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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그룹을 제외하면 존 러스킨이 당시 유일하게 독창적인 영국의 사상가라고 말했다.
영국의 비평가, 미술 이론가 러스킨은 예술가를 영감 받은 예언자와 교사로 보고 예술의 위대함은 신이 만든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딕 양식의 부활을 주창했지만, 장식에 있어서는 전통을 거부했다.
그는 예술과 건축은 신이 창조한 인간의 경이로움과 기쁨을 반영해야 한다고 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영감을 받은 자연주의적인 형식이 요구되며 고딕이야말로 진정 적합하다고 했다.
그는 장식을 신의 계시를 받은 경이로움을 관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았으며, 자연 형태의 재현에 기초를 두었고 장식의 표현 가치에 대하여 매우 개인적인 기준을 도입했다.
그가 고딕을 극찬한 것은 각 개체의 미묘한 특징을 명확하게 하는 우아하고 풍부한 구성을 지닌 고딕 디자인의 특징 때문이었다.

러스킨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위한 미의 숭배가 예술을 위한 예술의 옹호자들과 관련을 맺었지만, 그의 인생 후반기의 경제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의문의 증대와 사회 개혁에 관한 강한 관심은 그가 사회적인 도덕성의 문제와 분리된 예술의 자립에 관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예술을 노동자들의 일상생활과 연결하는 그의 사고는 윌리엄 모리스의 관점과 관련이 있다.
예술을 ‘국민적 미덕의 가시적 신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예술의 도덕적 기능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는 때로 미학과 비평에서 ‘도덕적 오류’의 명백한 예로 간주되어 왔다.
러스킨은 완강하고 근시안적으로 오래된 장인 정신을 대신하는 산업혁명의 효과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무언가를 보는 것이고 또 본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하여 예술의 본질적 목적이 진실에 대한 사랑임을 적극적으로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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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라파엘전파를 주도한 인물은 화가로서 활약하기보다는 시인으로 각광을 받은 로제티였다.
그는 기관지를 발행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래서 <기원 The Germ>이 탄생했다.
<기원>은 그 자체로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자의식이 강한 전위미술가들 그룹의 첫 번째 정기간행물이란 점에서 그리고 뒤를 이어서 출현한 이런 종류의 간행물들의 일반적 본보기, 즉 초반의 엄청난 열의, 훌륭한 기사거리의 부족, 인쇄업자들과의 갈등, 판매부진, 단명 등과 같은 선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회화가 주요업무가 아니었던 울너, 스티븐스,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는 기관지에 대한 로제티의 취지를 후원했다.
기관지는 구성원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매체이자 아카데미와 같이 기존에 설립된 체제에 내재하는 제약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는 매체였다.
울너의 친구로서 유능하지만 거의 무명이었던 시인 코번트리 팻모어Coventry Patmore(1823-96)가 여기에 동참했고, 그 밖에도 크리스티나 로제티, 포드 매독스 브라운, 윌리엄 벨 스콧William Bell Scott(1811-90), 월터 하우얼 데버럴Walter Howell Deverell(1827-54), 윌리엄 케이브 토머스William Cave Thomas(1820-84) 등이 참여했다.
로제티의 친구 벨 스콧은 1846년부터 1863년까지 뉴캐슬Newcastle의 공립미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라파엘전파의 구성원들은 65개나 되는 기관지 명칭을 목록으로 만들고 그것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기원’을 선택했다.


팻모어는 1854년에 장편시 <집안의 천사 The Angel in the House>를 출간했는데,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1819-1901)이 통치(1837-1901)하던 영국 역사상 가장 번영의 시기에 여성에 대한 당대의 보편적인 개념을 정의한 것으로 희생적이고 가정적인 여성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꼽았다.
팻모어는 시에서 가정은 최고의 안식처요, 여성은 가정을 편안한 휴식처로 만드는 존재이며, 또한 여성은 지상에 내려온 천상의 안내자로 묘사했다.
‘집안의 천사’라는 용어는 당대에는 인기가 높았으나 그 뒤 수동적이고 나약한 여성이란 부정적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빅토리아 시대의 경직되고 가부장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비판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국의 중요한 여류시인들 가운데 하나인 크리스티나 조지나 로제티Christina Georgina Rossetti(1830-94)는 오빠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스케치에서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지만 매력적이다.
그녀는 콜린스의 약혼녀였으나 콜린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종교적 갈등으로 파혼했다.
평생 독신으로 산 크리스티나는 때때로 세속적인 열정의 요구와 거룩한 신앙 사이에 붙잡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는데, 이런 분열이 크리스티나의 시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그녀는 자연으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받는 ‘종교적 광인’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그녀가 1862년에 발표한 <도깨비 시장 Goblin Market>과 그 밖의 시들은 라파엘전파의 첫 번째 문학적 성공으로 기록되었다.
크리스티나는 1872년 오빠 로제티의 건강악화로 인한 신경질적이고 격정적인 성격에 의해 물리적 고통을 받았고, 1882년 오빠가 타계한 뒤 그녀의 인생 마지막 12년은 평온한 삶이었다.


<기원>의 창간호는 1850년 1월에 발행되었고, 표지에 헌트의 에칭작품과 기관지 발행이 의도하는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던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의 모호하고 나약한 시가 실렸다.
제2호는 다음 달에 발행되었으며 로제티의 시 <은총 받은 처녀 The Blessed Damozel>가 실린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기원>은 판매가 부진하여 <미술과 시 Art and Poetry>라는 새로운 명칭과 <자연에 대한 사고 Being Thoughts towards Nature>라는 부제가 붙은 제4호 이후에는 계속 발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기관지의 보급이 한정되었지만 기관지를 발행하는 일은 라파엘전파의 활동영역을 확장시켜주고, 로제티가 시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한 곳이라는 의미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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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뛰어난 독창적 사상가이며 미술평론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은 라파엘전파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해준 일종의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라파엘전파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다.
러스킨은 해설자라기보다는 동지로서 라파엘전파에 결속되었는데, 그의 생애 대부분이 라파엘전파의 운명과 함께 뒤얽혀 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과 같은 해인 1819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셰리주酒Sherry의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엄격한 칼뱅주의에 기반을 둔 복음교회파 신도였다.
그의 가족은 런던 근교의 헌 힐Herne Hill에 있는 안락하고 커다란 저택에서 살았으며, 근처 덜리치 대학Dulwich College에는 당대에 흔치 않던 일반인을 위한 갤러리가 있었다.
러스킨은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았지만 부모와 여러 명의 개인교사들에 의해 강도 높고,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독특한 교육을 받았다.
그에게 완고한 도덕성을 처음 고취시킨 것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모의 엄격한 종교였다.
개인교사를 통해 러스킨은 킹 제임스 영역 성경King James Bible을 공부했다.
빅토리아 시대 대부분의 부유층 자녀들이 그랬듯이 그도 어린 시절부터 회화를 익혔고 당시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화가 알렉산더 러시먼Alexander Runciman(1736-85), 잉글랜드의 화가 앤토니 반다이크 코플리 필딩Antony Vandyke Copley Fielding(1787-1855), 복음주의자이면서 잉글랜드의 화가, 사진작가 제임스 더필드 하딩James Duffield Harding(1798-1863)에게서 전통 스케치를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인 러스킨은 회화에서도 재능을 나타냈다.
재능은 열여섯 살 때에 그린 드로잉 <옥스퍼드의 성 메리 교회와 올 소울스 대학 St. Mary's and All Souls, Oxford>(1835)에서 발견된다.
허물어져 가는 석조건축의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부드러운 연필의 단속적인 선에서 그리고 대학과 성 메리 교회의 중세적인 형태와 세속적인 세부를 혼합하는 방식에서 그가 회화의 건축적 양식에 숙달했음을 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화가가 되기를 포기했다.


러스킨의 정신이 형성된 과정은 복잡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숭배하던 세 영웅에게서 중요한 영향을 이끌어낼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Edinburgh 출신의 역사소설가, 시인 월터 스콧Walter Scott(1771-1832)에게서 낭만적 중세주의를, 잉글랜드 북부 컴벌랜드의 코커머스 출신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1770-1850)로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에 담긴 의미에 대한 신념을 배웠다.
프랑스와 알프스 지방을 도보로 여행한 워즈워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러스킨은 알프스 산을 워즈워스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고, 산에 대한 시를 썼다. 알프스 산은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러스킨은 낭만주의 풍경화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그가 터너의 작품에 집요하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30년대 후반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할 때부터였다.
당시 사람들이 터너가 미쳤고 말년의 작품들은 자연에 대해 충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분개하여 그는 터너를 옹호하는 책을 쓰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설득해 터너의 후원자로 만들었다.
아버지가 구입한 터너의 많은 수채화와 로저스Rogers의 <이탈리아 Italy>에 실린 터너의 삽화는 러스킨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러스킨은 터너에게서 도상과 재현에 대한 열정, 그리고 회화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열정을 배웠다.
그가 터너를 처음 만난 건 1840년이었으며 그 뒤 두 사람은 특이한 우정관계를 지속해갔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843년에 터너를 변호하기 위해 <근대 화가론 Modern Painters>(5권)의 제1권을 익명으로 발표하여 예술미의 순수감상을 주장하고 예술의 기초가 민족 및 개인의 성실성과 도의에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시각적 인상을 이와 반대되는 개념적 지식보다 우위에 놓고 훈련된 감수성에 바탕을 둔 관찰을 중시했다.
제3권과 제4권을 1856-57년에, 제5권을 1860년에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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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매독스 브라운Ford Madox Brown(1821-93)>





포드 매독스 브라운Ford Madox Brown(1821-93)은 존 러스킨과 마찬가지로 라파엘전파의 구성원들보다 조금 앞선 세대에 속한다.
라파엘전파 회화에서 표현된 원리들의 초기 전개가 그의 작품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대체로 개인적이었으며 스스로의 회화를 자신이 발견해나갔다.
영국과 유럽 대륙을 이어주는 도버Dover 해협에 면한 프랑스 항구도시 칼레Calais에서 여객선 사무장의 아들로 태어난 브라운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유럽 대륙에서 보냈다.
브뤼헤Bruges와 헨트Gent에서 다비드의 제자로 벨기에 화가 알베르트 그레고리우스Albert Gregorius(1774-1853)에게서 회화를 배우고, 그 뒤 벨기에의 역사화와 장르 화가 바론 바페르스Baron Wappers(1803-74)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1837년 안트베르펜의 로열 아카데미Royal Academy(1663년에 설립)로 향했다.
1839년과 1840년에 그가 안트베르펜과 파리에 있으면서 가졌던 고국에 대한 감정은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처형 The Excution of Mary Queen of Scots>과 <융프라우에 있는 맨프레드 Manfred on the Jungfrau>에 표현되어 있다.
후자의 주제는 자유분방하며 유려한 정열의 시를 써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은 영국 낭만파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1788-1824)의 작품에서 가져온 것이다.


브라운은 1844년에 결혼하여 딸을 얻고, 이듬해 영국에 정착한 뒤 라파엘전파 구성원들과 가깝게 지냈지만 그룹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브라운의 딸 에마 루시는 훗날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와 결혼했다.
브라운은 낭만주의 역사화의 전통을 좇아 그리면서 색을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여러 차례의 유럽 대륙 여행, 특히 이탈리아 여행이 그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로마에서 나자렛파Nazarense 구성원들을 만났는데, 요한 프리드리히 오베르베크Johann Friedrich Overbeck(1789-1869), 프란츠 포르Franz Pforr(1788-1812), 페터 폰 코르넬리우스Peter von Cornelius(1783-1867), 빌헬름 폰 샤도Wilhelm von Schadow(1788-1862)가 이끌던 독일 화가들의 그룹으로 그들은 국외로 추방당했다.
중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1809년 빈에서 가톨릭 계율을 지키는 교단적 그룹을 결성한 그들에게는 종교적, 문화적 의고주의Archaism를 이용하여 독일의 고유한 화화를 정화시키는 목적이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1471-1528), 페루지노Perugino(1450-1523), 산치오 라파엘로Sanzio Raffaello(1483-1520) 등은 나자렛파가 추구한 새로운 미술의 표본이 되었다.
나자렛 출신의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 나자렛파는 중세 화가들의 길드 ‘루가 형제단 Lukasbund’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룬 구성원들에게 붙여진 비웃음이 섞인 별칭이었다.
오베르베크가 그린 <화가 프란츠 포르의 초상 Portrait of the Painter Franz Pforr>을 보면 창문 너머로 북해 연안 저지대의 시장 마을이 보이는 풍경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친구 화가를 북구 르네상스 화가의 모습으로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의도적으로 고졸한 양식을 사용했으며 15세기 북구 거장들의 도상뿐 아니라 기법까지도 모방했다.
나자렛파는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을 지나치게 개인적, 형식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부정한 반면 중세미술을 개인의 단일한 미적 생성물이 아닌, 민중의 종교적, 정신적, 평안을 위한 공동체적 산물이라는 시각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나자렛파는 낭만주의자들의 반동과 중세 복고주의를 결합시킨 그룹이며 라파엘전파가 이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들과 유사한 목적과 방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브라운이 1845-48년 영국에서 그리기 시작한 첫 회화 두 점 <곤트의 존에게 번역한 성경을 읽어주는 위클리프 Wycliffe Reading his Translation of the Bible to John of Gaunt>와 <에드워드 3세의 궁에 있는 초서 Chaucer at the Court of King Edward III>는 나자렛파와 라파엘전파 사이에 연결점을 제공했다.
두 작품 모두 민족학에 대한 전형적인 낭만적 관심이라는 점에서 나자렛파의 전례를 따르고 있다.
1853년에 되어서야 완성한 <에드워드 3세의 궁에 있는 초서>를 그린 의도는 영국적 정서와 영국 시의 영광을 나타내는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의도를 너무 고풍스럽게 표현했으므로 햇빛이 가득한 곳에서 기사와 귀부인, 왕과 궁중신하들 앞에서 독서하는 초서의 환영이 되고 말았다.
첫 번째 도안은 세 폭 제단화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이 역시 나자렛파를 따른 것이다.
양쪽 패널에는 초서가 뿌린 씨의 열매라 할 수 있는 후대의 시인들에 있는데, 왼쪽 패널에 <실낙원 Paradise Lost>의 저자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시인 존 밀턴John Milton(1608-74), 후세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시인 중의 시인’으로 불린 스펜서Edmund Spencer(1552?-99), 그리고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가 있고, 오른쪽 패널에는 낭만파 시인 바이런Byron(1788-1824), 영국의 시인이며 비평가 포프Alexander Pope(1688-1744),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방언을 사용하여 시를 쓴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1759-96)가 묘사되어 있다.
선명하게 세부를 처리한 방식은 밀레이와 헌트 같은 젊은 화가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이다.
규모가 컸던 원래의 작품에서는 중앙의 장면만 완성되고 양쪽 패널은 완성되지 못했다.
<에드워드 3세의 궁에 있는 초서>는 문학과 중세에 대한 취향 외에도 라파엘전파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심스럽게 선택된 고고학적 세부배열, 구성의 평면성, 그리고 한 순간에 존재하는 명암을 처리한 것이 그러하다.
브라운은 종종 초기작품에서 자연적 빛의 체계를 실험했으며, 이는 몇 년 뒤 라파엘전파의 가장 중요한 신조를 예견한 것이다.
로제티는 고대학교에 재학할 때 잠시 동안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곤트의 존에게 번역한 성경을 읽어주는 위클리프>에 대한 주제는 갑자기 떠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주제를 생각해낸 그날 저녁에 그는 첫 번째 스케치를 그렸고, 다음 날에 대영박물관의 독서실에서 존 리위스John Lewis의 <위클리프의 생애 Life of Wyclif>, 영국 시인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ey(1774-1843)의 <교회서 Book of the Church>를 읽었다.
영국과 교황과의 세금 등의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왕실사절로 외교임무도 수행한 적이 있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1320/24-84)는 로마가톨릭의 권력남용에 관한 부당성을 지적한 뒤 개혁운동에 나섰다.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바친 투쟁의 목표는 신적 진리와 인간 자유의 확립이었다.
곤트의 존과 왕실, 귀족들이 그를 옹호했다.
그는 성경이 자기 고유의 언어로 읽혀지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의 생애>와 <교회서> 등은 회화의 반가톨릭 내용을 위한 관념을 제공해주었다.
위클리프의 사상을 옹호함으로써 프라하의 대주교 츠비넥Zbynek과 불화하고 프라하의 성직자단에 의해 설교를 금지당한 얀 후스Jan Hus(1371-1415)와 더불어서 위클리프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다.
성서를 처음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는 중세세계의 반전설적인 인물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개신교도로서 브라운의 관심을 끌었다.
브라운은 가구를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 고딕을 부활시킨 건축가 퓨진을 참조하고 고딕 알파벳을 모사했다.
나자렛파의 회화와 비슷하게 엷고 단조로운 색조와 분산된 구성으로 이루어진 <곤트의 존에게 번역한 성경을 읽어주는 위클리프>는 최종적으로 프레스코화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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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레 로제티Gabriele Rossetti>






런던에서 태어난 이탈리아계 영국 화가이며 시인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1828-82)는 정치적 압력에 의해 고국을 떠나 1824년에 영국에 정착한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학자 가브리엘레 로제티Gabriele Rossetti(1783-1854)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브리엘레 로제티는 1441년 헨리 6세에 의해 설립된 명문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이탈리아어 교수가 되었고,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자식 네 명을 두었는데 로제티는 둘째였다.
로제티는 열세 살 때 사스 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재학했는데, 그가 이 학교에 입학하기 2년 전인 1839년에 해협제도에서 온 총명한 존 에버렛 밀레이가 이 학교에 입학했다.
총명한 밀레이와는 달리 로제티는 이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스스로도 다음 단계로 올라갈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1845년 여름이 되자 그도 왕립미술원의 견습학생이 되었다.
현재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안의 건물의 동쪽 반을 차지하던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of Arts은 1853년까지만 해도 수련과정이 10년 걸리는 학교로 학생들은 처음 수년 동안 고대학교Antique School에서 고전주의 조각들을 드로잉 해야 하고 그 뒤 유화를 그리며 실제 모델을 그릴 수 있었다.
건물이 비좁아 여름 전시기간에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할 공간은 거의 없었다.
왕립미술원은 1768년 조지 3세의 칙허를 얻어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1723-92)를 초대회장으로 설립되었다.


로제티는 1848년 봄 포드 매독스 브라운에게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청했다.
당시 무명이었던 브라운은 로제티가 자신을 놀리려고 그러는 줄 알고 회초리를 준비하며 혼내주려고 했으나 사실임을 알고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동안만 배운 로제티는 여름에 브라운을 떠나 윌리엄 홀먼 헌트에게 몰입했다.
두 사람은 곧 같은 작업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작업실은 작은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다소 지저분한 런던의 웨스트엔드West End의 클리블랜드 가Cleveland Street에 위치했으며, 스티븐스에 의하면 “크고 썰렁한 방”이었다.
그 해 헌트는 빅토리아 시대의 대중작가 불워 리턴Edward Robert Bulwer Lytton(1831-91)의 14세기 로마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한 구절을 소재로 <정의를 반드시 구하겠다고 맹세하는 리엔치 Rienzi vowing to obtain Justice>를 그렸는데 로제티가 주인공의 모델이었다.
헌트가 당시 고어 가Gower Street에 있던 밀레이의 작업실에서 그린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초상 Portrait of Dante Gabriel Rossetti>을 보면 영감이 풍부한 천재의 모습이다.
천재로서의 화가라는 이미지는 낭만주의운동에서 화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개념이었으므로 헌트가 그렇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로제티는 불규칙적으로 수업에 참가했으며 예술과 문학에 대한 취향도 일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시인이며 화가로서 왕립미술원에 재학한 적이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를 발견했다.
블레이크는 어릴 때부터 비상한 환상력을 지녀 창가에서 천사와 대화하고 언덕에 올라 하늘을 만진 체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영박물관에서 블레이크의 원고를 우연히 본 로제티는 동생에게 빌린 10실링으로 시, 드로잉, 경구적인 산문, 그리고 <조슈아 레이놀즈의 강연에 대한 주해 Annotations to Sir Joshua Reynold's Discourses>가 수록된 원고를 구매했는데, 여기서 블레이크는 레이놀즈의 강연록을 “위선자의 속임수”로 묘사했다.
로제티는 또한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1809-92)과 더불어서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1812-89)의 활달한 시를 좋아하여 시각적으로 표현하기를 갈망했다.


로제티는 시인과 화가 모두 되고자 했으며 왕립미술원에서의 공부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비개성적이고 틀에 박힌 수업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학업을 도중에 그만두었다. 그가 영감을 얻기 위해 선택한 사람은 포드 매독스 브라운이었다.
브라운에게 끌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아카데미와 무관한 데 있었다.
로제티는 브라운으로부터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의 색채방법을 배우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자 그를 떠났다.
그는 헌트를 통해 그의 친구 밀레이를 만났다.
밀레이는 헌트의 생각에 공감했는데, 그것은 레이놀즈의 가르침이 영국 회화에 해악이 되고 있으며, 아카데미 화가들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는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변모 Transfiguration>에서 “진실의 단순함을 무시하고, 열두 제자를 호화스런 자태로, 그리스도를 세속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로제티가 스무 살의 나이에 처음 그린 라파엘전파주의 작품은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 The Girlhood of Mary Virgin>로 1848년 늦은 여름 내내 헌트의 지속적인 지도하에 그린 것이다.
마리아의 모델은 여동생 크리스티나 조지나 로제티이다.
이 작품은 PRB라는 글자를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린 것으로 런던의 자유전The Free Exhibition에 출품되어 1849년 3월 24일에 소개되었다.
그는 좌측 하단에 서명한 뒤 그 아래에 붉은색으로 PRB라고 적었다.
이 작품이 선보였을 때 어느 누구도 아카데미에 대한 반동의 의미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최초의 라파엘전파 작품으로 아카데미의 관습을 거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복고양식이 사용되었다.
이 종교화는 원래 세 폭으로 구상되었다.
종교적 주제는 14세기 양식의 회화에 매우 적합했으며 로제티의 성향과도 잘 맞았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이 관람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보다는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이 작품은 종교적 주제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장치가 배제되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자연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로제티의 기법이 미숙했으므로 사실적 회화라고 할 수는 없다.
주목할 점은 그가 상징적인 세부에 매료된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은 상징적 의미를 무겁게 지니고 있으며, 로제티는 그림의 액자에 붙여놓은 소네트에 이를 자세히 설명해놓았다.
예를 들면 책은 성모 마리아의 미덕을, 백합은 순결함을, 일곱 개의 가시가 있는 찔레와 일곱 개의 잎이 있는 종려나무는 성모 마리아의 ‘크나큰 슬픔과 이에 대한 큰 보답’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부 평론가들은 성가족을 신의 모습보다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내려고 한 데 대해 비난했다.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은 라파엘전파의 개혁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정한 효과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거의 어색한 듯한 양식을 차용했다는 점에서 전통주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 회화에서 볼 수 있는 많은 회화적 장치들이 사용되었는데, 어색한 구성, 중세 필사본의 한정된 공간과 대담한 배열방식이 돋보인다.
기법에서 보면 캔버스의 표면이 판지처럼 매끄럽게 될 때까지 애벌칠을 한 뒤 수채화 붓으로 유채를 칠해 모든 색조가 투명해졌다.
양식에서 보면 일종의 소박한 참신함이 나타나 있지만 어느 부분이 계산에 의한 것인지 혹은 능력의 부족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헌트와 브라운은 로제티에게 원근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원근법은 로제티에게는 지루하고 성가신 것이었다. 그가 원근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모든 인물이 화면에 빽빽하게 구성되고 말았다.
성 요아킴St. Joachim이 혼란스럽게도 관람자 가까이 불쑥 나타나 있으며, 왼편 마루와 오른편 마루의 소실점이 일치하지 않는다.
카탈로그에 실린 로제티의 시를 통해 상징물들의 의미를 알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난간 위에 걸쳐져 있는 붉은색 옷은 그리스도가 수난 때 입었던 옷을 상징한다.
성 안나St. Ann 뒤 담쟁이덩굴로 감겨 있는 수평선과 수직선의 고안물의 형태가 십자가인데 이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그리고 정원의 황금빛 후광 속의 비둘기는 전통을 좇아 성령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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