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 본문에서 다룬 사자의 성질에 관한 내용은 고전 문헌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아엘리아누스·플리니우스·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사자에 관한 기록과 좋은 비교를 이룬다.
그러나 직접 내용을 빌려왔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다른 동물들이 가진 습성을 사자의 성질로 바꾸어 설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자신의 꼬리를 휘저어서 발자국을 지우는 여우의 습성이나, 눈을 뜨고 잠자는 토끼의 습성, 그리고 새끼를 혀로 핥아서 깨우는 곰의 습성을 사자에게 모은 것으로 보인다.

1 창세기 49: 9
라틴 성서의 “Catulus leonis Iuda a praeda fili mi ascendisti requiescens accubuisti ut leo et quasi leaena quis suscitabit eum”은

“유다는 사자의 새끼다.
내 아들아, 너는 먹이를 올라탔구나.
너는 수사자처럼, 그리고 암사자처럼 길게 누워서 쉬고 있구나.
그러니 누가 그를 건드릴 수 있으랴”라고 옮길 수 있다.

2 요한묵시록 5: 5
그러나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분이 이 일곱 봉인을 떼시고 두루마리를 펴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3 요한 1: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4 시편 24: 8-10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야훼이시다.
싸움터에서 그 용맹 떨치신 야훼이시다.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영광의 왕은 만군의 야훼 그분이시다.

5 아가 5: 2

6 마태오 26: 64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것은 너의 말이다” 하시고는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또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22: 69
“사람의 아들은 이제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7: 55
이 때 스데파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7 시편 121: 4

8 골로사이 1: 15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9 창세기 49: 9
라틴 성서의 “Quis suscitabit eum,” 곧 “누가 그를 건드릴 수 있으랴”는 공동번역에서 누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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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마뱀이 뱀처럼 청춘을 회복하는 성질이 있다고 기록한다.
시력을 회복할 뿐 아니라, 에페소 4 : 22와 골로사이 3 : 9의 기록을 인용함으로써 구태를 벗는다는 내용을 덧붙인 것도 도마뱀과 뱀의 유사한 성질을 가리킨 것이다.
본문 제11장 ‘뱀’과 비교해서 읽는 것이 좋다.

1 에페소 4: 22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골로사이 3: 9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렸고

2 말라기 3: 20
너희에게는 승리의 태양이 비쳐와 너희의 병을 고쳐 주리라.

3 즈가리야 6: 12
공동번역에서 “이 사람을 보라.
그 이름은 새싹이니, 이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새싹이 돋으리라”로 옮겼으나, 라틴 성서의 “ Ecce vir Oriens nomen eius et subter eum orietur”를 바로 옮기면 “보라, 그의 이름은 떠오르는 사람이니, 그의 휘하에서-만물이-떠오를 것이다”라는 뜻이다.

민수기 24: 17
공동번역에서 “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는 라틴 성서의 “Orietur stella ex Iacob,” 즉 “야곱에게서 한 별이 떠오를 것이다”를 옮긴 것이다.

루가 1: 78
공동번역에서 “하늘 높은 곳에 구원의 태양을 뜨게 하시어”로 옮겼으나, 라틴 성서의 “ Visitavit nos Oriens ex alto illuminare”는 “우리의 떠오르시는 분이 높은 곳에서 빛을 뿌리는 것을 보았다”라고 옮길 수 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떠오른다’라는 뜻으로 풀이한 것은 ‘Oriens’를 옮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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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아새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 라틴 명으로 ‘칼라드리우스caladrius’라고 불리는 당아새는 로만 문화권에서 ‘칼란드라calandra,’ 곧 종달새와 같은 새로 혼동해서 쓰였다.
실제 당아새의 색깔과 달리 본문에서 검은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이 온통 하얀 새라고 설명된 것은 자연관찰보다는 그리스도의 속성을 빗대기 위해서 상징적 의미가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당아새에게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본 것은 플루타르코스( quaest. conv. V 7. 2)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엘리아누스( Aeth. 3. 8)나 플리니우스( N.H. 30. 94)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황달병에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병의 나쁜 기운을 들이마시고 다시 뱉아 내는 당아새의 성질은 오랜 전설에서 기원한다.
이 가운데 히포낙스( 48 D)의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플라톤( Gorgias 494 B)은 당아새가 공연히 삼켰다가 뱉아 내는 성질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 어로 당아새를 의미하는 카라드리오스charadrios와 비슷한 카라드라charadra가 ‘틈새’나 ‘심연’을 의미하고, 당아새는 곧 ‘바위 틈에 보금자리를 틀고 사는 새’라는 뜻으로 생긴 말이었으니, ‘당아새는 삼키고 또 뱉아 내는 새’라는 말은 단어의 운을 의도적으로 뒤섞은 표현이었을 것이다.

1 신명기 14: 17
공동번역에서 “정한 새는 어떤 것이든지 먹을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새는 먹지 못한다.
…사다새, 흰독수리, 가마우지…등이다”라고 옮겼으나, 여기서 가마우지에 해당하는 ‘charadrios’는 ‘당아새’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로만어권 국가에서 나온 피지올로구스 판본에는 ‘charadrios’를 ‘calandra,’ 곧 ‘종달새’로 잘못 옮기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당아새는 피지올로구스에 서술된 것처럼 ‘온통 하얀’ 깃털의 새와는 다르다.
그리스도의 속성에 빗대기 위해서 당아새의 색을 의도적으로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다.

2 요한 I서 1: 5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그대들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3 요한 14: 30

4 베드로 I서 2: 22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습니다.

5 마태오 8: 17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사야 53: 4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이사야 53: 11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하리라.

이사야 53: 12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

6 시편 68:18
당신께서 포로들을 사로잡아 높은 곳에 오르시니
사람들이 조공을 바쳤고,
반역자들도 야훼 하느님 계신 곳에 찾아왔사옵니다.

에페소 4: 8 성서에도,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사로잡은 자들을 데리고 가셨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7 요한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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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칸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 새끼를 유난히 아끼는 펠리칸의 성질은 아엘리아누스가 기록하고 있으나 자신의 살을 찢어서 피를 흘리는 자기희생의 면모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본문의 내용은 이집트의 호라폴로Horapollo가 5세기 무렵에 남긴 《히에로글뤼피카Hiero -glyphica》에 기록된 펠리칸의 모습과 유사하다.
여기에서 펠리칸이 새끼들을 지키려고 자신의 날개를 태우거나, 독수리의 공격을 받고 제 허벅지 살을 찢어 던지거나, 새끼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여서 살리는 습성 등이 서술되었다.
펠리칸이 옆구리 상처를 벌려서 흘린 피로 죽은 새끼들을 다시 살려 내는 주제는 뚜렷한 기독교적 상징성 때문에 피지올로구스의 책에서 가장 사랑받는 내용이 되었다.

1 시편 102: 7
라틴 성서의 “Similis factus sum pelicano solitudinis”는 “나는 홀로 있는 펠리칸과 같은 처지가 되었으니”로 옮길 수 있다.
공동번역에는 시편 102: 6의 구절에 해당한다.

2 이사야 1: 2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3 요한 19: 34
군인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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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 ‘nycticorax’의 원 뜻은 ‘밤까마귀’ 또는 ‘올빼미’이다.
루터 성서는 이것을 ‘올빼미Ka촸zchen’로, 취르허 성서Zu촵cher Bibel에서는 ‘부엉이Eule’로 옮겼다.
밤을 좋아하는 올빼미는 대개 악의 상징으로 이해되지만, 본문에서는 올빼미의 선한 속성이 강조되었다.

1 시편 102: 7

2 이사야 9: 1-2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

마태오 4: 16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루가 1: 79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3 루가 12: 32

4 신명기 14: 11-16
공동번역에서 “정한 새는 어떤 것이든지 먹을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새는 먹지 못한다.
…부엉이, 따오기, 백조… 등이다”라고 하였으나, ‘nycticoracem’은 ‘부엉이’가 아니라 ‘올빼미’로 옮겨야 옳다.

5 II 고린토 5: 21

6 II 고린토 11: 7
여러분을 높이려고 내가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한 것이 죄가 된단 말입니까?

7 이상은 로마서 9: 25이다.
그리고 아래의 인용에 해당한다.

호세아 2: 25
나는 이스라엘을 내 것으로 이 땅에 심으리라.
로루하마를 귀여워해 주고
버린 자식을 “내 자식”이라 하리니,
그제야 입을 열어
“나의 하느님” 하고 부르리라.

I 베드로 2: 10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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