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걸인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걸인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는 것은 다분히 사회비판적인 의도가 작용한다. 빈곤을 퇴치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걸인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걸인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보통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중세에는 바보들을 도시 밖으로 내쫓았는데 저능아와 정신분열자들만 바보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게으르거나 알코홀 중독자자들도 바보들과 함께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이들은 도시 밖 들에서 떠돌며 살다가 떼를 지어 사람이나 민가를 습격했다. 갱이 되는 것이다.
마네는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마네 22, 미술사 메트로 219-1)을 1859년 살롱전에 출품했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 들라크루아가 이 작품을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반대로 낙선되었다. 하지만 마네에게는 첫 성공작이다. 주정뱅이 걸인을 그린 그림은 교육적 목적을 중시하는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렸겠지만 대충 문지른 듯한 붓질과 자유로운 소묘는 갈고 닦은 솜씨임이 분명했다. 마네는 특별히 사회비판적인 의도를 갖고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걸인을 주제로 선택한 것이다. 알코홀 중독자 걸인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현대도시의 모습 중 하나이고 도시의 삶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화가의 의무라면 마네가 걸인을 그린 것은 현대회화의 모티프로 당연하다. 그는 그런 의도로 그린 것이다.
마네는 1860년 두아이 가에 화실을 얻고 바티뇰 블바드에 아파트를 얻었다. 바티뇰은 생라자르 역 북쪽에 있는 동네로 1861년 파리 시에 포함되었다. 이 시기에 파리에는 건축붐이 일고 있었고 유럽의 모든 철로가 파리로 통하도록 새로운 철로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아파트들이 여기저기에 들어서고 기차역이 생겨 많은 사람이 파리 시내로 몰려들자 파리의 인구는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파리는 현대화되면서 유럽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바티뇰에는 파리의 중심으로 향하는 기차와 차들의 커다란 정거장이 있었다. 바티뇰 불바드에는 걸인과 집시들이 많았으며 마네는 그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마네는 역사화를 주로 그린 토마 쿠튀르(1815~79)의 문하에서 6년 동안 수학했지만, 그의 전통적인 훈련보다는 루브르에서 대가들 특히 벨라스케스, 무리요, 리베라 등 에스파냐 화파를 연구하는 것을 선호했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은 벨라스케스의 <메니프>(미술사 메트로 211-1)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마네는 벨라스케스로부터 인물을 단순화시키는 기교를 받아들여 파리의 걸인을 묘사했다. 그는 바닥에 술병을 그려넣어 관람자에게 걸인이 독한 압생트에 중독된 자임을 시사했으며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레몬껍질과도 같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들뜰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6년 이상 그를 가르쳐온 쿠튀르에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그림이었다. 쿠튀르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은 바로 이 작품을 그린 장본인이다”라고 혹평했다.
벨라스케스는 열아홉 살 때 보데곤bodegone 시리즈를 그렸는데, 보데곤이란 정물화적 모티프로 일상적 주제를 다룬 회화를 말한다. 이런 유형은 플랑드르의 떠들썩한 풍속화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보편화되지 않을 때였다. 벨라스케스는 <달걀을 요리하는 노파>(1618)와 <물장수> 같은 주제에 진지함과 위엄을 불어넣었다. 그는 대상을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다루면서 냉정한 사실적 태도로 재현했으며 나중에는 인물 묘사에까지 확장하면서 전체 구성을 일관성과 기념비성으로 했다. 이런 점을 마네가 파악하고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
비애, 유머와 인간적 이해를 담은 벨라스케스의 걸인 그림은 후세 화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고, 같은 나라 사람 고야가 삼십대 초에 그의 작품을 많이 모사하면서 대가의 기법을 익혔다.(미술사 메트로 237, 237-1) 고야가 1778년에 그린 <눈먼 기타 연주자>(고야 31, 32)는 <메니프>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고야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걸인에게 느낀 매력을 처음 표현한 작품으로 머리를 뒤로 젖힌 눈먼 걸인의 모습은 뒤틀린 이목구비의 융합체를 이룬다. 이 작품은 태피스트리 공장을 위해 밑그림으로 그린 것인데, 공장 측은 화면에 인물이 너무 많고 색조가 다양하다는 이유로 이 밑그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야는 작품을 수정해서 공장으로 돌려보냈지만, 기타 연주자의 얼굴은 고치지 않았다. 그는 수정을 요구받은 것이 비위에 거슬렸는지 원래 그림의 일부를 나중에 제작한 동판화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괴상하게 생긴 눈먼 기타 연주자는 풍자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태피스트리를 위한 고야의 밑그림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에스파냐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이루고 있는 날마다 되풀이되는 고되고 단조로운 노동이었다. 고야는 거기에서 고대 아르카디아(목동과 처녀들이 순결하고 근심걱정 없는 삶을 꾸려 나가는 이상향)의 목가적 전원시 같은 풍경을 끌어냈지만, 그후 거기에서 점점 멀어졌다. 사전 계획에 따라 제작된 이런 궁전 장식용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소박함을 좋아하는 당시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고야가 에스파냐 시골생활의 즐거움과 행복한 아이들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어린 자식들이 연달아 죽은 것은 얄궂은 운명이었다. 고야의 자식 가운데 일곱 명이 요절했다. 인생의 즐거움을 그리라는 주문과 함께 자식들의 잇따른 죽음을 견뎌야 했던 정신적 부담이 젊은 그에게 무엇인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실제로 1770년대 말과 1780년대에 그린 작품에는 대부분 비타협적인 양식이 나타나 있다. <눈먼 기타 연주자>는 그의 밑그림 중 가장 크고 야심적이며 독창적인 작품이다. 관행에서 벗어난 이 작품은 고야의 예술이 동시대인의 예술과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 순간을 나타낸다.
가수, 악사, 유랑 연예인, 그리고 시골 농부와 신사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광경을 묘사한 회화와 판화 및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17~18세기 유럽의 대중미술에서 가장 폭넓게 사랑받는 주제를 이루었다. 벨라스케스의 영향 외에도 고야는 티에폴로가 젊은 시절에 베네치아에서 그린 거리의 악사들에게 감동을 받았으며, 그 자신도 마드리드 거리에서 구걸하는 눈먼 악사들을 보았을 것이고, 별난 기인과 사회에서 소외당한 부랑자와 불구자에 대한 그의 직관적 통찰력은 풍자적 표현에 대한 취향으로 발전했다. 이리하여 그의 밑그림은 에스파냐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 되었고 왕실도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늙은 음악가>(마네 28)는 이질적인 인물들을 배열하여 구성한 작품이다. 늙은 음악가는 마네의 화실 부근에 살던 바이올린 연주자 집시 장 라렌느인데 늘 술에 취해 있었던 그는 경찰들로부터 몹시 천대받았다. 마네는 라렌느를 화면 중앙에 고대 철학자의 모습처럼 앉히고 아이들의 호기심과 사랑을 받는 순진한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크리스포스를 묘사한 헬레니즘 조각을 변형한 것이다. 마네는 루브르에 있는 이 조각을 모사한 적이 있다. 모자를 쓴 흰색 옷을 입은 아이는 바토의 <피에로>(마네 29, 28)를 상기시킨다. 바토의 피에로는 이탈리아 코미디언 배우로서 바토가 파리에 있는 카페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18세기의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의 코미디는 잘 알려져 있었다. 피에로처럼 생긴 아이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고 놀라운 시선으로 늙은 음악가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늙은 걸인을 바라보는데 라렌느는 마치 기념촬영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관람자를 바라본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그 옆에 걸터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다. 마네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 이 인물을 그대로 <늙은 음악가>에 삽입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와 두 소년도 따로 그려서 하나의 그림으로 합성시켰는데 이는 당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메니프>와 <애솝>(미술사 메트로 211)에서 영감을 받아 나중에 <철학자 (망토를 걸친 걸인)>(미술사 메트로 238), <넝마주이>(미술사 메트로 241), <철학자 (굴과 걸인)>(미술사 메트로 239, 240)등을 그렸다.
이런 작품들은 마네의 참신하고 획기적인 표현 기법을 돋보이게 한 결과가 되었다. 이때부터 마네는 젊은 아방가르드 화가들 사이에서 스승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뒤에 출현할 인상주의로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 세잔 등을 포함한 인상주의 그룹 화가들은 마네를 존경했으며 이들은 게르부아 카페 등지에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