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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화운동

관전과 이과전 모두에 불만을 품은 화가들에 의해 전개된 미술운동이 소위 말하는 전위미술이다.
일본 최초의 전위미술은 1920년대인 다이쇼大正 말기에 일어났다.
1920년경부터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미술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이런 사상을 배경으로 한 미래주의, 다다주의, 러시아의 구성주의, 독일의 표현주의 등의 미술운동이 전개되었다.
전위예술가들은 과격했으며 혁명을 추구했으므로 대부분 프로레타리아 미술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7, 8년 존속하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소멸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이과전이 여전히 의욕적인 신인들을 화단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지만 신선함을 상실해 갔고 이런 시기에 새로운 단체전으로 주목을 받은 그룹이 1926년에 설립된 ‘1930년 협회’와 좀더 후에 등장한 ‘독립미술협회’였다.
야수주의와 에꼴 드 파리 화풍의 영향을 받은 이들 그룹의 한때 활발하게 활약했고 우리나라 화가들로는 구본웅, 김만형(1916~84), 송혜수(1913~), 오점수(오지호의 다른 이름), 김응건, 임응구 등이 이들 단체전에 출품했다.

특기할 점은 1930년대 제전, 이과전, 혹은 독립미술협회전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소위 말하는 신일본주의로 일본식 서양화에 대한 집착이었다.
서양의 모방 일변도에서 벗어나 일본적 정감과 풍토를 표현하려는 의식의 발로로서 국수주의적 사회의 요구이기도 했다.
오카쿠라 덴신이 1900년에 이미 강연을 통해 ‘신일본화운동新日本畵運動’의 이념을 여섯 가지로 집약했는데, 전통을 존중하는 가운데 서양의 양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응용하여 모방이 아닌 새로운 창작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지였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의 전통화법 또는 서양화법의 어떠한 기법에 의하든 그것을 완전히 소화하고 흡수하여 적어도 모방한 것은 아니어야 한다.
특히 일본화법의 기초교육을 받은 화가는 양식과 기법에 사로잡히지 말고 감정의 솔직한 표현을 마음에 둘 것을 요한다.
2. 고인명가古人名家의 화법에 정통할 것.
3. 생명감이 화면에 약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4. 화법을 완전히 수득修得해야 비로소 보다 독창적으로 자기표현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5. 작화作畵의 품격을 존종할 것.
6. 옛날 명품, 특히 전통 유세회의 연구 속에 한층 진보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사실.  

‘신일본화운동’은 훗날 신일본주의를 주장한 독립미술협회의 고지마 젠자브로兒島善三郞(1893~1962), 수다 구니타로須田國太郞(1891~1961) 등에게 일본적 서양화에 대한 정체성 논의가 이루어지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여태까지 추종하던 프랑스 미술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의 아름다운 풍토와 성정을 표현하기 위해 일본 고유의 표현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일본적 서양화에 대한 관심은 1935년 이후 전 화단으로 퍼져나갔다.
일본 화가들은 서양의 양식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정서와 관습을 표현해야 한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었으며 이런 자의식은 국수주의적 사회 분위기와 다분히 관련이 있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이를 규탄하는 국제연맹을 1933년에 탈퇴한 후 더욱 더 침략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므로 1930년대의 미술은 이런 군국주의 상황 아래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중반 또 다른 전위미술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과전과 독립미술협회가 권위 위주로 달라지고 세력을 두고 운영의 갈등을 드러내자 화가들은 대규모의 단체전보다는 소규모의 동인전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긴자銀座의 화랑가를 중심으로 전시활동을 폈다.
이들은 대부분 미술학교를 갓 졸업했거나 신인들이었지만 비평가들이 잡지를 통해 이들의 동향을 소개했다.
이들은 유럽의 구성주의와 초현실주의에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의 대표적인 두 그룹이 1937년에 창립한 기하적 추상을 추구한 ‘자유미술가협회’와 2년 후 창립된 초현실주의 경향의 ‘미술문화협회’였다.
앞서 언급한 전위그룹에 비해 정치적으로 비교적 온건하며 순수 추상을 추구한 자유미술가협회는 자유라는 명칭이 군국체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1940년에 ‘미술창작가협회’로 명칭이 바뀌는 등 곡절을 겪으며 1944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전람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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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양화

1920년대 근대 동양화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 화가는 오창석吳昌碩과 제백석霽白石이었고 일본 화가로는 다께우찌 세이호竹內栖鳳와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이었다.
오창석은 여든의 고령이었지만 패기 넘치는 작품을 계속해서 제작하고 있었으며 명성을 국내외에 크게 떨치고 있었다.
전통양식을 무시한 세찬 선과 현란한 채묵을 구사해 쏟아내는 신선한 작품은 매우 진보적이었으며 회화뿐 아니라 전각篆刻의 도법장법刀法章法이 국내외 젊은 동양화가들에게 입신의 경지로 보여졌고, 구태 속에서 허덕이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동경의 표상이 되었다.

제백석은 오창석과 연령차는 있지만 나란히 쌍벽을 우리는 중국화의 거목이었다.
그는 오창석과는 달리 수묵 중심의 소박한 필치로 풍자와 은유가 담긴 화조 어해를 즐겨 그려 구수한 서민적 정취를 풍겼으며 97세의 장수를 누리는 동안 대단히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수많은 제자를 거느렸다.
공산정권 때는 동향관계인 모택동 주석의 특별한 예우를 받아 만년에 부귀를 누렸다.

일본의 다께우찌 세이호와 요코야마 다이칸은 만년에 예술과 명성을 겸비한 일본 화단의 양대 거목이었다.
다께우찌는 관서, 요코야마는 관동 화파의 영수로 군림하면서 동경을 거점으로 한 관동파와 경도를 중심으로 한 관서파를 이루고 제국미술원을 둘러싸고 쟁패와 알력을 계속했다.
다께우찌는 북종화적 골격 위에 진보적인 참신한 구도와 세련된 필치도 독창적인 화풍을 창안해냈다.
당시 일본 화단의 일반적인 경향은 일본화 특유의 생경한 구도와 변화 없는 선, 서양화적인 진채를 사용하는 사실 위주였지만 다께우찌의 작품에서는 간명직절簡明直截, 군더더기가 없는 명쾌한 표현으로 자연에 접근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젊은 동양화가들을 사로잡았다.

요코야마는 수묵 위주의 산수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나화풍의 산수화도 아니고 일본식 신나화도 아닌 독창적인 풍경화였다.
수묵이 번져서 운연雲煙 경계를 이루는 식의 그의 작품은 신중하고 근엄한 그리고 품격 있는 화경을 펼쳐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러나 일반 관람자와 신경향을 따르는 젊은이들에게는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새로운 화화 양식에 관한 정보를 얻기에는 중국보다는 일본을 통하기가 훨씬 쉬웠으며 일본 화단 소식에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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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중요 재벌인 미츠이, 미츠비시, 노구치 등은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의 주가폭락으로 세계가 경제공황에 빠졌다.
세계대공황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취약한 일본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1929~31년 일본의 공장 총생산액은 삼분의 일로 줄었고 1930년 한 해만도 3백여만 명의 노동자가 직장을 잃었다.
일본 농업은 공황에 이어 닥친 농업공황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함으로써 다른 부문보다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 노동자와 농민은 독점자본가와 지주계급이 공황의 손실을 자신들에게 떠넘기려는 데 대해 격렬히 저항했다.
일제는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대륙침략을 감행했다.
일제는 1931년 9월 그들이 조작한 유조구柳條溝의 철도폭파사건을 빌미로 만주를 침략하고 이듬해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웠다.
그 밖에도 상해, 열하를 차례로 침략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등 대륙침략의 길로 나섰다.
경성제대 학생들은 반제동맹을 결성하고 행동에 나섰고 일제는 경찰을 풀어 이들을 검거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가 상해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축하장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일제는 만주침략을 개시하면서 조선을 전진기지로 이용하는 동시에 독점자본의 수탈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고자 했다.
일제는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삼고 조선의 모든 자원을 끌어내 침략전쟁에 동원했다.
일제는 공황의 위기 속에서 활로를 모색하던 일본 독점자본가들에게 유리한 투자시장을 확보해주는 한편 농업지대인 만주지방을 효율적으로 지배·수탈하기 위해 조선에서 공업화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에는 공장법 등을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독점자본가들에게 풍부한 노동력을 자유롭게 수탈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일본의 중요 재벌인 미츠이, 미츠비시, 노구치 등은 방직, 화학, 기계, 금속공업, 광업부문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후 값싼 전기, 풍부하고 저렴한 원료와 노동력을 독점적으로 이용하여 생산과 유통을 전면적으로 지배해갔다.
현저히 불리한 상황에 처한 조선 자본가들은 일제 자본이 침투하지 않았거나 영세한 생산부문인 술, 누룩공장, 철공소를 경영하거나 양말, 직물제조업, 유기, 옹기 등의 생산에 종사했다.
식민지 공업화정책에 따라 노동자의 수는 급속히 증대했는데 공장, 광산, 토목, 건축 노동자 수만도 1933~38년 5년 동안 2.8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황 이전보다 30~50퍼센트 인하된 기아임금을 받으면서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혹사당했다.
이들 대부분은 숙련노동에서 배제되어 힘든 육체노동을 강요당했으며 일본인 노동자 임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는 등 민족적 차별을 당했다.

일제는 1936년 8월 군부파시스트인 미나미南次郞를 신임 총독으로 파견하는 한편 조선 민중을 철저히 통제하는 일에 착수했으며 이를 위해 시국계몽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경찰력을 증강하고 그 기구를 개편·강화했다.
1938년에는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한 후 도, 부·군, 읍·면, 동·리에 지방연맹을, 직장에 직장연맹을 설치했으며 지방연맹 아래에 10호를 단위로 한 애국반을 두었다.
일제는 결국 1940년 9월에 독일·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하게 되고 이듬해에 진주만을 폭격하는 것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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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 번의 영주 사타케 쇼잔과 그의 신하 오타노 나오타케의 회화
 

  오쿄의 메가네에에서 볼 수 있는 세밀한 경관 묘사는 우키요에에 영향을 끼쳐 1770년대와 1780년대에 우타가와 도요하루歌川豊春(1735~1814)의 우키에에 계승되었다.
서양화의 원근법을 도입한 풍경 판화 우키에에 탁월한 도요하루는 시대의 취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안에이安永에서 간세이寬政기에 걸쳐 명성을 얻었다.
일본의 초기 풍경화가 대부분 노조키 카라쿠리(이중희 174, 124)를 통해 감상하는 메가네에였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1770년대부터 1800년대 까지 서양의 양식을 자의적으로 받아들인 화풍이 성행했는데 에도양풍화江戶洋風畵로 아키타 난화와 시바 고칸의 양풍화는 언급할 만하다.
오늘날 동경인 에도에서 북쪽으로 560km 떨어진 아키타 번秋田藩의 영주 사타케 쇼잔佐竹曙山과 그의 신하 오타노 나오타케小田野直武(1749~80)가 중심이 되어 그린 서양식 회화를 아키타 난화秋田蘭畵라고 한다.
아키타 번은 악화된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1773년에 당대의 물산학자 히라가 겐나이를 에도로부터 초빙했으며 겐나이는 아키타 번의 지성支城인 가쿠타데에서 그곳의 무사 오타노 나오타케의 뛰어난 그림 솜씨를 보고 그를 에도로 오게 해서 서양화를 배우게 했다.
나오타케가 처음 그린 것은 1774년 8월에 간행된 <해체신서解體新書>를 위한 삽화였다.
서양 의학서에 있는 동판화로 된 인체해부 그림을 모사하는 것으로 서양인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곧 서양 양식을 익히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음영에 의한 엄격한 사실주의를 익힐 수 있었다.
아키타 번의 영주 사타케 쇼잔은 영지와 에도를 격년제로 근무하는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에 의해 나오타케가 타계한 1780년 이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에도에서 근무하면서 아키나 난화의 창시자 나오타케로부터 서양 양식을 배웠다.

아키나 난화는 자주적 서양화풍의 그림이라는 것 외에도 자체의 화론에 입각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사타케 쇼잔이 1778년 9월에 발간한 『쇼잔사생첩曙山寫生帖』에 ‘화법강령’과 ‘화도이해’라는 소제목으로 아키나 난화 화론이 수록되어 있다.
그들은 서양화를 유용성의 명분으로 받아들였으며 박물학 도감과 같은 사실묘사가 절실한 분야에 필요하다고 타당성을 주장했다.
쇼잔은 사생도뿐만 아니라 서양화풍의 그림도 그렸다.
쇼잔은 ‘화법강령’에서 동양화의 근간과 같은 필법을 부정했다.

첫째, “필법을 주로 할 경우 실용을 잃어버린다”고 하면서 “세필로써 형상을 그리고 채색하여 비로소 묵의 흔적을 없앤다”고 했다.
필법을 부정하는 반면 세필의 묘사와 채색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둘째, 여백 대신에 실공간을 도입한 것으로 동양화에서 여백은 암시적 의미를 지니며 여운을 담은 표현공간의 역할을 하지만, 쇼잔은 여백을 비현실적 공간으로 인식했으므로 화면 전체가 하늘이나 구름 등 현실적인 실공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도이해’에서는 서양화법을 논했다.
첫째, 음영법으로 사물의 그림자가 태양의 반대편에 생긴다는 것이다.
음영은 사물의 실체인식이 아니라 광원에 의한 일시적인 무형의 현상이지만 쇼잔은 현재 바라보는 상태가 사물을 파악하는 기준임을 주장했다.
둘째, 원근법으로 멀고 가까움의 차이에 따른 크기와 농담의 변화, 지평선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함을 역설했다.
특기할 것은 서양화론이 서양의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양화론에서 그 개념을 빌어온 것이란 점이다.

나오타케가 서양 양식으로 풍경화를 그린 것이 에도의 서민 출신 화가 시바 고칸司馬江漢(1747~1818)을 자극했다.
고칸은 히라가 겐나이의 소개로 나오타케를 만나 그로부터 직접 서양화법을 배웠다.
그는 일찍이 1770년경 우키에에서 니시키에라고 불린 다색 판화 기법의 개발에 성공한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1725?~70)의 화풍에 투시원근법을 적용했다.
하루노부는 1765년에 다색 판화 기법을 개발하여 우키요에에 획기적인 발전을 꾀했다.
고칸은 우키요에풍의 미인화에도 음영화법을 적용하여 새로운 화풍을 개발하기도 했다.
고칸은 원근법을 적용하여 일본의 풍경을 그리면서 낮은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사용하여 현실 공간을 광대한 공간으로 느낄 수 있게 표현했다.
그는 수평선 부근을 밝게 처리하거나 경물이 사라지는 소실점에 산이나 연기 등을 구성시켰다.
그리고 화면 전체에 명암이 나타나게 했는데 그의 작품은 더러 이국풍의 풍경으로 나타났다.
그의 1783년작 <삼위경도三幇景圖>와 1786년작 <영국교도兩國橋圖>에는 실경보다 넓게 펼쳐진 공간과 투명하게 맑은 대기가 느껴진다.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을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이 시기에 그대로 옮길 수 있게 해준 기계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고칸이 말한 사진경寫眞鏡이 그것으로 초기 카메라Camera Opuscule이다.
그는 사진경에 관해 적었다.
“산수는 그 땅을 밟는 것과 같이 그리는 법으로서 사진경이라고 하는 도구이다.
이것을 가지고 만물을 옮겨 그린다.
때문에 일찍이 대상을 보지 않고 그리는 법이 없다.
동양화와 같이 무명의 산수를 그리는 일은 없다.”

에도양풍화는 1787년 막부의 총리격인 로쥬老中에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1758~1829)가 부임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다노부는 간세개혁寬政改革을 단행하여 막부체제를 위협하는 상업 자본의 만연을 억제하고 귀농과 농업생산 증대에 힘썼다.
그는 간세이학寬政異學의 금禁이란 정책으로 양학洋學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했다.
양풍화도 기반이 점차 약화되었으며 양풍화가 개발한 풍경 묘사는 에도 시대 말기의 우키에로 흡수되었다.
그렇지만 현실의 자연공간을 객관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원근법과 명암법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점과 세밀하게 묘사하는 서양화의 영향은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1866~1924)가 인상주의 양식을 소개할 때가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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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호의 『필법기 筆法記』



신神: 신적인 화가를 말하는데 이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대자연의 변화를 따름으로써 자연스럽게 형상을 성취하는 사람을 말한다.
묘妙: 놀라운 화가 혹은 경이로운 화가를 말하는데 이는 그의 사상으로 천지만물의 본성을 꿰뚫어 봄으로써 모티프의 진리에 따라 사물들이 그의 붓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람을 말한다.
기技: 슬기로운 화가를 말하는데 이는 모티프의 진리에 일치하지 않는 대강의 윤곽들을 그리는 사람을 말한다. 즉 그가 그린 사물들에는 이치가 없고 유사성도 없다.
교巧: 숙련된 화가를 말하는데 이는 단지 자연의 모방자로서 오로지 위대한 원리들에 부합하는 미의 흔적들을 잘라내어 조합한다.
이런 분류는 형호荊浩의 유명한 논집인 『필법기 筆法記』에 설명되어 있다.
형호의 분류는 당대 말기에 씌여진 『당조명화록 唐朝名畵錄』에 있는 주경현朱景玄의 분류 및 1005년에 출간된 『익주명화록 益州名畵錄』에 있는 황휴복黃休復의 분류와 같은 이전의 분류방식을 수정한 것이다.
이들 초기 주장은 724-777년에 쓰여진 『서단 書斷』 속에 있는 장회관張懷瓘의 서예작품에 대한 분류에 기초하고 있다.
장회관은 화가들을 신·묘·능能의 세 등급으로 구분했다.
주경현은 이에 덧붙여 네 번째 범위로 자발적이거나 충동적인 것, 즉 일逸이라는 제4의 범위를 설정했다.
그렇지만 일逸格이 등급상 어디에 속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경현은 그것이 뛰어난 것으로서 또한 저급한 것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낼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반면에 황휴복은 일격을 등급 중에서 첫 번째로 두었으며 형호는 일逸을 기奇로 대체한다.
오스발드 시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경현과 황휴복에 의해 제시된 이론체계의 틀을 수정한 이러한 분류는 실로 그 나름의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자발적으로 충동적인 화가(逸)를 신적인 화가(神)로부터 구별해내는 것은 슬기로운 화가(奇)를 숙련된 화가로부터 구별해내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The Chinese on the Art of Painting』, New York: Schocken Books, 1963, pp.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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