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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 캐리커처 회화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의 작품에는 동물들도 종종 등장한다.
그는 동물을 캐리커처로 익살스럽게 묘사했다.
1921/6 작품 <달걀과 좋은 불고기는 어디에서 오는가>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에서나 볼 만한 만화 같은 그림이다.
달걀을 닭에게서 얻고 불고기를 돼지에서 얻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런 평범한 내용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한 데서 그의 기발한 사고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삶은 달걀에 ‘달걀’이라고 적어 넣고 털이 뻣뻣하게 곤두선 돼지 아래에는 ‘좋은 불고기’라고 적었다.
그리고 하단 오른편에 ‘이 모든 그림을 그린 사람은 클레 아저씨입니다’라고 적었다.
그는 이 수채화를 한 해 전에 그린 드로잉을 닮게 그렸다.
이 작품을 친구이며 화가, 피아니스트인 가트프리드 갈스턴Gottfried Galston(1879~1950)의 딸 플로리나 아이레네Florina-Irene를 위해 그렸으며 소녀에게 주었다.
플로리나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 갈스턴은 뮌헨의 클레 아파트 반대편에 살았다.

<배나무 아래의 남자>(1921)는 ‘감나무 아래에서 감 떨어지만 기다린다’는 우리나라 속담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배나무 아래 한 사내가 두 다리를 길게 펴고 앉아서 배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노동 없이 결실을 거두려는 운이 좋은 사람을 묘사한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젊지 않은 사람의 성적 갈망을 조롱하려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붉은 점이 있는 배가 여성의 젖처럼 생겨 후자의 해석도 가능해보인다.

가장 창의적인 화가
클레는 현대의 거장들 가운데서 가장 창의적이고 대단한 많은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완성작은 8천여 점에 달한다.
수많은 다양한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각각의 양식들을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어 그의 붓질이 닿은 작품은 어떠한 양식으로 제작되었어도 다른 작품과 혼동할 우려가 없다.
비할 데 없는 타고난 상상력과, 최고의 솜씨, 탁월한 형태 감각을 겸비한 클레는 강의와 지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금세기의 혁신적인 미술에 어떤 예술가도 능가하지 못할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주요 공공 컬렉션에 속해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베른 미술관에 있는 파울 클레 재단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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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 음악의 장단 구조를 풍경화에서 리듬으로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사원 정원>(1920)은 1914년 4월 튀니지를 방문하고 받은 감동을 되새겨 그린 것으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연상시킨다.
계단을 올라 문을 통해 들어가면 여러 정원으로 갈 수 있는 장면이다.
높은 담 밖으로 야자수가 보이고 둥근 지붕을 한 건물도 여러 채 있다.
그는 그림을 세로로 삼등분하여 재구성하기도 했는데 오른편 두 그림이 너무 대칭적이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 부분이 왼편으로 옮겨졌다.
그는 1925년부터 과거와 현재의 작품을 가격별로 등급을 매겨 I(1)로부터 X(10)로 분류하고 I를 가장 싼 가격으로 X를 가장 비싼 가격으로 상징했다.
이런 등급을 연필로 작품 하단에 적어 넣었는데, 이 작품 하단 왼편에 1920/186 아래에 II(2)라고 적힌 것이 보인다.
1920/186은 1920년에 제작한 작품 가운데 186번째라는 뜻이다.

<장미 정원>(1920)은 유기적인 형태와 비유기적인 형태를 혼용해 리드미컬하게 배열한 작품으로 클레는 1920년경 이런 작품을 연속적으로 제작했다.
정원에 대한 그의 개념은 자연적 유기적 성장과 인위적 질서 모두였다.
이 작품에는 비정형 삼각형과 부등변사각형들이 있고 밝은 붉은색, 오렌지색, 핑크색 벽돌로 쌓아올린 회화적 벽이 있다.
건축적 방법으로 이런 색상들을 벽처럼 쌓아올리는 구성을 선택했다.
그는 회화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회화적 사고 Pictorial Thinking>란 제목의 글로 ‘문화적 리듬 cultural rhythms’을 언급하면서 음악에서의 장단 구조를 풍경화에서 리듬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그의 회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며 칸딘스키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클레는 들로네의 색상 대비에서 영향을 받아 이를 리듬으로 표현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
그는 화면 중앙의 장미로부터 리듬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도록 구성했다.
그는 노래의 가사를 구성의 요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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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는 일기와 편지에서 섹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는데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여인>(1920)은 에로틱한 작품이다.
클레는 일기와 편지에서 섹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는데 1898년부터 1918년까지 쓴 일기에 섹스에 대한 주제의 글은 한 번 밖에 언급되지 않는다.
1901년 여름 일기에 ‘성적 절망감 sexual helplessness’이란 단어를 적으면서 ‘순화 purification’, ‘감성적 평정 emotional equilibrium’의 필요성에 관해 적었다.
1900년부터 타계한 1940년 사이 아내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에로틱한 내용의 글을 화제로 삼은 것은 단 한 번뿐이다.
1932년 4월 17일자 편지에서 그는 인간의 관계가 에로티시즘이나 굴종 혹은 선택적인 친화 혹은 이 세 가지 모두에 의한 것을 구분했다.
우리가 에로티시즘을 발견하는 것은 작품을 보고서가 아니라 그가 그런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제목이 시사하지 않으면 작품만으로는 에로틱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왼편의 남성이 팔을 위로 올리고 오른편을 향해 달아나는 여성을 잡으려는 행동을 취하고 있으며 또 하나의 눈이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오른편에 종이를 대고 검은색 물감을 칠했으므로 연인은 화면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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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적, 상징적, 추상적 기호들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는 칸딘스키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읽고 색채에 대한 이해가 증대되었다.
칸딘스키가 가지고 있던 색채에 대한 심리적 효과는 클레가 추구하던 점이기도 했으므로 그는 칸딘스키의 색 이론에 동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 이입>과 <고딕 미술에서의 형태의 문제 Formprobleme der Gotik>(1912)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클레는 1916년 3월 11일 독일군으로 징집되었다.
세계대전 중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그는 표현수단으로 숫자, 알파벳, 느낌표, 정지부호, 화살표, 별, 깃발, 눈, 심장 같은 형상적, 상징적, 추상적 기호들을 주로 사용했다.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자연 형태들 대신에 십자가, 활, 창살, 점 모양 등을 사용했다.
이런 기호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연과 결부된 한계에서 벗어나 무한한 표현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예술가의 손은 “낯선 존재 의지의 전적인 도구”라고 했다.
기호와 상징은 다의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논리적인 하나의 의미로 확정지어지지 않는다.
그가 작품에 시적인 제목을 붙였기 때문에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창조에의 고백 Schopferische Konfession>(1919)에서 자신이 표현한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적었다.

<급강하하는 새와 화살표>(1919)에서 급강하하는 새는 비행기처럼 보이는데 그는 한 해 전에 <새-비행기>를 이런 형태로 연필로 드로잉한 적이 있다.
연필 드로잉은 비행학교에 복무할 때 그린 것으로 자신의 머리 위를 떠다니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새라는 생각이 든 것으로 짐작된다.
직사각형들을 연결시키면서 연결되는 부분에 점을 찍고 새 다리와 머리를 그려 넣어 새처럼 보이는 비행기구가 되게 했다.
드로잉에서는 하단에 작은 화살표를 두 개 그려 넣었지만 수채화에서는 큰 화살표 세 개를 그려 넣어 하강의 방향을 가리켰으며 강렬한 인상을 심었다.
드로잉을 작품을 완성하는 준비과정으로 삼았으며, 한 점의 드로잉에서 여러 점의 작품을 고안해내기도 했고, 때로는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다시 작품의 출처가 되게 사용했다.

<하강하는 새>는 드로잉 <하강하고 활주하는 새>를 그린 후 구성을 정리하여 완성시킨 작품이다.
그는 1918년 3월 8일 비행학교에서 폭격수 게오르그 슈미트의 비행기가 추락하여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 날 목격한 충격이 <하강하는 새>를 그리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기에 적었다.
“이번 주 나는 세 차례에 걸친 치명적인 사건을 목격했는데 한 사람은 프로펠러에 부딪혔고 두 사람은 공중에서 충돌했다. 어제는 네 번째의 사람이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지붕 위로 거꾸로 곤두박질쳤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일 년 후 클레는 그 날의 사건을 머리에 떠올리며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하강하는 새 모양을 모사하면서 비행기에 13이란 숫자를 적어 넣고 오른편에 하강하는 방향을 화살표로 크게 그려 넣어 하강의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시사했다.
숫자 13은 비행기에 적힌 넘버일 수도 있고 불운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화살표는 이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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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는 색과 평면적 구조로 구성하는 추상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의 창작에 원천적인 영감을 준 것이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의 오르피즘Orphism이다.
오르피즘이란 명칭은 1912~13년에 발표한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붙인 명칭으로 시인은 오르피즘은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 이해하고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 Les Peintres cubistes>(1913)에서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예술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나타낸 미술이라고 했다.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했으며 이런 점이 클레와 마케와 같은 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들로네는 색채를 점차 형태에서 분리시켜 주제가 없는 회화를 창조했는데 완전추상이었다.

클레는 들로네의 작품에 매료되어 1912년 파리에 갔을 때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창문>을 보고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감탄했다.
클레는 들로네를 가리켜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라고 적으며 들로네의 논문 <빛에 관하여 On Light>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들로네는 1906년 신인상주의와 외젠 슈브뢸의 색채 이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후 계속 중심 모티프가 될 색채 이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쇠라의 점묘주의로부터 파생된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연결을 탐구했다.

색채의 체계적 사용을 통해 과학적으로 색채를 물질화시켰으므로 쇠라의 작품은 비구상은 아니더라도 방식만큼은 추상적이었다.
그는 거의 수학적 구조를 통해 색채를 물리적으로 다루면서 조형적 조화를 꾀했다.
들로네는 <자서전>(1924)에서 적었다.
"회화는 자체의 수단과 법칙을 가져야 한다.
아폴리네르가 기술한 대로 ‘빛의 열매’인 색은 화가의 물질적 수단이며 언어인 것이다.
결국 화가는 물질적 요소들의 도움으로 작업하게 되고 모든 요소는 의지에 의해 전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양의 조절이 가능한 색채는 화면에 분배된다.
화면은 작업을 통해 유일한 참조가 되며 비판과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색채 또한 색채들끼리 또 다른 척도를 자아낸다."

클레는 색과 평면적 구조로 구성하는 추상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영향이며 <꽃 침대>(1913)가 그 예이다.
미묘한 색조의 변화가 리드미컬한 효과를 낸다. 들로네와 만남은 선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온 클레로 하여금 색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색채 형태 회화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파리의 모더니즘에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파리의 모더니즘은 국제적으로 가장 수준 높은 미술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빛이 합리적인 방법으로 형상을 만든다는 것을 안 클레는 색채와 명암이 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고, 색채를 검은색과 흰색 사이의 숱한 농담의 위계로 보고 색조를 무게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명암의 증감을 통해 무게를 조절하여 화면의 통일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910년 이전에 쓴 일기에서 색에 관한 세심한 관찰과 명암의 증감을 다루는 현명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화가가 될 능력이 없다고 자탄한 것을 보면 색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고 또한 많은 실험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발견한 색채는 그의 화면 구성에 변화를 일으켰고 칸딘스키의 자유롭고 즉흥적인 창작은 들로네의 색채 대비와 더불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들로네의 영향은 1914년 초에 그린 그림들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무제>가 그 예이다.
색면을 격자 모양으로 배열하는 구성이 그에게 창작의 자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색면의 격자 모양을 입체주의자들인 피카소와 브라크 그리고 오르피스트 들로네가 사용했는데, 그들은 공간과 오브제를 부순 후 회화적 목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런 양식을 사용한 것이지만 클레는 시각적 대상인 오브제를 부수고 재구성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평편한 구성을 위해 사용한 것이 다르다.
평편한 정사각형 색면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이 시기에 몇몇 유럽 화가들이 구사하고 있었다.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가 1913~14년에 평편한 절대주의Suprematism 추상화를 제작했다.
유럽에서 구성주의가 발생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절대주의를 추구하는 이유를 말레비치는 저서 <비대상 세계 The Non-Objective World>(1959)에서 자연의 외양을 재현하고 이상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순수한 예술적 감정이나 비대상적 감수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현실과 유사한 것, 이상화된 이미지가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추상화는 순수 예술적 감정을 위한 것으로 작가의 감정이나 태도를 배격하려는 것이다.
말레비치가 추구한 미학은 칸딘스키와 클레의 색면 구성에도 적용된다.
다만 클레는 이를 회화의 한 가능성으로만 간주했을 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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