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앤디 워홀의 폭로》

 

1978년 12월과 이듬해 1월 워홀은 아주 수수께끼 같은 추상화를 제작했는데 제목이 〈그림자〉(그림 171)였다.
추상화는 처음 제작한 것으로 그에게도 추상의 개념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환영처럼 보이며 조작한 환상주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그림들은 소호에 있는 하이너 프리드리히(Heiner Friedrich) 화랑에서 소개되었다(1979. 1. 27~3. 10).
커다란 전시장에 67점을 걸었고 뒤쪽 작은 전시장에는 16점을 전시했는데 방 전체가 신비로운 분위기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워홀은 더 이상 이러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며 실크스크린으로 초상화를 제작하는 데 다시 전념했다.

1979년 워홀은 《앤디 워홀의 폭로 Andy Warhol's Exposures》라는 제목으로 375점의 사진들을 엮은 책을 출판했다.
영화배우, 패션계 사람들, 록 가수들, 운동선수들, 정치인들의 사진이었다.
워홀은 늘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찍었는데 그 가운데는 트루만 카포테가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진료실에 있는 장면도 있고, 라이자 미넬리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장면도 있으며, 비앙카 재거가 팔을 들고 겨드랑이의 털을 깎는 장면도 있다.
워홀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누구나 개인적인 모습이 노출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협조했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에서 망명한 유명한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를 찍을 때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누레예프는 화를 내면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빼앗아 망가뜨린 후 워홀의 얼굴에 집어던지고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카메라를 주우려는 워홀의 손을 짓밟아버렸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워홀은 그 책을 출판한 것이다.
19달러 95센트의 가격이 매겨진 《앤디 워홀의 폭로》는 제법 팔렸다.
워홀의 자필서명이 들어간 은으로 도금한 책에는 100달러를, 따로 1,000부를 찍어 자필서명을 삽입하고 22캐럿 금으로 도금한 책에는 500달러의 가격을 매겼다.

그해 11월 휘트니 뮤지엄에서 ‘앤디 워홀 : 70년대 초상화들 Andy Warhol: Portrait of the 70s’전이 열렸다.
이 전시에서는 예술, 사업, 정치, 연예, 패션계에 종사하는 유명인사 56인의 초상화 두 점씩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여 소개했다.
홀스톤, 로이 리히텐슈타인, 라이자 미넬리, 이브 생 로랑, 레오 카스텔리, 믹 재거, 데이비드 호크니, 모택동의 초상화도 포함되었으며 워홀 어머니의 초상화도 여덟 점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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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이 망치와 낫을 그린 것은

 

1971년 들어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갑자기 밀월관계처럼 진전되고 있었다.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으로 원정 게임을 하러 가고 이듬해에는 외교수완이 아주 탁월한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과 중국의 정상회담 이후 철의 장막이 걷히고 자본주의의 상징 코카콜라가 중국에 상륙해 중국 사람들도 이제 코카콜라를 마시기 시작했다.
워홀은 1972년 닉슨의 초상화(그림 164)를 제작했다.
대통령선거 시기에 닉슨의 얼굴 밑에 다른 대통령후보 ‘맥가번을 찍으시오’라는 문구를 적은 초상화를 만들어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이 시기에 워홀도 중국에 관심을 가졌다. 워홀은 “중국에 관한 글을 아주 많이 읽었다”고 하면서 모택동의 초상화(그림 166)를 실크스크린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가 선전용으로 사용하는 모택동의 사진을 드로잉하여 과거에 제작한 초상화들과 달리 좀 더 회화적으로 제작했다.
워홀은 모택동의 초상화로 벽지도 만들어 실크스크린과 함께 파리 갈리에라 미술관(Mus럆 Galliera)에서 소개했다(1974. 2. 23~3. 18).

모택동의 초상화를 제작한 후 워홀은 정치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 1976년에는 〈정물〉(그림 168)이라는 제목으로 망치와 낫을 제작했다.
그해는 미국 독립 2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공산주의는 미국이 적대하는 이념이었다.
워홀이 망치와 낫을 그린 것은 소련의 상징 망치와 낫이 벽의 낙서처럼 보였으며, 그것들 역시 팝 이미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산업노동자와 농민들의 단합을 꾀하기 위해서 그러한 상징을 국기에 사용했지만 워홀에게는 그들의 국기가 팝의 성상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는 국기의 2차원적 망치와 낫을 입체감이 나도록 묘사하여 3차원이 되게 했다.
모택동의 초상화와 ‘망치와 낫’은 1977년 1월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소개되었다.

그 무렵 〈해골〉(그림 169)을 제작하기도 했다.
공장에 자주 왔으며 워홀과 함께 파리에도 갔던 커트론에 의하면 워홀이 파리의 고물상에서 해골을 구입했다고 한다.
해골을 뉴욕으로 가지고 온 워홀은 커트론에게 해골을 카메라로 찍으라고 해 커트론은 흑백사진으로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워홀이 왜 해골에 색을 칠했는지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인터뷰에서 해골을 파시즘의 상징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재스퍼 존스의 그림에도 해골이 등장했는데 존스가 워홀의 그림에서 이미지를 구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워홀은 저격당했을 때 차라리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해골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워홀은 레스토랑에서 친구 트루만 카포테와 함께 식사하면서 죽음에 관해 대화했다.
카포테가 죽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하자 워홀은 “아냐,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도 없지”라고 말했다.

워홀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상화도 세 점 제작했다.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에 초대받았을 때 그는 카터의 초상화를 선물했다(그림 167).
그의 실크스크린 초상화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므로 초상화 의뢰를 받는 일이 잦았으며, 1만 달러를 받고 정당의 전당대회를 위한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77년부터 직업 운동선수들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 워홀은 먼저 열 명을 선정했는데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그림 172), 농구선수 카림 아보덜, 축구선수 펠레, 승마선수 윌리 슈메이커, 테니스 선수 크리스 에버트, 피겨스케이트 선수 도로시 해밀, 야구투수 탐 시버, 하키 선수 로드 길버트, 미식축구선수 심슨, 골프 선수 잭 니클라우스였다.
워홀은 글러브나 공 등 운동기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이들의 사진을 찍었다.
운동선수들 중 절반은 오른쪽 얼굴 모습을 찍었고, 힘 있는 표현주의 방법으로 색칠한 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나중에 워홀은 풍경화를 그리듯이 사람의 몸통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듬해에는 각 선수들을 여섯 가지 다른 모습으로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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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인기인을 찾아서


1972년 워홀은 집세가 오르자 작업실 ‘공장’을 떠나기로 하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860 브로드웨이 3층을 세 얻었다.
그가 세든 3층은 1,000평방미터로 아주 넓었으며 방문객들은 비디오 카메라로 감시를 받는 등 보안이 철저해 마음에 들었다.
《인터뷰》 잡지일도 넓은 곳에서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인터뷰》가 아직은 이익을 주지 않았지만 3년 전 창간했을 때에 비하면 구독자 수가 배로 증가했다.
직원도 세 명에서 이제 열다섯 명으로 늘어났으며, 잡지의 후원자 가운데는 10달러를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더러 100달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인터뷰》의 편집인 밥 콜라첼로는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1973년 3월호는 48페이지에 달했고 광고가 11페이지였으며 발행부수는 5만 5,000부에 이르렀다.
워홀은 잡지의 취지를 “새 얼굴과 새 인재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워홀은 새로운 작업실로 온 후 실크스크린 사업에 전념했는데 그야말로 유명인들의 초상화들을 찍어내는 일이었다.
연예인으로는 라이자 미넬리, 폴 앵카, 믹 재거, 패션계 인물로는 이브 생 로랑, 디아네 폰 푸르스텐버그(그림 163), 폴스톤, 엘렌느 로샤, 캐롤라이나 헤레라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정당으로부터 의뢰받은 정치가들의 초상화도 많았으며, 대통령 제네랄드 포드와 지미 카터,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 등의 초상화와 외국 정치가들의 초상화도 제작했다.

워홀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이용하여 초상화를 실크스크린하기 좋아했지만 사진이 없을 때는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된 사진을 이용했다.
색을 사용하면서 미니멀리즘 예술가 엘스워스 켈리와 프랭크 스텔라의 회화방법을 응용하기도 했다.
거친 붓질로 표현주의적 요소가 힘있게 나타나도록 했으며,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빠른 붓놀림을 응용했는데 드 쿠닝의 방법이 엿보이기도 했다.
비록 실크스크린이지만 워홀은 아크릴이 젖었을 때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 터치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직접 손으로 그린 듯한 느낌을 주어 자신이 진지한 태도로 제작했다는 것을 구매자들이 알아주기 바랐다.
그의 초상화에는 모델의 정신상태가 얼어붙은 것처럼 나타났는데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워홀의 그러한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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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사업을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1970년에는 판화가 붐이었는데 값이 비싸지 않아 사람들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워홀은 다시 꽃을 주제로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에 제작한 10점을 변형시켰는데 그래서 요즈음 미술시장에는 그의 꽃그림이 흔한 것이다.
250점을 한정 제작하여 한 점에 3,000달러에 팔았는데 당시 마를린의 초상화보다 여섯 배나 비싼 가격이다. 그는 진한 빨강, 오렌지, 노랑색을 주로 사용하여 꽃을 화려하게 했다(그림 160).

워홀의 미술관 순회전이 엮어졌다.
큐레이터 존 코플런스가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 뮤지엄(Pasadena Art Museum, 1970. 5. 12~6. 21)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을 도는 순회전을 기획한 것이다.
전람회는 시카고 현대미술관, 네덜란드의 스테데릭 뮤지엄(The Stedelijk van Abbemuseum), 파리의 파리 박물관(Le Mus럆 de la Ville de Paris),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 뉴욕의 휘트니 뮤지엄 순으로 순회할 예정이었다.
큐레이터는 워홀이 1962년 이전에 제작한 작품들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예술가가 뮤지엄에서 대규모 전람회를 갖는 순간부터 작품 값은 치솟기 시작한다.
파사데나 뮤지엄에서 회고전이 열린 이틀 후 뉴욕의 경매장에서는 워홀이 1962년에 제작한 〈찢어진 큰 캠벨 수프 통조림〉(그림 75)이 6만 달러에 팔렸다.
8년 전에 제작되었고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여러 점 중 하나에 불과한 수프 통조림 그림이 그 정도 값에 팔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생존해 있는 예술가의 판화 값으로는 고액이었다.
취리히의 예술품 중개상 브루노 비쇼프버거가 사들인 이 작품은 지금 취리히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워홀의 명예로운 고액기록은 다른 예술가에 의해 곧 깨졌는데 리히텐슈타인의 〈Big Painting No.6〉(1965)가 그해 11월 7만 5,000달러에 거래된 것이다.

워홀이 1974년에 열 개의 이미지들을 병렬해 250장 한정판으로 제작한 〈손으로 색칠한 꽃〉은 경매에서 한 점에 13만 5,000달러에 팔렸다.
영화에서는 돈을 많이 못 벌었지만 그림에서의 수입은 넉넉했다.
1975년 가을에는 워홀이 자신의 예술과 돈과 명예에 대한 견해를 적은 《앤디 워홀의 철학 : A부터 B까지 그리고 다시 A로 The Philosophy of Andy Warhol: From A to B and Back Again》가 출판되었다.
부와 성공에 대한 집념을 솔직하게 고백한 그의 저서 역시 많이 팔려나갔다.

예술의 다음 단계는 사업예술(Business Art)이다.
난 상업미술가로 출발했으며 사업예술가로 마치기를 바란다.
… 사업을 잘 한다는 것은 매혹적인 예술이다.
…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 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1971년 봄 워홀은 즐거워했는데 파사데나 뮤지엄에서 열었던 회고전이 휘트니 뮤지엄에서 다시 열리고 있었고 몇 주 후에는 웨스트 47번가 고덤 북 마트(Gotham Book Mart)에서 팝아트 이전의 작품 약 300점을 ‘앤디 워홀 그의 초기 작품들 : 1947-1959’(1971. 5. 26~6. 26)이란 주제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명한 그룹 롤링 스톤즈의 앨범 재킷을 디자인하게 되어 더욱 신이 났다.
실제 지퍼를 사용하여 제작한 롤링 스톤즈의 앨범은 4월에 시판되어 2주 만에 50만 장이나 팔렸다(그림 153).
워홀은 “당신들은 믿기지 않을 거에요. 그렇게 앨범이 많이 팔렸는데도 난 돈을 조금밖에 받지 못했어요. 다음에는 한 장에 50센트를 달라고 할 참이에요”라고 불평했다.
한 장에 50센트면 25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다.
1971년 6월에는 비틀즈 그룹의 존 레논과 아내 오노 요코가 뉴욕에 잠시 들러 워홀과 함께 며칠을 지냈다.

이 무렵 한때 워홀의 화려한 커플이었던 에디 시즈윅은 마약복용 치료를 위해 캘리포니아 주 산타바바라의 요양소에 있었다.
1971년 1월부터 6월까지 20회 이상의 전기치료를 받은 에디는 마약을 구하기 위해 매매자와 성관계를 갖는 등 육체와 정신이 병들대로 들어 있었다.
남자들은 실리콘으로 부풀린 그녀의 젖가슴을 보고 싶어 했고 에디는 자신의 젖가슴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에디는 병원에서 역시 마약복용 치료를 받고 있는 스무 살의 마이클 브렛포스트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7월 두 사람은 결혼하여 산타바바라에 아파트를 얻어 보금자리를 차렸다.
에디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더니 11월 어느 날 아침 괘종시계 소리에 잠을 깬 마이클이 에디를 안으려고 만지니 그녀의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겨우 28세의 나이로 에디는 세상을 떠났다.
5년 동안 에디를 만나지 못했던 워홀은 그녀의 사망소식을 듣고 매우 우울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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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이 잡지사 사장이 되다

1969년 가을 워홀은 또 하나의 사업을 시작했다.
월간지 《인터뷰 Interview》(그림 158)를 발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충동질한 사람인 신문 《다른 장면들 Other Scenes》의 발행인 존 윌콕은 이렇게 회상한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워홀의 공장에 있다가 늘 그랬듯이 워홀이 영화로 100만 달러를 벌지 못하는 것을 투덜대자 “앤디, 넌 왜 신문을 만들지 않느냐?”고 물었고 결국 두 사람은 동업해 잡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워홀이 돈을 대고 윌콕은 편집 일을 하기로 하고 지분을 반반으로 정했다.
워홀은 처음에 잡지 제목을 inter/VIEW로 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Interview로 정했다.
윌콕이 잡지가 어떠한 이미지로 보이기를 바라느냐고 묻자 워홀은 “정말 혁명적이며, 롤링 스톤즈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69년 9월 월간 영화잡지 《인터뷰》 창간호가 출판되었다.
35센트 가격이 매겨진 이 잡지의 흑백 겉표지는 비바, 제임스 라도, 제롬 라그니가 프랑스 감독이 헐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 〈사자의 사랑〉에 등장하는 누드를 풍자하여 갖가지 포즈를 취한 장면이었다.
워홀은 말랑가를 편집인으로 임명했다. 말랑가에 의하면 워홀이 잡지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영화제에 자신의 영화를 출품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윌콕은 말이 50% 주인이었지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고 워홀과 말랑가가 편집을 주도했다.
일 년 후 윌콕은 영국으로 이주할 계획이어서 워홀더러 자신의 지분을 사라고 했다.
《인터뷰》는 여태까지 돈을 벌어준 적이 없었지만 윌콕은 6,000달러를 요구했다.
윌콕은 “앤디가 제게 5,000달러를 주었어요.
생각해 보니 1,000달러는 평생 받지 못할 것 같아 대신 앤디의 작품을 달라고 말했지요”라고 했다.
워홀은 윌콕에게 1970년에 제작한 꽃 실크스크린 두 점을 주었다.
당시 한 점에 500달러였던 이 작품들은 1997년 현재 약 3만 2,000달러에서 3만 5,000달러 정도 나간다.
워홀은 곧 잡지 겉표지에 자신만이 주인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잡지는 조금씩 좋아졌고 구독자 수가 늘어났다.

워홀은 이 무렵에는 외출할 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휴대하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수천 점의 사진을 찍곤 했다.
그는 누구든지 공장에 오면 “자네 자지와 불알을 찍어도 되겠나?”라고 물었다.
워홀은 “누구는 그러마 하고 바지를 내렸고 누구는 안 된다고 거절했는데 그들이 누군지 알면 당신들은 놀랄 거요”라고 말했다.

이 시기에 워홀과 가장 가까웠던 여인은 브리지드 폴크였다.
폴크는 워홀이 찍은 사내들의 자지 사진들을 좋아했으며 워홀은 폴크의 상반신 나체를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즐겨 찍었다.
살이 찐 폴크는 허리를 조금만 굽혀도 뱃가죽에 주름이 생겼고 상반신은 녹아흐르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았다.
1969년 가을 폴크가 워홀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이 떠돌자 로스앤젤레스의 잡지 《Coast FM & Fine Arts》는 폴크의 말을 인용하며 진상을 보도했다.

제가 앤디를 위해 2년 동안 작업했어요.
그는 더 이상 작업하지 않아요.
작업하는 것이 지루해서죠.
수프 통조림 그림들은 제가 그렸어요.

《타임》 기자가 워홀에게 소문의 진위를 묻자 워홀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폴크가 모든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독일 언론이 발끈해 그럼 그들이 여태까지 수집한 작품들은 워홀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폴크의 작품이란 말이냐고 항의했다.
사람들은 수십만 달러를 지불하고 실크스크린을 구입했는데 그것들이 폴크의 작품이라고 알려지자 항의전화가 빗발쳤지만 워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도 비지니스라 생각했고 ‘공장’이라고 부른 작업실에서 생산되는 대량의 제(작)품을 누가 만들었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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