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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플랑드르 미술의 영향


보스가 스헤르토겐보스 밖으로 나간 적이 있다는 기록은 없지만
초기 작품을 보면 위레트흐트에서 지낸 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후에 나타난 성숙한 양식에서 보여지는 플랑드르 미술의 영향으로 미루어 볼 때
네덜란드 남쪽을 여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는 중에 <성 율리아노의 십자가 처형 Crucifixion of St. Julia>을 그렸다는 주장이 있지만
휴고 반 데르 고스Hugo van der Goes(1440년경~82, 1467~82년에 주로 활동)의 포르티나리 세쪽 제단화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이탈리아 상인이나 외교관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이 형제회 기록에 남아 있는 건
1516년에 사망했다는 사실과 그해 8월 9일 형제회 친구들이 성 요한 교회에서 그를 추도하는 장례미사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보스에 관한 내용은 시문서와 형제회 기록이 거의 전부지만
17세기의 몇몇 자료를 통해 그의 작품 몇 점이 성 요한 교회에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지창조>가 제단 위에 있었고 <동방박사의 경배>는 성모 마리아 제단에 장식되었다.
1504년 부르고뉴의 미남 공작 필리프는 예로니무스 반 아켄Jeronimus van Aeken으로 불리운 보스에게 제단화를 주문했는데,
<최후의 심판>으로 양날개 패널에 <천국>과 <지옥>이 묘사된 세쪽짜리 커다란 그림이다.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빈 소재 세쪽 제단화를 필리프가 주문한 작품의 축소판 복제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원작은 1629년 프레데리크 헨리Frederick Henry 왕자의 네덜란드 군대가 스페인으로부터 스헤르토겐보스를 탈환했을 때 분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톨릭의 번영시대가 칼뱅주의자들의 금욕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 뮤지엄 그리고 개인이 소장한 상당수의 보스 작품은 원작을 복제 또는 모방한 것들이다.
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30여 점에 불과하고 그림과 소품 드로잉들이다.
원작을 보려면 마드리드의 프라도 뮤지엄에 가야 한다.
보스와 그의 작업장에서 제작한 주요 제단화 세 점과 소품 몇 점이 그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 중 초기에 제작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작품에 제작연대를 기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상이 심하고 후세 사람들이 덧칠을 했으므로
작품에 나타난 양식과 기교의 미묘한 차이를 들어 연대순을 확정짓는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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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와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정회원 

 

형제회는 1478년 교회 내 아직 공사 중이던 성가대석 북쪽에 부속예배당을 건립하기로 하고 교회 전문 건축가 알라르트 두 하멜Alart du Hamel을 책임자로 선정했는데,
훗날 두 하멜은 보스 양식의 엔그레이빙을 제작했다.
두 하멜은 성 요한 교회를 위해 많은 작업을 했으며 교회 본당 회중석과 성모 마리아 형제회 예배당을 장식하는 일을 했다.
일부 학자는 그가 교회의 창 위의 작은 박공gablet과 부축벽 날개flying buttresses에 식물 잎사귀 무늬를 장식한 것으로 본다.
시문서에 의하면 1504년 시가 그에게 선량공 필리프의 초상을 제작하라고 의뢰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가 이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가 제작한 몇 점의 판화가 보스의 작품과 유사해서 그가 보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 가족 대부분 형제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자연히 이 단체가 집행하는 갖가지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종종 연례행사에 사용되는 목조상을 도금하거나 채색하는 일도 했다.
형제회 장로들이 1475~76년에 예배당에 안치할 커다란 크기의 목조 제단 장식물에 관해 논의할 때
보스 아버지 안토니우스 반 아켄이 아들들과 함께 참석한 것으로 봐서
그가 예술고문직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식물은 1477년에 완성되었다.

1480~81년 형제회 문서에 보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삼대째 형제회의 정회원으로 적혀 있다.
정회원이란 형제회의 모든 규칙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하는 의식을 통해 받아들여졌으며
당시 정회원은 오십 명 남짓했고
그들에게는 성직자cleric의 직위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 직위는 결혼을 금하거나 성직을 직업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정화원은 수요일마다 집행되는 미사에 참여하고 형제회가 주최하고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그 밖의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다.

보스는 형제회로부터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그가 1493~94년에 새 예배당의 창문을 위한 착색유리를 디자인했으며
1511~12년에 십자가 처형을 그렸고
이듬해에는 샹들리에를 디자인했으므로 예배당은 일반 전통 예배당에 비해 훨씬 더 장려해졌다.
샹들리에를 디자인한 대가로 받은 돈이 적은 것으로 봐서 거의 헌신적으로 작업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는 형제회가 1512~13년 보스에게 샹들리에를 주문하면서 돈을 지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샹들리에가 현존하지 않아 어떻게 디자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550~51년의 기록에는 샹들리에 위에 있는 조각상이 부서져 복원하여 샹들리에에 땜으로 붙인 것으로 적혀 있어
보스가 디자인한 것을 황동 제작자가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가 디자인한 샹들리에는 애르트 반 트리흐트Aert van Tricht가 제작한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추정한다.
부서진 조각상을 복원한 사람은 메헬렌에 작업장을 갖고 있던 황동 제작자 야스파르Jaspar였으며 형제회 기록에는 1554년 6월 그에게 지불한 것으로 적혀 있다.
야스파르는 샹들리에를 청소하고 사라진 부분을 만들어 복원시켰다.
두 번째로 샹들리에를 청소한 것은 1580~81년으로
기록에는 "아주 검게 되었고 더러워졌다"고 적혀 있다.

보스가 활동할 시기에 스헤르토겐보스에는 두 명의 재능 있는 화가가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교회 전문 건축가이기도 한 알라르트 두 하멜과 미히엘 반 게메르트Michiel van Gemert였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엔그레이버였지만 엔그레이빙과 회화가 그들의 주요 직업은 아니었다.
두 하멜은 조각가로도 유명했으며
20년 동안 후기 고딕 건축물인 성 요한 교회를 재건하는 데 몰두했다.
금세공가 반 게메르트는 나이프, 맥주조끼, 쇠로 제작된 오브제에 인그레이브하는 기술에 탁월했다.
두 사람 중 두 하멜이 특히 보스와 가까운 사이였다.

작품에 모노그램미스트monogrammist 'bos with a knife'라고 길게 서명한 사람으로 학자들은 그가 미히엘 반 게메르트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모노그램 작품은 내용에 있어서 스헤르토겐보스 사람이 제작한 것이 분명하고 서명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반 게메르트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타당해보인다.
스헤르토겐보스는 15세기 후반과 16세기에 나이프의 생산지로 유명했으며 나이프를 스페인에까지 수출했다.
따라서 서명자가 스헤르토겐보스 사람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

당시 나이프의 손잡이에 장식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이런 장식은 나이프 제작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엔그레이버가 했다.
기록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 형제회가 1509~10년, 1510~11년, 1516~17년에 금세공가 반 게메르트에게 모두 29자루의 나이프에 형제회의 모토를 새겨 넣는 장식 일을 맡긴 것으로 되어 있다.
형제회는 일부 나이프를 자체에서 사용했지만 더러는 선물로 더러는 팔았다.
형제회는 1510~11년 그에게 뚜껑과 손잡이가 달린 큰 맥주 조끼 45개에 엔그레이브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그가 제작한 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보스가 타계한 1516년 8월 7일 그 주에 무게가 거의 2kg이나 되는 커다란 성체 현시대monstrance를 제작할 것을 주문받았는데,
두 하멜이 디자인한 것과 유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생존에 대가로 인정을 받았고 그렇게 불리었다.

보스가 생존한 시기에 활동한 착색유리 제작자들에 관해 알려진 것이 없다.
그들의 작품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이 패널화나 캔버스화를 그린 화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할 수 없다.
형제회의 기록에 의하면 다양한 착색유리 제작자들이 활동한 건 사실이다.
이들이 교회와 수도원의 창문을 장식했으며,
성 요한 교회 내에 있는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예배당도 장식했는데,
예배당의 장식은 부분적으로 보스가 디자인한 것을 근거로 했다.
형제회는 예배당의 새로운 창문 장식을 위해 착색유리 제작자 빌렘 롬바르트Willem Lombart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보스가 스케치한 것을 받아 제작하라'고 했다.
예배당에 관한 17세기 기록에는 '가장 예술적인 창문들 artificiosissima vitra'이라고 적혀 있으며,
주제들이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스도의 할례>, <수태고지>,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수태>였다면서
보스가 리넨에 그린 그림들을 롬바르트가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적혀 있다.

보스는 엠브로이더리를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1511~12년에 제작한 엠브로이더리에 대해 형제회가 지불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떤 것을 디자인했는지는 현존하는 작품이 없어 알 수 없지만 기록에는 십자가를 디자인했다고 적혀 있다.
무명작가가 1460년경에 제작한 제의chasuble를 위한 엠브로이더리에 파란색이 사용되었음을 보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이다.
제의 등에 실크 그리고 금색실과 은색실을 사용하여 십자가를 디자인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보스도 이런 재료를 사용하여 디자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에는 보스가 금색 제의에 십자가를 디자인했다고만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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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바보들의 배>


보스는 죄를 주제로 상징적으로 어리석은 행위로 묘사했는데 그에게는 무지가 죄였다.
성서에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가 곧 죄라고 적혀 있다.
그가 갖고 있던 계몽적·사회적 이념은 육욕적 성적 충동, 방탕함, 게으름, 낭비벽, 지나친 욕심, 분별 없는 성급한 행동, 욕구불만에 기인한 공격, 불안정, 변덕 등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가 찬양한 이상의 것들과 반대되는 덕은 욕심을 다스리는 자제력, 욕구불만을 다스리는 훈련, 겸손, 검약, 비축, 성급한 행동을 억제하는 조심성 등이었다.
가장 혐오한 것은 섹스에 대한 갈망으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고 보았으며 종교적으로 말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만든다고 보았다.
육욕적 열정을 보스는 가장 위험한 요소로 보았으며 이에 비하면 그 밖의 죄들은 상황에 따른 것이라서 비교적 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어리석은 행위에 의해 비롯되는 죄는 자신의 영혼을 망칠 뿐만 아니라 사회질서를 파괴하여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우려했는데, 이는 새로운 사고는 아니었고 후기 중세 문학에서 이미 반영되고 있었다.
쾌와 색욕에 대한 비난은 <폭음폭식의 우화 Allegory of Gluttony>와 <바보들의 배 Ship of Fools>에 잘 나타나 있으며 두 작품은 원래 하나의 패널로 구성되었다.

성직자 계급에 대한 보스의 비난은 <마술사>와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났지만 더욱 심하게 비난한 작품은 중기인 1480년과 1516년 사이의 창작으로 추정되는 <바보들의 배>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와 두 수녀가 배 안에서 농부들과 더불어 떠들석한 주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배 안의 구조는 기이하며 돛대는 잎이 무성한 나무이다.
부러진 나무가지가 배 뒤에 부착되어 있고 그 위에 광대가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이는 당시의 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세에 바보들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다.
1399년 프랑크푸르트 시는 밤에 벌거벗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미친 남자를 붙잡아 마인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기록에 의하면 1406년 밤 어부들이 미치광이를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마인츠로 운반했으며 1418년 프랑크푸르트 시민은 미친 여자들을 배에 태워 아샤펜부르크로 보냈다.
1427년 정신 나간 대장장이의 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예는 유럽 전역에서 예사로운 일이었다.
각 도시는 바보들만 사회로부터 추방한 것이 아니라 걸인, 날품팔이, 해직된 군인, 앉은뱅이, 병자들도 추방했다.
보스가 펜과 브라운 잉크로 스케치한 드로잉에서 이런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습작했음을 본다.
이런 사람들은 육지로도 추방되었지만 배에 실어 멀리에까지 보내는 건 보통이었다.
그래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아주 많았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인구의 30퍼센트나 되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배회하며 먹을거리를 찾아 다녔다.
중세의 성벽과 성문은 적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데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방랑자들 그룹이 성내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마을에 미치광이가 생길 때 마을사람들은 그 사람을 가두고 격리시켰다.
이들을 격리시킨 곳을 ‘바보들의 궤 Fool’s Chest’ 혹은 ‘정신병원 Madhouse’이라고 불렀으며 작은 오두막집이 보통이었다.
이들을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치유되지 못한 채 여생을 구박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바보나 미치광이들만 격리된 것이 아니라 심한 병에 걸린 사람들도 격리되었으며 이들은 오로지 신과 성인의 가호가 있기만 바랄 뿐이었다.
격리정책은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종교적인 이유가 컸다.
바보, 미치광이 , 심한 병을 앓는 사람들을 신의 저주를 받은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 예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 중에서 병자나 미치광이가 생기면 집에 가둬놓고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가족이 없는 사람은 마을사람들에 의해 ‘바보들의 궤’로 보내지거나 동네 밖으로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보스가 생존하던 때는 중세 말과 종교개혁이 막 시작되려던 때였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교회 문에 신학적 반박문을 내건 때는 1517년이었다.
중세의 사고가 급격히 달라지고 있을 때라서 바보와 미치광이 그리고 병자들을 신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믿는 경향이 퍽 줄어들고 있을 때였으며 이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줄 알던 때였다.
공장의 수가 늘어 도둑놈, 걸인, 게으른 자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켰고 일을 맡길 수 없는 바보와 미치광이들만 격리시켰다.
바보들을 배에 실어 먼 곳에다 버렸다는 증거는 없지만 보스의 <바보들의 배>를 보면 격리시킨 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보스는 단순히 이런 사회적 현상을 그린 것이 아니다.
배에는 수도사와 두 수녀도 타고 있으며 생소하게도 주연이 벌어지고 있다.
당시 수도사와 수녀는 각기 따로 살고 있었으므로 함께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면 이는 본분을 잃은 행각이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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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


보스의 종교관은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한계 상황과 운명이 순환적 이미지들로 나열되어 있다.
순환적 이미지들을 병렬하는 것은 중세에 있었던 일로 신앙수양, 도덕적·과학적 내용을 설명과 더불어 소개했으며 계절, 노동, 생일 관련 별자리를 표시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에 출간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De civitate Dei(City of God)』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일곱 가지 미덕’과 이에 반하는 ‘일곱 가지 죽을 죄’가 그림으로 묘사되어 바퀴 형태로 병렬되어 있으며 이해를 돕는 글이 아래 적혀 있었다.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독일 판화에는 도상적 형판이 있는데, 보스 작품과 유사하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 원형 중앙에 ‘하나님의 눈’이 있고 동공에는 석관에서 모습을 일으키고 드러낸 부활한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 때 창에 찔린 상처를 관람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석관 아래에는 반원형으로 글이 적혀 있다.
"조심하라, 조심하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일곱 가지 죽을 죄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죄명이 라틴어로 그림 하단에 각각 적혀 있다.
안주인이 식탁으로 나른 많은 음식물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 남자는 ‘폭음폭식 Gula’의 죄를 묘사한 것이고 난로 앞에서 졸고 있는 비대한 몸집의 남자는 ‘나태 Acedia‘를 의인화한 것이다.
나태한 자의 종교적 의무에 대한 불이행은 왼편으로부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여인의 로자리오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텐트 속 몇 쌍의 연인들은 ‘색욕 Luxuria’을 의인화한 것이다.
화려한 보닛을 쓴 악마가 거울을 들고 있는 것도 모르고 허영에 찬 여자가 새 모자를 쓰고 좋아하는 장면은 ‘자만 Superbia’을 묘사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분노 Ira’는 술집 앞에서 다투는 두 남자로, ‘탐욕 Avaricia’은 뇌물을 받는 판사로, ‘시기 Invidia’는 거절당한 구혼자가 노려보는 것으로 각각 묘사되었다.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이런 장면들은 네덜란드 전원이나 구체적인 가정용품들이 있는 실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죽을 죄의 순서는 6세기 교황 대 그레고리가 정한 것으로 그 후 전통이 되었으며 보스가 전통을 좇아 시각화했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에는 미숙한 부분이 보여 보스의 초기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후대 학자들이 작품에 나타난 의상을 관찰한 결과 1490년경 이전에는 유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져 1500년을 전후 한 중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간주한다.
일부 학자는 인물들이 땅딸막하고 서투르며 평편하고 외곽선이 경직되어 있는 데다 색채가 너무 밝아 보스의 다른 작품들과는 크게 차이를 보여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독창적 디자인은 보스가 고안했더라도 작업장에서 조수들이 완성시킨 것 같으며 ‘탐욕’과 ‘시기’에서의 수준 높은 인물 묘사만큼은 보스 자신이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세월이 오백 년이나 지났으므로 부분적으로 부식되었고 누군가에 의해서 덧칠된 데다 반복해서 복구했으므로 원래 솜씨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보스의 솜씨가 어디서 어디까지이고 어느 부분을 조수들이 그렸는지 확연히 구별할 수는 없더라도 이 작품에는 역동적 요소와 인간의 심리가 잘 나타나 있다.
구성에 있어서는 시계 방향으로 병렬시키는 건 전통 양식이었다.
14세기 영국 프레스코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원형이 발견된다.
죄의 장면들을 원형으로 병렬하는 건 세상에 만연하는 일반 죄에 대한 분류이지만 보스는 중앙에 ‘하나님의 눈’을 삽입하여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죄로 변형시켰으며 죄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모티프를 강조했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 위 띠 안에는 라틴어로 구약성서의 구절이 적혀 있다.
"이 생각없는 민족, 철없는 것들, 조금이라도 셈이 슬기로왔더라면 알아 차렸을 터인데!(신명기 32:28~29)"
"그들에게 내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결국 어찌 되는가 두고 보리라.(신명기 32:20)"

신을 거울에 비유하는 건 중세 문학에서 흔히 발견된다.
독일 인문학자 야곱 빔펠링은 에르푸르트Erfurt 교회에 적혀 있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라는 말이 젊은 자신에게 감동을 주어 좀더 경건한 삶을 살게 만들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보스가 그림 중앙에 ‘하나님의 눈’을 그려넣은 건 이 같은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네 귀퉁이에는 원형의 작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으며 죽음, 최후의 심판, 천국, 지옥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
네 종말은 인과응보로서 보스 당시 네덜란드인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다.
네 종말은 네덜란드 수도원에서 말년을 보낸 카르토지오 수도회의 수사 드니의 저술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의 저서는 북유럽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1477년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1500년 이전에 이미 46차례에 걸쳐 재판되었으며 네덜란드어로 재판된 것만도 무려 13차례나 되었다.
네 원형화에는 미숙한 부분이 많아 보스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조수들이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곱 가지 죽을 죄를 범한 자들이 각각 처벌을 받는 지옥의 장면은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묵시록적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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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


인간의 어리석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 The Stone Operation(the Cure of Folly)>이다.
바보를 치료하기 위해 머리에서 돌을 제거하는 수술조차 바보스러운 행위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16세기 바보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 후 이런 내용의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그것들이 보스의 작품을 모사한 것인지 영향을 받아 변형시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은 보스의 어떤 비종교화보다도 많은 유형으로 현존한다.

보스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이것은 매우 익살스러워서 관람자는 미소를 지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가슴에 띠를 둘러 의자에 묶인 사내를 외과의사가 칼로 머리를 절단하고 돌 제거 수술에 들어갔다.
오른편 수도사와 수녀가 수술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도 보스가 작업장에서 조수들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에 표정이 없고 묘사가 미숙해서 조수들이 그린 것 같으며 배경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보스가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풍경을 배경으로 들에서 벌어지는 수술은 원형 안에 묘사되어 있고 상단과 하단에는 네덜란드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master snijt die keye ras, mijne name is Lubbert Das.
마스터, 돌을 속히 빼내주십시요. 저는 루베르트 다스입니다.
Master, Cut the stone out quickly, my name is Lubbert Das.

다스Das는 네덜란드 문학에서 주로 저능아의 이름에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 혹은 바보의 머리 속에 돌이 박혀 있다고 믿었으며 머리를 가르고 그 속에 있는 돌을 끄집어내면 어리석음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생각했을 뿐 실재에 적용할 수 있는 수술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리석은 자 혹은 바보의 미련한 행위가 도무지 사라지지 않으므로 그런 식으로 치유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 것이다.
당시 수술 관련 책에는 정신이상자를 수술하면서 해골에 구멍을 뚫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뇌에서 돌을 끄집어낸다는 엉터리 수술이 소설에 등장했으며 수술을 하고 나니 더 어리석어졌다는 이야기가 전래된다.
돌 제거 수술의 테마를 브뢰겔을 포함해 네덜란드 화가들이 다룬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이 이런 수술에 기대를 걸은 것으로 짐작된다.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외과의사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깔대기와 수녀 머리 위에 얹혀 있는 붉은색 책이다.
수도사가 들고 있는 주전자는 제거한 돌을 넣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돌 제거 수술에 수도사와 수녀가 입회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엉터리 수술에 입회한 것으로 보아 성직자 계급을 비난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 같다.
놀랍게도 외과의사가 머리에서 꺼낸 것은 돌이 아니라 오른쪽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꽃이다.
더러 학자들은 이 꽃을 튤립으로 보고 16세기 네덜란드어로 튤립이 어리석고 우둔함을 뜻해서 보스가 돌 대신에 튤립을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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