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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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잔치의 꽃은 돌잡이다. 돌잡이는 첫 생일을 맞은 아기의 미래를 재미로 점치는 행사이다. 아기가 무엇을 잡았느냐가 화젯거리가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에게 실, , 연필과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잡게 한다. 돈을 잡으면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되고, 연필을 잡으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요즘은 마이크, 판사 봉, 청진기, (야구공, 농구공, 축구공 등)이 돌잡이 물건으로 많이 나온다. 마이크는 가수, 판사 봉은 법관, 청진기는 의사, 공은 운동선수가 된다는 의미다.

 

만약 돌잡이 물건으로 이 있다면, 그것을 잡은 아기의 앞날은 어떻게 보면 좋을까? 책을 잡았으니까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책잡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오히려 문제투성이라서 상대방에게 책잡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방금 언급한 건 말장난[]이니까 책을 잡은 아기의 미래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책은 연필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부모는 책을 잡은 아기가 독서를 좋아하고, 공부 잘하는 똑똑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돌잡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아기가 책이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면 그 아기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집안 환경은 아기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로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아무리 책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책 읽는 행위가 몸에 배지 않으면 책에 친숙한 사람으로 자라지 못한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책을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읽을 능력이라든가 책을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책 읽는 뇌라는 책을 쓴 미국의 신경심리학자 매리언 울프(Maryanne Wolf)는 애초에 인간의 뇌는 처음부터 독서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문자를 읽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행위에는 뇌 회로의 연결이 필요하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고 서서히 문명을 만드는 와중에 뇌는 기존 회로를 재편성해 문자를 인지하고 해독하는 능력을 향상해 왔다. 그러면서 독서라는 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울프는 독서를 문화적 발명으로 본다. 따라서 독서는 타고난 능력도, 재능도 아니다. 책 읽는 사람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은 책 읽는 사람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 안에서 동영상 프로그램 · 영화 · 음악 등 각종 미디어를 접한다. 콘텐츠도 전에 볼 수 없었던 형식으로 바뀌고 있다. 짧은 시간에 즐길 수 있는 영상 위주의 콘텐츠가 많아지고 있다. 울프는 이러한 디지털 시대를 순간 접속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책으로라는 제목의 책에서 뇌의 읽기 회로가 잊히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본다. 전작 책 읽는 뇌에서 언급했던 뇌의 읽기 회로가 사라진다면 책을 깊이 읽고 생각하는 능력도 같이 사라진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한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지 않게 되며 책을 읽는다고 해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는다. 책을 좋아하는 저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는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장편소설 유리알 유희를 다시 읽은 경험을 들려주면서 그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자신의 태도를 고백한다. 다른 사람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는 사람도 디지털 기기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 속에 있는 문장을 빠르게 혹은 대충 읽고 있다. 마치 스마트폰 화면에 나온 짧은 텍스트를 훑어보듯이 말이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으면 글을 대충 훑어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없다. 나만큼, 그리고 나보다 더 책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하는 애서가 동지들이여, 우리 솔직해지자. 정말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종이책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뇌의 읽기 회로가 줄어들고 있으며 그 자리에 동영상과 짧은 글을 선호하는 뇌 회로가 생겨나고 있다. 예전과 다르게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독을 피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다시, 책으로는 책 안 읽는 사람과 책 읽는 사람 모두에게 경고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사용할수록 글을 훑어보고 건너뛰는 신경회로는 강해지지만, 집중력과 성찰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매일 영상과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디지털 시대에도 깊이 있는 사고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종이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저자는 종이책 읽기를 무조건 예찬하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양손잡이 읽기를 제안한다. 디지털 기기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알고, 깊이 있는 사고를 유도하는 종이책에도 눈길을 주는 것이다.

 

다시, 책으로는 나에게 초심을 다지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준 책이다. 깊이 읽기를 강조하는 저자의 단순한 메시지는 나태해진 나를 깨우는 낙숫물이다. 종이책을 대충 읽으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고, 그 시간 동안 여러 생각들을 모아서 재편성한 것들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독서는 책을 덮으면서 끝나는 종점에서 나만의 생각이 샘솟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이 출발점을 잊어선 안 된다.

 

 

 

 

 

[] 책잡다남의 잘못을 들어 나무라다는 뜻의 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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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3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03 17:19   좋아요 0 | URL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20대가 독서 모임에 꾸준하게 참석하는 일은 드물어요. 독서모임에 호기심이 생겨서 오는 20대들은 많지만, 그들은 매번 모임에 자주 오지 않아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건데, 아무래도 요즘 20대들은 책보다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책을 집중해서 읽고 책에 대해 토론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2019-09-03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03 17:23   좋아요 0 | URL
그런 독서 패턴에 가끔은 질리지 않던가요? ㅎㅎㅎ 저는 책을 꼼꼼히 읽는 방식이 귀찮다고 여러 번 느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럴 때는 정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

stella.K 2019-09-0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찔리는데...?!ㅋㅋ
습관이 무섭다고 난 완독주의였지. 비록 책을 많이 못 읽어도
완독해야 속이 풀리지 안 그러면 찜찜하더라고.
내가 독서에 취미가 붙었을 때 어느 명사가 완독을 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책을 읽는 거냐고 지금 생각하면 권위주의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막 강하게 어필했던 게 내내 뇌리에서 떠나질 않더군.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책들은 발췌독을 하던가 읽다가 포기하지만
정말 좋은 책이다 싶은 책은 완독을 하지.
누구는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라고도 하고.

cyrus 2019-09-03 17:27   좋아요 0 | URL
저도 완독해야 할지, 아니면 발췌 독서를 해야 할지 혼자서 생각이 많아질 때가 있어요. 완독하지 않으면 찝찝함을 지울 수 없거든요. 그래도 발췌 독서를 하면 편하긴 해요. 요즘에 나오는 책들은 색인이 잘 만들어져 있어서 내가 알고 싶은 내용만 찾아서 골라 읽을 수 있어요. 하지만 색인이 아예 없는 책은 어쩔 수 없이 정독해야 돼요. ^^;;

레삭매냐 2019-09-03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월 달궁모임에서 책읽기에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제가 풀어낸 스토리가 기억이 나네요.

책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
지요.

하지만 그렇게 요약된 이야기들 혹은 짤을 보다
보면, 장편 소설 같은 스토리는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된다 뭐 그런 식의 이야기를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긴 호흡으로 만나야 하는 책들이 외면 받고 있는
상황이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아서 말입니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과연
힘들게 장편을 써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다면
누가 장편을 쓰려고 할지 전 그게 궁금했습니다.

cyrus 2019-09-03 17:40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독서 모임이 있는 날에 멤버들을 만나면 많이 나오는 대화 주제가 ‘영화’입니다. 저도 영화가 책보다 재미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 저는 경청만 해요. 하지만 책 얘기만 나오면 수다쟁이가 됩니다. 아, 물론 상대방을 위해서 적당하게 말합니다. 너무 많이 떠벌리면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보이기 쉽거든요. ^^;;

긴 호흡으로 만나야 할 책들은 독자들의 외면을 받기 쉽고, 이러면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될 확률이 높아요.

syo 2019-09-04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임밸류가 사이러스 쯤 되니까 당당하게 ˝너 똑바로 읽고 있냐?˝ 이렇게 지를 수 있는 거지요. 호쾌하다 ㅎㅎㅎ

cyrus 2019-09-04 12:03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제대로 안 읽고 그냥 넘긴 적이 많아요. 시간이 없어서 그냥 대충 본 것도 있고, ‘이건 다 알고 있으니 훑어보고 넘어가자’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전자의 반응은 나태해서 그런거고, 후자의 반응은 오만이에요. 그래서 <다시, 책으로>을 읽으면서 저의 독서 생활에 대해서 반성했어요. ^^;;
 

 

 

낭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낭만이라는 단어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나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느끼는 대로 삶을 인식하는 자유로운 내면 상태를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낭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유.

 

낭만주의자들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꿈꾼다. 그러므로 현실이라는 세계를 받쳐주는 두 개의 기둥, 즉 이성과 논리적 사고와 친해지기 힘들어한다. 그들에게는 이 기둥들은 굵은 쇠창살이요, 현실은 거대한 감방이다. 이 현실의 감방을 탈출하는 유일한 돌파구는 감방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낭만주의자는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새로운 활력소를 얻는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는 감성을 추구하며 개인의 체험과 주관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현실과 상상, 이성과 감성, 주지(主知)와 주의(主意)를 철저히 분리하지 않았으며 현실 도피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지 않았다. 특히 독일의 낭만주의 지식인들은 현실을 벗어나야 할 세계가 아니라 변화해야 할 세계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실을 변화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 대한 소식은 바람을 타면서 유럽 전역으로 전해진다. 그 당시 독일 지식인들은 프랑스혁명을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시대는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대이다. 자유를 동경하는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프랑스혁명에 열광했으며 혁명을 지지했다. , 물론 혁명을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낭만주의자도 있었다. 또 혁명의 과격함에 충격을 받아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을 철회하거나 혁명 세력을 비판하는 낭만주의자도 있었다. 어쨌든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면서 살고 싶어 했다.

 

 

 

 

 

 

 

 

 

 

 

 

 

 

 

 

* [절판] 뤼디거 자프란스키 낭만주의: 판타지의 뿌리(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12)

 

 

 

 

 

 

 

 

 

 

 

 

 

 

 

* 에른스트 호프만 모래 사나이(창비, 2017)

* 에른스트 호프만 모래 사나이(지만지, 2011)

* 에른스트 호프만 모래 사나이(문학과지성사, 2001)

 

 

 

낭만주의를 감성과 상상을 중시하는 사상또는 현실 도피적인 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또 낭만주의자들을 지나치게 감상적인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단순한 생각은 낭만주의와 낭만주의자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책이 뤼디거 자프란스키(Rüdiger Safranski)낭만주의: 판타지의 뿌리(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책의 저자는 독일에서 시작된 낭만주의와 그에 영향을 받아 생긴 낭만적인 것의 정의를 구분한다. ‘낭만적인 것이란 특정한 시기에 국한되지 않은 시대정신이자 문화이다. 저자는 독일 낭만주의의 종착점에 서 있는 작가로 호두까기 인형모래 사나이를 쓴 에른스트 호프만(Ernst Hoffmann)을 지목한다. 호프만은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의 내면 상태를 묘사한 이야기를 주로 썼다.

 

호프만 이후에 이어져 온 낭만주의적 문화는 낭만적인 것으로 이름 붙여 분류할 수 있다. 독일 낭만주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남긴 지적 전통과 문화적 유산들은 다음 세대에 이어져 내려왔다. 예를 들어 야성과 광기를 마음껏 발산하는 축제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city dionysia)에 영감을 얻은 니체(Nietzsche)의 디오니소스 예술관과 게르만 신화(Germanic mythology)와 중세 문학을 소재로 한 바그너(Wagner)의 음악들 모두 낭만적인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아카넷, 2007)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책세상, 2005)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아카넷, 2015)

* 프리드리히 니체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책세상, 2002)

* 정영도 니체 vs 바그너(세창출판사, 2019)

 

 

 

그러나 독일 낭만주의에서 시작된 낭만적인 것민족주의와 전체주의를 만나면서 삐딱 선을 타게 된다. 바그너는 게르만 민족 우월 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다. 서른 한 살의 니체는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가 되어 자신의 책 비극의 탄생에서 바그너를 찬양한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신인 디오니소스적 예술관과 이성 중심의 아폴론적 예술관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니체는 바그너의 종교적 편견과 반유대주의에 실망하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니체 대 바그너를 썼다. 또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바그너를 음악을 병들게 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유대주의를 비판했던 니체의 글과 사상은 유대인들을 학살한 히틀러(Hitler)에게 영감을 주었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 있고, 고통을 주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인간상으로 위버멘쉬(Übermensch)를 제시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니체가 제시한 인간상을 초인(超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망상에 가까운 히틀러의 왜곡된 해석은 자신을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가진 막강한 권력자로 부각시켜주는 지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정신병이 발병한 니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돌본 누이동생 엘리자베트(Elisabeth)는 반유대주의자와 결혼했고, 그녀는 니체의 책과 유고를 반유대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해석하여 편집했다. 이렇다 보니 오랫동안 니체는 반유대주의자로, 그의 책에 히틀러가 좋아한 반유대주의적 내용이 적혀 있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졌다. 그리고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게르만 민족의 정신을 잘 구현한 음악으로 바그너의 작품들을 꼽았다. 20세기 초에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그리고 파시즘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낭만적인 것은 낭만주의의 부작용이다.

 

 

 

 

 

 

 

 

 

 

 

 

 

 

 

 

* 이본 셰라트 히틀러의 철학자들(여름언덕, 2014)

* [절판] 괴테 괴테의 프랑스 기행(인화, 1998)

 

 

 

히틀러의 철학자들의 저자 이본 셰라트(Evon Sherat)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지식인들에게 비판이 가해지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완전히 잡기 직전에 독일의 지식인들은 나치즘(Nazism)정치적 낭만주의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나치들은 게르만 민족과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지적 및 문화적 도구로 낭만주의를 지목했고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독일 낭만주의 작가들의 책은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제3제국 시대의 필독서가 되었다. 낭만주의: 판타지의 뿌리는 독일 낭만주의에서 시작된 제3제국 시대의 낭만적인 것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설명한다. 자프란스키는 책의 머리말에 낭만적인 것은 병적인 것이라고 말한 괴테(Goethe)의 말을 인용한다. 괴테도 처음에 프랑스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자유해방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약탈을 자행하는 혁명 세력의 행보를 목격한 이후로 혁명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괴테의 불길한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갑갑한 현실 세계를 현실 너머의 세계로 만들려는 히틀러의 애착은 혁명에 흥분한 독일 낭만주의 지식인들이 남긴 불행한 유물이다. 위험한 낭만주의자는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그 욕망을 위해 또 다른 개인의 자유와 삶을 무참히 짓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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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02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낭만은 로망의 일본식 음역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것을 차용할 바에야 차라리
원어를 사용하는 게 어떨지 싶네요.

그나저나 이데올로기의 왜곡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니체의 위버멘쉬를 퓨어러에 갖다
대는 방식의 기술적 접근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cyrus 2019-09-03 11:45   좋아요 0 | URL
좋은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낭만주의를 ‘로맨티시즘(romanticism)’이라고 써야겠어요. ^^
 
일기 여행 -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신비한 여정
말린 쉬위 지음, 김창호 옮김 / 산지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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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우울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마음이 아플수록 더욱더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때로는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머릿속을 꽉 채운 잡다한 상념을 비우기 위해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렇듯 나만의 방법을 사용해 슬픔을 잊어보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내 마음의 상처는 과연 모두 사라진 걸까?” 자아 성찰적인 질문을 나에게 던질 때 ‘그렇다’고 확신하면서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힘든 상황에 반복적으로 처하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도움이 되는 방법을 위급하게 찾아 헤맨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다짐과는 다르게 고통과 두려움을 곧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위태로운 상황은 반복된다.

 

치유(healing). 우리는 이 단어를 많이 쓰지만,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을까? 일단 치유의 정의를 내리기부터 쉽지 않다. 그냥 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음이 아픈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내면 여행’이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상처받은 내면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일기 여행》은 자아 성찰에서 치유로 이어지는 내면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안내서다.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저자는 ‘일기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기는 글쓰기를 이용해 심신의 병을 고치는 일종의 치료법(therapy)이다. 마음속이 복잡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종이에 뭘 쓰거나 낙서를 하면 마음이 진정되던 경험을 누구나 한두 번쯤 겪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일기 쓰기 숙제를 하느라 끙끙대던 추억에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기는 누구나 혼자서 쓸 수 있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날짜를 기록하며 쓰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규칙이다. 하지만 일기조차 남을 의식하고 써온 사람들에게는 이조차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도 현실이다. 이때 《일기 여행》이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일기 쓰기가 얼마나 훌륭한 ‘치유’의 도구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의 일기 쓰기’란 무엇일까. 저자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삶을 기록하려는 여성의 정신적 여행”이라고 말한다. 일기라는 글을 쓰는 물리적 행위, 즉 종이 위에 단어가 되어 나타난 내 모든 감정은 ‘나’라는 존재에서 나오는 진솔한 목소리에 대한 확인이다. 여성이 글을 쓰는 것은 내 목소리를 가지는 것과 같다.

 

이런 멋진 행위를 여성이 마음껏 누릴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자와 문법을 이해해야 하고, 책에 접근할 기회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성 중심적 사회는 대부분 여성을 교육에서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글 쓰는 여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 읽을거리도 제한했다. 이렇다 보니 글을 쓰고 싶은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성으로 보일 수 있는 필명을 만들어 작가 활동을 했다. 전업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여성들은 자신만의 비밀 노트에 글을 쓰거나 일기 쓰기에 몰두했다. 수많은 여성이 남긴 일기장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화 상대였고, 마음껏 자유를 꿈꿀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었다.

 

‘일기를 읽는 행위’도 장점이 있다. 일기는 그것을 쓴 사람을 말해주는 지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일기를 보면서 타인의 삶이 되어 그 사람의 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일기를 읽는 행위에 매료되는 건 그 때문이다. 일기는 타자의 삶을 살도록 해주고, 타자의 의식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일기의 주인공은 자신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일기를 보는 독자는 일기의 주인공 속에서 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일기를 읽으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봄으로써 큰 도움과 위안, 나아갈 방향을 얻을 수 있다. 일기는 글쓴이의 사적 성찰에 대한 단순한 기록물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경험과 깨달음을 들려준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를 쓰는 행위는 부질없는 짓일 수 있다. 어차피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대개의 기록이 사회적 권위가 있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뭐라도 써야 한다. 힘 있는 자들의 기록이 쌓여갈수록, 사회 전체의 표준은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휜다. 그래서 특출한 경력이 없는 사람, 즉 전업 작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는 많이 배운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고상한 행위’라는 통념은 거짓이다. 이런 거짓말로 이익을 누리는 이들은 글쓰기로 밥을 버는 이들뿐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육체적 노동을 직접 해보지 않으면서도,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으면서 밥을 챙겨 먹는 자신들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글쓰기가 마치 대단히 신비한 재능이 필요한 일인 양 꾸미곤 했다.

 

글쓰기는 ‘수준 높은 정신적 노동’이 아니다. ‘정신적 노동’임에는 분명하지만, 높은 수준의 지식과 사고력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글을 쓴다고 해서 대단한 교양인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교양인이 아니어도 글을 쓸 수 있다. 글은 어떤 지식을 전달하고 공유하기 위해 쓰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글의 본질적인 용도는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과감히 들춰보자. 그런 다음에 마음을 편히 하고 종이 위에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사무치게 미웠던 사람에 대한 감정, 나 자신에게 실망했던 사건, 하려고 했으나 잘되지 되었던 일, 내년엔 꼭 하고 싶은 계획 등 주제를 잡아도 좋다. 고통은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데서 나온다. 일기 쓰기를 통해 여러 개의 나를 돌아보면 진짜 옹골찬 내면의 힘을 가진 새로운 내 모습이 정체를 드러낸다. 여러 개의 감정이 있던 내가 하나의 ‘나’로 합체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힘겹게 살아온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긴다.

 

글쓰기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기를 쓰면서 시작할 수 있다. 일기는 새로운 글을 낳게 만드는 모태가 될 수 있다. 일기를 쓰면서 글쓴이 스스로 자신 안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된다면,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나올 것이다. 일기 쓰기는 완성된 결과물보다는 그 ‘기록하는 과정’에 가치가 있다. 일기는 진정한 ‘나’를 만나러 가는 여행을 위한 지름길이다.

 

 

 

 

 

※ Trivia

 

역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국인 이름을 영어로 발음하는 방식대로 썼다. 그리고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소설 《빌러비드》를 직역하는 세심함(?)을 발휘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표기에 맞게 쓰면 다음과 같다.

 

 

* 31쪽: 크리스타 울프(Christa Wolf) → 크리스타 볼프

 

* 71쪽: 리처드 바그너(Richard Wagner) → 리하르트 바그너

 

* 171쪽: 오더 로드(Audre Lorde) → 오드리 로드 (‘오드르 로드’라고 쓰는 사람도 있음)

 

* 295쪽: 로버트 슈만(Robert Schumann) → 로베르트 슈만

 

* 310쪽: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사랑하는(beloved) → 《빌러비드》

 

* 317쪽: 조지아 오케이프(Georgia O’Keeffe) → 조지아 오키프

 

* 320쪽: 마리 배쉬커트세프(Marie Bashkirtseff) → 마리 바시키르트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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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8:43   좋아요 1 | URL
저는 초등학생 때까지 일기와 독후감을 많이 썼어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글쓰기에 흥미를 잃었어요. 사실 공부만 하느라 글을 쓸 기회가 없었죠. 이상하게도 군인이 되니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대하고 난 뒤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알라딘 블로그에 글을 남겼어요. 오랜만에 글을 썼던 시기라서 저도 글을 어떻게 쓸지 막막했었습니다. ^^

2019-07-10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8:4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기와 리뷰의 공통점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정리할 예정입니다. ^^

2019-08-15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7 08:30   좋아요 0 | URL
원래 그 분 강연이 그렇게 진행됩니다. 그 분의 강연을 처음 분들은 당혹스러울 수 있어요.. ^^;;
 
제임스 글릭의 타임트래블 - 과학과 철학, 문학과 영화를 뒤흔든 시간여행의 비밀
제임스 글릭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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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타임머신(Time Machine)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타임머신은 시간의 벽을 넘어 과거나 미래로 여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계이다. 가장 유명한 타임머신은 1895년에 발표된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의 동명 소설에 묘사된 기계이다. 이 소설이 나오고 난 이후 20세기 사람들은 ‘시간여행(time travel)이라는 소재로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쳤다.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타임머신은 여전히 상상 속 기계로 남아있지만, 매력적인 소재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시간여행을 하길 원한다.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그 욕망을 부채질한다. 물론 대개는 부질없는 상상이나 몽상에 그칠 뿐이다. 전생이나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도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점집이나 역술가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그만큼 누구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물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질수록 과거에 대한 향수(鄕愁)의 농도도 짙어진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미래에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흐릿하게 만드는 과거에 대한 향수, 즉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레트로토피아(retrotopia)가 현대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레트로토피아는 복고풍을 뜻하는 ‘retro’와 유토피아(utopia)를 합친 말이다. 향수병은 흔히 나이가 들수록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젊은이들이 과거의 기억에 집착한다고 주장한다. 여생이 줄어들수록 추억에 빠져 놀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과거로 가든, 미래로 가든 시간여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타임머신이 실용화된다고 해도 복잡한 문제점(시간여행을 할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모순들. 대표적인 것이 ‘아버지 역설’이다. 시간 여행자가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던 과거로 가서 자신의 아버지를 실수로 죽인다면 시간 여행자는 어떻게 될까?)이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타임머신과 시간여행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이 타임머신과 시간여행을 다룬 공상과학물 마니아라서? 그러나 타임머신과 시간여행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은 시간여행이라는 공상적인 소재가 어떻게 해서 우리 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 책이다.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시간여행은 애초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저자는 무슨 생각으로 고리타분한 주제를 가지고 책을 썼을까? 보나 마나 이 책에서 저자는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과학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겠지.” 그러나 ‘시간여행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라는 진부한 문제는 이 책에서 중요하지 않다. 《타임 트래블》은 시간여행의 실현 가능성(불가능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한 책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문학 작가들의 다양한 견해를 밝혔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자들은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이유를 철학적인 관점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자신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음으로 과거를 여행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시간여행은 불과 백 년 전에 만들어진 근대적 판타지다. 과학기술은 근대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근대화에 접어드는 시대에 살아온 지식인들은 과학적 진보가 곧바로 사회 전체의 진보에 직결된다고 믿었다. 웰스도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사회가 더 고도로 발달하는 문명화 과정에 관심이 많았다. 웰스는 과학기술이 유럽의 미래를 유토피아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하면서도 문명이 빠르게 변화하는 속도에 의해 사라지고 잊히는 ‘과거의 유산’을 잊지 않았다. 이 ‘과거의 유산’은 지나가버린 시간을 증명해주는 소중한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계속해서 ‘과거의 유산’을 발굴하였고, 그것은 눈으로 확인 가능한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어도 과거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즉 근대 초기는 기차와 마차와 공존하는 시대였다. 과거와 (미래에 근접한) 현재가 겹겹으로 포개진 시대에 살던 유럽인들은 ‘시간’을 ‘눈으로 확인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웰스가 소설에서 고안한 타임머신은 눈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싶은 근대 유럽인들의 기대심리가 어느 정도 반영된 상상 속 기계라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웰스의 타임머신에 콧방귀를 뀌면서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웰스의 《타임머신》을 평한 어느 평론가는 “이런 미래 여행이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시간여행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20세기 사람들은 ‘과거’로 남게 될 자신들의 시간(‘현재’)을 영원히 보존하여 미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타임캡슐’을 생각해냈다. 저자는 타임캡슐을 ‘희비극적인 타임머신’이라고 말한다. 땅에 묻힌 타임캡슐은 ‘가장 느린 타임머신’이다. 타임캡슐은 그것을 땅에 묻어둔 사람과 나란히 시간여행을 한다. 타임캡슐을 만든 사람은 시간 여행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주인(시간 여행자)이 없는 타임캡슐은 미래가 된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잠든다. 타임캡슐의 용도를 생각해 보면 저자가 타임캡슐을 ‘희비극적 타임머신’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다.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우리는 타임캡슐을 미래로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 여행자가 될 수 없고, 타임캡슐을 바라보는 미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할 수도 없다.

 

웰스의 소설을 보면서 비웃은 평론가의 말처럼 시간여행은 정말 ‘쓸모없는 여행’일까? 시간여행이 가능한지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사람들은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물론, 유사과학에 너무 빠져버려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를 즐겨 본다. 과연 시간여행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한정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인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간여행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시간여행이 궁극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죽음을 피하고 싶은 심리’에서 찾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죽는다. ‘나’라는 존재가 없는 미래를 상상해보라.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내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영원히 눈을 감는 순간 내일(미래)을 맞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서글픔을 잊기 위해 행복했던 과거를 끄집어내기도 하고, 오지 않을 미래가 어떨지 긍정적으로 상상한다.

 

“인생은 매일 매일 사는 동안 모두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We are all travel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day of our lives.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ne)>에 나온 대사가 말해주듯, 우리는 지금도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지나간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다. 시간여행을 상상하는 일만큼 삶에 활력을 주고, 혼자서 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사고 실험’ 게임은 없을 것이다. 단,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게임도 많이 하면 정신에 해롭다. 현실을 도피하는 심정으로 과거에 너무 몰입해서도 안 되며 미래를 맞춘답시고 설레발을 치고 다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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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문화론 - 사가판 私家版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인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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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똑똑하다는 건 세상이 다 안다. 노벨상 수상자 중엔 약 30%가 유대인이다. 201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포크송 가수 겸 작곡가인 밥 딜런(Bob Dylan)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뿐만 아니다. 유대인이 오래 장악해온 경제 분야는 물론 정보기술, 문화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이 수두룩하다. 구글의 공동 설립자 래리 페이지(Larry Page), 페이스북의 최고 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는 모두 유대인이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의 세계 정복 전략을 담은 『시온 의정서』가 진짜라고 믿는다. 위조라 판명된 이 문서가 세상에 공개된 이후 나치는 그것을 구실로 유대인을 학살했다. 지금도 이 ‘허위’ 문서를 근거로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은 로비의 천국, 유대인 로비는 최고 수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 정치권과 미국 내 유대인 로비 단체의 유착 관계는 아주 질기면서 끈끈하다. 미국과 유대인의 특별한 관계 덕분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테러’로 몰아붙이면서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유대인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하나는 똑똑한 유대인에게 보내는 부러운 시선. 또 하나는 팔레스타인을 빼앗으려는 이스라엘 유대인에 향한 반감 어린 시선. 그런데 우리는 유대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유대인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있다. “유대인은 똑똑한 민족이야.” “유대인은 홀로코스트 희생자야.” “유대인은 돈을 너무 밝혀.” 유대인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자도 ‘유대인은’이라는 주어로 시작해서 유대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의를 내린다.

 

20년 동안 유대인을 연구했다는 우치다 타츠루(內田樹)“유대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도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도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완전히 배제한 채 유대인이 누군지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 누군지 설명하려면 각자의 가치 판단을 집어넣어야 한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유대인은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다양한 가치 판단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가지고 유대인이 누군지 말하게 된다. 유대인과 반유대주의를 분석한 그의 책 《사가판 유대문화론》은 그동안 유대인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해온 독자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만한 책이다. 내가 왜 이런 표현을 썼는지 이 서평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책 제목 앞에 붙은 ‘사가판(私家版)은 우리나라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다. ‘사가’를 ‘사삿집’이라고 하는데, 개인이 혼자 살림하거나 개인이 소유한 집을 뜻한다. 《사가판 유대문화론》은 유대인과 그들의 문화를 알려고 하는 저자의 개인적 관심이 반영된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유대인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이나 중립적인 관점이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유대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는 “유대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대신에 “유대인은 무엇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스스로에게 질문한 끝에 그가 내린 주관적인 결론은 이렇다. 첫 번째, 유대인은 단일 국민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두 번째, 유대인은 인종이 아니다. 세 번째, 유대인은 유대교 신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단일 민족’, ‘순수혈통 민족’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정말로 그런 민족이 있다면 언어와 생활 방식이 완전히 비슷해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언어와 생활 방식도 제각각이다. 나도 그렇고, 사람들은 유대인을 특정 인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다른 인종과 구분할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나 생물학적 기준은 없다. 나치는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유대인을 다른 인종과 구분되는 특정 인종으로 만들려고 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교를 믿는 건 아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상당수의 유대인은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종교를 포기했다.

 

유대인은 딱히 차별을 받을 만한 특정 민족도, 특정 종교만 믿는 사람들이 아닌데도 반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을 싫어했다. 유대인은 ‘유대인을 부정하려는 자’들의 가치 판단에 여러 겹 덧씌워진 채 존재해왔다. ‘유대인을 부정하려는 자’라고 하면 악랄하기 짝이 없는 최악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반유대주의자는 악인’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저자는 유대인 문제를 연구하면서 반유대주의자들의 삶을 알게 되었는데 저자가 확인해본 결과, 오히려 그들은 올바른 품성을 가진 인간이었다. 어째서 그들은 반유대주의자가 되었을까? 반유대주의자들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사악한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을 대항하는 전지전능한 자, 즉 구세주의 등장을 갈망했다. 그래서 반유대주의자들은 그럴듯한 음모론에 현혹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앞서 언급한 『시온 의정서』다.

 

자, 이제 내가 이 책이 독자에게 파문을 줄 수 있다고 말한 이유를 언급하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저자는 현재의 유대인 문제를 풀 수 있는 ‘최종적 해결’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의 ‘암울한 결론’에 당혹스러워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들이 이 책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잘못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의 암울한 결론은 애초에 해결하기 어려운 유대인 문제에 단념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유대인 문제 해결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면서 ‘도덕적 올바름’에 사로잡혀 말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저자는 유대인 문제에 관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은 복잡하면서도 민감한 사회적 ·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올바른 의견’을 내세우려고 한다. 그들의 의도는 좋다. 하지만 이 ‘올바른 의견’은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올바른 의견’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자신을 ‘도덕적으로 올바른 위치’에 머물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사용한다. 그렇게 되면 ‘도덕적으로 올바른 위치에서 말하는 의견’에 반하는 다른 목소리는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될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진지한 사유나 논의가 없으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은 정체되고 ‘도덕적 올바름’이라는 겉멋만 잔뜩 든 공허한 말만 남는다. 너무 단순한 생각이지만,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상당히 해결하기 힘든 사회적 · 정치적 문제가 있다면 가끔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 중지(epoche)를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유대인 혹은 유대인 문제’를 괄호 안에 넣어두고 편견으로 그것을 접근하는 태도를 멈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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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4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28 11:35   좋아요 0 | URL
사실 우리도 ‘한민족’이라는 단어를 잘못 쓰고 있어요. 대부분 사람은 ‘한민족이라면 이래야 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민족을 배타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은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라는 말도 민족에 대한 편견이고 자기혐오에요.

얄라알라북사랑 2019-06-25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달만에 알라딘 로그인, 서재 들어오자마자 바로 찾아보게 되는 cyrus님의 서재^^

cyrus 2019-06-28 11:35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

페크(pek0501) 2019-06-25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의 책을 두 권 갖고 있는데 읽어 볼 만한 저자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의견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는 저로서는 어떤 판단을 하려 할 때 보류하게 되더군요. 시간에 따라 생각이 변하기도 하고, 같은 사건도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듯이 최종 판단은 없는 것 같아요.

cyrus 2019-06-28 11:37   좋아요 0 | URL
사람이 늘 한결 같은 입장을 가지면서 살 수 없어요. 어떤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입장을 가질 수 있어요. 어떤 문제에 입장을 내되, 그 입장이 틀리거나 잘못됐다면 그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번복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2019-06-28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28 11:42   좋아요 0 | URL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에 큰 문제는 없었고요. 그냥 이번 주는 바빴어요. 어제 독서모임이 있었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페미니즘 독서모임이 타이트하게 진행하게 돼요. 독서모임과 관련된 책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반납해야 할 책들까지 몰아서 읽느라 알라딘에 접속하지 못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