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보이즈의 신화




보이즈의 신화는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의 전투기가 러시아 군인들의 포격을 맞고 크리메아에 추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라디오 기술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1941년 코니그라츠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았다.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한 그는 포격으로 추락한 후 의식을 잃고 눈 속에 며칠 묻히고 말았다.
독일 군인들이 그를 구출하려고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눈 속에 처박힌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구출작전을 포기했다.
보이즈는 냉동된 상태에서 거의 저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행운의 여신이 그를 살려주었다.
보이즈는 훗날 회상했다.


“그때가 1943년 겨울이었습니다.
JU-87기를 타고 정찰 중이었는데 러시아 군인이 쏜 대공포를 맞고 폭풍 속에 추락했습니다.
전투기는 곧 화염에 싸였고 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눈 속 깊이 파묻혔고 온 몸이 언 상태였어요.
난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타타르족이 나를 발견했습니다.”


타타르족은 그를 자신들의 캠프로 데려다가 그의 몸에 지방을 덮고, 펠트로 몸을 말아서 체온이 회복되도록 했다.
타타르족은 크리메아의 유목민으로 러시아와 독일 국경 부근에 거주하는 부족이다.
그는 훗날 회상했다.


“그들은 나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어요.
그래서 난 캠프에서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독일 군인들이 날 구출하려고 독일 국경 부근을 샅샅이 뒤졌다는데 눈 속에 처박힌 날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난 의식을 잃은 상태였어요.
의식을 회복한 건 12일이 지난 후였어요.
내가 기억하는 건 전투기가 추락할 때 ‘낙하산을 펴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걸 알았어요.
포격당하고 2초 내에 낙하산을 펴고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보통 때 나는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늘 몸이 자유로운 상태가 되게 했는데 유사시에 낙하산을 펴고 떨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어요.
난 지도를 휴대하지 않았는데 인근지역을 잘 안다고 오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식을 잃은 나를 타타르족이 발견하여 그들 캠프로 옮겼습니다. ...
두개골이 깨어지고, 턱뼈가 부러졌어요.
눈 속에 완전히 파묻힌 상태였습니다.
타타르족이 날 발견한 건 수일이 지난 후였지요.
내가 기억하는 목소리는 ‘보다 voda'였는데 그들의 말로 ‘물’이란 뜻입니다.
펠트로 된 천막과 코를 찌를 듯한 얼얼한 냄새가 나는 치즈 그리고 기름과 우유가 보였습니다.
그들은 지방덩어리를 내 몸에 덮어 몸이 훈훈해지도록 했으며, 펠트로 몸을 둘둘 말았습니다.
훈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펠트로 만 것인데 체온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 조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던 때가 늘 기억에 생생하며, 내게 늘 작용한답니다.
그 후 독일 군인들이 나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그때의 체험은 보이즈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놓았다.
예술가가 되게 한 것이며, 지방 펠트를 조각의 재료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보이즈는 조각의 재료로서 지방과 펠트가 타타르족이 자신에게 사용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이 스스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보이즈를 유명하게 만든 건 이 두 가지 재료였다.
그는 타타르족에게 평생 빚을 지고 말았다.


우리는 편견 없이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를 천재라고 미리 생각해서도 안 되지만 야바이꾼이나, 떠벌이로 단정해서도 안 된다.
평론가나 미술사학자들의 주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를 바라보는 건 위험한 방법이다.
그가 한 말에서 의식구조와 미학을 알아보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우리 스스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가 한 말로 충분하다.
그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자신이 처한 시대에 실존의 문제와 씨름한 진지한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며, 그가 어째서 예술이야말로 새 인생을 창조할 수 있는 자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술만이 인생의 궁극적 자원이라고 믿기까지 그에게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의 탐구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예술은 당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의 산물이므로 예술가가 처한 시대를 알면 이해 못할 예술가는 없다.


어려서부터 보이즈는 시, 철학, 문학, 과학, 대중전통 문화, 연금술과 점성술 등에 관한 책을 읽었다.
특히 낭만주의의 대가들 괴테, 쉴러, 노발리스 등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신비주의자 루돌프 스타이너의 신지학에 심취했다.
보이즈는 전통주의 예술의 개념을 버리고 철학, 문학, 과학, 종교의 합성으로서의 폭넓은 의미로서의 예술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었는데 예술의 만능을 믿었기 때문이며, 그에게 예술은 개념이라기보다는 신념에 가까웠고, 거의 종교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새 인생의 자원으로 창조성을 꼽았으며, 창조성으로부터 존재의 상황을 확대해나갔는데 창조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창조”라는 말은 그의 미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개념이다.


보이즈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많은 사람이 비평했는데 창조의 개념을 이해하면 그의 말을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미쟁이 이모 씨가 화가이고, 목수 서모 씨가 조각가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본 청소부가 웬만한 시인보다도 훌륭한 시인이었다고 말했는데 시를 한 줄도 쓰지 않은 청소부, 어쩜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청소부를 가리켜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한 데서 그가 시인을 시의 범주가 아닌 일반적 의미의 예술의 범주 안에서 이해했음을 본다.
일반적 의미의 예술이란 물론 창조가 가능한 모든 영역을 뜻하는 것이다.
보이즈는 예술을 기존의 관념을 넘어서 창조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미쟁이 이모씨의 벽돌 쌓는 기술과 목수 서모씨의 나무 다루는 솜씨는 예술가의 작품 만드는 기술과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보이즈는 창조성 여부에 따라서 예술가의 자격을 판단하려고 했다.
그는 예술가의 90% 가량이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했는데 기회주의자 예술가들에 비한다면 미쟁이, 목수, 또는 청소부의 창조성이 뛰어난 예술을 칭찬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될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그의 주장은 개인의 잠재적 창조성의 개발이 시급함을 의미한 것이지 말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서의 예술가라는 뜻은 아니다.
마드리드의 청소부가 시인이라고 말할 때, 감자를 재배하는 농부가 예술가라고 말할 때, 그는 청소부와 농부의 창의력을 지적한 것이며, 반면 대부분 기회주의자 예술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보이즈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것조차 의식 있는 행위라면 예술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만큼 창조성이 중요하다는 걸 역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창조성이 있다고 믿었으며, 문제는 창조성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교육시키느냐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예술가들이 주장하는 자신들의 특수계급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특수계급이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창조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술가이기 때문에 특수계급이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창조성과 자유는 동일한 의미였다.
자유는 그에게 첫째, 개인이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행동이었고, 둘째, 주변 사람들 행동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의미했다.
그는 조화로운 관계를 더욱 강조했다.
개인과 대중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가치 있는 사회적 관계로서 보이즈는 개인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대중에게 소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는 늘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병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자유가 창조이고, 창조가 곧 자유였다.
그는 창조성을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생각, 느낌, 그리고 의지였다.
이 세 가지는 그의 조각이론이 되었다. 그에게 창조성이란 이 세 가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첨가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가 창조성을 사람에게 한정된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동물과 식물에게도 적용한 것인데 창조성을 에너지로 이해한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신비주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를 현대판 무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그의 폭넓은 창조성의 개념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에게 정신은 에너지였으며, 에너지 혹은 정신을 늘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논리적으로 유물론을 비난하게 된 것이다.


보이즈는 정신적 진화를 강조하면서 관념적 유물론을 비판했고, 대신 현상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사람들이 지혜로워지기를 바랐으며, 이런 일이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전통으로부터 유산 받은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전통이 유물론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교육방법은 혁신적이었다.
그는 선생은 다 안다는 듯이 가르치기만 하고 학생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그지 앉아서 선생의 가르침을 듣는 전통주의 방법을 배척하면서 선생과 학생이 함께 토론하고 탐구하는 새로운 교육을 주장했다.
이는 그에게 조각을 가르친 에발트 마타레Ewald Matare(1887-1965)가 제안해서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물의를 일으킨 방법이기도 한데 보이즈는 마타레의 혁신적인 교육방법을 받아들였다.
보이즈는 197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소설가 하인리흐 뵐Heinrich Boll(1917-85)과 함께 창조성과 상호징계 연구를 위한 자유 국제대학Free International University for Creativity and Interdisciplinary Research을 창설하고 공동명의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창조성이 사회를 바꾸고 진화시키는 열쇠라고 주장하면서 창조성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예술가라고 주장했다.
보이즈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예술을 행할 수 있으며, 새 사회 조직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창조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창조성이 국가의 수입이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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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요제프 보이즈는 1965년 11월 26일 뒤셀도르프의 슈멜라 화랑에서 <어떻게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How to Explain Paintings to a Dead Hare>를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는 1974년 뉴욕에서 소개한 <늑대 Coyote>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관람자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화랑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밖에서 스크린을 통해 그의 연기를 관람할 수밖에 없었고, 더러는 창문을 통해 직접 본 사람도 있었다.
그는 머리에 꿀과 금색 잎사귀를 바르고,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다가는 벽에 걸린 칠판으로 가서 무엇인가를 쓰면서 아기처럼 가슴에 안은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에 관해 설명했다.
훗날 왜 산토끼에게 그림에 관해 설명했느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산토끼는 출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
내게 산토끼는 화신의 상징입니다.
산토끼는 사람만이 정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안으로 파고드는 것과 파서 건축하는 일입니다.
산토끼는 땅속에서 스스로를 구체화하며 이것이 중요합니다.
머리에 꿀을 바른 건 내가 생각을 갖고 명료하게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은 생각할 줄 알고, 꿀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지요.
꿀은 의심의 여지없는 생생한 물질이라서 이런 방법으로 나는 생각의 극적 본질에 다시 활력을 고취시켰던 것이랍니다.
사람의 생각은 생동하며, 비록 동일한 과정을 통해 죽음의 첨단까지 지적으로 만들지만 많은 것이 죽은 상태에 있으며, 정치학과 교육학 안에서 죽은 것과 다름없는 본질을 표현하고 있답니다.
금과 꿀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머리의 변형을 지적하며, 또 두뇌와 사고의 개념, 의식과 그림을 설명하는 데 필요로 하는 모든 수준의 것들을 지적합니다.
나는 뼈와 전자부품으로 만든 라디오를 펠트를 사용해 만든 걸상 아래에 설치했습니다.
나는 산토끼를 안은 채 이 그림에서 저 그림으로 옮겨가면서 절뚝거리는 걸음을 했는데 구두 바닥에 부착한 넓적한 자석 쇠붙이가 화랑의 돌바닥을 긁어 쇳소리가 나게 했습니다.”


쇳소리가 화랑을 진동했겠군요.


“나는 산토끼에게 무언으로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라디오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를 내며 파장을 내보냈기 때문에 쇳소리가 유일하게 화랑의 침묵을 깨뜨렸습니다.
이 장면이 아마 사람들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작용했을 줄 알아요.
이것은 사람들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설명하는 것에 대한 문제, 특히 예술과 창조적 작업에 관한 설명의 문제, 또는 신비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문제의 형상을 설명하는 문제를 아는 데 설명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무엇인가를 동물에게 설명하는 아이디어는 세계의 비밀에 관한 감각과 상상력을 일으키는 것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대로 죽은 동물조차도 사람의 고집스러운 이성적인 상황보다는 직관의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해한다’, 혹은 ‘납득한다’ 하는 말에 내재된 문제와 많은 표준들이 이성적 분석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이것은 이 같은 행위에 반응하는 것들의 뿌리가 되었으며, 왜 나의 기교가 특정한 지식이나, 대중 일부에 대한 특별한 반응대신 인간 힘의 영역 안에서 에너지의 극점을 찾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랍니다.
나는 창조적 영역의 복잡함이 밝게 드러나도록 시도했습니다.”


보이즈는 1966년 7월 7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위한 침투 동종, 가장 위대한 현대 작곡가는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아이입니다 Infiltration Homogen for Grand Piano, the Greatest Contemporary Composer is the Thalidomide Child>를 소개했다.
탈리도마이드는 수면제이다.
펠트로 씌운 그랜드 피아노는 현재 파리 퐁피두센터에 소장되어있다.
왜 피아노를 펠트로 씌웠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피아노 소리를 펠트 속에 가두기 위해서였어요.
우리가 알기로 피아노는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잠재력을 항상 가지고 있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경우 소리가 없는 것이 대신 가능한 일이며, 피아노의 운명은 침묵이 됩니다.
‘침투 동종’이라는 말은 펠트의 속성과 구조를 설명합니다.
펠트로 씌웠기 때문에 피아노는 소리를 걸러내는 능력과 더불어서 소리의 동종 저장이 되는 것이랍니다.
피아노는 사람의 운명과 한 쌍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 개의 적십자 마크를 피아노에 부착한 건 우리가 침묵하고 다음의 단계를 행동으로 취하지 않을 경우 긴급함과 진화 안에서 우리가 위협받게 된다는 걸 지적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이런 오브제는 토론을 위한 자극으로 이해해야지 미학의 물질로 받아들이면 곤란해요.”


작품의 기본적 테마가 선생의 작품에 의례 나타나는 집합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표현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선생의 말은 전쟁 중 부상당한 사실을 부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부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관점과 정신적 바탕을 강조하기 위해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부상은 회복과 치유로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고통은 개인의 능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상황과도 같은 것이며, 완전한 실존을 더욱 광범위하고 절대적인 영역으로 운반하는 것이기도 하답니다.”


보이즈는 1966년 10월 14일과 15일에 코펜하겐의 화랑 101에서 <유라시아, 시베리안 심포니 34악장 Eurasia, 34th Movement of the Siberian Symphony>을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는 복잡하게 구성되었지만 개념적으로 사고의 중요한 요소들이 동원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처음에 소개한 테마 ‘십자가의 분할 Division of the Cross’이 그렇다.


“난 무릎을 꿇은 채 마룻바닥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십자가를 칠판이 있는 곳을 향해 밀고 가다가는 일어서서 칠판에 십자가를 그리고는 반쯤 지운 뒤 아래에 유라시아 말을 적었습니다.
뭐라고 썼는지 지금 기억나지 않는데 직관으로 쓴 글이었어요.
나는 책략적으로 길고 가는 검정색 막대기에 묶은 다리와 귀가 뻣뻣해진 죽은 산토끼를 밀고 갔습니다.
산토끼를 가슴에 안고 칠판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산토끼 다리에 하얀 가루를 뿌렸으며, 온도계를 입에 넣었고, 튜브를 불어 넘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칠판 옆에 선 채 산토끼의 귀를 흔들면서 쇳조각을 부착한 구둣발로 마룻바닥을 마구 두들겨 소리를 냈어요.”


이 퍼포먼스의 아이디어는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산토끼가 나와 함께 주연을 맡은 것이 아이디어였습니다.
내가 산토끼의 귀를 기다란 막대기로 세운 이유는 <지방 의자>와 <지방 코너>에 나타난 각도를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마지막으로 내가 칠판에 적은 건 두 개의 특별한 온도였는데 하나는 펠트의 온도 32도였고, 다른 하나는 지방의 온도 21도였어요.”


직관이 작품에서 중심적 구조를 이루었던 것 같군요.


“직관은 생각의 성격과 양을 정복하는 이성 최고의 형태로 지각적 감각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이성적 분석 그 이상으로 나아가도록 해줍니다.”


보이즈는 1966년 12월 15일 예술가들의 음악과 연기의 도움을 받아 <만레사 Manresa>를 발표했다.
이 작품의 테마는 직관이 이성 최고의 형태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무로 된 십자가 절반에 펠트를 씌우고, 전기장치, 로즈메리 페인트와 잡동사니를 넣은 나무상자를 사용했다.


“난 십자가 절반에 ‘엘리먼트 1 Element I’이라고 적고 나무상자에는 ‘엘리먼트 2’라고 적었습니다.
십자가를 절반만 사용한 건 현대인의 분열된 자아를 상징하기 위해서였는데 정신적인 존재가 아닌 이성적인 존재를 뜻하며, 나무상자는 직관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퍼포먼스 마지막에 그는 테엽을 감은 새를 공중에 날렸는데 자유를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만레사는 스페인 동네 이름으로 예수회의 창시자 로욜라의 성자 이그나시우스가 저서 <정신적 훈련 Spiritual Exercises>을 집필한 곳이다.
설치가 자서전적 기독교의 명상과 몸을 정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나는 개인이 고통으로부터 재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병든 사회도 치유되기를 바랐습니다.
직관이 이성의 최고 형태임을 말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
<만레사>는 <어떻게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와 같은 주제의 작품입니다.
관람자에게 직관과 함께 하는 지성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걸 말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사용한 지방과 꿀은 창조적 에너지에 비유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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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즈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





지금까지 보이즈의 사상에 관해 살펴보았으며 이제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 관해 알아보도록 한다.


루돌프 스타이너의 영향

보이즈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루돌프 스타이너Rudolf Steiner(1861-1925)이다.
그는 런던으로부터 신지학을 받아들여 독일 신지학 소사이어티Theosophical Society를 창설했는데 신지학자들과 의견충돌이 잦자 협회를 떠났으며, 1912년에 따로 인류학지혜 소사이어티Anthroposophical Society를 창설했다.
스타이너는 사람에게 물질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정신적 지각능력이 있는데 이 능력은 현대 서양문화에 의해 한정된 물리학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이즈에게 나타난 이런 사고는 스타이너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보이즈는 정신적 지각능력으로 농업, 예술, 경제, 의학, 그리고 교육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스타이너는 그리스도가 인간 창조성에 살아있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사고 또한 보이즈에게 영향을 끼쳤다.
보이즈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건 정신적 지각능력을 근거로 한 말이었다.


보이즈는 스타이너의 장미십자주의Rosicrucianism 사상에 심취했는데 장미십자주의란 1484년 크리스천 로젠크레우즈Rossenkreuz가 독일에서 창설했다고 전해지는 연금 마법의 기술을 말한다.
스타이너는 현대인에게 심원한 지식보다는 장미십자주의의 신지학 또는 신비주의가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와 과학 모두가 편협하게 체계화됨에 따라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데 실패한 것을 예술이 대신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사고는 그대로 보이즈에게서 전수되었다.
보이즈는 기독교 사상을 도입해서 변형시켜서 원래의 모습을 유지시키려고 했다.
그가 기독교 주제들 피에타, 십자가처형, 슬픔에 빠진 남자 등을 주제로 선택해 작품을 제작한 건 기독교 원형을 회복하려는 사고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십자가의 경우 예를 들면 그는 일반적 상징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표현했다.
그는 예술을 정신적, 사회적으로 재활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가 자신의 조각이론이 “예술의 개념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말한 건 예술이 정신적, 사회적으로 재활의 기능을 지녔음을 의미했다.
1960년대 독일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이해한다면 보이즈의 이러한 혁명적 예술 개념이 그의 시대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통행할 수 없도록 동독과 서독에 장벽이 세워진 건 1961년이었고, 동독과 서독은 철학, 종교, 경제, 그리고 정부가 각각 달랐다.
보이즈는 십자가를 상징물로 사용하여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어 보다 건강한 사회로 구성해야 함을 역설했다.


1950년대 말부터 그의 드로잉에서 우중충한 붉은 빛이 감도는 브라운색 십자가가 수 없이 나타났는데 이런 상징은 향후 예술가로서 그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는 이 십자가를 “브라운 십자가 Braunkreuz”로 불렀다.
1960년대 초부터 브라운 십자가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좀더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이즈 브라운”이라고 불렀는데 보이즈 브라운은 지방 그리고 펠트와 함께 인생과 예술이 연결된 보이즈의 자필적인 매체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적십자Red Cross는 상처가 났거나 병든 사람을 긴급하게 치료하는 국제적 기구의 상징인데 반해 보이즈의 브라운 십자가는 기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적십자를 창설한 사람은 헨리 두난트Henry Dunant로 그는 예술가였다.
그는 피아노를 불에 태우는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보이즈는 펠트로 피아노를 뒤집어씌워서 형태만 나타나도록 했는데 이 작품은 두난트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그는 두난트로부터 예술의 기능에 관해 영향을 받았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장미, 혹은 장미빛을 그리스도의 피로 상징했는데 보이즈는 장미빛을 브라운색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복잡한 변형으로 브라운색은 나치의 대량학살을 상기하게 했으며, 히틀러의 급습 군대를 사람들이 “브라운 셔츠 Braunhemd”라는 별명으로 불렀고, 참담했던 당시를 독일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브라운 과거 Braun Vergangenheit”라고 말한다.
브라운 십자가는 기독교 상징 외에도 나치주의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한 군국주의의 상징이 어울려진 요소였다.
그는 기독교가 변질되어 유물론과 같아졌다고 믿었으므로 기독교에 신지학을 보태 기독교의 본질을 복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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