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미술품 바라보기
(다음은 석유공사 기관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동시대의 예술가들에 의해서 다양한 미술품들이 연일 생산되고 있어 양과 질에서 엄청나다. 어떤 작품은 평론가의 일견에도 과연 미술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렇다면 일반 관람자들의 혼란은 더욱 클 것이다. 관람자가 평론가에게 “동시대 미술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요?” 하고 물을 수 있다. 필자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선 질문에 들어있는 주요 단어들의 개념을 정립해야 여기에 답할 수 있다. ‘동시대’, ‘미술품’, ‘감상’의 의미를 알면 질문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동시대’는 한 세대를 말하는데, 과거에는 세대의 기간이 짧았지만, 오늘날에는 50년을 말한다. 50년 전부터 지금까지가 동시대로서 1960년부터 지금까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미술품’에 대해 ‘시각예술’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그 본질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의견이 1980년대 초에 제기된 이래 많은 예술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지만,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런 현상은 미술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시를 ‘언어예술’, 음악을 ‘소리예술’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그 본질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동시대인은 과거에 정의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정의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미술, 시, 음악이 한정된 지역, 특히 유럽의 몇 나라들을 중심으로 권위를 가졌을 때는 그 지역 사람들의 공통된 ‘감상’ 방법이 정의가 되어 통용되었지만, 1980년대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문화가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자각과 더불어서 어느 한 문화가 권위를 독점하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위에서 ‘감상’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미술품’과 연관시켜서 사용했다. 공통된 감상 방법이 미술품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공통된 감상 방법이란 예를 들면 회화란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말한다. 그래서 그런 선입견에 일치하지 않을 때 관람자는 “저것은 그림이 아냐!” 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화란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견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즉 기원전 400년 전부터 생성되어 서양인이 고수해온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많은 회화론이 선입견을 갖게 만들었다. 선입견, 혹은 감상 방법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과거에는 서양에서 아카데미, 동양에서 화원이란 기관이 생겨 화가들을 훈련시켰으며, 오늘날에는 미대가 그 역할을 맡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 나라와 나라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이 되면서 모든 문화가 존중되고 동등하게 취급되면서 서양식 회화의 선입견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회화에는 반드시 어떠해야만 한다는 규정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미대는 화가를 훈련시킬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없게 되었다. 미대 무용론은 그런 의미에서 제기된 것이다.

1980년대 이래 양식과 장르 사이의 구분이 허물어진 해체주의 경향으로 절대양식의 붕괴와 과거의 모든 양식을 포함해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양식이 이전의 양식에 비해 더 낫다, 혹은 더 진전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양식이 동등한 위치에서 표현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우월한 양식이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미술사와 일상문화로부터 양식을 차용하는 소위 혼성모방이 두드러지게 되었고, 기존의 양식과 형상을 공공연하게 차용하거나 모방, 혹은 변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복제의 발달, 대량전달, 정보화 등이 작품의 독창성과 가치를 약화시키며, 그로 인해 창작과 평가, 감상의 방법에 변화가 왔다. 관람자가 동시대 미술품 앞에서 혼란스러운 건 당연하다.

감상과 관련해서 필자는 ‘일상의 오브제’가 ‘미술의 오브제’로 ‘변용’되는 것에 주목하라고 권한다. 미술관이나 화랑에 진열된 미술품에서 일상의 오브제, 예를 들면, TV 모니터, 일상적인 장면을 찍은 필름, 우리 주변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물품, 폐품, 플라스틱, 용기, 건축자재 등이 발견된다. 그것들이 미술관이나 화랑 밖에 진열된다면 어느 누구도 미술품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주된 개념은 ‘변용’이다. 변용이란 물질의 본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이 달라진 걸 말한다. 오래 교제한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가 어느 날 사랑스럽게 보인다면 그 사람이 변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팝아트, 아상블라주, 비디오아트를 포함한 미디어아트, 정크아트, 펑크아트, 대지아트, 해프닝, 바디아트, 퍼포먼스아트, 아르테 포베라, 네오지오 등 다양한 장르의 미술품에서 일상 오브제의 변용을 발견한다. 일상 오브제와는 다른 용도,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람자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관람자는 일상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차이가 오로지 예술가와 관람자의 시각, 혹은 바라보는 태도에 달렸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런 장르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방법인 것이다.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의 작품을 예로 들면 그 특성이란 반복repetition과 무nothing, 혹은 하찮음nothingness이다. 거기에는 반복되는 이미지 외에 아무것도 없다. 워홀은 그런 작품들을 통해 이미지의 의미와 정체성을 물었다. 진부한 것에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예술가와 관람자의 몫이다. 반복은 관람자로 하여금 그것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정말, 사랑 해”보다는 “정말, 정말, 정말, 사랑 해”가 더 중요한 표현처럼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관람자는 일상의 평범하고 통속적인 재료를 사용한 작품을 감상할 때 드러나는 평범함과 통속성 이면에 숨겨진 예술가의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을 보지 못하면 감상에 실패하는 것이다.

동시대 미술품 대부분은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으로 이뤄졌다. 디자인에 고도한 솜씨가 내재되었기 때문에 디자인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동시대 미술품에 TV 모니터와 동영상물, 그리고 설치가 더욱 많이 사용되고 있다. 삼차원의 표현이 예술가의 의도를 전달하기에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들을 디자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쉽게 이해된다.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모니터가 사용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을 예로 들면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미지가 개별적으로 그리고 전체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한다면 아주 간단한 공식에 따라 변하면서 반복될 뿐이란 걸 알게 된다. 어려운 음악이라도 멜로디가 변하는 과정을 숫자로 적으면 소나타, 론도 등 간단한 공식에 따라 변하면서 반복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동시대 미술품에는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는 공식이 없다. 다만 예술가와 관람자의 바라보는 의도와 감상이 있을 뿐이다. 관람자의 역할이 과거와 달리 창작의 일부분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미술품이 미술품으로 인정받으려면 관람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미술품이 관람자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미술품이 아니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당분간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걸 보류해야 한다. 왜냐면 미술품은 소통의 대상물이다. 미술품에는 예술가 자신의 의도가 담겨있어야 하고 그것이 관람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미술품이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술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관람자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가 혹은 평론가가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단지 보이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시각 현상을 우리는 미술품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필자는 끝으로 관람자에게 “누가 동시대 미술품을 두려워하랴?” 하고 자신 있게 말하라고 권한다. 이해가 되지 않거나 맘에 들지 않으면 당당하게 “그건 미술이 아냐!” 하고 말해야 한다. 그러기에 앞서 작품 이면에 숨겨진 예술가의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을 발견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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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낯익은 1960년대 장르들의 반복과 복제
[미술비평] 표류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2008년 06월 23일 (월) 14:32:50 교수신문 editor@kyosu.net
 


   
  □ 키치 61 제프 쿤스, ‘진부함의 도래’, 1988. 분홍색의 뚱뚱한 돼지가 목에 리본을 두른 채 날개 달린 천사에 끌려오는 장면을 보고 사람들은 매혹적이고 천진하단 인상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쿤스는 키치를 고귀한 것으로 만든다.  
 
컨템퍼러리 아트가 표류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초부터다.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특정한 훈련을 통해 고유한 영역을 점하게 된 전문가란 인식을 부정했을 때, 혹은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 할 훈련이란 없음을 알고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에, 그때부터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런 자의식은 1960년대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 초는 외적으로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다분했다.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밥 딜런의 저항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은밀히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에 반발했고, 이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에 대한 반발이 미국과 영국에서 팝 아트를, 유럽에서 누보레알리슴을 생산했는데, 명칭만 다를 뿐 유사한 이런 운동의 배경은 해방이었다. 이 운동의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로서 그는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누상자인 브릴로 상자를 모사하여 1964년 봄에 화랑에서 선보였다. 실재와 외양에 있어 진부한 비누상자에 불과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미술품으로 바라봤으며, 이는 미술품이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입증했다. 해방과 관련해 1964년에 괄목할 사건이 많이 발발했으며, 비틀즈가 에드 설리반 쇼를 통해 미국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미국 전역과 곧 이어 전 세계를 휩쓴 해방정신의 상징이자 촉매가 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미술품은 더 이상 실재의 그림자나 실재의 모방이 아니라 실재 자체라는 인식이 1960년대에 보편화됐다. 아티스트들은 더 이상 소수의 엘리트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진부한 매체들을 선호했다. 그리고 대중이 미술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복제를 통해 다량 생산했다. 그들은 모든 매체를 받아들였고, 버려진 산업폐기물과 쓰레기소각장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물질들로 작품을 제작했으며, 자신의 몸을 재료로 사용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배설물까지도 미술품의 재료로 사용했다.



   
  □ 1964년 4월 21일 뉴욕 스테이블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개막일. 앤디 워홀이 브릴로 상자 조각품들 사이에서 서 있는 모습이다.  
 
우리가 현재 미술관과 화랑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작품 형식이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고도의 자의식 운동인 팝 아트와 누보레알리슴을 시작으로 1970년대 개념이 미술가들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해방의 무드가 다양한 장르들을 생산해냈는데, 아상블라주와 정크 아트, 펑크 아트, 설치, 키치, 시추에이션 아트, 비디오 아트, 해프닝, 퍼포먼스 아트, 바디 아트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성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컨템퍼러리 아트는 1960년대에 생산된 장르들의 혼재 현상에 불과하며, 수준에 있어 1960년대에 머물고 있다. 그 시대의 다양한 아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컨템퍼러리 아트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아울러서 질이 매우 저하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념의 해체를 시도하는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띠지만 이 역시 1970년대의 개념미술에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브제와 개체들이 미술품 내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 생산하고, 반복과 복제가 의미의 대상, 혹은 기호를 소멸시킨다.


팝 아트의 전형인 키치 아티스트들은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에 굶주린 대중, 혹은 감상적 자기 향락을 좋아하는 대중을 위해 문화의 질이 낮고 인습적인 가상 실재를 그대로 소재로 이용하고 있다. 키치는 복제를 통해 늘어나고 있는데, 복제를 통한 키치의 생산은 워홀에 의해 이미 극단적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그는 1963년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전시회에 대응해 이 유명한 작품을 서른 번이나 복제하면서 ‘기술복제시대의 미술작품’을 양산했다. 실크스크린 인쇄방식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키치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으로 각광받았다. 그의 복제화는 원화와의 관계에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미술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한 당시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했다. 워홀은 “서른 개가 하나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복제를 하게 되면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는가 하는 것인데, 라스코 동굴화의 복제화에서 사람들이 원화와 같은 체험을 하는 데서 복제에서도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입증됐다.


복제가 용인되자 만화, 광고, 낭만을 특징으로 하는 키치 아트가 등장했으며, 이는 팝 아트가 통속적인 회화세계를 다루고 원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는 데서 더 나간 것이다. 예술에서의 엘리트주의를 철저히 배척한 제프 쿤스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만을 제작한다. 「진부함의 도래」는 어린 천사가 목에 리본을 두른 분홍색 암퇘지를 예술로 끌어들이는 장면이다. 쿤스는 진부한 것, 즉 키치를 예술로 끌어들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하지만 내 마음에 들어’ 하는 반응을 유도한다.


유머와 아이러니는 키치 아트의 생명이다. 그만큼 대중이 키치를 사랑하고 애호하기 때문에 이런 예술이 생겨난 것이다.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좋은 취향이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키치를 진지한 미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촌티패션, 찢어진 청바지, 배꼽티, 복고열풍을 통한 값싼 재료로 모조한 옷들이 키치에 속한다. 음악에서의 웅얼거림, 무의미한 소리가 키치에 속한다. 사람들은 본래 금지되었던 것, 감동적인 것,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알게 된 것이다.


키치 아트가 팝 아트의 변종으로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성행하는 미술은 1960년대 이미 생산된 장르들의 혼재에 불과하므로 컨템퍼러리 아트는 거의 반세기 동안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김광우 / 미술평론가

필자는 뉴욕 시티칼리지와 포담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주요저서로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프랑스미술 500년』, 『백남준 VS 앤디 워홀』,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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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소개하는 작가론은 김주영 씨의 부탁으로 쓴 것입니다.
내가 김주영씨을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 파리에서였습니다.
그때 그 분의 안내를 받아 오베르로 가서 반 고흐와 테오의 무덤을 본 것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번 광주 비엔날레에서 황토 토굴을 보신 분이 있다면 그것을 소개한 작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국외로 보내는 자료라 영어로 쓴 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다보니 어색한 부분도 있을 줄 압니다.) 

  

김주영의 예술적 정신에 관하여
김주영의 첫 퍼포먼스 <스님의 명상>이 1992년 파리대학 정원에서 행위된 이래 여태까지 해온 설치와 퍼포먼스의 제목들이 시사하듯, 그녀의 예술적 정신 혹은 미학은 다른 이들이나 대상들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녀의 행위와 조화를 잘 이룬다.
자신을 유물론자이며 유심론자라고 했듯이 그녀는 자신의 체험만을 믿을 뿐 어떤 류의 개념들도 부정한다.
그녀에게 인생은 오직 환상이며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회복시켜 주는 궁극적 요소는 자각이다.

1995년 뽕뚜아즈에서 그리고 이듬해 베를린에서 보여준 <나비의 꿈>은 퍼포먼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설치를 하는지 그 방법을 잘 말해준다.
어느날 그녀는 나비 한 마리가 정원의 백일홍 위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그것은 그대로 그녀의 설치가 되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늦가을 어느 날 귀가하는 길에 죽은 나비를 발견하고는 나비의 혼을 위해 제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비의 꿈>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틀리에 앞 정원에서 죽은 나비를 불에 태우고 그 재를 광목천으로 만든 길(폭 0.7미터, 길이 20미터)을 따라 시내로 가서 물에 띄워보냈다.

그 무렵 그녀는 박인경 씨와 대화하던 중 작곡가 윤이상 씨를 머리에 떠올렸다.
아리아 <나비의 미망인> 악보를 보고 매우 아름답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윤이상 씨와 교신을 했다. 베를린에 있는 윤이상 씨의 집 근처 연못가에서 그녀는 <나비의 꿈>을 행위했는데 불행하게도 퍼포먼스가 있기 불과 몇 주 전 윤이상 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와 윤이상 씨 모두가 언급한 나비는 장자가 말한 바로 그 나비였다.
인생에 관한 장자의 철학은 환상이었으며 또한 인간과 나비의 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는 김주영에게 아주 많은 걸 시사했다.
장자를 통해 그녀는 우주의 만물에는 신성한 혼이 있으며 만물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물을 사랑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먼지와도 같은 무생물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김주영은 프랑스 뽕뚜아즈의 자신의 아틀리에 이층에 종이로 커다란 검정 육면체 상자를 설치했다.
그 상자를 그 나비에게 바치고 일년 동안 명상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검은 방>의 전부이다.
그녀의 인식의 힘은 대단했는데 상자 안에서 명상하면서 어두운 밤 우주 안에서의 고독을 느낄 수 있었다.
상자는 그녀에게 우주였다. 절대의 자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그녀는 공간과 시간에서 어떻게 탈출하는지를 배웠다.
그 상자 안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 상자 안에서는 자의식이 가능했다.

1996년 어느날 우연히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 남자는 평생 길에서 가면을 쓴 채 춤추며 노래를 부르다 길에서 죽었다.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제를 통해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이것이 <중광대, 그 삶의 방법>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녀는 그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천 장 복제하여 아틀리에의 벽과 바닥에 붙였다. 그리고 쌀을 여러 군데 쏟아부었는데 그 남자가 평생 굶주린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을 50센티미터 높이의 나무상자 세 개에 붙여서 위패로 사용하며 관람자들을 초대하여 사진들을 밟고 다니게 했으며 사진과 쌀을 태웠다.
이 퍼포먼스는 지신에게 제를 드리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중광대란 이름은 그녀가 붙인 것으로 단순히 거리의 삐에로란 뜻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버려진 아이였다.
그는 길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하루밤을 보낼 그날의 안식처를 찾았다.
어느날 그는 길모퉁이에 죽어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돌보지 않은 그 남자의 슬픔을 동정했다.
그의 혼의 굶주림을 채워주기 위해 쌀을 태우는 것으로 그에 대한 동정심을 표시했다.

<어느 기생의 영혼제>는 1993년 서울에서 소개한 것으로 이것 또한 그녀의 동정심의 발로였다.
그때는 이름 모를 기생을 위한 것이었다.
김주영은 불쌍한 인생들을 위로해주기 바란다.
1997년의 <같이 먹읍시다>는 쌀과 감자로 굶주린 모든 혼들을 만족시켜주는 것이었다.
이 퍼포먼스를 프랑스의 그녀 아틀리에에서 소개했다.
설치는 전체 작품의 일부였다.
기다란 테이블(폭 0.7미터 길이 2.13미터) 위에 30kg의 쌀을 붓고 문간에 25kg의 감자를 가져다 놓았다.
누구라도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게 했다.
동쪽과 북쪽으로 난 창문을 열고 새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와서 먹게 했다.
그녀는 이를 음력 8월 15일에 행위했는데 이 날이 한국에서는 추석이다.

삶의 방법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그녀로 하여금 생태학에까지 관심의 폭을 확장하게 했다.
하루는 죽은 물고기를 한 마리 발견했다.
오염된 물이원인이었다.
그 물고기를 플래스터로 뜨고 가는 광목띠로 싼 후 검정색을 칠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리 위에 올려놓은 후 꽃밭에 설치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관람자들과 함께 그 물고기를 위해 촛불의식을 거행하면서 유리 위에 색가루를 뿌리고 그 위에 야생화를 바쳤다.
그리고 그 앞에 가부좌를 하고 새벽 4시 촛불이 다 탈 때까지 명상에 잠겼다.
이것이 <공해로 죽은 물고기를 위하여>였다.
사흘 후 이 오브제를 아틀리에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녀는 예술품을 만들지 않고 예술을 행위한다.
그녀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만들기보다는 하나의 행위인 것이다.

불은 그녀에게 과거와 미래를 화해시키는 하나의 연장이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을 화해시키는 것이 그녀가 하는 행위의 목적이다.
불행한 삶을 산 혼들을 위로하고 다음의 생에서는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 그녀의 설치와 퍼포먼스의 주요 목표이다.
그녀는 부적과 환생의 효력을 믿는다.
그녀는 부적을 태우고 불이 불행을 삼킨다.
그녀는 1998년 인도와 네팔을 여행할 때 마을에서 많은 부적을 태웠는데 그 마을들은 오랑가바 마을, 아그라 마을, 제퍼 마을, 제살매르 마을, 포카라 마을, 바라나시 마을 등이었다.
즉흥적으로 그녀는 <부적의 불꽃>을 행위했다.

그녀의 작품 제목들은 우리로 하여금 현대판 무당처럼 행위하는 그녀의 예술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만약 그녀의 목적과 그것을 이루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당과 같은 그녀의 행위에 동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예술적 정신은 매우 단순하다.
그녀는 사람, 동물, 벌레, 사물 등에까지 동정심을 표한다.
그녀는 물질이 주는 만족을 배격한다.
그녀에게 궁극적인 가치는 정신적인 즐거움 혹은 평온한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녀의 작품 제목들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스님의 명상>(1992), <윤회의 논리>(1993), <제 5의 계절>(1994), <지나가는 존재>(1995), <흔적>(1995), <창; 동구 밖>(1995), <하늘로 간 달팽이>(1997), <고슴도치, 안녕>(1999), <어느 말의 아름다운 환생을 위하여>(1999), <만다라>(1999), <이름 없는 깃발들>(1999), <떠도는 무명의 영혼들이여; 등잔불제>(2000), <신목>(2000), <새야, 새야>(2000) 등이 있다.

지난 해 그녀는 <고려인; 그 슬픈 족적의 순례>를 소개했다.
기차를 타고 강압에 의해 유랑을 떠난 사람들의 통로 블라디보스톡, 카바로브스크, 노보스브리스크를 경유하여 알마 아타에까지 갔다.
그녀는 충청북도 청원군 중말에서 출발하여 알마 아타의 우츠 토베까지 장장 7천 킬로미터를 다녀왔는데 9월 22일에 떠나 10월 2일에 돌아왔다.
그 순례에서 수집한 자료를 편집하여 금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소개했다.
그녀는 황토 굴집을 설치했는데 당시 고려인이 살던 집을 재현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히로시마 조센징>을 소개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조센징은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하해서 부른 말이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약 7천 명의 조센징이 죽었다.
김주영은 그들의 혼을 위로하려고 한다.
나는 그녀가 이 퍼포먼스를 성공적으로 이끌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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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드가와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1834~1917)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를 묶어서 말할 수 있는 공통점은 프랑스 전통회화를 유지 발전시킨 데 있다.
두 사람 이후 전통회화의 맥이 끊어진 것을 볼 때 두 사람은 전통회화의 마지막 보루였다.
프랑스 전통회화는 다비드와 앵그르로 이어지는 역사화와 인물화였으며 미적 강령은 일찍이 그리스 회화에서 성취된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한 이상주의였다.
프랑스의 소묘 전통을 최고의 수준으로 완성시킨 앵그르의 선묘는 관능적인 느낌을 주어 낭만주의에 가까운 표현력을 발휘했고 그는 아카데미에 방향성과 권위를 부여했다.
이상적인 미의 추구는 프랑스 회화의 특징이었으며 이를 추종한 화가가 바로 드가와 르누아르이다.

19세기 프랑스 회화를 주도한 것은 낭만주의였으며 일상적 현실의 단조로움에 반발한 낭만주의의 한 측면은 이국 취향이었다.
이국 취향은 고갱의 경우 타히티에서 삶을 마감하는 현실 도피로도 나타났다.
평범한 현실에 숭고함을 부여하려는 노력도 낭만주의의 태도였다.
19세기 초 프랑스 회화의 가장 취약한 분야는 풍경화였다.
프랑스 회화의 선구자들 푸생과 클로드 로랭이 일찍이 풍경화를 그렸지만 인물들을 묘사하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역사적 풍경화였고 풍경화를 고유한 장르로 발전시킨 것은 19세기 중반에 활약한 바르비종 화파였다.
바르비종 화파란 퐁텐블로 숲 외곽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 테오도르 루소를 비롯한 화가들이 풍경화를 주로 그린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풍경화는 19세기 말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서 독립된 장르가 되었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상주의의 세계적 명성은 프랑스 전통회화의 종말을 의미한다.
19세기 말 드가와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자로 불렸지만 다른 인상주의자들과는 달리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이상을 구현하면서 프랑스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드가가 7살 연하의 르누아르를 만난 것은 훗날 인상주의로 불리게 될 화가들의 모임에서였다.
1862년 르누아르, 모네, 바지유, 시슬레 등 훗날 인상주의의 주역이 될 화가들은 스위스 태생의 글레이르의 파리 아틀리에에서 수학하면서 친구가 되었으며, 이들은 살롱전을 통해 프랑스 화단에 이름을 날린 마네를 중심으로 카페에서 자주 만났다.
그들은 마네가 1864년 새로 이사한 바티뇰 불바드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주로 만났으며 이들은 ‘바티뇰 그룹’ 또는 ‘마네파’로 불리었다.
드가가 2살 연상의 마네를 처음 만난 것은 1863년 루브르 뮤지엄에서였고 마네가 그를 게르부아로 오게 해서 젊은 화가들에게 소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제1회 인상주의 그룹전이 1874년 4월 15일~5월 15일에 열렸을 때 드가는 1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드가는 모두 8차례에 걸쳐 열린 인상주의 그룹전에 7번이나 참가하여 ‘인상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독자적인 양식을 구사했고, 그들과는 달리 풍경화보다는 실내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묘사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특기할 점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대각선에서 바라본 장면이나 그림 가장자리에 인물이 잘리기도 하는 낯선 구도를 사용했다.
드가의 작품은 자발적인 장면과 분위기 그리고 솔직한 행위가 스냅사진처럼 포착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외관적인 관점이고 그가 매우 신중한 태도로 구성한 결과이다.
몰래 들여다보는 장면처럼 그리는 것이 바로 그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구성인 것이다.

드가는 파스텔로 그리기를 선호했으며 1880년대 시력이 나빠진 후에는 빠른 속도로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는 파스텔화를 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시력이 나빠지자 유화를 그리기 어려워져 밀랍으로 모델링을 하기 시작했으며 1890년대에 시력이 더욱 나빠지자 조각에 전념했다.
그가 회화에서 선호했던 모티프는 조각의 모티프이기도 했는데, 달리는 말, 목욕하거나 몸을 치장하는 누드 여인, 발레리나 등이었다.
이런 조각들은 그가 타계한 후에야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말년의 거의 20년 동안 드가는 거의 실명상태였으며 이 시기에 은둔생활을 했다.
피사로는 드가를 가리켜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칭찬했고 르누아르는 그가 “로댕보다 더 뛰어난 조각가”라고 극찬했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르누아르는 파리 시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그렸는데, 몽마르트르에는 상점 종업원, 식당 종업원, 잡부, 모델, 연예인들이 대거 거주했고 카페가 많아 밤이면 더욱 붐볐다.
르누아르는 귀엽게 생긴 어린이, 꽃, 자연의 경관, 여인의 초상 등을 특유의 따뜻한 느낌을 주며 화사한 색채로 그려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작품을 제작했고,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지만 1880년경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0년대에 관절염을 앓기 시작하고 1897년 자전거를 타다 팔이 부러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유명해진 후에는 고전적 주제, 특히 여인의 누드와 어린 소녀를 즐겨 그리면서 신화에서 주제를 얻기도 했다.
그는 더욱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면서 인체의 형태를 풍만하게 그리고 부드럽고 둥글게 표현했다.
1912년부터는 휠체어에 탈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으며 간병인의 도움으로 자유롭지 못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감동했으며 자신도 회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르누아르의 아들이며 유명한 영화감독인 장 르누아르는 1962년에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를 썼으며 이 책은 그 해 프랑스와 영어로 출간되었다.

<드가의 초상>, 사진, 드가의 동생이 1895~1900년에 찍은 것이다.

드가의 <늘어진 옷을 걸친 서 있는 모습>, 1860~62년
26~28살 때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할 때 그린 드로잉이다.
선으로 정확하게 인체와 의상을 묘사하는 것은 아카데미가 추구한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프랑스 회화의 전통이 되었고, 드가는 앵그르의 제자로부터 이런 훈련을 받았다.
제자를 방문한 앵그르가 드로잉 훈련을 받는 드가를 보고 “젊은이, 선으로 그리게. 선은 회화의 생명일세”라고 격려해준 말을 드가는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드가의 <목욕 후>, 1883~84년
드가는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을 많이 그렸는데 마치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바라본 모습처럼 모델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는 모델로 하여금 목욕할 때 그리고 목욕 후 몸을 말릴 때 취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포즈를 취하게 했으므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당시 프랑스 여인들의 솔직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듯 그는 파스텔로 인체와 방의 내부를 매우 정교하게 묘사했으며 따라서 파스텔화를 고유한 장르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드가의 <댄스교실>, 1874년
이 작품은 댄스교실에서의 한 순간을 포착한 스냅사진처럼 보이지만 매우 사려 깊게 미리 준비한 인물들을 배열한 것이다.
드가는 인물 하나하나를 미리 습작을 통해 준비했다가 합성시키는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했는데 오른편의 댄스 교사는 이미 타계한 사람으로 사진에서의 모습을 실제로 그곳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다.

바지유의 <르누아르의 초상>, 1867년

르누아르의 <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아내>, 1868년경
르누아르와 함께 수학한 시슬레는 파리에서 영국인 부자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영국으로 보내져 언어와 상업을 공부했는데 아버지가 사업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업보다는 회화에 더 관심이 많은 시슬레는 곧 파리로 돌아왔고,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르누아르의 말로 ‘유쾌한 사나이’인 그는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르누아르는 이 작품에서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내를 매달리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르누아르의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위한 습작, 1886~87년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린 드로잉에서 르누아르의 뛰어난 소묘력을 볼 수 있다.
선을 중요시하는 것은 프랑스 회화의 전통으로 드가와 르누아르가 이어받았다.
인체의 가장자리를 흰색으로 칠한 것은 인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런 유연하고 아름다운 선은 채색에서 사라지게 되지만 사실적 형상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한다.

르누아르의 <일광욕하는 사람들>, 1918~19년
이 작품은 타계하기 얼마 전에 그린 것으로 화면에 두 여인이 나란히 누워있지만 동일한 여인으로 포즈를 달리 하게 해서 합성한 것이다.
모델은 러시아 여인으로 르누아르의 아들 장과 결혼했다.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화사한 색을 사용했으며 붓질을 짧게 하면서 여러 색을 섞어 사용하는 방법은 그의 독창적인 양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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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로네와 쿠프카의 오르피즘


색을 사용하여 색의 면을 만들고 색의 톤으로 공간을 암시하는 양식으로서의 오르피즘Orphism은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와 구 체코슬로바키아 화가 프란티셰크 쿠프카Frantisek Kupka(1871~1957)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오르피즘은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칭으로 시인은 이를 입체주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간주했다.
시인이 오르피즘을 입체주의의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것으로 본 시각은 당연했는데,
당시 입체주의가 매우 성행하고 있었고, 그는 입체주의 외의 회화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며, 들로네가 입체주의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컬러 챠트와 같은 들로네의 작품은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에 의해서 이미 예견되었다.
쇠라와 시냐크의 회화는 붓을 세워 점을 찍듯이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한 색의 분할로서 순색의 색점으로 그리는 것이었으며 작품의 규모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점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쇠라 작품에서 이런 접근 방식은 강렬한 빛의 효과를 주는 동시에 형태를 견고하고 명확하게 한다.
쇠라의 분할주의는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앙리 마티스가 주로 영향을 받았다.
들로네는 쇠라의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색과 색의 대비는 역동성과 공간의 깊이감 외에도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추상화로 나타났으며 신지학 또는 절대 정신에 대한 화가의 사고를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지만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회화에 몇몇 화가들이 전념했다.
특히 쿠프카가 음악과 영적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회화에 심취했으며 그 밖에 바실리 칸딘스키, 피트 몬드리안, 파울 클레 등이 이런 동일한 동기에서 색면 대비의 회화를 추구했다.
쿠프카를 포함하여 이들 네 사람 모두의 공통점은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음악을 모티프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영매의 능력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나타나는 체험을 한 쿠프카는 자연히 종교와도 같은 신지학에 관심을 쏟게 되었으며 이런 신비주의의 경향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다수의 작품으로 나타났다.
신지학은 오늘 날 병적 이성주의로 간주되지만 당시에는 가장 지성적인 신비주의였다.
쿠프카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하고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음악에서 유추한 시각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쿠프카는 야수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지개색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들로네보다 먼저 거의 완전 추상에 도달했지만 들로네는 알려진 예술가였고 쿠프카의 이름은 낯설었기 때문에 파리 사람들은 들로네가 먼저 완전 추상에 도달한 화가라고 생각했다.

피카소에 대해 유난히 경쟁심이 많았던 들로네에게는 쿠프카와 같은 영적 동기는 없었다.
그는 색채를 풍부하게 하고 추상적 형태의 표현적 특성을 강화시킴으로써 입체주의의 엄격한 구성에 시적 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입체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전환시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야 파리 화단에 자신의 입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믿은 들로네는 쿠프카와는 달리 내적 요구로부터 이런 회화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외적 대상을 단순화하고 그 대상을 입체주의의 장점을 살려 다각도에서 바라보듯 다양한 색면들로 묘사하여 리드미컬한 효과가 나도록 했다.
색면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등장하게 되는 키네틱 아트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오르피즘 회화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칼리그람 Calligramme’의 토대가 되었다.
시인은 오르피즘의 원리를 시에 적용하여 시어를 배열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의 원리에 의하면 서로 무관하거나 대비되는 부분들이 임의적이고 부적절하게 병치되었을 때 구성의 각 요소들은 논리적 혹은 관습적 방식보다는 오히려 충돌과 대비를 통해 상호 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르피즘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문학, 음악, 조형 예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개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다양한 인식의 표현,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즉각적인 직관, 혹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연속된 사건들에 대한 순간적이며 집중된 직관을 의미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현재’라는 심리적인 개념을 미술과 문학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로베르 들로네, <커튼 사이의 에펠탑>, 1910
입체주의의 효과가 아니라면 들로네는 980피드나 되는 높은 에펠탑을 캔버스에 모두 그려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각도에서 바라본 장면을 한 캔버스에 묘사함으로써 높은 탑을 부서뜨려 나타낼 수 있었다.
들로네는 에펠탑 맞은편에 위치한 호텔 방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에펠탑을 여러 점 그렸다.

로베르 들로네, <동시 대조: 해와 달>, 1913
그림에는 제작연대가 1912년으로 적혀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그린 것으로 본다.
당시 들로네뿐 아니라 몇몇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제작연대를 앞당겨 적었는데 자신들이 먼저 성취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킨 것들로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추상이다.
그는 자율적인 색채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순수 색면들이 서로 침투하고 회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로베르 들로네, <창문>, 1912~13
들로네는 색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색채의 동시 대조를 통해 색채는 역동성을 찾게 되며 그림에서 색채의 구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이는 현실 표현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로베르 들로네,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 1914
들로네가 이 그림을 그리기 5년 전인 1909년 7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5분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루이 블레리오가 자신의 단발비행기 블레리오 11호를 타고 프랑스 칼레 근처 초원을 이륙하여 도버 해협을 날라 32분 후에 착륙한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타고 하늘을 나른 것이다.
5년 전의 이 사건을 모티프로 29살의 들로네가 가로 세로 각각 2.5미터의 큰 정사각형으로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 역사상 처음 비행한 그를 치하했다.
그는 그림 하단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최초로 하늘에 동시에 떠오른 태양 원반들을 위대한 비행기 제작자 블레리오에게 바침, 1914”

들로네는 선명한 색채로 몇 덩어리의 크고 작은 원반들을 컬러차트처럼 그렸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반들의 얽힘 속에 블레리오 11호의 프로펠러와 바퀴, 그 밖에도 조그맣게 그려진 바삐 일하는 기술자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항공역사를 장식하는 또 다른 영웅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이중 날개의 비행기도 보인다.
이 작품에서 모든 색채가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원반의 수를 대폭 증가함으로써 그는 관란자로 하여금 힘찬 시각적 운동감을 맛보게 해주며 빙빙 도는 듯한 느낌, 흘러가는 느낌, 또한 움직이는 기계에 의해 우주의 개발이 이루어진다는 암시를 준다.
들로네는 태양이 펼치는 불꽃놀이로 하늘을 정복한 블레리오의 위업을 찬양했다.
1909년 10월 14일 블레리오의 단발비행기는 날개를 접어 동체에 붙인 채 공화국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북부역에서부터 공예 학교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블레리오를 열렬한 환호로 환영했다.

프란티셰크 쿠프카, <첫 단계>, 1910~13?
이 작품은 퍽 개인적인 양식으로 그려진 것으로 정신적 상징주의에 속한다.
쿠프카는 회화에는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에 도달하여 선의 리듬과 색채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의 창조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프란티셰크 쿠프카, <대각선의 면>, 1925
이 작품은 쿠프카가 실재 세계를 어떻게 지성적으로 추상화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색과 구조의 조화를 통해서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추상으로 표현했다.
다양한 초록색이 있고, 얼룩의 파란색 가장자리에는 노란색이 있으며, 흰색과 검정색은 매우 강렬한 느낌을 준다.
미묘하고 복잡한 색들의 대비에서 음악적 느낌이 발생하는데 실제로 쿠프카는 음악을 시각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수직으로 뻗은 기다란 것들은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킨다.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그렸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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