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의 과도내각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이 무렵 사태수습을 협의 중에 있던 국회는 3·15선거의 무효화 선언과 내각책임제의 개헌 등을 수습방안으로 채택했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소식이 발표되자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권고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국회의 결의가 전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7일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전달했다.
이어 이승만은 이튿날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옮겼다.


4월 27일 국회의 결의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이 발표되자 허정 외무장관은 자동적으로 대통령 서리에 취임했다.
시민의 시위가 막바지에 달했을 때 이승만은 4월 24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인 허정을 외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허정은 취임과 더불어 내외 기자단과 회견을 갖고 선거를 위한 과도정부의 당면과제로 첫째, 정·부통령 선거는 국회와 협의하여 실시하며, 둘째, 경찰의 중립화를 법안으로 추진하고, 셋째, 과도정부의 각료는 비정당인으로서 구성한다는 등의 3개항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허정 내각수반은 ‘비혁명적 방법에 의한 혁명’을 수행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하면서 4월 28일 과도정부의 입각자 명단을 발표했다.


내무장관: 이호

법무장관: 권승렬(유임)

재무장관: 윤황병

문교장관: 이병도

부흥장관: 전예용

상공장관: 전택무

보사장관: 김성진

교통장관: 석상옥
(이하는 5월 2일에 발표된 입각자 명단)

국방장관: 이종찬

체신장관: 오정수

농림장관: 이해익

공보실장: 서석순


허정 내각은 5월 2일 첫 국무회의를 열어 혼란 상태에 있는 정국을 수습하고 난맥 상태에 있는 경제위기를 타개할 것을 다짐했다.
다음은 혁명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당면 정책 다섯 가지이다.


1. 부정선거 관련자를 엄중 처벌한다.

2. 경제사범을 엄단한다.

3. 경제적 민주화를 지향하는 시책을 추진한다.

4. 중소기업 육성에 재정적으로 뒷받침한다.

5. 악질 세무 관리를 엄단한다.


허정은 첫째, 반공주의를 더 한층 강화하고, 둘째, 부정선거 처벌대상은 고위 책임자와 잔학행위를 한 자에게만 국한하며, 셋째, 4·19혁명 당시 미국의 행위를 내정간섭 운운하는 것을 이적행위로 간주하고, 넷째, 한국과 일본 관계의 정상화 노력과 일본 기자 입국을 허용한다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과도정부의 한계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허정을 수반으로 과도정부가 4월 27일 구성되었지만, 이 내각은 급격한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허정이 반공을 한층 더 견실하게 진전시키고, 부정선거의 처벌대상을 고위 책임자와 잔학행위자에 국한시키며,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서 그의 정치가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에 있어서 허정 내각은 비혁명적인 방법으로도 혁명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하지 못했고 오히려 혁명의 억제에 그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에 대한 내각의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과도정부의 입장은 기존의 법 안에서 이들에 대한 처벌을 다루는 것인데, 이들에 대한 공판을 매듭짓지 못하고 민주당 정부로 넘겼기 때문이다.
경찰에 대한 처벌도 마찬가지였다.
과도정부는 경찰의 중립화와 민주화를 약속했지만 선거부정과 정치테러 관련자들을 해임하거나 좌천시키는 데 그쳤다.
과도정부는 사회의 어느 세력, 어느 계층으로부터도 적극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학생들이나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허정은 이승만 정권의 연장으로 여겨졌다.


과도정부는 이승만과 그 하수인들인 자유당 의원들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여론과는 거리가 먼 조치를 취했다.
유혈진압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승만의 미국 망명을 주선했으며, 자유당 의원들 가운데 부정선거에 관련된 자들만 처벌한다는 방침에 따라 고위 간부 14명만 구속하는 선에서 종결지었다.


게다가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 처리를 축소시키거나 지연시켰다.
과도정부는 처음에는 자본축적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부정축재자들 가운데 불법축재자들만 조세범으로 처벌하겠다고 밝힌 바 있었다.
그러나 그 뒤 허정은 자유당과 불법적으로 관련된 조세범에 한정하여 처벌하되, 이들이 자수기간 내에 자진 신고하면 탈세액 이상을 추궁하지 않겠다는 선까지 후퇴했다.
결국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리는 그 자체가 워낙 복잡한 성격의 것이었으므로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혁신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만 했어야 할 사안들을 과도정부는 가장 온건한 방법으로 다루었다.
과도정부가 사회의 어느 한 부문에 대해서도 과감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또 건드릴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뒤에 들어선 장면 정권의 행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비교적 순조롭게 개헌과 총선의 절차를 마쳤다는 점에서 과도정부로서의 최소한의 역할은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기붕 일가의 변사와 이승만의 망명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이승만의 후계자로서 부통령이 되어 대통령직도 승계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 이기붕은 최인규와 한희석과 함께 부정선거를 추진하여 국민의 주권을 짓밟았다.
그는 4월 혁명 와중에 이승만의 강요로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4월 28일 한 가족 집단자살로 과거의 모든 죄를 뉘우쳤다.


이기붕은 전날 교수단 데모를 계기로 재연된 데모대가 서대문 자택을 포위하는 등 신변에 위기가 다가오자 우선 6군단 영내로 피신했다.
그 후 이기붕의 피신을 둘러싸고 해외망명 등 여러 설이 나도는 가운데 4월 28일 새벽 5시 40분 경무대 별관 경비실 옆에 있던 이무기 집 마룻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기붕뿐만 아니라 부인 박마리아, 장남 강석, 차남 강욱 등 일가족이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다.
계엄사령부는 이기붕 일가 자결사건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금일 아침 5시 40분 이기붕씨, 박마리아 여사, 장남 이강석 소위, 차남 이강욱 군은 시내 세종로 1번지 소재 경무대 제36호 관사에서 자결했다.
동 유해는 자결현장에서 검사와 의사의 검시를 끝마치고 수도육군병원에 안치 중에 있으며 그 진상은 조사 중이다.


이기붕 일가의 장례는 이승만 부부와 자유당 소속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에서 고별식으로 거행되었다.


한편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1개월 남짓 이화장에서 두문불출의 나날을 보냈다.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부정선거 관련자들의 처벌 과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인 1960년 5월 29일 상오 8시 50분, 그는 부인 프란체스카만 동반하고 CAT 전세기편으로 비밀리에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이승만은 그날 측근 인사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망명길에 올라 하와이의 호놀룰루로 떠났다.
허정 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이 전송차 김포공항에 나갔을 뿐 그는 쓸쓸한 망명길을 떠났다.


4월 30일 국회에서는 이승만 망명에 대한 책임추궁이 있었다.
양일동 의원의 추궁에 허정은 “이박사는 건강이 나빠 하와이로 요양차 여행한 것이며, 외교관 여권을 주선해 주었다. 이박사의 이한은 오히려 시국수습에 도움이 될 것이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면 민주당 대표는 이승만 탈출의 경위와 진상을 밝히도록 과도정부에 요구했고, 부패와 독재와 학정에 인책, 사과하지 않고 망명함은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과도정부를 비난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4·19혁명의 성격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4·19혁명은 3·15부정선거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집단시위를 벌여 불만을 표시했고, 정부가 이에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경찰에 발포명령을 내려 많은 사람을 죽게 했으며, 이에 흥분한 전 국민이 집단 항거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사건이었다.


4·19혁명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3·15부정선거였지만, 그 배후에는 권위주의적 이승만 정부 체제의 특성과 비도덕성·폭력성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정당성의 고갈,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의존이 높아져 경제적 자생력을 상실했으며, 그로 인해 산업구조가 취약해졌고, 따라서 국민경제가 위기에 몰린 것이 부정선거를 통해 불만으로 분출한 것이었다.


사회와 경제적 측면에서 이 혁명의 배후를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데, 195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침체상태에 있었다.
이런 경제적 위기는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1950년대 후반 이후 급격히 떨어진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던 우리나라 경제는 원조의 급격한 감소로 심각한 위기 국면에 빠졌다.
따라서 1957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둔화되었으며,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화되었고, 조세부담률과 실업률은 매년 상승했다.
한국은행이 1982년에 발표한 『한국의 국민소득』에 의하면, 경제성장률이 1957년에 7.6%였던 것이 1958년에는 5.5%, 1959년에는 3.8%, 1960년에는 1.1%로 계속해서 하락했다.
도매물가 상승률의 경우에는 1957과 1958년은 각각 마이너스 0.7%와 마이너스 2.6%를 기록했던 것이, 1959년과 1960년에는 각각 9.5%와 7.1%로 상승했다.


원조경제와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우리나라 경제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은 농촌경제였다.
PL480으로 지칭되는 미국 잉여농산물의 과잉도입은 국내 농산물 가격의 하락을 가져왔으며, 이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저하는 식량의 대외의존도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런 모순의 귀결로 농촌경제의 파탄은 필연적이었고, 따라서 이농이 증가했으며, 이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빈민층을 형성했다.


4·19혁명 이전의 경제구조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1차 산업인 농업 분야에서의 정부 정책의 실패로 말미암아 자립적 국민경제의 토대가 상당한 정도로 훼손되었다.
2차 산업에서는 외국 원조에 기생하는 종속적 산업구조가 형성되었으며, 그나마 상업자본적인 성격이 강하여 공업화의 내실을 기대하기 곤란했다.
3차 산업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졌는데, 이는 농촌 이농민의 도시유입으로 인해 발생한 불완전 취업상태와 도시의 인구를 공업으로 흡수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산업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국민경제의 위기는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철환의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3』에 의하면, 1960년 당시 완전 실업률은 8.2%에 달했고, 이는 잠재 실업률 26.0%를 합하면 사실상 총실업률은 34.2%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같은 국민생활의 전반적인 파탄은 4·19혁명의 객관적인 조건으로 작용했다.


김영명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학생들이 4·19혁명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당시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성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적었다.
1950년대 우리나라 사회는 도시화와 교육기회의 증대라는 이른바 근대화를 경험하고 있었지만, 산업화를 기반으로 하는 계급의 분화와 성장은 매우 미진한 상태에 있었다.
서관모는 『한국사회의 계급구성과 계급분화』에서 우리나라 사회적·경제적 계급구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 1960년의 우리 사회는 전체 경제활동 인구 가운데 농민이 58.1%, 도시의 프티부르주아 및 전문직 종사자가 13.4%, 그리고 생산직 노동자는 10.5%에 불과한 농업사회였다.
계급의 조직화와 정치의식의 성장은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며, 민간세력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따라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경제적으로 발달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미분화되어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수동성이 당시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경향이었다.
1950년대 우리나라의 지배적인 경향은 한 마디로 사회적·경제적 모순 및 권위주의적 정치에 대해 민간 사회가 적극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의 철저한 정치적 통제 및 조작을 통해 정권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경향은 1950년대 전반기의 대학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사회는 반공주의 주입을 통한 이념적 획일화, 경제적 빈곤, 비도덕적 정치에 대해 적극 대항하지 못하는 침체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대학사회 일각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소리 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가치관들이 대학사회에 싹트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되새겨 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대학사회 내에는 기성세대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점차 증가했고, 상대적으로 도덕적 사명감과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한 대학생들은 자신들을 민주주의 수호의 전위대로 자처하기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그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은 강력한 정치참여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사회 구성원의 수가 급속히 팽창했는데, 1948년 2만 4천여 명이었던 대학생의 수가 1960년에는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4·19혁명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정의감, 도덕적 사명감, 그리고 이를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용이함 및 수적 규모의 급속한 팽창 등에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민주당, 과도정부에 참여 회피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당시 민주당은 당내 응집력과 일체감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정권을 인수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차기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과도정부에 직접 참여하는 일은 피하고 다만 허정 과도정부에 영향력만을 행사하기로 했다.
이같이 여야가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가운데 허정으로 하여금 과도정부를 이끌게 했으나, 관심의 초점은 혁명과업 수행과 새로운 정부의 탄생을 위한 정치적인 현안 문제들이었다.
이런 난관을 둘러싸고 과도정부, 민주당 신파와 구파, 그리고 자유당은 서로의 견해 차이와 이해의 상충으로 난맥상을 연출했는데 그 원인은 다음에 있었다.


첫째, 혁명의 주체세력이 정권담당 세력으로 등장하지 못했고,

둘째, 구정권에 의해 기용된 사람이 과도정부를 맡게 되었으며,

셋째, 자유당 정권은 몰락해도 자유당 국회는 엄존해 있었고,

넷째, 민주당 양파는 혁명과업 완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서로 자파의 정권장악에만 혈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허정은 과도정부의 정책기조 방향을 밝힘에 있어 과도정부의 일부는 새 정부 출범을 위한 산파역이란 대전제를 깔고 4·19봉기의 여파를 극소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4·19를 의거로 인식했고, 혁명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허정 수반의 정치적 방향도 그러했거니와 이를 뒷받침한 것이 국회에서의 자유당의 포진이었다.
과도정부는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벌에 있어 편의주의적 호도책으로 일관하면서 부득이한 문제들만을 최소한으로 다루는 데 그쳤다.
자유당은 국회 내 다수의석을 이용하여 친이정권(親李政權) 관리들에 대한 처벌 움직임을 봉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