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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Giotto


조토Giotto(1267-1337)에 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화가이며 건축가인 조지오 바사리가 1550년에 가장 탁월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인생(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and Architects)에 관한 책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가 1540년대 중반에 쓰기를 시작해서 1550년에 출판했는데 13세기 화가 조바니 치마부에로부터 시작해서 한창 유명해지고 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에 이르기까지 120명의 대가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그는 1568년에 재판하면서 자료를 더욱 보충했으며, 생존하는 예술가들을 보탰고, 예술가들의 목판화 초상화를 삽입했으며, 각장에 서문을 달고 이해하기 쉽도록 색인도 만들어 넣었다.
바사리의 저서는 오늘날 이태리의 르네상스(Renaissance)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꽃을 피고 결실을 맺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근본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Titian) 그리고 수십 명의 고명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과 교류했고 교황, 왕자, 저명한 인사들도 알고 있었으므로 저서에 나타난 내용은 생생한 증언과도 같은 것이다.


바사리는 조토가 10살 때 영리함을 나타냈고 그의 영리함은 아버지만 즐겁게 한 것이 아니라 동네와 동네 밖의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기록했다. 하루는 치마부Giovanni Cimabue(1240-1302)가 사업차 플로렌스로부터 베스피냐노Vespignano로 가던 중에 조토가 양으로 하여금 풀을 뜯어 먹게 하고는 끝이 약간 뾰족한 돌로 평편하고 잘 닦인 석판에 그 양을 모델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조토는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는데 스스로 자연으로부터 배워서 그리고 있었다.
치마부에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놀라운 장면을 보고는 조토에게 자기와 가서 함께 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조토는 아버지가 허락하신다면 가겠다고 대답했다.
치마부에는 본도네에게 물어 허락을 받은 뒤 조토를 데리고 플로렌스로 갔다.


바사리는 조토가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스스로 익히고 또 치마부에로부터 배워서 조야한 그리스인의 방법을 완전히 버리고 현대의 그리고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적었다.
바사리는 그리스인의 회화방법을 조야하다고 했는데 그는 이태리 회화의 우수함을 역설했으며 치마부에가 그리스인의 회화방법으로부터 독자적으로 그림을 그린 첫 예술가들 중 한 사람이라고 앞서 극찬한 적이 있었다.
조토의 자연주의 회화방법을 바시리는 처음부터 극찬하면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바사리는 1550년 현재 과거 200여 년이 넘도록 어느 화가도 조토와 같은 훌륭한 자연주의 방법을 사용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는데 지나친 칭찬이 아니었다.


조토는 플로렌스의 포데스타(Podesta) 궁전에 있는 예배당 내부를 장식하면서 아주 가까운 친구이면서 유명한 시인 단테Dante Alighierri(1265-1321)의 초상화를 라티니Brunetto Latini의 초상화와 나란히 그렸는데 라티니는 단테의 스승이다.
두 사람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시 시민 도나티Corso Donati이다.
단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조토를 극찬했다.

“치마부에가 회화 분야를 장악한 사고였지만 이제 조토가 유일한 목소리이다. 치마부에의 명성은 그만 어두워지고 말았다.”

단테에게 치마부에는 중세의 전통 스타일의 대가였고 조토는 현대 회화를 창조한 사람으로 이를 증거 할 만한 그림들이 플로렌스에 얼마든지 있었다.


조토가 회화에 자연주의 스타일을 회복시켰다는 것이 당시 예술가, 학자, 시인들의 한결같은 찬양이었다.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1313-75)와 페트라크Francesco Petrarch(1304-74)도 조토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페트라크는 조토를 고대 그리스의 신비적인 화가 아펠레스Apelles에 비유했다.
예술가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는 조토가 타계한 지 50년이 지난 후에 그의 회화적 언어가 완전히 신선했으며 회화사에 있어 근본적으로 혁명적이었다면서 “조토가 그리스인의 미술을 라틴 사람의 것으로 만들었고 또한 현대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조토를 이태리 최고의 예술가로 꼽았다.
이 같은 말을 기베르티Ghiberti가 반복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조토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는데 중세의 어두움을 깨뜨리고 회화에 다시 희망을 주는 빛을 나타낸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이는 고전적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회화를 재생시킨 위대한 예술가로 받아들여졌다.
재생은 바로 르네상스의 정신인 것이다.
조토는 벌써부터 르네상스의 길을 닦았던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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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가 화가로 데뷔한 것은


이탈리아 시인과 예술가들을 경악시킨 조토의 회화방법은 여백을 두드러지게 사용한 것과 사물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한 것 그리고 자연주의 색채를 구사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우리가 관심을 두고 말하는 자연주의 색채는 빛의 밝기에 따라서 변하는 색을 나타낸 것을 말한다.
파두아Padua의 스크로베니 예배당Scrovegni Chapel에서 처음으로 자연주의 색채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오래 닫혀 있던 빛과 색의 관계를 부순 것이다.
그의 구성을 보면 그가 일상생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주의 깊게 관찰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인 사물들, 동물과 식물들, 그가 묘사하려고 한 인물의 의상에서 이런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평소에 돋보기를 끼고 사물을 확대해서 본 듯 했고 세상을 새로운 방법으로 읽어나가면서 자신의 관점들을 믿을 만한 풍경과 사실주의에 기초한 구성적인 공간 안에 담아냈다.


조토가 화가로 데뷔한 것은 아시시Assisi에 있는 상 프란체스코San Francesco의 바실리카 상단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에피소드들을 프레스코로 장식하면서부터였는데 1290년경이다.
중세 전통에 의하면 예술가가 데뷔하기 전에 스승의 작업장에서 한동안 훈련과정을 갖는다.
조토가 플로렌스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치마부에의 작업장에서 그의 회화방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280년대 초로 아마 15세 때쯤이었을 것이다.
조토의 초기 그림을 보면 치마부에의 회화적 언어가 구사되었음을 보는데 조토가 오랫동안 그로부터 수학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1290년대 플로렌스는 예술의 중심지였다.
조토는 산타 트리니타Santa Trinita 성당과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성당의 장식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새로운 고딕 주제의 장식과 모자이크에 감동을 받아 그 이미지를 머리 속에 깊이 담아두었다가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지옥의 장면을 모자이크의 이미지를 따라서 모방하기도 했다.
그는 플로렌스 밖의 도시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 투스카니아 사람들이 거주하던 피사Pisa와 시에나Siena에 관심이 있었으며 시에나의 고딕 두오모Duomo의 구조물과 내부 장식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두치오Duccio의 그림에도 흥미가 있었지만 니콜라Nicola와 조바니 피사노Giovanni Pisano 형제의 조각들에도 관심이 있었다.
니콜라는 1260년에 이미 피사에서 활발하게 작업했는데 그의 조각은 그리스인의 조각을 라틴의 조각으로 바꾸는 혁명적인 작업이었다.
피사노 형제의 조각을 통해서 조토는 명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조토는 십대 때 한동안 로마에 머물었는데 로마에 자주 간 치마부에를 따라 갔던 것 같으며 1285년과 1288년 사이에 머물었다.
조토는 치마부에의 조수로 그곳에서 작업한 것 같은데 그의 작업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 아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치마부에와 더불어 플로렌스의 회화를 대표했는데 그는 1282년에 로마에 안주했다.
1290년대 로마는 건축 붐이 고조에 도달했을 때였다.
1277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니콜라스 3세(Nicholas III(1277-80년 재위)는 로마를 기독교 국가의 수도로 손색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재건하고 새로운 건축물을 짓도록 했다.
그는 라테란 궁내 대성당의 프레스코를 보수하도록 했고 신축한 예배당에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를 장식하도록 했다.
상파울로San Paolo의 바실리카에 있는 낡은 프레스코를 피에트로 카발리니Pietro Cavallini가 보수했고 같은 해 1285년 아놀포가 제단 위 닫집 모양의 차양Canopy에 그림을 그렸다.
니콜라스 3세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가 첫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니콜라스 4세(Nicholas IV(1288-92년 재위) 때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는 라테란을 보수하면서 1291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 야코포 토리티Jacopo Torriti로 하여금 바실리카의 앱스에 모자이크를 장식하도록 했다.
니콜라스 4세는 교황에 즉위하던 해 산타 마리아 마기오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의 묵은 때를 벗기는 대청소 작업을 명하면서 토리티로 하여금 앱스에 프레스코를 그리게 했고(1296년에 완성) 필립포 루수티Filippo Rusuti로 하여금 정면에 모자이크를 장식하도록 했다.
아놀포 디 캄비오는 1290년에 제단을 장식했다.
스무 살도 채 안된 조토는 로마에서 현대화 되어가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고전주의를 탐구하여 새로운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로마의 화가들로부터 조토는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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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조토가 제작했다고


로마에서 조토가 제작했다고 믿어지는 작품이 두 점 있는데 1904년 피에트로 토에스카Pietro Toesca는 이를 플로렌스의 대가의 작품이라고 말했고 1966년 일라리아 토에스카Ilaria Toesca는 구체적으로 조토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두 점 가운데 하나는 현재 로마의 팔라조 베네지아 뮤지엄Museo di Palazzo Venezia에 소장되어 있는 아라코엘리Aracoeli의 산타 마리아 성당에 그린 십자가처형이고 다른 하나는 산타 마리아 마기오레 성당의 트랜셉트transept(십자형 내부의 좌우 익부)에 그린 프레스코이다.
그는 원형 안에 각각 예언자들의 초상화를 그려 넣었다.
이것들이 조토의 작품이라면 그가 아시시에서 작업하기 전에 로마에서 그린 것들일 것이다.
팔라조 베네지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패널은 색이 완전히 벗겨졌고 형태만 남아 있는데 그리스도의 몸과 성 요한의 모습이 적절한 비례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성당의 메달 안에 그려진 초상화들에서 그가 전통을 소중하게 받아들였음을 보며 그는 두터운 선으로 테를 둘러 생기 있게 했는데 그가 아시시의 상 프란체스코 성당 바실리카 천정 세 번째와 네 번째 구획에 구약과 신약성경의 내용을 프레스코를 그리면서 이 같은 방법을 사용했음을 본다.


13세기 말 가장 로마인다운 기념비적인 작품은 장방형 회당이 두 개가 있는 아시시의 상 프란체스코 성당의 장식이다.
이 성당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들의 모체가 되는 곳이며 대주교가 아니라 교황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는 성당이다.
따라서 이곳의 장식이 가장 로마적인 것은 당연하다.
프란시스Francis(1181/82-1226)는 1226년 10월 3일 아시시의 포르지운콜라Porziuncola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성당은 2년 후 그를 기념하여 건립되었고 1253년에 완공했으며 그해 이노센트 4세Innocent IV에 의해서 봉헌되었다.
아래에 있는 바실리카에는 프란시스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고 회중석 양쪽 벽에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프란시스의 생애가 마주 바라보도록 프레스코로 장식되었다.
이 장식을 마친 후 후원자들은 위에 있는 바실리카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러 명의 예술가가 다양한 방법으로 장식되었는데 네 가지가 주제였다.
좌우 익부 중 오른쪽에는 사도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왼쪽에는 묵시록이며, 성가대가 있는 쪽에는 성모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이고, 중앙의 둥근 천정에는 복음서 저자들의 초상화이다.
회중석 아래 양쪽 벽과 앱스를 향해 정면 아래 양쪽에는 프란시스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그려졌고, 그것들 위 오른쪽 벽에는 신약성경에 관한 내용이 그려졌으며, 윗단 왼쪽 벽에는 구약성경에 관한 내용이 그려졌다.
입구 근처 십자로 가로지르면서 네 구획을 만든 천정에는 교회의 박사들이 장식되었으며 입구의 둥근 천정에는 성자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위 바실리카에는 치마부에의 감칠맛 나는 과격한 중세풍 장식이 두드러졌는데 그는 우익부, 왼쪽 벽 전면, 앱스, 그리고 천정을 장식했다. 회중석 위층을 이루며 제단 근처에서 정면에까지 이어지는 마주 바라보는 양쪽 벽에 그려진 구약과 신약성경의 주제는 로마 화가 야코포 토리티Jacopo Torriti가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토리티는 교황 니콜라스 4세Nicholas IV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가서 1291년에 라테라노에 있는 상 조바니 바실리카의 앱스와 산타 마리아 마기오레(1296년에 완성)를 장식했다.
토리티가 아시시를 떠난 1290년경에 조토가 입구 십자로 네 구획으로 나뉘어진 천정에 교회가 추앙하는 박사들을 장식했고, 오른쪽 벽에는 ‘에소를 거절하는 이삭 Isaac Rejects Esau’과 ‘장자의 축복을 받는 야곱 Jacob Receives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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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소를 거절하는 이삭과 장자의 축복을 받는 야곱


조토는 두 그림을 마주 보는 양쪽 벽에 각각 그렸다.
그는 ‘에소를 거절하는 이삭Isaac Rejects Esau’을 정확한 기하와 공간을 나타내는 상자 모양으로 화면을 구성한 후 눈이 먼 아버지 이삭을 아주 작은 방의 커다란 나무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모습으로 그렸다.
새로운 방법의 상자 모양의 화면은 토리티Torriti의 ‘가나의 혼인식Marriage at Cana’에서 발견되는데 조토의 것과 달리 입체감이 없이 평편하다.
커튼이 섬세하게 묘사된 막대기에 달려 방 전체 벽을 장식하고 관람자가 방안의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커튼을 열어 놓았다.
앞으로 나온 부분은 밝지만 방 안쪽은 어두운데 그늘지기 때문이다.


‘장자의 축복을 받는 야곱Jacob Receives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에서 그는 이삭을 좀더 위엄을 나타낼 수 있도록 구성을 약간 달리 했으며 기하적 형태로 공간이 훨씬 열려 있도록 했다.
커튼은 당시 유행하던 우아한 디자인의 것으로 장식적인 효과를 높여 주고 명암에 의해서 공간을 안으로 한정시킨다.
이는 예술가가 구도에 관해 충분한 지식이 있음을 알게 해주고 또한 건축에도 관심이 많음을 알게 해준다.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다운데 침착한 제스처와 완벽한 모델의 모습은 그가 고전주의 방법을 따라 그렸음을 알게 한다.
위엄을 나타낸 이삭의 모습은 로마인의 석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하지만 조토는 각 모델의 동작을 통해서 관람자가 그들의 대화를 분별할 수 있도록 했고 모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나타나도록 세심하게 묘사했다.
‘장자의 축복을 받는 야곱’을 보면 조토가 이삭으로 하여금 야곱의 손을 잡게 함으로써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이 있음을 인정하고 리브가가 커튼을 약간 제치고 이 장면을 바라보도록 했다.
조토의 자연주의적 관찰이 야곱의 얼굴과 반쯤 감긴 눈으로 이삭이 눈을 멀었음을 나타낸 데서 발견된다.
리브가의 이마에 나타난 주름은 그레고리의 이마에 나타난 주름과 같아 같은 화가의 솜씨임을 알게 해준다.


이 두 그림에서 빛이 정면에서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두 그림 사이 위에 있는 작은 창으로부터 빛줄기가 내려 와 닿는다.
왼쪽에 있는 ‘에소를 거절하는 이삭’에서 오른쪽으로부터 와 닿는 빛을 볼 수 있고 ‘장자의 축복을 받는 야곱’에서는 반대 방향에서 빛이 와 닿는 것을 볼 수 있다.
빛에 의한 명암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 ‘에소를 거절하는 이삭’에서 에소의 왼팔과 왼손 손등이다.
조토는 밝은색 붓질로 빛이 와 닿았음을 묘사했다.


두 그림의 주제는 창세기의 에피소드에서 구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이삭이 늙어 눈이 어두워졌다. 이삭은 장자 에서에게 자기가 언제 죽을 런지 모르니 사냥해서 별미를 만들어 오라며 그것을 먹고 복을 빌어 주겠다고 말했다.
쌍둥이 작은 아들 야곱을 편애한 리브가가 남편의 말을 엿듣고는 야곱에게 살진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끌어 오면 별미를 만들어 줄 터이니 그것을 아버지께 갖다 드리고 에소가 받을 아버지의 복을 가로채라고 했다.
야곱이 형의 몸에는 털이 많아 아버지가 만지면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느냐고 말하자 리브가는 에소의 옷을 야곱에게 입히고 염소 새끼 가죽을 매끈한 손과 목에 감아 주어 몸에 털이 난 것처럼 꾸몄다.
이삭은 알고 속았는지 모르고 속았는지 야곱에게 다음과 같이 축복했다.


“아! 내 아들에게서 풍기는 냄새, 야훼께 복 받은 들 향기로구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리신 이슬로 땅이 기름져 오곡이 풍성하고 술이 넘쳐 나거라.
뭇 백성은 너를 섬기고 뭇 족속들은 네 앞에 엎드리리라.
너는 네 겨레의 영도자가 되어 네 동기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복을 빌어 주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야곱이 아버지의 복을 받고 막 물러나왔을 때 형 에소가 사냥에서 돌아 왔다.
에서는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가서 복을 빌어 달라고 했다.
이삭은 방금 복을 빌어 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은 야곱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은 구두로 한 약속을 법으로 여겼기 때문에 한 번 약속하면 변경시키지 않았다.
장자의 축복이란 재산을 다른 형제에 비해 두 배로 물려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소는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나를 두 번씩이나 뒷발질하라고 그 녀석의 이름이 야곱이었던가? 저번에는 내 상속권을 빼앗더니, 이번에는 내가 받을 복마저 가로채는구나!”

이삭이 에소에게 말했다.

“도리에는 어긋나지마는 나는 야곱을 너의 상전으로 삼고, 모든 동기를 그에게 종으로 주었다. 그에게는 곡식과 술도 떨어질 날이 없을 것이다. 에서야, 이제 와서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느냐?”

에소는 목을 놓아 울면서 아버지가 죽게 되면 야곱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나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유랑을 떠나게 된 것은 에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였고 유랑생활은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새 인간이 되어 나라를 건국하게 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창세기 27:1-45).


교회의 박사들과 이삭 이야기가 조토의 작품이냐 하는 학문적인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탈리아 학자들과 그 밖의 학자들이 그의 작품으로 인식하고 있다.
조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 중 로마니니Romanini는 이삭의 이야기를 아놀포Arnolfo의 작품이라고 1987년에 주장했고, 브랜디Brandi는 1983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로마인 화가의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밖의 성서적 주제의 그림들은 조토의 방법으로 로마인이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토드Thode가 1885년 처음 조토의 작품이라고 주장한 이래 짐메르만Zimmermann(1899), 토스카Toesca(1927), 베렌슨Berenson(1932)과 근래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조토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틴토리Tintori와 마이스Meiss는 1962년 조토가 아시시에서 프레스코를 그릴 때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음을 지적했다.
새로운 기법이란 하루에 그릴 만한 면적의 벽을 물에 젖게 한 후 색소를 빠르게 바르는 방법으로 조르나테giornate라고 하는데 마른 플래스터에 그려서 패널에 그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과거의 폰타테pontate 방법과 비교가 된다.
조토가 사용한 새로운 방법은 이탈리아 프레스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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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 the Deposition’은 파두아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프레스코를 예고하는 그림이다.
두 그림을 비교하면 오른쪽에 두 남자가 서 있는데 한 사람은 두 손을 깍지지고 있다.
두 그림 모두 예수의 시신을 중심으로 타원형의 구성되었으며 왼쪽에 한 무리의 여인을 구성했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무질서하게 비행하는 천사들은 치마부에의 그림을 상기하게 한다.


조토의 그림을 보면 그가 두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스승 치마부로부터 윤곽선을 분명하게 하는 것, 옷이나 커튼의 주름을 날카롭게 묘사한 것, 중세의 모델들에 대한 일반적인 비례를 지속적으로 따른 것, 이야기적으로 묘사하면서 성서의 내용과 균형을 이룬 것 등이다.
그에게 영향을 준 다른 한 사람은 조토에 앞서 아시시에 그림을 그린 아놀포이다.
조토의 고전적 공간에 대한 개념은 그로부터 받은 영향이 역력하다.
그리고 또 지적할 만한 것은 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황폐해지는 고대 미술품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이런 영향은 그가 그린 사람의 얼굴과 의상 특히 이삭 이야기와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린 그림에서 여인들의 옷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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