지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er)’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자에 가깝다물론 인간을 사랑하는 자는 지혜를 외면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당연히 철학이다. 하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자는 철학을 외우는 학문이 아닌 사유의 도구로 본다철학을 외우려고 하면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철학의 위로는 이 책을 쓴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책이 아니다. 철학의 위로에 소개된 철학은 삶의 문제와 연계할 수 있는 사유의 도구이다. 이 책의 저자는 고대 철학부터 시작해서 현대 철학까지 두루 살펴보면서 삶의 본질들을 찾는다. 저자가 말하는 삶의 본질이란 지식으로 정의 내려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통해 답을 구하는 것(11)’이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의 답을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서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을 지식이 아닌 지혜로 이해하려면 자신이 살아가야 할 방향성을 잃지 않아야(12)’ 한다


지혜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종종 범하는 실수는 자신의 개별적 경험을 소중한 지혜로 여기면서 절대적인 지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주관적 가치판단이 개입하는 개인적 경험은 대체로 상대적이고 임의적이다. 경험적 지식은 특정한 목적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도그마(dogma)가 된다. 도그마가 된 철학을 추구하는 자는 성찰 자체를 아예 모르거나 외면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액면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하다우리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철학이다. 결국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사랑이란 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찰을 의미한다. 독자는 철학적 성찰을 통해 위로를 구할 수 있다.


저자는 공간철학자이자 건축가다. 나는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반성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철학자라고 믿고 싶다. 내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저자는 책 속의 오류와 오자들을 확인해서 고쳐야 한다.



* 30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은 원숭이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또 다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이제 인간은 먹고 마시며 삶을 마감하는 동물적 삶에서 벗어나 나를 있게 한 근원을 찾는다. 세계의 존재자로서 존재의 근원을 묻는 것은 이성적 인간의 정신에서 나온다.



 

인간은 원숭이의 꼬리표를 떼어내고라는 표현에 진화론을 피상적으로 이해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지금도 원숭이가 인류의 조상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과학을 신뢰하며 진화론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마저도 원숭이가 인간으로 변했다(진화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복잡한 진화론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원숭이의 조상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진화론의 의미를 왜곡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 허술한 설명은 진화론을 공격하려는 창조론자들의 먹잇감이 되기도 한다. 원숭이는 현생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친척이다. 인간과 원숭이는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독립적으로 진화했다






* 49

 

 아낙사고라스에 의하면, 무한한 우주는 누스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누스를 파악하고,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다. 고대 철학자 플라티노스(Plotinus)도 누스를 만물의 일자로부터 유출된 기능으로 보았으며, 스토아학파에서는 누스를 창조적 로고스와 동일시했다.

 


플라티노스플로티노스의 오자. 해당 책 112쪽과 139쪽에 플로티노스라고 되어 있다.






* 125

 

 이데아(Ιδέα)는 이성의 작용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개념으로 플라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의 이데아론은 현상세계 밖의 세계로서 모든 사물의 원인이며 본질이다. 이데아는 인간의 경험을 배제한다. 이데아 혹은 에크도스(Ecdos)로 사용되어지는 이데아의 관념은 이성의 작용을 통해 얻는 본질적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단어는 에크도스(Ecdos)’가 아니라 에이도스(eidos). 그러나 에이도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주로 사용되는 개념이므로 플라톤이 생각한 이데아의 의미와 차이가 있다. 이데아가 현실적인 사물의 (관념적인) 원형이라면, 에이도스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은 질료(재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이데아를 설명하면서 언급한 에크도스는 영어, 그리스어, 라틴어 사전에 없는 단어다. 나는 이 용어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철학을 공부하는 지인에게 직접 물어봤다. 그분도 철학의 위로를 읽었으며 에크도스가 아니라 에이도스가 맞는 용어라고 말했다. 에크도스는 틀린 단어다. 저자는 글을 쓰면서 위키백과 관념항목을 참고해서 쓴 것으로 보인다. 이 항목에도 이데아가 에크도스(Ecdos)에서 나온 말이라는 잘못된 내용이 있다.




* 141~142

 

 

 당시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의 천동설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여겼다. 그들은 지구 중심의 세계관을 완전한 자연계의 현상이며, 진리라고 믿었다. 당시 사람들은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회전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회전한다는 생각은 중세 1,000년의 신앙심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집필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불변의 진리는 의구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 사건을 통해 기독교 중심의 유럽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성직자들은 이 책을 악마의 책이라고 불태워 버렸다. 이탈리아의 브루노(Bruno)지동설을 받아들여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또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종교재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그는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 si muove)”라는 말을 남겨 변할 수 없는 진리를 옹호하였다.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는 지동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아서 화형당한 과학의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으며 브루노에 대한 과장된 평가다. 브루노는 지동설을 받아들였으나 우주를 유한의 공간이라고 생각한 코페르니쿠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우주는 무한하다는 일명 무한 우주론을 주장했다. 브루노는 기독교에 대한 공개 비판과 이단에 가까운 급진적인 기독교 교리 해석을 주장한 혐의를 받아 화형을 당했다그리고 갈릴레오는 실제로 지구는 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 148

 

 제논(Xenon)은 로고스를 모든 실재에 내재되어 있는 이성의 정신적 원리로 규정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한 철학자의 이름 철자가 틀렸다. 올바른 이름 철자는 ‘Zenon’ 또는 ‘Zeno’


‘xenon’은 원자번호 54번의 원소 이름이다. 원래는 그리스어 발음인 크세논으로 표기했으나 최근에는 영어식 발음 제논으로 표기하고 있다.




* 377

 

 언어를 과학적으로 다루는 철학자는 페라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이다. 그는 언어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의 언어학은 언어능력이 가지고 있는 자연언어의 체계적 연구를 통해 언어에 대한 기호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는 언어를 과학적으로 해석하여 기호의 체계로 분류하고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 구조를 연구하였다.

 

 

페르디낭으로 써야 한다.






* 419

 

19412월 마지막 작품 막간을 끝으로 우즈강에 투신해 자살해 버렸다.



 

막간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죽기 전에 쓴 마지막 소설이다. 책의 제목임을 알 수 있는 괄호를 넣어줘야 한다.







* 430


 

 원본의 이데아는 사라지고 복제만이 세상를 뒤덮는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우리의 의식은 시뮬라크르를 지향하며, 원본 없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세상를세상을의 오자다.




 

부실한 점이 많은 이 책의 제목을 철학책의 위기로 바꾸고 싶다. 사실 밑천이 드러난 ‘철학자의 위기가 이 책의 상태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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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1-01-18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키백과의 오류가, 출간될 책으로 이어지고....존재하지도 않는 철학용어가 독자들의 머릿 속을 떠돌며 자리 잡지 못하고....작아 보이지만 작은 실수가 아니네요...의도가 담기지 않았더라도.

cyrus 2021-01-19 06:33   좋아요 0 | URL
저자의 집필 의도와 내용은 좋았는데, 생각보다 ‘옥에 티’가 많았어요. ^^;;
 
책 읽기의 끝과 시작 - 책읽기가 지식이 되기까지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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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고 난 후에 서평을 쓰지 않으면 허전하다. 그때 그 느낌은 밥을 맛있게 먹었는데 배가 부르지 않은 것과 같다. 독서 후 글쓰기 활동은 아주 중요하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책을 보면서 얻은 지식과 그것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은 서평 쓰는 일을 어렵게 생각하거나 부담스러워한다. 서평은 독후감보다 좀 더 체계적인 사고를 필요로 한다. 독후감은 말 그대로 독서 활동 이후에 나온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정리해 쓰는 글이라면 서평은 책을 평가해 다른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글이다. 서평을 쓰려면 책과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책의 내용을 의심하면서 읽어야 한다. 독후감 쓰기에 익숙한 독자들은 자신들이 책을 평가할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서평 쓰기를 주저한다. 어떤 사람은 서평의 형식과 비슷한 글을 쓰고 있으면서 자신의 글을 독후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책에 대한 내용을 비판하면서 서평을 쓰는 일에 자격이 필요하나? 서평은 지식인이나 전문 서평가만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또 책을 평가하는 글쓴이의 입장이 논리적으로 정리된 서평이 독후감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후감도 서평처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또는 책을 주문하도록 유도하는) 글이 될 수 있다.

 

서평 쓰기의 목적을 잘 이해한다면 서평 쓰는 일이 어렵지 않다. 철학, 역사, 사회과학 분야의 책의 서평을 써온 강유원의 서평 모음집 책 읽기의 끝과 시작은 서평의 기본적인 기능과 쓰는 방식을 알려주는 책이다. 책 읽는 목적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책 속 내용을 공부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강유원은 독서를 지식을 얻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획득한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책 내용을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일이 바로 서평 쓰기다.

 

서평은 책을 대하는 사람들 또는 그 책을 읽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 서평 쓰는 일은 사적인 독서에 해당한다. 글쓴이는 자신이 쓴 서평을 읽으면서 책 내용을 복습할 수 있다. 서평을 쓴 과거의 는 몇 년 후의 본인이 책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그때 넌 이 책을 이렇게 읽었는데, 알고 있지?” 다른 사람이 내가 쓴 서평을 읽고 책을 구매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사적인 독서는 공적인 독서로 확대된다. “당신도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거예요.” “이 책은 별로예요. 책을 사기 전에 잘 생각해보세요.” 서평 쓰기와 서평 읽기는 독서만큼이나 중요한 행위다. 강유원은 책 읽기-서평 쓰기-서평 읽기-책 읽기가 반복되는 과정이 이루어지면 지식도 쌓이고, 책을 고르는 안목이 생긴다고 말한다.

 

서평 작성의 8할은 책을 요약한 내용이다. 쉬워 보이는 일이지만, 서평 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책을 요약할 때 실수를 저지른다. 그들은 책을 읽은 동기나 책에 대한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나도 서평을 쓰다 보면 종종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평은 책 전체 내용을 다 담아낼 수 없다. 고작 몇 줄의 문장만으로 책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서평을 잘 쓰려면 책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서평 모음집이 책 읽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주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도 책 읽는 방법이 잘못되면(저자가 이 책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좋은 서평이 나오기 힘들다. 책 읽기의 끝과 시작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책 읽는 방법이, 2부는 서평 쓰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3부는 강유원이 쓴 서평으로 채워져 있다. 서평을 잘 쓰고 싶은 독자들은 당연히 2부를 먼저 볼 것이다. 책을 읽는 순서는 독자들의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1부를 지나쳐서는 안 된다. 기본이 제일 중요하다. 서평 쓰기의 시작은 책 읽기다.

 

이 책의 부록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번역본에 대한 비평적 서평인 장미의 이름 읽기(미토, 2004) 전문이다. 장미의 이름 읽기는 이미 절판된 책이다. 책 읽기의 끝과 시작은 강유원의 서평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한 원 플러스 원(one plus one)과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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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20-05-05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쓰기는 항상 어려워요~

cyrus 2020-05-05 11:38   좋아요 0 | URL
철학책은 좀 어려운 주제의 책이라서 저도 철학책 서평 쓰기는 어려워요. ^^;;

페넬로페 2020-05-05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서평은 항상 훌륭해요^^
책을 선택하고 비교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cyrus 2020-05-05 19:59   좋아요 1 | URL
글을 잘 쓴다는 칭찬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글을 썼다는 말을 듣는 게 더 좋아요.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

stella.K 2020-05-05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 책은 읽고 싶긴한데 너의 평점이 높진않군.

cyrus 2020-05-05 20:03   좋아요 0 | URL
제 기준으로 볼 땐 ‘보통’이었습니다. 저자의 직업상 책에 실린 서평이 인문학, 역사 분야에 치우쳐 있고, 저자가 소개한 서평 쓰는 방식은 예전에 전문 서평가들이 한 번쯤 언급했던 내용이라서 전체적으로 책에 특별히 눈여겨 볼만한 내용은 없었어요. 철학을 깊이 공부하지 않은 독자라면 저자의 서평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저도 서평을 다 읽지 않았어요. syo님처럼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무난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의 글이에요. ^^

syo 2020-05-05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이 서평 책 한 권 내도 된다고 봐요, 나는.

cyrus 2020-05-06 08:05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소수의 독자’가 다섯 명 이상이라면 독립 출판물 형식으로 서평 모음집을 내보겠습니다. ㅎㅎㅎㅎ

syo 2020-05-06 19:18   좋아요 0 | URL
11111

cyrus 2020-05-06 23:40   좋아요 0 | URL
syo님이 책 다섯 권을 주문하는 건 무효입니다. ㅎㅎㅎ

조그만 메모수첩 2020-05-0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올해는 안 사기로(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많아서) 마음 먹었지만 cyrus님 서평 읽고 나면 어느새 책들을 장바구니에 주섬주섬 넣고 결재하려는 저를 발견하지요. 잘 읽었습니다~

cyrus 2020-05-08 17:02   좋아요 1 | URL
그래도 책을 주문하기 전에 꼭 실물을 확인하고, 살 것인지 말 것인지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

transient-guest 2020-05-11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로 독후감과 서평 사이에 있네요 아마도...
 

 

 

우리 사회에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외로움은 치유돼야 할 질병처럼 인식된다. 많은 사람이 타인과의 정서적 거리에서 비롯된 괴로움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 라르스 스벤젠 외로움의 철학(청미, 2019)

* 올리비에 르모 자발적 고독(돌베개, 2019)

 

    

 

외로움의 철학(청미)의 저자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한다. ‘외로움은 사람이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괴로운 감정 상태다. 그러나 고독은 개인이 혼자 무언가를 하려고 타인과의 거리를 두면서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고독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은 외롭지 않다. 외로움과 고독의 의미를 구분한 저자의 입장은 새로운 건 아니다. 자발적 고독》(돌베개)의 저자는 고립과 고독을 구분했다. 고립은 외부적 요인들로 의해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다. 고립된 사람은 외로움을 잘 느낀다.

    

 

 

 

 

 

 

 

 

 

 

 

 

 

 

 

* 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사월의책, 2013)

 

    

 

외로움의 철학자발적 고독원서는 2017년에 나왔고, 번역본도 작년에 같이 나왔다. 그러나 둘 중 먼저 나온 책은 자발적 고독이다. 이 두 권의 책이 나오기 훨씬 전에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사월의책)를 쓴 노명우 교수는 혼자 산다는 것은둔을 구분했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자전적 사회학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혼자 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혼자 살면서 느꼈던 일상을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저자는 혼자 사는 것을 독신 풍조의 확산이나 가족 공동체 몰락의 징조로 여기는 사회의 시선을 비판한다.

 

이 글에 언급된 세 권의 책 이외에도 고독의 장점을 설명한 책들이 더 있다.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고독을 주제로 한 책들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처음에 저자는 고독과 외로움(고립)의 의미를 구분한다. 고독에 대한 정의를 내린 다음 고독의 장점을 몇 가지 설명한다. 그리고 스스로 고독을 선택해 사유와 성찰을 적극적으로 한 철학자나 작가의 사례를 든다. 고독을 예찬한 저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인물은 몽테뉴(Montaigne)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앞으로 혼자 사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혼자 살기의 장점을 설명한 책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사실 글 좀 쓰는 사람이라면 고독에 대한 책 한 권을 충분히 쓸 수 있다. 이런 책들은 아직도 혼자 사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고독에 익숙한 사람들은 책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나도 이제 고독에 대한 책을 그만 읽으련다. (라고 말해놓고선 또 읽을 것 같다‥….)

 

 

 

 

 

 

Trivia

 

 

*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204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몽테뉴, 아버지라는 역할까지 일시 정지시킨 몽테뉴, 남편이기를 잠정적으로 중단한 몽테뉴는 절대적인 자신만의 공간, 자신의 질문에만 몰두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공간을 괴테에게 영향을 받아 치타델레(Zitadelle)라 불렀다.

 

 

책 뒤에 치타델레의 의미를 설명한 주석이 있다(288). 주석 내용은 이렇다. 몽테뉴가 괴테의 자아 개념을 따서 탑에 붙인 이름으로 요새 안에 독립된 별채 성()을 뜻한다.” 몽테뉴는 괴테보다 먼저 태어났다(몽테뉴는 1533년 생, 괴테는 1749년 생). 그런데 어째서 몽테뉴는 괴테의 자아 개념을 자신이 거주하는 탑의 이름으로 정할 수 있었을까. 내가 봐도 이 내용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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