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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쉴레, 감히 자위행위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순수미술을 만화처럼 왜곡시킨 사람으로 말하자면 쉴레를 따를 자가 없을 것이다.
표현을 위해서라면 그는 자신의 드로잉이 만화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화가라면 대상의 외관을 변형시킬 때 이를 추하게 나타내기보다는 이상화시키는 것이 일반이지만 뭉크와 쉴레는 그런 태도를 대상의 진실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두 사람은 사물의 밝은 면 못지않게 어두운 면도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뭉크와 클림트보다 27-8년 후에 태어난 쉴레에게서 이른 표현주의 그림을 발견하기는 불가능하지만 1910년에 그린 <자화상>은 두 사람과는 전혀 다른 비이성적인 표현주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표현주의의 선구자는 아니더라도 그가 그린 그림에서 표현주의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표현을 위해서라면 관람자 앞에서 감히 자위행위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쉴레는 자신의 전부를 회화의 재단에 바쳤다.
1911년 이후에 그린 그림들은 표현주의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즉 표현주의가 마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쉴레의 <자위행위하는 자화상>의 경우
그는 금기시하는 성에 대한 표현을 통해 본능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위행위를 경험하는가!
이런 보편적 행위를 추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들이 쉴레의 그림을 춘화로 여기지 않는 이유는 진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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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클림트와 신화 
 

클림트는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화가로 그의 표현주의에는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다.
즉 본질에 대한 사고가 있는데 이는 신화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파악하기 어렵다.
표현주의의 출발을 따지기 위해 연대를 거슬러 가면 클림트가 1889년에 그린 <흐르는 물 Flowing Water>을 꼽을 수 있다.
여인의 누드를 활처럼 휘어지게 그렸는데 마치 중력에 의해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모습이다.
그에게 누드는 성적 대상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의 그림에서 상징주의 요소가 농후한 것은 인체를 표현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흐르는 물>에서 누드를 흐르는 물로 상징한다.
<행복의 열망>과 <망자들의 행렬>에서도 클림트는 여인의 누드를 허공에 헤엄치듯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는데 이런 식으로 누드를 공간에 구성한 예가 과거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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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클림트와 뭉크 그리고 여자 
 

클림트와 뭉크는 여자의 일생을 나타낸 그림들을 그렸다.
클림트는 여자의 일생을 세 시기로 표현했고 뭉크는 네 시기, 또는 세 시기로도 표현했다.
클림트는 <여자의 세 시기 The Three Ages of Woman>에서 여자 아이와 그 아이를 안은 채 수면으로 빠져든 여인, 그리고 늙은이로 여인의 연령을 상징적으로 셋으로 나눴다.
깊이 잠든 여인의 모습에서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관능적 여인의 매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젊은 여인과 대조가 되게 절망적인 모습의 늙은이는 몸을 옆으로 돌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등이 휘고 아랫배가 나온 늙은 여인의 모습에서 삶을 위협하는 죽음을 묘사했음을 본다.

<생의 네 시기 Four Ages in Life>에서 뭉크는 여자의 일생이 꿈으로 시작되지만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무뚝뚝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고독해지는 존재로 묘사했다.

여자에 대한 생각이 다른 뭉크, 클림트, 쉴레는 자연히 사랑이나 섹스, 키스장면을 각각 다른 모습으로 표현했다.
<연인들 Lovers>을 보면 클림트는 남자와 여자를 서로 즐거움을 나누는 성적 파트너로 그렸지만,
<남자와 여자>를 보면 정상적인 남녀관계를 이루지 못한 뭉크에게 섹스는 서로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원만치 못한 행위로 표현되었다.
<포옹하는 두 여인(두 친구)>의 경우 쉴레는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성에 대한 변형적인 충동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성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믿었다.
당시 터부시한 레즈비언의 사랑,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 등을 거침없이 표현함으로써 섹스에 대한 호기심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음을 본다.
동성애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고 쉴레의 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클림트의 섹스장면과 쉴레의 것을 비교하면 클림트의 그림은 노골적이지만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도취된 모습이고 쉴레의 그림에는 관람자의 눈과 마주치는 당혹감과 함께 은근히 관람자를 부추기려는 변태적 요소도 내포되어 있다.

열렬히 포옹하고 키스하는 남녀의 모습은 둘이 하나가 되는 영원한 모티프로서 예술가들이 선호한 주제였다. <키스 The Kiss>에서 보듯 뭉크의 키스에서는 심리적 상황이 배제되고 애정의 표시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삼키려는 두려운 존재들로 나타난다.
클림트의 <키스>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일체가 되고 사랑의 무아지경에 빠져는 반면 뭉크의 것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매력에 이끌려 키스를 하지만 종국에는 배반하고 서로를 괴롭히게 되는 이중적 존재의 모습이다.
뭉크의 <키스>가 어두운 화면으로 나타나는 데 반해 클림트의 <키스>는 사랑을 매우 미화한 장면으로 가장 우아하고 화려하게 나타난 애욕주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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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뭉크, 쉴레, 클림트 세 사람에게 여자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클림트는 여자를 남자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이성으로 생각했다.
처녀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꿈과 환상에 도취된 감성적으로 민감한 존재인 동시에 요염한 제스처로 남자의 정신에 깊이 파고드는 동물적 감각이 농후한 존재로 그의 그림에 나타난다.
클림트는 성적 충동을 스스로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여인을 그리고 자위행위에 가까운 노골적으로 선정적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마치 몰래 훔쳐보는 장면처럼 관람자에게 호기심에 대한 만족과 성적 자극을 제공한다.

뭉크의 그림에서는 여자에 대한 선입견이 좀더 과격하게 나타난다.
몇 번의 연애 경험을 통해 여자는 남자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제공하고 휴식을 주지만 동시에 남자의 모든 자긍심을 삼켜버리며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게 해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든다는 피해의식을 그는 갖게 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뭉크에게 여자는 파멸과 죽음의 상징이었고 생의 이면에는 늘 여자로 인한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강박관념은 뭉크의 여성관이 되었다.
여자를 흡혈귀같은 존재로 보는 그의 여성관은 작품 <흡혈귀 Vampire>로도 묘사되었으며 여자에 대한 두려움은 하품이나 하는 형이하학적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성의 억압을 반대하는 쉴레는 여성을 그릴 때도 성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존재, 섹스를 갈망하는 모습으로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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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와 여자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클림트는 여자의 누드를 인생을 표현하는 고상한 상징물로 보았다.
그에게 여자누드는 자유와 평화의 여신을 의미했으며 무엇보다도 에로스 자체였다.
이에 반해 쉴레는 남자와 여자 누드 모두를 억압된 성적 충동을 병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 보았으므로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두 사람에 비하면 뭉크는 누드를 별로 그리지 않았다.
그가 파리에서 그린 누드 그림들을 보면 여자의 누드를 고상한 주제나 성적 충동의 대상으로 여지기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여자는 형이하학적 존재 그 이상이 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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