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 경계가 없는 의식과 무의식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폴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1912-1956)을 아주 짧은 말로 소개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적어도 세 마디는 해야 한다.
1. 처음에는 토마스 하트 벤턴과 멕시코 벽화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초현실주의와 정신분석학자 융의 영향을 받았다.
2. 1940년대 말 그의 그림은 리듬과 액션을 상기시키는 것들이었고, 그림을 크게 그리기 시작했는데 거의 벽화 크기로 그려서 커다란 그림을 그린 최초의 미국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3. 그는 물감을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 유명해졌다.
폴록은 아버지 사업이 계속 실패한 관계로 14년 동안 여덟 번 이사하는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8년 봄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을 때는 매뉴얼 아트 고등학교Manual Art High School로 전학했는데
동창생들 중에 화가들이 많았고 필 골드스타인Phil Goldstein도 포함된다.
필 골드스타인은 필립 구스턴Phillip Guston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
구스턴은 처음에는 추상을 추구하다가 나중에는 만화 같은 그림을 시적인 색으로 그렸다.
매뉴얼 아트 고등학교에는 누드 모델을 처음 시도한 스와니Schwanny(Schwankovsky)란 이름의 교사가 있었는데
요가에 관심이 많은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55마일 떨어진 라구나Laguna에 라구나 아트 콜로니Laguna Arts Colony를 설립하고 미술을 가르쳤고 아내는 음악을 가르쳤다.
스와니는 토요일이면 크리스나무르티Krishnamurti로 하여금 학생들에게 강의하게 했는데 폴록은 구스턴과 함께 라구나에 가서 크리스나무르티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폴록의 동양 신비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은 이때 생긴 것이다.
폴록은 두 형을 따라 1930년 9월 뉴욕으로 갔는데 18살 때였다.
폴록보다 10살 많은 큰형 찰스 세일Charles Ceil은 1926년 뉴욕으로 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Art Students League에 입학해 토마스 하트 벤턴Thomas Hart Benton(1889-1975)으로부터 수학하고 있는데 벤턴은 미국 풍속화파Regionalist School의 선두자였다.
벤톤은 파리로 유학을 가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수년 동안 수학했지만 귀국한 후 미국식 풍속화를 그리면서 이 분야의 선두자가 되었다.
그는 유럽에서 배운 “모더니즘의 먼지를 털어내는 데 십 년이 걸렸다”고 투덜거렸다.
찰스는 동생 폴록을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시켜 벤턴의 가르침을 받게 하면서 폴이란 이름 대신 잭슨이란 이름을 사용하라고 했다.
폴록과 함께 수학한 친구들은 한결같이 폴록이 드로잉을 할 줄 모른다고 했으며 폴록 자신도 한때 회화를 그만두고 조각가가 되려고 했다.
드로잉을 제대로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는 벤턴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따라서 기교에 의존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 보니 더욱 과격하게 추상화하며 과장된 표현주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내가 <폴록과 친구들>을 쓰면서 확신할 수 있었던 점은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에서도 보듯이 미술사에서의 혁명은 아카데미 출신보다는 과격한 생각을 가진 예술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폴록의 친구들 모두 그보다는 드로잉을 잘 했지만 창작의 세계에서의 폴록의 상상력은 어느 누구보다도 빠르게 질주했는데 시속 160km가 넘었고 따라서 표현에 있어 그의 과격함은 따를 자가 없었다.
폴록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화가를 꼽으라면 벽화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쿠에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1896-1974)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디에고 리베라(1886-1957)와 호세 클레멘테 오로츠코Jose Clemente Orozco(1883-1949)와 더불어 멕시코를 대표하는 세 예술가들 가운데 막내이다.
폴록은 1924년에 클레몬트Claremont의 포모나 대학Pomona College에서 호세 오로즈코의 벽화를 직접 본 적이 있으며 멕시코 회화에 대한 관심은 그때부터 생겼다.
폴록은 1932년 형 샌드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쿠에이로스의 작품도 보았다.
시쿠에이로스가 1936년 뉴욕에 체재할 때 ‘화가들을 위한 실험적 워크샵 Experimental Workshop for Painters’을 조직했을 때 폴록은 그의 그룹에 동참했다.
서른 여덟 살의 시쿠에이로스는 멕시코 민중봉기를 혁명으로 상승시키는 데 일조를 한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미국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벽화를 홍보하고 있었다.
그는 1930년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고 이듬해 한 해 동안 가택연금되기도 했다.
폴록은 무보수 조수로 시쿠에이로스를 도왔는데 그가 그림을 미리 구성하지 않고 물감을 깡통에 담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 붓는 방법에 매우 감동을 받았다.
그런 방법으로 우연에 의한 이미지들을 생기는 데 매우 감동되었다.
그해 폴록은 캔버스를 마루바닥에 놓고 시쿠에이로스와 같은 방법으로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는 기교를 실험했는데 시쿠에이로스의 영향이었다.
경계가 없는 의식과 무의식
폴록의 작품세계를 알려면 그의 정신세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경계가 없는 의식과 무의식이 돌출한 창작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로 9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938년 뉴욕에 돌아온 조셉 헨더슨Joseph Lewis Henderson 박사가 호기심을 갖고 폴록의 정신세계를 분석했다.
1939년 1월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고 퇴원한 지 4개월 후 폴록이 다시 폭음을 하자 형 샌드는 폴록을 데리고 이스트 73가에 있는 헨더슨에게로 데리고 가 정신치료를 의뢰했다.
헨더스은 스승 융의 이론을 폴록에게 적용시켰는데 융은 미술을 상징학과 연계시켜 미학이론을 전개했으며 예술가들이 그들이 상상하는 정신세계로부터 이미지들을 창조해낸다고 믿었다.
융은 보통 사람은 직관, 느낌, 감각, 사고 세 가지 개성 혹은 기능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균형을 이룬 후 전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런 융의 이론을 적용해 헨더슨은 폴록이 갖고 있는 본능적 경향들이 집합적 무의식 안에서 어떤 경향으로 나타나는지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의 개성들의 재통합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폴록의 창작과정을 거꾸로 연역해 그의 드로잉들을 분석함으로써 무의식세계에서 분출하는 이미지들에 그가 어떻게 의식적으로 가치등급을 정하는가를 살펴보는 데 주력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 나타난 상징주의를 분석하면서 폴록의 단순한 관념들과 기본적인 정의들로부터 시작해 좀더 구체적이고 복잡한 내용들로 분석해 들어갔으며 폴록의 드로잉에 나타난 각기 다른 두 이미지를 그의 상반된 충돌로 이해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구부러진 선과 둥근 형태가 여성적인 것들을 상징한다고 결론내렸다.
헨더슨은 융의 이론을 폴록에게 적용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느꼈는데 폴록의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를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폴록이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헨더슨은 매주 가져오는 폴록의 드로잉들에서 자아의식적 요소들을 발견했고 또 본능적 경향들도 발견했는데 그런 것들은 ‘집단 무의식’을 의미했다.
그는 “잭슨의 그림들을 통해 개인적인 그의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지만 왜 내가 그때 그의 알코올중독을 치료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나의 의무는 그가 갖고 있는 개성적인 기능들을 한껏 북돋아주는 것이었지 고통당하는 그의 이기심을 구해주거나 재정립하는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헨더슨은 폴록이 어렸을 때 본 것들이 무의식 속에 남아 있음을 발견했고 그것들 중 인디언들에 관한 이미지들이 있음을 보았다.
폴록은 서부에서 성장하면서 인디언 문화를 호기심을 갖고 바라본 적이 있었으며 인디언들이 모래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감동해 나중에 인디언처럼 춤을 추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서 들소가 여인을 공격하는 장면이 매우 에로틱하게 묘사된 것을 봤으며 들소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사람이 들소로 변하는 경우도 보았다.
말은 뱀으로 둔갑했고 뱀은 몸을 둘둘 감은 모양으로 여자의 자궁 안에 쭈그리고 있었다.
폴록은 오로츠크의 그림에서 본 인상깊었던 이미지들을 자신의 무의식을 통해 재현하면서 그것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폴록은 멕시코 고대 상징들인 뱀, 도끼, 불구자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친구는 “폴록은 벤턴이나 멕시코 벽화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아주 나쁜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갖고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했다. 그것은 아주 신비한 방법이기도 했다”고 했다.
폴록이 헨더슨의 치료를 받은 기간은 18개월이었다.
폴록은 그에게 82점의 드로잉을 주었으며 과슈 한 점은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이 그림들은 나중에 ‘정신분석적 드로잉들’로 불리우면서 학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헨더슨은 1970년 이 드로잉들을 샌프란시스코 화랑에 팔았고 그해 10월과 11월에 65점이 휘트니 뮤지엄에서 ‘잭슨 폴록: 정신분석적 드로잉들’이란 명칭으로 대중에 공개되었다.
헨더슨은 훗날 샌프란시스코에 융 연구기관을 설립했는데 미국 내에서 융의 이론을 연구하는 가장 큰 기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