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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걸인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걸인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는 것은 다분히 사회비판적인 의도가 작용한다. 빈곤을 퇴치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걸인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걸인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보통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중세에는 바보들을 도시 밖으로 내쫓았는데 저능아와 정신분열자들만 바보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게으르거나 알코홀 중독자자들도 바보들과 함께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이들은 도시 밖 들에서 떠돌며 살다가 떼를 지어 사람이나 민가를 습격했다. 갱이 되는 것이다.

마네는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마네 22, 미술사 메트로 219-1)을 1859년 살롱전에 출품했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 들라크루아가 이 작품을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반대로 낙선되었다. 하지만 마네에게는 첫 성공작이다. 주정뱅이 걸인을 그린 그림은 교육적 목적을 중시하는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렸겠지만 대충 문지른 듯한 붓질과 자유로운 소묘는 갈고 닦은 솜씨임이 분명했다. 마네는 특별히 사회비판적인 의도를 갖고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걸인을 주제로 선택한 것이다. 알코홀 중독자 걸인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현대도시의 모습 중 하나이고 도시의 삶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화가의 의무라면 마네가 걸인을 그린 것은 현대회화의 모티프로 당연하다. 그는 그런 의도로 그린 것이다. 

 마네는 1860년 두아이 가에 화실을 얻고 바티뇰 블바드에 아파트를 얻었다. 바티뇰은 생라자르 역 북쪽에 있는 동네로 1861년 파리 시에 포함되었다. 이 시기에 파리에는 건축붐이 일고 있었고 유럽의 모든 철로가 파리로 통하도록 새로운 철로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아파트들이 여기저기에 들어서고 기차역이 생겨 많은 사람이 파리 시내로 몰려들자 파리의 인구는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파리는 현대화되면서 유럽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바티뇰에는 파리의 중심으로 향하는 기차와 차들의 커다란 정거장이 있었다. 바티뇰 불바드에는 걸인과 집시들이 많았으며 마네는 그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마네는 역사화를 주로 그린 토마 쿠튀르(1815~79)의 문하에서 6년 동안 수학했지만, 그의 전통적인 훈련보다는 루브르에서 대가들 특히 벨라스케스, 무리요, 리베라 등 에스파냐 화파를 연구하는 것을 선호했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은 벨라스케스의 <메니프>(미술사 메트로 211-1)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마네는 벨라스케스로부터 인물을 단순화시키는 기교를 받아들여 파리의 걸인을 묘사했다. 그는 바닥에 술병을 그려넣어 관람자에게 걸인이 독한 압생트에 중독된 자임을 시사했으며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레몬껍질과도 같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들뜰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6년 이상 그를 가르쳐온 쿠튀르에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그림이었다. 쿠튀르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은 바로 이 작품을 그린 장본인이다”라고 혹평했다.

벨라스케스는 열아홉 살 때 보데곤bodegone 시리즈를 그렸는데, 보데곤이란 정물화적 모티프로 일상적 주제를 다룬 회화를 말한다. 이런 유형은 플랑드르의 떠들썩한 풍속화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보편화되지 않을 때였다. 벨라스케스는 <달걀을 요리하는 노파>(1618)와 <물장수> 같은 주제에 진지함과 위엄을 불어넣었다. 그는 대상을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다루면서 냉정한 사실적 태도로 재현했으며 나중에는 인물 묘사에까지 확장하면서 전체 구성을 일관성과 기념비성으로 했다. 이런 점을 마네가 파악하고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

비애, 유머와 인간적 이해를 담은 벨라스케스의 걸인 그림은 후세 화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고, 같은 나라 사람 고야가 삼십대 초에 그의 작품을 많이 모사하면서 대가의 기법을 익혔다.(미술사 메트로 237, 237-1) 고야가 1778년에 그린 <눈먼 기타 연주자>(고야 31, 32)는 <메니프>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고야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걸인에게 느낀 매력을 처음 표현한 작품으로 머리를 뒤로 젖힌 눈먼 걸인의 모습은 뒤틀린 이목구비의 융합체를 이룬다. 이 작품은 태피스트리 공장을 위해 밑그림으로 그린 것인데, 공장 측은 화면에 인물이 너무 많고 색조가 다양하다는 이유로 이 밑그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야는 작품을 수정해서 공장으로 돌려보냈지만, 기타 연주자의 얼굴은 고치지 않았다. 그는 수정을 요구받은 것이 비위에 거슬렸는지 원래 그림의 일부를 나중에 제작한 동판화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괴상하게 생긴 눈먼 기타 연주자는 풍자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태피스트리를 위한 고야의 밑그림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에스파냐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이루고 있는 날마다 되풀이되는 고되고 단조로운 노동이었다. 고야는 거기에서 고대 아르카디아(목동과 처녀들이 순결하고 근심걱정 없는 삶을 꾸려 나가는 이상향)의 목가적 전원시 같은 풍경을 끌어냈지만, 그후 거기에서 점점 멀어졌다. 사전 계획에 따라 제작된 이런 궁전 장식용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소박함을 좋아하는 당시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고야가 에스파냐 시골생활의 즐거움과 행복한 아이들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어린 자식들이 연달아 죽은 것은 얄궂은 운명이었다. 고야의 자식 가운데 일곱 명이 요절했다. 인생의 즐거움을 그리라는 주문과 함께 자식들의 잇따른 죽음을 견뎌야 했던 정신적 부담이 젊은 그에게 무엇인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실제로 1770년대 말과 1780년대에 그린 작품에는 대부분 비타협적인 양식이 나타나 있다. <눈먼 기타 연주자>는 그의 밑그림 중 가장 크고 야심적이며 독창적인 작품이다. 관행에서 벗어난 이 작품은 고야의 예술이 동시대인의 예술과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 순간을 나타낸다.

가수, 악사, 유랑 연예인, 그리고 시골 농부와 신사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광경을 묘사한 회화와 판화 및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17~18세기 유럽의 대중미술에서 가장 폭넓게 사랑받는 주제를 이루었다. 벨라스케스의 영향 외에도 고야는 티에폴로가 젊은 시절에 베네치아에서 그린 거리의 악사들에게 감동을 받았으며, 그 자신도 마드리드 거리에서 구걸하는 눈먼 악사들을 보았을 것이고, 별난 기인과 사회에서 소외당한 부랑자와 불구자에 대한 그의 직관적 통찰력은 풍자적 표현에 대한 취향으로 발전했다. 이리하여 그의 밑그림은 에스파냐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 되었고 왕실도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늙은 음악가>(마네 28)는 이질적인 인물들을 배열하여 구성한 작품이다. 늙은 음악가는 마네의 화실 부근에 살던 바이올린 연주자 집시 장 라렌느인데 늘 술에 취해 있었던 그는 경찰들로부터 몹시 천대받았다. 마네는 라렌느를 화면 중앙에 고대 철학자의 모습처럼 앉히고 아이들의 호기심과 사랑을 받는 순진한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크리스포스를 묘사한 헬레니즘 조각을 변형한 것이다. 마네는 루브르에 있는 이 조각을 모사한 적이 있다. 모자를 쓴 흰색 옷을 입은 아이는 바토의 <피에로>(마네 29, 28)를 상기시킨다. 바토의 피에로는 이탈리아 코미디언 배우로서 바토가 파리에 있는 카페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18세기의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의 코미디는 잘 알려져 있었다. 피에로처럼 생긴 아이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고 놀라운 시선으로 늙은 음악가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늙은 걸인을 바라보는데 라렌느는 마치 기념촬영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관람자를 바라본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그 옆에 걸터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다. 마네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 이 인물을 그대로 <늙은 음악가>에 삽입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와 두 소년도 따로 그려서 하나의 그림으로 합성시켰는데 이는 당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메니프>와 <애솝>(미술사 메트로 211)에서 영감을 받아 나중에 <철학자 (망토를 걸친 걸인)>(미술사 메트로 238), <넝마주이>(미술사 메트로 241), <철학자 (굴과 걸인)>(미술사 메트로 239, 240)등을 그렸다.

이런 작품들은 마네의 참신하고 획기적인 표현 기법을 돋보이게 한 결과가 되었다. 이때부터 마네는 젊은 아방가르드 화가들 사이에서 스승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뒤에 출현할 인상주의로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 세잔 등을 포함한 인상주의 그룹 화가들은 마네를 존경했으며 이들은 게르부아 카페 등지에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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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인데 얼마나 놀라운 눈인가!"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마네와 모네의 이름은 비슷해서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된다.
어떤 작품은 마네의 것인지 모네의 것인지 혼돈스러울 때도 있다.
마네는 인물을 주로 그린 화가지만 그가 그린 풍경화를 보면 모네의 것과 유사한 데가 있고,
모네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지만 모네가 그린 인물화를 보면 마네의 것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우정을 나눴으므로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832년에 태어난 마네는 1840년에 태어난 모네보다 여덟 살이 많지만 동시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마네는 한 스승 아래서 6년 동안 수학하면서 모델에 대한 드로잉을 충분히 익혔고 루브르 뮤지엄을 포함해서 여러 곳의 뮤지엄에서 대가들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대가들의 화풍을 익혔다.
작품을 팔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유산이 많아 당대의 많은 화가들에 비하면 좋은 조건 아래서 작업할 수 있었다.

마네가 많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연구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할스, 틴토레토, 필립피노 립피, 브루위, 안드레아 델 사르토, 기를란다이오, 파르미지아니노, 고야 등의 화풍들이 베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신지식인에 해당되는데 자신이 익힌 많은 대가들의 주제와 화풍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또 다른 류의 화풍을 창조해냈다.
마네는 의도적 구성이나 생략으로 화가 자신만의 느낌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으며, 따라서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고, 모델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 예로 아내 수잔을 그린 11점의 인물화는 모두 걸작이 못 되었지만 빅토린 뫼랑을 모델로 한 10점은 대부분 걸작이 되었다.
인물화와 달리 그의 풍경화는 당대 풍경화 화가들의 것들에 비하면 특기할 만하지 못하다.
그의 풍경화 일부는 모네를 의식하고 그의 화풍을 흉내냈지만 졸작으로 나타났다.
다만 그가 타계하기 얼마 전에 그린 풍경화는 시적이며 그만의 미적 관점으로 나타났다.

마네와 달리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모네는 아버지의 경제적 도움이 전혀 없는 가운데 화가의 길을 걸었다.
따라서 그는 고향에서 부댕에게서 잠시 수학한 것을 제외하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다.
파리에서 무료로 모델을 그릴 수 있는 화실에서 잠시 모델을 그린 것 외에는 인물화와 드로잉에 대한 수학은 하지 못했다.

부댕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모네에게 화실은 건물 안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었다.
그는 산으로 들로 나가서 자신이 직접 바라본 장면들을 그렸다.
그는 대가들의 화풍을 연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눈과 느낌만을 신뢰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는 다만 모네가 있을 뿐이다.
작품을 팔아야만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동료 화가 바지유가 보불전쟁 때 전선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그를 경제적으로 도왔으며 그후에는 마네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도와주었다.

마네와 모네와 어울린 폴 세잔은 모네를 가리켜서 "그는 눈인데 얼마나 놀라운 눈인가!"라고 했듯이 모네가 자연을 바라보는 눈은 보통 화가들의 것들과는 달랐다.
모네는 아주 독특한 눈을 갖고 빛이 일기의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사방으로 분산되는 것을 마음 속으로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마네를 일컬어 '인상주의 화가들의 왕'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지만 정작 그 영예를 받아야 할 사람은 모네이다.
여덟 차례에 걸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룹전에 마네는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이 선호하는 모델이자 동생 외젠느와 결혼한 하가 베르테 모리소에게 그들의 그룹전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했다.
모리소는 마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룹전에 참여했다.

마네는 일찍이 파리 화단에서 유명해져 인상주의 운동의 선구자라는 영예를 얻었지만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마네는 국전을 통해 그리고 낙선전을 통해 파리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훌륭한 화실을 갖고 있었으며, 또 나이도 많아 카페에 가면 모두들 그의 주위로 몰렸다.
그는 주로 카페 게르부아에 자주 갔는데 그곳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단골 카페로 바지유, 팡탱-라투르,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등이 자주 갔으며, 드가는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어쩌다 갔지만 그들 모두 마네를 그룹의 리더로 생각했다.
이들 그룹은 마네의 화실이 있는 바티뇰 가의 이름을 따서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알려졌다.
바티뇰 그룹의 화가들이 인상주의 운동을 전개했고 마네가 그룹의 리더였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자연스럽게 마네를 인상주의의 왕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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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제임스 티소>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티소Tissot(1836~1902)의 본명은 자크 조제프Jacque Joseph입니다.
그는 벨기에의 화가 알프레드 스티븐스Alfred Stevens(1818~75)의 기법으로 화려한 사교계, 특히 부인들을 그린 화가로 파리에서 순조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 뒤 티소는 파리 코뮌에 가담했다가 1871~72년 런던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영어 이ㅡㅁ 제임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화류계의 그림을 그려 다시 높은 인기를 얻었고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을 그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주로 영국에 영주한 화가, 판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1834~1903)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탬스 강변의 풍경을 담은 그림도 많이 그렸습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뒤 그의 삶의 후반은 매우 종교적이 되었고 성서의 삽화를 그리는 데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티소는 영국에서 초상화로 많은 돈을 벌러 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마네의 베니스 풍경 한 점을 2천 5백 프랑을 주고 구입했는데,
마네의 모델이자 마네의 남동생 외젠과 결혼한 여자 화가 베르테의 말로는 그 가격은 티소에게 코끼리 비스켓 정도라면서 티소는 단번에 30만 프랑어치의 그림도 판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1천 5백 프랑이 오늘날 약 960달러에 해당하므로 그림값을 대충 어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테가 런던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티소가 왕자처럼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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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지닌 미지의 힘에 끌려서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12월 4일 모스크바 중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에 러시아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성기를 맞고 있었다.
차르 알렉산더 2세는 개혁정치를 폈고 시베리아로 추방된 사람들에게 귀환을 허락했다.
칸딘스키 가족도 이때 귀환했는데 동시베리아의 몽고 국경 근처 차 재배지역인 키아크타에서 수십 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칸딘스키의 아버지 바실리 실베스트로비치 칸딘스키는 몽골계 시베리아 출신으로 차를 파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어머니 리디아 이바노브나 티치에바Lydia Ticheeva는 발트 지방의 모스크바 사람으로 미모와 지성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한 자식인 칸딘스키는 세 살 때인 1869년에 부모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가족은 1871년 흑해 연안의 오데사 시로 이주했는데, 아버지가 그곳 차 공장의 책임자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오데사로 이주하고 얼마 안 되어 부모는 이혼했다.
칸딘스키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색은 “싱싱하고 밝은 초록색, 흰색, 양홍빛 빨강색, 검정색, 황토색”이라고 했는데, 색을 기억하는 주관적 직관적 능력도 놀랍지만 최초로 받은 인상 깊은 이런 색들은 평생 창조적 영감을 주는 근원이 되었다.

칸딘스키는 어머니의 언니가 되는 이모 엘리자베타 티치에바의 보호 하에 성장했다.
이모는 칸딘스키와 종종 독일어로 대화했으며 독일 동화를 들려주었다.
칸딘스키는 8살 때부터 피아노와 첼로를 배웠고 소묘도 익혔다.
10살 때 오데사 중학교에 입학하고 1885년까지 오데사에 살면서 아버지와 함께 모스크바에 1년 동안 머물면서 볼라야 강과 카마 강을 배를 타고 여행했다.
어릴 때부터 회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1879년에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민속학, 인류학에도 관심이 많아 대학 부속 연구소의 자연과학 협회와 민속학 인류학 협회의 연구 과제를 위해 러시아 북부 볼로그다 지방을 여행했다.
시리아계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그곳에서 농가의 건축, 공예, 장식 모형 등 다채로운 색상과 장식적 민예품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농민법과 이교도 신앙 유물에 관한 논문을 썼다.
논문이 훌륭했으므로 협회는 그를 멤버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그는 법학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처음 보았으며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명암에 의한 ‘강력한 화음 mighty chord’을 발견했다.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면서 예술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고 <로엔그린 Lohengrin>을 듣고 ‘매혹적인 모스크바’의 밤 풍경이 발하는 색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경험을 했다.
그때 음악이 지닌 그런 힘이 나타나는 회화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훗날 말했다.
이런 경험은 하나의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에 작용하는 공감각synesthesia으로 그는 색을 대상의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음악과 연관시키기 시작했으며 음악은 이후 그의 창작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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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공부한 르누아르·바지유·시슬레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모네의 고모는 1861년 살롱전 수상자 오귀스트 툴무슈에게 모네를 돌봐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모네는 툴무슈의 추천을 받아 1862년 가을 유능한 교사이며 화가 가브리엘 샤를 글레이르의 화실에 입학했습니다.
스위스 태생의 글레이르는 1843년 살롱전에서 <저녁>을 선보인 후 상당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제자들 중에는 풍경화로 로마대상을 수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로마대상은 에콜 데 보자르 재학생들에게 최고의 상입니다.
에콜 데 보자르는 1648년에 설립된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후신으로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학생들 모두 가장 영예로운 로마대상을 받는 것을 목표로 공부에 열심했습니다.
1749년 코이펠이 제정한 이 상은 매년 수상자를 선발하는 컨테스트에서 합격한 학생에게 주어지는데,
우선 작은 화실을 제공받아 그곳에서 10주 동안 작업하다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3~5년 동안 유학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집니다.
여기에 드는 모든 비용을 정부가 부담한답니다.
정부가 비용을 대고 유능한 화가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입니다.
유학을 마치고 그림을 제출하여 재능이 인정되면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작품을 비싼 값에 팔수 있으며 정부가 발주하는 작업을 딸 수 있어 경제적으로 쉽게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부댕과 마찬가지로 글레이르가 풍경화를 강조했기 때문에 모네는 그곳에서 수학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게다가 글레이르가 수강료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글레이르는 권위를 찾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모네는 스승의 지도에 순순히 따르는 타입이었습니다.
글레이르는 제자들의 장점을 파악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가르쳤는데 휘슬러,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가 그로부터 수학하고 있었습니다.

글레이르는 교과서적인 틀에 박힌 교육에 반대했으며 에콜 데 보자르의 교사들과는 달리 자신의 독특한 방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남자 누드 모델을 그리게 한 후 제자의 등 뒤에 서서 말했습니다.

“아주 나쁘지는 않군! 하지만 너무 모델처럼 그렸어.
네가 보고 있는 저 사람은 작고 뚱뚱하지 않아?
그러니까 작고 뚱뚱하게 그려야지.
저 사람 발이 크군.
그러니까 그렇게 그려야지.
저 발은 참으로 못생겼군!“

함께 수학한 알프레드 시슬레는 파리에서 영국인 부자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영국으로 보내져 언어와 상업을 공부했는데 아버지가 사업가로 만들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업보다는 회화에 더 관심이 많은 시슬레는 곧 파리로 돌아왔고, 글레이르의 화실에서 아마추어 화가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르누아르의 말로 그는 ‘유쾌한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르누아르가 <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아내>를 그릴 때 아내가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르누아르는 모네보다 1살 아래로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짝 마르고 늘 병색이 있는 그는 카페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때 모네와 마찬가지로 별말없이 친구들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파리 시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모델로 그렸습니다.
몽마르트르에는 상점 종업원, 식당 종업원, 잡부, 모델, 연예인들이 대거 거주했고 카페가 많았으며 밤이면 활기를 띠었습니다.
모네와 이들은 글레이르가 1863년 화실을 그만둘 때까지 함께 수학했습니다.

모네는 프레데릭 바지유와도 우정이 두터웠는데 키가 유난히 크고 잘생긴 바지유는 남쪽 몽펠리에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습니다.
르누아르와 동갑내기인 바지유는 1862년 파리로 와서 회화를 배우면서 의학도 공부했는데 부모가 의사가 되라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파리의 상류층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모네는 바지유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여러 차례나 받았습니다.
바지유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모네를 가리켜 “가장 절친한 환쟁이 친구”라고 적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퐁텐블로 숲 근처 샤이의 작은 집에서 르 아브르 출신의 모네와 여드레를 함께 지냈습니다. 풍경화에 뛰어난 그 친구가 제게 몇 가지 귀뜸해준 덕택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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