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품을 통해 아동의 심리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모호하고 애매하게 표현되는 감정이나 생각을 파악하려면 단일 미술작품의 주제보다는 여러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발견되는 형태나 전체적인 작업 과정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키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외곽선을 넘지 않고 채색하는 데 무척 신경 썼습니다.
이런 행동은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반영된 것입니다.
미키는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입으로는 분노와 처벌의 내용이 담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또한 미키 내면의 충동 조절에 대한 걱정을 보여줍니다.
다른 예로 막스라는 아이는 손가락 그림 두 점을 완성한 후 그 위를 물감으로 덮어버렸습니다.
이는 합리화와 지성화를 통해 감정과 충동을 덮어버리는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또 도니라는 아이는 나무토막으로 도시 모형을 만들면서 점점 의자를 치료사 쪽으로 끌어와 앉았습니다.
모형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치료사도 함께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치료사도 함께 탁자에 앉아 모형을 만들던 상황이었습니다.
도니는 처음에 각자 따로 건물을 만들자고 했지만, 다 완성한 후에는 둘을 합쳐놓았습니다.
완성된 작품만을 보았을 때는 도니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작업 과정에서 보여준 행동을 보면 의존하고 싶은 바람과 친밀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동 미술치료』의 저자 주디스 아론 루빈은 미술작품의 내용을 통해 아동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려면 다음 네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해당 작품을 만드는 동안 발생한 언어적, 비언어적 의사소통.
그 내용은 재료나 주제와 연관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2.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주제와의 연관성.
3. 작품을 만드는 동안, 혹은 작품 완성 이후 이야기한 내용, 제목, 투사된 이미지 등.
4. 형태의 왜곡, 과장, 생략, 혹은 상징 선택 등에 함축된 내용.
주디스 아론 루빈은 자신의 경험상 프로이트가 제안한 심리학의 전제 중 하나인 ‘정신 결정론 psychic determinism’이 유효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정신 결정론이란 무의식이 존재하며, 인간의 모든 심리 현상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무의식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가설입니다.
아이가 미술 활동을 하는 동안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이의 심리 상태와 연관된다는 가정은 아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특정한 미술 활동을 하기 직전이나 직후에 내뱉은 말, 취한 행동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과연 보편적인 상징이 존재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주디스 아론 루빈은 그러한 연합이 어느 정도 유효한 것이 사실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보편적 상징이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돌아봐도, 태양은 아버지를, 집은 어머니를 상징하는 경우가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고 술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에게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상관관계는 가설을 세우기 위한 용도로만 적용해야 합니다.
예컨대, 대부분 쭉 뻗은 선은 남근을, 그릇 모양 형태가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정 상징의 특유한 의미는 해당 아동의 전반적인 태도, 언어 사용, 몸짓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아이의 행동을 충분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기만 한다면, 치료사는 미술작품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치료사 자신의 상황이나 심리 상태를 투사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주제들은 보편적인 인간적 문제나 발달 과업과 연관되기 때문에 그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 대부분은 분노나 애정에 대한 욕구와 관련 있습니다.
분노는 물어뜯거나,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처럼 구강과 관련된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토미가 점토로 괴물 머리를 만든 후, 그 괴물이 앞길을 가로막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모두 잡아먹었다고 말한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또한 분노는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항문기적 특성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맥의 경우 손가락 그림물감으로 화산을 그린 후 용암과 불꽃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쑤셔 넣거나 찌르는 등의 남근을 상징하는 형태 또한 분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랜스가 점토용 칼을 가지고 적을 베는 시늉을 한 것은 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또 권위 있는 대상에 맞서는 식의 표현을 통해 자율성을 추구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반은 남자와 여자가 있는 그림을 그린 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여자가 집 주인이라고? 내 집에서는 내가 대장이야!”
대개 미술에서 그러한 분노는 직접적으로 표현되기보다는 잠재적인 힘이나 권력을 암시하는 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미키는 그림에 총알을 그려 넣은 후, 언제든 그 총알을 사용할 수 있다고만 말했을 뿐, 총알이 실제로 발사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성별과 관련해서, 아이들은 구강과 관련된 표현을 통해 신체적 보호 또는 양육을 나타내는 경향이 높습니다.
예컨대 신디는 점토로 사람 모양을 만든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여자는 우리 엄마 같아요. 크고 둥글고 따뜻해요. 나를 행복하게 해줘요.”
이와 상반되게 거절, 유기 등의 주제를 표현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페기는 점토로 강아지를 만든 후, 그 강아지가 못된 고모에게 쫓겨났다고 말했습니다.
미술작품을 통해 자신의 신체 부위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전성기기pregenital stage 욕구를 표현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는 대개 두 대상을 결합시키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예컨대 도니가 나무토막으로 만든 건물 두 개를 나란히 옆에 놓은 후 서로 뽀뽀하고 껴안는 것처럼 흉내 냈던 행동이 전성기기의 욕구를 나타냈습니다.
또한 미술작품을 통해 호기심을 주로 표현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미키는 자신이 그린 후크 선장의 배 창문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말로 호기심을 표현했습니다.
그 밖에 자주 표현되는 주제로는 경쟁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경쟁의 대상은 대개 더 나이가 많고 강한 적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암시합니다.
예컨대 존은 머스탱 자동차를 한 대 그린 후 그 차가 자동차 경주에서 이겼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자신들이 해를 입은 내용이 담긴 미술작품을 만듭니다.
그러한 내용의 미술작품은 분노나 성적 충동 때문에 자신이 벌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나타냅니다.
예컨대 에바는 한쪽 다리가 없는 사슴을 그렸고, 존은 적군과의 전투에서 격추당한 비행기를 그렸습니다.
아이들은 때로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나 갈등을 미술작품에 표현합니다.
예컨대 샐리는 자신이 그린 배 안의 노잡이가 남자아이라고 했다가 다시 여자아이라고 오락가락하면 말했습니다.
초크로 그린 그 그림 속 일문의 성별은 불분명해 보였습니다.
이따금 미술작품에 로맨틱한 성적 바람이 표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헤더는 점토 덩어리 두 개를 만든 후, 두 사람이 결혼해 바로 아기를 낳는 상황극을 연출했습니다.
여러 미술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그 아이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예컨대 존은 신체적 상해와 관련된 그림, 점토 모형을 연달아 만들었습니다.
또 도니는 나무토막으로 만든 건물 두 개를 접착제로 붙이고 난 후에는 “포옹하고 있는 두 사람”을 그림으로써 누군가와 함께하고픈 바람을 표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상징에 둘 이상의 의미가 담긴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다양한 수준의 복합적 의미를 한 가지 상징에 응축해 담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멜라니가 그린 독수리는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싶은 심리적 욕구와, 내면에 억눌려있던 분노와 공격성을 동시에 보여주었습니다.
피트는 자신이 만든 뱀 모양의 추상적인 작품에 대해 설명하면서, 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다고도 하고 또 뱀이 되어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모두 물어버리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두 설명은 각기 다른 내용이기는 했지만 모두 분노를 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