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앙리 반 데 벨데>




윌리엄 모리스의 사회주의적 디자인 개혁을 가장 열성적으로 지지한 인물로 벨기에의 아르누보 디자이너와 건축가들 가운데 가장 다재다능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863~1957)는 1863년 4월 3일 안트베르펜에서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1년 안트베르펜의 미술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같은 시기에 빈센트 반 고흐도 그곳에서 공부했다.
반 데 벨데는 1884년과 이듬해에 파리의 초상화가 카롤뤼스 뒤랑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했으며, 클로드 모네, 폴 시냐크, 카미유 피사로, 휘슬러 같은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및 상징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1880년대에 화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그는 벨기에 화가들의 단체 뱅(20인회)이 주최한 전시회에 출품된 조르주 쇠라와 반 고흐와 같은 후기인상주의자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1884년에 형성된 뱅에는 아방가르드에 속하는 일련의 화가들이 있었고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1860-1949)도 뱅의 일원이었다.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종종 소름끼치고 엽기적인 해골이나 악마의 모습으로 표현한 앙소르가 주로 다룬 소재는 인간 희극의 상징인 그로테스크한 가면으로 이는 그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등장한다.

반 데 벨데는 1889년에 뱅의 일원이 되었다. 그 해에 어머니가 타계하자 정서적 위기에 빠진 반 데 벨데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완전히 회복한 건 1893년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공예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뱅이 1893년 해체되기 전 연 마지막 전시회에 그는 <수호천사 A Guardian Angel>라는 태피스트리를 출품했는데, 그것은 동화적이고 순진무구하며 상징주의에 가까운 동시에 율동적이고 선을 강조한 형태의 작품이었다. 이 시기에 존 러스킨의 사상과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의 이념을 알게 되었다.

1890년대에 이미 아르누보 형식과 동일한 추상화한 식물형태와 유선형으로 가구를 디자인한 반 데 벨데가 가구에 관심을 가진 건 자신의 취향에 맞는 디자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많은 디자인 작품은 국제 아르누보의 징표가 될 선적인 자유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반 데 벨데는 실내장식뿐 아니라 태피스트리, 가구, 은제품, 도자기, 목걸이, 의자 그리고 패턴도 디자인했다.

완벽하게 디자인된 환경을 창조해내려는 그의 초기 시도는 1896년에 아내와 딸을 위해 브뤼셀 근처 위클Uccle에 지은 블루멘베르프 자택Bloemenwerf House이다. 이 집은 그의 디자인 이론을 입증하는 모델로 창호, 가구, 카펫, 커튼에서부터 식기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전통적인 형태의 모방에서 탈피해 합목적성이 있는 종합 디자인으로 완성된 것이다.

모리스를 좇아 반 데 벨데는 집뿐 아니라 내부에 모든 물건들의 배치를 구성했다. 세 개의 궁형 박공을 가진 단순한 이 집은 1858년 필립 웨브가 모리스를 위해 디자인한 레드하우스의 전범을 따른 것이다. 그가 디자인한 가구들은 대부분 만들어 넣은 것이거나 벽에 부착된 것으로 미술공예운동을 지향한 것이었다. 집 외부는 영국의 토착적인 양식이지만, 많이 깎아내어 자유로운 곡선을 이룬 가구와, 역시 자신이 디자인한 패턴 벽지가 있는 내부에는 총체적인 아르누보 전망이 드러난다. 가구와 그래픽 분야에서 반 데 벨데는 프랑스 아르누보를 특징짓게 될 관능적이며 지나치게 세련된 여성적 이미지를 피하고, 트로폰 초콜릿공장Tropone Chocolate Factory을 위해 1897년에 제작한 유명한 포스터에서처럼 유동적인 추상형태를 강조했다.

그는 1899년에 베를린에 있는 하바나 담배회사 상점Havana Tobacco Company Shop의 실내장식을 디자인하고 1901년에는 베를린의 최고 이발사인 프랑수아 하비Francois Haby의 이발소 실내장식을 맡았다. 이발소는 온수와 가스파이프 같은 설비가 겉으로 드러나 장식적인 요소로 이용된 기능적인 실내가 되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바나 담배회사 상점은 과도한 환상의 표현이었다. 상점의 가구와 비품 그리고 채색장식은 상승적인 선적 운동감을 자아내도록 조정되었다. 그 운동감은 피어오르는 연기를 암시하는 추상적인 소용돌이가 반복되는 장식 띠가 있는 방 꼭대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규모가 작은 건축설계는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더 많은 창조적 자유를 제공하여 완벽한 장식적 화려함과 극단적인 실험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을 제공했다.

미술가는 본질적으로 절대적인 개인주의자이며, 자유롭고 자발적인 창조자이기 때문에 규범이나 유형을 강요하는 규율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반 데 벨데의 재능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들은 독일의 미술전문가들이었다.

빙은 1895년에 반 데 벨데로 하여금 네 명의 동료와 함께 아르누보 갤러리의 네 개 공간 실내장식을 디자인하도록 위탁했다.

1898년 ‘라 메종 모데른 La Maison Moderne’(현대의 집)이란 상점을 연 율리우스 마이어-그레페Julius Meier-Graefe(1867-1935)는 독일 출신의 미술사학자, 작가, 화상으로 파리에서 빙과 가장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그조차도 반 데 벨데를 새로운 세대를 위한 스승이자 교육자로 보았다. 마이어-그레페는 1898년 브뤼셀의 민중의 집에서 ‘공예가이자 사회주의자인 윌리엄 모리스’라는 제목의 반 데 벨데의 강연을 듣고 그를 ‘모리스의 직접적인 후계자’로 명명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귀스타브 세뤼리에-보비Gustave Serrurier-Bovy(1858~1910)>




앙리 반 데 벨데는 미술공예운동의 구성원들이 제작한 섬유, 벽지, 전등, 판화를 벨기에에 도입한 인물로 귀스타브 세뤼리에-보비Gustave Serrurier-Bovy(1858~1910)를 꼽으며, 그가 영국 미술공예운동의 감성을 최초로 해석한 디자이너이고 자신과 빅토르 오르타가 그의 뒤를 따랐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벨기에 남동부의 리에주Liege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영국 미술공예운동 소속의 길드가 운영한 학교에 다닌 세뤼리에-보비는 가족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가구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

그는 1870년대에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 그리고 프랑스의 건축가 외젠 에마뉘엘 비올레-르-뒤크Eugene Emmanuel Viollet-le-Duc(1814~79)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 고딕 부활운동의 대변자 비올레-르-뒤크는 피에르퐁Pierrefonts의 성과 파리 센 강가의 시테 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Notre Dame Cathedral의 복원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강의록인 『건축론 Treatises on Architecture』(1863~72)에서 그는 철과 유리의 과감한 사용을 주창했다.

1884년에 결혼 한 뒤 세뤼리에-보비는 리에주에 실내장식을 제공하는 매장을 열었으며, 그곳에 연 두 번째 매장에서 자신이 제작한 가구와 일본 양식의 공예품을 포함하여 리버티상사의 제품을 취급했다. 그는 자신의 가구공방에서 가구를 설계하고 제작했다.
1894년과 1895년에 자유미학에서 전시회를 열고, 1897년에는 브뤼셀 만국박람회의 콩고 전시관을 짓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에 그는 파리에 지점을 냈다.

세뤼리에-보비가 1899년경에 제작한 마호가니 침대는 영국 미술공예운동의 중심인물로 서정성을 보여주는 패턴과 가구를 디자인한 찰스 프랜시스 앤슬리 보이지Charles Francis Annesley Voysey(1857~1941)의 떡갈나무로 제작한 <백조의자>와 <필기용 책상>에 나타나는 형태의 단순성과 구조적 정직성을 갖추고 있지만, 미술공예운동을 떠나서 과감하게 부르주아적 안락함이 배어나는 아르누보를 수용했음을 시사한다.
떡갈나무 대신 마호가니를 사용한 것 자체가 사치스러움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이 점은 곡선적 덮개의 웅장한 형태와 디자인된 꽃문양으로 장식된 패널에서도 확인된다.
이 침대는 파리 지점에 전시되었다.
‘가정 속의 미술 L'Art dans l'Habitation’로 명명된 상점은 부르주아 가정의 방들로 이루어져 있어 1890년대에 디자인한 ‘장인의 방 Artisan's Room’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세뤼리에-보비와 르네 뒬롱Rene Dulong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은 식당인 청색관은 완벽한 아르누보 건축의 드문 예 중 하나이다.
1890년대 후반과 1900년대에 세뤼리에-보비의 가구는 초기작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고딕부활 양식과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고 표현적인 아르누보 형태로 발전해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





아르누보에 끼친 영국 디자인의 영향은 앙리 반 데 벨데와 귀스타브 세뤼리에-보비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가장 완벽한 아르누보의 초기 예는 유럽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가장 빨리 시작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한 벨기에의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의 작품이다.
그의 건물과 실내장식은 영국 디자인 개혁전통의 급진적인 정치이념이 신로코코 양식의 엘리트적 유미주의 그리고 건축에서 철강과 유리의 사용으로 가능해진 기술적 진보와 결합된 실용적인 예이기도 하다.

13세기 이전에 플랑드르 방직의 중심지로 운하로 북해와 연결되어 있어 외항기선의 출입이 가능한 겐트Gent(플라망어로는 헨트)에서 태어난 오르타는 파리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브뤼셀의 미술 아카데미 부속 건축학교 재학 중에 이미 독보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 뒤 공부를 계속하여 1881년에 브뤼셀의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이 학교에서 존경받는 신고전주의 건축가 알퐁스 발라Alphonse Balat(1818-95)에게 사사했으며 그의 건축사무실에서 일했다.
레오폴드 2세Leopold II(1835-1909)의 단골 건축가로 1874-76년에 라에켄Laeken에 지은 왕립 온실Royal Glasshouses의 둥근 지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기술의 이용에 뛰어난 발라는 창의적인 표현방식을 고안하여 강철과 유리를 재료로 혁신적인 구조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작품에는 모리스, 애슈비, 비어즐리의 영향이 엿보인다.
발라는 반 데 벨데와 마찬가지로 재료와 구조의 성질에 충실한 조립에 의존하는 기능주의를 주창했다.
왕립 온실 건축이 오르타가 화려하게 디자인한 바론 반 에트벨데 백작Baron van Eetvelde(1852-1925)의 저택(1895-97)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오르타가 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철강과 유리 같은 재료의 건축적 가능성을 이용한 것은 건축물에 금속 요소를 많이 드러내 보인 벨기에 건축가 어네스트 헨드릭스Ernst Hendrickx(1844-92)의 조수로 일한 경력 때문이기도 하다.

오르타는 1890년에는 자신의 사무실을 열고 1893년에 성숙한 아르누보 최초의 건축적 표현으로 유명한 타셀 하우스Tassel House(1893-95)를 설계했다.
브뤼셀의 폴 에밀 얀스 가에 있는 자신의 주택 설계를 오르타에게 의뢰한 에밀 타셀Emile Tassel(1838-79)은 브뤼셀 대학의 도형기하학 교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애호가이자 전문가, 아마추어 사진작가, 일본 미술품 수집가였다.
오르타가 타셀을 만난 건 1893년 ‘자기완성, 관용, 그리고 계몽’을 교의로 프랑스 혁명 후 유럽에서 생긴 비밀결사 프리메이슨Freemason 집회에서였다.
타셀은 아마도 격조 높은 환경을 갖춘 주택을 원했던 것 같다.
타셀이 원한 것은 “학자와 미술가들만으로 구성된 친한 친구들을 초대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독신자”의 집이었다고 오르타는 술회했다.
고객의 지적, 사회적 취향을 반영하고 있는 타셀 하우스에서 노출된 철 구조물의 혁신적인 사용과 개방적 공간은 오르타 양식의 특징이 되었다.
집의 입구는 연철로 만든 곡선의 난간, 요동치듯 비틀린 벽면장식 그리고 선명한 색상의 모자이크 바닥으로 장식되었다.
방과 복도들은 눈에 띄지 않게 서로 통해 있다.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계단이며 철로 제작된 계단기둥은 식물을 모방해 만들어졌는데, 철제 난간은 물결치듯 흐르는 형태이며, 이런 형태는 벽의 덩굴무늬 그림과 바닥 모자이크의 덩굴무늬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나선형과 곡선은 아르누보의 주요 모티프로 영국의 맥머더 그리고 특히 삽화가 헤이우드 섬너Haywood Sumner와 같은 미술공예운동의 다른 화가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오르타가 보여준 선의 형태는 벨기에 특유의 것이다.
그것은 이후 사람들이 ‘벨기에식 선’으로 명명한 긴장감 넘치고 추상화된 장식이다.
그러나 오르타의 장식미술에서 다른 아르누보 화가들처럼 식물의 잎이나 꽃이 아니라 기둥과 줄기였다.
그의 업적은 채찍선 같은 리듬을 지닌 전형적인 아르누보 곡선을 처음으로 공간과 구조로 변형시킨 데 있다.
1890년대 초 영국이 벨기에에 미친 영향은 실내장식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응접실 장식에서 오르타는 애초에 구상했던 이집트 양식의 벽지를 버리고 반 데 벨데에게서 구입한 영국 벽지를 사용했다.
식당에는 찰스 프랜시스 앤슬리 보이지가 만들어 일레인Elaine이라고 명명한 또 다른 영국 벽지를 사용했다.
응접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디자인한 의자 장식에는 리버티상사를 위해 제작된 수선화무늬가 있는 천을 사용했다.
역점을 둔 곳은 서재이고, 1층과 2층 사이에는 타셀의 사진작업을 위한 작업실이 마련되어 있다.
타셀은 집에서 모임을 자주 가졌으며 모임에서 사당 안쪽 벽면에 투사된 슬라이드를 이용해 강연을 하곤 했다.
손님용 욕실과 흡연실은 이런 모임을 위해 마련되었다.

타셀은 오르타가 브뤼셀 대학의 종합기술학부에서 조교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오르타는 대학에서 프랑스 건축가이자 건축보존위원으로서 건축물에 철을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옹호한 외젠 에마뉘엘 비올레-르-뒤크의 이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오르타는 타셀을 통해서 화학 콘체른Konzern의 대표인 발명가, 화학자 아르망 솔베이Armand Solvay를 알게 되었다.
1895년과 1900년 사이 고급스러운 루이즈 가에 솔베이 저택을 디자인했다.
아직은 조심스러웠던 타셀 저택의 외관과는 달리 여기서 건물 정면은 활 모양으로 구부러졌고, 측면의 돌출 창 부분도 궁형으로 튀어나왔다.
건물 배치부터 사소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내부는 다시금 서로 통하는 공간이라는 도식을 따랐다.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고 조정되었으며, 홀 안에서는 놀랍게도 부풀어 오른 공간이 캐러멜색, 금색, 살구색과 같은 많은 따스한 색조를 띤 채 방문객을 둘러싸게 된다.

브뤼셀에 있는 일련의 집들이 오르타의 명성을 증명하는데 그는 1894년과 1905년 사이에 자신의 집 외에도 다섯 명의 변호사를 위한 주택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주택은 변호사 외에도 정부 각료들을 위한 것으로 미적으로 진보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호화스럽기 때문에 오르타와 그의 많은 고객들이 속해 있던 벨기에 노동자당에 투표한 대중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브뤼셀의 많은 미술가들처럼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그는 1896년과 1899년 사이에 백화점, 사무실 그리고 벨기에 노동자당을 위해 다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강당을 건립했다.
1895년과 1899년 사이에 세워진 인민의 집Maison du Peuple 정면은 벨기에 최초로 철과 유리를 폭넓게 사용한 구조물이며 내부의 강당 지붕의 철골빔은 구조적 요소이면서 동시에 장식적이었다.
이 건물은 1960년대에 아르누보를 경시한 택지개발업자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아르누보의 공적 표현은 상점과 백화점의 설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오르타는 동료 건축가 폴 세인트노이Paul Saintenoy(1862-1952)와 함께 아르누보 양식으로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브뤼셀에서 가장 큰 두 백화점, 즉 폴 세인트노이가 1899년에 세운 올드 잉글랜드 백화점Old England Department Store의 유리 정면과 오르타가 1901년에 건립한 아 리노바시옹A L'Innovation으로 명명된 백화점이 대표적인 예이다.
아 리노바시옹의 정면은 주위의 전통적 건물들에 반항하듯 볼록한 모습이다.
거대한 유리창은 외부에 벽돌의 필요성을 제거했으며, 보행자들이 내부에 진열된 많은 상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이 백화점들은 구매자들에게 오르타의 인민의 집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조명과 넓은 공간을 제공했다. 아 리노바시옹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오르타는 1903년에 다른 상점 그랑 바자 안스파크Grand Bazar Anspach를 설계했다.
그랑 바자 안스파크는 상점 양쪽에 늘어선 아파트 건물과의 조화를 위해 유리 정면을 없애고 위층에 벽돌을 올림으로써 어느 정도 소박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면서도 주출입문 위에 날개 모양의 유리덮개를 사용함으로써 현대적 느낌을 보탰다.
근대 재료인 철과 유리로 건축된 이 새로운 거대한 건축물은 쇼핑의 경험을 재규정했으며, 중류층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여가기회를 제공하고, 중하류층과 노동계층 여성들에게는 고용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각 층마다 상품들로 진열된 백화점들에는 화장실, 카페 그리고 심지어 미술화랑까지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랑 바자 안스파크는 여성들이 도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한 새로운 공간이 되었다.

오르타는 1913년에 브뤼셀 미술협회 회장이 되고 후에 남작 작위를 받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폰스 마리아 무하Alphons Maria Mucha(1860-1939)>




프랑스의 아르누보는 특히 여성적 형태를 많이 사용했다. 뫼렌Mohren에서 태어나 빈과 뮌헨에서 교육을 받은 체코의 그래픽 디자이너 알폰스 마리아 무하Alphons Maria Mucha(1860-1939)는 프랑스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Sarah Bernhardt(1844-1923)를 주제로 일련의 연극포스터를 통해 파리 아르누보의 이국적이고 무절제한 성과 동일시했다.
1890년대에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인 베른하르트는 무하에게 자신의 연극포스터를 아르누보 양식으로 디자인해줄 것을 의뢰했다.
<지스몽다 Gismonda>(1894)에서 무하는 베른하르트를 대담하게 양식화된 모습으로 묘사했다.
베른하르트의 물결치는 듯한 의상은 포스터라는 이차원 형태에 적합한 무하의 복잡하고 정교한 선적 양식과 잘 어울렸다.
무하의 이미지는 1890년대 중반에 파리 대중에게 독창적이며 인상적으로 받아들어졌으며, 그가 묘사한 여배우의 모습은 이상화된 세기말 여성을 대중화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라 사마리텐 La Samaritaine>(1894)을 위한 포스터에서 무하는 베른하르트의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중점적 장식 모티프로 사용해 구불구불한 선과 곡선에 초점을 맞추었다.
무하는 많은 포스터에서 그녀의 몸을 가늘고 길게 늘어진 모습으로 표현했다.
세기말적 이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실제 모델을 보고 그린 드로잉에 베른하르트의 머리를 붙였다.

무하는 1901년 루아이알Royale 가에 소재한 조르주 푸케Georges Fouquet(1862-1957)의 보석상점을 디자인했다.
꽃문양 모티프를 사용하여 새로운 유형의 보석을 창조한 푸케는 1900년에 무하가 디자인한 보석을 생산하여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베른하르트를 위해 제작한 포스터로 성공을 거둔 무하는 일련의 상업포스터를 제작하게 되었고, 욥Job 담배종이 같은 제품을 위한 포스터에서 대중에게 유혹적이며 방종한 자세로 아라베스크 모양을 이루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가득 찬 낭만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무하는 욥 담배종이에 나타난 환상을 3차원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푸케의 상점을 장식했다.
상점 계산대에는 두 마리의 공작이 장식되었는데, 한 마리는 꼬리를 활짝 펴서 자신의 화려함을 한껏 과시하는 조각이다.
공작은 1870년대와 1880년대 심미주의운동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티프로 일본화에서 유래했다.
공작의 양식화된 묘사는 많은 디자이너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1877년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1834-1903)의 <공작의 방 The Peacock Room>이 유명하다.
공작은 동양을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자부심과 과시를 함축하는데, 이는 아르누보의 낭만적 개인주의에도 남아 있는 심미주의운동의 주요 주제였다.
유행과 부를 구현한 공작은 푸케의 상점을 위한 완벽한 모티프가 되었다.

실내에는 거품이 이는 샘물에서 솟아오른 요정의 조각과 여성 형상을 주요 모티프로 한 환상적인 벽난로가 있다.
벽난로의 기단부 양쪽에는 웅크린 두 인물이 측면에 매달려 있으며, 연체동물 형태의 난로로 가리개 위쪽에는 반투명 옷을 걸치고 팔을 든 채 서 있는 여신상이 있다.
그림이 그려진 벽난로 장식 선반에는 웅크리고 앉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인이 묘사되어 여성의 몸이라는 주제가 지속된다.
이는 현란한 과시가 진보적 디자인 개념만큼이나 중요했던 고객을 겨냥한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자신의 활약을 통해 신여성의 이상을 구현했다.
여성의 지위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프랑스 아르누보에 반영된 많은 동시대 주제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19세기 말경에는 신비주의와 같은 반이성주의나 심리학과 신경학에서의 새로운 연구를 통해 밝혀진 꿈과 무의식에 대한 활발한 관심이 나타났다.
두 세계에 대한 관심은 아르누보의 이미지에도 반영되었다.
무하가 1899년판 주기도문인 <르 파테 Le Pater>를 위해 제작한 표지그림에는 일곱 개의 별 속에 들어 있는 18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된 세계시민주의적, 인도주의적 우애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프리메이슨 상징과 히브리 상징이 보인다.
주기도문을 위한 표지로서는 비기독교적인 이 디자인은 세기말의 미술계에 퍼진 종교에 대한 절충적인 태도를 잘 드러낸다.
히브리 상징은 19세기 말에 새롭게 관심의 대상이 된 고대 유대인의 신비주의 전통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르네 랄리크Rene Lalique(1860~1945)>




마른 데파르트망Department 태생의 프랑스의 보석세공사, 유리공예가 르네 랄리크Rene Lalique(1860~1945)는 파리의 루이 오코크Louis Aucoc 밑에서 금세공 도제수업을 받고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뒤 1878년부터 1880년까지 런던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파리로 돌아온 뒤 1년 동안 보석상이자 금세공가인 오귀스트 프티Auguste Petit를 위해 일했으며, 유명한 파리의 보석상들을 위해 장신구를 디자인했는데 그 중에는 네덜란드의 루이 프랑수와 카르티에Louis Francois Cartier(1819-1904)도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에콜 베르나르 팔리시를 다니며 조각가 뷔스티앵 르키앵으로부터 배웠다.
1884년 프랑스 공예품 전시와 연계하여 루브르에서 열린 ‘프랑스 왕관 보석 전시회’를 계기로 랄리크는 독자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는 벨 에포크Belle Epoque(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아름다운 시절) 풍조 아래 화려한 장식작품을 제작하여 명성을 얻고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1885년에 파리의 보석세공 공방인 쥘 데스타프Jules Destape를 인수했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파리의 일류 보석상들을 위해 보석장식을 만들었으며, 사업은 새로운 공방을 물색해야 할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1890년 그는 30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1890년 이전의 랄리크 보석디자인의 모티프는 당시 파리에서 일반적이던 자연주의적 보석세공과 차이가 없었다.
그는 파리 보석상들에게 납품하는 동안 그들의 취향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1895년 더 이상 납품하지 않게 되자 랄리크는 비로소 새로운 형식과 모티프의 세계로 향했다.
그가 새로운 형식과 모티프에 대한 영감을 얻은 곳은 상징주의로, 여성 인물, 여인의 머리, 곤충, 물고기, 백조, 딱정벌레, 꽃 등 도약하는 운동감이 가득한 세계였다.
그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전통 원료를 거부하고 선명한 색채의 준보석을 선호하여 보석디자인에 혁신을 일으켰다.
요정이나 꽃과 같은 모티프는 랄리크의 아르누보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가 1897-98년에 제작한 머리띠 <사이렌 Siren>은 아르누보 디자이너들이 선호한 여성으로 보석세공인들에게 인기 있는 모티프였다.
그는 1895년부터 1909년까지 프랑스 미술가 전시회에서 정기적으로 보석과 공예품을 선보였다.
그는 일본 공예에 관심이 많아 칠보자기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가 1895년과 1907년 사이에 디자인한 보석세공품 중 칠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미묘하게 변화하도록 처리한 차갑고 혼탁한 색조를 선호했다.
진주와 자개 외에 상아 그리고 색을 가미해 세련된 효과를 낼 수 있었던 뿔을 선호했다.
돌 가운데서는 무지개빛을 내는 신비한 오팔과 황옥, 월장석을 선호했다.

아르누보 시기에 보석으로 유명해진 랄리크는 자신의 보석디자인을 값싸게 복제하는 데 점차 관심을 기울이다가 1901년경부터는 유리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1909년에 유리 제조업체를 인수해 1918년부터는 유리세공에 몰두했다.
1908년과 1910년 사이 틀에 부어 제작한 장신구를 연속적으로 생산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가 1904-06년에 제작한 브로치 <키스 The Kiss>는 그의 첫 유리공예품이다.
<키스>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연인들이 화관을 쓰고 사랑스럽게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상징적 이미지의 사용은 아르누보의 모호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미술가들은 분명한 도덕적 태도를 취하는 과학자, 심리학자, 정치가 그리고 평론가들과는 달리 종종 시대의 도덕적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고객과 시장은 그들의 작품에 보수적 가치를 부여했다.

유리작업에서의 랄리크의 혁신은 프랑수아 코티Francois Coty(1874-1934)로부터 향수병 디자인을 주문받은 1908년에 이루어졌다.
전등이 보급되기 시작하자 그는 가장 먼저 유리를 조명기구에 활용하여 전기스탠드, 샹들리에 등을 제작했으며, 1910년대에 유리그릇 제작에 몰두하면서 작풍에 변화가 1920년대의 화려한 아르데코Art Deco(Style Moderne이라고도 한다) 양식을 구현하게 되었다.
아르데코는 1910년경에 파리 살롱전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 명칭은 새로운 양식이 출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192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장식미술 및 현대산업 박람회’의 명칭에서 유래했다.
아르데코는 1930년대에 서유럽과 미국의 건축과 장식미술에서 주된 양식이 되었다.
아르누보가 수공예적인 것에 의해 나타나는 연속적인 곡의 선율을 강조하여 공업과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반면 아르데코는 공업적 생산방식을 미술과 결합시킨 기능적이며 고전적인 직선미를 추구했다.
아르데코 양식의 특징은 단순함, 깔끔한 형태, 유선형 같은 외양, 구상주의 형태에서 나온 기하학적이고 양식화된 장식과 매우 다양하며 값비싼 재료로 이중에는 천연재료와 인조재료도 종종 포함되었다.
그러나 아르누보와의 경계선이 희미했는데, 슈토클레트 저택과 같은 프로젝트는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두 양식 모두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양식의 연속성의 예를 1920년대까지 활동한 많은 아르누보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의 작품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가장 성공적인 전환은 랄리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랄리크의 유리 제조 사업은 번창하여 192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의 반짝이는 유리분수가 광고포스터에 등장하는 등 박람회를 대변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 후 아르데코의 아이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제작된 그의 유리제품들은 아르누보와의 장식적 연속성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1925년경에 제작한 큰 병 모양의 전등은 자연주의의 유기적 형태가 음각으로 장식되어 있고, <불새 The Firebird>라고 명명된 같은 시기의 다른 전등은, 그와 비슷하지만 1880년대 상징주의 화가들의 정신에 가까운, 변신하는 새-여인을 모티프로 하여 디자인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