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타르, 숭고한 감정은 발생, 사건, 동요이다
리오타르가 숭고한 감정을 ‘발생 occurence’으로 본 이유는 그것이 의식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며, 또한 의식에 의해 구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이 정립할 수 없는 것이고 의식이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 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 quid’이냐고 묻기 전에 ‘우선’ 일어나는 ‘사태 quod’로 보았다.
1950~51년에 이미 자신의 그림에 <숭고한 영웅 Vir heroicus sublimis>이란 제목을 붙인 바네트 뉴만Barnett Baruch Newman(1905-70)은 60년대 초 최초의 조각품 세 점에 <여기 I>, <여기 II>, <여기 III>란 제목을 붙였으며, 그림들에는 <저기가 아니라 여기 Not over there, here>, <지금 Now>, <존재 Be>라고 붙였다.
그는 1948년 12월에 에세이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 The Sublime is Now」를 발표하여 벌써부터 숭고한 감정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나타냈다.
뉴만의 작품들은 리오타르의 말로 하면 “숭고한 것은 다른 어떤 곳, 저기 혹은 거기, 이전 혹은 이후 혹은 다른 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지금 …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이 그림이다라는 것에 존재한다. 이 그림이 여기 지금 존재한다는 것,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 바로 이것이 숭고한 것”4)으로 발생, 사건, 동요를 뜻한다.5)
사건은 하이데거가 사용한 말인데 그에게 ‘사건 ein Ereignis’이란 무한히 단순한 것으로 박탈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6)
칸트는 이를 ‘동요 agitation’라 했는데 판단력을 실행하는 정신의 활동을 의미한다.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의 동요는 규정되어야 할 어떤 것이 규정되고 있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리오타르는 숭고한 감정을 어떤 것이 기대될 때마다 “이제는 무엇이?”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비참함에 비유했다.
화가가 조형적인 면 앞에서, 음악가가 음적인 면 앞에서, 철학자가 사고의 황량함 앞에서 갖게 되는 비참함에 비유했다.
그는 우리가 종종 불안감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연관시킴을 지적하면서 실제로 기다림이 문제시될 때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지만 이런 기다림, 즉 ‘긴장 suspense’은 미지의 것을 느끼는 것에서 오는 류의 쾌락이나, 혹은 스피노자Benedict (Baruch) Spinoza(1632-77)의 말을 빌려 사건이 수반하는 존재의 증가에서 오는 기쁨조차 야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놀라움과 경탄을 함축한 이런 감정은 쾌와 불쾌·즐거움과 두려움·감정의 강화와 저하가 결합된 모순적 감정으로 17세기와 18세기 유럽에서 ‘숭고’란 명칭으로 불리었고, 이 명칭 하에 “고전시학의 모험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미학이 예술에 대해 비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 것도 그리고 낭만주의, 즉 근대성이 승리를 거둔 것도 역시 이 명칭 하에서”7)였고, 모순적 감정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는 의문 자체로서 “‘일어나고 있다’가 억제되고 ‘일어나고 있는가?’가 언명되는 방식”8)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말까지 예술적 반성에서 주요 쟁점이 된 숭고한 감정이 모던을 특징지우는 예술적 감성의 양식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리오타르는 가장 오래된 숭고한 감정에 대한 고찰을 1세기 말엽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에서 찾았다.
숭고성을 연설 속에서 규정하려고 한 롱기누스는 이를 망각할 수 없는 것, 저항할 수 없는 것, 많은 것을 상기하게 하는 것, 즉 “그것에 의해 많은 성찰 hou polle anatheoresis”이 야기된다고 했다.
리오타르는 롱기누스가 “연설가의 에토스와 파토스 속에서 그리고 비유 단어 선별과 표현색인 단어의 결합과 같은 연설기법 속에서 숭고의 원천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논문들(수사학, 시학, 정치학)의 규범에 따라 - 이것의 기능은 행위자들에게 모델로 되는 것이다 - 숭고의 원천을 찾으려 한다”9)고 보았다.
그러나 숭고가 주제가 되었을 때는 수사적인 혹은 시학적인 체계적 서술은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면서 롱기누스가 연설에서 종종 극히 단순한 표현을 통해 알려지는, 즉 연설가의 어귀 강조나 단순한 침묵에 의해 더욱 큰 장엄성이 예상되는 사고의 숭고성이 존재한다고 본 것을 상기시켰다.
그는 롱기누스가 말한 침묵을 수사법의 한 형태로 보고 침묵이 모든 수사법들 가운데 가장 비규정적인 것임을 지적했다.
롱기누스는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문장론이 동요되는 것을 숭고 효과의 예로 제시했는데 그의 저서를 번역한 브왈로는 서문(1683년과 1701년에 첨가한 부록)에서 그리고 1713년 사후에 출간된 제10 성찰에서 고전주의적 기법제도에 대해 암시의 차원을 넘어 완전한 결별을 밝혔다.
그는 숭고란 가르쳐지지 않는 것이라서 모든 교수법이 이에 대해 무력하다고 했다.
그는 숭고가 시학에서 확립될 수 있는 규칙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파악능력, 취미 및 “모든 세계를 지각하기 위한 감각”만을 독자나 청자에게 요구할 뿐이라고 했는데 리오타르는 그의 견해가 페레 부르Pere Bouhours의 것10)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브왈로에 의하면 “숭고는 증명되거나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다가와서 흔들어놓고 느끼게 하는 어떤 경이로운 것이다.”
숭고가 규칙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 숭고에 의해 비규정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증언하는 것은 19세기와 20세기 미학의 과제가 되었다.
낭만주의 회화에서는 캔버스, 구도, 선, 색, 공간, 형상이 재현이란 것에서 제약을 받지만, 현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표현하는 것은 재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모더니즘 회화는 재현에 관한 일련의 규칙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다.
이는 회화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세잔의 그림을 예로 들면 선·공간·빛에 대한 고려가 없는데 그가 지각이 발생하는 순간에 지각을, 지각하기 이전에 지각을 포착하고 재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를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발생으로서 색채, ‘일어나고 있다(어떤 것 - 색채 - 이 일어나고 있다)’는 놀라움, 적어도 어떤 것이 눈에 비치고 있다는 놀라움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것”11)이라고 했는데 리오타르는 그의 판단이 경솔하다면서 세잔이 종종 미세한 감각들의 부적절성을 개탄했고, 이것들에 있어서는 추상들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캔버스를 모두 채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 말을 지적했다.
그는 회화에 틀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색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대상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최소한 전시 공간조차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세잔, 말레비치, 바디아트와 해프닝 예술가들, 뒤샹, 뷔랑Daniel Buren의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모더니즘이 지각할 수 있는 ‘지금’을 거대한 재현적 회화의 붕괴 속에, 표현될 수 없는 ‘지금’을 앞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으로 설정시켰으며, ‘주체’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가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가?” 결핍에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았다.
이러므로 모더니즘이 숭고의 미학에 속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