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오가이


구로다가 파리를 떠나기 3년 전 모네는 이미 로댕과의 2인전을 통해 조각에서는 로댕 회화에서는 모네라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지고 있을 때였다.
모네는 1890년 늦여름부터 건초더미를 모티프로 그리기 시작했다.
늦여름부터 겨울 한철에 이르는 계절의 변화에 의해 달라지는 인상을 포착했는데 건초더미의 그림자 모양과 길이가 언제 어디에서 그렸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시인 말라르메는 건초더미 그림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네는 그림을 그릴 때 과학자와도 같은 태도로 일기와 시각에 따라 변하는 빛을 관찰했으며 그것이 거의 과장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사실주의로 분류하더라도 쿠르베와 휘슬러의 작품에 비하면 덜 사실주의적이었다.
모네가 1891년 봄부터 가을까지 그린 포플러 시리즈도 마찬가지로 과장되어 나타났다.
인상주의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일본 화가들이 그린 인상주의 그림에서는 이런 요소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양식만 나타나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구로다가 친구들과 함께 동경미술학교에 교수로 초빙되면서 바야흐로 일본에서의 본격적인 서양화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에 의해서 서양화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본고장 유럽과 직결되는 존재로 부상되기 시작했다.
구로다에 의해 인상주의에 근거한 아카데미즘으로 대변되는 이 학교의 화풍은 일본 관전의 지배적인 풍조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수학한 조선 유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아카데미즘이란 말은 예술에 관해 사용할 때 부정적인 이미지로 예를 들면 매너리즘화된 형식주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말은 19세기에 미술학교라는 제도 특히 프랑스 아카데미 데 보자르를 통해 그곳에서 공부한 예비화가에게 전수된 회화기법이며 또한 회화의 이념이기도 했다.
감각에 호소하는 색채보다도 명암이나 선을 지적으로 간주하여 중시하고, 기법적으로는 연필 자국이 보이지 않게 표면을 정성들여 마무리하는 것이 특색이었다.
주제에 관해서는 역사화, 신화화를 정점으로 한 장르의 위계가 존재했다.
여기에 대립한 것이 아방가르드로서 쿠르베, 마네로 시작하여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를 거쳐 야수주의, 입체주의로 발전해 간 진영이다.
일본 미술학교에서의 아카데미즘은 인상주의 양식을 가장 뛰어난 기법으로 가르친 것을 말한다.
당시 아방가르드는 선善, 아카데미즘은 악惡이라고 하는 도식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아카데미

아카데미academy는 학문이나 예술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나 학습의 장소 또는 단체를 말한다.
아카데미란 말은 플라톤이 제자들에게 철학을 가르친 아테네 교외의 작은 올리브 숲의 명칭에서 유래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아카데미란 용어는 철학, 문학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학자 단체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16세기에 아카데미는 운영의 규칙이 확립되고 제도화되면서 좀더 광범위한 활동까지도 포함했다.

미술과 관련해서 아카데미는 르네상스 시대에 실용적인 문제를 토의하는 예술가들의 집단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로 보면 1500년경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의 작업장도 아카데미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아카데미는 1562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1519~1574) 대공이 피렌체에 설립한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였다.

코시모 1세는 피렌체에서 후기 르네상스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예술가들 특히 폰토르모, 브론치노, 암마나티, 첼리니, 조반니 볼로냐, 그리고 바사리 등을 자신의 주변에 모이게 하는 한편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코시모 1세가 불러모은 예술가들의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를 주도인 인물이 최초의 서양미술사를 쓴 바사리였다.
그의 목적은 종래의 길드의 지배로부터 예술가들을 해방시키고 이전 100년 동안 그들이 획득한 사회적 지위를 굳히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와 코시모 1세 대공이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36명의 예술가가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아마추어 예술가와 이론가들도 회원이 되었다.
기하학과 해부학 강의도 계획되었지만 작업장의 실기 지도에 대신 할 만한 의무적인 실기 훈련은 없었다.

미술 아카데미는 17세기 중반부터 말까지 독일과 스페인 등에도 설립되었다.
그리고 1720년에는 유럽에 약 19개의 아카데미가 개설되었다.
큰 변화가 18세기 중반에 있어났고 1790년까지 유렵에는 100개가 넘는 미술 아카데미가 존재했다.
영국 왕립미술원도 그 하나로 1768년 런던에 설립되었다.
이들 아카데미의 대부분은 새로운 의식으로서의 사회생활에 예술이 지닌 역할을 수행하기를 바라는 인식에서 생겨났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기운 속에서 아카데미 회원이 누리던 귀족주의적인 특권은 신랄한 비판을 받았고 자크 루이 다비드를 지도자로 한 많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의 해산을 요구했다.
결국 프랑스 아카데미는 1816년 아카데미 데 보자르로 재출발했다.
실질적으로 아카데미를 위협한 것은 예술가를 천재로 본 낭마주의 작가의 개념이었다.
즉 예술가는 가르칠 수도 없고 규범에 종속될 수도 없는 영감의 빛으로 걸작을 창조하는 천재라는 관점이었다.
예술가가 곧 천재라는 개념은 18세기 영국의 저술가들 사이에서 처음 생겨났으며, 칸트가 이를 공식화했고, 괴테와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촉진되었다.
사실 19세기의 모든 뛰어난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에 소속되지 않고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모색했다.

19세기 미술이 재평가되어 인상주의가 최종적으로 인정되었을 때, 예술가들과 부르주아 시만 사이의 이런 대비는 더욱 두드러졌다.
아카데미는 기존의 관습에 얽매여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권위를 유지했지만 진보적인 사람들로부터는 비난을 받았다.
아카데미의 자율화와 아카데미의 독점권을 타파한 미술학교의 증가로 양측 사이에 점차 타협이 이루어졌다.
아카데미는 어떤 예술가라도 개성적 시각으로 자신만의 순수한 재능을 드러낼 수 있는 수준의 장인 정신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 이런 변화의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1896년 동경미술학교에 서양화과가 개설되고 처음 서양미술사를 가르친 사람은 모리 오가이森鷗外였다.
오가이가 강의한 내용이 학생들의 필기 노트로 전해지는데 그의 강의가 덴신의 것과 다른 점은 그리스 이전 이집트와 앗시리아 미술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면서 17~19세기 미술에 중점을 둔 것이다.
서양화는 르네상스라는 고전에 바탕을 둔 원근법, 명암법, 그리고 인체의 완벽한 비례의 풍성한 수확을 거둔 후 17~19세기에 걸쳐 다양하게 유럽의 곳곳에서 꽃을 피웠으므로 3세기에 걸친 이 시기의 서양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는 것은 근대로의 이행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당연하고 또한 필수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이와무라 유키岩村透가 1899년에 서양미술사를 담당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유키가 고대를 다루지 않은 것은 동경미술학교에서는 고대보다도 르네상스 이후 동시대 서양미술과 관련되는 작품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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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츠시카 호쿠사이


카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그가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다가 결국 1798년 이후에 사용한 이름이다.
호쿠사이는 에도의 외곽 시골에서 태어났고, ‘카추시카 지역의 농부 정신’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여러 가지 공예를 시도한 후 1778년에 그는 카츠카와 순쇼勝川春章의 화실에 들어가 15년 동안 순로春郞라는 이름으로 배우 초상화, 연재소설의 삽화 등을 그렸다.
1792년 스승이 타계하자 동료 순코春好와의 의견충돌로 화실을 떠났다.
호쿠사이는 카노파의 유센狩野融川, 고전 토사파의 한 갈래의 스미요시住吉, 소타츠-코린파로부터 사사했으며, 심지어 네덜란드의 동판화 기법까지도 배웠다.
소타츠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는 타와라야 소리俵屋宗理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기도 했다.
서양화와의 만남은 그의 양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쿠가와德川 막부의 엄격한 고립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상인들은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일본과 교역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호쿠사이는 네덜란드 판화의 영향으로 서양 화풍의 순수 풍경판화 세트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에도의 경관이나 그 주변의 바다풍경을 그린 판화들에는 라틴 알파벳을 흉내낸 일본 글씨로 화제畵題가 쓰여 있고 과장된 기하적 투시법과 음영법이 적용되어 선묘로 그려진 인물들과 이상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호쿠사이는 여기서 처음으로 일본 회화에서는 전혀 이질적인 아주 낮은 단일 시점을 채택했다.
이 두 가지 원리가 그로 하여금 후지산富士山 연작과 같은 걸작품을 낳게 한 것이다.
예기치 못했던 이 동서의 만남은 반 세기 이후 파리에서 화가들이 호쿠사이의 판화를 발견하고 연구하게 되었을 때 또 한 번의 반향을 가져오게 되었다.
1804년부터 호쿠사이는 토카이도東海道 연작과 에도의 명소를 그린 연작들을 몇 세트 제작했다.
1814년에는 유명한 『호쿠사이 만가』, 즉 그의 평생의 결실이 담긴 모든 드로잉들로 형성된 일종의 그림백과사전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의 생전에 13권이, 그리고 사후에 2권이 더 출간되었다.
1825년경부터 1831년까지 그는 드디어 최초의 후지산 연작을 출간했는데,
제목에는 <후가쿠산 쥬록케이 富獄三十六景>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46경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시점에서 떠나 그는 대체로 낮은 시점에서 본 산의 모습을 그렸는데 아름답고 인상적인 효과를 창출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풍경화를 생기 있게 하는 것은 그 안에 포함된 몇몇 점경인물들이다.
그러나 <붉은 후지산>은 어떤 인적에 의해서도 전혀 방해받지 않은 경이로운 산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특히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의 가수 La Chanteuse des rues>에서 일본 판화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종 모양으로 둥글게 한 드레스를 평편하게 이차원적으로 채색하고 가장자리를 밝은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모습이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게 한 효과는 일본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이다.
그 외에도 당시 화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감한 생략과 사선구도 등은 일본 판화에서 받은 강렬한 시가적 효과를 이용한 것들이다.
특히 모네는 대각선 구도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모네가 그린 풍경화와 해양화에서 나타난 파도가 치솟는 형태 등은 히로시게와 호쿠사이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이다.
모네가 얼마나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그가 1876년에 그린 <일본 소녀 The Japanese Girl>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제2회 인상주의 전람회에 출품된 것으로 아내 카미유에게 화려한 기모노를 입히고 금발 가발을 쓰게 한 후 그린 것으로 일본화를 모방한 것이다.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통해 소개된 일본 미술은 유럽인에게 파란을 일으켰는데,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의 수가 늘었고, 판화 사본을 벽에 장식하는 살롱과 카페가 늘었으며, 일본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프랑스인에게 우키요에 학파의 대가들 호쿠사이, 히로시게, 우타마로의 목판화는 프린트물로 익히 알려졌다.
반 고흐도 일본 판화를 모사하며 일본화풍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몽마르트르 근처에 있는 상점에서 판화 사본을 구입했으며 그것들이 수백 점에 달해 얼마나 일본화에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아틀리에 벽은 일본 판화들로 장식되었으며 그것들을 그림 배경에 사용하기도 했다.
유럽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에 일본 판화의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판화를 배경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1891년 평론가 로저 막스Roger Marx는 일본 미술은 모더니즘에 있어 중요하다고 했고,
“일본은 우리들의 스승이다”라고까지 말한 평론가도 있었다.
따라서 일본 관립미술학교에서 인상주의를 아카데미즘으로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저항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를 자긍심을 갖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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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도(1630~1707년 이후)





석도의 본명은 주약극朱若極이다.
아버지 주형가가 감국監國을 자칭한 죄로 복주에서 처형당하자 태감太監이 어린 그를 데리고 도주했고 그는 후에 승려가 되었다.
그는 청초의 승려화가로 창조를 주장하고 옛 것을 모방하는 데 반대한 산수화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저서 『화어록 畵語錄』에서 “일一로서 만萬을 다스리고 만으로써 일을 다스린다”고 했는데, 개별과 일반, 보편과 특수의 관계로서 그의 변증법적 사상을 표현한 말이다.
그는 『화어록』에서 일획이란 말과 이와 동의어인 36개의 일一자를 사용했다.
대부분의 석도 연구자들은 일획은 곧 일필일획 혹은 “붓을 일으키거나 붓을 대는 것(起筆落筆)”이라 하여 일一이 서수序數라고 본다.
석도는 당시의 복고주의에 반대하여 말했다.


“비록 어떤 화가를 핍진하게 닮았다 하더라도 또한 어떤 화가가 먹다 남은 국을 먹는 것일 뿐이다.

예전 사람의 수염과 눈썹은 나의 얼굴에 날 수 없고 예전 사람의 폐와 내장은 나의 배와 창자에 들여놓을 수 없다.

내가 예전에 대하여 어찌 배우기만 하고 변화시키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필묵의 기교에 관해서는 “먹은 정도正道를 닦지 않으면 정기精氣가 없고 필은 생활生活이 없으면 신묘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필과 먹이 마땅히 시대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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