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섭과 야나기
최순우는 『우리의 미술』에 조선 백자에 대해 적었다.
“의젓하기도 하고 어리숭하기도 하면서 있는 대로의 양심을 털어놓은 것, 선의와 치기와 소박한 천정天定의 아름다움, 그리고 못생기게 둥글고 솔직하고 정다운, 또 따듯하고도 희기만한 빛, 여기에는 흰 옷을 입은 한국 백성들의 핏줄이 면면이 이어져 있다.
말하자면 방순芳醇한 진국 약주 맛일 수도 있고, 털털한 막걸리 맛일 수도 있는 것, 이것이 조선 자기의 세계이며, 조선 항아리의 예술이다.”
고유섭은 조선 미술의 특색으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민예적인 것, 비정제성, 비균제성, 적조미, 적막한 유머, 어른 같은 아해,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등을 꼽았는데,
앞서 야나기가 주장한 바와 일치하는 견해로 그가 야나기의 민예론에 동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민예를 강조함으로써 한때 야나기의 비애미론에 비판적이었던 태도를 바꾸어 동조하는 주장을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에서 폈다.
“조선에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미술이란 것은 있지 아니하였고 근일의 용어인 민예라는 것만이 남아 있다.
즉 조선에서는 개성적 미술, 천재주의적 미술, 기교적 미술이란 것은 발달되지 아니하고 일반적 생활, 전체적 생활의 미술, 즉 민예라는 것이 큰 동맥을 이루고 흘러내려왔다.
그러므로 민예로서의 미술은 계급문화로서의 특수성보다도 일반 대중생활의 전체 호흡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하겠다.
고구려, 백제는 물론이요 신라의 미술도, 고려의 미술도, 이조의 미술도 모두 다 민예적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고려조로부터 개성적 미술, 천재주의적 미술이라 할 중국의 문인화가 일부 유행하기는 하였으나 중국에서와 같이 뚜렷한 개성문제, 천재주의가 발휘된 것이 아니요 다분히 이 민예적 범주에 들어 있었고, 개성적 요소, 천재주의적 요소는 극히 적은 특수례를 이루었을 뿐이다.”
고유섭이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에서 편 주장은 마치 야나기의 주장처럼 들려 그가 야나기의 이론에 전적으로 동조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의 미술은 순전히 감상만을 위한 근대적 의미에서의 미술이 아니다.
그것은 미술이자 곧 종교요, 미술이자 곧 생활이다.
말하자면 상품화된 미술이 아니므로 정치한 맛, 정돈된 맛에서는 항상 부족하다.
그러나 그 대신 질박한 맛과 순진한 맛에 있어 우승하다.”
야나기가 타계한 이듬해인 1962년 김원룡은 그를 추모하는 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술관 - 그 생애와 미의 세계’에서 야나기의 조선미관을 비애·적막 둘로 요약하며 비애미론과 더불어 즉여사상卽如思想을 바탕으로 한 야나기 민예론을 거론하면서 조선미관이 민예론의 핵심적인 개념들 무사의 미, 조작 없는 미, 타력의 미, 무유호추無有好醜의 미, 법미法美, 심상尋常의 미, 평범의 미 등이 불교미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야나기의 “성문화된 조선미의 철학은 영원히 광채를 잃지 않을 것이며 틀림없이 하나의 진리를 우리들에게 제시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