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는 광주에 정착하여

오지호는 광주에 정착하여 그곳 풍경을 그리던 중 1960년 4·19학생의거가 자유당 독재정권을 붕괴시켰고, 민주당이 들어섰지만 이듬해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정치·사회 모든 분야에 구조적인 재편성이 뒤따랐다.
오지호는 4·19때 한 사건의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일 년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정신적·신체적 고통으로 쇠약해졌고 그의 화면은 전과는 달리 어둡고 칙칙한 색조가 나타났으며 조형적 긴장감도 완화되었다.
1964년에 그린 <열대어>는 유영하는 붉은색의 열대어 한 마리를 보고 그린 것이지만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완전 추상작품을 보는 듯하다.
열대어 주변에는 짙은 청색의 원이 둘러져 있고 배경이 거친 붓질에 의한 적갈색면으로 구성되었다.
세부적인 묘사를 생략하고 형태와 색질의 대비로 마티에르의 효과를 강조함으로써 추상의 의지를 현저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조형적·기법적 실험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특이하다.

그는 1968년에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를 출간했고,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혹은 초대작가로 참여하면서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82년 12월 25일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에 적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화가다.
그런데 이 땅에 생을 받았다는 이유로, 또 내가 내 자신이 믿는 바를 굽힐 줄 모르는 내 생래生來의 성격 때문에, 나는 내 예술과는 생판 동떨어진 다른 일들로 많은 인과 욕을 겪었다.
사변 전후의 일들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다.
예술과는 물론 세상의 모든 것들과 인연이 끊긴 몇 해 동안의 그 막된 생활의 뒤, 1953년 초 겨울에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초옥에 들게 되었다.
- 여식 하나를 데리고 이 집이 자리 잡고 있는 당시의 지산동 - 비어 잇는 논바닥, 파랗게 싹들이 돋은 보리밭, 복숭아나무 과수원들, 그 주위를 둘러 있는 산봉우리들!
그때, 봄볕처럼 따뜻한 이 산골짜기는 몸과 마음이 한 가지 상처투성이가 된 나를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이 안아 주었던 것이다.
진정!
오래간만에 얻은 마음의 평온이었고, 생의 희열이었다.
윗글은 그때, 내 자연에 대한 뼛속에서 스며 나오는 그 고마움의 조그만 표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일 년만 있다가 온다던 개성에 십 년을 살았고, 사변 후 오늘까지 이곳에 머무르고 있고, 또 내 태생의 땅인 동복에, 40년 전에 내가 지은 집을 지금도 그대로 두고 있는 이유의 태반은 내가 사는 그 집과 그 집 주위의 자연 - 그 산과 들과 내와 풀과 나무들에 든 그 정 때문이다.
196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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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는 녹향회가 단명한 데


녹향회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두 차례의 전람회를 연 후 해산되었다.
오지호는 녹향회가 단명한 데 대해 좌절감을 느끼고 1928년부터 매년 출품했던 선전에 1932년부터는 출품하지 않았다.
1935년 개성의 송도고보 교사로 취임한 그는 그곳 자연에 매료되어 의욕을 갖고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광선과 색채의 유기적인 관계를 그림으로써 김윤수의 말로 ‘한국 인상주의 운동의 정통’을 이루게 되었다.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은 이 시기 그의 작품 경향과 이론적 성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1938년 그가 김주경과 함께 경비를 부담하여 발간한 이 원색화집은 당시 일본 최고 수준의 석판인쇄술로 제작한 것으로 호화롭고 질적으로 뛰어난 책이다.
이 책에는 오지호, 김주경의 작품이 각각 10점씩 수록되었는데 대부분 1935~37년에 제작한 것들이다.
초기 작품 <시골 소녀>(금성 오지호 6)도 이 책에 수록되었다. 이 책 뒤에 그의 ‘순수회화론’이 게재되어 있는데 빛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회화는 빛의 예술이다.
태양에서 생겨난 예술이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요, 태양과 생명과의 융합이다.
그것은 빛을 통해서 본 생명이요, 빛에 의해서 약동하는 생명의 자태다.
… 회화는 유동하는 생명의 한 순간에 있어서의 전적全的 상태이다.
활동하는 생명 전부의 동시적 상태이다. 환언하면 순간에 있어서의 생명의 전 상태를 영원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회화는 탄생된 그 때의 상태대로 영원히 존재하고 탄생된 그 상태로 영원히 활동한다.”

정규는 1975년 『한국의 근대미술』에 기고한 ‘한국 양화의 선구자들’에서 오지호에 관해 적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어떠한 개념적인 설명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자연을 그려보려고 하였다.
… 그러나 오지호의 경우에 있어서는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을 조형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형의 방법을 인상주의적인 기법으로써 통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오지호 그림의 화려한 색채는 단순히 장련의 설명에 그치지 않고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평론으로 화단에 큰 반향을 자아내기도 했는데, 1939년 5월 『동아일보』를 통해 연재된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 중에서 ‘피카소와 현대 회화’는 입체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았다.
피카소의 반회화적 미술 형식은 추종자들에 의해서 순수추상, 즉 장식미술로 발전한 반면 회화예술에 끼친 해악은 실로 심각하고 참혹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해방 후 한때 김주경과 함께 조선미술가동맹에서 활동한 전력이 문제가 되어 투옥되었고, 6·25동란이 발발하자 그는 분단 모순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부딪쳤다.
6·25동란이 그에게 안겨 준 또 다른 시련은 전쟁 중 동복 집에 소장했던 초기부터의 모든 작품이 한 점도 남지 않고 소실된 것이다.
현존하는 것들은 친척친지들이 보관했던 소수의 작품이다.
휴전이 되자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출옥한 그는 1940년부터 시작한 조선대 미술과에 다시 출강했다.

1960년대의 그의 그림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는데 밝고 정돈된 화면은 사라지고 대신 색의 대조와 리듬이 강조되었으며 거친 필촉과 재질감이 두드러졌다.
자연을 조형의지로 추상화하여 재구성하려는 강한 의지가 나타났다.
그는 1956년 8월 『조선일보』에 기고한 ‘데포르메론’에서 적었다.
“회화는 물론 자연 이상의 것을 만드는 것이 그것의 목적이요, 또 존재 이유다.
그런데 … 자연보다도 불리한 조건하에서 자연 이상의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에는 없는, 회화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방법에 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유일한 방법이 ‘데포르메’이다. 회화는 ‘데포르메’에 의해서만 우리들의 정신으로 하여금 현실의 자연과는 별개의 자연,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자연을 느끼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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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서양화 2세대의 대표적인 화가, 비평가 오지호(1905~82) 는 1905년 12월 24일(음력)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여덟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사대부적인 교양에 밝은 가정환경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부친 오재영은 대한제국 말기에 보성군수를 지냈으며 오지호가 15살 때인 1919년에 고종황제의 인산因山과 3·1운동을 서울서 직접 목격하고 내려온 직후 민족의 현실에 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지호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전주고보를 거쳐 1921년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 학교 도화선생으로 재작한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었다.
오지호는 1923년 고려 미술원 연구소에 들어갔는데, 그 해에 발족한 고려 미술회는 강진구, 박영래, 나혜석, 백남순 등의 서양화가들로 구성되었고, 나중에 동양화가들이 참가함으로써 고려 미술원으로 개칭되었으며, 전문 화가들을 양성하기 위해 연구소를 두었다.
연구소 서양화 부문의 지도는 이종우, 강진구를 비롯하여 몇몇의 서양화가들이 담당했으며 이 연구소에서 이마동, 구본웅, 길진섭 등이 배출되었다.
오지호는 이종우로부터 소묘와 유화 기법을 배우는 한편, 장래에 절친한 관계를 갖게 되는 친구 김주경과 김용준을 만났다.

오지호는 1925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으로 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응시했다.
그러나 이 학교의 치열한 입시 경쟁으로 낙방하고 가와바타화 학교에 들어가 일 년 동안 노력한 끝에 이듬ㄶㅐ인 1926년에 대망의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 서양화과 교수로 후지시마 다케지, 오카다 사부로스케, 와타 에이사쿠 등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 서양화화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외광파外光派 계열의 관학파들이었다.
오지호가 입학할 당시 일본 화단에는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었지만 동경미술학교는 이런 사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지호는 가와바타화 학교 시절 직접 지도를 받았던 후지시마의 교실에 들어가 공부했는데, 후지시마는 외광파의 선구적 화가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낭만주의적인 문학성, 도는 장식성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수학한 후 뛰어난 직관과 데생력을 토대로 대상을 단순화시킴과 더불어 거친 붓질로 순도 높은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외광파 화풍에 싫증을 느낀 관람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해인 1926년에 그린 <잔설 殘雪>은 습작에 불과하지만 활달한 붓질과 대담한 묘사가 그의 조형감각을 보여준 뛰어난 작품이다.
그가 일기의 한 순간을 신속한 붓질로 포착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최초의 유화인 이 작품 오른쪽 아래 붉은 물감으로 ‘1926년 점수화占壽畵’라고 세로로 표기한 사인이 적혀 있다. 동경 근교 이케부쿠르의 동네 장면을 그린 것으로 잔설이 쌓인 골목길을 너무 넓게 설정하여 구도상 짜임새가 부족하지만 색을 개성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1968년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에 기고한 ‘자연과 예술’에서 일본의 자연 형상에 관해 적었다.
“태양 광선의 광채는 수증기에 흡수되어 자연의 색채의 미묘한 색조와 섬세한 광택은 거의 소실되고, 색과 색은 뽀얀 베일로 덮인 듯 확연한 구별이 없고, 윤곽은 애매하여져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오지호는 일본 자연 환경에서 영향받은 정조情調를 불식시키고 명징한 태양광선 아래 자연의 생명력이 한껏 발현되는 우리나라 환경에 적당한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광학적 효과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인상주의 회화에 경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5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931년 봄 졸업과 함께 귀국한 그는 서양화가들의 단체 녹향회를 통해 화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8년 12월에 발족한 이 단체에는 김주경, 박광진, 심영섭, 장석표 등 야심을 가진 화가들이 있었다.
녹향회는 순수한 서양화가들로 구성된 최초의 동인단체라는 의의와 함께 서양화 도입 이래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아 온 일본의 화풍을 지양하고 조선 민족 미술을 위한 새로운 화풍을 전개하려는 진취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31년 4월에 개최된 녹향회 공모전은 선전에 대항하려는 이들의 야심찬 계획의 일환으로 당시 언론의 호응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김주경이 1931년 4월 5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녹향회를 앞두고’에서 공모전의 성격이 드러난다.

“양화의 토대 건설과 미술의 민중화를 위한 계몽이 필요하다.
무능의 자아를 벗어나 유능, 희망, 활약의 자아를 발견하고 또 그렇게 진전하는 신기력의 소유자가 늘어가야 할 것이다.
… 전람회장에서 어떤 격렬한 색채나 또는 필치가 있는 작품을 대할 때에는 그것이 홍수나 폭풍우와 싸워나가는 민족으로서 의당히 가져야 할 예술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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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김정현(1915~76)은 1915년 7월 2일(음력)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에서 한학자 김상용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성장기를 시골에서 보냈다.
마을에서 십리길 거리의 구림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제사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6살 때 회화를 독학하기로 결심한 후 광주로 가서 7년 동안 서양화를 배우며 주로 수채화를 그렸다.
그는 28살 때인 1942년 제21회 선전에 <채석장>을 출품하여 동양화부에서 입선했고, 이듬해에는 <기영 機影>, 1944년의 마지막 선전 제23회에는 <맥청 麥晴>이 거듭 입선하여 화단에 진출했다.
이 시기에 그는 목포와 광주를 오가며 누구의 사사함을 받지 않는 가운데 저명한 화가의 작풍을 스스로 선택하여 독학하면서 미술잡지와 전문 서적의 독서를 통해 미술에 관한 지식을 키웠다.

그는 선전에 처음 입선 한 후 동경으로 가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가와타바 미술학교 일본화과에 등록하고 처음으로 정기 수학했다.
그가 그곳에서 수학한 기간은 1년이었다. 언제 귀국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44년 선전에 출품할 때에는 광주에 돌아와 있었다.
해방 후 1946년 그는 목포여자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며 1955년경 서울로 이주했다.
그는 광주의 고명한 산수화가 허백련을 찾아가 사사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답적인 형식과 관념적 표현의 종래적인 산수화 범주의 수묵화에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1950년대 이후 나타난 향토적인 수묵담채 실경의 먹붓 구사와 먹색의 전통적 표현 및 깊이는 허백련에게서 배운 사의의 전통적 남종화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전통 수묵화에 농채로써 치밀하고 세심하게 꽃이나 새 등을 선명하게 결합시키거나 조화시켰다.
절충적인 수묵채색화 수법의 활용은 독특한 그의 양식으로 진전되었다.

6·25동란을 고향에서 겪고 1955년 봄 서울로 올라와 첫 개인전을 갖고 정착했다.
그의 첫 개인전 출품 작품들은 <춘란>, <설촌>, <맥풍>, <녹우>, <흑산도 풍경>, <낙화암> 등으로 사생풍의 기법과 전통 산수화의 심의적 수법이 혼용 혹은 절충되고 채색표현이 수반된 선명한 채색화의 화조 그림들이었음이 당시의 한 평문에서 알 수 있다.
화가이면서 비평에서도 활동한 김영기는 “모티프와 구도가 참신하다”면서 “고정된 재래의 전통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작가”라고 적었다.

1955년 제5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맥풍 麥風>은 개인전에 소개한 것을 출품한 것인지 동일한 제목으로 다시 그려서 출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작시기가 1954년으로 되어 있다.
한창 익어가는 보리밭 풍경을 여문 보리이삭을 황금빛 극채색으로 그리고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소용돌이 회오리바람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바람을 과장하여 자신의 강한 욕구를 표현했다. 보통 보리밭에는 종다리가 깃을 치지만 여기서 회오리바람과 함께 원을 그리며 나는 두 마리 새는 제비로 보인다.
이 작품은 입선에 그쳤고 이듬해에 출품한 작품들도 입선에 머물자 그는 1960년까지 출품하지 않았다.
그는 1961년에 추천작가로 우대되어 다시 출품하면서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통해 왕성하게 활약했다.
1957년 연말에 화단의 뚜렷한 존재로 중견화가의 자리를 구축한 김기창, 이유태, 김영기, 허건, 박내현, 천경자 등이 한국화의 창조적인 새로운 방향 추구를 다짐한 백양회白陽會를 결성할 때 김정현도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창작이 존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창립회원으로 매년 백양회전에 참여했다.

1961년 국전 당국이 새로운 운영제도로 종전의 초대작가·추천작가를 추천작가로 단일화하고 그 대상 작가의 폭을 넓히려고 했을 때 주위의 강력한 추천으로 김정현은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그해 국전의 동양화부 심사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
국전에는 심사위원으로서 <조양 朝陽>을 출품했다.
이듬해 제11회 국전에도 심사위원으로서 출품했다. 1960년대 김정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임간 林間>으로 춘春·추秋 2부작이다.
이것들은 여태까지 볼 수 없던 농담변화를 통한 수묵표현의 추상화였다.
수묵으로 서양 양식의 표현으로 나타난 이 작품은 그의 독자적 창의성을 보여준 것으로 이경성은 ‘김정현론’에서 그의 창의적인 작품의 특징을 “구도가 서양화적이라는 점과 소재의 다양성, 그리고 색채의 부조화 속의 조화 등”으로 언급하면서 김정현이 서양화를 연구했음을 지적했다.

60세에 접어든 1974년 10월 서울 고옥당 화랑에서 여덟 번째 개인전을 열었을 때 신문기자의 방문을 받고 그는 자신의 의욕과 희망을 피력했다.
“나는 비교적 다작한 편이나, 작품다운 작품은 1년에 5~6점 제작하기가 힘들다.
앞으로 여유가 있다면 5~6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일생을 정리할 대작을 남겨 보고 싶다.”

그러나 그는 2년 후 지병이던 고혈압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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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은 화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1930년대 한국화에 관한 담론으로 제기된 민족적 감성의 구현으로서의 향토미와 전통계승을 인상주의 양식을 변형시켜 완성한 사람이 박수근(1914~65)이다.
그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처음 선전 제11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한 1932년부터였으며 이 시기에 많은 일본 유학파가 귀국하여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유학파를 통해 간접적으로 서양화 기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
그는 1936년에 <일하는 여인>, 1939년에 <여일>을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했지만 획기적이거나 창의적인 작품이 못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는 1940년에 선전에 <맷돌하는 여인>을 출품하고 1943년까지 매해 출품하여 입선했는데 모티프는 농가에서 다양한 일을 하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열두 살 때 밀레의 <만종> 복사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는 밀레와 마찬가지로 농가에서 벌어지는 노동의 신성함을 주로 그렸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박수근은 원근과 입체감을 배제하고 직선을 사용하여 대상을 단순화하고 평면화했다.
피트 몬드리안이 추상 조형을 위해 자연의 모든 선을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집약했듯이 그도 주로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대상을 단순화하여 조형의 미만 받아들였다.
그의 화면에서는 모든 사물은 상징성을 지니며 동등한 위치를 점하는데 이런 특징은 1960년대 초반 이후의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화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미술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유행 양식과는 무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이런 무관성이 고유한 그의 양식으로 인정받게 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인물과 대상만을 회화적 구성 요소로 사용하면서 배경을 무시했으며 서양의 양식인 원근법을 따르지 않았으며 인물과 주변 환경물인 나무, 초가집 등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추상화했다.
대상과 대상의 주변을 모두 화강암의 표면처럼 마티에르의 질감으로 고르게 했다.
그는 돌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문지르는 프로타주 기법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프로타주 기법에 의한 고르고 거친 화면이 그가 추구한 공간을 배제시킨 평편한 회화세계가 되었다.
그는 캔버스에서의 프로타주의 효과를 물감을 엷게 타서 칠하고 겹겹이 덧칠하는 방법으로 성취했다.
균형적인 질감을 통일하기 위해 그는 수차례에 걸쳐 칠하고 또 칠했으며 젯소가 발라진 캔버스 위를 모노톤 물감으로 골고루 칠했다.
화면이 어느 정도 칠해졌을 때 붓으로 데생을 하고 그 위에 다시 붓과 나이프로 색을 칠하여 두터운 재질감의 화면이 되게 했다.
그의 그림에 X레이를 투시한 결과 물감 층이 8~10층이나 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그림은 일견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짧은 붓질에 의한 것과 유사해 보이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의한 영롱한 빛이 발하는 대기를 묘사한 데 반해 박수근은 화면 전체를 고르고 거칠게 해서 빛의 역할을 무시했으며 따라서 볼륨을 없앴고 외곽선으로 형태만을 취했다.
재질감이 주는 느낌을 인상주의 화가들보다 더욱 극대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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