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서양화 2세대의 대표적인 화가, 비평가 오지호(1905~82) 는 1905년 12월 24일(음력)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여덟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사대부적인 교양에 밝은 가정환경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부친 오재영은 대한제국 말기에 보성군수를 지냈으며 오지호가 15살 때인 1919년에 고종황제의 인산因山과 3·1운동을 서울서 직접 목격하고 내려온 직후 민족의 현실에 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지호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전주고보를 거쳐 1921년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 학교 도화선생으로 재작한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었다.
오지호는 1923년 고려 미술원 연구소에 들어갔는데, 그 해에 발족한 고려 미술회는 강진구, 박영래, 나혜석, 백남순 등의 서양화가들로 구성되었고, 나중에 동양화가들이 참가함으로써 고려 미술원으로 개칭되었으며, 전문 화가들을 양성하기 위해 연구소를 두었다.
연구소 서양화 부문의 지도는 이종우, 강진구를 비롯하여 몇몇의 서양화가들이 담당했으며 이 연구소에서 이마동, 구본웅, 길진섭 등이 배출되었다.
오지호는 이종우로부터 소묘와 유화 기법을 배우는 한편, 장래에 절친한 관계를 갖게 되는 친구 김주경과 김용준을 만났다.
오지호는 1925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으로 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응시했다.
그러나 이 학교의 치열한 입시 경쟁으로 낙방하고 가와바타화 학교에 들어가 일 년 동안 노력한 끝에 이듬ㄶㅐ인 1926년에 대망의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 서양화과 교수로 후지시마 다케지, 오카다 사부로스케, 와타 에이사쿠 등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 서양화화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외광파外光派 계열의 관학파들이었다.
오지호가 입학할 당시 일본 화단에는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었지만 동경미술학교는 이런 사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지호는 가와바타화 학교 시절 직접 지도를 받았던 후지시마의 교실에 들어가 공부했는데, 후지시마는 외광파의 선구적 화가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낭만주의적인 문학성, 도는 장식성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수학한 후 뛰어난 직관과 데생력을 토대로 대상을 단순화시킴과 더불어 거친 붓질로 순도 높은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외광파 화풍에 싫증을 느낀 관람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해인 1926년에 그린 <잔설 殘雪>은 습작에 불과하지만 활달한 붓질과 대담한 묘사가 그의 조형감각을 보여준 뛰어난 작품이다.
그가 일기의 한 순간을 신속한 붓질로 포착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최초의 유화인 이 작품 오른쪽 아래 붉은 물감으로 ‘1926년 점수화占壽畵’라고 세로로 표기한 사인이 적혀 있다. 동경 근교 이케부쿠르의 동네 장면을 그린 것으로 잔설이 쌓인 골목길을 너무 넓게 설정하여 구도상 짜임새가 부족하지만 색을 개성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1968년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에 기고한 ‘자연과 예술’에서 일본의 자연 형상에 관해 적었다.
“태양 광선의 광채는 수증기에 흡수되어 자연의 색채의 미묘한 색조와 섬세한 광택은 거의 소실되고, 색과 색은 뽀얀 베일로 덮인 듯 확연한 구별이 없고, 윤곽은 애매하여져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오지호는 일본 자연 환경에서 영향받은 정조情調를 불식시키고 명징한 태양광선 아래 자연의 생명력이 한껏 발현되는 우리나라 환경에 적당한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광학적 효과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인상주의 회화에 경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5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931년 봄 졸업과 함께 귀국한 그는 서양화가들의 단체 녹향회를 통해 화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8년 12월에 발족한 이 단체에는 김주경, 박광진, 심영섭, 장석표 등 야심을 가진 화가들이 있었다.
녹향회는 순수한 서양화가들로 구성된 최초의 동인단체라는 의의와 함께 서양화 도입 이래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아 온 일본의 화풍을 지양하고 조선 민족 미술을 위한 새로운 화풍을 전개하려는 진취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31년 4월에 개최된 녹향회 공모전은 선전에 대항하려는 이들의 야심찬 계획의 일환으로 당시 언론의 호응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김주경이 1931년 4월 5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녹향회를 앞두고’에서 공모전의 성격이 드러난다.
“양화의 토대 건설과 미술의 민중화를 위한 계몽이 필요하다.
무능의 자아를 벗어나 유능, 희망, 활약의 자아를 발견하고 또 그렇게 진전하는 신기력의 소유자가 늘어가야 할 것이다.
… 전람회장에서 어떤 격렬한 색채나 또는 필치가 있는 작품을 대할 때에는 그것이 홍수나 폭풍우와 싸워나가는 민족으로서 의당히 가져야 할 예술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