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딕키와 단토의 등장 이후 

딕키와 마찬가지로 단토 또한 플라톤으로부터 바이츠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예술의 정의에 대한 논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생산적 노선을 최소한 시사하는 접근법들 속에 불충분한 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이에 반해 딕키는 예술에 대한 정의의 가능성을 사회학적이라고 불리울 만한 방법, 즉 예술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사회적 정황을 묘사하는 방법으로 성취코자 했다.
단토는 미술사와 예술을 증명하기 위한 예술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단토의 미술계가 아이디어들의 세계라고 말한다면,딕키의 미술계는 사람들, 예술가들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딕키와 단토의 논증은 궁극적으로 양립될 수 없지만 캐롤은 두 사람 모두
명확한 것들, 정황에서 분리된 예술의 속성들에 대한 강조로부터 불명확한 것들,
예술론을 확립하는 데서 버금가는 발달을 위한 단계를 마련하는 정황-의존(역사적 사회적) 특징들을 향하여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타당하다고 보았다.

딕키와 단토의 등장 이후 예술론에 대한 접근법들의 행진은 공격의 선두에 선 딕키와 단토에 의한 네오-비트겐슈타인 학파 논증의 틈새를 통해 나아가 네오-비트겐슈타인 학파에 대한 응답들, 즉 접근법에는 문화적, 역사적, 의도적, 네오-제도적 이론들과 이런 이론들의 혼용도 포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최근에 소개되는 다양한 미학 이론들은 바이츠의 이론으로 회귀하는 그 이상이 아닌데 딕키와 단토의 이론의 도움을 받고 있다.
최근의 미학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 딕키와 단토는 예술의 정의에 대한 프로젝트로 복귀했을 뿐만 아니라 미학자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비결이 될 만한 불명확학 속성들, 즉 예술적 의도들과 같은 것들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서 단토는 예술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관념이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예술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관념이 역사적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플라톤에 의한 철학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플라톤은 예술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행위로 보고 이에 대응할 만한 모방론을 만들어 유포시켰기 때문에 서양미술사를 단토는 "예술을 고립시키려고 한 플라톤의 예술론에 의한 미술의 억압사"로 본다.
그는 칸트가 미술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무관심성 Interesselosigkeit'이란 말로 특징지운 것을 미술품은 자연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말과 관련지워서 두 사람 모두에게 비판을 가한다.

미술품은 어떤 것을 위해 유용해보이더라도 철학적 진실에서 보면 그렇지 못하며 논리적 무목적성은 그것을 사용하는 어떤 것도 오용이나 왜곡될 것이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무관심과 관련있으므로 예술이 체계적으로 중립을 지켰던 것이다.
칸트는 예술이 분명 즐거움을 제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무관심한 즐거움이었다.
단토는 이를 실재 요구들의 만족이나 실재 목적들의 달성과 연고가 없는 이래 미온적인 만족감으로 보고 일종의 발작적인 즐거움, 즉 고통이 없는 가운데 존재하는 즐거움으로 본다.
칸트의 미학은 어느 특정한 본질이라도 가지지 않는 채 한 본질을 가진 것인양 보였으므로 바로 여기에 헤겔의 예술철학이 자리매김되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요 견해이다.

역사 그 자체 스스로 자각되는 변증적 계시로 본 헤겔은 정신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가 정신임을 깨닫게되었을 때 역사의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다.
이는 말하자면 칸트의 말로 특정한 본질에 대한 무지로 인해 그 자체에 소원하게 되었을 때가 아니라 그 자체를 통해 자체에 일치한 때 오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은 예술과 철학이 각각 상이한 단계로 존재한다고 보고 철학을 자유롭게하는 것을 예술의 역사적 사명으로 간주했다.
철학이 자유롭게되면 예술은 그 역사적 사명을 다 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엄청난 철학적 비젼을 갖고 있던 헤겔은 예술의 그 완연한 형태 자체가 이미 철학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확증을 갖고 예술의 철학적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정신적 사명에서 해방된 것으로 보았다.
예술에 대한 철학적 특권박탈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되어 칸트로까지 이어졌지만 헤겔에 이르러 그 숙명적 특권박탈이 비로소 예술철학을 통해 예술과 철학 모두가 자유로운 모습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같은 내용이 스스로를 가리켜서 "거듭 태어난 헤겔리안"이라 칭한 단토의 요지이다.
이는 플라톤의 모방론을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단토는 <구름>과 <국가>를 예술과 철학 사이 전쟁으로

플라톤은 회화와 생물을 본질미가 아닌 비교적 아름다운 것들로 취급했고 비극과 희극을 순수하지 않은 것들로 취급했다.
회화와 문학에 대한 그의 배척은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형상'으로 파악하려는 사변적 정립에도 원인이 있지만 정치적으로 불순한 동기가 작용한 때문이다.
<미술의 종말 이후 After the End of Art>로 유명한 단토Danto는 1986년에 발표한 저서 <예술의 철학적 특권박탈 The Philosophical Disenfranchisement of Art>에서 플라톤의 불순한 동기를 예술에 대한 철학적 특권박탈이었다는 말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플라톤의 <국가 The Republic> 제10권에 나타난 예술가의 모습을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기원전 450년경-385년)의 희극 <구름 The Clouds>(기원전 423년)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를 빗대어 시대에 뒤진 자로 오명을 씌운 그 철학자의 모습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단토는 주장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에서 플라톤이 숭배하는 소크라테스를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현실과는 무관한 이상주의자로 조소했다.
<구름>이 철학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자 소크라테스는 제자이면서 서사시 시인인 이온에게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성보다 낮은 수준에서 관객을 궁지에 빠뜨리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암울하고 혼돈된 기백에 의존한 것이라고 이온에게 설명했다.
단토는 이를 가리켜 "오직 자체의 자아-평가에서 예술을 다루는 것"으로 비판한다.

단토는 <구름>과 <국가>를 예술과 철학 사이 전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본다.
이온이 플라톤에 의해 <국가>의 심리상태의 확인, 즉 예술이 교활한 표리부동 안에서 예술에 반해 사용되고 있음을 극적으로 조작하기 위해 묘사된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예술가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자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단토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해 철학과 예술 사이의 전쟁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플라톤의 철학이 모방의 모방이 된 이래,
즉 철학이 플라톤적 유언에 자리매김되는 부록에 있었던 이래
철학 자체가 곧 예술에 대한 특권박탈이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다.
헤겔리안으로서 그는 헤겔이 바로 예술을 철학에서 구분하여 미학을 예술철학으로 탈바꿈하게 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술이 빠져나간 철학의 꼴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 그에게 생긴 다음의 의문이었다.
그의 답은 매우 간명하다.
예술의 특권을 박탈하면서 형성된 철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가깝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술이 자유롭게 되자 예술을 압제해 온 철학 또한 자연히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중에서 
 
미술사 자체가 사라졌다

<예술의 종말 이후>에 대한 해석은 이선종님의 질문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렇잖아도 도움이 되는 번역자로서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 책을 읽다가 어려워서 이해를 하지 못하는 독자 그리고 이 책을 읽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주제에 관해 궁금한 독자를 위해 쓴다는 생각으로 제5장 이후를 설명합니다.
단토의 예술철학은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매우 밝고 희망적이지만 그가 상대로하는 독자는 미술사 전반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고 나아가서 철학적 문제까지도 이해하거나 제기하는 학자급이기 때문에 문장이 난해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이해하고 어려운 부분은 훗날 다시 읽을거리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미술사에 대해 좀더 지식이 싸일 때 다시 읽으면 이해의 즐거움을 다시금 맛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특히 미술 관련 창작하는 사람들은 단토의 이론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창작을 점검하고 방향을 새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아서 단토는 제8장에서 '회화, 정치, 그리고 탈역사적 미술'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예술철학을 말한다.
그는 이 책을 펴내기 전에 '예술의 종말 이후 30년'이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다분히 그린버그의 주장에 대한 반론의 성격이 짙다.
그린버그는 컬러필드color-field(이를 색면 추상이라고 한다) 이후부터 1992년 현재까지 팝아트를 시작으로 30년 동안의 일련의 미술을 마치 미술사에서의 퇴행의 시기로 보고 "지난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어느 모임에서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를 데카당스로 전망하며 절망했다.
그러나 단토는 오히려 지난 30년이 미술사상 예술가들이 가장 자유를 구가한 때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이 본연의 자리를 회복한 것으로 보고 매우 희망적임을 주장한다.
좀더 근원적인 점은 미술사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주장이다.

역사는 자유를 위해서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면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 밖에 없다는 단토의 주장은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비롯한다.
예술만 종말을 맞은 것이 아니라 역사도 종말을 맞았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울타리가 사라진 오늘날 각 나라의 역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세계의 역사가 존재할 뿐이다.
지구촌 어느 곳에서라도 발생하는 사건은 이제 그 나라의 사건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역에 보도되면서 세계사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과거 각 나라의 역사의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다원주의는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토는 탈역사를 말하는데 이는 곧 역사 이후를 뜻한다.
그린버그는 역사를 진보의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지난 30년을 퇴행의 시기로 보고 곧 새로운 양식이 미술을 제 궤도로 되돌려놓을 것으로 막연히 기대했지만, 단토는 그러한 과거의 역사적 개념은 이미 붕괴되었으며 미술의 열차는 종착지에 도달했으므로 또 다른 궤도를 달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단토는 1990년대 초 현제의 시각으로 팝아트 이후 30년을 딴 장르도 마찬가지이지만 회화가 자기 자신에 대한 타당한 정의를 점점 더 많이 발견하고자 노력한 시기로 본다.
그는 이러한 노력은 실재에 있어서 철학의 과제라면서 예술가들은 자유를 만끽하는 가운데 창작에 몰두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이론은 순수성에 기반을 둔다.
각 장르의 특질이 유지되어야 한다.
회화는 회화의 특질이 있고 조각은 조각의 특질이 있으며 그 밖의 장르는 그 나름대로의 특질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그린버그는 주장했다.
오늘날 각 매체의 특질은 사라졌다.
보기에 따라서는 동시에 여러 장르에 속할 수 있는 작품이 얼마든지 있다.
이것만 봐도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내러티브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고 단토가 이를 지적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자신에게는 회화를 절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시대에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은 설 자리가 없으며, 그것이 존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것은 기괴한 것이 되어버렸다. 신지식계급은 그것을 완전히 절멸시키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회화의 종말은 일찌감치 예견되었던 일로 그린버그조차 194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젤화의 위기를 언급했다.
미술에서 회화가 차지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므로 회화의 종말은 곧 미술의 종말을 의미한다.
더글라스 크림프는 1980년대 초에 회화의 종말을 선언했다.


회화에 대한 종말이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초에 갑자기 회화가 성행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줄리앙 슈나벨과 데이브드 살레를 선두로 한 신표현주의Neo-Expresionism였다.
단토는 이를 '한 몫 챙기기'의 현상으로 본다.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값이 급등하기 전 '돈 벌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 혹은 재산이 될 정도로 급등한 작품을 싼 값으로 살 수 있었을 때 미술시장 언저리를 기웃거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때늦게 작품에 투자하기 시작하자 이를 노린 화가들이 마구 그림을 양산해낸 것이다.
슈나벨과 살레는 갑자기 돈을 벌었는데 이는 미술사의 종말 이후의 당연한 징조가 아니라 미술품 투자를 노린 지각생 구매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기회주의 화가들의 돈벌기였을 뿐이다.
모더니즘 내러티브가 종료된 마당에 신표현주의자들은 회화를 단순히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지속될 내러티브가 없자 자기표현을 한 것이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론에는 표현이 금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의 이론이 붕괴되자 표현이 허용된 것이다.
단토는 이를 철학자들이 의무상의 양태들이라 부르는 것의 구조에 어떤 심대한 혁명이 발생한 것이 비유한다.

1970년대 후반 파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였고 미셀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장 프랑수아 료타르, 자크 라캉, 그리고 엘렌 식수와 루스 이리가래 같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텍스트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이들의 저서는 우리말로도 번역되었는데 료타르에 의하면, 거대 내러티브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로 본다.
그리고 해체론의 정신은 내러티브를 진리나 허위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견지에서 바라본다.
어떤 이론이 받아들여진다면 과연 누가 이득을 보게 되며, 그 이론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제기되는 표준적인 물음이 되게 됨에 따라, 이런 물음이 모더니즘 자체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단토는 일련의 예를 들어 해체론에 타당성은 있지만 문제의 핵심이 되는 컨템퍼러리 미술사의 심층구조에는 육박하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그가 말하는 심층구조란 다원주의를 말한다.
다원주의는 매체들의 열린 연접성에 의거해야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며 단토는 이 열린 연접성이 한때 예술적 동기들의 연접성에 상응했고, 또한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내러티브에 의해 예증되는 종류의 진보발전적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봉쇄했음을 지적한다.
그는 말한다.

"이제 발전을 끌고갈 선호되는 운반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회화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버렸으며 미술의 철학적 본성이 마침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예술가들이 해방되어 그들 마음대로 다양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술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연접성이 단토로 하여금 미술사의 종말을 감지하게 했다.
연접성이란 퍼포먼스와 설치, 사진, 대지미술, 공항작품, 섬유작품, 온갖 띠무늬와 질서의 개념적 구조물 등이 회화의 동료가 된 것을 말한다.
탈역사적 미술에는 엄청난 메뉴가 있고 예술가들 자신들은 원하는 대로 이런 많은 선택을 골라내는 데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런 호의적이고 신축성 있는 연접성 속에는 회화를 위한 추상 회화와 모노크롬 회화의 여지도 있다.
모더니즘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현재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단토가 말한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양식 자체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식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양식이 질적 가치 혹은 유일한 지고의 가치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양식이란 단순히 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함을 지적한 말이다.
예를 들어 그린버그는 컬러필드를 미술사의 필연적 귀결로서 미술사의 과정으로 인식했지만 오늘날 컬러필드는 단순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화가는 바로크 양식으로 혹은 인상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으며 그런 것에 실증이 나면 표현주의를 표방할 수 있다.
양식이 미적 우월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은 모더니즘이 붕괴된 이후의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중에서 
 
단토의 변용의 미학

아서 단토에게 예술의 종말을 감지하게 한 것은 시각예술에서의 변용의 미학이다.
평범한 것을 변용을 통해 아이콘으로 만들고 대중적인 미술과 고급 미술과의 구별을 흐리게 한 데 있다.
일차적으로는 변용을 통해 평범한 사물을 고급 미술의 미학적 사물로 격상시키고 결과적으로는 대중적 미술과 고급 미술의 경계가 사라지게 했음을 주목했다.
변용은 기독교의 개념으로 소위 말하는 '변화산 정상의 사건'을 의미한다.
어느 날 산 정상에서 예수를 따르던 제자 세 사람이 예수의 모습에서 예언자 혹은 메시야의 이미지를 발견했다는 데서 비롯한 말이 변용이다.
변용은 말 그대로 모습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동일한 모습인데 바라보기에 따라서 달라진 것이다.
보는 사람의 인식이 달라진 것이지 대상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팝아트는 바로 관람자의 인식을 문제 삼은 미술이다.
동일한 사물을 달리 인식하는 사유의 문제를 제기한 미술이다.
단토가 이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그토록 자극적이었을 수 있었던 원인이 변용적이었음을 지적한다.
평범한 사물을 통해서 인식의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극을 준 것이다.
단토는 말한다.

"팝아트 자체는 미국 고유의 업적이며,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도처에서 그토록 전복적이었던 것은 그것의 기본 입장이 변용되기 때문이다."

그는 팝아트가 평범한 것들인 일상적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들을 미술로 변용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추상표현주의는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들에 숨겨진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전제들에 기초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을 언급한 것이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이 원초적인 힘과 접촉하는 무당 노릇을 하려고 했음을 지적했다.
팝아트가 추상표현주의에 반발로 생겨난 미술운동이었으므로 단토는 팝아트와 추상표현주의와의 상이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가지의 상이한 점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추상표현주의가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이었다면, 팝아트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가장 일상적인 것들, 즉 콘플레이크, 수프 통조림, 비누 뭉치, 인기 영화배우, 만화 따위를 찬양했다. 그리고 변용의 과정을 거쳐 팝아트는 이런 것들에게 거의 선험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이에 앞서 분석철학자 단토는 철학이 종말에 이르게 된 것으로 1930년대 성행했던 분석철학을 꼽았다.
분석적 철학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형이상학을 무용하게 만들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단토가 아니더라도 1930년대부터 만연되었던 사고였다.
단토는 분석철학이 철학의 종말을 재촉한 것처럼 팝아트가 예술의 종말을 재촉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둘 다 인식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했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해방적이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파리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파리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말한 적이 있음을 들어 분석철학과 팝아트가 사람들로 하여금 정형화된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인식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을 지적한다.
미술은 이러저러하다든가 미술품이란 이러저러해야 한다든가 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것이 팝아티스트들의 성과라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우리를 억압한 과거의 인식체계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이전의 철학과 미술을 총괄적으로 조망했음을 지적한다.
분석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철학 전체와 대립했고 팝아트는 실제적 삶을 위해 미술 전체에 대립했음을 지적한다.

단토는 미래의 미술을 철학의 문제로 본다.
분석철학과 팝아트가 동일한 시기에 오래된 고정 관념의 인식체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며 둘 모두 인류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미학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원래 예술과 철학은 동반자 관계였는데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플라톤이 예술을 수준이 낮은 것으로 여겼으므로 철학과 거리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철학과 예술의 관계가 회복 내지는 정상화되었다고 본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50년대 중반 철학과 미술 둘 다 당시의 인간 심리 저 깊은 곳에 있던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그것들로 하여금 미국 장면 밖에서는 그토록 대단한 해방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팝아트에 대한 그의 희망적 청사진은 대단했는데 "팝아트가 의식 속으로 끌어올린 것은 우리 모두 세상에 홀로 남겨져 살아간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누구라도 바랄 수 있는 훌륭한 삶이었다"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팝아트가 심대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고 예술 개념에 있어 심원한 철학적 변화를 성취한 대격변의 모멘트였다고 말한다.

변용은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뒤샹은 평범한 것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레디메이드를 팝아트와 구별한다.
하지만 뒤샹이 미적인 것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고 미술의 경계선들을 시험한 공로는 인정하면서 미술사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사람이 없었음을 지적한다.
뒤샹과 팝아트 사이에 어떤 외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팝아트가 우리로 하여금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 중 하나이며 또한 팝아트의 성과로 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