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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김윤철 지음 / 지와사랑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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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의 책머리에: 믿음의 조상들 이야기

<창세기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창세기는 성경의 첫 번째 권으로 하나님 구원의 계획을 알리는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겪어온 파란만장한 인생과 신앙으로 창세기 12장 1절부터 마지막 장 마지막 절(50장 26절)까지이다.


아브라함 이전까지는 설화이지만 아브라함부터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이라는 말은 “온 나라의 아버지 the father of nations (the King James, 개역성경에는 뭇민족의 아버지 the father of a multitude로 되어 있다)”라는 뜻인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 창세기의 주요 주제이다.


이 책의 구성은 아브라함의 가계를 따른 것이다.


제1편 아브라함의 일대기(12:1-25:11).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25:12-28:9).

제2편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 이야기(28:10-36:43).

제3편 야곱과 열두 아들 이야기(28:10-36:43).

제4편 요셉과 야곱 가족의 이집트 이주 이야기(37:1-49:33).
요셉의 최후 이야기(50:1-26).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는 파란만장하다.
단편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인생을 살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위기 때마다 아내를 누이라 속였으며, 롯의 두 딸은 아버지의 아이를 낳았으며, 야곱은 형을 배신하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고, 장인이자 외삼촌인 라반을 속여서 재산을 증식하는 등 파렴치한 일들을 일삼았다.
어찌 보면 그들은 우리와 다름없이 평범하거나 그 이하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 시인하고 회개했으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집요하게 하나님께 매달렸고, 하나님이 분부하시면 순종하고 따랐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으며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 유산으로 상속시키려 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후손에게 전함으로써 자신들이 범했던 과오를 후손들은 범하지 않도록 하는 교훈으로 남겼다.
이것이야말로 선민으로서 손색이 없는 자세라 하겠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부끄러운 과거를 은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서 후세를 교훈하려는 진실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
이것은 믿음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들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출판사 知와 사랑에서 사랑의 총서를 기획하면서 구약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청탁해 왔다.
이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나아가 기독교의 본질을 찾아간다는 일에 동참하는 뜻으로 오랫동안 준비해오던 이 주제로 『창세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창세기 이야기』의 전편이라 할 수 있는 천지창조와 노아에 이르는 『하나님 이야기』는 따로 쓰기로 하고 우선 역사적인 인물들의 인생역정을 살펴보았다.
앞서 출간된 『성지 이야기』와 『욥 이야기』에 이은 세 번째 책이다.


나는 평생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 대한 흠모의 마음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독서해 왔다.
이제 인생의 황혼을 맞아 지금까지의 신앙과 학습을 정리하고자 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생애와 신학을 전하는 『선지자 이야기』도 집필 중이다.
이 책들을 통해 독자들이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다양한 고대문화 속에서 성경의 참된 의미를 이해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끝으로 본문에 대한성서공회에서 출간한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을 인용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더러 괄호 안에 공동번역성서를 함께 인용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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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이야기 1
김광우 지음 / 지와사랑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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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이야기>를 쓰며

시편 150편은 거의 기원전 1,000년경부터 200년경까지 약 800년에 걸쳐서 쓰여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이것들은 그들로부터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기 훨씬 전에 쓰여진 것들이라서 시편을 읽으면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고고학자라도 된양 오랜 유적을 탐험하는 흥분을 느끼게 되며 부드러운 붓으로 흙을 털어내어 숨겨진 보화를 드러내듯 순박한 믿음의 파편들을 한 데 모으는 일이라서 보람도 생긴다.
신앙이 언제 어떻게 생겼으며 또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살피는 작업은 종교의 본질에 접근하는 고귀한 작업인데, 예를 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시편의 말에서 신앙의 본질이 두려움에 있었음을 안다.


시편은 아주 오래 전에 불리운 노래들이라서 소박하기가 이를 데 없으며 진심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라서 따라 부를수록 한없는 정취를 느끼게 된다.
요즘처럼 사람의 마음을 한 치도 헤아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래 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투명한 마음을 그윽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이란 즐거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다.


150편의 노래들 가운데는 하나님께 대한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난 찬양도 있지만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도 있고,
자신에게 닥친 환난에 대한 불평도 있으며,
스스로를 뽐내는 자기 과시가 있고,
기도에 대한 응답도 있지만 무응답도 있다.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부른 애절한 노래도 있지만 하늘 가까이서 부른 환희의 노래도 있으며,
성산 시온산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부른 순례자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이방의 산에서 포로의 몸으로 실의를 통렬하게 표현한 노래도 있다.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힘차게 부른 노래가 있고,
전쟁터에서 승리를 기원한 노래가 있으며,
쫓기는 몸으로 굴속에 피신한 상태에서 부른 절박한 노래가 있고,
눈물을 흘리며 애곡한 노래도 있다.


노래를 지은 이들의 신분들 또한 다양한데 선지자, 왕, 제사장, 성가대장, 교사, 순례자, 평민, 노예 등이다.
이들은 혼자 부를 수 있는 노래, 선창을 따라 부르는 노래, 몇 그룹으로 나누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노래, 그리고 다 함께 부르는 합창을 작사하였다.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을 숨기지 않고 모두 드러낸 노래도 있지만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도 있으며, 후대를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교육용 노래도 있다.
이렇듯 노래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 내용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역사, 율법, 계시, 예언, 가르침, 참회, 형제애가 있으며,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도 있고, 원수를 저주하는 노래도 있으며, 개종자의 노래도 있고, 순례자의 노래도 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노래도 여러 편이나 되며, 복음서 저자들, 바울, 베드로, 야고보, 히브리서 저자를 포함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시편을 즐겨 인용했다.


시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을 선택해서 그분의 나라를 세우셨다.
이를 테면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건국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다.
이 이름을 모세가 호렙산에서 발견했는데 인자하고 신실하며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이다.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기도를 반드시 듣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다.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을 사용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 안에 공동번역성서를 인용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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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김홍기 지음 / 지와사랑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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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한계: 두 왕국설(Two Kingdom Theory)

<종교개혁사>(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루터의 정치윤리는 “세속 권력에 대한 복종의 한계”(1523), “평화를 위한 제언”(1525), “농민 폭도들의 만행에 반대함”(1525), “농민을 가혹하게 적대한 논문에 관한 공개서한”(1525) 등의 논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논문들 속에서 루터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처럼 국가의 권력이 종교적인 일에 간섭하는 것도 철저히 거부하고,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 레오 10세가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려는 것도 철저히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루터의 정교분리의 두 왕국설은 교황이 세속 권력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것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루터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두 왕국설을 주장했다.
왼손 왕국의 주인은 세속 통치자이고, 그리스도는 다만 오른손 왕국의 주인이다.
따라서 그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주장한다(행 5:30).
그는 정치와 종교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세속적인 일(영토와 백성과 재산과 육체에 관한 일)과 영적인 일을 구분지었다.


루터는 교회는 사랑과 용서로 다스려져야 하고, 세속 국가는 칼과 정의로 다스려져야 함을 그는 강조하고, 율법과 복음, 정의와 사랑을 구분지었다.
교회는 복음과 사랑으로 다스려져야 하고, 세속 국가는 율법과 정의로 다스려져야 함을 주장한다.
그는 딤전 1:9에 근거하여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위하여서는 율법의 정의가 필요하고, 마 7:18에 근거하여 좋은 나무는 저절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는 이중구조의 윤리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두 왕국 모두에 속한다.
크리스천은 세속 권세에도 복종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권세에도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으로서 산상수훈대로 살아야 하고, 세상왕국의 시민으로서 세속 법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말하는 산상수훈은 크리스천의 삶에 적용되는 것이지, 불의와 악을 행하는 세속인들을 통치하는 일에 적용해서는 무질서해진다는 것이다.
세속인들의 무질서와 방종에 대해서는 율법의 칼과 정의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바로 이러한 두 왕국설의 시각에서 질서를 파괴하고 무정부 상태를 만드는 농민들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한계가 있다.
불의한 자와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와 부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혁명은 “마리아 찬양” 주석에서 강하게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혁명은 허용하지 않는다.
두 왕국설에 근거하여 인간의지의 무력함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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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야기 - 사랑의 총서 2
김광우 지음 / 지와사랑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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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수는 과연 누구일까?
 <예수 이야기> 중에서


이 물음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알아봐야 할 주제이지만 여기서 간략한 답을 먼저 찾아보자.
그는 산타클로스처럼 가공의 인물도 아니고 상징주의자들의 인격화된 신화적 인물도 아니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사도 바울에게서 들을 수 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여인에게서 나고 율법 아래 놓였던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는 모든 유대인들의 자식과 마찬가지로 태어난 지 여드레 후에 할례를 받았으며 아주 흔한 이름인 여호수아로 불리었다.

그의 청소년기는 베일에 싸여 있다.
그래서 유언비어 같은 가설들이 전해졌다.
그가 장사꾼들을 따라 영국까지 갔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인도로 가서 불교 교리와 요가를 몸소 익혔다는 주장도 있다.
그가 십자가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요가법으로 살아남아 인도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는 주장도 있다.

예수는 누구일까?
복음서 저자들은 한결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자연히 우리는 무엇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도록 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누가복음서에 유일하게 어린 시절의 기록이 있는데 예수가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이다.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관례에 따르면 열두 살의 어린이는 율법과 예배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글쓴이).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누가복음서 2:41-50】

유월절이 되면 면적이 약 30만 평 되는 예루살렘 성내 전체가 북새통을 이룬다.
유대의 각 지역뿐 아니라 국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유월절에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망국의 한을 푼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는 순례자들의 행렬로 파도를 이루며, 그들 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예루살렘의 거리들은 아주 비좁아서 흔히 미아들이 속출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잃어버린 줄 알고 몹시 낙담했다가 사흘 후 성전에서 아들을 발견하자 매우 기뻤다.
그러나 열두 살 난 아들의 말은 아주 뜻밖이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누가는 예수를 감히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는 조숙한 소년으로 묘사하여 경건함과 지혜가 이미 어린 소년에게 깃들어 있었으며, 그가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정해져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를 끝으로 이후 약 20년에 걸친 예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글을 쓴 누가마저도 이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그 무렵 유대에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헤롯 대왕이 B.C. 4년에 사망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세 아들이 유대를 분할하여 다스렸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에 터전을 마련하고 유대, 이두매아, 사마리아를 다스렸으며, 안디바는 갈릴리와 요르단 동편 베레아를, 빌립은 다마스커스와 레바논에 접경을 둔 게네사렛 호수(갈릴리 호수) 북부와 북동부를 다스렸다.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베들레헴 주변의 사내아이를 죽인 헤롯은 B.C. 4년에 사망한 헤롯 대왕을 가리키며 그 이후에 나오는 헤롯은 아들 안디바를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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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야기 - 사랑의 총서 2
김광우 지음 / 지와사랑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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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수의 성장배경은 어떠했을까?
<예수 이야기> 중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기록했으며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밤나무골 용식이, 만수의 아들 용팔이 식으로 부르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야고보를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마리아는 야고보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예수의 호칭은 그가 나사렛에서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예수 당시 사람들은 그를 ‘나사렛 예수’라 불렀으며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마태와 누가는 나사렛을 큰 동네처럼 기술했지만, 나사렛은 갈릴리 남부 산간지대의 그리 경사지지 않은 언덕 위에 있는 해발 380m의 조그만 마을이다.
나사렛은 구약성서에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지만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가운데 하나로 B.C. 2000년경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다.

예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예수가 바로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분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자 나다나엘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복음서 1:46】

이렇듯 나사렛은 베들레헴처럼 유대의 왕이 나실 곳으로 예언된 마을도 아니고 예루살렘처럼 경건화 된 곳도 아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촌락이다.
나다나엘의 말처럼 그야말로 특별히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는 나사렛이 바로 예수가 성장한 고향이었다.

갈릴리 지방은 오래된 주거지역이다.
비가 적당히 내려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며, 갈릴리 호수에는 물고기가 많아 사람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4km이며 둘레는 약 50km이고 넓이는 약 170km2 나 된다.
호수의 북쪽 헤르몬 산으로부터 흘러온 물이 갈릴리 호수를 이루며, 호숫물은 남쪽으로 흘러 요단강을 거쳐 사해로 빠진다.
호수는 고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작은 하프 모양의 악기처럼 생겼는데, 양손으로 줄을 뜯어 연주하는 그 악기를 헤브라이어로 ‘긴노르(Kinnor)’라고 부른다.
호수의 모양이 긴노르처럼 생겼다고 해서 구약시대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긴네렛 호수라고 불렀고 예수 당시에는 게네사렛 호수로 불렸다.
복음서에 나오는 게네사렛 호수가 바로 이 갈릴리 호수이다.

《유대 고대사》의 저자 요세푸스는 갈릴리의 비옥함과 아름다움을 칭찬해마지 않았다.
그는 갈릴리에는 모든 종류의 동물과 식물이 있다고 하면서 특히 게네사렛 호수 주변의 온화한 기온을 지적했다.
오래 전부터 대지주들이 소작인들을 시켜 농사를 지었고 부유한 이방인들도 이곳으로 이주해와 대지주가 되었다.
갈릴리의 대지주들이 농부와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부렸으므로 그들이 대지주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이 예수의 설교에서 발견된다.
갈릴리라는 말은 ‘민중들의 지방’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이 국가로 형성되기 전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엔 갈릴리를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 불렀다(마태복음서 4:15).
유대 지역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배타적이라고 여겼지만 갈릴리 사람들의 신앙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신앙에 비해 오히려 순수한 편이었다.

갈릴리의 산간지대에 위치한 나사렛은 예수 조상대부터 살던 마을이다.
예수는 가축을 기르는 우리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보잘것없는 촌락 나사렛에서 성장했다.
나사렛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수태했음을 알려주었다는 집이 있는데 그곳에는 오늘날 ‘마리아 수태고지 교회’가 있다.
예수는 적어도 여섯 남매와 함께 나사렛에서 성장했다.
결혼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여러 누이들 외에도 네 형제들의 이름이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마태복음서 13:55-56】

예수가 처형된 후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된 야고보, 요셉의 헬라화된 이름인 요세, 신약성서 유다서의 저자로 믿어지는 유다, 이름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는 시몬이 예수의 형제들이다.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조상의 이름에서 딴 것이며 요세(Joses)와 예수(Jesus)는 헤브라이어를 그리스어로 부른 이름이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건축업자가 아니라 목재를 다루는 목수였다.
165년에 순교한 유스티누스는 요셉이 목재로 된 농기구나 쟁기, 멍에 등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예수가 청년이었을 때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불리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직업도 목수였다(마가복음서 6:3).

나사렛에 보존되어 있는 예수가 생존했던 당시의 서민주택을 보면, 흰 석회를 바른 골방에 창문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예수가 살던 집도 그와 같은 골방이었을 것이다.
당시 갈릴리 목수들의 대부분이 품팔이꾼이었듯이 예수도 일감을 찾아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며 노동을 해서 홀어머니 마리아를 부양하는 가난한 생활을 했다.

나사렛에는 불구자와 병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낮에는 무척 덥고 밤에는 비교적 추운 동네라서 동풍이 부는 계절에는 폐렴환자가 급증하며, 이질도 가끔 발생하고 말라리아 병이 유행하기도 했다.
복음서에 언급되는 고열병 환자와 귀신들린 자는 말라리아 환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는 귀신들린 자와 갖가지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병자들을 낫게 했다.

나사렛에서 성장하는 소년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이라고는 회당에서 행해지는 구약성서에 관한 가르침이 전부였다.
예수는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배웠다.
그가 회당에서 강론을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읽을 줄 알았고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쓸 줄도 알았다.
그가 글을 써서 제자들에게 준 적은 없었지만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언가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요한복음서 8:6, 8:8).
그가 구약성서를 읽은 것으로 보아 헤브라이어를 알고 있었으며 일상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갈릴리가 헬레니즘 지방에 근접해 있으므로 예수와 제자들은 그리스어도 알았거나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예수는 예언자들 가운데 이사야를 가장 존경했다.
그는 이사야서를 가장 많이 인용했으며, 이사야의 말씀에 관하여 가르치기를 즐겨했다.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펴서 읽은 적도 있었다(누가복음서 4:16-17).
그는 헬레니즘과 로마의 풍습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들로부터는 영향 받은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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