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명이다

 

 

 

바쁜 일이 없고 각 항목을 천천히 따라 할 수 있을 때 이 수행을 해보라.

 

1단계: 안식처에 귀의하기
이런 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출발은 앞서 다룬 안식처에 귀의하기로 시작한다. 고요하고 안전한 느낌을 받
는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

 

2단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명상 자세로 앉고 호흡을 의식하는 데 집중하라.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고요
한 즐거움을 느껴라. 우리 몸 전체를 느껴라. 몸 전체를 느끼면서 몇 분간 심호흡을 하라. 이제는 몸의 각 부분으로 수행해보라.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발을 느낀다. 숨을 내쉬면서 나는 발에 미소를 보낸다”라고 속으로 말하라. 발을 좀 더 생생하게 의식하게 되었다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발이 내가 아님을 나는 안다. 나는 발 그 이상이다”라고 말하라.
그리고 종아리도 같은 방법으로 수행해보라.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종아리를 느낀다. 숨을 내쉬면서 나는 종아리에 미소를 보낸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종아리가 내가 아님을 나는 안다. 나는 종아리 그 이상이다”라고 말하라.
다음에 같은 방법으로 손, 팔(상박, 하박), 등, 목, 어깨, 머리, 얼굴, 가슴, 배, 심장, 폐, 그리고 다른 소화기관 등 몸의 각 부분을 대상으로 차례차례 말하라. 다시 몸 전체를 느끼면서 편안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라.

 

3단계: 감관은 내가 아니다
이제 감관과의 탈동일시를 시작해보자. 불교에는 육감, 즉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몸을 느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눈을 의식하라. 원한다면 눈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도록 눈을 감고 손으로 눈꺼풀을 부드럽게 만져보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나는 눈이 내가 아님을 안다”라고 말하라. 같은 방법으로 귀, 코, 혀, 몸, 마음도 말하라.

 

4단계: 오온은 내가 아니다
이제 같은 방법으로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을 수행하라. 여기서 색은 3단계의 몸과 같으므로 약간 중복된다. 그러나 상관없다. 목적은 전면적인 탈동일시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몸은 내가 아니다.” “내 감정은 내가 아니다.” 이런 방법으로 계속하라.
5단계: 요소들은 내가 아니다
옛날에는 우주가 땅, 공기, 불, 물로 구성된다고 여겨졌다. 명상에서는 이 네 가지 요소로 사물을 설명하는 방법이 아직도 널리 사용된다. 땅은 우리 내부의 단단한 것을 의미한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땅 요소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라. 같은 방법으로 “공기 요소(호흡)는 내가 아니다. 불 요소(체온, 열을 발생시키는 소화 과정)는 내가 아니다. 물 요소(몸속의 유동체)는 내가 아니다” 하고 깊이 생각하라. 주변의 다른 모든 것에서도 이 네 가지 요소를 찾아보라.

 

6단계: 나는 생명이다
심호흡을 하면서 서두르지 말고 고요하게 다음의 각 구절을 차례대로 생각하고, 그이 의미하는 현실에 마음을 열어라.

 

• 나는 이 몸, 육감, 오온, 네 가지 요소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 나는 삶 그 자체다.
• 나는 시공을 초월해서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생명이다.
• 나는 지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속에 있는 생명이다.
• 나는 미래와 과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속에 있는 생명이다.
• 나는 결코 태어나지 않았으며 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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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재는 개념으로 담아낼 수 없다

 

 

 

죽음에 대한 간단한 개념으로 시작해보자. 유물론자는 죽음을 그냥 끝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천국에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죽음을 환생이란 측면에서 생각해서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개념들은 너무 단순하다. 아무것도 진정으로 태어나지 않으며, 아무것도 진정으로 죽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이미 우리 부모나 조상 속에서 그리고 다른 많은 형태들로 살고 있었다.
내가 죽은 후에도 나는 많은 형태들로 지속된다. 천국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며 사후에 가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환생을 문자 그대로 너무 단순하게 받아들여서 죽고 다시 태어남을 계속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나 신비스러워서 불교에서 공śūnyatā이라고 부르는 경이로운 생성의 실재(색色)이다. 한계가 없는 것에 한계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죽음과 환생을 곰곰이 생각하면 극단적인 시각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물질과 에너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변화할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마찬가지로 죽음도 하나의 변화일 뿐이다.
문자 그대로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죽음은 끝이지만 단순한 끝이 아니다. 실재는 존재bhava 또는 비존재abhava로 구분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 상견常見(sassata, 만물이 실제로 영원히 존재한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 또는 단견斷見(uccheda,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 공무空無로 돌아간다는 그릇된 견해)으로 나눌 만큼 간단하지도 않다. 실재는 그 중간에 있다. 커피를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그 맛을 설명하는 것처럼 실재가 무엇인지 말로는 정확 히 표현하지 못한다. 실재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개념을 떠나 그것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분리된 자아로 존재한다는 착각과 우리를 동일시하면, 죽음이 다가올 때 고통을 겪게 된다. 반대로 우리를 삶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면 지금 그리고 죽는 순간에도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상인이었던 아나타핀디카Anathapindika는 오랫동안 붓다와 붓다의 일행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죽을 때 큰 고통에 몸부림쳤다. 붓다는 그를 돕기 위해 수행이 높은 제자 사리푸트라Shariputra와 아난다Ananda를 보냈다. 이들은 아나타핀디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에게 여러 가지 명상법을 가르쳐주었다. 이 명상법은 육체적 자아와의 전면적인 탈동일시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이 명상으로 아나타핀디카는 크게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무아, 대선사의 죽음 또는 환생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두려움을 없애주지는 못한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우리 자신의 통찰이 요구된다. 다음은 아나타핀디카에게 도움이 된 명상법의 일종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죽을 때가 되어서야 이 수행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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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12연기

 

붓다는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이 원인에서 발생하는 방식을 12연기의 가르침에서 더욱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1. 무명: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 즉 번뇌
2. 정신 구조: 과거에 있어서의 선악업善惡業
3. 의식: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나오게 하는 씨와 같은 것
4. 이름과 모양: 의식이 ‘나’ 아닌 것들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
5. 여섯 가지 감관: 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촉감의 세계 혹은 이름과 모양의 세계와 접촉
6. 접촉: 단순한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상태
7. 감정: 5세부터 14세까지의 단순한 고락의 감수 작용을 일으키는 상태
8. 욕망: 재산이나 애욕에 탐착하는 14세 이후
9. 집착: 탐착이 증진되는 상태
10. 존재: 애욕과 탐착의 선과 악의 업이 습관이 되어 미래를 규정하는 상태
11. 태어남: 미래의 과가 발생한 상태
12. 늙고 죽음

 

무지를 멈춰야 합니다
의존 시초의 영향이라 함은 각 단계가 전 단계에 의존하며 전 단계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노쇠와 죽음을 멈추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원하지 않는 단계, 즉 카르마(업)와 착각의 오염된 힘에서 발생한 윤회적 재탄생을 멈춰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지를 멈춰야 합니다. 첫 단계를 멈춘다면 나머지 11단계는 저절로 멈춥니다.

 

고통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인도의 스승 무착Asanga은 세 가지 조건을 근거로 고통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1. 부

동성: 첫 번째 조건은 부동성입니다. 부동성은 고통이 창조주와 같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의도에 의해서 생성되며, 자체적인 원인의 결과로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2. 비영구성: 두 번째 조건은 비영구성입니다. 이는 고통이 자체적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지만, 영구적인 현상은 결과를 만들 수 없으므로 이 원인과 조건은 비영구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3. 구체적인 잠재성: 세 번째 조건은 구체적인 잠재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원인과 조건이 영구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건 충분치 않습니다. 각 원인과 조건이 개인적인 결과를 생성하는 고유의 잠재성을 보여야 합니다. 어떤 조건은 아무런 결과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붓다는 그 원인을 무명으로 인식했습니다.

 

창조주는 우리의 마음
불자들은 창조주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창조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궁극적으로 창조주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부정적이고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을 정화하고 깨우치면 모든 부정적인 결과가 멈추고 긍정적인 결과가 뒤따릅니다.

 

불교는 인간의 종교
불교는 인간의 종교이며 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불교는 행동의 방식과 마음을 훈련하는 방식을 주로 다룹니다.

 

모든 신은 한 존재의 구현
그렇다고 불교 신자들이 상위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노련하거나 깨달은 상위 존재의 관점에서는 유일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신deva과 같은 수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신은 한 존재가 구현된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우리 마음이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석가모니 붓다
석가모니 붓다는 연민과 지혜로 가득 찬 가르침의 달인이었습니다. 붓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과 수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힘겨운 영적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두 가지 진실
상대적인 단계에서는 하나의 측면이 존재합니다.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합니다.

 

꽃을 상상해보세요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상상해보세요. 이 꽃은 매 순간 변하며 높은 온도에서는 더욱더 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뜨거움이나 차가움 같은 조건이 꽃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압니다. 누군가는 “이 장미는 아름다워요. 향기도 좋고, 색깔도 예쁘네요.” 하고 말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장미가 별로에요.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시투성이잖아요. 만지면 따가워요.” 하고 말합니다.

 

하나의 사물에 대한 다른 시각
이렇듯 우리는 하나의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좋거나, 나쁘거나,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요. 사물의 본성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궁극의 단계
우리는 이 모든 다른 개념을 낳는 이 대상의 기반에는 반드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개별적인 본성의 부재가 이 기반의 역할을 합니다. 탁자 위에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많은 물건들을 올려놓지만, 이미 물건들이 그 위에 있다면 더 이상 올려놓을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궁극적인 본성이 사물들을 받아들이거나 사물들이 각기 다른 기능을 하도록 기반의 역할을 합니다.

 

모든 관점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
하나의 단계에서, 이 모든 다른 관점들이 어떠한 기초들 위에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초들을 직접 볼 수 없지만, 깊이 생각하면 이 모든 관점들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
이러한 두 가지 진리인 상대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은 다른 현상입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사성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진리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진리는 이른바 두 가지 출처에 근거하여 설명됩니다. 두 가지 출처는 착각과 그 착각에 의해 야기되는 업보Karmic Actions입니다. 붓다는 착각은 닦이지 않은 부정적인 마음 상태의 산물이지만, 이 닦이지 않은 마음 상태는 원인과 조건에 상당히 좌우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인과 조건
마음의 여러 관점들은 또한 원인과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은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여러 상태들로 변형시키는 어떠한 본성을 지닙니다. 따라서 원인과 조건의 산물인 이 착각, 즉 예상을 제거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멈출 수 있다고 규명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해서 두 가지 진리를 이해하면 고통의 멈춤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성제를 이해함으로써 삼보를 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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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삶 자체다

 

 

 

먼저 첫 번째 초의 불꽃을 그 자체로서만 다시 살펴보자. 그것은 우리가 알고 촛불이라고 부르는 어떤 종류의 것, 말하자면 ‘자아’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실은 훨씬 이해하기 어렵다. 불타는 초는 실제로는 변화와 변형의 과정이다. 매 순간 새로운 밀랍 분자가 연소한다. 매 순간 새로운 산소가 사용된다. 매 순간 불꽃은 죽었다 살아난다.
오랫동안 숙고해야겠지만,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면 죽음과 삶이 항상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숨어 있던 괴물은 이제 친근한 애완 고양이가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를 지금도 아무개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고정되고, 실체가 있으며, 변화하지 않는 존재로 식별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괴물이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생명 과정, 즉 시작이나 끝이 없는 과정임을 깨닫고 저것과 같다고 볼 때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무엇과 동일시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이 분리된 존재, 고립된 자아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런 관점에서 식별을 멈출 때, 우리의 두려움과 싸움은 끝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끝없고 무한한 삶이며, 우주 만물과 분리될 수 없고 신비롭고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한꺼번에 모여 나를 만드는 요소들은 다시 각각으로 떨어지고 수없이 많은 형태들과 유형들로 다시 합쳐진다. 사후에는 다른 사람으로 “다시 올 것이다” 하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일은 꽃, 구름, 또는 산꼭대기에서 두려움 없이 바람을 맞으며 즐거이 서 있는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더욱이 지금도 우리는 다양한 형태들을 취하고 있다.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는 일에서 생명을 구해주는 일까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의 삶이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그들의 삶 속에 있고, 그들의 삶은 우리의 삶 속에 있다. 우리는 상호 연관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돈을 보낸다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심리치료사로서 나는 내가 도와주었던 사람들에게서, 나아가 그 사람들과 연결된 모든 사람에게서 다시 태어난다. 나 역시도 작가 그리고 선생으로서 많은 형태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제 붓다의 연속으로 붓다는 우리 안에 살고 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감동했다면 우리는 예수의 연속이다. 이것이 충분히 마음속 깊이 와 닿았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데 그 까닭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0)


선사, 랍비, 신부, 또는 목사가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거나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보낼 때 누군가가 걱정과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연속인 셈이다. 우리와 그 사람은 상호 연관되어 존재한다. 우리는 구름에서 막 떨어지려는 빗방울과 같다. 그 빗방울이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강으로 흘러가거나 심해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되더라도 그것은 계속되는 변형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무엇이 되더라도 빗방울은 불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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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생: 환생과 무아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실은 실제로 무아이며, 분리될 수 없고, 무상하며 계속 변화하는 ‘저것’이다. ‘저것’은 본질적으로 명칭을 붙일 수가 없으며 알 수도 없다. 불교 신자들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저것’에 이름을 붙이려 하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저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안다는 망상에 빠질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것’이 우리의 것이고 우리에게 ‘저것’이 있으며 다른 단어와 개념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것’을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유대 신앙은 이런 통찰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유대인은 ‘저것’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하느님의 참된 이름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로 된 유명한 네 자음 문자다(YHWH 또는 YHVH). 이 이름은 너무나 성스러워 신앙심이 깊은 많은 유대인들은 이 문자를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이 네 자음 문자를 소리 내 말하는 대신 단순히 아도나이Adonai(주主)나하셈Hashem(네 자음 문자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야훼의 네 자음 문자는 보통 영어로도 완전히 쓰이지 않으며 ‘저것’을 말할 때 근본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실제로 알 수 없다. 결국 침묵을 지키고, 마음을 챙기고, 숨을 쉬고, 미소짓는 편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불교의 사후세계는 영어로 ‘환생’보다는 ‘부활’에 가깝다. 환생을 의미하는 단어 Reincarnation은 문자 그대로는 ‘육체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무아의 통찰에 비추어 볼 때, 갔다가 돌아온다는 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리가 분리된 자아가 아니라 ‘저것’의 보이지 않는 발현이라면 도대체 어디로 갈 수 있으며 도대체 어떻게 돌아온단 말인가? 게다가 ‘당신’이라는 존재는 또 무엇인가? 영어로 Rebirth는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나다’라는 점에서 환생보다는 조금 나아보이지만 우리의 존재를 떠나고 돌아오는 일종의 분리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여전히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환생과 무아
우리는 분리되고, 소외되고, 길을 잃은,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생명체나 사물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일부가 아니다. 우리는 결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보통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아 있는 존재인 우리는 일반적으로 살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물과 무기질 몇 킬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실체는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은 변형과 변화의 과정, 즉 어떤 유형이 있는 에너지의 흐름이다.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하는 건 실제로 우주의 그 밖의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실체라면 무엇이 환생하고 부활한단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환생에 대해 숙고해보면, 쉽게 말해서 우리가 과거에 클레오파트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바흐나 베토벤이었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 수백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묘한 에너지 유형이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넘어가고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는 전생의 기억까지 넘어가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에너지 유형을 보통 우리라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우리’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의 생각으로 할 수 있는 멋진 게임 중 하나는 ‘만약에’라고 가정하고 사실에 반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예일대학에 들어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예일대의 비밀 조직 ‘해골과 뼈’에 들어가 조지 부시와 존 케리와 어울려 다녔다면 나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을까? 어떤 기회가 있었을까? 또는 운동 신경이 뛰어나게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완벽하고 다정다감한 부모를 만났더라면? 또는 리버풀에서 존, 폴, 조지, 링고와 막역한 친구로 지냈더라면, 그리고 그들이 내게 비틀즈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면 어땠을까?” 등을 말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흥미로운 질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의 뛰어난 뇌가 이런 정신적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예일대학에 입학했다면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만든 것 중 하나는 우리가 했던 경험이지 다른 경험이 아니다. 우리가 좀 더 탄탄한 체격이었다면 어땠을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몸과 의식은 하나다. 다른 몸이었다면 의식도 달라졌을 것이다. 탄탄한 몸이었다면 우리의 체험과 의식도 바꿔놓았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닐 것이다.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가 되었더라도 그것 역시 우리를 바꾸어놓았을 것이므로 우리가 아닌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한때 다른 시간이나 장소에 살던 다른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돌아와 현재 시간과 환경에서 이 몸으로 삶을 살고 있다면 이는 무슨 의미일까? 특정 유전자를 갖고 특정 경험을 하면서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 몸으로서 존재함이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모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마도 지금쯤이면, 우리 머리는 핑핑 돌아 어지러울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어지러움 속에서 사후에 일어날 일은 모른다고 말한 노선사에 대한 존경심이 들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자신이 집착했던 개념을 조금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붓다는 항상 현실을 똑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개념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다.
환생을 초 두 자루에 빗대어 설명한 이야기가 있다. 내게 불 켜진 초가 하나 있고 그것으로 다른 초에 불을 붙이고는 꺼버린다고 하자. 그러면 두 번째 초의 불꽃은 첫 번째 초의 불꽃과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우리의 생각은 어떤가? 사람들은 흔히 같은 불꽃이나 다른 불꽃 둘 중의 하나로 재빨리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두 가지 모두 사실이거나 또는 두 가지 모두 아니라고도 답할 수 있다. 같은 불꽃인가? 답은 그렇다. 어느 정도는 그렇다. 두 번째 불꽃은 첫 번째 불꽃의 연속인 셈이므로 넓은 의미에서 같은 불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불꽃인가? 역시 답은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두 번째 초의 불꽃은 첫 번째 초와는 다른 밀랍과 심지에서 다른 산소를 태워 생겨났다. 예리한 칼날 같은 불교의 이론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진술이 모두 타당해 보인다. 그것은 이전과 같은 불꽃이다. 그것은 다른 불꽃이다. 그것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불꽃이다. 또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불꽃이다. 그렇다면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지닌 생명 에너지의 불꽃이 다른 생명으로 옮겨간다면 우리는 동일한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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