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은 그때 리와 아주 사이가 나빴다



폴록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여인들을 찾아가 자기 아이를 임신하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린버그는 7월에 폴록과 함께 주말을 보내려고 스프링스로 왔다가 부엌에 앉아서 폴록과 리의 싸움을 목격할 수 있었다.
폴록은 리에게 하루 종일 화를 냈으며 그린버그가 리의 편을 들어주면 폴록은 더욱 화를 못 참았다.
폴록은 리에게 “난 너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소리쳤으며 “결혼이 두 사람을 죽일 것만 같았다”고 그린버그는 전한다.
다음 날 리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폴록이 리를 죽일 것만 같아서 그린버그가 리에게 의사를 찾아가보라고 권한 것이다.
폴록은 리와 함께 치료를 받았는데 폴록에게는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
젊은 의사 랄프 클라인은 폴록과 함께 뉴욕에 가서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는 시다에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폴록의 정신 상태를 가까이서 관찰하기도 했다.

랄프 클라인은 맨해턴에서 개업하고 있었으므로 폴록은 매주 화요일이면 클라인을 만난 후 시다에 왔다.
술을 마시면 폴록은 “시팔, 매춘부 같은 놈들아! 네 놈들이 화가라고 생각해?”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 밤에는 테이블에 있는 십여 개의 술잔들을 바닥으로 쓸어버렸고, 어떤 때는 음식물을 친구들이나 낯선 사람들에게 마구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여자들을 희롱했는데 그건 폴록만이 했던 짖궂은 장난은 아니었다.
드 쿠닝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보통 있는 일이었으므로 특기할 만하지는 않다.
폴록은 여자에게 혀를 내미는 시늉을 하면서 “근래에 좋은 자지를 빨아본 적이 있냐?”고 묻기도 했다.
어느 여류화가에게는 “넌 섹스는 잘하겠지만 빌어먹을 가치 있는 그림을 그리지는 못할 게다”라고 말했으며, 흑인에게 “너는 네 피부 색깔을 좋아하니?”라고 물었다.

시다에 출입하는 십여 명의 젊은 예술가들은 폴록을 우상처럼 생각하면서 그들도 그처럼 유명한 예술가가 되기를 고대했는데 폴록은 그들에게 “시팔 너희는 뭐 하는 놈들이냐?”고 하고 어떤 때는 “너희는 네 놈들의 이름을 알리려고 무슨 짓들을 하고 있니?”라고 묻기도 했다.
그는 사내 동성연애자들을 ‘심부름꾼들’이라고, 여자 동성연애자들은 ‘매춘부들’이라고 불렀는데 어떤 때는 사내에게도 이 말을 적용했다.
또 그는 동료 예술가들을 ‘지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접시와 술잔들을 부순 후 상처 난 손가락의 피를 짜서 테이블 위에 물감 흘리기 기교로 그림을 그리듯이 칠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이 시기에 시다에서 폴록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예술가는 프란츠 클라인이었다.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언제든 클라인이 거기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이 떠날 때에도 그가 그곳에 있음을 보았다”고 래리 리버스가 말했다.
폴록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클라인은 당시 아내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므로 더욱 술을 마셨다.
그도 세상을 피해서 술집으로 도피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맥주를 주로 마시는 그도 늘 주량을 초과하는 편이었다.
자연히 폴록은 클라인을 형처럼 따르면서 함께 술을 마셨다.
폴록이 술을 젓는 플라스틱 대롱을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으면 클라인도 따라서 씹었다.
두 사람이 서로 응시할 때는 마치 영화 <하이 눈 High Noon>의 한 장면 같았다.
어느 날 밤 클라인은 야구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는데 폴록이 그의 팔꿈치를 쳤다.
그가 “잭슨, 까불지 마!”라고 말하고 다시 야구 이야기를 계속하자 폴록은 다시 그의 팔꿈치를 쳤다.
클라인은 “한 번만 더 그러면 네 명줄을 끊어놓겠다!”고 소리쳤다.
클라인이 다시 야구 이야기를 시작하자 폴록은 지루해서 클라인의 모자를 벗겨 높은 선반 위로 올려 보내고는 술집 밖으로 달아났다.
두 사람이 취하면 대화가 아니라 온통 욕지거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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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에게는 지성이 없었다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암컷이리 She-Wolf>는 폴록의 대표작들 중 하나로 그가 1943년에 그린 것으로 그해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이 그녀의 화랑 금세기의 예술Art of This Century에서 열어준 개인전에 출품하기 위해 그린 것들 중 한 점이다.
1930년 18살의 나이로 뉴욕에 온 지 13년만에 자신에게 주어진 첫 행운의 개인전을 위해 신명이 나서 그린 작품이다.
캔버스의 크기가 가로 세로 170cm 106cm인 것만 봐도 대작을 그리겠다는 야심에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암컷이리는 로마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로 로마를 건국한 쌍둥이에게 젖을 먹여 키운 로마인들에게는 고귀한 동물이다.
하지만 이런 건국에 관한 에피소드를 염두에 두고 폴록이 그린 것은 아니었다.
두 동물이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그림에서 왼쪽 동물은 황소로서 피카소의 <궤르니카 Guernica>에 나오는 황소를 연상하게 한다.
폴록은 <궤르니카>를 뉴욕 화랑에서 보고 코가 아주 납작해진 적이 있었다. 피카소의 이 작품은 폴록뿐 아니라 뉴욕의 많은 젊은 화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폴락 Pollock>이란 제목의 영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잠시 상영되었다가 사라졌는데 폴록이라고 하지 않고 폴락이라고 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폴락은 Pollack으로 이런 이름이 따로 있다.
여하튼 이 영화는 폴록의 일대기를 다룬 것으로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인데 경제적으로 실패한 데 대해 유감이다.
광고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영화를 보면 폴록이 술에 취해 형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오르다 쓰러진 채 “피카소가 다 해 먹었다”고 투덜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피카소에 의해 회화는 죽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실제로 많은 화가들이 딴 직업으로 전업하거나 조각으로 장르를 바꾸는 등 피카소의 위협은 대단했다.
<궤르니카>에서 본 황소의 이미지가 폴록의 잠재의식에 남아 있다가 <암컷이리>에서 뛰쳐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오른쪽 동물은 전혀 다른 류의 소로 미국의 5센트 코인에 새겨져 있는 들소처럼 보인다.
두 동물은 두툼한 붉은 화살로 황소의 심장으로부터 들소의 머리까지 수평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화실은 인디언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폴록이 한때 인디언 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니까 <암컷이리>는 피카소의 황소와 미국 들소의 만남이었고 두 놈이 인디언의 화살에 맞아 폴록의 전리품이 된 셈이다.

페기는 이 그림의 가격을 650달러로 매겼는데 모마가 50달러를 깍아 600달러에 구입했다.
<암컷이리>는 미술관이 구입한 폴록의 첫 작품이 되었다.

그해 폴록은 <파시패 Pasiphae>도 그렸는데 파시패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스Minos의 아내이며 또한 흰 황소와 섹스해 황소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미노타우르Minotaur를 낳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러나 폴록은 파시패를 그리려는 의도도 그린 것은 아니었다.
평론가 스위니가 폴록의 작업실에서 그 그림을 보자마자 파시패라고 제목을 붙여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에 <파시패>가 된 것이다.

폴록의 많은 그림은 제목을 염두에 두고 사변적으로 그려진 것들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그린 후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정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 제목에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제목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감상해도 된다.
폴록의 그림은 한 마디로 잠재의식의 현상으로 그가 아주 솔직하게 강박관념처럼 따라다니는 이미지들을 표현했으므로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창작 과정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알 수 있다.

우리도 융의 제자 헨더슨과 같은 입장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이 지닌 장점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관람자를 속이며 기만하는가!

숨김없이 드러낸 폴록의 잠재의식에서 우리는 고대 원시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 본능의 일면을 보고 공감하게 된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기교를 발견하게 된다

폴록에게는 지성이 없었다.
신비주의를 탐닉했고 알코올 중독과 정신분열로 의식과 무의식의 뚜렷한 경계가 없는 혼돈 속에서 생활했다.
그가 생각한 것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 다혈질인 그는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논리적을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사고가 전혀 논리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폴록이 유명해지자 많은 사람이 그를 인터뷔했고 윌리엄 롸잇William Wright도 그를 인터뷔했는데 다음의 대화를 통해 폴록의 미적 관심을 알아보자.

WW: 모던아트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JP: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목적들에 대한 표현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WW: 과거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표현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JP: 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날의화가들이 자신들 밖에서 주제를 발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대부분 모던 아티스트들은 다양한 데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지만 그들은 자신들 안에서 작업합니다. 새로운 요구는 새로운 기교를 필요로 합니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기교를 발견하게 됩니다.

WW: 예술가는 무의식으로부터 그림을 그리고 캔버스는 예술가가 바라보는 무의식처럼 나타나야 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JP: 내가 사용하는 대부분 물감은 유액으로 묽은 물감입니다. 붓보다는 붓의 윗부분인 막대기를 주로 사용하는데 붓은 캔버스에 닿지 않고 그 위에 있게 됩니다.

WW: 캔버스에 붓으로 칠하지 않고 막대기로 물감을 떨어뜨리는 방법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 말할 수 있겠습니까?

JP: 음, 그렇게 하는 게 좀더 자유로우며 캔버스 주위로 움직이는 데 더 편합니다.

WW: 음, 막대기는 붓보다 조절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내 말은 물감을 너무 많이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많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붓을 사용하게 되면 칠하고자 하는 바로 그곳에 물감을 바를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색을 칠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JP: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험에 의할 것 같으면 ...
막대기에서 떨어지는 물감의 양을 조절하게 됩니다. 난 우연한 현상을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우연의 현상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WW: 프로이트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JP: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WW: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를 사전에 갖고 작업하십니까?

JP: 일반적인 관념과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그리지만 드로잉을 하고 작업하지는 않고 캔버스에 직접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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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 경계가 없는 의식과 무의식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폴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1912-1956)을 아주 짧은 말로 소개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적어도 세 마디는 해야 한다.

1. 처음에는 토마스 하트 벤턴과 멕시코 벽화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초현실주의와 정신분석학자 융의 영향을 받았다.
2. 1940년대 말 그의 그림은 리듬과 액션을 상기시키는 것들이었고, 그림을 크게 그리기 시작했는데 거의 벽화 크기로 그려서 커다란 그림을 그린 최초의 미국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3. 그는 물감을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 유명해졌다.

폴록은 아버지 사업이 계속 실패한 관계로 14년 동안 여덟 번 이사하는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8년 봄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을 때는 매뉴얼 아트 고등학교Manual Art High School로 전학했는데
동창생들 중에 화가들이 많았고 필 골드스타인Phil Goldstein도 포함된다.
필 골드스타인은 필립 구스턴Phillip Guston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
구스턴은 처음에는 추상을 추구하다가 나중에는 만화 같은 그림을 시적인 색으로 그렸다.

매뉴얼 아트 고등학교에는 누드 모델을 처음 시도한 스와니Schwanny(Schwankovsky)란 이름의 교사가 있었는데
요가에 관심이 많은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55마일 떨어진 라구나Laguna에 라구나 아트 콜로니Laguna Arts Colony를 설립하고 미술을 가르쳤고 아내는 음악을 가르쳤다.
스와니는 토요일이면 크리스나무르티Krishnamurti로 하여금 학생들에게 강의하게 했는데 폴록은 구스턴과 함께 라구나에 가서 크리스나무르티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폴록의 동양 신비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은 이때 생긴 것이다.

폴록은 두 형을 따라 1930년 9월 뉴욕으로 갔는데 18살 때였다.
폴록보다 10살 많은 큰형 찰스 세일Charles Ceil은 1926년 뉴욕으로 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Art Students League에 입학해 토마스 하트 벤턴Thomas Hart Benton(1889-1975)으로부터 수학하고 있는데 벤턴은 미국 풍속화파Regionalist School의 선두자였다.
벤톤은 파리로 유학을 가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수년 동안 수학했지만 귀국한 후 미국식 풍속화를 그리면서 이 분야의 선두자가 되었다.
그는 유럽에서 배운 “모더니즘의 먼지를 털어내는 데 십 년이 걸렸다”고 투덜거렸다.

찰스는 동생 폴록을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시켜 벤턴의 가르침을 받게 하면서 폴이란 이름 대신 잭슨이란 이름을 사용하라고 했다.
폴록과 함께 수학한 친구들은 한결같이 폴록이 드로잉을 할 줄 모른다고 했으며 폴록 자신도 한때 회화를 그만두고 조각가가 되려고 했다.
드로잉을 제대로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는 벤턴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따라서 기교에 의존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 보니 더욱 과격하게 추상화하며 과장된 표현주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내가 <폴록과 친구들>을 쓰면서 확신할 수 있었던 점은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에서도 보듯이 미술사에서의 혁명은 아카데미 출신보다는 과격한 생각을 가진 예술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폴록의 친구들 모두 그보다는 드로잉을 잘 했지만 창작의 세계에서의 폴록의 상상력은 어느 누구보다도 빠르게 질주했는데 시속 160km가 넘었고 따라서 표현에 있어 그의 과격함은 따를 자가 없었다.

폴록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화가를 꼽으라면 벽화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쿠에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1896-1974)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디에고 리베라(1886-1957)와 호세 클레멘테 오로츠코Jose Clemente Orozco(1883-1949)와 더불어 멕시코를 대표하는 세 예술가들 가운데 막내이다.
폴록은 1924년에 클레몬트Claremont의 포모나 대학Pomona College에서 호세 오로즈코의 벽화를 직접 본 적이 있으며 멕시코 회화에 대한 관심은 그때부터 생겼다.
폴록은 1932년 형 샌드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쿠에이로스의 작품도 보았다.
시쿠에이로스가 1936년 뉴욕에 체재할 때 ‘화가들을 위한 실험적 워크샵 Experimental Workshop for Painters’을 조직했을 때 폴록은 그의 그룹에 동참했다.
서른 여덟 살의 시쿠에이로스는 멕시코 민중봉기를 혁명으로 상승시키는 데 일조를 한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미국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벽화를 홍보하고 있었다.
그는 1930년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고 이듬해 한 해 동안 가택연금되기도 했다.

폴록은 무보수 조수로 시쿠에이로스를 도왔는데 그가 그림을 미리 구성하지 않고 물감을 깡통에 담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 붓는 방법에 매우 감동을 받았다.
그런 방법으로 우연에 의한 이미지들을 생기는 데 매우 감동되었다.
그해 폴록은 캔버스를 마루바닥에 놓고 시쿠에이로스와 같은 방법으로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는 기교를 실험했는데 시쿠에이로스의 영향이었다.

경계가 없는 의식과 무의식
폴록의 작품세계를 알려면 그의 정신세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경계가 없는 의식과 무의식이 돌출한 창작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로 9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938년 뉴욕에 돌아온 조셉 헨더슨Joseph Lewis Henderson 박사가 호기심을 갖고 폴록의 정신세계를 분석했다.
1939년 1월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고 퇴원한 지 4개월 후 폴록이 다시 폭음을 하자 형 샌드는 폴록을 데리고 이스트 73가에 있는 헨더슨에게로 데리고 가 정신치료를 의뢰했다.
헨더스은 스승 융의 이론을 폴록에게 적용시켰는데 융은 미술을 상징학과 연계시켜 미학이론을 전개했으며 예술가들이 그들이 상상하는 정신세계로부터 이미지들을 창조해낸다고 믿었다.
융은 보통 사람은 직관, 느낌, 감각, 사고 세 가지 개성 혹은 기능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균형을 이룬 후 전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런 융의 이론을 적용해 헨더슨은 폴록이 갖고 있는 본능적 경향들이 집합적 무의식 안에서 어떤 경향으로 나타나는지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의 개성들의 재통합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폴록의 창작과정을 거꾸로 연역해 그의 드로잉들을 분석함으로써 무의식세계에서 분출하는 이미지들에 그가 어떻게 의식적으로 가치등급을 정하는가를 살펴보는 데 주력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 나타난 상징주의를 분석하면서 폴록의 단순한 관념들과 기본적인 정의들로부터 시작해 좀더 구체적이고 복잡한 내용들로 분석해 들어갔으며 폴록의 드로잉에 나타난 각기 다른 두 이미지를 그의 상반된 충돌로 이해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구부러진 선과 둥근 형태가 여성적인 것들을 상징한다고 결론내렸다.
헨더슨은 융의 이론을 폴록에게 적용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느꼈는데 폴록의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를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폴록이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헨더슨은 매주 가져오는 폴록의 드로잉들에서 자아의식적 요소들을 발견했고 또 본능적 경향들도 발견했는데 그런 것들은 ‘집단 무의식’을 의미했다.
그는 “잭슨의 그림들을 통해 개인적인 그의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지만 왜 내가 그때 그의 알코올중독을 치료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나의 의무는 그가 갖고 있는 개성적인 기능들을 한껏 북돋아주는 것이었지 고통당하는 그의 이기심을 구해주거나 재정립하는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헨더슨은 폴록이 어렸을 때 본 것들이 무의식 속에 남아 있음을 발견했고 그것들 중 인디언들에 관한 이미지들이 있음을 보았다.
폴록은 서부에서 성장하면서 인디언 문화를 호기심을 갖고 바라본 적이 있었으며 인디언들이 모래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감동해 나중에 인디언처럼 춤을 추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서 들소가 여인을 공격하는 장면이 매우 에로틱하게 묘사된 것을 봤으며 들소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사람이 들소로 변하는 경우도 보았다.
말은 뱀으로 둔갑했고 뱀은 몸을 둘둘 감은 모양으로 여자의 자궁 안에 쭈그리고 있었다.
폴록은 오로츠크의 그림에서 본 인상깊었던 이미지들을 자신의 무의식을 통해 재현하면서 그것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폴록은 멕시코 고대 상징들인 뱀, 도끼, 불구자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친구는 “폴록은 벤턴이나 멕시코 벽화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아주 나쁜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갖고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했다. 그것은 아주 신비한 방법이기도 했다”고 했다.

폴록이 헨더슨의 치료를 받은 기간은 18개월이었다.
폴록은 그에게 82점의 드로잉을 주었으며 과슈 한 점은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이 그림들은 나중에 ‘정신분석적 드로잉들’로 불리우면서 학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헨더슨은 1970년 이 드로잉들을 샌프란시스코 화랑에 팔았고 그해 10월과 11월에 65점이 휘트니 뮤지엄에서 ‘잭슨 폴록: 정신분석적 드로잉들’이란 명칭으로 대중에 공개되었다.
헨더슨은 훗날 샌프란시스코에 융 연구기관을 설립했는데 미국 내에서 융의 이론을 연구하는 가장 큰 기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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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호프만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한스 호프만Hans Hofmann

한스 호프만Hans Hofmann(1880-1966)은 뉴욕 스쿨 1세 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선생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 분이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지식이 충분해서 뉴욕의 젊은 화가들에게 모더니즘의 백과사전처럼 보였으며, 실습을 통해 구체적 사례들로 보여주는 회화의 당면 문제는 대부분 화가들이 고심하며 찾던 내용이었으므로 존경받는 선생이었다.
그는 회갑을 넘긴 나이인 데다 원만한 성격에 자상한 면이 있어 그를 따르는 화가들에게 아버지와도 같았다.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 중 불모의 토양에서 추상표현주의를 일궈낸 선두자들 아실 고키·윌렘 드 쿠닝·잭슨 폴록·훗날 폴록의 아내가 된 리 크래스너 등이 있고 평론가들로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해롤드 로젠버그를 꼽을 만하다.
훗날 크래스너는 호프만이 마티스와 피카소 사이를 시계불알처럼 왔다갔다 했다고 말했는데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로 불리우는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비교 분석하며 가르쳤기 때문이다.

호프만은 1880년 뮌헨 근처 바바리아Bavaria의 바이센부르크Weinssenburg에서 공무원 아버지의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과학·수학·음악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 그는 뮌헨 미술학교로 진학했으며 1903년 스승이 베를린의 부자이면서 미술품 딜러인 필립 프로이베르크Philip Freudenberg에게 그를 소개했다.
프로이베르크의 경제적 도움으로 호프만은 1904년 파리로 유학 가서 야간학교 콜라로시Colarossi에서 드로잉을 배우면서 에콜 드 라 그랑 쇼미에르Ecole de la Grande Chaumiere에 재학했는데 앙리 마티스도 그 학교에 재학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우정을 나눴고 입체주의 창시자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한 살 어린 피카소로부터 호프만은 입체주의 미학을 직접 청취할 수 있었다.
파리에 거주하면서 그는 미즈 볼페그Miz Wolfegg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로베르 들로네의 아내 소니아와 함께 의상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호프만은 1909년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와 그 외의 예술가들이 창설한 베를린 새분리파Neue Sezession에 그림을 출품했다.
이듬해 ‘야수들의 왕’ 마티스의 독려로 베를린의 미술품 딜러 파울 카시러가 호프만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1914년 봄 여동생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뮌헨에 갔다가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그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심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그는 징집에서 면제받았다.
전쟁으로 프로이베르크는 더이상 호프만을 경제적으로 도울 처지가 못되었으므로 호프만은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으며, 1915년 뮌헨 근교에 자신의 모던 아트 학교를 개교했는데 백여 명의 학생들이 입학했다.
그는 폴 세잔·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칸딘스키의 완전추상을 가르쳤으며 그의 학교는 모던 아트를 가르친 최초의 학교로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1930년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버클리Berkeley 대학 미술과 과장으로 재직하던 제자 워츠 프라이더Worth Fryder가 여름학기를 호프만이 맡아줄 것을 부탁하며 미국으로 초청했다.
1932년 또 다른 제자의 초청으로 두 번째 미국을 방문한 호프만은 턴Thurn 미술대학에서 초청 강사로 재직했다.
이때 호프만은 미국에 계속 체재하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뉴욕 이스트 57번가에 자신의 학교를 열었으며 1938년에는 그리니치빌리지 웨스트 8번가로 이교했다.
제자들이 호프만에게 존경심을 표했는데 “호프만은 산처럼 우뚝 서있었다.
그는 훌륭한 독일인의 이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말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훌륭한 교사였음을 지적한 제자도 있고, 또 다른 제자는 “호프만이 파리를 뉴욕으로 운반했다. 무식한 우리에게 그는 말을 가르쳐주었다”며 그를 통해서 유럽의 모더니즘을 알게 된 데 대해 고마워했다.

호프만은 “예술가와 평론가는 무엇을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며 그런 점을 그림들을 비교하는 가운데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그는 무엇이 마티스를 위대하게 만들고 왜 그의 그림이 라울 뒤피의 그림에 비해 더욱 훌륭한지 설명할 줄 아는 교사였다.

호프만은 색과 색·선과 선의 대비·채색방법이 그림의 표면에서 어떻게 반작용하는지 유심히 관찰하라면서 밀고 당기는 색과 선들의 상대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긴장감으로부터 어떤 에너지가 분출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궁극적으로 화가가 성취해야 할 점이 그러한 긴장감들을 조절하여 완벽하게 구사함으로써 최적의 균형에 도달하는 것임을 가르쳤다.
호프만은 늘 “그림을 평편하게 하며 색들이 노래하게 하고 최소한의 것을 갖고 최대한의 효과를 나타내라”고 했다.
“그림을 평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색들이 평편하게 남아 있게 하라”고 가르쳤다. 훗날 조안 미첼은 호프만으로부터 구조·빛·공간·색들의 서로 밀고 당기는 상대성 관계를 배워 회화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는데 뉴욕 스쿨에 미친 호프만의 영향이 차세대에까지 미쳤음을 알게 해준다.

교사로서의 호프만은 두드러졌지만 2차 세계대전 이전에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특기할 만한 작품을 발견하기 어렵다.
<암컷 우상 I Idolatress I>(1944)은 그가 64살 때 그린 것이다.
그가 가르친 대로 색과 선의 상관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긴장감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으며 색들이 두꺼운 마분지에 평편하게 남아 있도록 촉촉히 젖어들었음을 본다.
미술학교 교사가 그린 회화론이 두루 재료로 나타난 그림이란 느낌이다.
구조와 채색에서나 공간의 분활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매우 기술적인 그림이다.
문제는 기교가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록 감동은 비례해서 줄어든다는 점이다.

암컷 우상의 얼굴 옆모습에서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이 상기되고 환상적 분위기의 채색에서 호앙 미로의 그림을 머리에 떠올리게 한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고도의 기교와 대가들의 장점을 응용한 것은 일단 감탄할만 하더라도 그만큼 독창성의 결여가 보여져서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기교에 자신을 갖고 있는 화가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기교가 오히려 화가 자신의 창의력을 옭아매는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주의 묘사에 능통한 화가의 작품에서 은근히 기교를 뽐내려는 의도가 종종 발견되는데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기교 자체가 유치하다는 것이 아니라 창작 내용의 부재를 기교를 통해 외형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잭슨 폴록의 <달 여인 Moon Woman>(1942)을 보면 왼쪽 가장자리 위 아래로 폴록만이 알 수 있는 모호한 상징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기껏해야 폴록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미지들에 대한 폴록 자신의 현상들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상징 하나 하나 그의 경험과 관련 있을 테고 그래서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들이겠지만 관람자는 그가 무엇을 경험했길래 그런 잔상들을 잠재의식 속에 남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퍽 개인적인 경험의 산물들일 것이다.

호프만의 그림과 이 그림을 비교하면 그가 호프만에게서 수학했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연한 몸짓과 오른쪽 상단의 꽃무리가 여성임을 느끼게 하고 반달 얼굴에서 달을 의인화했음을 보는데 무엇보다도 강렬한 눈이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두 사람의 그림에서 의도적으로 쓱쓱 문지른 마른 붓자국과 고의적으로 그러나 사변적으로 남긴 얼룩은 거친 감정과 불가지한 것에 대한 불확실한 느낌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특성이다.
이를 개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일종의 채색방법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우리는 꽤나 문명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진화가 가속되었기 때문이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원시인들이었고 따라서 우리 내면에는 고대 원시인들이 지녔던 야성적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그런 야성적 기질을 윤리적으로 억누르고 있지만 잠재의식 속에서는 그 기질이 욕망으로 꿈틀대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호기심·공격적으로 강간하고 싶은 충동·잔인하게 행위하고 싶은 충동 등 고대인으로부터 물려 받은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억누르지만 않는다면 행동으로 다분히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의 기질인 것이다.
이런 잠재의식을 끄집어내어 형상화하는 것도 신화를 주제로 그린 화가들의 창작 영역에 포함되는데 폴 세잔의 여러 명의 남자가 공격적으로 강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알베르토 쟈코메티의 목이 부러진 채 바닥에 딩구는 몸체 조각은 원시적 기질과 관련 있고 폴록의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호프만의 암컷우상은 창작이라기보다 폴록의 달 여인을 변형시킨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폴록은 달 여인과 이듬해에 그린 원을 자르는 달 여인 Moon Woman Cuts the Circle(1943)을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화랑에서 소개했다.
원을 자르는 달 여인은 달 여인에 비하면 좀더 복잡하고 감성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주제는 신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유사한 데 가 있다.
서른한 살의 폴록 개인전 카탈로그를 호프만이 보관하고 있었음이 나중에 알려졌는데 그는 폴록의 달 여인을 보고 영감을 받아 2년 후 암컷우상 을 그렸다.
호프만의 봄 Spring은 화가로서 그의 재능을 시위한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그림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린 바람 Wind에는 1942년에 그린 것으로 적혀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빨라야 1944년이거나 혹은 이듬해에 그렸을 것으로 짐작한다.

호프만의 <봄 Spring>
이 그림들에서 나타난 물감을 질질 흘려 사용한 기교를 호프만이 1944년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명기하는 년대가 실제보다 앞섰던 사례를 로베르 들로네의 에펠타워를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린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솔직하지 못한 행위는 인정을 받고 싶은 화가의 욕심이 낳은 수치스러운 과오이다.

물감을 질질 흘려 사용하는 기교는 폴록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기교로 알려졌으므로 누가 먼저 이런 기교를 사용했는가가 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적이 있었다.
호프만은 자신이 이 기교를 먼저 사용했다고 주장했며 진실은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기교 문제를 접고 본다면 봄은 그가 흰색을 실타래처럼 엉키게 사용하여 창조적인 선을 보여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선들은 엷게 탄 물감이 흐르면서 절로 만들어지는 유연한 선들이지 화가들의 붓이나 예리한 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선들이다.
우연에 의한 자연스러운 선들로 관람자로 하여금 자유로운 시각을 즐기게 해준다.

이 그림은 또한 호프만이 자연에서 발견하는 이미지를 더이상 주제로 삼지 않고 내면의 이미지를 형상화했음을 말해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폴록에게 이런 식의 추상은 내면 세계에 대한 반복일 뿐이라면서 자연에서 주제를 발견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그 자신 내면을 관조해 추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그림은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제스추럴 추상임을 알 수 있을 텐데 화가가 팔을 휘휘 저으면서 제스추어를 통해 그렸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며 화가의 제스추어가 창작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은 제목이 <봄> 아니라도 상관없고 제목을 아예 달지 않아도 상관없다.
관람자는 화가의 몸짓을 통해 그가 느낀 감정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
제스추럴 추상화를 감상할 때는 관람자는 화가의 제스추어를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춤 추듯 팔을 이리저리로 휘젓는 기분을 느껴보는 것이 바람직한 감상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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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토비는 평생에 걸쳐 선불교 미학을 받아들이면서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모든 부분을 집약시키지 않고 상호관련 있게 한 마크 토비 마크 토비Mark Tobey(1890-1976)는 나이로 보면 뉴욕 스쿨 1세 이전의 세대에 속한다.
그가 뉴욕에 늦게 알려진 이유는 양차 대전 사이 유럽과 중국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0년대에 자신을 뉴욕 화단에 알렸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워싱턴주의 시애틀에서 보냈기 때문에 뉴욕 예술가들과는 자연히 교류가 적었다.
그는 1942년과 1955년 사이 뉴욕에서 모두 스물다섯 차례에 걸쳐 자신의 그림을 소개했으며 그래서 늦게나마 영예로운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토비의 <하얀 글씨 White Writing>는 그의 그림을 상징할 만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자주 사용한 하얀 선들은 동양의 글씨처럼 매우 우아했다.
그는 폴록이 그릴 캔버스 전체를 구성하는 오버올 화법을 먼저 실천했으며 폴록은 그의 <하얀 글씨>를 보고 감동했다.
토비는 1918년에 인류는 하나라고 가르치는 종교 바하이Bahai 신앙을 받아들였고, 1923년에 중국 회화를 연구했으며, 1934년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선불교를 집적 배웠다.
그의 미학은 바하이교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데 토비는 1962년에 말했다.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여러 종류의 명칭에 불과하며 오직 하나의 종교가 있을 따름이다.
모든 종교의 뿌리는 바하이의 견지에서 보면 세계와 인류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이론에 기초한다.”
이런 그의 사고가 그의 그림에서 주제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회화적 구성에 관해 “나는 모든 부분이 한 곳으로 집약되지 않고 그것들이 상호관련을 가지는 가치를 지니게 한다”고 했다.
인류가 하나라는 그의 신앙은 무수한 작은 선들과의 상호연관성을 통해 시각화되었다.
폴록과 드 쿠닝 그리고 클라인이 온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팔을 크게 움직이면서 그림을 그렸다면 토비는 손목만을 움직이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하얀 글씨들은 1935년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모든 개인적인 요소들을 제거한 순수 명상의 세계로 관람자들을 초대했다.

193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토비는 사람과 풍경을 사실주의적 방법으로 설명하듯 그렸다.
그러다가 1935-36년부터 추상에 관심을 갖고 힘 있는 하얀 선들을 사용하여 알아볼 수 있는 형태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흐르는 듯하면서도 율동적인 선들은 그가 운동에 대해 연구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그림들은 더욱 추상화되었다.
남은 평생 동안 그는 캔버스를 삼차원의 공간처럼 운동들로 채우면서 빛과 율동들이 어울리는 우주적 세계를 펄쳤다.

1942년 토비가 그린 <형상들은 남자를 따른다 Forms Follow Man>는 달라지고 있는 추상의 증거물로 충분한 작품이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적었다.
“언제까지 계속해서 이런 흰색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이 방법은 소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긴장감을 주며 너무 요구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가 1947년에 그린 <우리 세기의 섬광 Blaze of Our Century>에도 무수한 하얀 점들이 검은 종이 위에 전체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근래 도심의 빛나는 불빛 같기도 하고 이차대전 때의 붕괴되는 도시의 화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얀 점들 안에 있는 몇 가지 형상들로서 붉은 입술처럼 빛나는 형태 및 수평과 수직으로 구성한 기다란 파란 막대기들은 도시의 밤에 나타나는 형상들인지 전쟁에 살아남았던 생존자들을 상징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유령처럼 보였다.

1950년대에 그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도시의 긴장감과 쉼없는 동력주의를 표현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는 <명상 연작 Meditative Series>에서 온화하고 고요하며 시적인 우주적 차원의 그림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가 1957년에 그린 <우주의 필드 Universal Field>는 완전추상으로 그의 거대한 세계와 미세한 세계의 상호관계를 시사했던 가장 적절한 예의 그림이라 하겠다.

그는 “나의 영감의 근저에는 고향 중서부의 것들로부터 미세한 세계의 내용들까지 포함된다.
나는 돌과 나무껍질에 새겨진 우주의 많은 것들을 발견한 적이 있다”고 했다.
미세하게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클레의 그림들과 관련이 있다.
당시 클레는 미국 예술가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957년 3월과 4월에 토비는 50장에서 90장 가량의 드로잉을 검은 수미sumi 잉크를 사용하여 흰 종이에 그렸다.
그는 다른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처럼 개인적으로 영웅적인 인간성을 나타내는 영상을 추구하지 않았다.
1957년 7월 수미 드로잉을 그린 며칠 후 “폴록과 클라인이 존재한다는 건 알지만 나는 상이한 음조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의 드로잉들은 폴록이 50년대 초 검정색과 흰색으로 그린 그림들과 매우 유사했고 머더웰이 1965년에 연속적으로 그린 <서정적 조곡 Lyric Suite>과도 흡사했다.
토비는 <하얀 글씨>가 “한 번에 성취해야 하기 때문에 ‘연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토비는 평생에 걸쳐 선불교 미학을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쓴 적도 있다.
“우리는 점차 일본인의 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몇 근래의 미국 예술가들이 선불교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선불교가 그들의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다.
화랑과 언론에서 그 점을 거론한 적도 있었다.”
선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 가운데 애드 라인하트가 있다.
토비가 1948년에 그린 <통로 Transit>는 애드 라인하트가 40년대 후반에 그린 그림과 관련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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