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중요 재벌인 미츠이, 미츠비시, 노구치 등은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의 주가폭락으로 세계가 경제공황에 빠졌다.
세계대공황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취약한 일본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1929~31년 일본의 공장 총생산액은 삼분의 일로 줄었고 1930년 한 해만도 3백여만 명의 노동자가 직장을 잃었다.
일본 농업은 공황에 이어 닥친 농업공황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함으로써 다른 부문보다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 노동자와 농민은 독점자본가와 지주계급이 공황의 손실을 자신들에게 떠넘기려는 데 대해 격렬히 저항했다.
일제는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대륙침략을 감행했다.
일제는 1931년 9월 그들이 조작한 유조구柳條溝의 철도폭파사건을 빌미로 만주를 침략하고 이듬해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웠다.
그 밖에도 상해, 열하를 차례로 침략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등 대륙침략의 길로 나섰다.
경성제대 학생들은 반제동맹을 결성하고 행동에 나섰고 일제는 경찰을 풀어 이들을 검거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가 상해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축하장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일제는 만주침략을 개시하면서 조선을 전진기지로 이용하는 동시에 독점자본의 수탈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고자 했다.
일제는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삼고 조선의 모든 자원을 끌어내 침략전쟁에 동원했다.
일제는 공황의 위기 속에서 활로를 모색하던 일본 독점자본가들에게 유리한 투자시장을 확보해주는 한편 농업지대인 만주지방을 효율적으로 지배·수탈하기 위해 조선에서 공업화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에는 공장법 등을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독점자본가들에게 풍부한 노동력을 자유롭게 수탈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일본의 중요 재벌인 미츠이, 미츠비시, 노구치 등은 방직, 화학, 기계, 금속공업, 광업부문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후 값싼 전기, 풍부하고 저렴한 원료와 노동력을 독점적으로 이용하여 생산과 유통을 전면적으로 지배해갔다.
현저히 불리한 상황에 처한 조선 자본가들은 일제 자본이 침투하지 않았거나 영세한 생산부문인 술, 누룩공장, 철공소를 경영하거나 양말, 직물제조업, 유기, 옹기 등의 생산에 종사했다.
식민지 공업화정책에 따라 노동자의 수는 급속히 증대했는데 공장, 광산, 토목, 건축 노동자 수만도 1933~38년 5년 동안 2.8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황 이전보다 30~50퍼센트 인하된 기아임금을 받으면서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혹사당했다.
이들 대부분은 숙련노동에서 배제되어 힘든 육체노동을 강요당했으며 일본인 노동자 임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는 등 민족적 차별을 당했다.
일제는 1936년 8월 군부파시스트인 미나미南次郞를 신임 총독으로 파견하는 한편 조선 민중을 철저히 통제하는 일에 착수했으며 이를 위해 시국계몽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경찰력을 증강하고 그 기구를 개편·강화했다.
1938년에는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한 후 도, 부·군, 읍·면, 동·리에 지방연맹을, 직장에 직장연맹을 설치했으며 지방연맹 아래에 10호를 단위로 한 애국반을 두었다.
일제는 결국 1940년 9월에 독일·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하게 되고 이듬해에 진주만을 폭격하는 것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