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10월 2일>] 뒤샹과 친구들
김광우 / 미술문화
"예술과 사물 간에 만리장성은 없다"







 


프랑스의 화가ㆍ조각가 마르셀 뒤샹이 1968년 10월 2일 81세로 사망했다. 현대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 단일 현대미술 작품으로 가장 많이 논의된 것이 뒤샹의 <샘>(1917)이다. 남자 화장실에 가면 반드시 있게 되어있는, 변기 제조회사에서 대량 생산된 기성제품(레디메이드ㆍready-made)인 소변기 하나를 뒤집어놓고 R. Mutt(바보얼간이라는 뜻)라고 서명한 뒤샹의 작품이 바로 <샘>이다.
진중권은 <미학 오디세이> 2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샘>이 다른 변기들과 달리 예술작품인 까닭은 무엇인가? …뒤샹은 과연 무엇을 창조한 걸까? 그것은 바로 '코드(code)', 즉 하나의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관습이다." 뒤샹은 수천년 동안 지속됐던, '눈의 즐거움'에 봉사하는 미술이라는 관습을 부정하고, 과연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가는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의문을 던졌던 것이다. 다시 진중권의 표현을 빌리면 뒤샹으로부터 "예술과 사물 사이에 만리장성은 없다."
또 다른 뒤샹의 유명한 작품은 (1919).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다 코 밑에는 콧수염을, 턱 밑에는 염소수염 같은 걸 그려넣었다. 이래놓고 뒤샹이 붙인 기묘한 작품 제목은, 프랑스어 발음대로 읽으면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는 말이 된다.
뒤샹은 이런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반예술의 다다이스트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는 평생 "예술만이 한 인간이 진정한 개인으로서 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활동"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재미 미술평론가 김광우가 쓴 <뒤샹과 친구들>은 1915년 이후 주로 뉴욕에 거주했던 뒤샹의 활동과 브르통, 아폴리네르 등 수많은 예술인들과의 교유를 중심으로 20세기 미술사를 조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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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레디메이드  

 

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마르셀 뒤샹(1887~1968)은 1916년 봄 레디메이드를 세 점 더 선정했는데, <빗>(뒤샹 123)은 쇠로 만들어진 것으로 개를 훈련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빗에 M.D.라는 마르셀 뒤샹의 첫 자를 적고 “높이(혹은 오만함)의 서너 방울 미개한 상태와 무관하다”라고 적었다. 그는 무감각한 상태에서 편견 없이 기성품을 선정한 후 비논리적인 제목을 붙여서 관람자로 하여금 각자의 생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작품의 제목을 유머스럽게 단 것은 그가 좋아한 시인 줄 라호그의 영향이었다. 27세에 요절한 상징주의 시인 라호그는 뒤샹이 태어나던 해에 타계했다. 라호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T. 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가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라호그의 니힐리즘, 아이러니, 그리고 빈정대는 유머는 뒤샹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라호그는 동음이의어를 거의 장난삼아 시어로 사용했으며, 두운법을 사용했고, 운율을 반복했으며, 두 낱말을 하나로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요염한’과 ‘결혼식’을 합쳐서 ‘요염한 결혼식’이란 새로운 낱말을 만들었고, ‘영원한’과 ‘무’를 합쳐서 ‘영원한 무’란 낱말을 만들었다. 그는 낭만적인 사랑, 결혼, 가족생활, 종교, 논리, 이성, 아름다움 등 어떤 전통적인 관념이라도 시를 통해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태양조차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여 태양은 병들고 “심장이 없는 별들의 웃음거리”라고 했다. 라호그의 영향을 받은 뒤샹은 작품에 유머스러운 제목을 붙였다.

뒤샹이 다음으로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여행자 소품>(뒤샹 122)이다. 이것과 <빗>의 원래의 것들은 없어졌고 두 번째의 것은 뒤샹의 허락 하에 1963년 스톡홀름에서 율프 린드에 의해 제작되었고, 세 번재의 것들은 이듬해 밀라노에서 슈바르츠에 의해 여덟 개 한정판으로 제작되었다.

1916년에 세 번째로 선정한 것은 <숨은 소리와 함께>(뒤샹 124)였다. 뒤샹이 ‘1916년 부활절’이라고 적은 이 작품은 아렌스버그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그는 아렌스버그와 함께 집에서 사용하는 노끈뭉치를 청동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판 사이에 삽입한 후 기다란 나사로 네 가장자리를 단단히 죄었다. 뒤샹이 시키는 대로 아렌스버그는 나사를 푼 후 뒤샹 모르게 볼을 노끈뭉치 중앙 빈 공간에 넣고 다시 나사를 조였으므로 그것을 들고 흔들게 되면 소리가 났다. 그래서 <숨은 소리와 함께>란 제목이 되었다. 청동판 위와 아래에 뒤샹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여 적었는데 더러 글자를 빠뜨리고 적었다. 제목은 그가 즐기는 단어놀이였으며 궤변을 서술할 수 없는 것을 변죽을 울리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했다.

뒤샹은 1917년 옷걸이를 <덫>(뒤샹 122)이란 제목으로 그리고 모자걸이를 <모자걸이>(뒤샹 123)란 제목으로 작품들로 선정했다. 이 두 작품은 그해 4월 부르주아 화랑에서 열린 그룹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카탈로그에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조각으로 분류되었다. 부르주아의 말로는 뒤샹의 <모자걸이>를 화랑 입구에 전시했는데 사람들이 그 위에 모자를 걸면서 작품일 줄 알지 못하더라고 했다. 뒤샹이 원했던 대로 사람들은 레디메이드에서 미학적 감정을 전혀 일으키지 않았다.

뒤샹은 1916년 가을 사폴린 에나멜페인트를 광고하는 포스터를 한 장 얻었다. 어린 소녀가 나무로 제작된 침대를 에나멜페인트로 칠하는 모습이 그려진 포스터였다. 뒤샹은 포스터 상단에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라고 친구시인의 이름을 적어넣고 하단에는 ‘from Marcel Duchamp 1916~1917’이라고 적어넣었다. 이것이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뒤샹 136)로 수정 레디메이드 작품의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뒤샹은 1918년 8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서양 장기 체스게임에 열중했다. 그가 체스에 전념한 사실은 이원론적 그의 정신세계를 잘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프랑스 지성인이 르네 데카르트와 앙리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적 세계를 추구한 것처럼 그도 두 세계에 병존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이 수학적 정밀한 방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아 그가 체스에 심취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 또한 수학적 정밀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체스는 놀라울 정도로 데카르트적이다. ... 체스두는 사람은 아름다운 조화를 창조하는데,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볼 수 없겠지만 결국에는 신비한 것이 아닌 줄을 알게 된다. 체스는 순수논리의 결과이다. 미술은 이와는 전혀 상이한 방법으로 이뤄진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뒤샹이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여동생 수잔과 장 크로티의 결혼선물이었다. 두 사람은 1919년 4월 14일에 결혼했는데 뒤샹은 결혼선물로 그들에게 기하에 관한 책 한 권을 끈에 달아 발코니에 매달도록 주문하면서 “바람으로 하여금 책장을 넘기며 절로 문제를 선택하게 한 후 페이지를 찢게 하라”고 지시했다. 뒤샹은 이것을 “불행한 레디메이드”라고 했다. 결혼선물로는 달갑지 않았지만 수잔과 크로티는 뒤샹의 지시대로 책을 매달고 바람이 책장을 절로 넘기는 장면을 사진을 찍었다. 수잔은 후에 사진을 그림으로 그린 후 <마르셀의 레디메이드 불행>(뒤샹 168)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뒤샹은 훗날 말했다. “행복과 불행의 개념을 레디메이드에 부여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재미있었다. 비와 바람이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흥미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1919년 가을 뒤샹은 파리를 방문 중이었다. 그는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어느 날 리볼리 거리를 걷다가 <모나리자>를 프린트한 싸구려 엽서를 한 장 샀다. 그는 모나리자의 얼굴에 검정색 연필로 수염을 그려넣고 아래에 대문자로 L.H.O.O.Q.라고 적었다. 그 글자를 볼 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프랑스어로 발음하게 되면 elle a chud au cul이 되어 '그 여자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란 뜻이 된다. 르네상스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작에 감히 수염을 그려넣고 지독한 농담을 보탠 것은 그야말로 극도의 다다주의 방법이었다. 1919년은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지 400주면이 되는 해라서 파리 시민들은 새삼 그를 상기하면서 그가 서양미술에 끼친 영향을 높이 받들고 있었는데 뒤샹이 이 대가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이다. <모나리자>는 이후 예술가들의 선호하는 주제가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1954년에 자신의 모습을 모나리자로 분장하여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면서 수염을 눈가장자리로 올려 익살을 나타냈다. 재스퍼 존스와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도 모나리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의 모나리자는 레어나르도의 모나리자가 아니라 뒤샹의 모나리자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뒤샹의 영향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다.

뒤샹은 루엥에서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이틀 후인 12월 27일 르 아브르에서 뉴욕으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 그는 승선하기 전에 브로메 거리에 있는 약국으로 가서 종처럼 생긴 1회분 주사약이 든 병을 샀다. 그는 약사더러 병 끝을 잘라달라고 주문하여 병에 든 약을 버리고 병을 봉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후원자 아렌스버그 부부에게 줄 선물로 가방에 넣었고, 그것에 <파리의 공기 50cc>(뒤샹 177)란 제목을 붙여 파리에서 선정한 작품이 되게 했다. 아렌스버그 부부는 돈이 많아 모든 걸 갖춘 상태였으므로 그들에게 그가 줄 선물이라고는 <파리의 공기 50cc>밖에 없었다.

1923년 새해를 맞은 뒤샹은 뉴욕을 떠나 프랑스로 완전히 귀국하려고 했다. 이것은 결국 일시적인 생각으로 끝났지만 당시에는 뉴욕을 완전히 벗어나려고 했고, 뉴욕을 떠나기 전 마지막 레디메이드를 제작하려고 했다. 그는 레스토랑에 갔다가 ‘현상수배’란 포스터를 봤는데 사람들을 웃기려고 누군가가 붙여놓은 것이었다. 포스터에는 사진과 함께 글이 적혀 있었다.
“조지 웰츠를 체포하는 데 협조하시는 분께는 보상금 2천 달러를 드립니다. 웰츠는 뉴욕에서 훅, 리옹, 그리고 씬꾸에르란 이름으로 양동이 상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뒤샹은 인쇄업자에게 포스터를 만들도록 한 후 하단 아랫줄에 ‘로즈 셀라비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란 문구를 보탰다. 로즈 셀라비는 1920년 늦여름 여자로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적어넣은 자신의 여성 이름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권사진 두 장을 포스터에 부착했다. 뉴욕을 떠나는 그가 제작한 레디메이드로는 어째 유감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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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의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벌거벗겨진 신부>

 
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이 처음으로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이를 줄여서 큰 유리라고 한다)를 드로잉으로 그린 것은 1912년 7~8월이었다.(뒤샹 201, 72) 그는 뮌헨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그렸는데 향 레이몽을 위해 그린 <커피 분쇄기>(뒤샹 64)와 유사한 모양으로 나타났다. 기계 이미지는 문명예찬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으며 뒤샹 외에도 레제, 피카비아, 레이몽 그리고 몇몇 예술가들이 기계 이미지를 탐험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계 이미지에 비해 뒤샹의 것은 덜 현대적으로, <커피 분쇄기>의 경우 손으로 갈아야 하는 구식 기계의 모습이다. 그는 <처녀>(뒤샹 73)란 제목으로 기계의 몸체를 습작했으며, 젖가슴과 들어올린 무릎으로 여성을 상징했다.

1912년 7월 말에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그렸는데 그가 그릴 <큰 유리>의 부분적인 실험이었다.(뒤샹 74)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은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처녀에서 신부로 변화하는 마음과 육체의 운동이다. 처녀로부터 신부로 변화하는 데 무슨 운동이 필요할까? 문화사학자 제롤드 사이겔은 설명했다.
“처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여인 또는 아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신부가 되는 것은 처녀성을 상실하기 전의 준비상태이다.”

신부가 되는 것은 불확실한 육체적 축복을 기대하는 환희의 짧은 기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뒤샹은 누드의 운동을 묘사하면서 입체주의 예술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땅의 색들인 브라운색, 황토색, 노란색 그리고 검정색을 사용했다. 그의 작품에서 제목이 시사하는 신부의 미혼남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가는 선과 아주 가는 기다란 직사각형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그린 후 8월에는 <신부>를 그렸다. 그는 어느 날 술집에서 취하도록 맥주를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신부가 딱정벌레처럼 나타나 날개로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고 했다. 그의 꿈은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이런 꿈을 꾼 후 그린 <신부>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더불어 매우 신비스러운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작품도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과 마찬가지로 입체주의 방법으로 운동을 묘사한 것이다.

뒤샹은 훗날 <신부>에 관해 말했다.
“<신부>에 관한 아이디어는 뮌헨에서 7, 8월 <처녀>와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드로잉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처녀 No. 1>을 먼저 연필로 드로잉했고, 다음에 <처녀 No. 2>를 드로잉한 후 수채를 조금 칠했다. 그런 뒤 이것을 캔버스에 옮겼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를 생각한 것은 그 후였다. 그때 그린 드로잉들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그린 것들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 시기에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작품과 무관하다. 그래서 가장 아름답게 시위한 부사적인 부사가 된 것이다. 의미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같은 ‘반감각적’ 언어는 문장의 관점에서 시적 차원으로서 내게 흥미로웠고 앙드레 브르통이 매우 좋아했다. 내게는 봉헌식과도 같았는데, 사실 그렇게 제목을 부칠 때 가치에 관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영어로도 마찬가지이다. ‘조차’는 온전한 부사로 의미하는 바는 없다. 좀더 벌거벗길 수 있는 가능성들 모두란 뜻은 당치도 않다.“

<큰 유리>는 1923년까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고 뒤샹은 완성시킬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뒤샹은 큐레이터 캐서린 쿠에게 말했다. “난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지 않으려고 했다. ‘완성’이란 말은 전통적인 방법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또한 전통주의에 따른 모든 장치를 수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큰 유리>를 더 이상 손대지 않은 채 센트럴 파크 서쪽에 있는 캐서린의 아파트로 운반했다.(뒤샹 202, 203, 223, 195) 그는 <큰 유리>에 대한 짐을 그런 방법으로 벗을 수 있었다.

현재 필라델피아 뮤지엄의 뒤샹 화랑에 소장되어 있는 <큰 유리>는 가로 175.8cm에 세로 272.5cm이다. 뒤샹은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두 개의 유리를 위아래 수직으로 세웠다. 그것은 너무 커서 한눈에 관람하기보다는 시선을 여기저기 옮기면서 보거나 또 뒤로 물러나서 보아야 한다. 그는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묶어서 만든 <푸른 상자>(뒤샹 249)에서 그것을 ‘지연’이라고 했다. 그는 <푸른 상자>에 적었다.
“그림이라고 하는 대신 ‘지연’이란 말을 사용한다. ... 그것이 그림이냐 하는 질문 자체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진행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지연을 만드는 것은 지연에 대한 다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유부단한 재결합에서 가능하다.”

<큰 유리>의 아랫부분은 <독신자 기계>이다. 각 요소는 자위행위의 의식을 거행하는데 그는 <푸른 상자>에서 이런 요소들은 자위행위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독신자는 스스로 자기의 초콜릿을 간다”고 적으며, 굳어진 가스의 번쩍번쩍 빛남은 “매우 자위행위적으로 환각에 빠뜨리게 한다”고 했다. 뒤샹의 <자전거 바퀴>와 둥근 형태들에 대한 강박관념은 <회전하는 유리판>(뒤샹 183)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는데, 둥근 회전하는 물체는 남자의 성기처럼 앞으로 나왔다가 들어가곤 했다. <로즈 셀라비>(뒤샹 186)는 여성에 대한 궁극적인 그의 이기심을 나타낸 것이다. <큰 유리>에서 불행한 독신자들은 의도는 갖고 있지만 거만하게 구는 신부를 벌거벗기지는 못한다.

카반느가 훗날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큰 유리>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뒤샹: 나도 모르네. 난 투명성 때문에 유리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겠지. 다음으로는 색이었어. 유리에 색을 사용하게 되면 뒤에서도 볼 수 있고, 색을 봉해버리게 되면 산화작용도 막을 수 있지. 색은 물리적으로 가능한 한 오래 순수한 모습을 유지한다네. 이런 중요한 요소들은 기술적인 문제지. 원근법도 매우 중요하네. <큰 유리>는 완전히 무시하고 업신여긴 원근법을 회복하네. 내게 원근법은 절대적으로 과학적이었어.

카반느: 사실주의 원근법이 아니란 말입니까?

뒤샹: 아닐세. 이는 수학적이고도 과학적인 원근법이었어.

카반느: 산술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뒤샹: 그래. 사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야. 이것들은 중요한 요소들이라네. 안에 내가 삽입한 것은 자네도 말할 수 있지 않겠나? 난 보통사람들이 그림에 사용하는 것 대신 덜 중요한 것을 시각적 요소에 부여하면서 일화를 좋은 의미로 시각적인 것들과 함께 섞었지. 난 이미 시각적 언어를 성취하기를 바라지 않았네.

카반느: 망막이었겠군요. (망막은 뒤샹이 먼저 사용한 말이다.)

뒤샹: 궁극적으로 망막으로 나타났지. 모든 것이 개념적으로 되었으며 망막보다는 재현한 것에 달린 문제가 되었네.

카반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개념 이전에 기술적인 문제가 먼저 대두되었을 겁니다.

뒤샹: 더러 그랬지. 근원적으로 몇 가지 개념들이 있었어. 대부분의 경우 기술적인 문제는 별로 없었고 유리니까 정교하게 작업해야 했어. ... 화가는 늘 장인과 같지.

카반느: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과학적인 문제들의 관계라든가 산술이라든가 더욱 문제가 되었을 것 같은데요.

뒤샹: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모든 그림은 반과학적이지. 쇠라의 그림도 마찬가지라네. 난 사람들이 별로 문제로 삼지 않고 시도하지도 않은 분명하고 정확한 과학의 관점을 소개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네. 과학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야. 반대로 과학을 신용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을 부드럽고 가볍게,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한 것이지. 하지만 아이러니가 내재했네.

카반느: 과학적인 점에서 말한다면 선생님은 과학에 많은 지식이 있었나요?

뒤샹: 아주 적었어. 난 과학자 타입이 아니지.

카반느: 아주 적었다구요? 선생님의 수학적 재능은 놀랄 만했는데 ...

뒤샹: 아냐, 천만에. 당시 우리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차원이었어. <푸른 상자>에는 사차원에 관한 글이 많이 적혀 있네. 자네 포볼로우스키란 사람을 기억하나? 그는 보나파트에서 출판사를 운영했네. 그 사람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군. 그는 잡지에 글을 썼는데 사차원에 관한 것이었고 널리 알려졌다네. 그는 납작한 이차원의 동물이 있다고 주장했지. 놀라운 이야기였어.

카반느: <신부>를 선생님은 “우리 안에 있는 지연”이라고 했는데.

뒤샹: 그래, 내가 좋아하는 시적 관심에서의 말이야.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시적인 말로 ‘지연’이라고 부르고 싶었네. ‘유리 그림’, ‘유리 드로잉’, ‘유리에 그린 것’이란 말을 피하고 싶었어. 그때 ‘지연’이란 말이 발견한 말처럼 마음에 들었지. 정말 시적이었어. 말라르메의 시어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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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에게 있어 창작은 단순하고 지적이며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은 사상이나 개념을 미술품의 본질적 구성 요소로 간주하며 기록의 형태를 우선적으로 완성된 작품으로 간주한다. 개념 미술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등장한 장르이지만 그 기원은 마르셀 뒤샹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베르타 스미스는 <개념 미술>에 적었다.
“뒤샹은 창조적인 행위를 여러 가지 오브제나 활동에 미술이란 명칭을 부여하는, 극히 기본적인 행위로 바꾸어놓았다. 그에게 있어 창작은 단순하고 지적이며 많은 부분 임의적인 결정의 ‘결과’이다. 뒤샹은 다양한 방식의 언어적, 시각적 장난과 의도적인 우연, 평범하고 하찮은 물건, 타인과 자신의 미술을 겨냥한 도발적인 제스처,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작품의 수단과 주제로 사용했다.”

블랭빌 근교 태생의 프랑스계 미국 예술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의 할아버지, 형 자크 비용과 여동생 쉬잔은 화가였고 형 뒤샹-비용은 조각가였다. 뒤샹은 1903년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잠시 수학했고, 1905~10년 <쿠리에 프랑세즈 Courrier Francais>와 <르 리르 Le Rire>에 풍자만화를 그렸다. 1909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처음 참가했으며 1909년 이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중심으로 한 서클 멤버들과 입체주의 운동에 참여한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그는 피카비아를 알게 되었고, 그와 함께 뉴욕 다다를 창설했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는 아모리 쇼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그는 이 작품을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거부당하자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입체주의 전시회에 처음 소개했으며, 또한 1912년 뒤샹이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 섹시옹 도르의 첫 번째 전시회에서 소개했다.    

1913년 2월 17일부터 3월 15일까지 뉴욕 렉싱턴 애비뉴 25번가에 있는 제69 연대 무기고armory에서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과 미국의 현대 미술을 모아 연 전시가 아모리 쇼Armory Show이다. 그 뒤 이 전시회는 시카고와 보스턴에서 잇달아 열렸다. 전시회의 공식 명칭은 ‘국제 현대 미술전’이었다. 이는 통계상 1,600여 점이라는 많은 작품이 전시된 대규모 전시회이자 또 한편으로는 아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새로운 미술을 과감하게 선보인 전시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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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뒤샹은 예술가가 아니고 1960년대가 퇴행의 시기였단 말인가! 

 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의 부자 월터 아렌스버그의 아파트는 진보주의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는데 뒤샹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1916년 그들은 ‘무명예술가들의 사회 The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를 결성하고 이듬해 파리의 앙데팡당전을 본딴 심사위원도 상도 없는 연례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연회비 5달러와 처음 내는 1달러만 내면 누구라도 무명예술가들의 사회의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전시회에 두 점을 출품할 수 있었다.
전시회를 1917년 4월 10일 렉싱턴 애비뉴 46번가와 47번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전람장 그랜드 센트랄 팔래스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전시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 아렌스버그·조셉 스텔라·뒤샹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5번가 118번지에 있는 모토 아이론 윅스Motor Iron Works 상점에 들렸는데
그곳은 배관에 필요한 기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뒤샹은 그날 변기를 하나 구입했다.
그는 그것을 화실로 가지고 가서는 거꾸로 세우고 검정물감으로 ‘R. Mutt 1917’라고 썼는데
변기 제조자의 이름을 작품에 서명하듯 적고 <샘 Fountain>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뒤샹은 <샘>을 6달러를 내고 출품했는데
무명예술가들의 사회 위원들 사이에 문제가 되었다.
일간지 <뉴욕 헤럴드>의 보도에 의하면
<샘>은 투표에 붙인 결과 근소한 차로 전시회에서 제외되었다.
뒤샹은 <샘>이 배척당한 데 대한 글을 써서 자신이 관여하는 잡지 <장님> 5월호에 기고했는데 다음과 같다.

리처드 머트 사건
그들은 어떤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고 했다.
리처드 머트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전시되지 못하고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씨의 <샘>이 거부당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1.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비도덕적이며 저속하다고 한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표절주의라고 한다.

단순히 하나의 화장실 설비, 목욕통이 비도덕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머트씨의 <샘>은 비도덕적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 매일 배관공들의 진열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머트씨가 그것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저 생활에 보통 필요한 사물을 발견하여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제목과 견해 아래 그것의 용도는 사라졌다.
이는 배관을 위해서는 불합리하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화장실 설비를 표절했다는 말은 부당하다.
미국이 만들어낸 유일한 예술품은 바로 이 화장실 설비와 교량들뿐이기 때문이다.

과연 뒤샹은 예술가가 아니고 1960년대가 퇴행의 시기였단 말인가!

뒤샹의 레디 메이드ready made는 예술가와 예술품에 대한 서양의 고정관념을 뒤흔든 미적 혁명의 산물이었다.
서양사람들은 미술품이 고도의 기술을 가진 예술가의 제작물로 보았는데,
첫째,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뒤샹 자신의 제작물이 아니고,
둘째,
그것은 고도의 기술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데 미학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예술가가 스스로 제작에 참여하지 않아도 예술가일 수 있으며 미술품을 제작한다는 의도로 제작하지 않은 일반 상품도 예술가의 선별에 의해 미술품이 된다는 것이 뒤샹이 우리에게 준 새로운 미학이다. 얼마나 놀라운 미적 혁명인가!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성행한 팝아트와 신사실주의는 소수를 위한 혹은 평론가들을 위한 미술로 전락한 서양미술을 대중을 위한 미술로 전환 내지는 복구시킨 역사적 쾌거였다.
소위 말하는 순수미술이란 미명 하에 미술을 위한 미술을 한답시고 서양미술은 소수의 미적 감각에 근거를 둔 소수에게 매우 고상한 미술이 되었다.
팝아트와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은 순수미술 재료가 아닌 평범한 물질들을 재료로 사용했고 소수를 위한 미술이 아닌 대중을 위한 미술을 추구했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 확실하다.
팝아트의 대표적인 예술가 앤디 워홀이 1964년에 제작한 <브릴로 상자 Brillo Box>는 수퍼마켓에서 파는 브릴로 비누 상자를 목공을 시켜서 나무로 똑같이 만든 것에 불과했다.
이 단순한 워홀의 행위가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는 이천 수백 년에 걸친 서양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분쇄한 혁명적 사건이 되었다.
<브릴로 상자>는 전혀 자연의 모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브릴로 상자 자체였다.
하지만
그 상자는 수퍼마켓의 브릴로 상자와 달리 워홀이 의도하는 바가 적절하게 표현된 미술품이었다.
고대 이집트인이 의도적으로 독창성을 멀리 하고 반복을 관행으로 여겼듯이 워홀은 동일한 것을 많이 만들어 하나와 많은 것을 차별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하나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이고 많은 것들은 하나 하나의 집합에 불과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기계가 되고 싶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반복의 미를 찬양했다.
하나의 작품 <브릴로 상자>가 서양사람들의 준 충격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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