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녀 마르가리타>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벨라스케스는 1651년 여름 마드리드로 돌아가 펠리페 4세의 환대를 받았다.
펠리페 4세는 1652년 왕의 방들을 정리하고 왕의 여행을 준비하는 직책인 궁정의 시종에 그를 임명했다.

펠리페 4세의 첫 번째 아내는 프랑스 앙리 4세의 딸 엘리자베스(스페인어로는 이사벨라)202였다.
1644년 그녀가 죽은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 3세의 딸 마리아나와 결혼했다.
벨라스케스가 돌아오자 펠리페 4세는 그에게 왕비 마리아나와 그녀의 자녀들의 새로운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벨라스케스는 왕비의 초상화203와 왕의 맏딸인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204에서 유사한 구도법을 사용했으며, 많은 화실에서 이 작품들의 복제가 이루어졌다.
왕가의 여인들은 커다란 머리장식을 하고 버팀살대로 장식한 치마를 입고 있어 마치 인형같이 묘사되어 있다.
마소도 1644~45년 <어린 왕녀 마리아 테레사>205를 그렸는데 시기적으로는 벨라스케스보다 앞서지만 구성에서는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마소가 이런 구성을 먼저 시도했다고 하더라도 색채를 밝게 사용한 벨라스케스의 작품과는 인물의 개성과 생동감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벨라스케스의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201와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206는 구도와 양식이 서로 비슷하고 그의 작품들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꼽히는데, 오른손을 의자에 올려놓은 것은 벨라스케스의 회화적 의도로 어리지만 왕녀의 의젓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델을 표현하는 데 있어 매우 섬세하게 정면에 왕가의 위엄을 드러내면서도 그 이면에는 모델들의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화가 지망생이던 드가와 마네는 루브르의 스페인 전시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다양한 양식을 익혔는데, 벨라스케스의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를 모사하면서 스페인 화풍의 장점을 받아들였다.207, 208
르누아르가 1864년에 그린 <로마인 라코>209도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고, 장-자크 에네도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앙리에테 제르맹>210을 그렸다.
휘슬러의 <회색과 초록색의 조화: 미스 시셀리 알렉산더>211도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미국화가 윌리엄 메릿 체이스도 1899년에 <어린 왕녀, 벨라스케스의 유물>212를 그려 벨라스케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이들의 작품과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를 나란히 놓고 보면 200년 전에 그린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명암의 대비와 은은하면서도 밝은 색상에 의해 더욱 생동감 있으며 붓질이 자유롭고 활기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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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의 선두자 자크-루이 다비드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로코코가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1780년 이후, 특히 다비드가 등장한 후였다.
다비드는 <안티오코스의 병의 원인을 밝혀낸 에라시스트라토스>77로 1774년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스승과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다비드는 고대 미술에 탐닉했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화가 개빈 해밀턴을 포함한 새로운 고전 부흥의 선구자들과 교류했다. 해밀턴은 화가이면서 고고학자였고 또한 유명한 화상이었다.
해밀턴은 역사화를 그릴 때 대부분 호메로스에서 주제를 얻었으며, 고대 미술뿐 아니라 푸생의 영향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복제 판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동시대 화가들과 다비드를 포함한 젊은 세대에게 영향을 미쳐 신고전주의 양식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영국보다는 유럽에서 더 유명했다.
그는 독일의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의 견해에 공감했는데, 멩스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 그리고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드레스덴 궁정 화가였던 멩스의 아버지 이스마엘 멩스(1764년에 사망)는 멩스를 훌륭한 화가로 만들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시켰으며 코레조와 라파엘로의 작품을 주로 모사하게 했다.
멩스는 빙켈만의 친구이며 그로부터 이론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작품에 적용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고대 그리스는 모든 예술 창조의 정점으로 받아들여졌다.
『회화에 있어 미와 취미에 대한 사상』에서 멩스는, 그것은 사람들이 라파엘로의 표현과 코레조의 우아미, 그리고 티치아노의 색채를 하나의 새로운 전체로 결합시킬 수 있다는 절충주의적 견해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적었다.


자연은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세 위대한 거장은 동일한 사실을 공유했다.
그들 모두 자신의 몫이 모든 예술을 포함하는 것인 양 진중한 노력으로 자신의 분야를 이루어낸 것이다.
라파엘로는 구성과 소묘에서 자신이 발견한 표현을 선택했다.
코레조는 확실한 형상과 특히 명암법에 있는 우아미를 얻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티치아노는 색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은 진리를 추구했다.


다비드는 1783년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그가 모티브로 삼은 것은 자기희생·의무에 대한 헌신·정직·금욕 등 시민이 지켜야 할 미덕이었다.
이런 미덕은 역사적 사실로서 낭만적으로 해석되어 고대 로마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비드의 작품 중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80,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호위병들>82, <소크라테의 죽음>81은 한 시대의 감정을 완벽하게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호라티우스 삼형제는 기원전 7세기의 로마 왕국 사람들이다.
로마 왕국이 이웃의 알바 왕국과 영토 문제로 분쟁하던 중 두 왕국은 각각 세 용사를 뽑아 싸우게 해 분쟁을 해소하기로 합의했다.
호라티우스 삼형제 중 하나는 알바의 쿠리아티 가의 딸 사비나와 결혼한 몸이었고 알바의 삼형제 중 하나는 호라티우스 가의 딸 카밀라와 결혼한 몸이었다.
어느 편이 이겨도 두 집안에는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호라티우스 삼형제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카밀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큰오빠를 저주했고 그는 누이동생마저 칼로 쳐 죽였다.
장남은 살인죄로 기소되었는데 아버지가 변호해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주제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비극은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호위병들>은 1787년의 살롱전에 소개하도록 왕이 주문한 것으로 1789년에 완성되었다.
작품의 원제목은 <브루투스, 제1 집정관, 로마의 자유에 대항해 타르퀴니우스의 음모에 가담한 두 아들을 죽게 하고 귀가하다;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아들들의 시신을 가져온 호위병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브루투스는 로마의 마지막 전제군주 타르퀴니우스에 맞서 로마를 구하는 데 공헌한 인물로, 그보다 500년 후 율리우스 시저를 살해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사건은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브루투스의 동료 콜라티누스의 정숙한 아내 루크레티아를 강간하는 데서 시작된다.
정조를 잃은 루크레티아가 남편과 브루투스 눈앞에서 자살하자 브루투스는 그녀의 몸에 꽂힌 칼을 뽑아 그녀의 피에 대한 복수와 더불어 부패한 독재자를 몰아내겠다고 맹세한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추방되고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기원전 508년에 세워진 로마 공화국의 최초의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그런데 브루투스의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가 타르퀴니우스의 복귀에 가담하자 부르투스는 두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의 행위가 가장 칭찬받을 만하거나 아니면 가장 비난받을 만하다면서 부르투스는 신과 같은 존재인 동시에 야수와도 같은 존재라고 했다.
이 작품은 1789년 8월 말에 완성되어 살롱전에 소개된 후 문제의 작품이 되었다.
이듬해 11월 19일 볼테르의 작품 『브루투스』가 공연되자 수많은 갈채를 받았는데, 배우들은 다비드 작품의 구성에 따라 그룹을 지어 연기했다.


1785년 살롱전에서 인기를 한몸에 받은 후부터 다비드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그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기원전 399년 신성불경죄와 아테네 청년들을 선동한 죄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진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최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과 철학적 대화를 했다.
이런 소크라테스는 계몽주의자들에게 가장 모범이 되는 위인으로 받들어졌다.


이 세 작품으로 다비드는 프랑스의 새로운 상징이자 프랑스 국경 너머까지 널리 확산된 신고전주의의 선두가 되었다.
영국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 경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시스티나 예배당과 바티칸 궁전을 장식한 르네상스 대가들의 그림과 나란히 평가하면서 이 작품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살롱전을 관전한 영국 언론인 존 보이델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뛰어난 걸작이라고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보이델은 열흘 동안이나 이 작품을 감상한 결과 고대 그리스 전성기였던 페리클레스시대의 소크라테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한 작품으로 샅샅이 살펴봐도 결함이라고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적었다.
당시 프랑스 대사로 주재하던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역시 살롱전을 관전한 후 다비드의 소크라테스가 가장 탁월한 작품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주목할 점은 신고전주의는 과거의 어떤 고전주의보다도 더욱 엄격하고 냉철하며 계획적이었고, 종래의 어떤 고전주의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형식을 압축하여 직선적인 것과 구성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을 추구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전형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고고학적 고전주의”라고도 불리는 신고전주의는 여태까지의 예술경향들에 비해 더욱 직접적으로 그리스·로마 예술의 고전 체험에 의존했다.
고대에 대한 학문적 흥미가 먼저 생겨 그것이 새로운 사조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취미의 변화가 있었으며 또 이런 취미의 변화 역시 삶의 가치의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난 것이다.
18세기 예술가들이 고대 예술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그들이 너무 유연하고 유동적이 되어버린 회화기술이나 색채와 음조의 지나친 유희적 자극을 맛보고 난 후 좀 더 엄숙하고 진지하며 객관적인 예술적 표현 방식에 끌린 것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다비드에 의해 추구된 신고전주의는 윤리적인 문제 내지는 단순성과 진실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순수하고 명확하며 단순한 선, 법칙성과 규율, 조화와 평온, 빙켈만이 말한 이른바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 이런 것들에 대한 동경은 무엇보다도 로코코의 불성실성과 지나칠 정도의 세련성, 공허한 기교와 화려함에 대한 반항인데, 사람들은 로코코를 타락하고 부패한 것, 병적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공식 화가가 되었고 이들은 협력하여 이전의 아카데미를 폐지하고 대신 앵스트튀 나시오날(국립 학사원)의 일부분으로서 아카데미 데 보자르(미술학교)를 창설하게 된다. 다비드를 지도자로 많은 예술가들이 1793년부터 아카데미의 해산을 요구했고 아카데미를 대신한 새로운 조직이 여러 차례 결성되었지만, 결국 아카데미는 1816년에 아카데미 데 보자르로 재출발하게 된 것이다.
취향에까지 미쳤던 나폴레옹의 영향력은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강력했다.


나폴레옹의 영향은 여성의 의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품위와 위엄을 갖추는 제국주의적 요소가 여성의 의상에 나타난 것이다.
나폴레옹 제1 제정기(1804-14)의 앙피르 양식(독일에서는 비더마이어 양식, 영국에서는 섭정 양식이라고도 부른다)에서 실내장식은 약간 단조로웠으며 무게와 힘을 강조했다.
색채는 회색을 띤 주황과 암적색, 어두운 노랑이었으며, 가죽·호두나무·청동 장식을 많이 사용했다.
이는 한가지의 중요한 차이점을 제외하고 루이-필리프시대의 중산층의 실내장식을 예고했다.
중요한 차이점은 나폴레옹이 안락한 의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퇴위 후 부르봉 왕가의 왕정복고시대는 좌석을 푹신하게 하기 위한 소재를 처음으로 사용한 시기이다.
이는 실내장식의 발전에서 19세기 최대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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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제리코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낭만주의 화가들은 근대의 삶을 모티브로 다루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는 1819년 실재 사건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재현하는 가운데 고전주의 규범을 극렬히 부정했으며 당시 정부의 무능력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메두사 호의 뗏목>91으로 고전주의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시체의 색조, 표현적 사실주의, 격렬한 붓질, 헛된 영웅주의, 이런 것들을 통해 다비드식 규범과 영원한 고귀함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1816년 7월 망명귀족 출신인 위그 뒤루아 드 쇼마레가 지휘하던 왕실 해군 소속의 메두사 호가 서아프리카로 향하던 중 블랑 곶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침몰했다.
성급히 만든 뗏목에 몸을 실은 승객과 승무원 150명은 끔찍한 고통을 견디며 13일 동안 대서양을 표류하다가 열다섯 명만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코레아르와 사비니라는 두 명의 생존자가 난파 당시의 상황을 글로 발표했으며 제리코는 그들의 증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메두사 호의 뗏목>을 마치 실재를 보고 그린 듯 정교하게 묘사했다.
제리코는 생존자들과 인터뷰했으며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뗏목을 만들었고 시체보관소에 가서 시체들을 습작한 후 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본래의 생각은 불안과 공포로 거의 광란의 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바다의 위협에 저항하는 모습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현재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두 장의 밑그림을 포함해서 여러 장의 밑그림을 보면 그가 어떻게 구성을 달리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구성에는 삼각구도 속에 왼쪽으로부터 파도가 크게 일어나 부푼 돛을 덮치려고 하면서 대립적인 힘이 나타나 있다.
그는 들라크루아를 시체의 모델로 하여 왼쪽 하단에 두 구의 시체를 그려 넣으면서 그 중 한 구가 서서히 바다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했다.
바람은 뗏목을 왼쪽으로 밀어붙이는 반면 난파당한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절망 속에서 구조선이 오기를 기다리며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


<메두사 호의 뗏목>은 1819년 살롱전에서 금메달을 받고 소개되었는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군주제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작품을 가차 없이 비난했지만 위대한 역사적 작품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정치적 현안이었던 이 배의 선장인 위그 뒤루아 드 쇼마레에 대한 재판은 군주제 전체에 대한 재판이 되어버렸다.
제리코는 동시대의 역사에서 착안한 극적인 사실을 가장하여 표류하는 인류의 이미지를 관람자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의 죽음은 영적인 모든 것이 배제된 채 냉혹한 현실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제리코가 1812년 <말을 탄 M.D. 씨의 초상>으로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2년 후에 <돌격명령을 하는 황제 근위대 장교>92라고 제목을 바꾼 이야기는 이 장르가 이미 낭만적 변모를 거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작품은 입상했지만 기마초상의 전통적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고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말이 관람자에게서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미완성의 작품이며 구성이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외형적인 형태의 완전성에는 관심이 없었고 극적인 색과 자유로운 제스처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제리코는 일찍이 석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8세기 말 독일에서 고안된 석판화 기법이 프랑스에 도입된 것은 1816년경부터였다.
그러나 런던에서는 1800년부터 석판화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국에 머물던 제리코는 1820년과 1825년 사이 이 기술을 익혀 낭만주의 미술의 잠재적 성공에 이용했다.93
제리코 외에도 낭만주의의 주요 예술가들이 이 기술을 익혀 삽화집을 내는 등 석판화를 널리 보급했다.
데생의 생생함과 명암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석판화는 예술적 표현의 한 방법으로 재빨리 자리 잡게 되었다.
들라크루아도 이 기술을 이용하여 <파우스트>와 <햄릿>을 포함한 여러 점의 삽화를 그렸다.
도미에와 같은 캐리커처 화가와 데생 화가들에 의해서 석판화의 품격은 한층 고양되었다.


멋쟁이 신사에 뛰어난 기수로서 극적 성격이 강한 제리코의 회화는 화려하고 정력적이며 다소 병적인 그의 개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카를 베르네의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아카데미 화가 괴랭의 문하에서 고전적 조형법과 구성법을 익혔다.
그는 루브르 뮤지엄에서 티치아노·루벤스·푸생, 그리고 고대 예술가들을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기교를 익혔으며 특히 루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816~17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바로크 작품에 매료되었다.
제리코는 1824년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서른세 살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 미술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괴랭의 또 다른 제자 들라크루아는 제리코로부터 영향을 받고 거기에서 자기 예술의 중요한 출발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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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취향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들라크루아는 어떤 의미에서 ‘세기병’을 앓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심한 우울증에 괴로워 했으며, 공허와 목표 상실의 감정을 가졌고, 생에 대한 권태와 싸웠다.
그는 우울증 환자였으며 늘 불만에 차 있었고 미완성의 사람이었다. 그가 삶의 태도로서의 낭만주의에는 반대했지만 회화 경향으로서의 낭만주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낭만주의의 광범위한 모티브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자신이 낭만주의의 대가라는 데 불쾌해 했다.
그는 제자를 교육하는 일에 흥미가 없었고 한 번도 일반인이 참관할 수 있게 아틀리에를 연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몇 사람의 조수를 썼을 뿐 제자로는 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영주 같은 취향이 그로 하여금 일체의 자기폭로주의나 현학주의를 싫어하게 했으며 대중을 경멸했다.


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취향은 1820년과 1830년 사이 수많은 책을 읽은 데서 이루어졌다.
그는 스탕달을 만났고, 1826년부터 노디에의 문학 동아리에 나가 빅토르 위고와 친분을 맺었다.
이런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그의 문학적 취향이 형성되었고 그의 일기와 편지들에 문학적 내용이 가득 차게 되었다.
그는 호라티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오비디우스·베르길리우스 등을 숭배했고 고전 외에도 근대와 당대 작가들 단테·셰익스피어·타소·몽테뉴·볼테르·디드로·괴테·월터 스콧·바이런 등의 작품을 읽었다.


1822년은 들라크루아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는데, 처음으로 살롱전에 출품한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96가 받아들여졌다.
왕립 살롱전은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받아들인 후 점차 대담해지는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최초의 걸작이었다.
그는 살롱전에 다음과 같은 긴 원제를 달았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플레기아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 도시 디스의 성벽을 둘러싼 호수를 건넌다.
죄인들은 배에 달라붙고, 또 그 위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쓴다.
단테는 그들 가운데 피렌체 사람이 몇 명 있음을 발견한다.”


낭만주의자들이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추종한 문학이 단테와 밀턴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크롬웰』 서문에 적었다.


현대 작가들 가운데 단테와 밀턴 둘만이 셰익스피어만큼 위대하다. …
그들은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우리의 문학이 극적인 색깔을 갖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작품에는 기괴한 것과 숭고한 것이 뒤섞여 있다.


들라크루아의 1858년 9월 3일 일기는 위고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호메로스와 유사한 모든 이들을 숭배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숭배한다.
우리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프랑스 현대 작가들(내가 말하는 것은 라신이나 볼테르 같은 이들이다)은 위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종류의 숭고함, 그리고 천박한 세부들을 시적으로 만들어 상상력을 매혹하는 멋진 그림으로 만드는 그 놀라운 천진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포르뱅 백작은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뤽상부르 뮤지엄에 소장하기 위해 2천 프랑을 주고 구입했다.
들라크루아는 빚쟁이들에 쫓길 때 이 그림을 그렸는데, 속히 화가로 성공하는 길만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석 달도 채 안 걸려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표류하는 인류의 처절한 이미지를 구현한 이 그림은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참조하여 그린 것이다.
저주받은 인간들 몸 위의 순수한 색의 물방울은 루벤스에게서 받은 영향이다.
제리코의 그림에는 색들이 명암에 압도되어 있지만 들라크루아의 것에는 색 자체가 표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루벤스는 풍부한 색채와 양감, 관능적 형상으로 인간의 육체를 찬미한 반면, 들라크루아는 루벤스의 기법을 사용하여 고통 받는 지옥의 장면을 묘사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는 이 작품을 가리켜서 “벌 받는 루벤스”라고 했는데, 작품의 성격을 짧은 말로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루벤스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꼽고 그의 기법을 연구했지만, 그의 미학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루벤스를 존경하면서도 전체적 구성과 세부적 균형에서 미숙하다고 보았으며 약간 과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854년 7월 29일자 일기에 풍경화가로서 루벤스의 선천적인 자질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인물의 특질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인물과의 관계 설정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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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코로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 낭만주의 풍경화의 선구자 장-밥티스트 카미유 코로(1796-1875)는 19세기 전반의 가장 뛰어난 풍경화가로서 거의 모든 풍경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6살 때 상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풍경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코로는 젊은 풍경화가 아실 에트나 미샬롱(1796-1822) 밑에서 수학하다가 미샬롱이 타계한 해에 고전주의자 빅토르 베르탱(1755-1842)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수학했다.
1825년 가을에 로마로 가서 그곳에서 보낸 3년이 그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로마와 그 주변 시골의 풍경을 그리면서 1826년 8월에 한 친구에게 말했다.

“내 생애에 진실로 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 풍경을 그리는 것이네. 이 확고한 결심 때문에 다른 어떤 일에도 심취하지 못할 것 같네. 난 결혼도 하지 못할 것 같네.”

그는 실제로 독신으로 살면서 전 생애를 회화에 바쳤다.
1834년 5~10월에 두 번째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 볼테라·피렌체·피사·제노바·베네치아 및 이탈리아 호수 지방의 경치를 주로 그렸다.
1843년 여름 마지막으로 잠깐 동안 다시 이탈리아를 방문했지만, 두 번째 시기에 스케치를 많이 그려두었기 때문에 남은 생애에 그것들로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코로는 “네가 보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꼼꼼하게 그려라”라는 마샬롱의 말을 평생 지침으로 받아들였다.
야외에서 직접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화실에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하면서 코로는 그때까지 형성된 풍경화의 고전적 기법에 새로운 개인적인 시정을 불어넣었다.
그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지만 밀레와 쿠르베와 같은 방법으로 농부나 노동을 이상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 사이의 논쟁 밖에 있었다.


코로의 사실주의적 단순성과 효용성을 높이 평가한 들라크루아는 1847년 코로를 방문한 소감을 일기에 적었다.


코로는 진정한 예술가이다. 예술가의 장점을 알려면 그의 집을 방문해야 한다.
뮤지엄에서 본 그의 작품들은 하찮게 여겨졌지만 그의 집에 있는 작품들을 보고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세례>103는 순박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다.
그가 그린 나무들은 훌륭하다.
내가 오르페우스에 관해 말하자 그는 좀 더 진전시키라고 충고해주었다. …
그는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야 작품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데 동감하지 않았다.
티치아노, 라파엘로, 루벤스 등은 쉽게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
코로는 한 주제만 파고든다.
생각이 떠오르면 작업하며 덧붙이는데, 이는 좋은 방법이다.


코로 작품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파악하기 힘든데, 이는 위작의 수가 수천 점에 이를 뿐 아니라 진작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53년 동안 유화, 데생, 판화를 3,221점 제작했고 10여 첩의 화첩과 자필 원고를 남겼다.
친구와 제자들이 그린 복제화도 100여 점이 된다.
코로의 특징이라면 훗날 모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대로 동일한 모티브, 동일한 장소, 동일한 주제를 수없이 그렸다는 점이다.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말년에는 몇몇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탐구했다.
그는 풍경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많은 작품이 인본주의적이고 철학적이며 서정적이고, 초상화의 경우 인물의 표현방식이 독특하며, 종교적·신화적 주제들로 구성된 풍경화에서 그의 재능이 발견된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는 자연에서 이끌어낸 미학적 성찰과 더불어 인간 중심의 시각과 이를 자연 속에 통합시킨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코로는 17세기 북유럽 유파와 영국의 근대 회화, 특히 컨스터블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835년부터 종교와 신화에서 주제를 구하여 역사적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삶에서 종교의 비중을 크게 둔 것은 1870년 이후였고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던 젊은 시절 1835년에만 해도 그는 고전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화가로서 종교적 테마를 풍경화에서 중요하게 다루었을 뿐이다.
그는 성서의 일화를 주제로 한 <황야의 하갈>104을 살롱전에 출품했는데, 아들 이스마엘을 구해낼 희망을 상실한 하갈의 고뇌를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루벤스, 게르치노, 로랭의 영향이 발견된다.
2년 후 그는 <황야의 하갈>과 단짝을 이룰 <황야의 성 히에로니무스>를 살롱전에 출품했는데, 이 작품 역시 대가들의 영향 아래 그린 것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티치아노, 푸생의 기법이 응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그의 최초의 역사적 풍경화들로 극적인 사건들의 의미와 사실주의로 사람들에게 놀라운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코로는 경관이 좋은 곳들을 찾아 프랑스를 두루 여행하면서 빛에 의한 나무와 바위의 변화를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오베르뉴, 프로방스, 리무쟁, 브르타뉴, 노르망디에 즐겨 갔으며, 퐁텐블로 숲을 정기적으로 가서 그렸는데, 이는 테오도르 루소보다 10년, 밀레보다는 25년이나 앞선 일이다.
활기가 넘치면서도 황량한 장소를 좋아한 그는 습작하기 적당한 브르타뉴의 풍경을 아주 좋아했다.


코로는 야외에서 동일한 모티브를 각도와 시각을 바꿔가며 연속적으로 그리면서 많은 작업을 했지만 진정한 창조는 그의 아틀리에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아틀리에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대형 풍경화를 다듬으며 전에 야외에서 보고 그린 습작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들을 이용했다.
기억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그는 추억 연작의 필요성을 느꼈다.
풍경을 마주하고 느꼈던 감정을 기억을 더듬어 표현해야 했으므로 그의 주제는 더 이상 문학적·역사적·종교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추억을 전달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가 진정 감동을 받았다면 그 감정의 진솔함은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다”고 했다.
1850년부터는 은빛 안개에 휩싸인 서정적인 풍경뿐 아니라 <아침, 요정들의 춤>105에서와 같이 상상의 인물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코로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파리에 있을 때는 정기적으로 음악회에 갔다.
그의 데생 수첩에는 관람 도중 신속하게 크로키한 가수와 오페라 무대 장식 습작으로 가득하다.
그는 로시니의 《오델로》, 구노의 《파우스트》, 앙브루아즈의 《햄릿》 등을 관람한 후 무대 뒤로 가서 배우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스케치하곤 했다.
그는 하이든, 베버, 모차르트, 베토벤, 클루크, 오베르 등을 좋아했으며 1847년에 작곡된 오베르의 오페라는 그로 하여금 <아이데>106를 그리게 했다.
오페라와 직접 관련된 그의 작품들로 1864년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와 이듬해 그린 <햄릿과 무덤 파는 사람>이 있고, 1860년 이후 그린 풍경화 대부분은 음악적 추상으로 넘친다.
보들레르가 그의 작품에서 신비로운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음악적 요소들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나타난 화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후기 작품에서 음악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현대적 세계를 결코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풍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시대를 초월하는 농부이거나 신화와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1845년까지만 해도 평론가와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에 그리 호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평론가들 특히 보들레르, 고티에, 샹플뢰리 등이 자연에 대한 그의 순수하고 진지한 태도와 사실주의에 기초하여 그림을 시처럼 그린다는 것을 알았다.
1850년대에 이르자 컬렉터와 화상들이 그의 작품을 다투어 수집하기 시작했다.
보들레르가 1845년의 살롱전에 관한 평론에서 “코로는 현대적 양식의 풍경화를 개척하고 있다”고 평했다. 코로는 1846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 시기에 쿠르베와 밀레는 주변의 일상적인 장면들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는데, 코로는 두 사람의 방법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살롱전에 계속 출품했으며 그의 작품은 고가에 팔렸다.
1855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회화 부문 1등상을 수상했으며 나폴레옹 3세가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1867년 레지옹 도뇌르의 임원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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