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지의 인물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프레데릭 존 키슬러는 1890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인에서 태어나2) 1965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75년이라는 세월은 평전을 쓰기 위한 대상인물의 생애로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특히 미국 고문서관의 자료목록을 보면, 그의 작업에 관해 언급한 신문, 잡지, 서적 등은-막대하다는 표현은 다소 과장이더라도-적은 분량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시대를 대표하는 어떤 양식의 창조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뉘앙스를 느낄 수 없다.
그는 작가 개인의 조형세계를 고정된 양식으로 정착시키기에 급급했던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과는 전혀 다른 타입의 인물이었다.
그러한 예술가의 생애를 통찰하여 평전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를 언급하기에 앞서, 기억해야 할 좀더 중요한 사실은 키슬러가 평생을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고수한 몇 안 되는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키슬러는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르 코르뷔제,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등과 달리 지나치게 많은 건축을 설계하지는 않았다.
필립 존슨의 언급대로 키슬러만큼 건물을 짓지 않고 유명해진 건축가도 없을 정도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는 극장건축가, 무대디자이너, 전시디자이너, 가구디자이너, 조각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3)
이처럼 그는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자신의 예술관을 전개시킨 인물이다.
그를 단지 건축가로만 규정할 수 없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키슬러에 관한 논고의 어려움은 그가 남긴 작업이 이처럼 다양한 영역에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편 키슬러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하여 제작의도 등을 빠짐없이 문장으로 남겨놓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실현되지 않은 미완의 프로젝트를 포함하여 그가 남긴 자료 전부를 각각의 영역별로 분류하여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에게 키슬러의 조형세계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생애를 통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에 관한 평전을 적기 위해서는 먼저 20세기 미술에 관한 다각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자조적인 반성과 함께, 그의 활동이 다양한 영역에 걸쳐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일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너무도 단편적인 처리기준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사실을 판단하는 데 있어 지나치게 공식적인 기준에 얽매여 있지는 않은지도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20세기의 4분의 3이 지나자마자 20세기 건축사, 20세기 회화사, 20세기 연극사, 20세기 조각사, 20세기 디자인사 등을 준비해왔다.
이미 기정사실이 된 각종 예술운동과 주의주장을 요약한 선언들, 그리고 무슨 무슨 양식 등이 이제는 역사가나 평론가의 문장 속에 공공연히 등장하고 있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거의 많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양식’ 또는 ‘주의’ 등의 꼬리표가 붙여진 채 역사박물관의 정리대상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오늘날 자신의 영역을 고수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분야별 전문가가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전공분야 이외에는 무지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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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를 통한 키슬러의 활동을 살펴보면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생애를 통한 키슬러의 활동을 살펴보면 지난 동안 우리들이 취해온 전문화의 경향이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의 활동을 구속해왔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여기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우리는 20세기가 시작되고 20여 년 간 유럽 각지에서 열병과도 같이 행해진 예술혁명의 동향에 관해서 다시 한 번 ‘역사박물관’의 정리함을 해체하여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만큼 실험적인 목적을 지닌 예술가가 국가나 도시를 초월해 나름의 주장을 펼치면서 유럽 대륙을 누빈 시대는 없었다.
물론 다양한 영역에 걸친 조형 활동을 전개했던 예술가들도 결국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말았으나, 그 이전의 그들은 다양한 영역에 걸친 실험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탐구했었다.
키슬러도 빈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을 자유롭게 왕래했던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소비에트 공화국의 체제강화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로 유럽의 지적 환경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 때문에 예술혁명의 범주를 넘어서 문화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운동들이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예술에 대한 진보적인 사상의 소유자들 중 어떤 이는 전사했고, 어떤 이는 전향했으며, 어떤 이는 추방당했고, 어떤 이는 숙청당했으며, 어떤 이는 망명했고, 심지어는 자살한 이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어렵사리 살아남은 예술가들 중 몇 명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의 자유로움과 풍요 속에서 1920년대 그들이 추구했던 사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실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문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완성’시키고자 노력했다. 전후의 상황은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들의 활동을 어떤 전문영역에 집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좋든 싫든 그들이 ‘인사이더’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술가가 스스로의 세계를 일정분야에 한정시킨다는 것은 인사이더가 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4)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키슬러는 마지막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친 활동과 실험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키슬러야말로 1920년대의 실험정신과 혁명의 실천이라는 20세기 미술 고유의 목적을 고수한 진정한 생존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와 같이 작가가 남긴 작업의 결과만 가지고는 충분한 평가가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따라서 키슬러의 활동과 20세기 초 유럽의 지적 영역 사이에 중복된 부분을 가능한 한 생생하게 파악하는 것이 그의 평전을 적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나치의 유태인 말살계획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갈등과 이에 따른 지식인의 미국망명,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관해서는 미국의 20세기 건축에 대한 바우하우스 지도자들의 공헌에 대하여 적고 있는 윌리엄 H. 조디의 『미국에서의 바우하우스의 여파/그로피우스, 미스, 브로이어 The Aftermath of the Bauhaus in America: Gropius, Mies, and Breuer』가 상세하다.
유럽에서 망명한 현대건축의 거장들은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키슬러는 미국에서도 여전히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고수한 인물이다.
앞의 책에서 조디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므로 인용해둔다.


다음에 거론해야 할 인물로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레데릭 키슬러를 들 수 있다.
그는 건축, 무대디자인, 조각, 회화를 포함하는 시각예술의 전 영역에 걸쳐 활동했으나, 그가 미친 영향은 생전에는 아직 결정적이지 못했으며 마치 갓 싹튼 새싹과도 같이 한정된 범위에 그쳤다.”1 (볼드체에 의한 강조는 저자에 의함)


키슬러가 미국에서도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후에 논하겠으나, 그것은 기계기술문명 하의 예술에 관한 자성의 결과 취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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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욕에 도착해서 1주일 정도 지난 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나는 지금 뉴욕에 있다. 3일 전 키슬러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 동안 연락하지 못한 것에 대한 예(禮)를 표하고,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내년 1월부터 일본의 잡지에 키슬러에 관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오늘밤 8시에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호텔에서부터 지하철 IRT선을 타고 세븐스 애비뉴의 14번가에서 내렸다.
여기에 온 것도 벌써 3번째다. 처음 방문한 것은 키슬러의 생전인 1961년 12월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파트의 입구에 도착했다.
56이라는 번호가 매겨져 있는 현관에 이르자 14년 전 키슬러의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그의 환경조각을 처음으로 보았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당시의 뉴욕 여행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5)


건축분야의 동향에 대해서는 서두에서 언급한 키슬러에 대해서 적지 않을 수 없다.
뉴욕에 도착해서 1주일 정도 지난 뒤 ‘레오 카스텔리’화랑을 통하여 키슬러에게 전화를 걸어 화랑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소개를 주선했던 이의 말로는 키슬러는 ‘괴짜’인데다 이상한 말만 하고 시간약속도 잘 안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며 나를 긴장시켰다.
약속 시간에서 1시간 반이나 지나서야 비서를 대동하고 키슬러가 나타났다.
150㎝정도의 작은 키에 백발인 남자가 선뜻 손을 내밀었다.
조금은 이상한 액센트의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분명히 70이 가까운 나이일텐데 건강한 목소리였다.
“이 세상의 모든 건축가들은 하나같이 ‘수컷의 건축’을 설계하고 있는데, 나는 ‘암컷의 건축’을 구상하고 있다.”6)라며 그의 아이디어인 <엔드리스 하우스>(1950, 1959)를 설명해주었다.
당신의 작품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하니 그럼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


얼마 후에 그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이탈리아의 화가 피에로 도라지오와 키슬러의 대담을 정리하고 있던 비서가 그 일부를 읽어주었다.
키슬러의 조각에 관하여 언급된 부분이었다.
또 도라지오가 지적이면서 상당히 훌륭한 화가라고 칭찬하는 부분도 있었다.
옆방은 작은 스튜디오였는데, 천장에 조각작품으로 보이는 것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천장으로부터 내려뜨려져 있는 작은 부분과 벽으로 연결되어 걸쳐 있는 부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대담에 의하면 그것이 전부 연속된 하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키슬러는 조각의 일부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꽃병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그 속에서 헝겊조각 같은 것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한참동안 만지작거리고 나서 성냥불을 붙였다.
그 안에는 기름이 들어 있는지 작은 불꽃이 타기 시작했다.
생각대로라면 4시간 정도는 계속 탈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으나 15분 정도 지나자 불꽃이 꺼지고 말았다.
나 이외에도 2명 정도의 방문자가 있었는데, 키슬러는 한사람씩 데리고 다른 방으로 사라진다.
누군가가 그 방에 들어가면 다시 다른 사람과 또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방이 많은 것도 아닌 터라서 사람들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이다.
왠지 키슬러의 <엔드리스 하우스>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엔드리스 하우스>는 1920년대에 새로운 타입의 극장공간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그 즈음 그는 데 스틸 그룹의 몬드리안, 반 뒤스부르크 등과 교류를 가졌으며, 시그램 빌딩(1958)의 설계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한편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참가하여 1947년 파리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국제전에서 뒤샹과 함께 전시디자인을 담당하기도 했다.7)
또한 기둥이 없는 곡면의 건축 <엔드리스 하우스>를 통해 그의 독자적인 공간개념인 ‘엔드리스’를 제기했던 인물이다.
이 여행기를 통해 키슬러의 작업과 사상의 전모를 전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애석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마지막으로 키슬러의 방에는 뒤샹의 등신대 데생이 있었다는 점을 기술해둔다.
뒤샹이 몇 년 전에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도 뒤샹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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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슬러에 관한 기사를 몇 개 더 발견했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두 번째로 여기 온 것은 키슬러의 평전을 집필할 계획을 갖고 자료를 얻기 위해 방문한 1971년 10월이었다.
그때 키슬러에 관한 사진자료 300점 정도를 보고 그가 다양한 영역에 걸친 활동을 전개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언뜻 보기에는 무관해 보이는 각각의 작업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뉴욕에 와서 새로 발간된 책 중에서 키슬러에 관한 기사를 몇 개 더 발견했다.
『건축과 디자인­1890∼1939』3에는 1925년에 발표된 키슬러의 선언문이 실려 있었고8),『입체주의자의 영화』4에는 키슬러의 실험적인 무대설계가 돋보이는 카렐 차페크의 을 위한 무대디자인(1923)이 페르낭 레제의 영화 <발레 메카닉>(1924)에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도 키슬러의 발자취를 추적할 수 있는 새로운 기록을 발견한 셈이다.
이 책들을 들고 키슬러 부인을 방문했다.


부인은 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젊어 보였다.
“아직 당신이 보지 못한 새로운 자료가 또 있다구요”라고 의기양양해 하면서, 최근에 발견한 일련의 가구사진과 <이빨의 집>이라는 주택의 에스키스를 펼쳐 보였다.
전자는 컬럼비아 대학의 건축과에서 학생을 지도하던 시절인 1930년대에 제작된 것이었다.
후자는 사람의 위턱과 아래턱, 그리고 이빨형태로부터 이미지를 발전시켜 종국에는 주택디자인으로 이미지가 변천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엔드리스 하우스>와 유사한 공간의 연출이 의도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부인은 키슬러의 전람회가 이번에 고향인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개최된 후9) 가까운 시일 내에 서독의 베를린에서 계속될 예정이라며 기뻐했다.
부인이 의기양양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1926년 키슬러가 고향을 떠난 후 반세기 만에 이루어진 귀향을 기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이미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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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키슬러에 관한 모놀로그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모놀로그(monologue)’라는 용어의 시간적 성질에는 엔드리스(Endless)한 구석이 있다.
‘엔드리스’는 ‘끝이 없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경우 시간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무한하다’는 의미에 가까워진다.
‘엔드리스’는 ‘구석이 없는’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공간적인 의미가 강조된다.
키슬러는 상자형의 건축을 감옥과 같은 것이라며 거부했다.
상자에는 꼭 가장자리라든가 모퉁이가 있다.
따라서 상자형 건물에는 천장, 벽, 바닥이 있다. 이같이 경계를 지니고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천장, 벽, 바닥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연속된 상황’ 속에서 의미를 잃는다는 데 주목했다.
이 같은 생각을 구체화한 ‘엔드리스’는 단지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건축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엔드리스 하우스>를 통해 증명했다.


앞서의 인용에서 키슬러가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여성의 신체를 ‘엔드리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종종 비유적으로 또는 야유적으로 4각의 상자형 건축을 ‘수컷의 건축’이라고 부르고 <엔드리스 하우스>를 ‘암컷의 건축’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키슬러가 사용했던 용어를 나열해보면, 소묘에 의한 회화 시리즈와 목조에 의한 환경조각에 붙여졌던 ‘갤럭시(Galaxy)’, 주로 극장 및 무대설계에 사용했던 ‘공간(Space)’-<공간주택 Space House>은 거주공간을 위한 것임-, 그리고 ‘유니버설’은 ‘공간무대(Raumb웘ne)’의 또 다른 명칭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극장공간의 기능이 ‘만능적(Universal)’이라는 점-이른바 ‘토털 시어터(Total Theatre)’ 개념10)과 같이-에 주목해 명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 나열된 용어들은 키슬러가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실천한 테마의 주요개념이기도 하다.


은하계에는 많은 천체가 있다.
그것들은 각각 다른 궤도와 운동의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하나하나의 별들은 주위의 다른 별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생과 소멸에 이르는 전 과정을 묵묵히 걷고 있다.
그가 ‘갤럭시’라고 부른 일련의 작품은 그의 우주관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이 같은 은하계의 구성원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은하계도, 건축도, 조각도, 인간의 신체도, 양상의 차이는 있으나 결국은 같은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건축, 조각, 회화 등의 예술작품도 가능한 한 우주공간의 형성원리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건축의 주요 양식 중 하나인 ‘국제양식(International Style)’이 아니라 ‘우주양식(Universal Style)’쯤 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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