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는 해프닝의 창시자 
 

동양 미학은 매우 우수하다.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보완해준다.
그래서 동양사람들은 이 둘 모두를 갖추게 된다.
공자의 사상은 주로 낮에 그리고 업무에 적용되는데 관리가 조정에 나아갈 때는 의관을 갖추고 예를 따라서 언행 하게 된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의관을 벗어버리게 되면 기생과 어울려 혹은 친구들과 정자에서 술을 거하게 마시며 시를 읊는다.
공자의 예를 완전히 버리고 노자의 자유분방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불교 미학도 마찬가지로 조화의 미학이다.
매우 엄격할 때는 한없이 엄멱하지만 부처를 똥막대기로도 취급할 수 있는 것이 불교이다.

큰 중 원효는 친구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먹고는 똥을 싸고 서로 제 똥이 크다고 우겼다.
이 얼마나 해프닝적인 행위인가!

해프닝의 창시자로 핼란 캐프로우Allan Kaprow를 꼽고 해프닝이 1959년 혹은 1960년에 행위된 것으로 말하지만 원효대사가 이미 캐프로우보다 더한 해프닝을 시위했다.
원효는 마을에 들어갈 때는 다시 승복을 입고 염격한 수도승의 규율을 따랐는데이 또한 자유분방한 그의 모습인 것이다.

동양인은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한데 섭렵할 줄 아는 지혜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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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과 야나기


최순우는 『우리의 미술』에 조선 백자에 대해 적었다.
“의젓하기도 하고 어리숭하기도 하면서 있는 대로의 양심을 털어놓은 것, 선의와 치기와 소박한 천정天定의 아름다움, 그리고 못생기게 둥글고 솔직하고 정다운, 또 따듯하고도 희기만한 빛, 여기에는 흰 옷을 입은 한국 백성들의 핏줄이 면면이 이어져 있다.
말하자면 방순芳醇한 진국 약주 맛일 수도 있고, 털털한 막걸리 맛일 수도 있는 것, 이것이 조선 자기의 세계이며, 조선 항아리의 예술이다.”

고유섭은 조선 미술의 특색으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민예적인 것, 비정제성, 비균제성, 적조미, 적막한 유머, 어른 같은 아해,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등을 꼽았는데,
앞서 야나기가 주장한 바와 일치하는 견해로 그가 야나기의 민예론에 동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민예를 강조함으로써 한때 야나기의 비애미론에 비판적이었던 태도를 바꾸어 동조하는 주장을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에서 폈다.
“조선에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미술이란 것은 있지 아니하였고 근일의 용어인 민예라는 것만이 남아 있다.
즉 조선에서는 개성적 미술, 천재주의적 미술, 기교적 미술이란 것은 발달되지 아니하고 일반적 생활, 전체적 생활의 미술, 즉 민예라는 것이 큰 동맥을 이루고 흘러내려왔다.
그러므로 민예로서의 미술은 계급문화로서의 특수성보다도 일반 대중생활의 전체 호흡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하겠다.
고구려, 백제는 물론이요 신라의 미술도, 고려의 미술도, 이조의 미술도 모두 다 민예적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고려조로부터 개성적 미술, 천재주의적 미술이라 할 중국의 문인화가 일부 유행하기는 하였으나 중국에서와 같이 뚜렷한 개성문제, 천재주의가 발휘된 것이 아니요 다분히 이 민예적 범주에 들어 있었고, 개성적 요소, 천재주의적 요소는 극히 적은 특수례를 이루었을 뿐이다.”

고유섭이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에서 편 주장은 마치 야나기의 주장처럼 들려 그가 야나기의 이론에 전적으로 동조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의 미술은 순전히 감상만을 위한 근대적 의미에서의 미술이 아니다.
그것은 미술이자 곧 종교요, 미술이자 곧 생활이다.
말하자면 상품화된 미술이 아니므로 정치한 맛, 정돈된 맛에서는 항상 부족하다.
그러나 그 대신 질박한 맛과 순진한 맛에 있어 우승하다.”

야나기가 타계한 이듬해인 1962년 김원룡은 그를 추모하는 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술관 - 그 생애와 미의 세계’에서 야나기의 조선미관을 비애·적막 둘로 요약하며 비애미론과 더불어 즉여사상卽如思想을 바탕으로 한 야나기 민예론을 거론하면서 조선미관이 민예론의 핵심적인 개념들 무사의 미, 조작 없는 미, 타력의 미, 무유호추無有好醜의 미, 법미法美, 심상尋常의 미, 평범의 미 등이 불교미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야나기의 “성문화된 조선미의 철학은 영원히 광채를 잃지 않을 것이며 틀림없이 하나의 진리를 우리들에게 제시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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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는 직관으로서만 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야나기는 직관으로서만 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에게 직관은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는 절대적인 입장이었다.
이는 신비주의로서만 설명될 수 있는데, 내가 미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가 미를 보는 것으로 기독교적 신비주의로 말하면 신이 나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는 혹은 신이 자신을 관조하는 일체를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이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찾으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거울로 반사하듯이 보는 것이다.
그는 공예를 중생에게 생활의 반려伴侶이며 순례의 동행 이인二人 혹은 한 쌍으로 보았고, 미와 중생, 그 사이에 숨은 언약,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미에 관여할 수 있는 길”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공예를 통해 중생은 구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공예의 길은 미의 종교에 있어서 타력도라 할 수 있다.”

절대적 입장에서 일체를 이루는 신비주의 사상에서 그는 공예의 미를 규정했다.
"준엄하다든지, 숭고함이라든지, 멀리 우러르는 세계가 아니라 보다 밀접하고 친숙한 영역이다.
따라서 공예는 정취의 세계, 즉 윤택함이라든지, 정취라든지, 촉촉함이라든지, 훈훈함이라든지, 부드러움이라든지 등의 말이 기물의 아름다움에 관해 되풀이되는 세계이다."

야나기는 민예의 기능을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방법 타력본원他力本願,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에 따라 염불하면 정토에 왕생한다는 범부성불의 방법론에 의탁하는 정토종의 종지宗旨로 보았다.

야나기가 조선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조선 예술에는 타민족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민예적 특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 공예품에서 친근감, 온화함, 안으로 숨은 경이로운 아름다움, 깊은 맛, 조용함, 적막함 등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점을 들어 그는 중국 도자기와 조선 도자기를 비교할 경우 조선 도자기가 “더 조용하고 소박하다.
마음에도 급한 데가 없다. 같은 분명함이라도 한결 온화하고 조용하다”면서 “중국 것은 우리가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언제나 저편에서 다가온다.
조선 것은 이쪽에서 찾든 찾지 않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린다”고 했다.
조선의 민예적 특성을 그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애완하는 풍습이 있지만 이런 풍습이 조선에는 없어 미를 위한 미를 추구하지 않고 모두 실용품으로 제작되었음을 꼽았다.
그는 조선의 도자기는 작위의 폐를 벗어났으며 “만듦새는 자연스러우며 소박하며 약한 데가 없고 신경질적인 데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중국과 일본에 비해 가장 민예적임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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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는 미가 실용에서

야나기는 미가 실용에서 유리된 까닭에 찬미되었다면서 미의 진실성을 찾으려면 실용적인 공예품에 눈을 돌려야 함을 『공예의 도』에서 역설했다.
“미는 하나이지만 미의 핵심에 이르는 길은 둘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미술fine art이라 부르고, 하나는 공예craft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미의 표준은 사실 미술에서만 논해져 왔다.
따라서 공예는 낮은 위치로 전락하고 그 의의는 무관심 속에 버림을 받았다.
미학 책들을 보라. 그것은 완전히 미술 위에 세워진 미학이 아닌가.
공예는 야나기는 unfreie Kunst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또한 practical art로도 applied art로도 불렸다.
여기에서 부자유라든가, 실제라든가, 응용이라든가 하는 형용은 몇 단계나 격하된 의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미는 실용에서 유리되어 있는 것인 까닭에 찬미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미학이 과연 미를 진실되게 본 것이었을까.”

야나기는 공들인 상등품上手物보다는 하치물건下手物 혹은 잡구에 오히려 보편적인 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점을 『일본 민예미술관 설립취의서』에서 밝혔다.
“우리들은 이러한 미가 미술품이라고 간주되는 것에는 오히려 적고, 반대로 잡구雜具라고 생각되는 소위 하치물건에 많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원래부터 미는 도처의 세계에 숨어 있다.
그렇지만 이미 상등품은 섬약에 흐르고 기교에 빠지고 병마에 괴로워한다.
그에 반해 무명의 공인에 의해 만들어진 하치물건에서는 추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거기엔 작위의 상처가 거의 없다. 자연스럽고 무심하며 건강하며 자유롭다.”

야나기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공예운동Art and Craft과 아르 누보Art Nouveau의 이론적 배경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공예의 미술화를 추구한 존 러스킨에 대해서 “세계를 미술의 천국으로 높이기 위해 지상의 공예를 포기했다”고 비판했으며, 윌리엄 모리스의 작업은 “공예로 되지 못한 채 끝난 미술”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이런 비판에서 공예에 대한 그의 궁극적인 시각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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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의 특질


이경성은 『미술입문』(1961)에서 한국 미술의 특질로 감성적·선적·서정적·소시민적 네 요소를 꼽았다.
그에 의하면,
첫째,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비애에 충만되어 있어 감상적이며 그런 예를 인생의 허무함과 애처로운 인간심정을 노래한 시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서 감성성을 지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둘째, 선은 정서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고구려 벽화의 웅건한 선, 석굴암 불상의 우아한 선, 고려자기의 세련된 선, 이조자기의 소박하고 우직한 선, 그리고 이조 목공품의 힘찬 선이 우리의 전통이며 도한 한국미의 약점으로 꼽는다.
셋째, 공예품에서 많은 걸작이 발견되는데 삼국시대 이전 도자기, 가구, 금공품 등에서 수준 높은 솜씨를 보여준 한국인이 그 후 좋은 솜씨를 보여주지 못한 이유를 통일신라 이후 정착생활의 안이와 평안을 주조로 하는 무사주의 그리고 대륙의 압력에서 오는 비애 속에 형성된 서정적 감성 때문으로 꼽았다.
마지막으로 역사적으로 비극을 많이 겪다보니 한국인은 이상과 영원을 약탈당했고 늘 오늘의 문제에 골몰해야 하는 소시민이 되어버렸으며 강한 인간형人間型을 창조하지 못하고 영탄적詠嘆的인 인간형이 되어 자연히 미술이 소시민적이 된 것이라고 했다.

한국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론은 야나기의 ‘비애의 미’와 고유섭의 ‘적조미寂照美·무기교無技巧의 미’이다.
고유섭은 1940년 10월 23일~27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조선 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에서 시도한 학설을 토대로 한국 미술의 특징으로 무기교의 기교·무계획의 계획, 즉 민예적 미로 꼽으면서 한국 미학은 비정제성·비균제성·무관심성·구수한 맛 등으로 추리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민예적 특징으로서 이를 먼저 주장한 사람은 야나기이다.

야나기는 민예民藝에서 미를 발견하면서 생활과 미가 결합된 공예의 미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참다운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생활과 긴밀히 결합”되었기 때문에 “미술은 공예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민예의 의미』(1931)에서 민예를 규정했다.
“민民은 원래 민중의 민이고 예藝는 우리의 의미로는 공예工藝의 예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민중적 공예’의 약칭으로서 민예 두 글자를 골랐던 것이다.
민중예술이라는 의미라 해도 좋으나 예술이라고 하면 자칫 개인적인 고급 미술 등을 연상시키므로 좀더 이름도 없는 공인工人들이 만든 실용 공예품이라는 의미를 시사하고 싶어 ‘민중적 고예’의 의미를 취해 민예라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영역할 경우에도 Folk Art라는 어휘를 피해 Folk Craft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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