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늙은 음악가>


19세기 중반, 파리에는 건축 붐이 일고 있었고 유럽의 모든 철로가 파리로 통하도록 새로운 철로들이 건설되고 있었습니다. 아파트들이 여기저기에 들어서고 기차역이 생겨 많은 사람이 파리 시내로 몰려들자 파리의 인구는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났습니다. 파리는 현대화되면서 유럽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습니다. 바티뇰Batignolles에는 파리의 중심으로 향하는 기차와 차들의 커다란 정거장이 있었습니다. 바티뇰 블바드에는 걸인과 집시들이 많았고, 마네는 그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네의 <압생트 마시는 사람 The Absinthe Drinker>, 1858-59, 유화, 181-106cm.

601

와토의 <피에로 Pierro>, 1715-21년경, 유화.

이 피에로는 이탈리아 코미디언 배우로서 와토Jean-Antoine Watteau(1684-1721)가 파리에 있는 카페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입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코미디는 인기가 있었습니다.

지붕기와공의 아들로 태어난 와토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습니다. 와토는 어렸을 적부터 소설과 음악을 매우 좋아했으며, 엉터리 약을 파는 약장수들을 모델로 스케치하는 남다른 취미를 보여 부모가 그를 집 근처 화가의 화실로 보내 그림 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열여덟 살 때 무일푼으로 파리에 상경한 와토는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는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실물을 모델로 아주 많은 그림을 그렸고, 이것이 그의 재능을 드러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무대 배경을 그리는 뛰어난 장식가 클로드 질로의 눈에 띄어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와토를 유명하게 한 작품은 코미디언을 그린 것 외에 오페라 발레 그림이었습니다.

023

마네의 <늙은 음악가 The Old Musician>, 부분

022

마네의 <늙은 음악가 The Old Musician>, 1862년경, 유화, 188-249cm.

마네는 앞서 그린 <압생트 마시는 사람 The Absinthe Drinker>이 마음에 들어 그 그림을 이 작품 오른편에 그대로 삽입했습니다. 왼편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와 두 소년도 따로 그려서 이 작품에서 하나로 합성하여 완성시켰습니다.


마네가 서른 살에 그린 <늙은 음악가>는 이질적인 인물들을 배열하여 구성한 그림입니다. 늙은 음악가는 마네의 화실 부근에 살던 바이올린 연주자 집시 장 라렌느로 늘 술에 취해 있던 그는 경찰들로부터 몹시 천대받았습니다. 마네는 라렌느를 캔버스 중앙에 고대 철학자의 모습처럼 앉히고 아이들의 호기심과 사랑을 받는 순진한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그리스 철학자를 묘사한 헬레니즘 조각을 변형한 것입니다. 그는 루브르 뮤지엄에 있는 이 조각을 모사한 적이 있습니다. 모자를 쓴 흰색 옷을 입은 아이는 와토의 <피에로 Pierro>를 상기시키고, 그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고 놀라운 시선으로 늙은 음악가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합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늙은 걸인을 바라보는데 라렌느는 마치 기념촬영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그 옆에 걸터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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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판매] 앤디 워홀 타임캡슐 ANDY WARHOL TIME CAPSULE 신고 URL복사

저자
매트 위비컨,제랄린 헉슬리 공저/김광우 역
출판사
미술문화 2012-12-20 ISBN 9788991847903 판형 268X305 페이지수 125
최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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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정보

책소개

‘팝의 교황’, ‘팝의 디바’,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이
죽은 지 25년 만에 타임캡슐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팝의 교황’, ‘팝의 디바’, 스스로 기계이기를 원하던 한 남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흘렀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현대미술의 아이콘이 되었고,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려버린 팝아트의 선구자이자 오늘날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인 앤디 워홀. 그는 콜라병, 달러 지페, 캠벨수프깡통, 마릴린 먼로, 마오와 같은 강력한 이미지를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미술가에 머무르길 원하지 않았던 그는 280여 편에 이르는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인터뷰》라는 잡지를 창간해 유행을 선도했다.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자신의 기록들을 출판했던 이 정열적인 남자는 지금 우리 곁에 없지만,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동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시각화하는 직관력을 보여준 그는 여전히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있다.

『앤디 워홀 타임캡슐』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워홀의 관심뿐만 아니라 창작에 관한 풍요로운 정보를 소개하면서 그의 삶을 추적한다. 대공황시기 피츠버그에서 보낸 워홀의 어린 시절부터 1950년대 뉴욕으로 건너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하기까지, 그리고 악명 높은 팝아티스트,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작자, 저술가, 출판인, 수집가, 한 시대의 기록자로서 진정한 하나의 아이콘이 된 워홀의 성공 과정과 진면목이 여기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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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매트 위비컨,제랄린 헉슬리 공저/김광우 역

저자 : 제랄린 헉슬리 Geralyn Huxley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 워홀 미술관의 영화와 비디오 부문 큐레이터. 세 권의 책과 많은 글을 썼으며, 정기적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워홀의 영화와 비디오에 관해 강연하고 있다.

저자 : 매트 위비컨 Matt Wrbican
앤디 워홀 미술관의 문서보관 담당자로서 워홀에 관한 전시회를 스무 차례 이상 기획했다. 최근에는 방대한 워홀 의 개인적 자료를 감독하고 있으며, 세계 전역에서 열리는 여러 워홀 전시회의 책임을 맡고 있다. 다섯 권의 책과 수많은 저널과 신문 기사를 썼다.

역자 : 김광우
뉴욕시립대와 포담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미술과 미술비평에 관심을 가져왔다. 일찍부터 뉴욕 미술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대가와 친구 시리즈 《폴록과 친구들》,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을 출간했다. 서양미술과 예술철학에 관한 많은 저서와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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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928~1949
병약한 아이 앤드류 워홀라
앤디의 고향 피츠버그
비잔틴 가톨릭 신앙 속에서 자라다
할리우드에 대한 사랑을 작품으로 만들다
창의적인 어미니 줄리아 워홀라
대학 시절에 개발한 워홀의 기법

1950~1959
1950년대의 뉴욕
뉴욕으로 가다
남다른 감각과 노력으로 상업 예술가로 성공하다
서쪽으로 간 세계 일주
댄스를 사랑한 워홀
트루먼 카포티와의 우정

1960~1969
짧지만 빛나는 순간 1960년대
팝아트에 도전하다
워홀의 팝아트와 초기의 아이콘들
죽음을 다루다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영화
새로운 기술에 탐닉하다
워홀의 비디오아트
워홀이 만든 책들
1960년대 워홀과 함께 한 아름다운 소년 소녀들
우홀과 벨벳 언더그라운드
그녀는 왜 앤디 워홀을 쏘았는가
유행의 선두주자 프레드 휴즈와 제드 존슨

1970~1979
글래머와 방종의 시대 1970년대
1970년대의 소년과 소녀들
《인터뷰》를 창간하다
밤의 유흥
워홀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워홀과 여장
로큰롤을 위하여
미술과 패션의 융합

1980~1987
레이건고 에이즈의 시대 1980
전 세계 유명 인사의 초상화
자화상
다시 시작한 여행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찾아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현한 전시와 설치
젊은이들의 멘토가 된 워홀
갑작스런 죽음, 그 이후 위로

출판사서평

이 책만의 독특한 구성
이 책을 펼친 독자는 피츠버그의 워홀 미술관에 소장된 워홀의 ‘타임캡술’에서 그대로 복제한 20가지가 넘는 자료를 직접 만져보며 이 유명한 모던 아티스트의 생애와 작품들을 들여다보고 그의 감수성과 독특함에 공감하는 특별한 기회를 만끽할 것이다.

워홀의 타임캡슐에서 복제한 포켓 자료들:
·1952년 뉴욕에서 가진 생애 첫 개인전을 알리는 엽서와 15점의 드로잉
·1966년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전시한 〈암소 벽지〉
·워홀이 〈캠벨 수프〉 회화에 사용한 스텐실
·워홀이 발레리 솔라나스로부터 총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에디 세즈윅이 보낸 문병카드
·워홀이 보관하던 잡지 『인터뷰』의 기사 “캔디 달링과 함께 집에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을 때의 택시 영수증
·워홀이 직접 그린 책 《나의 정원 깊은 곳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 매니저 시절의 공연 포스터
·대학 입학을 위해 제출한 고등학교 성적증명서
·포토부스에서 찍은 사진과 메모들
·워홀이 디자인한 연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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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



 



 

 

 

페스티벌이 성공적으로 치러진 지 7주 만인 1794년 7월 27일 공화당 내 우파와 좌파의 충돌로 인해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이 실각과 더불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보수파의 대표적 인물 장 람베르 탈리앙과 루이 스타니슬라 프레롱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공포정치’는 1793년 9월 17일부터 이듬해 7월 28일까지 10개월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3,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테르미도르(Thermidor, 프랑스 공화력*의 제11월) 9일, 즉 7월 27일의 반동으로 처형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던 날 그는 공회 전당대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날 병중이었다고 변명했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이 그는 매우 건강한 상태였다. 그는 공회 집회에서 불쑥 연단에 올라가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선생님이 사약을 마시게 되면 저도 사약을 마시겠습니다.”라고 했고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 그만큼 그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존경을 표하며 추종했다. 다비드는 쟈코뱅 공화국의 혁명적 문화를 결성하는 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었으므로 사건 당일 전당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문을 살 만 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할 줄을 사전에 알고 자신의 안녕을 위해 그날 대회에 불참했던 것 같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일당은 체포된 다음날 아침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테르미도르 9일과 10일의 정의의 행위>

 

비에르가 제작한 판화 <테르미도르 9일과 10일의 정의의 행위>132를 보면 7월 27~28일 파리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두대에서 잘려진 목들이 여기저기 널린 곳을 복수의 두 여신이 가로질러 달려가는 장면이다. 그림 아래 기록된 바로는 이 압제자들은 정의의 논리에 따라 과거 그들이 처형한 희생자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 비에르는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를 ‘정의의 행위’란 제목 하에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테르미도르 시기에 유행한 노래가 있다.

 



목이 잘릴 자들이여, 너희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니 두려움으로 창백해지는구나

너희는 우리의 믿음을 저버렸지

포악한 자들이여, 흙으로 돌아가라

죽음의 땅으로 가라

피에 취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짓만 한 자들이여

지독한 생애를 마감하라

 

 



<정의와 인간애의 친구>

 

 



<극악무도한 자들>

 



시민들이 이 노래를 반주에 맞춰 불렀으며 무대에서도 불릴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쟈코뱅이 자신들을 살해했다고 하는 시민들은 “쟈코뱅을 죽여라, 그놈들은 불한당들이다!”라고 소리쳤다. 이 시기에 쟈코뱅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은 매우 컸으며 쟈코뱅당원들은 위선자이며 그들의 이념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제작된 <정의와 인간애의 친구>133는 쟈코뱅당원들의 이중성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 멋진 의상을 한 쟈코뱅이 뒤에서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여기서 신사차림의 사람은 쟈코뱅주의를 상징한다. 쟈코뱅은 무정부주의자 또는 프랑스의 새로운 야누스 135로도 풍자되고 극악무도한 자들로도 묘사되었다. <극악무도한 자들>134에서는 쟈코뱅의 이중성이 급진 혁명가와 메두사의 머리를 한 표독한 여자로 묘사되었다.

 

 



<프랑스 국민 모두의 목을 벤 후 사형집행인의 목을 베는 로베스피에르>

 

쟈코뱅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자연히 이념에 있어서 그들의 주역인 로베스피에르에게 모아졌고 당시 제작된 컬러 판화에는 심장을 짠 피를 잔에 채워 마시는 잔인한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시기에 죽음을 주제로 한 섬뜩한 그림들이 널리 알려졌는데 <프랑스 국민 모두의 목을 벤 후 사형집행인의 목을 베는 로베스피에르>136도 이런 것들 중 하나이다. 7월 27~28일 양일에 처형된 사람의 수는 파리에서만 2천 8백 명이었고 프랑스 전체로는 1만 8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4만 명으로 추산하는 학자도 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감옥에 투옥된 사람은 30만 명에 이르렀다. 7월 29일에는 파리 코뮌의 멤버 70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테르미도르 9일의 알레고리>

 

혁명의 이름 하에 자행된 포악한 마구잡이 처형을 작자미상의 드로잉 <테르미도르 9일의 알레고리>137에서 볼 수 있다.

테르미도르 이후 전형적인 포스터 형식의 판화가 당시의 절망적 상황을 말해준다. 공포정치 이후 1795년 5월 13일에 루이 라피트가 발표한 판화 <표독한 형상들>138은 공포정치의 시기에 투옥되었던 변호사 푸아리에의 의뢰로 그린 것이다. 테르미도르 이후 푸아리에는 조제프 르 봉을 대항하는 여론몰이를 개시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알게 된 몽제이의 도움을 받아 르 봉을 비난하는 팜플렛을 연속적으로 발행했는데 르 봉의 권력 남용과 감옥에서의 학대상황을 세부적으로 폭로했다. 그가 발행한 팜플렛은 널리 배포되었다. 테르미도르 이후 시각문화는 피를 부른 테러리스트, 복수의 여신, 단두대, 수많은 시신들로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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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예술가 자크 루이 다비드



 



 

 

 

다비드는 1793년 8월 10일에 개최될 예정인 페스티벌 준비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수십만 명의 파리 시민이 참여하는 대축제는 루이 16세를 축출하고 공화국을 선포한 혁명의 날을 기념하고 시민들의 단합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가톨릭의 전통적 페스티벌을 모방한 공화국의 건국을 상징하는 가장행렬이 있는 축제였다. 다비드의 책임 하에 축제준비위원으로 그의 제자 지오아키노 기우세페 세랑젤리, 건축가들 오귀스트 세발 위베르와 장 니콜라스 루이 뒤랑, 목수 뒤플레이, 그리고 음악가들 브루니, 사레트, 메훌이 참여했다. 다비드는 축제에 사용할 의상, 건축물, 그리고 소품들을 디자인했다.

 

 



125

 

다비드의 혁명적 가장행렬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1794년 6월 8일에 개최된 ‘지고한 존재를 위한 페스티벌’125이었다. 1793년의 프랑스는 오래 지속된 왕과 교회와의 관계면에서 볼 때 더이상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없게 되었으나, 일종의 종교적 형식을 필요로 했는데 사회적 유대와 사후 구원에 대한 희망을 위해서는 종교를 완전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고한 존재’에 관한 문화로서의 시민 종교가 형성된 셈인데 이 존재를 이성적이며 인정 많고 지혜롭다고 믿게 되었다.

 

 

 



124

 

 



127

 

페스티벌은 튈르리 공원에서 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규모로 거행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개회사를 낭독할 때 밝혀진 거대한 빛이 무신론을 상징하는 지혜의 동상을 환하게 밝혀 모습을 드러나게 했다.124 이는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무신론적 행사였다. 페스티벌에 참여한 시민들은 2십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신을 위한 찬송가를 불렀고, 젊은이와 늙은이들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8에서와 같은 제스처를 취하며 충절을 맹세했다. 가장행렬은 오늘날 에펠 타워가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원형경기장, 개선문,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거대한 언덕이 있었고 헤라클레스 동상과 자유의 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127

헤라클레스 동상은 다비드가 시민들의 단합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헤라클레스 동상은 포획한 적의 대포를 녹여서 제조되었고 받침대는 궁정의 기념비와 오늘날 노트르담으로 불리우는 당시 ‘이성의 성전Temple of Reason’으로 불린 곳에 세워졌던 성자와 왕들의 동상을 녹여서 만들었다. 헤라클레스의 한 손에는 자유와 평등을 상징하는 작은 조각이 들려 있고 다른 손에는 가공할 무기 곤봉이 들려 있다. 다비드에게 헤라클레스는 매우 유효한 혁명의 상징물이었다. 그는 헤라클레스를 ‘프랑스 시민의 승리’로 상징하기도 했다. 1793년 11월 그는 이 거대한 동상이 프랑스 시민을 상징한다면서 파리의 퐁 뇌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28

 

다비드는 대혁명을 주제로 한 드라마의 무대휘장을 디자인하면서 헤라클레스를 승리의 병거 위에 위치시키고 그의 무릎에 조그만 조상 ‘자유와 평등’을 올려놓고 그 앞에 학문, 예술, 사업, 그리고 부를 의인화한 조상을 놓았다. 네 마리의 황소가 이 병거를 끌면서 바퀴로 왕실과 봉건주의의 상징물들을 박살낸다. 승리의 천사가 한 손에 창을 들고 황소 위를 날아 앞에 넘어진 왕을 칼로 찌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있다. 고대, 중세, 현대의 정치적 영웅들인 로마 여인 코르넬리아, 브루투스, 윌리엄 텔, 마라, 르 펠레티에, 피에르 바이유, 샤를 보바이 드 프레오가 병거 뒤를 따르고 있다.128

다비드는 혁명을 찬양하는 작품들을 제작할 계획만 세워놓고 실현시키지 못한 것들도 많은데 그것들은 계획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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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의 날조된 전설 <바라의 죽음>



 



 

 

 

다비드가 마지막으로 공화당원의 죽음을 그린 것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제프 바라라는 열세 살 소년이다. 이 소년은 1793년 12월 7일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벤데Vendee에서 일어난 동란 때 말 두 필을 빼앗으려는 왕당파 당원들에게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122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공화당은 바라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바라가 “왕이시여 만수무강하라”고 외치기를 거부하고 “공화국이여 영원하라”고 애국심에 불타는 말을 외치다 목숨을 잃은 것으로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운 전설을 창조하기로 한 것이다.

 

 

 



<바라의 죽음>

 

 





 

<바라의 죽음>123은 완성하지 못했는데 미완성으로 남은 이 작품은 다비드가 그 이전이나 이후에 그린 그림들에 비해 수수께끼 같다. 땅바닥에 비스듬히 누운 바라의 손에는 혁명을 상징하는 꽃모양 기장이 달린 편지가 있다. 다비드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누드로 드로잉한 후 옷을 입히는 방법을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누드로 묘사했다. 흥미로운 점은 바라가 여성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그가 고대 그리스의 청년의 누드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으로 짐작되며 주변에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아 어떤 상황에서 죽음을 맞았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바라의 누드 자세도 평범하지 않은데 아마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후 강간당한 모습이 아닌가 짐작된다. 바라의 죽음에 관한 실제 자료가 제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비드가 이렇게 그린 것은 사실을 무시하고 시공을 초월해 영원히 존재하는 누드로서의 영웅을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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