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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堯舜)의 왕도사상
인의(仁義)로 백성을 다스린다

<아주 오래된 오늘>(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인애(仁愛)로써 거느리매 백성들이 거기에 따라 했고, 걸과 주가 천하를 잔학과 횡포로써 거느리매 백성들이 거기에 따라 했다.
그들이 내리는 명령이 그들 자신이 실제 즐겨하는 것과 상반되는 것이면 민중들은 따르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에게 선이 있고 난 뒤에 남에게도 선이 있기를 추구하며, 자기에게 악이 없고 난 뒤에 남에게 나무랄 수 있나니, 제 몸에 간직한 것이 용서가 아니고서 능히 남을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림은 그 집안을 다스림에 있다.

堯舜1 率天下以仁 而民 從之 桀紂2 率天下以暴 而民 從之 其所令 反其所好 而民 不從 是故 君子 有諸己而後 求諸人3 無諸己而後 非諸人 所藏乎身 不恕 而能喩諸人者 未之有也 故 治國 在齊其家 ●『대학』

주> 1 요(堯)와 순(舜)은 동양의 이상적인 전설적인 두 임금.
2 걸(桀)은 하(夏)나라 말기의 왕으로 폭군. 주(紂)는 은(殷) 말기 왕으로 잔학했던 왕.
3 有諸己而後 求諸人에서 제(諸)는 말 잘할 ‘저’로 발음하며 내가 잘한 후에 남이 잘하기를 구한다는 말이다.

어느 날 요임금이 변장을 하고 민정을 살피다가 만난 한 백성에게 “왕이 정치를 잘해서 태평성대를 누리니 왕의 은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백성이 대답하여 “해 뜨면 일어나고 해지면 쉬며, 우물 파서 물마시고 밭 갈아 밥 먹으니 제왕의 은덕이야 내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했다.
이는 요의 정치가 너무도 원만하여 민중들이 의식하지 못할 만큼 태평무사 했다는 이야기이다.

요임금에게는 단주(丹朱)라는 왕자가 있었지만 불초(不肖)하여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임금은 초야에 묻혀 있는 대효(大孝) 순(舜)의 소문을 들었다.
신하들은 입을 모아 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순을 천거했다.

그는 소경의 아들입니다.
그의 부친은 장님일 뿐 아니라 고약한 고집쟁이로 매우 불순한 자입니다.
그의 어미는 계모로서 간사하며 그의 이복동생 상(象)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순은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와 화목하려고 애쓰면서 일가를 잘 다스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덕망이 높고 과실이 없이 잘 살아가고 있사온데 그의 덕에 대한 감화는 그의 일가뿐 아니라 온 나라에 미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되어 감히 그를 천거토록 진언합니다.

임금이 답하기를 “하지만 비록 그런 인물이라 하더라도 좀 더 그를 관찰한 후에 참으로 그가 능히 그럴 만한 인물이라고 판단되면 기꺼이 양위하기를 서슴지 않겠으며 그를 짐에게 가까이 불러들이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짐에게 두 딸이 있는데 그 두 딸을 한꺼번에 그의 처로 삼게 하려 한다.”
그리하여 임금은 두 딸에게 각기 비옥한 땅을 골라서 나눠주고 순으로 하여금 두 딸을 맞아 살도록 하면서 임금을 돕는 높은 지위에 봉했다.
순이 그 임무를 맡은 다음, 날이 갈수록 눈에 뜨일 만큼 만사에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고, 순의 덕이 천하 만방에 점점 널리 퍼져나가, 임금은 안심하고 순에게 제위를 맡기게 되었다.

순은 원래 초야에 묻혀서 질그릇을 굽고, 밭을 갈며 사는 현자로서 예지가 깊고 빛나며 밝을 뿐 아니라 온유하고 신실하여 깊은 덕을 지녔다고 한다.
요가 섭정(攝政) 28년 만에 순에게 선위(禪位)하고 죽자, 순은 제위를 왕자 단주에게 전하기 위하여 멀리 피신했다.
그러나 천하의 제후들이 단주를 따르지 않고 순을 찾아와 조근(朝覲)하자 순은 이것이 천명임을 깨닫고 비로소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순은 우(禹)에게 치수(治水)를 맡기고 요의 왕업을 이어받아 훌륭히 발전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남쪽 바람의 훈훈함이여!
좋이 우리 백성들의 성냄을 풀어주리.
남쪽 바람이 때맞춰 불어옴이여!
좋이 우리 백성들의 살림을 풍부하게 하리로다.

순임금 재위 9년에 홍수가 나서 우가 치수의 대명을 받고 집을 떠날 때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3년 후 자기 집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집에서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나 그대로 지나갔다.
그 후 3년 뒤 두 번째 집을 지날 때에는 자기 아들이 연을 날리고 있었으나 그대로 지났다.
3년 후 세 번째 지나갈 때에는 안에서 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대로 지나쳤다고 한다.
우는 이처럼 천자의 명령에 충성했으므로 천하를 얻게 되었다.

순임금에게는 상균(商均)이라는 왕자가 있으나 그 역시 불초한지라 순은 치수에 공이 있는 우에게 선위한 것이다.
왕도(王道)사상이란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 등의 역대 왕들의 인의를 중심으로 한 지도이념이다.
이것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정치이념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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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효(大孝) 순(舜)
모든 도덕은 효도에서 시작된다 

<아주 오래된 오늘>(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동양의 왕도사상은 그 근본을 인의에 두었고, 인의 근본은 효도와 백성을 사랑함에 두었다.
요순설화를 보면 요임금은 후계자를 구할 때 당시 대효로 알려진 순을 찾아서 후계자로 삼고 천하를 맡겼다.

온 천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장차 자기에게 돌아오려고 하는데도 이것을 마치 초개같이 여긴 것은 오직 순임금뿐이었다.
사람이 어버이에게 기쁨을 사지 못하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고, 어버이에게 순종치 않으면 자식 노릇을 할 수 없다.
순임금은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 아버지 고수가 기뻐하기에 이르자 온 천하도 이에 감화되어 부자간에 도덕이 정해졌다.
세상에서 이것을 대효(大孝)라고 이른다.
●『맹자』, 「이루 상(離婁 上)」편

맹자는 순임금을 대효라고 했다. 순은 천하를 얻더라도 부모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면 초개같이 버릴 것이라고 했다.
요임금이 순을 찾았을 때는 효도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시집보내어 부마로 삼고 두 부인을 거느림을 본 후에 천하를 맡겼다.

도응: 순이 천자로 있고 고요가 형관으로 있을 때 순의 아버지 고수가 사람을 죽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맹자: 그를 집행할 따름이다.

도응: 그렇다면 순은 금하지 않았겠습니까?

맹자: 어떻게 순이 금할 수 있겠는가, 이어받은 법이 있는데.

도응: 그러면 순은 어떻게 했을까요?

맹자: 순은 천하 내던지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몰래 부친을 업고 달아나 해변에 살면서 죽을 때까지 흔연히 즐거워하면서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

맹자의 대답은 순이 이 세상의 부귀영화보다도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중요하게 여기므로, 범행자는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체포하고 자기는 효를 위하여 천자의 지위를 버리고 몰래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효도할 것이라는 것이다.

만장이 맹자에게 “『시경』에 아내를 얻을 때 반드시 부모에게 고해야 한다고 했는데 순은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장가를 들었다고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맹자는 “고하면 장가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남녀가 같이 사는 것이 대륜(大倫)이라. 만약에 고한다면 인간의 대륜을 폐하고 부모를 원망하게 되므로 고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삼 심을 때 어찌하나. 가로세로 이랑 내지
장가들 때 어찌하나. 부모에게 아뢰야지
아뢰고서 얻은 아내 어찌 이리 버려두나.
●『시경』, 「제풍 남산」 편

만장: 부모가 순에게 창고의 지붕을 손보게 하고 사다리를 치우고 그의 아버지는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우물을 파게하고 그가 나오기 전에 그대로 묻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복동생인 상은 ‘형을 묻어버리기로 꾀한 것은 다 나의 공적이다.
소와 말과 곡창은 부모에게 주고 방패와 창, 거문고와 활은 내가 가지고 두 형수는 내 잠자리를 돌보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상이 순의 집에 가보니 순은 정자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상은 놀랐으나 뻔뻔스럽게 “형님 생각이 간절하여 왔습니다”라고 하며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자 순은 “마침 잘 왔구나. 너는 나를 위해 이 백관들을 좀 다스려다오”라고 말했다 하니 사실입니까?
순은 상이 행한 일을 몰랐을까요?

맹자: 왜 몰랐겠느냐.
순은 상이 근심하면 자기도 근심하고 상이 기뻐하면 자기도 기뻐한 것이다.

만장: 그렇다면 순은 거짓으로 기뻐한 것입니까?

맹자: 아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정(鄭)나라 재상 자산(子産)에게 물고기를 선사하자, 자산은 연못지기를 시켜 연못에 넣어 기르라고 했다.
연못지기는 이것을 삶아 먹고 돌아와서 “처음 놓아주니 어릿어릿하더니 조금 있다가 생기를 차려 꼬리를 치면서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하자 자산은 ‘제 곳으로 갔구나! 제 곳으로 갔어!’하고 말하였다.

연못지기는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가 자산을 지혜롭다 하는가? 내가 삶아서 먹어버렸는데, 제 곳으로 갔구나, 제 곳으로 갔어라고 말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군자를 속이는 데 도리에 맞는 말로는 할 수 있으나 도리에 맞지 않는 말로는 하지 못한다.
상이 형을 경애하는 도리로 거짓말을 했으므로 순은 정말 믿고 기뻐한 것이지 어찌 거짓으로 했겠는가.

순은 아버지와 이복동생 상의 계략으로 두 번 죽을 뻔했다.
첫 번째로 창고에 불을 질렀을 때 순은 미리 알아차리고 삿갓 두 개를 준비했다가 몰래 뛰어내렸다.
두 번째로 우물을 파서 묻으려 했을 때에는 옆에 미리 구멍을 뚫어놓았다가 살아 나왔다.

『효경』에 “부모를 사랑하는 자, 감히 남을 미워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을 얕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기독교에서도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했다.
십계명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바울은 “자녀들아, 네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 6장 1-3절)라고 했다.

동양의 효제(孝悌)사상은 부모에 효도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도이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모든 도덕의 근원은 효도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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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재상 이윤(伊尹)
의와 도가 아니면 천하를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오늘>(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공손추(公孫丑)가 맹자에게 물었다.
“이윤은 부정한 일을 그냥 보고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 왕 태갑(太甲)을 동궁으로 쫓아냈는데 백성들이 크게 좋아했습니다. 태갑이 현명해지자 다시 돌아오게 했는데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이 신하가 되었을 때 그 임금이 현명하지 못하다면 본래 쫓아내기 마련입니까?”

그러자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이윤과 같은 생각으로라면 괜찮지만, 이윤과 같은 생각이 없다면 찬탈이다.”
●『맹자』, 「만장 상(萬章 上)」편

이윤은 은(殷)나라의 밭 가는 농부였다.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면 천하를 녹(祿)으로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았고, 의와 도가 아니면 한 오라기 풀도 주고받지 않았다.
탕(湯)왕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그를 초빙하니 그제서야 마음을 바꾸었다.

‘내가 밭 갈며 요순(堯舜)의 도를 즐기는 것이 어찌 요임금이나 순임금과 같이 만드는 것만 하겠는가.
하늘이 이 백성을 내시어 먼저 아는 자를 시켜서 뒤늦게 아는 자를 알게 하시고, 먼저 깨달은 자를 시켜서 뒤늦게 깨닫는 자를 일깨워주셨다.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 먼저 깨달은 자이다.
나는 도를 가지고 이 백성들을 일깨워주겠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이윤은 이러한 사명감에서 탕왕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때 하(夏)의 걸(桀)왕이 포악무도하여 민심은 도탄에 빠지고 정국은 문란하여 혼란에 빠졌다.

이윤은 탕왕을 도와서 대혁명을 수행했다. 탕왕이 죽은 후, 이윤은 선왕의 부탁으로 태자 태갑을 도와서 재상이 되었다.
태갑은 즉위하자 불의한 행동을 자행함으로써 나쁜 습성으로 되돌아갔다.
이윤이 아무리 간하여도 왕은 듣지 않았다.
이윤은 “왕이 깨닫지 못한다면 신(臣)은 선왕의 명을 받아 뒤에 오는 왕에게 잘못이 없도록 부탁을 받았으니 도에 어긋난 행실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며, 곧 동궁이라는 궁궐을 새로 건축하여 왕을 거기에 옮겼다.
그곳은 선왕의 묘와 가까운 곳이다.
이는 언제나 부왕의 능묘를 눈앞에 두고 보게 함으로써 선왕의 교훈을 생각하여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 탕왕의 능 근처에 동궁을 짓고 꾸준히 간하여 매사에 미혹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왕이 왕궁에 있으면 아첨하는 많은 무리가 왕의 행실에 잘못이 있어도 오히려 그것을 칭찬했다.
그래서 이윤은 미혹한 왕을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왕은 별궁에서 3년 동안 외롭게 지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도 이윤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윤이 말하기를, 왕이 여전히 변치 않으시므로 불의는 습성이 되었으니 나는 의를 행치 않는 자는 따를 수 없다.
동(桐) 땅에 궁을 세우고 선왕을 가까이 모시어 교훈을 받음으로써 평생토록 미혹되지 않게 하리라.
왕이 동궁(桐宮)으로 가서 부왕의 묘(廟)에 복상(服喪)하고 계셨으니 마침내 진실 된 덕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王未克變 伊尹曰 玆乃不義 習與性成 予弗狎于弗順 營于桐宮 密邇先王其訓 無碑世迷 王緖桐宮居憂 克終允德
●『서경』, 「태갑(太甲)」1편

주> 1 『서경』에는 「이훈(伊訓)」, 「태갑(太甲)」, 「함유일덕(咸有一德)」 세 편이 있는데, 이 중에서 이윤이 왕 태갑에게 올린 글은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태갑은 원래 현명했으므로 매일 부왕의 묘 곁에서 조용히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탕왕이 나라를 세울 때의 노고를 생각하며 행실을 삼가고 덕을 닦게 되었다.
이에 이윤은 대단히 기뻐하여 다시 왕을 영접하고 복위시켰다.

왕이 겸허한 태도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이르시되,
소자는 덕에 밝지 못하여 스스로 불초에 이르러 욕심으로 법도를 어기며 방탕하여 예를 폐하고 허물을 몸에 부르니
하늘이 내리신 재앙은 오히려 피하려니와 스스로 지은 재앙에서 가히 도망하지 못하니
과거 스승의 훈계를 등져 그 처음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대의 덕을 힘입어 그 마침을 도모하나이다.

이윤이 공손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이르되, 그 몸을 닦으며 미쁜 덕이 아래와 화합하는 밝은 임금인 것입니다.
선왕이 곤궁한 백성들을 자식같이 사랑하셨으므로 백성이 그 명령을 복종하여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이웃나라까지도 우리 임금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님이 오시면 벌을 받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서경』, 「태갑」편

이윤이 임금에게 정사를 다시 맡긴 후에 은퇴하면서 덕으로 훈계를 하였다.
슬프도다!
하늘은 믿을 수 없고 명은 일정치 않으니 그 덕이 떳떳하면 자리를 보전하고, 그 덕이 떳떳하지 못하면 구주(九州)가 이로써 망할 것입니다. ●『서경』, 「함유일덕」편

번지가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니라”라고 답했다.
다시 번지가 “지(知)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이니라. 옛날에 탕 임금이 백성 가운데서 이윤을 천거하여 재상을 삼으니 불인(不仁)한 자가 멀어졌다”고 하며 이윤의 사람됨을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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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왕의 여민동락(與民同樂)
백성과 더불어 즐거워한다 

<아주 오래된 오늘>(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맹자가 양(梁)나라 혜왕(惠王)을 찾았다.
왕이 “노인이 천 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우리 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맹자는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利)를 말씀하시는고,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맹자는 문왕을 찬양한 시경의 시를 혜왕에게 소개했다.

영대를 짓기 시작하여 땅을 재고 푯말을 세웠더니
백성들이 스스로 몰려와 며칠 안 되어 다 이뤘네.
서둘지 말라고 이르셨건만 백성들은 스스로 몰려들었네.
왕께서 동산을 거니시면 암사슴이 엎드려 잠든 모습
사슴은 살이 쪄서 윤이 흐르고 백조는 학과 같이 희기도 하다.
왕께서 못가를 거니시면 오! 물고기 가득 뛰노는구나.

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炚 庶民子來
王在靈捧 餠鹿攸伏 餠鹿濯濯
白鳥蓮蓮 王在靈沼 於咐魚躍
●『시경』, 「대아(大雅)」편

문왕이 궁에 공원을 만들려고 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몰려와서 공원도 만들고 연못도 팠다.
왕은 너무 서둘지 말라고 했으나 짧은 시일에 완공했다.
정원 이름을 영대(靈臺)라 하고 연못 이름을 ‘영소(靈沼)’라고 불렀다.
동산에서는 사슴이 잠을 자고 학이 날고, 연못에서는 고기가 뛰놀았다.
맹자는 문왕이 이 동산을 개방하여 백성들과 함께 즐겼다며 혜왕에게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제안했다.

맹자는 “백성이 함께 망하기를 원한다면, 비록 정원과 연못에 새와 짐승, 물고기가 뛰논다 한들 혼자서 어찌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혜왕은 못 들은 척하며 맹자를 그의 궁전 안에 있는 화려한 동산으로 인도하고 연못가를 거닐면서 자랑스럽게 “선생도 이런 것을 좋아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맹자는 위의 시를 인용하면서 “어진 덕이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이런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어진 덕이 없는 사람은 비록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즐길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맹자는 옛 성왕 중에서도 특히 문왕을 사모했다.
문왕이 어진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면서 훌륭하게 공원을 꾸미고 백성들과 즐겼다는 것을 읊은 시가 『시경』, 「대아」편에 있는 ‘영대(靈臺)’이다.

영대는 사방 칠십 리에 이르는 규모로, 임금의 거대한 동산인 동시에 온 백성이 같이 즐기는 개방된 국립공원이었다.
문왕은 이 공원을 자기만을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식처럼 사랑하는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워할 수 있는 여민동락의 영대와 영소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는 맹자가 혜왕에게 민본주의 사상을 설득시키기 위한 예였다.

백성들이 걸(桀)왕을 해에 비유하여

이놈의 해는 언제 없어진담.
우리도 차라리 너와 함께 망하는도다.
●『서경』, 「탕서」편

이 시는 하(夏)나라 백성들이 걸(桀)왕의 학정을 원망한 시이다.
걸 왕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하늘이 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해가 없어져야 내가 망할 것이다”라고 하여, 해가 건재하고 있는 한 자기도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백성들은 그 학정을 원망하여 “이 해는 어느 때 망할 것인가. 우리도 너와 함께 망하리라” 하고 극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이렇게까지 원망을 받는대서야 아무리 화려한 궁전과 정원이 있다 하더라도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결국 걸 왕은 민심을 잃고 하늘의 버림을 받았다.
천명을 받은 은(殷)의 탕 임금에게 정복되어 중국 최초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났던 것이다.

맹자는 왕에게 민본주의를 강조하고 통치자는 모든 즐거움을 백성들과 함께하라고 충고했다.
그는 왕에게 풍자 섞인 충고를 하면서 문왕은 여민동락했기 때문에 성천자(聖天子)라 불리게 되었고, 걸 왕은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나라를 잃고 폭군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고 했다.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여민동락은 문왕의 정치철학인 민본주의를 뜻한다.
백성을 사랑할 줄 모르는 왕은 이미 왕의 자격이 없는 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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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의 역성혁명(易姓革命)
하늘의 인심은 백성이 보고 듣는 것에 달렸다 

<아주 오래된 오늘>(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제 선왕: 탕 임금이 걸을 내쫓고, 무왕이 주(紂)를 정벌했다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맹자: 옛 기록에 있습니다.

제 선왕: 인도(仁道)를 해치는 자를 도적이라 하고, 의리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고 합니다.
잔적(殘賊)을 일삼는 자는 필부(匹夫)라고 합니다.
필부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맹자』, 「양혜왕」편

맹자는 『서경』에서 역성혁명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여기에서 특히 인의를 해치는 자는 왕이라 할지라도 이미 왕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주(紂)는 곧 필부라고 규정했다.

수(受, 주왕을 말함)가 신하 억만을 두나 마음이 억만이고, 나는 신하 삼천을 두나 마음은 하나이다.
상(商)나라 죄가 천하에 가득한지라 하늘이 명하여 베이라 하시니 내가 하늘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그 죄가 같으리라.
수가 억조 오랑캐를 두었으나 마음이 떠나고 덕이 떠났고 나는 신하 열 사람을 두니 마음이 같으며 덕이 같으니, 비록 그는 지극히 친한 것 같은 사람을 두나 아첨배들이며 어진 사람만 같지 못함이라.
하늘의 인심이 우리 백성의 봄으로부터 하시며, 하늘의 들으심이 우리 백성의 들으심으로부터 하시니, 백성의 책망함이 나 한 사람에게 있으니 이제 나는 반드시 가리라. ●『서경』, 「태서」편

이 글은 주(周)나라 무왕이 선왕인 문왕(文王)의 뜻을 이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포악무도한 주를 토벌하기 위하여 내린 조서이다.
옛날 중국은 중앙에는 왕인 천자(天子)가 있고 지방은 제후국(諸侯國)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후들은 신하로서 천자에 복종했다.
그러나 종주국인 은(殷)나라의 주왕은 폭군으로 주색에 빠져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하고 왕에게 간하는 충신들은 모두 죽였다.

주나라는 제후국이었으나 문왕이 덕으로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복종했다.
문왕이 죽자 즉위한 무왕은 주를 정벌할 사명감을 느끼고 주를 토벌하지 않으면 자기도 같은 죄를 지어 하늘의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하늘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반드시 백성이 바라는 바에 따를 것이다.
그는 백성 전체를 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며 반드시 하늘의 도움으로 승리할 것을 믿었다.
이와 같은 명분을 내걸고 주를 토벌해서 멸망시켰다.

무왕의 교훈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망한다’는 원리이다.
주왕은 폭정을 했으므로 민심이 흩어져서 신하가 억만이라도 민심이 억만이고, 자기는 신하가 삼천이나 마음은 하나라는 것이다.
하늘이 감시하는 바는 백성이 보는 바와 같고, 하늘의 듣는 바는 백성이 듣는 바와 일치한다.
즉 민심이 천심이라는 것이다.
무왕은 하늘을 대신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대사를 단행했다.
부왕인 문왕은 덕이 많아 천하가 그를 따랐으나 은인자중하여 주왕이 바른 정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죽었다.
무왕은 더 참는 것은 하늘에 죄를 짓는 일이요, 부왕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태공망(太公望)을 군사로 삼아 혁명을 성취했다.

그러나 하늘을 대신해서 불의를 친다는 천명사상은 역사상 많은 폭군들에 의해서 악용되었다.
태평양 전쟁 시 일본은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친다는 구실로 그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했다.
6·25 전쟁 때 공산군의 남침은 남한 백성을 해방시킨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다.
5·16 군사 쿠데타, 12·12 사건 등으로 이뤄진 군사정권 또한 정치적 안정을 핑계 대며 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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