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모던 학파가 다비드에게서 비롯했다는 최대의 찬사이다
1860년에 외젠 들라크루아는 말했다.
"다비드는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모던 학파의 아버지였다. 그는 건축에서도 개혁을 꾀했으며 일상용 가구에서조차 개혁을 해냈다."
모던 학파가 다비드에게서 비롯했다는 최대의 찬사이다.
다비드의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보기 위해 매년 많은 사람이 루브르 뮤지엄을 향한다.
루브르에서 다비드의 작품보다 더 많은 사랑을 차지하는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뿐이다.
열정적인 동시에 조울증적인 다비드의 기질은 모든 그의 작품에 속속들이 배어 있으며 이는 그의 고유한 양식이 되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복잡한 느낌을 시각적으로 미묘하면서도 매우 적절하게 묘사해내는 데 있어 다비드는 달인이었다.
궁정 수석화가가 되는 것이 회화에 입문한 후부터 그의 유일한 꿈이었고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에 깊숙히 관여했으며 결국 꿈을 이루어냈지만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군림했던 그도 자의 반 타의 반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비드와 나폴레옹 모두 조국을 등지고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태어날 무렵 프랑스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극에 달해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정부는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선택할 수박에 없었다.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프랑스는 유럽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780년 당시 프랑스 인구는 2천 5백만에 육박했고 파리 시민은 65만으로 가장 큰 도시였다.
참고로 주변 나라들의 인구를 보면 러시아가 2천 4백만, 이탈리아 1천 7백만, 스페인 1천만, 영국 9백만, 프러시아 8맥 60만, 오스트리아 790만, 아일랜드 4백만, 벨기에 220만, 포르투칼 210만, 스웨덴 2백만, 네덜란드 190만, 스위스 140만, 덴마크 80만, 노르웨이 70만이었다.
당시 빈부 격차가 극심했으며 가문, 명예, 땅의 소유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결정지웠다.
사회계급은 삼등분되어 있었으며, 성직자가 13만, 귀족이 40만, 나머지가 평민이었고, 평민은 혹독한 법의 지배를 받았으며 죄의 심판은 그들에게 가혹했다.
정부의 무능으로 군사적 침략을 받았고 전쟁의 패배가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자 가난한 사람들은 한층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경제적으로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매우 빈곤했다.
이 시기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은행가. 금융업자, 변호사, 돈 많은 상인들인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축적된 부를 이용해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기존의 귀족과 연합하거나 왕가에 영향력을 행사해 정치적 지위를 차지했다.
이런 혼란과 횡포에 맞서 불평등을 고발하고 왕권과 종교적 전통에 반발한 철학자와 작가들이 있었는데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드니 디드로 세 사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계몽주의의 파도를 타고 이들의 영향은 프랑스에서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매우 컸다.
디드로와 장 르 롱드는 1751~80년 사이 35권의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을 출간했는데 인류의 모든 지식을 집약한 것으로 프랑스의 사회적, 기술적 현대화의 청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