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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모던 학파가 다비드에게서 비롯했다는 최대의 찬사이다

 

1860년에 외젠 들라크루아는 말했다.
"다비드는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모던 학파의 아버지였다. 그는 건축에서도 개혁을 꾀했으며 일상용 가구에서조차 개혁을 해냈다."

모던 학파가 다비드에게서 비롯했다는 최대의 찬사이다.
다비드의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보기 위해 매년 많은 사람이 루브르 뮤지엄을 향한다.
루브르에서 다비드의 작품보다 더 많은 사랑을 차지하는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뿐이다.

열정적인 동시에 조울증적인 다비드의 기질은 모든 그의 작품에 속속들이 배어 있으며 이는 그의 고유한 양식이 되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복잡한 느낌을 시각적으로 미묘하면서도 매우 적절하게 묘사해내는 데 있어 다비드는 달인이었다.
궁정 수석화가가 되는 것이 회화에 입문한 후부터 그의 유일한 꿈이었고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에 깊숙히 관여했으며 결국 꿈을 이루어냈지만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군림했던 그도 자의 반 타의 반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비드와 나폴레옹 모두 조국을 등지고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태어날 무렵 프랑스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극에 달해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정부는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선택할 수박에 없었다.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프랑스는 유럽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780년 당시 프랑스 인구는 2천 5백만에 육박했고 파리 시민은 65만으로 가장 큰 도시였다.
참고로 주변 나라들의 인구를 보면 러시아가 2천 4백만, 이탈리아 1천 7백만, 스페인 1천만, 영국 9백만, 프러시아 8맥 60만, 오스트리아 790만, 아일랜드 4백만, 벨기에 220만, 포르투칼 210만, 스웨덴 2백만, 네덜란드 190만, 스위스 140만, 덴마크 80만, 노르웨이 70만이었다.

당시 빈부 격차가 극심했으며 가문, 명예, 땅의 소유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결정지웠다.
사회계급은 삼등분되어 있었으며, 성직자가 13만, 귀족이 40만, 나머지가 평민이었고, 평민은 혹독한 법의 지배를 받았으며 죄의 심판은 그들에게 가혹했다.
정부의 무능으로 군사적 침략을 받았고 전쟁의 패배가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자 가난한 사람들은 한층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경제적으로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매우 빈곤했다.

이 시기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은행가. 금융업자, 변호사, 돈 많은 상인들인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축적된 부를 이용해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기존의 귀족과 연합하거나 왕가에 영향력을 행사해 정치적 지위를 차지했다.
이런 혼란과 횡포에 맞서 불평등을 고발하고 왕권과 종교적 전통에 반발한 철학자와 작가들이 있었는데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드니 디드로 세 사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계몽주의의 파도를 타고 이들의 영향은 프랑스에서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매우 컸다.
디드로와 장 르 롱드는 1751~80년 사이 35권의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을 출간했는데 인류의 모든 지식을 집약한 것으로 프랑스의 사회적, 기술적 현대화의 청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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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처음 만난 것은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프랑스의 최고 화가라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26살에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동시에 프랑스 국내 치안사령관이라는 막중한 권력을 가졌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불과 10년만에 그는 실질적으로 프랑스 군대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만난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다비드와 정식으로 교신한 것은 1797년 봄과 여름이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면서 다비드에게 자신과 함께 동행하여 전투장면을 그려줄 것을 청했지만 다비드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처음 만난 것은 1797년 12월 10일 파리에서였다.
전승하고 돌아온 나폴레옹을 정부가 공식 축하하는 축하연에서였다.
나폴레옹은 다비드를 꼭 만나기를 원했으므로 집정부 간사에게 다비드와 함게 식사하도록 자리 배정을 지시했다.
다비드 역시 나폴레옹을 만나기를 원했던 터라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대화했다.
식사 도중 다비드는 나폴레옹에게 초상을 그리겠다고 했고 나폴레옹은 쾌히 승낙했다.
이 날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사람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그를 가리켜 "프랑스 최고의 화가"라고 극찬했다.

나폴레옹은 1799년 30살에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 제1통령에 올랐고 35살에 황제에 즉위했다.
나폴레옹의 권력은 막강했고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다비드는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또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이 황제와 황후로 즉위하는 대관식을 그린 것은 다비드가 프랑스 최고의 화가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21살 연상인 다비드를 다루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많은 장군들이 부를 축적했듯이 다비드도 부를 탐닉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에 앞서 다비드에게 그날의 장면을 네 개의 캔버스에 그릴 것을 공식으로 청했으나 다비드가 요구하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할 형편이 못되었고 다비드는 두 점만을 그렸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정치가로서 존경했지만 그를 통해 그림값을 터무니없이 올려 받으려고 했다.
나폴레옹도 다비드를 존경했지만 그림값을 지나치게 청구할 때는 다른 화가들에게 의뢰했다.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은 프랑스 화가가 그린 가장 큰 작품들 중 하나였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고나식에는 200여 명이 공원되었는데 다비드가 묘사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실제와 동일했다.
과연 다비드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1812년에 그린 <서재에서의 나폴레옹>은 혈기왕성하고 매끈하고 날렵한 몸매의 운동선수와도 같은 영웅이 아니라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배가 나오기 시작한 모습의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작품을 보고 매우 만족해 하며 다비드에게 말했다.
"선생이 날 제대로 묘사했군요. 친애하는 다비드 선생, 난 밤에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낮에는 국민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다."

그 밖에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청을 받고 그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앞서 혁명기간 중에 그린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다비드의 작품은 순수 미학적 동기에서 그린 것들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게 그려진 것들이다.
그래서 사실이 많이 왜곡되었다.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인 단순하고 명료함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칭찬을 받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정치선전적이었고 관람자를 오도하는 것들이었다.
화가가 정치가와 유착되었을 때,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그 화가의 작품이 미학적으로는 파산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다비드의 일생을 통해 볼 수 있다.
결국 정치가와의 유착고리가 끊어졌을 때, 즉 나폴레옹이 몰락했을 때 나폴레옹의 사람 다비드도 그와 더불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강제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고 다비드는 스스로 벨기에로 망명하여 그곳에 뼈를 붇었다.
미술과 정치의 관계는 이 책의 주요 내용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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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자크 루이 다비드가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릴 때만 해도
 

다비드는 37살 때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렸는데, 신고전주의 회화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힌다.
아마 1640년 피에르 코르네유가 쓴 <호라티우스 가족>을 읽었거나 이 가족에 관한 연극을 보고 아이디어를 구한 것 같은데, 이 작품은 당시 발레로도 공연되는 등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호라티우스 삼형제를 삼각구도로 묘사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영웅들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했다.
삼형제는 말없이 결연한 자세를 취하고 여인들은 슬퍼하면서도 소리내어 울지 않는데, 이는 결의에 찬 감정을 나타낸 것으로 빙켈만은 이런 감정의 억제를 예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성격으로 꼽았다.

맹세는 방에서 이루어졌지만 다비드는 텅빈 방에 불필요한 가구들을 두지 않음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이 딴 곳을 향하지 못하게 했다.
드로잉에는 있었던 계단이나 불필요한 인물들을 제거함으로써 구상을 더욱 간결하게 했다.

그는 작은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한 장면처럼 넓은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형상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릴리프 조각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공간구성 방식을 터득하였다.


다비드가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릴 때만 해도 프랑스 대혁명(1789~93)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지만, 1790년대 초에는 이 작품이 새로 집권한 프랑스 공화당에 충성하는 제스처로 해석되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비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혁명이 일어난 이후 정치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정치 선전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비드는 1780년대에 이미 영웅주의와 조국에 충성을 표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1783년에 그린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도 그런 내용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헥토르(그리스의 장군 아킬레우스에 의해 죽은 트로이의 왕자)의 아내 안드로마케가 비탄에 젖어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위대한 영웅 헥토르의 고결한 시신이 침상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구성했다.
침상 아래에 검과 투구를 그려넣어 관람자로 하여금 전쟁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는 푸생과 개빈 해밀턴이 그린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들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한 장면을 그린 이 작품으로 다비드는 더욱 더 유명해졌고 왕립미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다비드는 정치와 인연을 맺으면서 부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며 프랑스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주는 권력도 탐하게 되었다.
역사화를 그려서 명성을 얻은 후 그리스 역사에서 좀더 엄격한 주제를 선택하여 그렸는데 그것이 <소크라테의 죽음>이다.
마치 푸생이 그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이 작품에는 놀랍게도 빛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그의 기교가 두드러진다.
이런 기교는 카라바조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성공하자 왕은 두 번째 작품을 의뢰했으며 그는 자신이 선택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을 그렸다.
최초의 집정관인 브루투스는 자신의 두 아들이 로마제국에 반하는 음모를 꾸민 사실을 알고 두 아들을 사형시킨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릭토르(집정관을 따라다니며 죄인을 잡던 관리)들이 집정관으로 하여금 장사지낼 수 있도록 시신들을 가져왔다.
브루투스는 아버지로서의 역할 이전에 집정관으로서 공화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우선적인 가치라는 교훈을 주는 이 작품을 1790년대 햑명적 이상주의자들이 환호하며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극장을 자신들의 회의장으로 사용하면서 단두대로 목을 치는 사형제도를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반혁명적인 인사들을 처형했으며 루이 16세와 왕후도 처형했다.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 공화국은 대의회장의 연단에 혁명의 과정에서 죽어간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다비드의 그림 두 점을 걸어놓았다.

두 사람 모두 1793년에 반대파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다.
다비드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루이 16세를 처형하던 날 밤 대의회 의원이었던 미셀 르 펠레티에가 왕의 호위대에 속한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로부터 6개월 후에는 과격한 사상을 가진 장-폴 마라도 광신적인 반혁명파 여인 샬로트 코르데이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마라는 목욕하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마라가 이런 모습으로 살해된 상황은 품위가 있거나 웅장한 그림이 되기 어렵지만 다비드는 실제 현장을 세밀히 살펴본 후 순교자와도 같은 죽음을 맞이한 영웅의 모습으로 마라를 묘사해냈다.
다비는 <마라의 죽음>에서 영웅주의와 미덕의 이상을 표현했다.
다비드는 마라를 알고 있었고 그를 좋아했다.
그는 마라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사상가들에 견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린 소크라테스와도 비교할 만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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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에서 발췌

말 탄 남자


1799년 11월 14일 서른 살의 나폴레옹은 성공적인 쿠데타로 뤽상부르 궁에서 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제1통령의 임기는 10년이었고, 제2통령, 제3통령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의 자문에 불과했고 봉급도 제1통령의 3분의 1에 불과한 15만 프랑이었다.
프랑스는 새로 들어선 통령정부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으며 5년 전부터 빈번하게 발생한 쿠데타와 정치적 혼란이 다소 안정되었다.
하지만 재정부족을 비롯한 프랑스의 갖가지 어려움은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프랑스는 정치적 파열, 경제적 탈진, 사회적 분열, 정신적 피폐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1799년 겨울 군대를 개편하고 이탈리아 원정길에 오를 준비를 했다.
이탈리아 피에몬테에서 잔여 병력을 이끌고 있는 프랑스의 마세나 장군이 두 배나 되는 병력 10만을 거느린 71살의 늙은 오스트리아 장군 멜라스에게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지원을 해야 했다.
그는 운송용 노새에 대포를 싣고 1800년 5월 14일 생-베르나르 샛길을 따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이 2차 이탈리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자크-루이 다비드는 그의 초상을 기념비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싶어 포즈를 취해줄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거절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면서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 그리스의 예술가 아펠레스에게 포즈를 취해주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다비드는 할 수 없이 나폴레옹이 마렝고에서 사용한 부츠, 뿔모양으로 생긴 모자, 장식이 달린 유니폼, 칼 등을 아들 또는 제자 프랑수아 제라르로 하여금 사용하게 해 나폴레옹을 대신한 모습으로 그렸다.

1774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스승을 따라 로마로 가서 프랑스 지부 아카데미에서 유학하면서 다비드는 고대 예술에 탐닉했고, 개빈 해밀턴을 포함한 새로운 고전 부흥의 선구자들과 교류했다.
그가 공감했던 미학상의 견해는 독일인 화가 멩스가 먼저 주장한 것이었다.
멩스는 빙켈만의 친구이며 그로부터 이론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작품에 적용했다.
멩스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과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다비드는 1783년 왕립미술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780년대에 루이 15세와 로코코 시대의 경박함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반발이 거세지자, 다비드의 위치는 확고해졌다.
색채보다 선묘를 더 중시하는 당시의 조류와는 타협하지 않았고, 표현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거부했다.
다비드는 왕립아카데미를 대신하는 새로운 기관을 창설하는 데 적극 참여했다.
그는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이후 투옥되었다가 혁명에 대해 서로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로 이혼했던 전부인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
석방되고 나서 그린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는 그에게 명성과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 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사회적, 예술적으로 다시 지배적인 지위를 누렸다.

다비드는 사나운 말 위에 침착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라는 나폴레옹의 주문으로 승리를 찬양하는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를 그리면서 왼편 하단 바위에 나폴레옹의 이름과 함께 한니발과 샤를마뉴의 이름을 적어넣었는데 두 사람은 나폴레옹에 앞서 험준한 알프스를 넘은 정복자들이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왕(768~814년 재위)으로 ‘유럽의 아버지 왕’으로 서유럽 대부분을 통일했다.

나폴레옹이 좋아한 그림은 자신의 모습이 주제로 그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미술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을 알고 기꺼이 미술품에 많은 돈을 지불했다.
그에 의해서 프랑스 회화는 정치적 성격이 짙어지게 되었으며 집정부(1799~1804)와 나폴레옹에 의해 예술가들은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묘사한 것처럼 거창하게 알프스를 넘지 않았다.
부하들이 이미 알프스를 넘은 며칠 후 말이 아닌 노새를 타고 협소한 길을 따라 넘었다.
훗날 폴 들라로세가 그린 그림이 실제에 가깝다.
들라로세는 1845년에 <퐁텐블로 궁전에서 퇴임하는 나폴레옹>을 그린 경험으로 나폴레옹의 인물 묘사에 자신이 생겼고, 1847년 <알프스를 넘는 샤를 마뉴>에 이어 1848년에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를 그렸다.

다비드는 20년 전 로마에 체류할 때 폴란드의 귀족 스타니슬라스 포톡키 백작으로부터 초상화를 주문받아 말 탄 모습으로 그를 그린 적이 있었다.
다비드는 바로크의 유명한 초상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의 <말 탄 사보이의 왕자 토마스>를 참조하여 거의 같은 스케일로 그렸다.
루벤스를 예외로 하면 반 다이크는 17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이다.
열 살 때부터 회화를 수학한 그는 19세에 화가들의 연합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620년에 런던으로 가서 수개월 동안 제임스 1세의 후원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다음해 이탈리아로 가서 162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그는 1628~32년까지 안트베르펜에서 지냈고 1632년 영국으로 가서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 거주했다.

다비드는 포톡키의 초상을 밝고 생기 있는 색을 사용하여 그렸는데 이런 요소들은 과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들로 그의 양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과거에 그린 초상화들에서는 가장 밝은 부분이 흩어진 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대각선 명암의 효과로 포톡키의 왼쪽이 밝게 드러났으며 말 다리의 어두운 부분은 극적인 장면으로 보인다.
다비드는 자신의 이름과 제작연대를 하단 왼편 가장자리 달마티안 개의 목걸이에 적어넣었다.
폴란드의 고귀한 귀족 출신의 백작 포톡키는 아내가 가져온 신부지참금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다.
학자이기도 한 그는 빙켈만의 저서를 번역했으며 그의 별명은 ‘폴란드의 빙켈만’이었다.
로마에서 다비드의 양식에 변화가 생긴 것은 무엇보다도 로코코 양식을 완전히 버리고 좀더 극적이면서 사실적인 묘사에 충실한 데 있으며, 대가들의 구성과 기교를 두루 관찰하면서 전통을 따르려고 한 것도 요인이었다.

다비드가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를 그릴 때 마드리드 궁전에 벨라스케스의 <말 탄 올리바레스의 백작>이 장식되어 있었다.
야외를 배경으로 하늘을 넓게 화면을 차지한 점에서 그리고 오른편에서 약간 비스듬히 바라본 구성은 반 다이크보다는 벨라스케스의 구성이 더욱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와 유사하다.
벨라스케스는 반 다이크보다 먼저 이런 구성의 그림을 그렸다.
다비드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참조했다는 기록이 없지만 두 작품의 유사성이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개운하지 않다.

벨라스케스는 1622년에 마드리드를 잠시 방문했고 이듬해 재상 올리바레스 백작의 초대를 받아 다시 수도로 가서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여생을 마드리드에서 보냈다.
궁정화가로서의 그의 임무는 모르 반 다스호르스트와 코에요로부터 비롯된 에스파냐 궁정 초상화의 경직되고 의례적인 양식의 전통에 인간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모델들에게 좀더 자연스런 포즈를 취하게 하고 장신구를 생략하여 인물에게 생명력과 개성을 부여했다.
왕실 컬렉션에 있던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의 작품은 티치아노의 작품을 훨씬 뛰어넘어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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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 대한 다비드의 열정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다비드는 1748년 8월 30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에서는 프리메이슨Freemasons(중세 석공의 숙련공 조합원)과 건축가가 속속 배출되었다.
다비드의 아버지 루이 모리스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브레이드, 리본, 레이스, 주름장식 등을 제조하는 사업을 했다.
어머니 마리 제네비에브 부롱은 벽돌공이며 건축업자의 딸이었다.
루이 모리스는 사업이 번창하자 당시 새롭게 부상한 철 도매업에도 투자했다.
그는 돈을 주고 말단 공무원직을 샀는데 18세기 프랑스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루이 모리스는 이런 품위를 갖추는 생활에 매우 만족해 했다.
그는 1757년 12월 2일 칼바도스를 여행하던 중 피스톨 결투로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왜 결투를 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9살에 아버지를 여윈 다비드는 외삼촌 프랑수아 부롱과 이모부 자크-프랑수아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는데 보호자 두 사람 모두 목수, 건축가, 건설업자였다.
부롱가는 18세기 후반 파리의 급격한 건설붐을 타고 많은 돈을 벌었다.

다비드는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보내졌고 마지막 학년을 쾨트르-나시옹 대학에서 마쳤다.
학문적으로 명문인 이 대학은 라틴어를 완전하게 구사하도록 가르쳤고 그리스사와 로마사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다비드는 우수한 학생이었으므로 고대사와 영웅들에 관해 충분히 배워 알고 있었지만 학자로서의 자질은 없었다.
훗날 그는 모교를 두 번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한 번은 1796년 죄인의 몸으로 갇힐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다음은 10년이 지난 후 영예로운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방문했는데 그 시기 이 대학은 프랑스 아카데미의 온상이었다.

어머니는 다비드가 군인이 되어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랐고 보호자인 외삼촌과 이모부는 건축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보통의 부르주아 출신 젊은이답지 않게 그는 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비드는 훗날 자신에 관해 적었는데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한 것이 흥미롭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드로잉에 열심이었다. ...
회화에 대한 열정은 가족들의 반대에 비례해서 더욱 더 커졌는데 가족들은 화가가 되는 걸 반대했지만 그는 드로잉을 마스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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