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의 역사
조선공산당의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1921년까지 급진적이고 점진적인 민족운동이 전개되면서 사회주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회주의사상·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전파한 것은 일본유학생들이었습니다. 김약수를 중심으로 송봉우, 이여성, 신백우, 안광천, 강진, 김광수, 이진태 등이 1922년 2월 동우회의 이름으로 선언문 ‘전국 노동자제군에 격檄함’을 발표하고 동우회가 계급투쟁의 직접적인 행동단체임을 밝혔습니다. 동우회의 선언을 전후하여 국내에는 사회주의적 색채의 단체들이 태동하게 되었는데, 그 중 무산자동맹회, 북풍회, 화요회, 조선노동당, 서울청년회 좌파 등이 주요 좌익사상단체로 꼽힙니다.
1922년 3월 서울에서 조직된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는 1922년 1월 윤덕병尹德炳, 김한金翰, 신백우申伯雨, 원우관元友觀, 이혁로李爀魯, 이준태李準泰, 백광흠白光欽, 진병기陳秉基, 김달현金達鉉, 김태환金泰煥 등이 조직한 무산자동지회와 그 해 2월 장병천張炳天, 심상완沈相完, 이영李英, 신일용申日鎔 등이 조직한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가 3월에 통합한 단체입니다. 회원들은 언론기관과 청년단체, 노동운동단체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이었으며, 대부분이 동경 유학생 출신이어서 1920년 1월 25일에 이기동, 한윤동, 홍승로, 유진걸, 김약수, 박렬, 김낙준, 정태성, 송봉수, 박일병 등이 설립한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산자동맹회는 1925년 7월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과 함께 네 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듬해 4월 이들 세 단체와 함께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었습니다.
1924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북풍회北風會는 김약수金若水, 김종범金鍾範, 마명馬鳴, 정운해鄭雲海, 남정철南廷哲, 서정희徐廷禧, 박창한朴昌漢, 박세희朴世熙, 신용기辛容箕, 송봉우宋奉瑀, 이호李浩 외 13명이 주동이 되었는데 이는 재일 사회주의 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국내 지부로서 성립되었습니다. 북성회는 국내 단체를 계통적으로 지휘하기 위한 사회주의 단체 최고기관을 설치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에 따라 1923년 10월 서울에서 1백60여 명이 모여 건설사建設社를 조직했으며, 이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1924년 11월 북풍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북풍회는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목표 실현을 위해서는 한일 무산자 계급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한국 내의 사상 단체 중에서 가장 친일적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화요회와 반목하게 되는 주된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북풍회는 그 내부에서 주류와 비주류로 갈려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북풍회는 1925년 3월 임시총회를 열고 화요회와의 합동을 결의했으나, 두 단체 사이에는 합동 뒤부터 반목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결렬되었습니다.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된 화요회火曜會는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가 개칭되어 성립된 단체입니다. 신사상연구회는 1923년 7월 7일 서울 낙원동에서 홍명희洪命熹, 홍증식洪增植, 구연흠具然欽, 박일병朴一秉 등이 발기하고, 윤덕병尹德炳, 김병희金炳僖, 이재성李載誠, 이승복李昇馥, 조규수趙奎洙, 이준태李泰準, 강상조姜相照, 홍덕유洪悳裕, 원우관元友觀, 박돈서朴敦緖, 김찬金燦, 김홍작金鴻爵, 김재봉金在鳳, 권오설權五卨, 안기성安基成, 이봉수李鳳洙, 김경재金璟載 등이 신사상을 연구하려는 목적에서 조직했습니다. 일종의 학술연구단체로 강습과 토론회를 실시하고 이론서적 및 잡지를 간행할 것을 당면사업으로 내세웠지만, 신사상연구회가 코민테른Comintern의 한국 내 지부로 비밀리에 결성된 꼬르뷰로국高麗局의 단체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1924년 11월 19일 신사상연구회 간부회는 명칭을 화요회로 개칭하고 종전의 연구단체에서 행동단체로 전환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화요회라는 명칭은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유래했습니다. 화요회는 1925년 4월 27일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김찬, 김재봉, 윤덕병, 홍덕유 등 화요회 회원들이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김재봉은 제1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으며, 김찬은 화요회와 조선공산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무산자동맹회, 북풍회, 화요회, 조선노동당, 서울청년회 좌파 등이 경쟁적으로 자파세력의 확충에 힘쓰게 됨으로써 무원칙한 분파투쟁을 초래하는 폐단도 나타났는데, 민족주의자들이 이미 조직한 각종 기성단체에 침투하여, 내용상 같은 단체들을 장악하는 분할공작과 사상·노농勞農·청년·부녀·형평衡平 등의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는 경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1923년 6월 서울에 코민테른이 설치되어 꼬르뷰로국국내부高麗局國內部라 했습니다. 이 기관의 책임비서는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코르뷰로에서 한국내 공산당결성의 밀명을 받고 서울에 잠입한 김재봉으로, 그는 김약수, 유진희 등이 포함된 17명이 서울에서 결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습니다. 당 책임비서에는 김재봉이 임명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전에 해외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상해공산청년회 비서였던 박헌영朴憲永(1900~55년)이 임명되었습니다.
임원근, 김단야, 최창식 등과 함께 김만겸金萬謙의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한 박헌영은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공산주의 선전물을 번역하는 일에 열중했으며,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에 취임했습니다. 1921년 늦가을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키 위해 모스크바로 가, 다음해 1월 고려공산청년동맹 대표로 참가했습니다. 1922년 4월에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해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년 6월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했습니다. 1924년 1월 만기출옥한 직후 그 해 2월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김찬, 신철 등과 청주, 대구 등 전국 28개 도시를 순회하며 ‘청년의 사회적 지위’, ‘식민지청년운동’ 등의 주제로 강연했으며, 기관지 <신흥청년>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4월에는 허헌許憲이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습니다.
1925년에는 국내의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기 위하여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한 핵심분파로 박헌영이 속해 있던 화요회가 중심이 되어 4월 20일에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4월 15일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여 일본경찰의 관심을 흩어놓고, 4월 17일 김약수, 김재봉, 윤덕병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마침내 국내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박헌영은 1925년 4월 18일 자기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고 책임비서직을 맡아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나, 그 해 11월 30일 주세죽, 김재봉과 함께 공산당 조직 확대와 고려공산청년회원 모스크바 파견 훈련을 적극 진행하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그 계획이 탄로되어 일제 경찰에 일망타진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입니다. 그는 공판 도중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 다음해인 1928년 11월 국내에서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마침내 국내 공산주의운동은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들어갔고, 조선공산당을 1국 1당 원칙의 코민테른 한국지부로 승인했습니다. 1925년 12월 서울에서 제2차로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조직되었는데, 당 책임비서에는 강달영,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이 각각 선출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화요회의 요인이며 제1차 조선공산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은 사실상 제1차 당 및 공산청년회의 후속조직이었습니다. 강달영의 정치적 목표는 좌우연합의 국민적 당을 조직하여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강달영이 민족진영의 천도교 중진들과 접촉한 것은 곧 민족적 기반의 좌우연합당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1926년 6·10 만세운동을 통해 3·1 운동을 재현하려던 강달영의 계획이 거사 직전에 탄로되어 일망타진됨에 따라 좌우연합당은 실현되지 못하고 제2차 조선공산당은 궤멸되었습니다.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 합니다.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은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에 찬동한 좌익단체들이 민족진영에 협동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제2차 조선공산당 간부로서 검거를 모면했던 김철수는 과거 화요회와 대립 관계에 있던 동경의 좌경 유학생 단체인 일월회一月會 간부였던 안광천, 하필원 등과 함께 북풍회 계통의 ML파 공산당과 합세하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이를 세칭 ML파 공산당이라 합니다. 코민테른은 ML파 공산당에 대하여 당 조직 운영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내렸는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ML파 공산당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당 책임비서를 김철수, 안광천, 김준연, 김세연 등으로 자주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년 2월에 검거되고 말았습니다. 36명이 종로서에 검거되었습니다. ML파 공산당의 고려공산청년회도 당과 같은 이유로 책임비서로는 양명, 하필원, 김철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당과 함께 검거되었습니다. 이것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 합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 등이 서울 춘경원春景園에서 ML파 공산당의 정통성을 탈취하기 위해 ML파 공산당과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했지만,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1928년 4월과 6월에 일제 경찰에 일망타진되고 말았습여 당 재건을 기도하던 중 그 해 12월 정우회선언의 안광천 일파와 제휴하여 제3니다.
1928년 3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 때 검거되지 않은 안광천, 한위건 등이 서울 시립 한 북한의 북조선노동당으로 양립했으나 남조선노동당은 모두 숙청, 체포되었습니다. 미군정의 공산당 간부 체포령으로 박헌영은 월북하고, 조선공산당은 남한지역의 남조선노동당과 김일성이 창내에 숨어 있다가 서울계의 신파 및 상해파 등과 연합하여 제4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이 당의 책임비서로는 조선공산당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 출신의 차금봉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는 고광수가 선임되었습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학생과학연구회를 간판으로 내걸고 서울의 각 중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동맹휴학, 시위행진 등을 감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추적은 혹심하여 그 해 7월 차금봉을 포함하여 당 간부들이 거의 체포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대부분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실패했고, 1945년 8·15광복을 맞아, 8월 20일 서울에서 숨어 지내던 박헌영을 중심으로 여운형, 허헌, 김원봉, 한빈, 이주하 등이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습니다. 부활한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 및 남조선신민당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 결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