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내에서도 이슬람주의처럼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성향이 있

 

 

 

 

 

 

이슬람교 내에서도 이슬람주의처럼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성향이 있다. 성문화된 샤리아가 없고, 무슬림이 샤리아를 보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샤리아를 고집하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어떤 샤리아를 말하는 것인가?” 라고 묻고 싶다. 샤리아화는 신정법의 탈을 쓴 독단정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슬람주의는 전체주의 조직법을 일반법으로 취급하여 시행한다. 융통성 있는 해석법과는 달리— 코란과 하디트를 해석하는 수니파 샤리아 학파(마다힙)와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졌다— 현대 샤리아화는 전체주의 방식으로 정치를 규정하며, 법치질서를 고려한 이슬람교의 재창조를 제안한다. 과거에는 샤리아의 정치적 역할이 칼리프에게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여, 통치자의 정치적 결정이 샤리아와 일치한다고 공포하는 데 그쳤다. 당시 율법사들은 판결의 독립성이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굳이 헌법의 영역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어떤 샤리아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어느 이슬람주의자에게 물을 땐 세 가지 방식을 일러주는데, 이를 시대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코란에서 샤리아가 기록된 구절(우리가 너희에게 바른 길[샤리아]을 마련하니 이를 따르라)은 하나밖에 없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전통적인 샤리아는 법이 아니라 도덕으로 이해해야 한다. 코란에 기록된 대로(선을 권하고 악을 금한다)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샤리아는 행실의 도덕과 최고의 선이지 법체제가 아니다. 무슬람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되살리고, 이슬람주의 정치를 샤리아화해야 한다는 민중의 요구는 반박하며, 인권에 위배되는 독단적인 법체제를 당당히 거부해야 마땅하다.

 

둘째, 8세기 당시, 4명의 무슬림 서기관 아부 하니파, 이븐 한발, 알샤피, 말리크 빈 아나스는 각각 자신의 이름을 따서 수니 이슬람교의 율법학파를 세웠다. 네 학파는 지금까지 민법에 제한을 두면서도 예배식에 관련된 사안도 다루었다. 비무슬림의 종교적 자유에 대해 이슬람법은 유일신 숭배자(유대인과 기독교인들)만 인정하여 유일신을 믿는 소수집단으로서 제한된 자유를 누리게 했다.

 

셋째, 20세기 이슬람주의가 부상하자 샤리아는 국가의 질서라는 법적 기반으로서 정치적 구색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샤리아의 근간은 이슬람교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8장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데올로기로서의 샤리아는 전체주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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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샨 왕조는 3대 왕 카니슈카의 재위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대승불교의 근원적인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던 모든 사람, 승려로부터 보통의 불자까지 모두 아우르는 열성적인 불교신도들의 이 같은 행보가 대승불교를 발전시켰다. 다양한 붓다와 보살들에 대한 개념이 정립된 것도 수확이었다. 특히 보살은 중생의 지위고하나 선악을 불문하고 모두를 구제하고자 하는 동정과 연민의 화신이었다. 깨달음과 열반의 세계가 눈앞에 있는 데도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이 구원받기 전에는 붓다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도 있었다.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측면이 이처럼 두드러졌던 탓에 대승불교의 추종자들은 이타적인 자기 종파의 보살과 이기적인 소승불교승려들을 대별하기도 했다. 소승불교의 승려들은 사찰에 은둔한 채 자신들 일신의 깨우침만을 얻으려고 고군분투한다는 것이다.
쿠샨 왕조는 3대 왕 카니슈카의 재위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차례로 왕위를 이어받은 그의 두 아들 바시슈카와 후비슈카는 왕국의 전성기를 유지하는 일에서는 시원찮은 성과를 보였다. 후비슈카는 34년이라는 긴 재위기에 별다른 업적을 내놓지 못했지만 종교에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힌두교의 부흥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이로 인해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던 굽타 왕조에서 불교는 인도 북부지역에서만 약간의 세를 유지할 정도로 위축되었다. 카니슈카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니슈카의 손자 바수데바는 힌두교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그의 이름이 크리슈나를 부르는 여러 명칭들 가운데 하나를 딴 것이라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왕조 초기에 주조된 동전과 달리 그의 재위기에 제작된 쿠샨 왕조의 동전에는 다른 종교의 신이 단 한 명도 새겨져 있지 않다. 역설적인 사실은 쿠샨 왕조 말기에 불교가 쇠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시기에 인도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불교건축물들이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데칸 고원을 지배했던 한 독립국의 군주는 무려 25개나 되는 석굴사원을 건축했다. 이 석굴
사원들은 와그호라Waghora 강 물줄기가 굽으면서 생겨난 말발굽 모양의 계곡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특히 데칸 고원 북서쪽에 자리 잡은 아잔타 석굴은 유명하다. 현재 인도 서부의 아우랑가바드 북동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잔타 석굴 내부는 붓다의 생애를 표현한 조각과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른 붓다의 모습, 새・ 동물・사람 등으로 환생한 붓다의 전생 등 표현의 소재도 매우 다양하다.
아우랑가바드와 가까운 마하라슈트라 주 엘로라Ellora 마을에도 석굴이 건립되었다. 아잔타 석굴에 맞서기 위해 힌두교도들이 건립한 석굴사원이었다. 78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석굴사원은 매우 아름답다. 힌두교도들이 산등성이를 타고 나란히 놓인 두 협곡 사이에 놓여 있는 거대한 한 덩어리의 암석을 조각하여 사원을 만들었다. 전체가 하나의 암석으로 이뤄진 이 사원은 시바 신에게 헌정되었다. 불교의 세를 물리친 힌두교의 위용이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하게 하는 유적이다. 먼 남쪽의 힌두교를 신봉하는 한 왕국에서도 힌두교사원이 건립되었으며, 시바의 공적을 기리는 이야기를 돌에 새기기도 했다.
오늘날 첸나이Chennai 남쪽의 마말라푸람Mamallapuram 해안에는 팔라바의 왕 마헨드라바르만 1세가 갠지스 강의 흐름을 기리고자 세운 석상이 있다. 전능한 강에서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는 시바의 엉킨 머리카락을 통해 천국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성수로, 이 성수가 망자들의 업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마헨드라바르만은 610년 금욕주의를 표방한 힌두 시인 아파르스바민의 영향으로 자이나교에서 시바를 모시는 힌두교로 개종했다. 오늘날 마말라푸람(마하발리푸람Mahabalipuram이라고도 함)에는 이때 만들어진 일곱 개의 탑과 화강암으로 만든 동물 조각, 거대한 바위를 잘라 만든 사원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팔라바 왕조와 그들의 뒤를 이은 촐라 왕조의 문화는 중세시대에 저 멀리 캄보디아・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320년 굽타 왕조가 정권을 잡은 후 대략 550년까지 인도 북부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찬드라굽타 1세의 뒤를 이은 굽타 왕조의 2대 왕 사무드라굽타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쿠샨 왕조 시절에 난립했던 주변 소국들을 정복했고, 제국의 영토를 인더스 강 상류까지 확장시켰다. 그 후 아소카 집권기 이후 시대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의 위업을 달성했다. 굽타 왕조는 일부러 마우리아 왕조를 모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많은 면에서 마우리아 왕조와 유사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는 굽타 왕조가 열성적으로 힌두교를 신봉했다는 점이다. 남방원정에서 개선하는 도중 사무드라굽타는 “모든 바다 너머”까지 뻗어나간 자신의 권세를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장엄
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저 멀리 스리랑카까지 위세를 떨친 사무드라굽타의 위대함을 알리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방식은 없었다.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 의식은 제를 올리는 이가 가축과 가축이 자라난 땅의 주인임을 확인시켜 주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권을 손에 쥔 지 얼마 되지 않아 권력기반이 약한 통치자는 자신을 명실상부한 제국의 주인으로 바로 세우길 원했고, 그럴 때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종마로 제를 올리곤 했다. 이 아름다운 동물은 원하는 곳 어디라도 갈 수 있는 빠른 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언제나 한 무리의 전사들이 종마를 따라다녔지만, 자신을 생포하고자 하는 놈은 언제라도 이 빠른 다리를 이용해 따돌릴 수 있었다. 사무드라굽타가 제에 올리기로 한 말은 1년간의 2-18 엘로라에서 발견된 시바의 아내 두르가(전쟁의 여신) 여신상. 데비 여신과 종종 동일시되는 두르가 여신이 물소 형상을 한 악마 마히샤를 죽이고 있다. 엘로라 석굴은 모두 34개로 2Km에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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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세계의 샤리아와 샤리아 헌법 채택론

 

 


 

 

 헌법을 비롯하여 모든 영역을 망라한 신성한 이슬람법의 주장은 법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다. 사담 후세인의 독재에서 해방된 이후 이라크의 여러 정당들이 신규 헌법을 논의할 때, 이슬람 울레마 위원회Committee of Islamic Ulema(이라크 정당에서 적극 활동하는 성직자 단체)는 어떤 헌법이든 이슬람 샤리아에 근거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위원회 대표연사인 이슬람 서기관 압둘살람 알쿠바이시는 “참정권에는 관심이 없지만 이슬람법은 헌법의 주된 근본이 되어야 마땅하다” 고 강조했다. 이슬람국가를 둘러싼 이 같은 주장에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샤리아식 헌법에 기초한 국가가 사담 후세인의 “공포 공화국” 을 민주적으로 대체하는 데 과연 필요할까? 이 책을 집필할 무렵에도 수니파와 시아파 이라크인들은 샤리아에 기초한 헌법제도의 의미를 두고 논쟁을 벌이며, 죽고 죽이는 짓을 매일 반복하고 있다. 이른바 이라크의 민주화로 헌법이 도입되었음에도 샤리아는 “이슬람교의 통치” 라는 또 다른 명칭으로 확립되었다. 미국 측 주장에 따르자면, 샤리아라는 말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추측컨대, 미군과 미 국무부만 모르고 나머지는 이를 알고 있다. 때문에 민주화 프로젝트가 법률의 이슬람화라는 라이벌 프로젝트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반론이 있긴 하지만, 코란을 탈피한 샤리아 규정은 개인의 인권38과 일치하지 않으며 모든 점에서 대립된다는 것이 굳게 자리 잡은 견해다.
그렇다고 논지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내가 코란에서 제시한 도덕적 의미를 지닌 샤리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종교와는 무관한 민주정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샤리아라며 규정한 이슬람교의 신성한 율법이라든가 신의 법lex divina 따위는 왠지 석연치가 않다. 코란을 탈피한— 인간이 구성한— 샤리아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중세 샤리아를 규정한 이슬람법의 네 학파는 사상의 기반을 다양하게 해석한 코란에 두었다. 게다가 이 이슬람법은 성문화되지 않았다. 샤리아 법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샤리아는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법으로, 대개 민법과 형법에 국한되며 특정한 경우에서 얻은 개별적인 판례를 축적해둔 데 전적으로 기초한다. 그러나 오늘날 샤리아에 대한 요구는 이를 헌법으로 삼는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라는 주문이다. 한편, 꾸며낸 전통을 둘러싼 의문을 제쳐두는 것은 1780년대의 국내 정치상황과 영국의 관습법 및 계몽주의 정치철학에서 미국의 헌법을 창출해낸다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샤리아가 헌법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이슬람교화의 요구가 이슬람세계의 민주정치 비전에 얼마나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샤리아라는 허울로 종교가 귀환하느냐, 이슬람 정치를 샤리아화하느냐는 이슬람문명의 걸림돌이다. 이슬람주의가 무슬림에게 제시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이거나 위기의 근원이라야 옳을 것이다. 그 까닭은 종교와 정치의 소통과 관계가 깊다.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사항을 밝혀둔다.

첫째, 이슬람교의 율법은 샤리아지만 무슬림은 그 정의에 대한 공통된 견해가 없다. 샤리아를 둘러싼 논쟁은 학술과 종교 및 정치가 한데 섞인 것이다.

둘째, 헌법dustur(두스투르)과 헌법으로서의 샤리아는 최근 이슬람 사상에 추가된 것이다.

셋째, 종교의 자유를 비롯한 인권 또한 최근 이슬람교에 추가된— 반론의 여지는 있으나— 것이다. 이 주제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이집트 무슬림들— 즉 무함마드 알가잘리와 무함마드 이마라와 같이 무슬림 형제단과 가까운 사람들— 은 인권이라는 이상의 원류가 바로 이슬람교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수단 이슬람주의자인 하산 투라비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 따르면, 인권은 이교와 무관하며 “우
리는 인권이 필요치 않다” 고 역설한다. 한편, 안나임처럼 종교와는 무관한 무슬림 학자들은 현대 이슬람문명의 사법개혁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슬람 정치를 샤리아로 만든다면 개혁에서 일탈할 공산이 커 종교의 자유가 제한될 것이다.
경전에 중심을 둔 이슬람교와 역사가 중심인 이슬람교의 차이는 샤리아와 이슬람교의 종교적 자유를 논의하는 데 적절한 화두가 된다. 이슬람교의 전통은 비이슬람교의 세 가지 계급을 의식하고 있는데,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무슬림 일신론자들(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유일신을 믿는 소수집단(딤미)으로, 이슬람교의 지배와 특정 제약 아래 종교적 신앙을 누릴 수 있으나 무슬림과 동등하지 않다.

둘째, 다신론을 추종하는 자들(유대교와 기독교 및 이슬람교를 제외한 나머지)은 불신앙(쿠프르)으로 취급되며 코란에서 명시한 규정에 따라 투쟁의 대상이 된다. 다원주의라는 사고방식으로 이 같은 종교를 인정하는 유일한 이슬람국가는 인도네시아다.

셋째, 개종을 통해 이슬람 신앙을 버리거나 아예 믿지 않으려는(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무슬림은 배교riddah(리다)나 이단으로 취급되어 불신자로 처벌받아야 한다. 배교 원칙은 과거의 무슬림ex-Muslims이나 불신자로 규정된 자들takfiri(타크피리, 무슬림 공동체에서의 파문)의 살상에 대해 정당성을 인정한다.

위 세 가지 계급은 이미 샤리아화와 민주적 헌법주의의 충돌을 예고했다. 혹자는 성문화되지 않았다는 본질을 내세워 샤리아가 매우 융통성 있는 법체제라고 주장한다. 고전 샤리아라면 그럴 수도 있으나, 오늘날 이슬람주의가 수용한 도그마는 엄격한 법전이다. 예컨대, 위에서 언급한 세 계급은 대체로 붕괴되어 하나로 통합된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그들과 의견이 다른 자라면 무슬림도 포함하여 죄다 불신자로 취급하여 샤리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샤리아를 정치화하여 이를 헌법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새로운 문명 프로젝트를 정당화하는 것과 같다. 이 프로젝트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은 “법의 지배” 라는 민주적 의미가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말마따나 “이동법law of movement” 의 의미로 “법” 을 거론한다. 헌법에 명시될 내용이야 한도 끝도 없겠지만 샤리아가 현대의 법 기준과 상충한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무슬림 선각자들도 이를 인정한다.
물론 그 방면에 이슬람주의자들만 있는 건 아니다. 샤리아를 “신이 베푼” 것으로 보는 무슬림 서기관들도 있는데, 이를 철저히 규명한 적은 없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기꺼이 샤리아를 적용할 것 같다. 또한 1930년, 이슬람교의 국제법에 관련된 책을 쓴 나집 알아르마나지, 그리고 최근 무함마드 사이드 알아슈마위가 그랬듯이,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무슬림 학자들도 있다. 탄탄한 근거를 갖춘 몇몇 이슬람 관련서적이 있는데, 예를 들면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비 알살리의 책이 읽어볼 만하다. 그는 샤리아의 이성적인 추론을 허용했으나, 요즘 이슬람교에서 샤리아를 보는 견해는 대체로 “샤리아식 논리” 로 이슬람주의가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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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힌두교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보살을 칭송하는 내용이 담긴 쿠샨의 비문이 마투라Mathura에서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니슈카의 개인적인 믿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당시는 대승불교의 사상이 아직 완성되기 전이었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의 보살의 강조와 대승불교의 부흥은 불교의 성인 나가르주나의 사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의 일이었다. 나가르주나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야, 서방정토 붓다인 아미타불Amithbha, 미래불인 미륵Maitreya, 그리고 자비의 신 관세음보살Avalokitesvara의 존재가 완벽하게 정립되었다. 아미타불・미륵・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에서 붓다는 아니지만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반신半神으로 추앙받았다. 나가르주나는 관세음보살이 남자・여자 혹은 동물의 형태로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 덕에 관세음보살이 중국의 자비의 신 관음으로 변신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졌다. 중국 동진東晋의 승려 법현은 자신이 목격한 대승불교 반신들의 기념행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불교의 여러 반신들을 태운 정교하게 꾸며진 의식용 마차를 한 무리의 가수・음악가・승려들이 에워싸고 시가를 행진했다고 한다. 힌두교사찰의 행사용 운송수단과 마찬가지로 이 마차는 그 높이가 웬만한 건물 5층 높이에 이를 정도로 높아서, 도시를 대표하는 거대한 건축물이나 성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이 마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불교와 힌두교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불교 내에서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학자들 간에 피 튀기는 논쟁이 한창이었다. 갈등의 골이 어찌나 깊었던지 붓다가 살아 있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였다. 나가르주나의 말을 빌어 표현하면 “붓다의 가르침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절묘한 논리로
불교의 모든 종파의 사상적 오류를 지적해갔다. 나가르주나 자신의 논리에 대해 설명해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할 것도 없다는 무생無生의 논리를 폈다. 감각의 소용돌이에 둘러싸여 있는 마음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유한 형태를 가진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특정 현상에 대해서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설명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그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것이 우리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관계에 존립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실재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의 무상함을 받아들여야만 궁극의 진리에 대한 직관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만이 붓다가 중생에게 전하고자 했던 심오한 가르침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반감을 품은 몇몇 사람이 그의 ‘무無’에 대한 사상 때문에 불교계 전체가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고 나가르주나를 비난했다. 이에 대해 나가르주나는 그들이 ‘무’의 개념을 잘
못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물을 통한 매일의 경험에 대한 진리와 이 명백한 현실 이면에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심오한 두 가지 진리를 깨우친 불자만이 꿈과 같은 매일의 삶에서 해방되어 붓다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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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와 신정질서를 위한 탐구

 

 


 

 

 

 

 

 

냉전이 종식된 이후, 세계의 질서를 둘러싼 종교와 세속적 비전의 경쟁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미국 학자 마크 위르겐스마이어는 탈양극성 정치를 논하기 위해 “신냉전”이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신냉전에서는 서방세계의 숙적인 공산주의를 이슬람이 대신해왔다. 왜일까? 좌파에서는 문명의 통일을 확신하던, 숙적을 잃은 서방세계가 이슬람교에서 “새로운 적” 을 만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이념의 전쟁에서는 이슬람혐오증이 반공을 대체한 셈이다. 이 같은 분석은 종족중심주의적 성향을 띤다. 즉, 서방세계의 정치적 라이벌에 집중한 나머지, 이슬람 자체는 거의 관계가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실제적인 쟁점을 간파하려면 편협한 집착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이슬람문명의 “종교의 귀환” 이 현대성에 내민 과제이기도 하다.
유럽이 팽창할 당시, 이슬람교는 반식민지・방어적 문화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하드는 서방 제국주의의 대응으로 비쳐졌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세계의 리더를 자처하겠다며 한술 더 뜨고 있다.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 사이드 쿠틉이 쓴 문헌에 따르면, 인류는 “서방세계의 위기와 민주정치의 파산으로 만신창이가 된 데다, 벼랑 끝에 내몰린 것으로 비쳐졌으므로 이슬람교만이 인류를 인도할 자격이 있다” 고 한다. 나중에 나온 『세계 평화와 이슬람교』에서 쿠틉은 이슬람교가 통치해야 세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면서, 이를 달성하려면 지하드를 “온 인류의 구원과 알라 신의 통치(하키미야트 알라)를 확립하기 위한 영원하고도 포괄적인 세계 혁명” 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샤리아는 쿠틉의 구원론을 전시 이데올로기로 바꾸는 데 필요한 기틀이 되었다. 상상속의 다국적 무슬림 공동체에 근간을 둔 이슬람주의식 정치적 국제주의가 실현되려면 샤리아국가뿐 아니라 세속주의를 탈피한 샤리아 기반 세계질서를 갖추어야 한다.
앞서 주장했듯이, 이슬람주의와 샤리아화 프로젝트는 이슬람 민족국가의 개발 위기와 맞물린 근대성 도입의 실패와 어설픈 세속화의 결과다. 이슬람세계가 문화접변acculturation에서 탈문화접변deacculturation으로, 근대화에서 전통화로의 복귀로, 서양화에서 탈서양화로, 세속화에서 세속화 탈피로 이동함으로써 기존의 소득도 잃어가고 있다. 지식의 탈서양화는 합리주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며, 베버의 보편적인(문화적인 한계는 있었지만) 개념인 합리주의화의 일환인 세속화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샤리아를 둘러싼 이슬람주의 사상은 세속 세계질서를 이슬람교의 신조에 근거한 신정질서로 바꾸려는 야심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꾸며낸 샤리아 전통은 이 같은 세계질서의 주된 정의를 제시한다. 고전 샤리아는 평화와 질서 및 정의의 개념을 포함하나, 현대의 “문화적 전통들 사이의 경쟁” 을 감안해볼 때, 샤리아와 민주적 헌법주의의 갈등에는 새로운 의미가 담겨 있다. 이슬람 신학에 따르면 코란은 알라 신의 말씀으로 신성한 것이나, 이를 탈피한 사상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것이므로 얼마든지 논쟁과 수정・보완의 여지가 있으며, 코란의 말씀과는 다르게 세속적인 특징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마다힙의 네 학파가 샤리아 법체제를 발전시킨 것은 지식인(울레마)과 율법사(푸카하)가 주도한 코란탈피post-Quranic 계획이었다. 얼마 후, 이븐 타이미야의 영향력 있는 문헌에 힘입어, 샤리아는 국가 정치(시야사)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대 이슬람주의에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꾸며낸 샤리아는 반서양 국가질서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성한 기원을 주장해야 했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변종 샤리아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예고한다. 세속화와 세속화의 탈피라는 라이벌 아젠다는 문명이라는 선을 따라 갈라지지 않는다. 세속주의 사상이라고 특히 유럽다운 것은 아니다. 중세 이슬람교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7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슬람교의 헬레니즘화에 기초한 일종의 합리주의32인 아베로이즘٢으로 중세 이슬람세계에서는 탁월한 이성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합리주의 학파는 이슬람문명에서 점차 수그러든 반면,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은 유럽 문화의 영속적인 일원이 되었다. 또한 계몽사상은 유럽의 세계화와 요즘은 서양화로 낮잡아 부르는 유럽사상의 보편화 과정에서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서방세계에서 교육받은 엘리트는 비서양 문화권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이슬람세계에서는 지금껏 문화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해 토착문화주의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34 현대 이슬람교에서는 정치의 샤리아화가 “세속화를 탈피한 사회 ”가 아닌 토착문화주의와 관계가 깊다.  새로운 정치적 외양을 갖춘 샤리아의 귀환은 신성한 종교의 귀환 사상에 담겨 있다. 근대성의 위기를 둘러싼 이슬람주의의 대응은 영성이 주도하는 종교적 르네상스라기보다는 정치의 종교화와 종교의 정치화에 더 가까우며, 이 둘은 갈등을 문화로 승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슬람교의 샤리아화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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