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내장cataract은 무엇입니까?

 

 

눈의 검은자와 홍채 뒤에는 투명한 안구 조직인 수정체가 존재하여 눈의 주된 굴절기관으로 작용합니다. 눈으로 들어온 빛은 눈 안의 앞부분에 있는 구조물로서 양면이 볼록한 렌즈 모양의 무색 투명한 구조이고 빛을 모아주는 역할을 하는 수정체lens를 통과하면서 굴절되어 망막에 상을 맺게 되는데, 백내장cataract은 이런 수정체가 혼탁해져 빛을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뿌옇게 보이게 되는 질환을 말합니다. 수정체는 두께 약 4mm, 지름 약 9mm로 양면이 볼록한 렌즈 형태를 하고 있다. 수정체는 수정체주머니(수정체낭), 암면 상피, 수정체 섬유로 구성되며 수정체주머니은 반투과성 막으로 수분과 전해질을 통과시키고 중심부와 뒷면이 상대적으로 얇습니다. 앞면 상피는 수정체주머니 바로 밑에 있는 한 층의 세포로서 수정체 섬유의 형성에 관여합니다. 수정체 섬유는 적도부(볼록렌즈의 가장자리 부분)에서 형성되어 대부분의 수정체를 구성하게 됩니다.

백내장은 선천성과 후천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선천성 백내장은 대부분 원인 불명입니다. 유전성이거나 태내 감염(자궁 내의 태아에게 발생하는 감염), 대사 이상에 의한 백내장도 있습니다. 후천성으로 나이가 들면서 노화현상의 일환으로 발생하는 것이 가장 흔한 노인성 백내장입니다. 그러나 외상이나 전신질환, 눈 속의 염증에 의해 생기는 백내장도 있습니다.

증상으로는 수정체 혼탁의 위치와 정도, 범위에 따라 다양한 정도의 시력 감소가 나타납니다. 주된 증상은 시야가 안개가 낀 것 같이 뿌옇게 보이며, 사물이 불분명하게 보이는 증상이 매우 서서히 진행하게 됩니다. 그 밖에 어두운 곳보다 밝은 곳에서 오히려 더 잘 안보이거나, 사물이 이중으로 보이는 증상도 나타날 수 있으며, 노안이 있던 분들이 갑자기 돋보기 없이도 신문이 잘 보이게 되었다면 눈이 좋아졌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백내장으로 인한 증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약물치료만으로는 혼탁이 발생한 수정체가 다시 맑아지지 않습니다. 백내장 진행을 더디게 해주는 안약들의 경우 큰 부작용은 없지만 그 효과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백내장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을 경우 수술을 하게 됩니다. 수술은 초음파로 혼탁이 생긴 수정체의 내용물을 제거한 후 개개인의 시력 도수에 맞는 인공수정체를 삽입해 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인공수정체는 영구적이며, 특별한 합병증이 없는 한 제거하지 않습니다. 인공수정체란 우리 눈의 수정체를 본떠서 만든 렌즈입니다. 굴절력이 일정하여 근거리, 혹은 원거리만 보이는 단점이 있으나 최근 자동초점조절, 다초점 인공수정체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백내장 수술 후, 즉시 거동이 가능하며 대부분의 일상생활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수술 상처부위가 완전히 아무는 한 달가량은 절대로 손으로 눈을 만지거나 비벼서는 안 됩니다. 세균이 수술상처부위를 통해 눈 안으로 들어갈 경우 매우 치명적인 안내염 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한 수술 후 한 달 내에 눈을 심하게 비비거나 부딪치면 안내 출혈, 망막 질환 등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음식물은 가릴 필요가 없으나 음주는 삼가야 합니다. 그 밖에 수술 후 약 1-2주는 사물의 색감이나 선명도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밝은 빛에서는 눈부심 등의 현상이 있을 수 있으므로 야외에서는 선글라스나 보안경 등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안창호와 윤봉길

 

 

1931년 상해 한인들의 경제적 상황이 매우 불안했습니다. 경제 부분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안창호는 상해 한인들을 위한 소비조합을 만들고 장차 생산합작의 단계로까지 발전을 염두에 두고 독립 운동을 지도하고 독려하는 경제적 혁명단체로서 공평사公平社를 창립해 경제적 위기를 타파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 대한적십자사 상의원常議員 등을 거친 조상섭, 선우혁, 차이석, 엄항섭, 장덕로를 포함하여 2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공평사를 조직했습니다. 이사장대리를 조상섭이, 경리를 장덕로가 맡았습니다. 1931년부터 자금을 모아 1932년 10월 영업을 개시했으나, 활동이 침체하여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안창호가 1932년 1월 16일자로 아내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최후순간까지 독립항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비장한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 혁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작정하고 오랫동안 희생을 달게 여기여 온 바에 이제 어떤 고통을 받든지 어찌 원망할 것이 있으리오. 나는 더욱이 여러 동지와 동포에게 빚을 진 것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다시는 집이나 무엇이나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뿐입니다.

 

편지를 보내고 얼마 후 개최된 흥사단 제18회 원동대회에서 안창호는 단원들에게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적대시하지 말 것과 전적으로 탈이념주의, 민족해방운동 지상주의에 입각해 민족통합을 이뤄야함을 역설했습니다. 독립 운동계의 각 계파가 역량을 축척하고 발전해나가지 못하고 힘겨루기만으로 역량을 소모하는 현실에서 안창호는 국제주의자와 계급혁명론자들에게 민족의 가치를 호소하는 한편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약화된 투쟁성을 퇴행적이라고 비판하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을 유화시키고 상대의 사상과 노선을 상호 포용하는 제3의 노선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1908~32)이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군 최고 지휘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을 폭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세에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인 윤봉길은 농민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세 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습니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그의 농촌계몽 운동이 단순히 계몽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설립하여 농촌개혁을 구체적인 실시했는데, 주된 사업은 농가부업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개선 등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 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규합했으며, 위친계爲親稧, 수암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습니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즉,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글을 가족에게 남긴 채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뇌와 결단은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윤봉길에게 강하고 굳센强毅 사랑은 곧 민족애였습니다. 그는 1931년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하던 중 김구를 만나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김구와 윤봉길은 의열투쟁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습니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윤봉길은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김구가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했습니다. 상해 병공창兵工廠의 주임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습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김구와 마지막 조반을 들고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했습니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많은 인파가 운집했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습니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이 도열해 있었습니다. 오전 11시 40분 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윤봉길은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수통형 폭탄을 단상위로 투척했습니다. 폭탄은 노무라와 시게미츠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날의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하면서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장개석은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 운동의 구심체로 역할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녹내장glaucoma이 무엇입니까?

 

 

녹내장glaucoma은 안압의 상승으로 인해 시신경이 눌리거나 혈액 공급에 장애가 생겨 시신경의 기능에 이상을 초래하는 질환입니다. 시신경은 눈으로 받아들인 빛을 뇌로 전달하여 보게 하는 신경이므로 여기에 장애가 생기면 시야 결손이 나타나고, 말기에는 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성인 실명 환자 9명 가운데 한 명이 녹내장으로 실명에 이르게 되었을 정도로 흔한 질환입니다. 녹내장은 “소리 없는 시력의 도둑”이라 불릴 만큼 자각증상이 전혀 없기 때문에 녹내장 환자의 절반가량은 본인이 녹내장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시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검진을 통해 일찍 발견하여 치료한다면 완전한 시신경 손상이 발생하기 전에 완치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체액이 눈 밖으로 나가는 부위가 막혀 버린 녹내장의 유형으로서의 개방각 녹내장open angle glaucoma은 전방각iridocorneal angle이 눌리지 않고 정상적인 형태를 유지한 채 발생하는 녹내장을 말하고, 녹내장의 드문 유형으로, 홍채가 압력으로 밀려 올라가서 홍채와 각막 사이의 각(angle)이 폐쇄되어 평상시에 체액을 눈 밖으로 배출하는 부분을 막아 버리게 되는 폐쇄각 녹내장closed angle glaucoma은 갑자기 상승한 후방압력 때문에 홍채가 각막쪽으로 이동하여 전방각이 눌려 발생하는 녹내장을 말합니다. 각막의 후면과 홍채의 전면이 이루는 각을 전방각이라 하며 이것이 눌리면 방수가 배출되는 통로가 막히게 되므로 안압이 빠르게 상승하게 됩니다.

녹내장의 발병의 주요 원인은 안압intraocular pressure 상승으로 인한 시신경의 손상입니다. 시신경 손상이 진행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안압 상승으로 시신경이 눌려 손상된다는 것과, 시신경으로의 혈류에 장애가 생겨 시신경의 손상이 진행된다는 두 가지 기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병을 일으키는 정확한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으며, 이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녹내장은 심한 시력 손상이 일어날 때까지 증상이 없지만, 다음과 같은 증상이 있을 경우 안과의 정밀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시력이 저하된 것 같다. 머리가 무겁거나 아프면서 안통이 함께 동반된다. 갑자기 오심 및 구토증세가 나타난다. 불빛을 볼 때 주변으로 달무리 현상이 나타난다. 시야가 좁아진 듯하다.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머리가 아프고 시야가 흐려진다.

안압은 녹내장의 진단과 치료에 중요한 지표가 되며 각막, 수정체, 유리체, 망막 질환의 수술 후 경과관찰에도 중요합니다. 안압이 너무 낮으면 안구 자체가 작아지는 안구 위축이 올 수 있고, 너무 높으면 시신경이 손상 받게 됩니다. 안압은 주로 방수에 의해 결정됩니다. 방수란 눈 안에서 만들어지는 물을 말하며, 눈의 형태를 유지하고 눈 내부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방수는 홍채 뒤쪽의 모양체라는 조직에서 매일 조금씩 생성되며, 생성된 양만큼 순환을 통해 눈 외부로 배출되는 흐름을 갖습니다. 방수가 너무 많이 생성되거나 흐름에 장애가 생겨 배출이 적어질 경우 눈 내부의 압력이 올라가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안압이 상승되어 녹내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녹내장의 가족력이 있거나, 평소 안압이 높은 경우, 또는 고혈압, 당뇨병, 심혈관 질환 및 근시를 가진 사람에게서 발병률이 높습니다.

40세 이상의 성인이나 녹내장의 가족력이 있는 경우, 안압이 높은 경우, 근시 등의 녹내장 위험인자를 지닌 사람은 1년에 한 번씩 녹내장 검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녹내장 치료의 목적은 시력의 회복이 아닌, 더 이상의 시신경의 손상을 막아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녹내장 안약은 안압을 낮추고 시력손상을 막아주므로 안약의 점안을 소흘히 하면 안 됩니다. 녹내장 치료로 레이저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으며, 약물치료와 병용할 수 있고 또는 단독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녹내장 환자가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정의 동요로 영향 받기 쉬운 병이므로 마음을 편하게 하고 흥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잠을 충분히 자며, 목이 졸리고 몸을 팽팽하게 압박하는 옷을 입지 말아야 합니다. 금연해야 합니다. 술을 피하고 다량의 물, 커피, 차 등을 한꺼번에 많이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은행나무 추출물은 시신경 혈류를 증가시켜 녹내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영화감상, TV시청, 독서를 피해야 합니다. 정상 안압 녹내장, 고혈압, 혈관연축의 소견이 모두 있는 환자는 고혈압약 사용시 내과-안과 의사의 협진이 필요합니다. 녹내장이 고혈압과 관련이 있으므로 혈압을 높이는 음식, 즉 짜거나 매운 음식, 과다한 물 섭취, 육식, 커피 등은 좋지 않습니다. 근육을 키우는 운동도 안압을 높일 수 있으나 유산소운동, 즉 조깅이나 자전거타기 등은 안압을 낮추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머리로 피가 몰리는 자세(물구나무서기) 혹은 복부 내장을 압박하는 복강 내의 압력인 복압intra-abdominal pressure이 올라가는 운동은 피해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공산당의 역사

 

 

조선공산당의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1921년까지 급진적이고 점진적인 민족운동이 전개되면서 사회주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회주의사상·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전파한 것은 일본유학생들이었습니다. 김약수를 중심으로 송봉우, 이여성, 신백우, 안광천, 강진, 김광수, 이진태 등이 1922년 2월 동우회의 이름으로 선언문 ‘전국 노동자제군에 격檄함’을 발표하고 동우회가 계급투쟁의 직접적인 행동단체임을 밝혔습니다. 동우회의 선언을 전후하여 국내에는 사회주의적 색채의 단체들이 태동하게 되었는데, 그 중 무산자동맹회, 북풍회, 화요회, 조선노동당, 서울청년회 좌파 등이 주요 좌익사상단체로 꼽힙니다.

1922년 3월 서울에서 조직된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는 1922년 1월 윤덕병尹德炳, 김한金翰, 신백우申伯雨, 원우관元友觀, 이혁로李爀魯, 이준태李準泰, 백광흠白光欽, 진병기陳秉基, 김달현金達鉉, 김태환金泰煥 등이 조직한 무산자동지회와 그 해 2월 장병천張炳天, 심상완沈相完, 이영李英, 신일용申日鎔 등이 조직한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가 3월에 통합한 단체입니다. 회원들은 언론기관과 청년단체, 노동운동단체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이었으며, 대부분이 동경 유학생 출신이어서 1920년 1월 25일에 이기동, 한윤동, 홍승로, 유진걸, 김약수, 박렬, 김낙준, 정태성, 송봉수, 박일병 등이 설립한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산자동맹회는 1925년 7월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과 함께 네 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듬해 4월 이들 세 단체와 함께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었습니다.

1924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북풍회北風會는 김약수金若水, 김종범金鍾範, 마명馬鳴, 정운해鄭雲海, 남정철南廷哲, 서정희徐廷禧, 박창한朴昌漢, 박세희朴世熙, 신용기辛容箕, 송봉우宋奉瑀, 이호李浩 외 13명이 주동이 되었는데 이는 재일 사회주의 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국내 지부로서 성립되었습니다. 북성회는 국내 단체를 계통적으로 지휘하기 위한 사회주의 단체 최고기관을 설치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에 따라 1923년 10월 서울에서 1백60여 명이 모여 건설사建設社를 조직했으며, 이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1924년 11월 북풍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북풍회는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목표 실현을 위해서는 한일 무산자 계급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한국 내의 사상 단체 중에서 가장 친일적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화요회와 반목하게 되는 주된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북풍회는 그 내부에서 주류와 비주류로 갈려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북풍회는 1925년 3월 임시총회를 열고 화요회와의 합동을 결의했으나, 두 단체 사이에는 합동 뒤부터 반목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결렬되었습니다.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된 화요회火曜會는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가 개칭되어 성립된 단체입니다. 신사상연구회는 1923년 7월 7일 서울 낙원동에서 홍명희洪命熹, 홍증식洪增植, 구연흠具然欽, 박일병朴一秉 등이 발기하고, 윤덕병尹德炳, 김병희金炳僖, 이재성李載誠, 이승복李昇馥, 조규수趙奎洙, 이준태李泰準, 강상조姜相照, 홍덕유洪悳裕, 원우관元友觀, 박돈서朴敦緖, 김찬金燦, 김홍작金鴻爵, 김재봉金在鳳, 권오설權五卨, 안기성安基成, 이봉수李鳳洙, 김경재金璟載 등이 신사상을 연구하려는 목적에서 조직했습니다. 일종의 학술연구단체로 강습과 토론회를 실시하고 이론서적 및 잡지를 간행할 것을 당면사업으로 내세웠지만, 신사상연구회가 코민테른Comintern의 한국 내 지부로 비밀리에 결성된 꼬르뷰로국高麗局의 단체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1924년 11월 19일 신사상연구회 간부회는 명칭을 화요회로 개칭하고 종전의 연구단체에서 행동단체로 전환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화요회라는 명칭은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유래했습니다. 화요회는 1925년 4월 27일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김찬, 김재봉, 윤덕병, 홍덕유 등 화요회 회원들이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김재봉은 제1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으며, 김찬은 화요회와 조선공산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무산자동맹회, 북풍회, 화요회, 조선노동당, 서울청년회 좌파 등이 경쟁적으로 자파세력의 확충에 힘쓰게 됨으로써 무원칙한 분파투쟁을 초래하는 폐단도 나타났는데, 민족주의자들이 이미 조직한 각종 기성단체에 침투하여, 내용상 같은 단체들을 장악하는 분할공작과 사상·노농勞農·청년·부녀·형평衡平 등의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는 경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1923년 6월 서울에 코민테른이 설치되어 꼬르뷰로국국내부高麗局國內部라 했습니다. 이 기관의 책임비서는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코르뷰로에서 한국내 공산당결성의 밀명을 받고 서울에 잠입한 김재봉으로, 그는 김약수, 유진희 등이 포함된 17명이 서울에서 결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습니다. 당 책임비서에는 김재봉이 임명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전에 해외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상해공산청년회 비서였던 박헌영朴憲永(1900~55년)이 임명되었습니다.

임원근, 김단야, 최창식 등과 함께 김만겸金萬謙의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한 박헌영은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공산주의 선전물을 번역하는 일에 열중했으며,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에 취임했습니다. 1921년 늦가을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키 위해 모스크바로 가, 다음해 1월 고려공산청년동맹 대표로 참가했습니다. 1922년 4월에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해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년 6월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했습니다. 1924년 1월 만기출옥한 직후 그 해 2월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김찬, 신철 등과 청주, 대구 등 전국 28개 도시를 순회하며 ‘청년의 사회적 지위’, ‘식민지청년운동’ 등의 주제로 강연했으며, 기관지 <신흥청년>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4월에는 허헌許憲이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습니다.

1925년에는 국내의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기 위하여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한 핵심분파로 박헌영이 속해 있던 화요회가 중심이 되어 4월 20일에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4월 15일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여 일본경찰의 관심을 흩어놓고, 4월 17일 김약수, 김재봉, 윤덕병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마침내 국내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박헌영은 1925년 4월 18일 자기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고 책임비서직을 맡아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나, 그 해 11월 30일 주세죽, 김재봉과 함께 공산당 조직 확대와 고려공산청년회원 모스크바 파견 훈련을 적극 진행하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그 계획이 탄로되어 일제 경찰에 일망타진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입니다. 그는 공판 도중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 다음해인 1928년 11월 국내에서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마침내 국내 공산주의운동은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들어갔고, 조선공산당을 1국 1당 원칙의 코민테른 한국지부로 승인했습니다. 1925년 12월 서울에서 제2차로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조직되었는데, 당 책임비서에는 강달영,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이 각각 선출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화요회의 요인이며 제1차 조선공산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은 사실상 제1차 당 및 공산청년회의 후속조직이었습니다. 강달영의 정치적 목표는 좌우연합의 국민적 당을 조직하여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강달영이 민족진영의 천도교 중진들과 접촉한 것은 곧 민족적 기반의 좌우연합당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1926년 6·10 만세운동을 통해 3·1 운동을 재현하려던 강달영의 계획이 거사 직전에 탄로되어 일망타진됨에 따라 좌우연합당은 실현되지 못하고 제2차 조선공산당은 궤멸되었습니다.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 합니다.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은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에 찬동한 좌익단체들이 민족진영에 협동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제2차 조선공산당 간부로서 검거를 모면했던 김철수는 과거 화요회와 대립 관계에 있던 동경의 좌경 유학생 단체인 일월회一月會 간부였던 안광천, 하필원 등과 함께 북풍회 계통의 ML파 공산당과 합세하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이를 세칭 ML파 공산당이라 합니다. 코민테른은 ML파 공산당에 대하여 당 조직 운영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내렸는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ML파 공산당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당 책임비서를 김철수, 안광천, 김준연, 김세연 등으로 자주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년 2월에 검거되고 말았습니다. 36명이 종로서에 검거되었습니다. ML파 공산당의 고려공산청년회도 당과 같은 이유로 책임비서로는 양명, 하필원, 김철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당과 함께 검거되었습니다. 이것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 합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 등이 서울 춘경원春景園에서 ML파 공산당의 정통성을 탈취하기 위해 ML파 공산당과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했지만,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1928년 4월과 6월에 일제 경찰에 일망타진되고 말았습여 당 재건을 기도하던 중 그 해 12월 정우회선언의 안광천 일파와 제휴하여 제3니다.

1928년 3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 때 검거되지 않은 안광천, 한위건 등이 서울 시립 한 북한의 북조선노동당으로 양립했으나 남조선노동당은 모두 숙청, 체포되었습니다. 미군정의 공산당 간부 체포령으로 박헌영은 월북하고, 조선공산당은 남한지역의 남조선노동당과 김일성이 창내에 숨어 있다가 서울계의 신파 및 상해파 등과 연합하여 제4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이 당의 책임비서로는 조선공산당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 출신의 차금봉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는 고광수가 선임되었습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학생과학연구회를 간판으로 내걸고 서울의 각 중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동맹휴학, 시위행진 등을 감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추적은 혹심하여 그 해 7월 차금봉을 포함하여 당 간부들이 거의 체포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대부분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실패했고, 1945년 8·15광복을 맞아, 8월 20일 서울에서 숨어 지내던 박헌영을 중심으로 여운형, 허헌, 김원봉, 한빈, 이주하 등이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습니다. 부활한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 및 남조선신민당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 결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왜 눈에 군살(익상편)이 생기는 걸까요?

 

 

익상편pterygium은 결막의 퇴행성 변화로 보통 눈의 안쪽 결막으로부터 시작해 혈관이 풍부한 섬유조직이 결막과 각막의 경계 부위를 넘어 각막의 중심부를 향해 삼각형 모양으로 자라나는 질환이입니다. ‘군살’, ‘군날개’, ‘백태’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유전적 요인과 야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 주로 발생한 것으로 보아 환경의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강한 햇빛(자외선), 먼지, 건조한 공기 등이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가장 주요한 원인은 자외선입니다. 눈의 코쪽 흰자위는 콧등에서 반사된 빛이 비추어지며 눈을 감을 때에 가장 늦게 감기는 부위이므로 다른 부위에 비해 늘 많은 자극을 받아 코쪽 흰자 위에서 익상편이 많이 발생합니다.

증상이 없어 미용적인 이유로 안과를 찾으나 충혈, 자극감, 시력 변화 등의 증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익상편이 각막 중심부로 많이 자람에 따라 점차 난시가 증가하며 시축을 침범할 경우 시력저하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매우 큰 병변에서는 바깥쪽으로의 눈 움직임의 제한이 나타날 수 있고 이런 눈 운동의 제한은 재발한 익상편이나 수술 후 흉터조직이 형성되었을 경우 더 잘 발생합니다.

치료방법은 심한 충혈, 이물감 및 여러 불편을 느끼는 증세에 따라 혈관 수축제나 인공눈물과 같은 윤활제 등을 사용합니다. 군살의 자라나는 속도가 빠른 경우에는 혈관수축제, 비스테로이드 항염제, 혹은 스테로이드제 등과 같이 염증 조절제를 사용하여 진행을 늦추는 치료를 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수술치료입니다.

익상편 수술은 입원하지 않고, 국소마취로 시행하며 약 30분 정도 소요됩니다. 수술 당시에는 통증이 없으나, 수술 후 1-2일 통증과 이물감, 눈물이 심하고 약 1달 동안 간헐적인 통원치료를 해야 합니다. 익상편 수술 자체는 간단하지만 수술 후 재발이 큰 문제가 되며, 출혈이 어느 정도 남게 됩니다. 결막 및 섬유혈관조직 자체를 모두 없앨 수 없으므로 재발률이 30-40%이며, 특히 환자의 나이가 젊을수록 재발률은 50% 이상으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항암제 투여, 결막자가이식, 양막이식 등의 방법들을 시행하지만, 100% 재발을 방지할 수는 없습니다. 재발 후에는 충혈이나 이물감이 더 심해질 수도 있으므로 젊은 환자들은 수술을 결정하기 전에 충분히 숙고해야 합니다.

예방으로는 주원인으로 알려진 햇빛, 먼지, 바람 등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변 같이 직사광선이 강한 곳에서는 선글라스를 착용해 되도록 자외선을 차단하는 것이 좋으며 황사철과 같이 먼지가 많고 바람이 부는 날은 보안경을 착용하고 외출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