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미술품 바라보기
(다음은 석유공사 기관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동시대의 예술가들에 의해서 다양한 미술품들이 연일 생산되고 있어 양과 질에서 엄청나다. 어떤 작품은 평론가의 일견에도 과연 미술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렇다면 일반 관람자들의 혼란은 더욱 클 것이다. 관람자가 평론가에게 “동시대 미술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요?” 하고 물을 수 있다. 필자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선 질문에 들어있는 주요 단어들의 개념을 정립해야 여기에 답할 수 있다. ‘동시대’, ‘미술품’, ‘감상’의 의미를 알면 질문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동시대’는 한 세대를 말하는데, 과거에는 세대의 기간이 짧았지만, 오늘날에는 50년을 말한다. 50년 전부터 지금까지가 동시대로서 1960년부터 지금까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미술품’에 대해 ‘시각예술’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그 본질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의견이 1980년대 초에 제기된 이래 많은 예술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지만,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런 현상은 미술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시를 ‘언어예술’, 음악을 ‘소리예술’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그 본질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동시대인은 과거에 정의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정의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미술, 시, 음악이 한정된 지역, 특히 유럽의 몇 나라들을 중심으로 권위를 가졌을 때는 그 지역 사람들의 공통된 ‘감상’ 방법이 정의가 되어 통용되었지만, 1980년대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문화가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자각과 더불어서 어느 한 문화가 권위를 독점하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위에서 ‘감상’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미술품’과 연관시켜서 사용했다. 공통된 감상 방법이 미술품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공통된 감상 방법이란 예를 들면 회화란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말한다. 그래서 그런 선입견에 일치하지 않을 때 관람자는 “저것은 그림이 아냐!” 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화란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견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즉 기원전 400년 전부터 생성되어 서양인이 고수해온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많은 회화론이 선입견을 갖게 만들었다. 선입견, 혹은 감상 방법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과거에는 서양에서 아카데미, 동양에서 화원이란 기관이 생겨 화가들을 훈련시켰으며, 오늘날에는 미대가 그 역할을 맡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 나라와 나라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이 되면서 모든 문화가 존중되고 동등하게 취급되면서 서양식 회화의 선입견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회화에는 반드시 어떠해야만 한다는 규정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미대는 화가를 훈련시킬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없게 되었다. 미대 무용론은 그런 의미에서 제기된 것이다.
1980년대 이래 양식과 장르 사이의 구분이 허물어진 해체주의 경향으로 절대양식의 붕괴와 과거의 모든 양식을 포함해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양식이 이전의 양식에 비해 더 낫다, 혹은 더 진전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양식이 동등한 위치에서 표현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우월한 양식이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미술사와 일상문화로부터 양식을 차용하는 소위 혼성모방이 두드러지게 되었고, 기존의 양식과 형상을 공공연하게 차용하거나 모방, 혹은 변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복제의 발달, 대량전달, 정보화 등이 작품의 독창성과 가치를 약화시키며, 그로 인해 창작과 평가, 감상의 방법에 변화가 왔다. 관람자가 동시대 미술품 앞에서 혼란스러운 건 당연하다.
감상과 관련해서 필자는 ‘일상의 오브제’가 ‘미술의 오브제’로 ‘변용’되는 것에 주목하라고 권한다. 미술관이나 화랑에 진열된 미술품에서 일상의 오브제, 예를 들면, TV 모니터, 일상적인 장면을 찍은 필름, 우리 주변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물품, 폐품, 플라스틱, 용기, 건축자재 등이 발견된다. 그것들이 미술관이나 화랑 밖에 진열된다면 어느 누구도 미술품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주된 개념은 ‘변용’이다. 변용이란 물질의 본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이 달라진 걸 말한다. 오래 교제한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가 어느 날 사랑스럽게 보인다면 그 사람이 변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팝아트, 아상블라주, 비디오아트를 포함한 미디어아트, 정크아트, 펑크아트, 대지아트, 해프닝, 바디아트, 퍼포먼스아트, 아르테 포베라, 네오지오 등 다양한 장르의 미술품에서 일상 오브제의 변용을 발견한다. 일상 오브제와는 다른 용도,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람자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관람자는 일상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차이가 오로지 예술가와 관람자의 시각, 혹은 바라보는 태도에 달렸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런 장르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방법인 것이다.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의 작품을 예로 들면 그 특성이란 반복repetition과 무nothing, 혹은 하찮음nothingness이다. 거기에는 반복되는 이미지 외에 아무것도 없다. 워홀은 그런 작품들을 통해 이미지의 의미와 정체성을 물었다. 진부한 것에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예술가와 관람자의 몫이다. 반복은 관람자로 하여금 그것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정말, 사랑 해”보다는 “정말, 정말, 정말, 사랑 해”가 더 중요한 표현처럼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관람자는 일상의 평범하고 통속적인 재료를 사용한 작품을 감상할 때 드러나는 평범함과 통속성 이면에 숨겨진 예술가의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을 보지 못하면 감상에 실패하는 것이다.
동시대 미술품 대부분은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으로 이뤄졌다. 디자인에 고도한 솜씨가 내재되었기 때문에 디자인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동시대 미술품에 TV 모니터와 동영상물, 그리고 설치가 더욱 많이 사용되고 있다. 삼차원의 표현이 예술가의 의도를 전달하기에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들을 디자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쉽게 이해된다.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모니터가 사용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을 예로 들면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미지가 개별적으로 그리고 전체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한다면 아주 간단한 공식에 따라 변하면서 반복될 뿐이란 걸 알게 된다. 어려운 음악이라도 멜로디가 변하는 과정을 숫자로 적으면 소나타, 론도 등 간단한 공식에 따라 변하면서 반복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동시대 미술품에는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는 공식이 없다. 다만 예술가와 관람자의 바라보는 의도와 감상이 있을 뿐이다. 관람자의 역할이 과거와 달리 창작의 일부분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미술품이 미술품으로 인정받으려면 관람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미술품이 관람자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미술품이 아니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당분간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걸 보류해야 한다. 왜냐면 미술품은 소통의 대상물이다. 미술품에는 예술가 자신의 의도가 담겨있어야 하고 그것이 관람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미술품이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술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관람자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가 혹은 평론가가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단지 보이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시각 현상을 우리는 미술품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필자는 끝으로 관람자에게 “누가 동시대 미술품을 두려워하랴?” 하고 자신 있게 말하라고 권한다. 이해가 되지 않거나 맘에 들지 않으면 당당하게 “그건 미술이 아냐!” 하고 말해야 한다. 그러기에 앞서 작품 이면에 숨겨진 예술가의 ‘고도한 솜씨’와 ‘디자인’을 발견해야 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