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와 윤봉길

 

 

1931년 상해 한인들의 경제적 상황이 매우 불안했습니다. 경제 부분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안창호는 상해 한인들을 위한 소비조합을 만들고 장차 생산합작의 단계로까지 발전을 염두에 두고 독립 운동을 지도하고 독려하는 경제적 혁명단체로서 공평사公平社를 창립해 경제적 위기를 타파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 대한적십자사 상의원常議員 등을 거친 조상섭, 선우혁, 차이석, 엄항섭, 장덕로를 포함하여 2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공평사를 조직했습니다. 이사장대리를 조상섭이, 경리를 장덕로가 맡았습니다. 1931년부터 자금을 모아 1932년 10월 영업을 개시했으나, 활동이 침체하여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안창호가 1932년 1월 16일자로 아내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최후순간까지 독립항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비장한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 혁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작정하고 오랫동안 희생을 달게 여기여 온 바에 이제 어떤 고통을 받든지 어찌 원망할 것이 있으리오. 나는 더욱이 여러 동지와 동포에게 빚을 진 것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다시는 집이나 무엇이나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뿐입니다.

 

편지를 보내고 얼마 후 개최된 흥사단 제18회 원동대회에서 안창호는 단원들에게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적대시하지 말 것과 전적으로 탈이념주의, 민족해방운동 지상주의에 입각해 민족통합을 이뤄야함을 역설했습니다. 독립 운동계의 각 계파가 역량을 축척하고 발전해나가지 못하고 힘겨루기만으로 역량을 소모하는 현실에서 안창호는 국제주의자와 계급혁명론자들에게 민족의 가치를 호소하는 한편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약화된 투쟁성을 퇴행적이라고 비판하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을 유화시키고 상대의 사상과 노선을 상호 포용하는 제3의 노선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1908~32)이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군 최고 지휘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을 폭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세에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인 윤봉길은 농민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세 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습니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그의 농촌계몽 운동이 단순히 계몽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설립하여 농촌개혁을 구체적인 실시했는데, 주된 사업은 농가부업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개선 등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 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규합했으며, 위친계爲親稧, 수암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습니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즉,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글을 가족에게 남긴 채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뇌와 결단은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윤봉길에게 강하고 굳센强毅 사랑은 곧 민족애였습니다. 그는 1931년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하던 중 김구를 만나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김구와 윤봉길은 의열투쟁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습니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윤봉길은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김구가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했습니다. 상해 병공창兵工廠의 주임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습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김구와 마지막 조반을 들고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했습니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많은 인파가 운집했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습니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이 도열해 있었습니다. 오전 11시 40분 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윤봉길은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수통형 폭탄을 단상위로 투척했습니다. 폭탄은 노무라와 시게미츠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날의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하면서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장개석은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 운동의 구심체로 역할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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