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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의 조화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지면이 충분하지 않아 백남준과 앤디 워홀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어 아쉬운 점이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 같은 환경 뉴욕에서 활약했지만 만난 적이 없고 서로가 서로를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을 묶어 한 권의 책을 쓰는 데 있어 독자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언론의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서로의 활약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미술의 장르를 창안해내고 이 분야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영화를 제작한 워홀이 비디오아트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이며, 영상을 재료로 3차원의 작품을 제작한 백남준이라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대중적인 이미지였기 때문에 팝아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홀에 관해서 혹은 팝아트에 관해서 침묵한 것 또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비록 두 사람이 서로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을 한 권의 책에서 다룰 충분한 근거는 있는데, 그것은 두 사람 모두 대중적인 이미지와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이미지 혹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를 화랑에 걸 수 있는 회화작품으로 변형시킨 놀라운 재능을 가진 워홀은 실크스크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캠코더가 시판되자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전위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서양으로 가서는 과학문명의 총아인 텔레비전을 예술의 도구로 삼기 시작하면서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좇아 자신의 작품 경향을 만들어나갔다.
예술가들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할 경우 그들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백남준과 워홀은 과학과 예술을 조화시키는 예술을 추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활약한 1960년대는 과학의 결실이 풍성하게 수확된 시기였다.
과학과 예술을 조화시키는 노력이 없었다면 과학은 건조해졌을 것이고 예술은 문명에 뒤쳐졌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두 사람은 이런 분야에서 선구자들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많은 그 밖의 예술가들이 과학과 예술을 적절하게 접합시켜 다양한 작품들을 쏟아내게 된다.
그 후 나타난 홀로그래피아트Holographic art, 컴퓨터아트Computer art, 커뮤니케이션아트Communication art 등 이런 분야들을 테크놀로지아트 혹은 전자예술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을 수 있는데, 전자예술의 선구자는 비디오아트와 레이저아트를 실행한 백남준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업적은 두고두고 미술사에 빛날 것이다.

과학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워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제작을 통해 보여준 그의 감성, 기량, 야망은 복합체로서의 그를 재조명하게 만든다.
그의 주요 영화작품을 이 책에서 다루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미술사가와 평론가들은 사회문화적 표상을 만들어낸 워홀과 더불어서 영화에 나타난 그의 미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기계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경우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이 고도로 전문적이며, 시각적이고, 거대한 힘을 과시하게 된다.
그러나 워홀의 영화와 백남준의 멀티 모니터에 나타나는 영상들 중심에는 인간이 있어 두 사람의 미학이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작품에서 관람자를 참여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데, 관람자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초대받는다는 개념에서 탈피하여 보다 친밀하게 상호대화적인interactive 차원에서 참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공통점은 존 케이지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케이지가 백남준에게 미친 영향은 이 책에서 충분히 언급되었지만 워홀 또한 케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점을 좀 더 살펴본다면 일본 선불교의 영향으로 이는 동양의 사상이 서양미술에 그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이미 예고한 대로 과학문명의 발달은 서양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을 불러오게 했고, 그런 공황으로부터 탈출을 그들은 동양의 명상적인 문화에서 찾았다.
백남준이 홀로 서양으로 가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으로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양의 문화로부터 원기를 공급받고 있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음악에서도 발견되는 대로 1960년대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화해하고 조화를 이룬 시기였으며, 이는 동서양 모두에 바람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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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기 중에서도 고등사기입니다.”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백남준은 1984년 6월 23일 고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비디오아트의 황제가 되어 귀국했다.
백남준의 귀국으로 그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6월 26일자 <조선일보>에 ‘신화를 파는 것이 나의 예술’이란 제목으로 정중헌이 기고한 인터뷰기사는 백남준이 말한 “예술은 사기”라는 구절로 화제가 되었다.

“한 마디로 전위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지요.
어느 시대이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엉터리와 진짜는 누구에 의해서도 구별되지요.
내가 30년 가까이 해외에서 갖가지 해프닝을 벌였을 때, 대중은 미친 짓이라고 웃거나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백남준의 퍼포먼스와 비디오아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그가 한 말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서 가능하다.
그가 한 말이 바로 그의 예술이다.
예술은 사기 중에서도 고등사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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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대형 매트릭스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백남준은 1982년에 32대의 컬러텔레비전과 여덟 대의 흑백텔레비전을 사용하여 <비라미드 V-yramid>를 제작했다.
이것은 1987년에 제작한 <보이스/보이스 Beuys/Boice>와 그 이듬해에 제작한 <다다익선 The More, The Better>와 함께 기념비적인 스케일의 작품이다.
휘트니 뮤지엄의 회고전에서 선보인 <비라미드>의 형태는 영상의 내용에 있어서 <TV 십자가>와 같다.
휘트니 뮤지엄이 구입 소장한 <비라미드>는 비디오와 피라미드의 합성어이다.
이 작품은 직각을 이루며 각각 20대의 텔레비전이 쌓아올려졌는데, 위로 갈수록 화면이 점점 작아진다.
이 작품에 사용된 비디오테이프는 특별히 편집한 <글로벌 그루브>와 <레이크 플레이시드 ‘80 Lake Placid &#3980;>의 연속적인 장면이며, 여기에 누드소녀, 피아노건반이 인쇄된 숄, 비디오테이프 <조곡 212>(1977)의 가옥 정면 등이 추가되었다.
1980년에 개최된 동계올림픽 장면을 담은 <레이크 플레이시드 ‘80>은 제13회 동계올림픽 기념예술제 조직위원회로부터 제작을 의뢰 받아 현지에서 촬영한 것이다.
전체 장면은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스키, 스키점프 등과 같은 다양한 스포츠 종목의 동작에 집중되었다.
또 다른 모티프는 비행기와 거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알렌 긴스버그이다.
상영시간 4분의 짤막한 테이프이지만 1981년에 개최된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사용했다.
자료는 순전히 시각적인 관점에서 선택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이후 지속된다.

백남준이 1982년에 제작한 <삼색 비디오 Tri-Color Video>는 여태까지 제작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큰 멀티 모니터 설치로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선보였다.
256대의 컬러텔레비전과 128대의 흑백텔레비전이 사용되었고 여덟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다양한 영상을 반영했다.
384대의 텔레비전은 4대를 한 단위로 가로 세로 8블럭 12블럭의 거대한 직사각형을 이루면서 화면을 위로 향한 채 퐁피두센터의 무대 바닥을 거의 채웠다.
퐁피두센터를 찾은 관람자들은 이 설치작품을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비디오 바닥으로 생각했다.
백남준에 의하면 비디오아트는 늘 절반만 예술에 속하고 나머지 절반은 일상의 문화에 속한다고 했다.
<삼색 비디오>는 프랑스 국기를 모방한 것으로 청색, 백색, 적색의 영상을 반영했다.
백남준은 <삼색 비디오>를 통해 프랑스인에게 거대한 전자국기를 선사한 셈이다.
헝거리 조각가 니콜라스 셰퍼Nicolas Schaffe는 300m가 넘는 인공두뇌학적인 조명탑을 건설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고, 조명탑을 세울 수만 있다면 레이저로 삼색을 하늘에 쏘아 프랑스 국기를 만들겠다고 장담했지만 셰퍼의 아이디어는 물리적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큰소리만 치고 실행하지 못한 셰퍼에 비하면 백남준의 전자 프랑스 국기는 프랑스인에게 대단히 흡족할 만한 것이었다.

전시회를 위해 발행한 화첩 표지에 백남준이 이 작품을 위해 콜라주로 스케치한 것이 실렸는데, 미국 우표 여섯 가지를 배열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같은 우표가 네 장씩 한 단위를 이루며 하나의 정사각형이 되고 있음을 본다.
다양한 우표의 모티프들은 384대의 모니터 위에 대각선으로 배열되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우표에는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1980년의 소방열차, ‘글 쓰는 능력-민주주의의 뿌리’라는 표제가 붙은 모래상자와 깃털, ‘국민의 보상 청원 권리’라는 표제가 붙은 여자 얼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1950년에 흑인 정치가로 처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랄프 붕체Ralphe Bunche, 그리고 인디언 추장 ‘미친 말’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이다.
이 우표들의 공통점은 인권과 평화로서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다.
지성이 결여되었다는 말을 듣는 백남준은 우표를 선정한 이유를 그것이 가장 싸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이저에 대한 백남준의 관심은 1980년에 제작한 <레이저 비디오 공간 Laser Video Space>에서 구체화되었다.
레이저laser(light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에 대한 관심은 1965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는 소논문들에서 레이저를 이용하여 소수의 TV 방송국의 독점방송을 극복하고 다수의 전문방송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상을 피력했다.
레이저는 처음에는 군대에서만 사용되었으나 농축된 가는 빛으로 흩어지지 않고 곧게 나아가는 레이저빔의 특성에 예술가들이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근거가 일찍이 1917년에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저를 실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에 들어서서였다.
레이저는 1965년에 일부 예술가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시각적 설치, 시청각적 설치, 거대한 크기의 환경작품, 그리고 홀로그래피라는 특수 영역에 사용되었다.
백남준의 레이저작업은 방송보다는 레이저를 이용하여 비디오 이미지를 공중에 띄우는 영상작업으로 진전되었다.
백남준은 1980년 3월 25일 모마에서 강의했고 그 내용을 큐레이터 바바라 런던Barbara London이 정리하여 ‘임의의 추출방식의 정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백남준은 말했다.

“21세기 회화는 극도로 복잡하면서도 극도로 단순한 프로그램이 가능한 전자벽지가 될 것이다.
규격화된 전자캔버스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정보가 가득 차 있더라도 그것을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어느 항목이건 어느 페이지이건 찾고 싶은 곳만 찾아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나 텔레비전을 볼 때는 만들어진 순서대로 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에 임의로 찾아볼 수 있는 임의 추출random access 방식이 개발될 때까지는 책이 존재할 것이다.”

<레이저 비디오 공간>은 백남준과 사진작가이자 디자이너 호르스트 바우만Horst H. Baumann의 공동 설치작품이다.
바우만의 기술적 도움이 없었다면 백남준은 성취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오래 전부터 비디오 프로젝션 작업을 해온 바우만은 1971년에 첫 프로젝트를 암스테르담에서 실현시킨 적이 있었다.
그가 백남준과 함께 이 작품을 제작한 것은 “전통적으로 규격과 모니터에 한정되어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해체하고 더 큰 공간적 효과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화면을 설치하지 않은 채 바른 비디오 환경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980년 가을 뒤셀도르프에서 그리고 이듬해 초 베를린에서 선보인 <레이저 비디오 공간 I>은 하나 또는 두 개의 레이저 외에 일곱 대의 모니터를 활용한 작품이다.
모니터의 영상이 레이저 프로젝션으로 나타났는데 여기에는 커닝엄의 춤추는 장면도 있어 그의 춤은 무중력 속에 활보하는 우주인처럼 보였다.
이 영상 자료는 1975년에 제작한 <백남준의 머스에 의한 머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페터 콜프가 편집한 이 비디오테이프는 댄스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모은 것으로 추상적이며 선 모양을 한 영상의 특성 때문에 레이저 프로젝션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레이저 비디오 공간 I>이 모니터 화면에 동시에 나타나는 영상을 복사해 비디오 설치의 확대를 묘사한 데 반해 <레이저 비디오 공간 II>에는 모니터가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레이저 비디오 공간 I>에 사용된 동일한 비디오테이프가 두 개의 레이저에 의해 공중에 투사되었다.
이런 형식의 비디오 환경을 1982년 휘트니 뮤지엄에서의 회고전에서도 볼 수 있다.
<레이저 비디오 공간 II>에 사용된 레이저 기술이 영상의 비물질화를 한층 진척시켰다.
멀티 모니터 설치가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을 임의의 숫자로 확대시킨 것이라면 레이저 프로젝션에서는 레이저 영상이 윤곽의 흐려짐이 없이 모든 지면에 투사되어 벽과 바닥, 천장 또는 자유롭게 공간에 걸린 그레이팅(격자)에서 동시에 관찰될 수 있었다.

<레이저 비디오 공간 I>에 이어서 개발된 <비디오 레이저 환경 Video Laser Environment>은 백남준의 멀티 모니터 설치와 바우만의 레이저 프로젝션을 결합시킨 것이다.
36대의 모니터가 직사각형으로 접합되었고, 비디오벽에 설치된 레이저는 양측 벽에 대칭적으로 투사되어 가느다란 영상들을 천장에 투사했다.
<글로벌 그루브>와 백남준이 레이크 플레이시드 동계 올림픽 장면을 담은 <레이크 플레이시드 ‘80>으로 편성된 비디오테이프가 레이저 프로젝션과 비디오 설치에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모니터의 나열이 전자상가의 텔레비전 벽면을 상기하게 했고, 공간이 밝아 레이저 프로젝션이 쉽게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니터의 다면체는 새로운 요소로 백남준은 <비디오 문>(1982)에서 이런 형식을 취했다.
브라운관의 전선을 바꿔 접합함으로써 영상을 거꾸로 혹은 측면을 바꾸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기법을 1963년 부퍼탈에서 사용한 적이 있었지만 멀티 모니터 설치작품에서는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가 1982년 베를린의 국제 무선전신 전시회에 출품한 <비디오 환경>은 <비디오 레이저 환경>의 형식을 약간 변형한 것이었다.
<비디오 환경>에서는 레이저가 사용되지 않았다. 32대의 모니터를 두 개의 직사각형 평면이 되게 했으며, 각 평면은 각각 4대의 모니터로 만든 네 개의 열이 되게 했다.
화면의 다면체는 비슷한 회로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비디오테이프도 <글로벌 그루브>와 <레이크 플레이시드 ‘80>의 합성 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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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가 된 워홀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1965년 5월 워홀은 소나벤드 화랑에서 열릴 전시회를 위해 파리로 갔다.
소나벤드가 워홀의 일행을 위해 비행기 표를 사서 보냈다.
소나벤드 화랑은 2차 세계대전 기간 피카소가 살던 집 근처에 있었고 워홀은 피카소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피카소를 좋아하면서 “피카소의 모습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가 마티스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그렇고 피카소에 관해 말할 때도 그저 “좋다” 또는 “대단하다”라고만 말했는데 과연 그가 대가들의 미학을 제대로 알고나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

워홀은 자신이 회화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 제의를 받아들일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중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 미쳐 있었고, 특히 할리우드 영화에 매료되어 “미국 영화가 최고다.
미국 영화는 분명하고 실제 같으며 영상이 놀랍도록 훌륭하다.
미국 영화는 말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다.
말을 적게 할수록 더 완벽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차례 할리우드로 가서 제작자들을 만났지만 할리우드로 진출하고 싶은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워홀이 파리에서 돌아오자 친구들이 공장에서 ‘가장 훌륭한 50인 Fifty Most Beautiful People’ 깜짝 파티를 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때마다 워홀은 누가 들어오는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았는데, 유명가수 주디 갈란드,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차례로 들어왔다.
모두 워홀이 우상처럼 여기던 스타들인데 그들이 워홀의 파티에 참석한 걸 보면 워홀이 유명인사가 된 것이 분명했다.

이 시기에 워홀과 에디가 뉴욕의 가장 이상적인 연인으로 알려졌다.
워홀의 영화 <음탕한 계집>(1965), <레스토랑>(1965), <부엌>(1965) 등에 출연한 에디는 <부엌>에 관해 “아주 비논리적인 영화로 성격과 동기가 없는 완전히 웃기는 영화다”라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쓴 타벨은 “내가 할 일은 무의미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었으며, 의미 없는 말을 쓰는 것이었다.
...
앤디가 ‘줄거리를 없애라!’ 하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성격 없는 배역들을 등장시켜야 했다”고 했다.
워홀과 에디가 함께 외출하는 일이 잦았고 함께 파티에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T셔츠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고 파티에 간 적도 있었다.
워홀은 말했다.
“사람들은 에디가 나를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내가 바랬던 것이 아니라 에디가 바랬던 것으로 내게도 놀라운 일이다.”
잡지 <에스콰이어>가 워홀에게 인생의 동반자로 누굴 꼽겠느냐고 묻자 워홀은 “에디다. 그녀는 나보다 더 내게 잘 해준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1965년 9월 에디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워홀이 스타로 알려진 만큼 자신은 유명하지 못하다면서 투덜거렸고 워홀과 헤어져야겠다고 말했다.
에디의 친구들은 워홀과 헤어지면 배우로서의 인기가 하락할 것이라면서 워홀 옆에 바짝 붙어있으라고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워홀은 에디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는데, 에디는 자신이 워홀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워홀은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에디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갔다.
워홀의 다음 영화에 에디의 역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나빴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주일에 5-6백 달러를 지불하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워홀은 아직 본전을 못 건지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에디를 주인공으로 쓰는 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영화에 몰두하면서도 틈이 나면 워홀은 그림을 제작했다.
캠벨 수프통조림도 다시 수십 점 제작했는데, 그중 한 점은 캠벨사의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전기의자도 여러 점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지만 밝은 색을 사용한 것 외에는 새로운 시도가 없었다.
1965년 10월 펜실베이니아 대학 현대미술관 관장 그린이 주최한 자신의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워홀은 친구들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갔다.
에디와 워홀은 주로 밤에 다투었고 낮에는 태연하게 연인처럼 행동했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중적 관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전시회 하루 전 날 많은 사람들이 워홀을 만나기 위해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TV 카메라맨이 라이트를 들이댔으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리는 바람에 그림에 부딪치기도 했다. 관장 그린은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림을 망치든지 도난이라도 당할 것 같아 관리인에게 벽에 걸린 작품들을 모두 치우라고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워홀에게 몰려와 사인을 요구했고 워홀은 두어 시간 사인을 해주다가 뒷문으로 달아났다.
워홀은 나중에 술회했다. “별난 전시회였다.
미술관에 그림은 없고 사람들만 있었다. 1960년대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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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영화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워홀의 작업실 ‘소방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다.
어빙 블럼도 와서 영화배우들의 초상화는 뉴욕보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시하는 게 낫다면서 페러스 화랑에서 다시 개인전을 열자고 제의했다.
워홀은 블럼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1963년 9월 마지막 주 페러스 화랑에서의 전시를 위해 워홀은 캠코더를 메고 친구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전시에서 엘비스와 리즈의 초상화를 소개했다. <붉은 엘비스>란 제목으로 수십 점을 제작한 워홀은 이번에는 로큰롤의 왕 엘비스를 기타를 든 모습 대신에 권총을 들고 막 쏠 태세인 카우보이의 모습으로 제작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실제 사람의 크기보다 확대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영웅으로 보이도록 했다.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미남배우 말론 브란도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있는 모습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
권총과 모터사이클은 남성을 상징하는 오브제들로 여성들에게 엘비스와 브란도를 성적 우상으로 인식시키기에 적절했다.
블럼은 워홀이 엘비스를 한 상자 보냈다면서 모두 합하니까 198cm 높이에 폭이 457cm에 달하더라고 말했다.
리즈의 초상은 1m 정사각형으로 모두 12점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주 머무는 동안 워홀은 2시간짜리 흑백유성영화 <타잔과 제인>을 제작했다.
깡마른 메드가 정글의 왕자 타잔 역을 맡았고 곱슬머리 나오미 레빈이 제인 역을 맡았다.
<보편적인 사랑>에서 괴물 거미 역을 맡았던 레빈은 워홀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를 제작한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제인 역을 맡겠다고 자청했다.
말랑가의 말로는 레빈은 워홀에게 홀딱 빠진 많은 여자들 중에 하나라고 했다.
워홀은 자신이 묵고 있는 베버리힐스 호텔 목욕통에서 벌어지는 장면과 레빈이 옷을 홀랑 벗고 수영장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도 필름에 담았다.
올덴버그 부부도 단역을 맡아 열연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뒤 워홀은 계속해서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작자들과 어울렸는데 그들 대부분은 리투아니아 태생의 조나스 메커스가 주도한 영화제작자협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레빈으로부터 메커스를 소개받은 워홀은 <키스>를 그에게 보여주었고 <키스>를 본 뒤 메커스는 워홀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키스>는 워홀이 로스앤젤레스로 떠나기 전부터 구상했던 것으로 50분짜리 흑백무성영화였다.
한 쌍의 남녀가 다른 동작 없이 키스하기에 여념이 없는 장면을 가까이서 찍은 필름이다.
촬영 장소는 레빈의 아파트였으며 레빈이 말랑가, 시인 에드 샌더스, 배우 러퍼스 콜린스와 50분 동안 키스하는 장면이 전부였다.

1963년 말 소방서를 비워줘야 했기 때문에 좀 더 큰 장소를 물색하던 워홀은 47번가 이스트 231번지의 건물이 마음에 들었다.
전에 공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에는 엘리베이터와 공중전화도 있었다.
워홀은 그곳을 부르기 좋게 공장이라고 했다.
그는 공장을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면서 벽에 은색 스프레이를 뿌렸고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아치 세 곡에 알루미늄 호일을 부착했다.
책상, 의자, 복사기, 화장실, 마네킹, 공중전화까지도 은색으로 통일하고 바닥도 은색으로 칠했다.

워홀이 공장으로 이주하고 처음 제작한 영화는 33분짜리 흑백무성영화 <이발>이다.
이것 도한 독특한 영화로 디자이너 존 다드의 머리 깎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워홀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을 주제로 선택하여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행위에 역점을 두었다.
반복이라지만 똑같은 행위는 있을 수 없어 유사한 행위들의 집합 안에서 매 행위가 새롭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다.

다음에 제작한 영화는 <식사>였다.
출연자는 스테이블 화랑에서 알게 된 로버트 인디애나였다.
<식사>는 1964년 2월 2일 일요일 아침 맨해튼 남쪽에 있는 인디애나의 화실에서 촬영되었다.
인디애나에 의하면 워홀이 그에게 준 지침은 단 한 마디 “이 버섯을 먹어라”였다고 한다.
3분짜리 필름 9통을 찍었으니 인디애나는 27분 동안 버섯을 먹었던 것이다.
<잠>과 <식사> 모두 사람의 기본 동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64년 한 해에 그가 제작한 영화가 많았고 제목을 붙이지 않은 영화도 많았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사람들의 동작은 극히 제한되었고, 클로즈업된 얼굴은 오랫동안 무표정한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장면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따라서 배우가 눈이라도 깜빡할라치면 클라이맥스에 이른 것처럼 부각되었다.
워홀은 10분 동안 눈을 세 번밖에 깜빡거리지 않은 배우를 가리켜서 최고의 배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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