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김광우의 저서 <성경 이야기>(지와 사랑) 중에서


가이사랴 지방의 한 마을을 지나다 예수는 문득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복음 8:29)


예수를 스승으로 삼아 그와 더불어 먹고 자면서 이스라엘 전역을 방랑한 지 2년도 훨씬 지났는데 새삼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제자들은 의아했다.


예수는 이제 사역을 마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사천 명이, 어느 날은 오천 명이 말씀을 들으러 몰려왔지만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예수는 사랑하는 제자들만이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주길 바랐다.
지금은 알지 못한다면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알아주기를 바랐다.


예수가 묻고자 한 것은 자신에게서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성에 관하여 말해 보라는 것이다.
신학의 대상이 되는 분이 제자들의 신학을 듣기를 원하신 것이다.


신학(theology)이란 신(theos)과 말(logos)의 합성어로 ‘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신학자는 흥미롭게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물 길러 우물로 나왔다가 우연히 그분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다.


서기 28년의 이야기이다. 예수는 요한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마리아를 경유해서 갈릴리로 가던 중이었다.
아직 사역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야곱의 우물로 알려진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던 예수가 물 길러 온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요한복음 4:9-26)


유대인이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느냐는 말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에 관해 말하면서 자신이 새 삶을 주는 능력이 있음을 시위했다.
예수가 말한 생수는 성령이지만 가르침이기도 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야곱(Jacob, 별명이 이스라엘이다)의 아들 요셉(Joseph)의 후손이라고 믿었다.
당신이 야곱보다도 위대하냐는 여인의 질문에 예수는 야곱의 우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이 야곱보다 위대함을 드러냈다.
예수는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 명 있었음을 지적하여 그녀의 모든 죄를 알고 있음을 나타내어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했다.
여인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알고 있다고 하자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직접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했다.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고, 사람들에게 증거한 것이다.


30년 4월 6일 목요일 저녁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 겸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저녁식사를 마친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인근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예수는 자주 그 동산에 가서 기도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 대제사장 가야바의 사주를 받은 무리가 창과 몽둥이와 횃불을 들고 가롯 유다를 앞세워 예수를 잡으려고 왔다.
급작스러운 습격을 당하자 베드로는 허리에 찬 칼을 빼어 종의 귀를 자르는 저항을 시도했지만 결국 예수를 홀로 남겨놓고 제자들과 함께 도망치고 말았다(마태복음 26:56).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고백한 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진정으로 믿었다면 그날 줄행랑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비겁한 행위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사태를 관망하기 위해서 예수가 붙들려 간 대제사장의 관저에 몰래 들어가 뜰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 계집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나사렛 예수와 한패라고 말하자 그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마태복음 26:72).


4월 7일 금요일 아침 예수는 다른 두 사형수와 함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공회 의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총독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시신을 안치했다(누가복음 23:50-53).
사흘 후 일요일 아침 일찍 예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간 막달라 여인 마리아가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무덤에 있던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그녀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려 주었다(누가복음 24:1-6).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소식을 알렸지만 그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마가복음 16:10-11).
무덤으로 달려 간 베드로는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 발견했다.
이 일에 대해 누가는 베드로가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누가복음 24:1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에 제자들이 신학적으로 응답한 것은 부활한 예수를 보고난 후였다.
제자들의 신학은 각자의 신앙고백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부활한 예수에게는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이 있다고 했다.
부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에 없었다. 영생에 대한 인류의 소망이 예수의 부활로 결실을 맺었다.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라는 것이 부활로 증명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그리스도 신화를 창조했다.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 사람들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립하면서 부활의 꿈을 키웠지만 그들에게 부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집트 왕은 미라가 된 채 4,500년 동안 갇혀 있었지만 피라미드 밖으로 걸어 나오지 못했다.


부활에 관한 베드로의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전제 하에서 가능한 신앙고백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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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메시아인가
김광우의 저서 <예수 이야기>(지와 사랑) 중에서


그리스어로 ‘크리스토스(Christos)’라고 번역된 ‘메시아’는 ‘기름을 붓다’라는 뜻의 헤브라이어 동사 ‘마샤하(Ma죚s∧ah)’에서 온 형용사로 ‘기름 부음을 받은’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메시아란 거룩한 직능을 부여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선지자들이나 때로는 대제사장, 이스라엘의 왕을 지칭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에 관해 구약성서는 다양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메시아는 다윗이 세운 왕조와 관련이 있는데, 다윗의 자손 가운데 왕위에 오를 사람을 정하겠다는 신탁(시편 132:11)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를 고난 받는 종으로 묘사했다.


나의 종이 매사에 형통할 것이니,
그가 받들어 높임을 받고,
크게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이사야서 52:13】


예언자 스가랴는 메시아를 공의로운 왕이라고 부르면서 그가 구원을 베풀 것을 예언했다(스가랴서 9:9).
예수는 이사야와 스가랴가 예언한 ‘공의를 베푸는’ 메시아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메시아는 지혜롭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지혜로움은 다니엘이 말한 지혜이다.


백성 가운데서 지혜 있는 지도자들이 많은 사람을 깨우칠 것인데, 얼마 동안은, 그 지혜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얼마가 칼에 쓰러지고, 화형을 당하고, 사로잡히고, 약탈을 당할 것이다. 【다니엘서 11:33】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다니엘서 12:3】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고 인자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에게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은 메시아와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자신이 본 환상을 증언하는 중에 인자라는 말을 사용한 바 있다.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 나아가
그 앞에 섰다.”
【다니엘서 7:13】


다니엘의 인자는 이사야가 말하듯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은 아니지만 메시아를 언급한 것이라 해석된다.
시편에도 인자라는 말이 나온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
주께서 몸소 굳게 잡아주신 인자 위에
주의 손을 얹어주십시오.
【시편 8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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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생각한 메시아
김광우의 저서 <예수 이야기>(지와 사랑) 중에서


예수가 생각한 메시아는 이사야서에 나온 것과 비슷하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이사야서 42:1?】


로마의 탄압을 받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나라를 구하고 왕으로 추대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생각한 메시아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진리를 가르치며 공의를 베푸는 사람이다.


예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갈 때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가복음서 8:27?0】


예수는 사람들이 유대에 독립을 가져다주는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서 자유를 깨닫게 하고 공의를 베풀어 속박당하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메시아로 부르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여 종말적인 왕의 칭호가 자신에게 붙여지는 것을 꺼려했다.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서 메시아란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가 그러한 칭호를 삼가하도록 한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자 산으로 피했다는 요한의 기록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예수가 메시아를 논제로 삼은 적이 한 차례 있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다윗 스스로가 그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마가복음서 12:35?7】


예수는 시편 110편에서 다윗이 메시아를 주라고 부른 것을 지적하면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율법학자들은 그의 말에 침묵을 지켰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유대를 건국한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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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선언했다
김광우의 저서 <예수 이야기>(지와 사랑) 중에서


예수는 체포되자 그제서야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선언했다.
그대가 그리스도냐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내가 바로 그이요”라고 대답한 것이다(마가복음서 14:61?2).
그러나 누가는 다르게 기록했다.
누가는 예수가 간접적으로 대답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대제사장이 “네가 그리스도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해라”라고 하자 예수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며,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인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서 22:67-69】


장로단, 곧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물었다.
예수는 “내가 그라고 너희가 말하였다”(누가복음서 22:70)라고 대답했다.
마태도 그리스도냐는 질문에 예수는 “당신이 말하였소”(마태복음서 26:64)라고 간접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했다.


예수가 그리스도냐는 질문에 간접적으로 대답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일생에 대한 이해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생애를 통해 메시아의 역할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일생에 걸쳐 그 사명을 완수한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바로 메시아에 대한 이해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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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에 메시아가 출현한다는 것은
김광우의 저서 <예수 이야기>(지와 사랑) 중에서


분봉왕 안디바의 귀에도 예수에 관한 갖가지 소문이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엘리야가 나타난 것이거나 또 다른 옛 예언자가 부활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소문들이 돌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부활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안디바는 소문의 주인공을 만나고 싶어 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어 죽였는데 내게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들리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복음서 9:9】


다시 유월절이 찾아왔다.
아마 29년 봄일 것으로 생각된다.
유월절에 메시아가 출현한다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믿음이자 바램이었다.
지난해부터 유대인에 대한 로마의 압력이 심해졌으므로 그들은 더욱더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가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과 뒤섞인 사건이 일어나자(누가복음서 13:1)
제로테 당원들은 거사의 날을 앞당기려고 했다.
실로암 탑이 무너져 18인의 희생자가 난 것도 그때였다(누가복음서 13:4).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커지자 사람들은 메시아의 출현을 더욱 고대하였고 예수를 메시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수도 부쩍 늘었다.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에게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남자들만도 약 오천 명에 이르렀다.
예수가 그들을 먹이려고 하니 준비된 것은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그들 모두를 먹이는 기적을 행했다.
사람들은 그가 행한 기적을 보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라고 입을 모으며 그의 결단을 촉구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앞세워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을 알고 혼자 산으로 갔다.(누가복음서 6:4?5)


오천 명의 남자들이 예수에게로 간 사실은 당시 고조되던 유대인의 민족감정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요한은 그들이 예수를 유대의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굶주린 오천 명이 그에게로 갔다는 것은 속박당하는 유대인들의 처지를 잘 드러내준다.
예수가 그들에게 사랑의 음식물로 배를 채워주었다는 것이 에피소드의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유대의 독립을 위해 일어나줄 것을 요구하며 예수가 앞장을 선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따르겠다고 외쳤을 것이다.
유월절이라서 사람들은 흥분해 있었다.
홀로 산으로 피한 예수는 결단의 벼랑에 서서 더욱 고독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과 유대인들의 요구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심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가 체포되었을 때 빌라도에게 한 말에서 그가 겪었던 큰 괴로움을 알 수 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서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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