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과 반 고흐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상징주의는 1885년경~1910년경에 성행했던 문학과 미술운동으로 사실에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환기와 암시의 방법을 선호했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폭넓은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 조류의 한 부분이었고, 특히 인상주의의 자연주의적 목표에 대한 반동이었다. 화가의 감정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상징주의 회화는 색채와 선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상징주의는 강렬하고 신비적인 종교적 감정을 특징으로 하며, 에로틱한 것과 병적인 것도 중요하게 다뤘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평면화된 형태와 넓은 색면을 지향했다.
예술이 곧 표현이라는 생각은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이미 나타났고 이를 분명하게 글로 밝힌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서양미술에서 표현을 중시하게 된 것은 천재의 개념과 함께 낭만주의 시대에 수립되었다. 천재는 어떤 분야에서건 정신적인 세계, 즉 절대에 대해 보통 사람들보다 우월한 통찰력을 가지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우월한 인성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어느 정도 자신과 유사한 수준의 통찰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근거하여 예술작품의 가치가 예술가의 가치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갱과 반 고흐의 작품에는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의 요소가 함께 내재해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자화상 그리고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에서 이런 점을 발견하기란 쉽다.
고갱이 반 고흐에게 보낸 자화상 <레 미레제라블: 베르나르의 초상이 있는 자화상>(고갱 16)을 보면 성난 모습이다. 그는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에 비유했다.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영혼을 타오르게 만드는 격렬한 화염을 묘사하려고 했다”면서 1888년 10월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동심 어린 꽃송이와 소녀 같은 배경이 우리의 예술적 순수성을 나타낸다네. 장 발장에 관해 말하자면, 사회의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힘이 부랑자처럼 달라진 것이라네. 우리 인상주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 자신을 장 발장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를 넘어서 사회에서 비참하게 희생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그리려고 한 것이네.”
고갱은 자신을 고뇌하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순진한 모습의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화를 배경에 삽입해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과 대조되게 하고 꽃무늬를 후광처럼 장식해 자신의 얼굴을 장 발장으로 상징하며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이 작품과 편지를 받고 반 고흐도 답례로 <자화상 (폴 고갱에게 바침)>(고갱 17)을 고갱에게 보냈다. 그는 일본 판화에서 승려를 보고 자신의 머리를 깎았다. 그는 자신이 회화 세계에서 도를 구하는 수도승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갱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장 발장이었고 고흐는 회화를 위해 도를 구하는 수도승이었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에 수도승이 등장하는 피에르 로티의 소설 <마담 크리상템>을 읽었고 일본 판화 복사본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물과 불 같은 성격이 드러났는데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했고, 냉소적이었으며, 궤변을 일삼았고, 무심한 면이 있었다. 반면 반 고흐에게는 북유럽 사람의 기질인 거친 면이 있었으며, 천성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질이었고, 동료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 같은 사람이었다. 반자연주의적인 혹은 상징주의 그림을 주로 그린 두 사람은 지성이나 관망한 사물로부터가 아니라 개인적인 감성에 기초하여 그렸다.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눈과 코 부분을 때어내 화풍을 비교할 수 있다.(고흐 56) 고갱은 살색을 칠했고, 눈썹 가장자리를 어두운 색으로 테를 둘렀으며, 물감 위에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해 드로잉의 효과를 첨가한 데 비해 고흐는 물감을 2~3mm 정도로 두텁게 사용하면서 눈썹을 삼차원적으로 표현하고 볼 또한 거친 붓자국으로 물감을 거칠게 두텁거나 얇게 칠하면서 살색이 아닌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색을 사용했다. 두 자화상에서 기법의 차이가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 두 사람의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화가의 감정적 경험을 나타내는 상징주의와 화가의 우월한 인성을 드러내는 표현주의는 종종 모호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예를 두 사람의 정물화와 인물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반 고흐가 1885년 그린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고흐 8)은 세 가지 오브제 현대소설, 펼친 성경, 촛대로 구성되었다. 이런 오브제들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종종 등장한 것들로 반 고흐의 오브제 선택에는 새로운 점이 없다. 이 정물화의 특징은 크고 작은 것의 대비로서 커다란 성경과 작은 소설, 펼쳐진 책과 닫힌 책, 단색조의 책과 밝은 색상의 책을 꼽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모호한 느낌을 준다. 펼쳐진 성경은 구약 이사야서 35장, 유명한 ‘종의 노래’가 기록된 페이지로 이사야가 시적으로 예언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역할로 해석되는 구절이다. 메시야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 받는 종으로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소설은 에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 La Joie de vivre>이다. 진리를 상징하는 성경은 커서 권위의 느낌을 주고 소설은 작지만 밝은 노란색으로 시선을 끈다. <삶의 기쁨>은 매우 진지한 철학적 의문을 내포한 책으로 졸라는 전통 신앙이 부재한 가운데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지 독자에게 묻는다. 반 고흐는 이 정물화를 통해 신앙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반 고흐가 실재를 신성화하는 신성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는 경향으로 나아갈 때 고갱의 작품은 초자연적 이상주의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가 심화되어 고갱은 말년에 악마숭배 및 엑소시즘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고갱의 대표작 <설교 후의 영상>(고흐 24)은 1888년 9월 중순 퐁타방에서 그린 것이다. 그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시골뜨기 여인들이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서 환희를 경험하는 순간을 모티프로 삼았다. 반 고흐의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고흐 31)이 개신교 입장에서 본 새로운 종교화라면, <설교 후의 영상>은 가톨릭 입장에서 본 고갱의 환상적인 새로운 종교화라고 할 수 있다. 반 고흐의 환상이 실재적인 데 반해 고갱의 환상은 비실재적이다. 반 고흐의 작품이 물리적이며 자연주의적인 데 반해 고갱의 것은 형이상학적이며 초자연적이다. 고갱이 <설교 후의 영상>을 팔지 않고 브르통의 한 성당에 기증하고 싶어 한 것이 흥미롭다.
상징주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알베르 오리에는 1891년 3월에 발표한 ‘회화에 있어 상징주의 운동’에서 고갱의 작품으로 상징주의를 설명했다. 오리에는 상징주의 성격의 작품에는 다섯 가지 내용이 필히 구비되어야 하는데 고갱의 작품에는 그것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1. 아이디어가 표현되어야 한다.
2. 상징적이어야 함은 고유한 표현이 아이디어에 있기 때문이다.
3. 추상적이어야 함은 일반적 의미 속에서 형태와 부호가 기록되기 때문이다.
4. 주관적이어야 함은 객관은 객관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관자에 의해 관망한 부호가 되기 때문이다.
5. 장식적이어야 함은 이집트인, 그리스인, 원시인들이 예술적으로 장식했으며 그것들은 주관적, 추상적, 상징적,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리에의 다섯 요소는 고갱의 미학을 적절하게 설명했으며 20세기 미술의 특징으로 나타날 표현주의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학자들은 반 고흐와 고갱을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선조로 찬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