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중에서
미술사 자체가 사라졌다
<예술의 종말 이후>에 대한 해석은 이선종님의 질문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렇잖아도 도움이 되는 번역자로서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 책을 읽다가 어려워서 이해를 하지 못하는 독자 그리고 이 책을 읽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주제에 관해 궁금한 독자를 위해 쓴다는 생각으로 제5장 이후를 설명합니다.
단토의 예술철학은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매우 밝고 희망적이지만 그가 상대로하는 독자는 미술사 전반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고 나아가서 철학적 문제까지도 이해하거나 제기하는 학자급이기 때문에 문장이 난해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이해하고 어려운 부분은 훗날 다시 읽을거리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미술사에 대해 좀더 지식이 싸일 때 다시 읽으면 이해의 즐거움을 다시금 맛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특히 미술 관련 창작하는 사람들은 단토의 이론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창작을 점검하고 방향을 새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아서 단토는 제8장에서 '회화, 정치, 그리고 탈역사적 미술'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예술철학을 말한다.
그는 이 책을 펴내기 전에 '예술의 종말 이후 30년'이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다분히 그린버그의 주장에 대한 반론의 성격이 짙다.
그린버그는 컬러필드color-field(이를 색면 추상이라고 한다) 이후부터 1992년 현재까지 팝아트를 시작으로 30년 동안의 일련의 미술을 마치 미술사에서의 퇴행의 시기로 보고 "지난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어느 모임에서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를 데카당스로 전망하며 절망했다.
그러나 단토는 오히려 지난 30년이 미술사상 예술가들이 가장 자유를 구가한 때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이 본연의 자리를 회복한 것으로 보고 매우 희망적임을 주장한다.
좀더 근원적인 점은 미술사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주장이다.
역사는 자유를 위해서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면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 밖에 없다는 단토의 주장은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비롯한다.
예술만 종말을 맞은 것이 아니라 역사도 종말을 맞았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울타리가 사라진 오늘날 각 나라의 역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세계의 역사가 존재할 뿐이다.
지구촌 어느 곳에서라도 발생하는 사건은 이제 그 나라의 사건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역에 보도되면서 세계사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과거 각 나라의 역사의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다원주의는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토는 탈역사를 말하는데 이는 곧 역사 이후를 뜻한다.
그린버그는 역사를 진보의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지난 30년을 퇴행의 시기로 보고 곧 새로운 양식이 미술을 제 궤도로 되돌려놓을 것으로 막연히 기대했지만, 단토는 그러한 과거의 역사적 개념은 이미 붕괴되었으며 미술의 열차는 종착지에 도달했으므로 또 다른 궤도를 달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단토는 1990년대 초 현제의 시각으로 팝아트 이후 30년을 딴 장르도 마찬가지이지만 회화가 자기 자신에 대한 타당한 정의를 점점 더 많이 발견하고자 노력한 시기로 본다.
그는 이러한 노력은 실재에 있어서 철학의 과제라면서 예술가들은 자유를 만끽하는 가운데 창작에 몰두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이론은 순수성에 기반을 둔다.
각 장르의 특질이 유지되어야 한다.
회화는 회화의 특질이 있고 조각은 조각의 특질이 있으며 그 밖의 장르는 그 나름대로의 특질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그린버그는 주장했다.
오늘날 각 매체의 특질은 사라졌다.
보기에 따라서는 동시에 여러 장르에 속할 수 있는 작품이 얼마든지 있다.
이것만 봐도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내러티브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고 단토가 이를 지적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자신에게는 회화를 절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시대에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은 설 자리가 없으며, 그것이 존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것은 기괴한 것이 되어버렸다. 신지식계급은 그것을 완전히 절멸시키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회화의 종말은 일찌감치 예견되었던 일로 그린버그조차 194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젤화의 위기를 언급했다.
미술에서 회화가 차지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므로 회화의 종말은 곧 미술의 종말을 의미한다.
더글라스 크림프는 1980년대 초에 회화의 종말을 선언했다.
회화에 대한 종말이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초에 갑자기 회화가 성행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줄리앙 슈나벨과 데이브드 살레를 선두로 한 신표현주의Neo-Expresionism였다.
단토는 이를 '한 몫 챙기기'의 현상으로 본다.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값이 급등하기 전 '돈 벌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 혹은 재산이 될 정도로 급등한 작품을 싼 값으로 살 수 있었을 때 미술시장 언저리를 기웃거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때늦게 작품에 투자하기 시작하자 이를 노린 화가들이 마구 그림을 양산해낸 것이다.
슈나벨과 살레는 갑자기 돈을 벌었는데 이는 미술사의 종말 이후의 당연한 징조가 아니라 미술품 투자를 노린 지각생 구매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기회주의 화가들의 돈벌기였을 뿐이다.
모더니즘 내러티브가 종료된 마당에 신표현주의자들은 회화를 단순히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지속될 내러티브가 없자 자기표현을 한 것이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론에는 표현이 금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의 이론이 붕괴되자 표현이 허용된 것이다.
단토는 이를 철학자들이 의무상의 양태들이라 부르는 것의 구조에 어떤 심대한 혁명이 발생한 것이 비유한다.
1970년대 후반 파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였고 미셀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장 프랑수아 료타르, 자크 라캉, 그리고 엘렌 식수와 루스 이리가래 같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텍스트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이들의 저서는 우리말로도 번역되었는데 료타르에 의하면, 거대 내러티브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로 본다.
그리고 해체론의 정신은 내러티브를 진리나 허위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견지에서 바라본다.
어떤 이론이 받아들여진다면 과연 누가 이득을 보게 되며, 그 이론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제기되는 표준적인 물음이 되게 됨에 따라, 이런 물음이 모더니즘 자체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단토는 일련의 예를 들어 해체론에 타당성은 있지만 문제의 핵심이 되는 컨템퍼러리 미술사의 심층구조에는 육박하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그가 말하는 심층구조란 다원주의를 말한다.
다원주의는 매체들의 열린 연접성에 의거해야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며 단토는 이 열린 연접성이 한때 예술적 동기들의 연접성에 상응했고, 또한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내러티브에 의해 예증되는 종류의 진보발전적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봉쇄했음을 지적한다.
그는 말한다.
"이제 발전을 끌고갈 선호되는 운반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회화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버렸으며 미술의 철학적 본성이 마침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예술가들이 해방되어 그들 마음대로 다양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술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연접성이 단토로 하여금 미술사의 종말을 감지하게 했다.
연접성이란 퍼포먼스와 설치, 사진, 대지미술, 공항작품, 섬유작품, 온갖 띠무늬와 질서의 개념적 구조물 등이 회화의 동료가 된 것을 말한다.
탈역사적 미술에는 엄청난 메뉴가 있고 예술가들 자신들은 원하는 대로 이런 많은 선택을 골라내는 데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런 호의적이고 신축성 있는 연접성 속에는 회화를 위한 추상 회화와 모노크롬 회화의 여지도 있다.
모더니즘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현재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단토가 말한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양식 자체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식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양식이 질적 가치 혹은 유일한 지고의 가치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양식이란 단순히 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함을 지적한 말이다.
예를 들어 그린버그는 컬러필드를 미술사의 필연적 귀결로서 미술사의 과정으로 인식했지만 오늘날 컬러필드는 단순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화가는 바로크 양식으로 혹은 인상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으며 그런 것에 실증이 나면 표현주의를 표방할 수 있다.
양식이 미적 우월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은 모더니즘이 붕괴된 이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