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블로거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제 책에 관한 것이라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추천도서 코너를 오늘부터 운영하려 합니다.

그 첫 번째로 김광우 저서의 뒤샹과친구들, 폴락과친구들, 워홀과친구들 시리즈 입니다.

 

 

 1997년 출판

 

2001년 출판

 

2005년 출판

 

특히 저는 뒤샹과친구들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흔히들 현대미술의 시발을 피카소라고 보지만, 뒤샹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뒤샹이 작업했던 환경과 그 주위 작가들의 이야기.

이야기 내용을 풍부하게 그리고 여러면에서 다루고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추천합니다.

마르셀 뒤샹, 잭슨 폴락, 앤디 워홀 골라먹는 재미 ㅋㅋ 

 

제가 읽었을 때는 이런 표지가 아니었는데, 재판발행하면서 표지 디자인들 바꿨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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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이란 이름은 굳이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소비문화를 공유하는 대중적인 세대의 사람이라면 한두 번은 들어봤음 직 하다. 간단한 상이 색채만 뒤바뀌고 계속 반복되는 모습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보다 더 앤디 워홀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영화 팩토리 걸을 접한 후였다. 영화가 상영되던 당시 곳곳에 붙어있던, 영화 팩토리 걸의 화려한 색감의 메인 포스터는 내 눈길을 끌었고,
본문요약 앤디 워홀이란 이름은 굳이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소비문화를 공유하는 대중적인 세대의 사람이라면 한두 번은 들어봤음 직 하다. 간단한 상이 색채만 뒤바뀌고 계속 반복되는 모습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보다 더 앤디 워홀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영화 팩토리 걸을 접한 후였다. 영화가 상영되던 당시 곳곳에 붙어있던, 영화 팩토리 걸의 화려한 색감의 메인 포스터는 내 눈길을 끌었고, 나는 워홀과 그가 영화를 제작하던 시기 그의 예술 감각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에디 세즈웍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영화는 그의 뮤즈와 뮤즈의 비극에 중점을 두며 워홀의 작품 활동 시기 중 일부만을 다루었고, 은빛 머리칼로 기억되는 대중스타로서의 워홀의 이미지는 간략하게 언급했기에 영화자체만으로는 워홀 알아가기에 많은 부족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일상 속에 그의 삶에 대해 더 이상의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미술사 강의를 수강하면서 얻은 뜻밖의 기회로 앤디 워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보다 더 알아보고자 했다. 앤디 워홀은 수많은 작품을 그의 독창적인 기법과 시각을 활용하여 남겼지만 분량 상, 전반적인 작가의 행적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고 ‘실크스크린과 반복의 미학’, ‘앤디 워홀과 죽음 이미지’, ‘창조의 공간, 팩토리’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작가 연구를 진행했다.
목차 서 론

#1.실크스크린과 반복의 미학

#2. 앤디 워홀과 죽음 이미지

#3. 창조의 공간, 팩토리반복,


죽음 그리고 창조
참고자료 이자벨 드 메종 루주, 2007, 『현대미술』
앤디 워홀, 1975, 『앤디 워홀의 철학』
노버트 린튼, 1993, 『20세기의 미술』
클라우드 호네프, 2006, 『앤디 워홀』
김광우, 1997, 『워홀과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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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는 에칭으로만 그 독특한 소묘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판화는 판의 형태에 따라 볼록판, 오목판, 평판, 공판 등으로 나뉘고 판의 재료에 따라 목판, 동판, 석판 등으로 구별된다.
나무는 구하기 쉽고 조각하기 쉬워 목판이 널리 사용되는데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 제작한 일련의 목판화와 뭉크의 목판화 또한 유명하다.

동판화는 판화 가운데 기법의 다양함과 미적 가치에서 인정을 받는다.
동판화는 뷰린으로 얇은 금속판을 깎는 인그레이빙engraving 기법과 내산성의 막을 입힌 금속판을 긁은 후 산으로 부식시키는 에칭etching 기법 등 두 가지로 나눠진다.
뒤러는 뷰린의 명수로 알려졌는데 그의 아버지가 금은 세공사였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기술을 연마하게 했다.
동판화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에칭이다.
16세기 후반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전문 동판화가들이 그 기술공정에 들어갔는데, 많은 화가들이 선호한 이유는 인그레이빙에 비해 기술적으로 훨씬 용이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에칭으로만 그 독특한 소묘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드라이포인트를 병용하여 명암표현을 탁월하게 했다.
그의 시대에는 에칭이 정점에 달했다.
뭉크의 경우 동판화는 거의 에칭이다.

석판화의 경우 초기에는 석판에 조각한 작품도 있었지만 지금은 석판이라면 리도그래피의 대명사가 되었다.
목판이나 동판처럼 파는 작업이 전혀 없는 이 기법은 기본적으로 평평한 석판 (오늘날에는 아연판을 많이 사용한다) 위에 지방성의 리트 크레용이나 잉크로 그린 후 석판화를 적신다.
그 위에 지방성의 잉크를 묻힌 룰러를 굴리면 물과 기름의 반발작용으로 잉크는 그려진 곳에만 묻게 된다.
리도 그래피의 가장 큰 장점은 직접 석판면에 그려도 좋다는 것이다.
리도 그래피는 18세기에 발명되어 19세기 후반에는 채색석판화로 발전하여 화려한 꽃을 피웠다.
아르 누보는 리도 그래피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계속 제작한 뭉크의 특성상 판화는 그에게 매우 유용했다.
뭉크의 주요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판화로도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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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어떤 의미에서 '세기병'을 앓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심한 우울증에 괴로워했으며, 공허와 목표 상실의 감정을 가졌고, 생에 대한 권태와 싸웠다.
그는 우울증 환자였으며 늘 불만에 차 있었고 미완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삶의 태도로서의 낭만주의에는 반대했지만 회화 경향으로서의 낭만주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낭만주의의 광범위한 모티프 때문이었다.
그는 낭만주의자로 불리워지는 데 달가워하지 않았고 자신이 낭만주의의 대가라는 데 불쾌감을 나타냈다.

들라크루아는 제자를 교육하는 일에 흥미가 없었고 일반인이 참관할 수 있는 아틀리에를 한 번도 연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몇 사람의 조수를 썼을 뿐 제자로는 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영주같은 취향이 그로 하여금 일체의 자아폭로주의나 현학주의를 싫어하게 했으며 대중을 경멸했는데
26살에 이미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말년에 "금수에 내맡겨져 갈가리 찢겨진 30년이었다"고 회고한 데서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친구와 숭배자 및 후원자들이 있었고 후원자를 통해 국가로부터 작품 주문을 받았지만 대중의 이해와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외톨이였으며 고독했는데 낭만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했던 것보다 더욱 그러했다.

그를 아무런 유보 없이 인정해주고 사랑한 친구는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 쇼팽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음악을 최대의 낭만주의 예술로 보았고 쇼팽을 낭만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낭만주의자로 칭찬했다.
이는 낭만주의에 대한 그의 사고가 일관성이 없었음을 보여주는데
모차르트를 최대의 경탄을 갖고 평하면서도 베토벤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며 낭만적이라고 보았다.
음악에 있어서 그는 고전주의적 취향을 갖고 있었으며, 쇼팽의 천편일률적인 감상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도 사상적으로 자신과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베토벤의 자유분방함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못했다. 

들라크루아는 정치가 샤를 들라크루아와 유명한 가구 제작업자의 딸 빅투아르 외벤 사이에서 네 번재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친아버지가 샤를 가문의 친구 외교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이라고 주장하는 미술사학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샤를 들라크루아가 심한 종량을 앓고 있었으므로 생식이 불가능했음을 그 이유로 꼽는다.
그의 남성 능력을 회복시키려는 수술이 근친들이 보는 가운데 1797년 말에 행해졌고 이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들라크루아의 친아버지가 탈레랑이라고 하는 또 다른 근거로는 그의 외모가 탈레랑을 닮았으며 들라크루아가 화가로서 첫 발을 내디딜 때 탈레랑이 은밀히 도운 점이다.

들라크루아에게는 형이 둘, 누이가 하나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7살 때 샤를 들라크루아 아버지를 잃었고 16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누나와 매형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는 누나와 함께 큰 재산은 아니지만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파산했다.

다비드의 제자로서 당시 평판이 자자한 화가 외사촌 레옹 프랑수아 리즈네르는 들라크루아에게 회화 기법상의 유익한 충고를 해주었으며, 당시 파리의 살롱 가운데 가장 유력한 왕당파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 남작의 살롱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훗날 들라크루아는 외사촌에게 상당한 액수의 유산과 샹로제에 있는 사유지를 남겨주었다.
들라크루아가 사교계에 기꺼이 받아들여진 것은 외사촌의 후원에 의한 것이지만 늘 단정하고 세련된 의상을 하고 품위있는 거동과 대화술이 나무랄 데 없었던 데 기인하기도 했다.
한편 제라르는 들라크루아에게서 회화에 천재적 재질이 있음을 알았다.

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취향은 1820년과 1830년 사이 수많은 책을 읽은 데서 이루어졌다.
그는 생제르맹데프레에 있는 제라르의 살롱에서 메리메와 스탕달을 만났고, 마르스 양의 연회에도 자주 가서 빅토르 쿠쟁, 퀴비에, 티에르 등을 만났으며, 1826년부터 문학 동아리 노디에의 세나클에 나가 빅토르 위고와 친분을 맺었다.
이런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그의 문학적 취향은 형성되었고 그의 일기와 편지들에 문학적 내용이 가득차게 되었다.

들라크루아는 로마에 소재한 프랑스 아카데미의 책임자 앵그르가 이끄는 고대와 전통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아카데미즘의 낡고 진부한 해석에 반발하면서 고대 신화의 근원적인 힘과 영웅들의 위대함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들라크루아는 다비드파의 '이상적 미' 개념에 가장 반항적이었으며, 끊임없이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면서 결코 그림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그의 사진과 자화상을 보면 이성적이면서 명철한 정신을 지닌 당디dandy였음을 알 수 있다.
당디란 세련된 의상과 거동을 통해 정신적 귀족을 자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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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1780년 8월 29일 프랑스 남서쪽 툴루즈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 몽토방에서 초상화가이면서 장식적 조각가 장 마리 조셉 앵그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앵그르는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회화를 배웠고 1791년 11살 때 툴루즈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드로잉, 인물화, 풍경화를 배웠다.
그는 입학하던 해 초상드로잉으로 3등을 했으며 2년 후에는 인물드로잉으로 1등을 수상했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솜씨는 매우 훌륭했으며 13살부터 16살까지 시립오케스트라에서 제2바이올린 연주자로 돈을 벌었다.
그는 평생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했다.

앵그르는 16살 때인 1797년 여름 늦게 파리로 가서 신고전주의의 선두자 다비드 아틀리에에서 앙투안 장 그로로부터 수학했으며 2년 후 에콜 데 보자르의 회화반에 받아들여졌다.
그는 1800년 2월 토르소 경연대회에서 2등했고 10월에는 로마대상을 2등으로 수상했다.
그는 군대 징집에서 면제받았고 1801년의 로마대상에서 회화부문으로 1등을 수상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의 수없이 많은 전쟁으로 재정이 넉넉지 않아 로마대상 수상자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못하고 아틀리에만 제공해주었다.
그는 1804년에 아버지의 초상과 자화상을 그렸는데
초상을 그릴 때 주로 선을 사용한 후 표현적인 색채를 사용했으며 이는 평생 그의 고유한 회화기법이 되었다.
로마에서 그는 초상화 외에도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이후 여인의 누드는 그가 선호하는 주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첫 황제에 등극한 지 얼마 후 1804년 24살의 앵그르는 로마의 나폴레옹 궁전을 위해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리라는 공식명령을 받았다.
앵그르는 등극할 때의 화려한 복장을 한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렸으며 국립대의회는 그것을 대의회장에 걸었다.
대의회는 나폴레옹의 위상을 알리기 위해 정치적 목적으로 앵그르에게 초상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비록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를 찬탄했을지라도 앵그르는 그의 위상을 나타내며 또한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인 사건을 표현해야 했는데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연히 고전에서 아이디어를 구해야 했다.
나폴레옹의 모습은 주피터의 모습을 방불케 했는데 앵그르는 판화를 통해서 주피터의 모습을 보아 알고 있었다.
주피터의 독수리가 나폴레옹 발 아래 양탄자에 디자인된 것만 봐도 주피터를 염두에 두고 그렸음을 알게 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위상을 로마제국의 영광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기고 있었다.
나폴레옹 자신 샤를막느의 뒤를 이은 황제라고 믿었는데 샤를막느는 9세기 로마 황제이면서 프랑크족의 왕으로 오늘날 독일에 해당하는 중앙 유럽의 전지역을 통치한 사람이었다.
앵그르는 나폴레옹의 초상을 그릴 때 샤를막느를 염두에 두었는데
나폴레옹의 왼손에 있는 상아로 된 손과 검 그리고 칼집은 샤를막느가 사용하던 것들이다. 

앵그르는 판사의 딸 앤 마리 줄리 포레스티에르와 약혼했는데 그녀도 다비드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4년 동안 로마에서 정부 지원 유학생활을 마친 후 앵그르는 프랑스로 돌아가는 대신 로마에 더 머물기로 하고 아틀리에에를 얻었다.
그는 줄리와 1807년에 파혼했는데 줄리의 아버지가 당장 파리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그가 불복종했기 때문이다.

앵그르는 평소 알고 지내던 관리를 통해 정부가 의뢰하는 작품을 제작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으므로 경제적으로 불편하지 않았다.
18세기와 19세기 화가들이 초상화를 많이 그린 이유는 초상화가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앵그르는 1813년 세레에서 여성 모자를 생산하는 사람의 딸 마들린 샤펠레와 결혼했는데 이탈리아에서 만난 여인이었다.
앵그르와 우정을 나누던 그녀의 사촌 마담 드 로레알이 그녀로 하여금 로마로 오게 해서 앵그르에게 소개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첫 아이가 사망했고 그후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앵그르는 1820년 로마에서 피렌체로 갔고 그곳에서 1824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역사화를 주로 그렸으며 자신의 고향 몽토방 대성당의 의뢰를 받아 <루이 13세의 서약>을 라파엘로의 기법으로 그린 후 둘둘 말아 소지하고 헌신적인 아내를 피렌체에 남겨둔 채 파리로 갔다.
이 그림이 1824년 살롱(국전)에서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아카데미에 반대하고 새로운 낭만주의를 옹호하는 선두자라고 갈채를 보냈다.
살롱전 폐막식 때 샤를 10세는 앵그르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1825년 6월 앵그르는 보자르 아카데미의 멤버에 선출되었으며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주어졌는데
아카데미 멤버에게는 가족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가 제공되었다.
그는 그해 말 아틀리에를 얻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는데 곧 백 명 이상의 제자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앵그르는 1829년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에 선임되었으며, 1833년에는 부원장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1834년 살롱전에 <성 심포리엥의 순교>를 출품했는데 평론가들이 냉담하게 반응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책임자로 발령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의 청은 받아들여졌다.
그는 파리에서의 10년 동안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1835년 1월 로마 아카데미에 부임했다.
그는 1841년까지 책임자로 재직하면서 빌라를 개축 확장했으며 도서관의 소장 책의 양을 늘렸고 교과과목에 고고학을 추가했다.
그는 많은 컨서트에 출연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앵그르가 파리로 돌아온 것은 1841년이었다. 그를 위한 축하연이 연일 있었고 그는 매우 환대받았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으므로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다.
1849년 7월 아내가 지병으로 타계했고 슬픔에 빠진 그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으며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이 계약을 무효로 해주고 그로 하여금 쉬게 했다.

앵그르는 1852년 봄 친구의 소개로 43살의 델피느 라멜과 결혼했다.
첫 번째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재혼도 그에게 행복한 가정을 허락해주었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만족해 했는지는 그가 1852년에 그녀의 장인과 장모의 초상을 각각 그렸고 1855년 아내의 초상을 3점 드로잉했으며 1859년에는 유화로 그린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1840년대와 50년대 많은 초상화를 그렸고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앵그르는 1862년 원로원에 선출되었으며 3년 후에는 왕립예술원의 멤버에 선출되었다.
1867년 1월 1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대가들을 연구했는데 그의 아틀리에에는 조토의 작품에 관한 드로잉도 남아 있었다.
초기에 그린 누드 습작, 1807년 로마에서 그린 둥근 형태의 캔버스에 그린 풍경화, 그가 수집해온 작품들, 수첩, 그리고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이 아틀리에에 남아 있었는데
이것들은 현재 앵그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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