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코로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 낭만주의 풍경화의 선구자 장-밥티스트 카미유 코로(1796-1875)는 19세기 전반의 가장 뛰어난 풍경화가로서 거의 모든 풍경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6살 때 상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풍경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코로는 젊은 풍경화가 아실 에트나 미샬롱(1796-1822) 밑에서 수학하다가 미샬롱이 타계한 해에 고전주의자 빅토르 베르탱(1755-1842)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수학했다.
1825년 가을에 로마로 가서 그곳에서 보낸 3년이 그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로마와 그 주변 시골의 풍경을 그리면서 1826년 8월에 한 친구에게 말했다.
“내 생애에 진실로 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 풍경을 그리는 것이네. 이 확고한 결심 때문에 다른 어떤 일에도 심취하지 못할 것 같네. 난 결혼도 하지 못할 것 같네.”
그는 실제로 독신으로 살면서 전 생애를 회화에 바쳤다.
1834년 5~10월에 두 번째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 볼테라·피렌체·피사·제노바·베네치아 및 이탈리아 호수 지방의 경치를 주로 그렸다.
1843년 여름 마지막으로 잠깐 동안 다시 이탈리아를 방문했지만, 두 번째 시기에 스케치를 많이 그려두었기 때문에 남은 생애에 그것들로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코로는 “네가 보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꼼꼼하게 그려라”라는 마샬롱의 말을 평생 지침으로 받아들였다.
야외에서 직접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화실에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하면서 코로는 그때까지 형성된 풍경화의 고전적 기법에 새로운 개인적인 시정을 불어넣었다.
그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지만 밀레와 쿠르베와 같은 방법으로 농부나 노동을 이상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 사이의 논쟁 밖에 있었다.
코로의 사실주의적 단순성과 효용성을 높이 평가한 들라크루아는 1847년 코로를 방문한 소감을 일기에 적었다.
코로는 진정한 예술가이다. 예술가의 장점을 알려면 그의 집을 방문해야 한다.
뮤지엄에서 본 그의 작품들은 하찮게 여겨졌지만 그의 집에 있는 작품들을 보고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세례>103는 순박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다.
그가 그린 나무들은 훌륭하다.
내가 오르페우스에 관해 말하자 그는 좀 더 진전시키라고 충고해주었다. …
그는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야 작품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데 동감하지 않았다.
티치아노, 라파엘로, 루벤스 등은 쉽게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
코로는 한 주제만 파고든다.
생각이 떠오르면 작업하며 덧붙이는데, 이는 좋은 방법이다.
코로 작품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파악하기 힘든데, 이는 위작의 수가 수천 점에 이를 뿐 아니라 진작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53년 동안 유화, 데생, 판화를 3,221점 제작했고 10여 첩의 화첩과 자필 원고를 남겼다.
친구와 제자들이 그린 복제화도 100여 점이 된다.
코로의 특징이라면 훗날 모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대로 동일한 모티브, 동일한 장소, 동일한 주제를 수없이 그렸다는 점이다.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말년에는 몇몇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탐구했다.
그는 풍경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많은 작품이 인본주의적이고 철학적이며 서정적이고, 초상화의 경우 인물의 표현방식이 독특하며, 종교적·신화적 주제들로 구성된 풍경화에서 그의 재능이 발견된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는 자연에서 이끌어낸 미학적 성찰과 더불어 인간 중심의 시각과 이를 자연 속에 통합시킨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코로는 17세기 북유럽 유파와 영국의 근대 회화, 특히 컨스터블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835년부터 종교와 신화에서 주제를 구하여 역사적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삶에서 종교의 비중을 크게 둔 것은 1870년 이후였고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던 젊은 시절 1835년에만 해도 그는 고전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화가로서 종교적 테마를 풍경화에서 중요하게 다루었을 뿐이다.
그는 성서의 일화를 주제로 한 <황야의 하갈>104을 살롱전에 출품했는데, 아들 이스마엘을 구해낼 희망을 상실한 하갈의 고뇌를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루벤스, 게르치노, 로랭의 영향이 발견된다.
2년 후 그는 <황야의 하갈>과 단짝을 이룰 <황야의 성 히에로니무스>를 살롱전에 출품했는데, 이 작품 역시 대가들의 영향 아래 그린 것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티치아노, 푸생의 기법이 응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그의 최초의 역사적 풍경화들로 극적인 사건들의 의미와 사실주의로 사람들에게 놀라운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코로는 경관이 좋은 곳들을 찾아 프랑스를 두루 여행하면서 빛에 의한 나무와 바위의 변화를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오베르뉴, 프로방스, 리무쟁, 브르타뉴, 노르망디에 즐겨 갔으며, 퐁텐블로 숲을 정기적으로 가서 그렸는데, 이는 테오도르 루소보다 10년, 밀레보다는 25년이나 앞선 일이다.
활기가 넘치면서도 황량한 장소를 좋아한 그는 습작하기 적당한 브르타뉴의 풍경을 아주 좋아했다.
코로는 야외에서 동일한 모티브를 각도와 시각을 바꿔가며 연속적으로 그리면서 많은 작업을 했지만 진정한 창조는 그의 아틀리에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아틀리에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대형 풍경화를 다듬으며 전에 야외에서 보고 그린 습작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들을 이용했다.
기억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그는 추억 연작의 필요성을 느꼈다.
풍경을 마주하고 느꼈던 감정을 기억을 더듬어 표현해야 했으므로 그의 주제는 더 이상 문학적·역사적·종교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추억을 전달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가 진정 감동을 받았다면 그 감정의 진솔함은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다”고 했다.
1850년부터는 은빛 안개에 휩싸인 서정적인 풍경뿐 아니라 <아침, 요정들의 춤>105에서와 같이 상상의 인물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코로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파리에 있을 때는 정기적으로 음악회에 갔다.
그의 데생 수첩에는 관람 도중 신속하게 크로키한 가수와 오페라 무대 장식 습작으로 가득하다.
그는 로시니의 《오델로》, 구노의 《파우스트》, 앙브루아즈의 《햄릿》 등을 관람한 후 무대 뒤로 가서 배우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스케치하곤 했다.
그는 하이든, 베버, 모차르트, 베토벤, 클루크, 오베르 등을 좋아했으며 1847년에 작곡된 오베르의 오페라는 그로 하여금 <아이데>106를 그리게 했다.
오페라와 직접 관련된 그의 작품들로 1864년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와 이듬해 그린 <햄릿과 무덤 파는 사람>이 있고, 1860년 이후 그린 풍경화 대부분은 음악적 추상으로 넘친다.
보들레르가 그의 작품에서 신비로운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음악적 요소들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나타난 화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후기 작품에서 음악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현대적 세계를 결코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풍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시대를 초월하는 농부이거나 신화와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1845년까지만 해도 평론가와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에 그리 호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평론가들 특히 보들레르, 고티에, 샹플뢰리 등이 자연에 대한 그의 순수하고 진지한 태도와 사실주의에 기초하여 그림을 시처럼 그린다는 것을 알았다.
1850년대에 이르자 컬렉터와 화상들이 그의 작품을 다투어 수집하기 시작했다.
보들레르가 1845년의 살롱전에 관한 평론에서 “코로는 현대적 양식의 풍경화를 개척하고 있다”고 평했다. 코로는 1846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 시기에 쿠르베와 밀레는 주변의 일상적인 장면들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는데, 코로는 두 사람의 방법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살롱전에 계속 출품했으며 그의 작품은 고가에 팔렸다.
1855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회화 부문 1등상을 수상했으며 나폴레옹 3세가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1867년 레지옹 도뇌르의 임원으로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