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야트족Burjat의 성무의례

 

부르야트족의 성무의례가 가장 복잡합니다.
처음으로 접신을 체험(접신몽, 환상, 영신들과의 대화 등)한 뒤에 입문자는 독거하면서 자신을 무당으로 세울 준비를 합니다.
이 동안에 입문자는 늙은 스승 무당, 특히 ‘신 아버지’로 불리는, 장차 자기 입문의례의 집행자가 될 무당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또한 그는 굿을 하기도 하고 신들이나 영신들을 부르기도 하며 무업의 비의를 배우기도 합니다.
부르야트족의 경우에도 무당 후보자는 공개행사에서 자기의 무력을 선보인 다음 비의의 계시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스승으로부터 직접 성별을 받습니다.

성별의 날짜가 정해지면 재계의식齋戒儀式(purification ceremony)이 치러집니다.
이 재계의식은 이론상 세 번에서 아홉 번 치러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두 번만 치러집니다.
‘신 아버지’와, ‘신 아들’로 불리는 젊은이 아홉이 3개의 우물에서 물을 긷고는, 우물의 영신들에게 타라순tarasun(보드카)을 제주祭酒로 바칩니다.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어린 자작나무를 뽑아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집으로 돌아온 이들은 물을 끓이되, 이 물을 정화하기 위해 야생 백리향과 노간주나무와 소나무 껍질 그리고 숫염소의 귀에서 잘라낸 털 몇 올을 솥에다 넣고 끓입니다.
이어서 이들은 이 숫염소를 잡아 피 몇 방울을 솥에다 떨어뜨리고는, 고기는 여자들에게 내주어 요리하게 합니다.
‘신 아버지’는 양의 견갑골로 점을 친 뒤, 후보자의 조상 무당들을 불러 타라순을 바칩니다.
헌주가 끝나면 ‘신 아버지’는 자작나무 잔가지로 만든 빗자루를 솥에다 담그고 후보자의 맨등에다 손을 올립니다.
‘신 아들들’이 이런 의례적인 동작을 반복하는 동안 ‘신 아버지’는 무당 후보자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너의 도움을 바라거든 도움을 베풀되 사례는 적게 청하고, 주는 것을 받는 데 만족해라. 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되 이들을 악령으로부터 지켜주시도록 이들을 보호해주시도록 신께 빌어라. 부자가 너를 부르는 일이 있으면 이들을 도와주되 너무 많은 사례를 요구하지 말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동시에 너를 부르거든 가난한 사람을 먼저 찾아본 연후에 부자를 찾아보도록 해라.”

무당 후보자는 이 말에 따를 것을 서약하고 스승이 선창하는 기도문을 되받아 읊습니다.
재계齋戒에 이어 수호영신들에 대한 신주神酒 타라순의 헌작獻爵(술잔을 올림)이 있으면 이 준비 제의는 끝납니다.
물에 의한 이런 재계는 매월 초승달이 뜰 때마다 한 번씩 해야 합니다.
형편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도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치러야 합니다.
이에 덧붙여 무당은 부정을 탔다고 여겨질 때마다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재계해야 합니다.
그 부정의 정도가 심한 때는 재계하되 피로써 해야 합니다.

이 입문의식을 치른 뒤에는 최초의 성별의식이 있습니다.
이 의식에 드는 경비는 공동체가 분담합니다.
준비과정에서 무당과 무당의 보조자들인 ‘신 아들들’은 제물을 걷습니다.
말을 타고 마을들을 다니면서 제물을 걷습니다.
이들이 제물로 걷는 것은 머릿수건이나 댕기일 경우가 보통이나 돈을 제물로 걷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습니다.
나무잔, 마장용馬杖(horse stick)用 방울, 비단, 술 등 필요한 물건을 걷습니다.
러시아 발라간스크 지역의 경우 무당 후보자와 ‘신 아버지’ 그리고 이 신 아버지의 아홉 ‘신 아들들’은 천막으로 들어가 아흐레 동안 금식합니다.
금식기간 동안 이들은 차와 밀가루죽밖에 입에 대지 않습니다.
천막 주위로는 말총을 꼬아 만든 금줄이 세 겹으로 내걸립니다.
이 금줄에는 동물의 생가죽이 꿰어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입문의례를 여러 차례 치른 것으로 전해집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입문의례는 첫 번째 입문의례를 치른 지 각각 3년 그리고 6년 뒤에 베풀어집니다.
이런 무속의 제의에서 자작나무는 우주수宇宙樹 혹은 세계의 축軸, 따라서 세계의 중심을 점유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유형이 다른 입문의례에서도 나무나 기둥에 오르는 절차는 대단히 중요한 몫을 하며, 이런 절차는 천계상승이라는 신화적, 제의적 테마의 변형입니다.
이와 같은 상승의 상징체계는 자작나무를 연결하고 여러 가지 색깔의 댕기(무지개의 색층, 서로 다른 천상계 지역들)가 걸린 끈(다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베리아 지역과 알타이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이런 신화적 테마와 제의는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도 나타나므로 이 지역 문화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부르야트족의 입문의례에는 미트라교Mithra(페르시아 신화에서 미트라는 빛, 진리의 신이었으며, 후에 태양신이 되었습니다.
미트라교는 미트라를 숭배하는 종교로 기원전 3세기에 페르시아에서 생겨나 소아시아, 로마제국 등지에서 성행)의 비의를 연상시키는 요소가 있습니다.
부르야트족의 입문의례에서 무당 후보자는 염소의 피로써 재계를 받는데, 이 염소가 바로 이 무당 후보자의 머리 위에서 도살되는 수도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무당 후보자가 희생된 짐승의 피를 마시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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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야트족의 무복


부르야트족 여무女巫는 끝에 말머리가 새겨져 있고 방울로 테를 두른 지팡이 두 개를 가지고 다닙니다.
어깨에는 검은색과 흰색 가죽으로 만든 서른 마리의 뱀이 땅에 닿을 듯이 늘어져 있습니다.
여무女巫의 모자에는 쇠로 만든 세 개의 투구 뿔이 솟아 있는데, 그 모양은 사슴의 뿔과 비슷합니다.
부르야트족 무당에게는 다음의 것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모피가 있어야 합니다.
선한 영신들을 몸주主(몸에 처음 내린 신으로 무당은 그 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심)로 섬기는 ‘백’ 무당에게는 흰 모피, 악령을 몸주로 섬기는 무당에게는 검은 모피가 있어야 합니다.
이 모피에는 말, 새 등의 동물 모양을 본뜬 많은 쇠붙이 장식이 꿰매져 있습니다.
둘째, 살쾡이 모양의 모자도 있어야 합니다.
입문의식入門儀式을 치른 지 며칠 뒤에 있게 되는 다섯 번째의 재계의식이 끝나면 무당은 쇠로 된 두 개의 투구 뿔을 받아 모자에 꽂습니다.
꼬부라진 두 개의 투구 뿔은 두 개의 뿔을 상징합니다.
셋째, 나무나 쇠로 된 마장馬杖(horse stick)도 있어야 합니다.
나무로 된 마장은 첫 번째 통과의례를 치른 날 밤에 준비되는데, 이 마장을 준비한 사람들은 이 마장을 잘라낸 자작나무가 죽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쇠로 된 마장은 다섯 번째 통과의례를 치른 다음에야 받게 되며, 이 마장의 한쪽 끝에는 말머리가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많은 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머리 위로 솟는 둥근 부분에 많은 쇠테가 감긴 쇠모자에 두 개의 뿔을 만들어 세웁니다.
뿔 뒤에는 고리가 아홉 개인 쇠사슬이 있습니다.
아래쪽으로 맨 끝에는 창날 같은 쇠붙이가 매달리는데, 이 쇠붙이는 등뼈nigurasun(척추골이란 뜻이다)라고 불립니다.
이 모자의 양쪽, 그러니까 관자놀이와 만나는 부분에는 하나의 쇠고리와 길이가 4.445cm(1베르쇼크)인 세 개의 쇠막대기가 매달려 있습니다.
주조과정에서 서로 꼬이게 만들어진 이 장식물은 쿠올부가스qolbugas(짝으로 혹은 쌍으로 결합하다로 띠, 매듭, 유대라는 뜻)로 불립니다.
사냥 동물과 가축의 색깔과 같은, 색색의 비단, 무명, 모직, 벨벳을 꼬아서 만든 뱀 모양의 타래를 모자 양옆과 뒤에 늘어뜨립니다.
그러고는 쾨뤼네körüne, 다람쥐, 노란 족제비 털 색깔의 무명천 조각도 여기에 늘어뜨립니다.
이 머리장식은 덮개maiqabci로 불립니다.

폭 30cm 정도 되는 무명천 조각을 옷깃에 붙입니다.
이 천 조각에는 갖가지 뱀 모양과 사냥 동물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이것이 날개dalabci 혹은 지느러미ziber입니다.

길이가 2.4m 정도 되는 두 개의 목발 모양의 장대의 거칠게 다듬어진 위쪽은 말머리 모양으로 깎입니다.
말馬의 목에 해당되는 부분에 세 개의 쿠올부가스가 달린 쇠고리가 꿰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말갈기라고 부릅니다.
장대 아래쪽에도 비슷한 쿠올부가스 고리가 달립니다.
이것은 말꼬리입니다.
이 나무의 앞면에도 쿠올부가스 고리 하나와, 조그맣게 축소하여 쇠로 만든 등자, 창, 칼, 도끼, 철퇴, 배, 노, 작살 같은 것들이 박힙니다.
이 아래로는 또 세 개의 쿠올부가스 고리가 붙습니다.
이 네 개의 쿠올부가스 고리는 말의 다리로 불립니다.
이 두 개의 장대는 소르비sorbi라고 합니다.

수콰이suqai라고 불리는 채찍도 만들어집니다.
여느 채찍 위에다 사향-들쥐 가죽으로 여덟 겹 싸고 세 개의 쿠올부가스가 달린 쇠고리를 끼운 뒤, 축소 모형으로 만든 철퇴, 칼, 창, 뾰족뾰족한 돌기가 있는 몽둥이를 달고 무명과 비단 끈으로 묶은 채찍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살아 있는 것’을 다스리는 채찍이라고 부릅니다.
무당인 뵈게böge는 굿을 할 때마다 하나의 소르비와 이 채찍을 손에 듭니다.
천막 안에서 굿을 할 때는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을 쓰기도 합니다.

특기할 점은 부르야트족 무당이 말馬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이는 중앙 그리고 북아시아 샤머니즘의 특징입니다.
이들이 말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말이 무당의 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풍습은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올혼스크Olkhonsk 지역의 부르야트족에게는 앞에 언급한 무구巫具 외에도 무고巫鼓, 마장馬杖(horse stick), 모피毛皮, 방울 등의 주물呪物을 넣는 상자가 있습니다.
이 상자에는 해와 달 그림이 장식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부르야트족 무당에게는 무구가 두 가지 더 있는데, 가죽이나 나무 혹은 쇠로 만들고 그 위에다 수염을 잔뜩 그려 넣은 무시무시한 가면인 아바갈데이abagaldei와 열두 가지 동물 모양이 그려진 금속제 거울인 톨리toli가 그것입니다.
무당은 톨리를 가슴이나 등에 매달고 다니거나 카프탄caftan(터키인이 입는 셔츠 모양의 기다란 상의)에 붙여 가지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무구는 사용되지 않은 지 오래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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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의 무속巫俗




고구려의 무당은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된 원인을 말하고, 뱃속의 아이를 점치고,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에 대해 말하고, 사람과 귀신鬼神이 자기에게 내렸다고 말하며, 시조始祖 왕王의 사당祠堂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후세의 무속에 보이는 굿, 저주詛呪, 복서卜筮, 공창空唱, 신탁神託, 치료治療, 위호衛護 등의 원류입니다.
굿을 한자漢字로 표현한 것이 새신賽神입니다.
복서卜筮는 길흉을 알기 위해 치는 점을 말합니다.
공창空唱은 무당이 입을 벌리지 않아도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게 하는 술법을 말하는데 일종의 복화술複話術입니다.
치료治療란 조선시대 의료를 맡아본 관아 활인원活人院에서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위호衛護는 무당의 집에서 조상의 혼령을 모시는 풍습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조상을 모신 신묘神廟와 같습니다.

사무師巫라는 것은 주周나라의 태사太師가 국가를 위해 길흉吉凶을 점쳤다거나, 혹은 만주의 살만薩滿이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한 것과 같습니다.
무당을 사무라 한 표현은 중국의 경우 송대宋代 이후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종백宗伯에 따르면 악공樂工의 우두머리가 태사太師이며, 출정 때 군사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승패를 예측했습니다.
살만薩滿은 퉁구스족Tungus 언어 샤먼shaman의 한자 표기입니다.
사무는 왕에게 덕을 닦아 재앙을 물리칠 것을 권했습니다.
사무는 당시에 왕의 사표師表가 되었습니다.
현명한 신하나 좋은 관리(현신양좌賢臣良佐)가 재이災異(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에 관해 논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재이가 있으면 반드시 사무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 제2대 왕 유리왕琉璃王(기원전 19-기원후 18년 재위) 19년(기원후 3년) 가을 8월, 하늘에 제사할 때 바치는 돼지가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돼지를 숭배했습니다.
유리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로 하여금 뒤쫓게 하니 장옥택長屋澤 가운데에 이르러 이를 잡아 칼로 돼지 다리의 힘줄을 끊었습니다.
장옥택長屋澤은 고구려의 지명地名으로 추측되나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유리왕이 듣고 노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희생을 어찌 해칠 수 있는가” 하고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묻어 죽였습니다.
9월에 왕이 병들자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병의 빌미가 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이 무당을 시켜 사과하니 병이 곧 나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7대왕 차대왕次大王(146-165년재위) 3년(148년) 가을 7월에 왕이 평유원平儒原에서 사냥을 했는데, 흰 여우가 뒤를 따라오면서 울었습니다.
평유원平儒原은 고구려의 지명으로 추측되나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왕이 흰 여우를 쏘았으나 맞지 않았습니다.
사무師巫에게 물으니 “여우라는 것은 요사한 짐승으로 상서로운 조짐은 아닙니다. 하물며 그 색이 흰색이니 더욱 괴이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거듭거듭 일러 친절하게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요괴함을 보여서 임금님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이를 계기로 반성해서 스스로 새롭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께서 덕을 닦는다면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흉하면 흉하고, 길하면 길할 뿐이거늘 너는 먼저는 요망하다 해놓고 또 복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이 어찌 거짓말이 아니냐” 하고 마침내 그를 죽였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10대 왕 산상왕山上王(197-226년 재위) 13년(209년)에 왕자 교체郊彘의 어머니(주통촌酒桶村의 여자)를 세워 소후小后로 삼았습니다.
교체郊彘는 산상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11대 왕이 된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산상왕 12년(208년) 제천용 돼지가 달아나 주통촌에 이르러 어떤 여인을 보고 멈추자 산상왕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이 여인을 만났고, 그래서 동천왕을 낳았다고 합니다.
교체郊彘는 하늘에 제사할 때 바치는 돼지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11대 왕 동천왕東川王(227-248년 재위) 8년 9월에 태후太后 우씨于氏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씨于氏는 원래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부인이었으나 고국천왕 사후 시동생인 산상왕山上王과 재혼했습니다.
우씨于氏가 임종하면서 유언하기를 “첩은 행실(절개)을 잃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태후의 전 남편인 국양왕國壤王이다. 국양왕이란 제9대 왕인 고국천왕을 가리킨다)을 만나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나를 차마 구렁텅이에 버리지 못한다면 청컨대 산상왕의 능陵 곁에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우씨于氏의 유언대로 묻었더니 무당이 말했습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 말씀하시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그와 함께 싸웠는데, 물러나 생각하니 너무나 부끄러워 나라 사람들을 차마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리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의 사후 시동생과 재혼하는 취수혼娶嫂婚은 고구려의 일반 혼인 풍속이었으므로 우씨의 재혼이 당시로서는 비윤리적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취수혼의 경우 죽은 뒤 원래의 남편 곁에 묻혀야 하는데, 우씨가 이를 어긴 것입니다.
따라서 무당의 말은 고국천왕을 빌어 우씨의 처사를 비난한 것입니다.
이에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28대 왕 보장왕寶藏王(642-668년 재위) 4년(645년) 5월에 당唐나라 장군 이세적李世勣이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기를 12일 동안이나 계속했습니다.
고구려는 보장왕 때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이세적李世勣(594-669)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요동성遼東城은 지금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에 있던 성입니다.
당唐나라 제2대 황제 태종太宗이 정예병을 이끌고 합세해 요동성을 수백 겹으로 에워싸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요동성에는 주몽사가 있었고 그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예리한 창이 있었는데,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전연前燕(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운 국가) 때에 하늘에서 내려보내온 것이라 했습니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박하게 되자 미녀를 꾸며 신의 부인으로 삼았는데,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께서 기뻐했으므로 성은 반드시 안전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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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의 무속巫俗




백제 무속의 역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여, 마지막 왕의 마지막 해에 무당이 거북의 예언을 해독한 기록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백제는 부여, 고구려에서 나온 나라였으므로 백제의 무속이 고구려와 같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무당이 여우의 변괴를 설명한 것이 있고, 백제에는 무당이 거북의 예언을 해석한 것이 있어 이런 것들이 동일한 계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후주서後周書』에 따르면 “백제에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술術을 이해한다”고 했으므로 예언을 해석한 무당이 날의 길흉을 점치는 사람, 즉 일자日者였을 것입니다.
『후주서後周書』를 『주서周書』 혹은 『북주서北周書』라고 하는데, 서위西魏, 북주北周 왕조(535-581)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 정사로 636년 당唐나라 영호덕분令狐德棻 등이 편찬했습니다.
일자日者란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의 의미를 해독하고, 그 대처방안을 제시한 관리를 일컫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 따르면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기원전 18-기원후 28년 재위) 25년(기원후 7년) 2월 왕궁의 우물물이 넘쳐흐르고, 한성漢城의 인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이었다. 일자日者가 말하기를 “우물물이 넘쳐흐른 것은 대왕께서 발흥할 징조이며, 소가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나라를 병합할 조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마辰馬(진한辰韓과 마한馬韓)를 병탄倂呑할 마음을 가졌다고 했는데, 이곳에서 일자日者라고 한 것도 무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제시대에서도 무풍巫風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 제31대 왕 의자왕義慈王(641-660년 재위) 20년(660년) 6월, 한 귀신이 궁중에 들어와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의자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들을 시켜 땅을 파게 하니 깊이 3자쯤 되는 곳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거북의 등에는 “백제는 보름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는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왕이 이를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보름달과 같다는 것은 찼다는 의미로 차면은 기울어질 것이고,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것이니 차지 않은 것은 점차 찰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노하여 그를 죽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보름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한 것이요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미미한 것이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성할 것이고 신라는 점점 미약해진다는 뜻일 겁입니다” 하니 왕이 기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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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의 무속巫俗




신라 말로는 무당巫堂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했습니다.
웅雄을 가리켜 무당이라 한 것은 신시神市의 환웅桓雄에서 시작된 것으로 환웅의 신시란 곧 고대 무축巫祝을 말합니다.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한 까닭에 단군檀君이라 했으니, 단군은 곧 신권찬자神權天子입니다.
단군檀君은 환웅의 아들로 기원전 2333년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했습니다.
신라인은 차차웅이 제사를 받들고 귀신을 섬기는 까닭에 이를 두려워하고 공경했으며, 마침내 웃어른을 차차웅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유어는 삼한三韓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무당을 차차웅이라 한 것은 그 말이 환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환桓과 한寒은 음音이 서로 가깝고 한寒의 훈訓은 차次입니다.
또 신라의 고유어를 한자漢字로 표기할 일이 있으면 훈訓으로 하거나 음音으로 했습니다.
예를 들면 서연산西鳶山을 서술산西述山이라고 한 것입니다.
경주의 서쪽 구간에 있는 서술산西述山은 선도산仙桃山으로도 불리는데, 선도산신仙桃山神 사소娑蘇는 소리개의 안내로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었으며, 그래서 소리개 연鳶을 써서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습니다.
선도산에 사는 지선地仙 사소娑蘇는 중구구왕실의 공주였습니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않아, 그녀의 부친이 솔개를 통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녀는 이 솔개의 인도로 선도산에 살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고유어에 연鳶을 가리켜서 술術이라 했으므로 연과 술은 서로 통용됩니다.
연의 훈인 소리개와 술의 음인 술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차차웅은 환웅을 말합니다.
신라 제2대 왕 남해차웅南解次次雄(?-24, 4-24년 재위)은 단지 무당이라는 칭호만 빌렸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제사를 주관하고 신을 섬기는 자였으므로 그 또한 한 사람의 단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라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기원전 57-기원후 3년 재위)는 진한辰韓 육부인六部人의 추대를 받아 거서간居西干(진한의 말로 왕王)이 되었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오로지 마한馬韓 사람만 삼한三韓 전체의 왕王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박혁거세는 반드시 마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한의 여러 국읍國邑들은 각기 한 사람으로 하여금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했고, 이를 천군天君이라 했다고 하니 박혁거세도 곧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던 천군이라 하겠고, 천신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은 곧 차차웅(巫堂)입니다.
남해차차웅은 그의 친누이인 아로阿老로 시조묘始祖廟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대개 신라의 풍속에서는 무당이 제사를 숭상하고 귀신을 섬겼습니다.
따라서 아로 또한 무당임이 분명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차차웅次次雄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말하기를 ‘차차웅이란 신라 고유어로 무당을 이른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웃어른을 자충이라 했다’고 했다.

김대문金大問은 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로 『화랑세기花郞世記』, 『고승전高僧傳』 등을 저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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