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미켈란젤로와 다윗

 

미켈란젤로는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피렌체 대성당 작업장에는 ‘거인’으로 불리는 매우 커다란 대리석이 있었다. 이것은 약 40년 전 르네상스 조각가 아고스티노 델 두치오에 의해 채석되었지만 작업장에 방치되고 있었다. 26살의 미켈란젤로에게 조각가로서 명성을 날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피렌체의 통치자 피에트로 소데리니는 이 대리석으로 <다윗>을 제작하게 한 것이다.

로마에서 5년 동안 체류하면서 기술을 연마해온 미켈란젤로는 <바쿠스>와 <로마 피에타>로 자신의 위상을 로마에 알렸다. 이제 그는 고향을 위해 걸작을 제작하고 싶었다. <다윗>은 그동안 로마에서 익힌 솜씨를 시험하는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자 그가 대가의 반열에 올랐음을 시위하기에 적당한 작품이었다.

도나텔로도 <다윗>을 강한 소년의 모습으로 형상화했고, 취향은 전혀 달랐지만 베로키오도 <다윗>(미켈란젤로 205)을 날씬하고 섬세한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둘 다 칼을 들고 있어 다윗이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없어 성서적 묘사가 아니다. 기베르티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는 도나텔로는 15세기 유럽을 대표할 만한 조각가이다. 그는 23살 때 피렌체 대성당을 위해 <다윗>을 제작했고 후에 여러 점의 <다윗>을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다윗>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은 코시모의 주문을 받아 1430년에 청동으로 뜬 것으로 메디치 궁전 안뜰에 세워졌다. 그는 로마에서 초상 흉상을 제작하는 방법을 익혀 르네상스 초기 초상 흉상 제작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베로키오는 조각가이면서 화가였고 쇠를 잘 다뤘으며 당시 이탈리아의 중요한 예술가들 중 하나로 알려졌다. 그의 별명은 ‘진정한 눈’으로 날카로운 시각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그 별명의 성직자 수하였기 때문에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도나텔로에게서 수학했다고 했지만 주요 재능은 금세공이었으며 섬세한 장인적 기교가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개인적인 위대함으로 보면 도나텔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는 새로운 세대의 이상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 예술가였다.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와는 달리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 이름답고 젊은 승리자의 상으로 물리적 혹은 심리적으로 곧 행동할 듯한 자세로 돌팔매로 적장을 쓰러뜨린 성서와도 일치한다. 신앙의 힘으로 우뚝 선 채로 “주는 나의 빛이시고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혹은 “주는 나의 바위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니” 하는 자신만만한 태도이다. 장난기를 다 벗지 못한 덩치만 큰 사람, 소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자도 아닌 아니, 몸은 아직도 성장하는 중이며, 팔다리가 거대한 손발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나이의 청년이다. 이 작품은 그가 누드 남자의 고대 이상형을 알고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다윗>과 미켈란젤로가 25년 뒤에 제작한 <아폴로 혹은 다윗>(미켈란젤로 368)을 비교하면, 모티프가 매우 공허하다는 느낌이다. <아폴로 혹은 다윗>의 세부는 아주 단순하지만 이 조각상은 동세를 통해서 무한히 풍부한 효과를 내고 있다. 여기에는 특별한 힘의 소모나 거창한 몸짓도 없다. 신체는 하나의 덩어리로 단단하게 응집되었으면서도 완전히 숙련된 깊이를 지녔으며, 뒤쪽 공간에도 생동감과 동세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윗>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누드 신체와 그 동세, 미켈란젤로는 이 둘을 추구했다. <아폴로 혹은 다윗>은 피렌체 공화정의 지도자 바치오 발로리를 위해 대리석으로 제작한 것이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겼고 발로리에게 보내지 못했다. 1530년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의 세력이 다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아폴로 혹은 다윗>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윗이나 아폴로 둘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어깨 뒤로 불분명한 형상의 덩어리가 있는데, 이를 화살통으로 해석하면 이교도의 신 아폴로가 되고 돌팔매 끈으로 해석하면 성서적 영웅이며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읫이 된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4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제작했다. 고대 조각가가 이런 거대한 대리석을 깍아 제작할 때는 보통 신의 형상을 만들었지만 미켈란젤로는 성서의 인물 다윗의 형상을 만들었다. 르네상스를 고대의 ‘재탄생’이라고 할 때 <다윗>보다 다 함축적으로 그 의미를 시위하는 조각은 없다. 그가 이 조각상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501년 9월 13일 월요일부터였다. 기록에 의하면 1502년 2월 28일 절반가량 제작되었으며 1504년 1월 25일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비례가 잘 맞지 않는 모습을 거대한 크기로 확대했지만 동작의 기묘한 리듬이 있고 다리 사이로는 큰 삼각형이 생겼다. 그는 굳이 아름다운 선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지만 모든 세부의 선들이 놀랄 만큼 아름다우며 전체적으로 신체의 탄력을 표현해냈으므로 거듭 놀라움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이 왼발을 옆으로 살짝 벌리면서 몸의 중량을 오른쪽 다리에 지탱하게 했다. 왼발은 약간 앞으로 내민 채 발가락으로 바닥을 살짝 누르는 자세이다. 이 발동작에서 다윗에게 내재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깊게 주름진 이마, 쑥 들어간 눈, 길게 똑바로 선 코, 돌출한 입술 이런 것들이 얼굴에 긴장감을 나타내며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 두터운 목, 돌출한 목의 근육, 몸통, 팔에서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머리는 반비례적으로 크지만 멀리서 바라보게 되면 축소감으로 비례적으로 보인다. 다윗은 왼손을 올려 늘어진 투석기 한쪽 끝을 쥐고 있다. 돌을 쥐고 컵 모양을 한 오른손은 반비례적으로 크며 투석기의 다른 한쪽 끝을 쥐고 있다. 이 작품은 관람자가 주위를 돌며 감상하게 만든다.

성서에는 어린 다윗은 사울 왕의 무기를 들기에는 체구가 너무 작은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거인으로 제작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완전한 누드로 묘사해 놀라움을 가중시켰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거구인 골리앗을 살해하고 나라를 구한 미래의 왕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신앙과 용기를 엄청난 정도로 표현하려고 했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의 압력으로 피렌체로부터 독립한 피사를 탈환하기 위해 파병했던 피렌체 시민들에게 역경을 이겨내는 힘과 용기를 고취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바사리는 극찬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조각은 고대의 것이든 모던의 것이든, 그리스인의 것이든 로마인의 것이든 간에 모든 조각을 퇴색시켰다. ... 분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다윗>을 본 사람이라면 생존하거나 죽은 조각가가 제작한 어떤 조각이라도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피렌체 지방자치회는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의 도덕적 힘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호평하면서 <다윗>을 청동으로 제작할 것을 의뢰했다. 당시 샤를 8세의 총애를 받던 피에르 드 로앙 장군에게 프랑스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다윗>이 제작되었을 때 이 조각의 위치를 놓고 피렌체 시민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란이 일어났고 피렌체 시는 예술가들의 자문을 구했다. 그때 레오나르도를 포함하여 페루지노, 보티첼리, 필리포 리피 등 유명한 예술가들은 <다윗>이 풍상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에 로지아 데이 란지 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시뇨리아(시청) 바깥 광장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조각은 1504년 5월 14일에서 18일 사이에 대성당 작업실로부터 베키오 궁전 정면(미켈란젤로 207)으로 옮겨졌는데 불과 1km 미만의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틀이나 걸렸다. 오늘날 여기에 세워져 있는 복제품은 피렌체의 정계로 들어가는 관문을 수호하는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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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입증해준다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바자리는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상을 만드는 데 있어 자연이 제공해 줄 수 없는 전체로서의 조화로움, 우아함이 깃든 조화로움만을 추구한 결과 9등신, 10등신, 심지어는 12등신까지의 비례법을 적용하곤 한다"고 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나중에 가서 미의 어떤 일정한 기준에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상상력과 개별적인 영감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입증해준다.
건축에 관한 미켈란젤로의 사고 또한 이와 같았는데
바자리는 <미술가 열전>에 적었다.

비트루비우스와 고대인들이 해놓은 일에 따라, 그리고 내려오는 관례에 따라 사람들이 그동안 완성시켰던 적도, 규칙이 좌우하는 일로부터 여하튼 그는 박차고 나왔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그에게 무한히 감사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가 장인들이 일할 때 늘 밟아야만 했던 상도의 굴레와 속박을 내팽겨쳐주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생애에 있어 마지막 15년 내지 20년 동안은 그의 예술과 사상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여러 점에서 볼 때 1530년대 후반부와 1540년대 초에 보여준 예술과 사상의 특징들이 좀더 강화된 양상으로 나타난 것 뿐이다.

1545년경 이후 교황권의 위상에 변화가 생겼다.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이 극에 달해 라티스본 회의Diet of Ratisbon 이후부터는 타협이란 것은 말조차 꺼낼 수도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미켈란젤로가 속해 있던 온건파는 점차 그 힘이 약해지게 되었다.
온건파의 신비주의는 날로 내성적인 성격을 더해 가게 되었다.
이런 격동기에 나온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조각한 군상조각이자 죽는 순간까지 완성하지 못한 <론다니니 피에타 Pieta Rondanini>가 있다.
그는 이 조각을 통해 모든 육체적인 특성을 나타내주는 인체의 상징요소들을 박탈하여 끝내 순수한 정신적인 관념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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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예술을 예술가가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로 보았다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종교적 기능에 대해 무엇보다도 명백히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종교적인 화가는 예술에 있어서도 능숙할 뿐더러 매우 경건한 인생을 살아감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종교적인 화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는데,
홀란다는 그가 말한 내용을 적었다.

하나님의 장엄한 모습을 어느 정도 묘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화가인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위대하고 능숙한 거장이어야 한다.
생각컨대 그 사람의 인생은 더 나아가서 성령으로 그의 이해력이 높아질 수 있도록 성인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흠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 그려진 하나님의 모습은 신자의 마음을 분산시키며 가뜩이나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심마저 잃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은 신앙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 움직여 신앙심을 일게 하여 명상에 잠기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 모습에서 나오는 참된 아름다움으로 인해 신에 대한 외경심과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대단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음 속에 품은 관념들을 손이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가 제작해놓은 작품에 대해 늘 만족해 하지 않고 낮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을 모든 미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하늘에 살고 있는 이 신적 존재는
다른 존재들을 아름답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더욱 더 아름다워진다.

미켈란젤로는 예술을 예술가가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로 보았다.

... 만약 예술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을 수만 있다면
예술은 자연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선물을 통해 예술가는 조각상을 새기기 위한 돌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다.

어떤 이가 얼굴과 행동거지에
예술가로서의 신적인 기운이 서려 있다면
비록 하찮고 보잘것 없는 모델을 놓고서라도
그는 정신과 손으로 돌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에게는 물질의 부분인 돌 자체는 상상력이 거기에 작용하지 않는 한 쓸모없는 죽은 상태이다.

펜과 잉크에서
숭고한 양식, 하찮은 양식, 평범한 양식이 나오듯
대리석에서도 조각가의 재능 여하에 따라
훌륭한 형태와 보잘것 없는 형태가 생겨난다.

이상과 같이 미켈란젤로의 예술론은 그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의 조각이론은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하더라도
대리석 덩어리 안에 어떤 관념이 잠재해 있어야
손의 힘으로 정신에 따라
그 관념을 돌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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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예술가란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내 영혼이 눈을 통해 처음으로 접한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동안
정신적인 영상은 커지지만 물질적인 영상은 움츠러든다.
마치 천하고 별 가치없는 사물인양.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예술가란 자연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기는 하지만 자연 안에서 보는 것을 그 자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이상적인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의 가시적 미를 직접적으로 표상해내지 않은 대표적인 작품이 그가 1534년과 1541년 사이에 클레멘트 7세와 바오로 3세를 위해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위에 있는 프레스코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ment>이다.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아담의 형상을 그릴 때만 해도 그는 실재보다 훨씬 이상화시켰지만 실재생활에서 아름다운 인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형상을 묘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그의 목적이 달라졌다.
여기서의 인체는 무겁고 무기력해보이며 사지는 두껍고 우아함이 결여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것처럼 미켈란젤로가 손을 떨기 시작해서 그렇게밖에는 그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더이상 물질적인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기를 중단한 때문이다.
그는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또는 정신적인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물질적인 미를 이용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실재 세계의 공간이나 원근법, 전형적인 비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봐서 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무시된 듯하다.
그가 물질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정신적인 것으로 향한 경향은 그가 늙어가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교황의 위치는 매우 약화되었다.
게다가 경제적 혼란까지 가중되었으며 1527년에는 로마가 약탈당하는 일이 벌어져 클레멘트 7세는 더욱 무력해졌다.
가톨릭뿐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 전체의 존폐가 위협당하는 사건들로 사람들이 동요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신비주의 사상은 이렇듯 이탈리아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확인하기가 두려운나머지 선택한 하나의 강구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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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묘사된 인물상들의 웅대함은 

 
미켈란젤로는 장수했기 때문에 그의 사고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하여 체계적으로 한 줄기로 정리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가 로마에서 제작한 초기 작품들은 성기 르네상스가 한창 꽃피던 상태의 양식을 보여주지만 사망하기 전인 1564년 그는 매너리즘 양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과 이론을 정확하게 구획지어 나누기란 가능하지 않지만 대략 나누면 다음과 같다.

1530년경까지의 첫 번째 시기에 나타난 미켈란젤로의 예술관은 성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Pieta> 그리고 초기에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은 이런 그의 예술관을 잘 말해주는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미켈란젤로 역시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피렌체 회화의 과학적 전통을 고수했지만 네오플라톤주의에 접하면서부터 그 영향권하에서 성장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바로 미 자체였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묘사된 인물상들의 웅대함은 자연현상의 단순한 모방 이상을 지니는데
그의 인체 이상화는 자연 형상을 면밀히 연구한 끝에 얻은 지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인체미에 대한 숭배의 요소가 깊게 자리잡고 있다.

로마의 성기 르네상스는 사상면에서는 기독교와 이교라는 상반된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융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 프레스코는 도상학적 면에서 보면 가장 박식한 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인물상들의 외양은 이교 신들의 모습을 띠고 있다.
네오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에게는 기독교와 이교 둘 다 소중했다.
그는 처음부터 말년의 신앙생활을 물들인 열정적인 자기 포기의 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보나롤라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아주 신실한 가톨릭 교도가 되었다.
물질계의 미에 대한 그의 믿음은 대단했는데 초기에 그가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에는 네오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신미와 가시적 미를 향한 진한 열정이 종종 육체적인 정열과 어우러진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그의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바자리와 콘디비 두 사람 모두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데 만족해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인체를 해부해가면서 매우 열심히 해부학을 공부했음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연의 정확한 모방을 믿지 않았다.
바자리에 의하면 그는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의 연필 소묘를 한 번 했을 뿐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한 살아있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초상화라는 것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홀란다는 미켈란젤로가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폴랑드르 회화를 경멸한 것으로 보았다.
콘디비는 제우시스가 그린 크로톤의 <비너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미켈란젤로의 방법을 서술했다.
그는 인간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세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아름다운 사물을 좋아한다.
...
회화 세계에서 자국을 남긴 모든 예술가가 그렇게 한 것과 같이 벌꿀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 자연 안에서 아름다운 것을 골라내 작품에 나타나게 했다.
저 나이든 스승은 비너스를 그리는 데 있어 한 처녀만을 보고 그리는 데 만족해 하지 않고 많은 처녀를 보고 다각도로 연구하여 각각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특징들을 골라내어 자신의 비너스로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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