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선재 강의 노트 2
개념미술Conceptual art
조지프 코수스는 논문 「철학 이후의 미술」(1969)에서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외관’에서 ‘개념’으로 이행하는 혁명을 이룬 것으로, 결국 “현대 미술의 출발이자 개념미술의 시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에게 예술가가 된다는 건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념미술의 선구자는 특유의 말장난을 즐긴 뒤샹이었습니다. 해학은 그에게 중요했는데,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1911)를 예로 들면 그렇게 제목을 붙인 이유로 그는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하고 과거의 작품들을 집대성한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1915~23)는 특유의 말장난이었습니다.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 관해 “사람들은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때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even’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회화와 무관하다. ... 좀 더 벌거벗길 수 있는 가능성들 모두란 뜻은 당치도 않다”고 했습니다.
뒤샹의 말장난은 1912년에 그린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에서도 나타났으며, 이런 식의 유머는 평생 지속되었습니다.
뒤샹은 예술가가 지식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불쾌해했습니다. ‘화가처럼 멍청하다’는 프랑스 속담을 언급하면서 그는 사람들이 화가는 사교계의 신사보다 덜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가 망막적 회화를 비난한 것은 화가의 수공적 예속에 반대하고 지적 입장을 취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회화는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으로서 오로지 시각적이거나 망막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거 예외적이었던 유머, 조롱, 혹은 패러디, 즉 풍자적 개작은 시각예술에서 유례없는 중요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개념미술은 사상이나 개념을 미술품의 본질적 구성요소로 간주하며 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개념미술이 처음 표명된 것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통해서였습니다. 1940년대에 그는 25년 전 자신이 레디메이드로 의도했던 것은 감각에 얽매인 미술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미술을 지적 행위로 돌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개념미술이 직접적으로 미니멀아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특히 미국에서는 공공연하게 논의되어 왔습니다. 미니멀리즘은 분명히 미술을 제작하고 경험하는 데서 고도로 개념화된 방식이었습니다.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은 작품의 의미보다는 물성 자체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면서 관람자가 보고 있는 것이 표현이나 상징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임을 주지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최소한의 것이라고 해도 작품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마이클 애셔는 1974년 로스앤젤레스의 클레어 코플리 갤러리에 아무것도 전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통상적으로 갤러리 사무실과 대중의 관람공간을 구별하던 칸막이도 치워버렸습니다. 전시된 것은 전시 기획자와 그녀의 책상, 갤러리의 재고품들이었으며, 누군가가 볼 일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면 그 또한 전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팝 아트Pop art
미국 팝 아트의 특징은 표면상의 냉정함으로 인해 주제에 대한 참여의식이 결여되어 보이는 점입니다. 일견 거기에는 다다의 기교와 다다의 수법이 재생된 듯 보이나 그 이면에서 다다의 정신을 발견하기란 어려운데, 아티스트들이 반미술을 표방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 새로운 미술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표면상의 경박함을 보고 팝 아트를 비지성적인 것으로 판단하거나 표면상의 초탈함을 보고 참여의식의 결여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팝 아트는 고도의 자의식 운동이었으며, 과거의 미술 개념이 아티스트들에 의해 해체되었습니다. 앤디 워홀은 미술품이 수공의 산물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많은 그의 작품들이 형판 인쇄를 통해 캔버스에 직접 옮겨졌습니다.
아상블라주Assemblage와 정크 아트Junk art
아상블라주란 명칭은 1961년 뉴욕 모마에서 개최한 ‘아상블라주’ 전시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아상블라주와 정크 아트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데, 정크 아티스트들은 종종 산업쓰레기들을 조립하여 표현적 구성물을 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상블라주는 표현적 목적을 위해 비미술의 재료를 조각적 구성물 안에 모으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들을 위한 용어이므로 팝 아트, 표현주의 미술, 정크 아트, 혹은 펑크 아트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으며,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실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장르에 이미지의 범람으로 관람자의 정신을 분산시켜 명상적 분위기를 야기해야 한다는 존 케이지John Cage(1912~92)의 기본 사상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체론적 구성all-over을 예로 들면 하나 혹은 둘의 주제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미지들의 나열로 우리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전체의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상황 미술Situation art과 설치Installation art
상황 미술은 관람자를 단순한 외부 관찰자에 머무르지 않게 하나의 사건, 혹은 상황 속으로 개입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해프닝과 그 목적이 같습니다. 상황 미술은 곧 설치입니다. 일종의 무대장치입니다. 시각뿐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이 동원됩니다.
펑크 아트Punk art
펑크 아트는 1960년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아티스트 그룹이 시작한 것으로 천박하고 기분 나쁜 주제를 의도적으로 불쾌하게 다룬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시크 아트Sick art로도 불립니다. 불쾌감을 유발하고자 하는 욕구와 병적 자기 현시욕을 다다, 팝 아트와 결합시킨 것입니다. 펑크 아트의 특징은 감정이 배제된 비인간적인 순수성에 반발해 혼합물, 병적인 것, 싸구려, 기이한 것, 모조품, 사악한 것,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성적인 점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펑크와 ‘냄새나는’, 혹은 ‘더러운’이란 뜻의 펑키라는 용어는 재즈 용어에서 온 것으로 모순되고 이상야릇한 것에 대한 집착을 암시합니다.
비디오 아트Video art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창출하는 비디오 아트는 반문화, 특히 1960년대 초 일부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의 작업 중에 생겨난 해악적 상업 TV에 반대하는 경향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해프닝Happening
1960년대에 새로운 미술 형태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해프닝은 1959년 앨런 캐프로Allan Kaprow(1927~)가 창안해낸 것입니다. 이는 천재를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관람자, 혹은 참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려는 아티스트들이 선택한 방식이었습니다. 캐프로는 해프닝에서 참여자로서의 관람자는 오브제나 회화와 같으며 도구와 지침서는 캔버스의 천과 같다고 했습니다. 관람자는 사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적극적인 참여는 정신적인 수준에서 요구되었습니다. 캐프로는 해프닝의 가능성을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에서 발견했습니다. 캐프로는 해프닝을 궁극의 실존적 참여라는 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세로 보았습니다.
존 케이지는 예술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이론을 펼쳤는데, 그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해프닝은 ‘자발적이며 줄거리가 없는 연극적 이벤트’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해프닝의 개념에는 화가들이 화랑과 미술관과 같은 엘리트 의식으로 뭉친 세계에서 탈피하여 거리나 시장으로 뛰쳐나와 한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 명칭은 요제프 보이즈가 벌인 많은 해프닝들과 같이 정치-사회적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시위나 기존의 도덕 체계에 충격을 가하기 위한 표현을 다루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퍼포먼스 아트Performance art
해프닝과 관련 있지만 보다 철저하게 계획되며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 퍼포먼스 아트의 전통은 자신들의 작품이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익살스럽거나 도발적인 이벤트를 무대에 올린 미래주의자, 다다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1950년대에 관람자 앞에서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마티외나 1960년대 초 물감을 몸에 바른 누드모델들을 지휘한 이브 클랭의 작업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퍼포먼스 아트가 그 자체로서 미술의 한 범주로 인식되게 된 건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였습니다. 해프닝이 의도적으로 내건 것과는 달리 퍼포먼스는 관객과의 즉흥적 협동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퍼포먼스는 ‘재연’, ‘구경거리’를 의미합니다. 이벤트도 퍼포먼스의 한 형태이며, 신체적 출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바디 아트Body art
사람의 몸을 재료로 이용하는 바디 아트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신체를 사용합니다. 처음 몇몇 작품의 경우 이벤트나 퍼포먼스 아트에 가까웠고 1950년대 말부터 여러 해프닝 속에 바디 아트의 일종이랄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바디 아트는 독립적 장르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개념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 아트는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노선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디 아트 작품은 아티스트의 감정이나 개인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후기 회화적 추상이나 미니멀 아트만큼 비개성적입니다. 윌러비 샤프가 말한 대로 바디 아트는 대체로 신체에 관한 진술입니다. “그것은 자전적인 예술이라기보다 신체의 사용과 관련된 예술이다.”
프로세스아트Process Art
작품에서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관심을 돌림으로써 다양한 유형의 비자연주의 미술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형식주의formalism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프로세스아트입니다.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루미니즘Luminism
윌러비 샤프는 1967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워커아트센터에서 열린 ‘광선, 운동, 공간’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처음 루미니즘이란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루미아Lumia란 용어를 덴마크계 미국의 실험예술가 토머스 윌프리드가 20세기 전반에 자신의 광선 구조물을 설명하며 이미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덴마크, 런던, 소르본대학에서 음악과 미술을 공부한 뒤 1916년 미국에 정착 윌프리드는 광선주의에 관심이 많았고, 빛의 패턴을 음악작품의 울림이나 해석으로 여기지 않고 빛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미술의 매체로 간주한 최초의 예술가였습니다.
광선을 미적으로 사용한 또 다른 방식은 광선 스펙터클로 이는 광선 환경에 포함됩니다. 광선 스펙터클의 원형은 베를린의 건축물에 조명을 비추는 것을 내용으로 한 나움 가보의 <광선 축제>(1929)였습니다. 가보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나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1938년에 <빛의 대성당>을 제작하면서 가보의 아이디어를 이용했습니다. 이 작품은 근대의 ‘소리와 광선’ 퍼포먼스의 효시가 됩니다. 2차 세계대전 후 광선 환경과 광선 스펙터클은 일본, 유럽,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실험예술가들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루초 폰타나와 브루노 무나리가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독일에서는 제로 그룹으로, 특히 오토 피네, 하인츠 마크, 귄터 위케르 등이 광선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고밀도의 강력한 광선 빔을 산출하는 레이저를 사용함으로써 광선 환경은 더욱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레이저LASER라는 말은 방사의 유도방출에 의한 빛의 증폭light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의 머릿글자의 집합에 의한 합성어입니다. 레이저의 중요한 성질은 간섭성을 가지며 단색성을 나타내고, 강력한 가는 빛을 방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레이저빔은 처음에는 군대에서 사용되었으나, 농축된 가는 빛으로 흩어지지 않고 곧게 나가는 특성 때문에 예술가들이 재료로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레이저빔이 처음 사용된 때는 1965년이었고, 그때부터 설치, 거대한 규모의 환경미술, 그리고 홀로그래피라는 특수한 영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독특한 영상을 생성하는 기술로서의 홀로그래피는 레이저 입체영상으로 불리며, 사물을 깊이, 관점, 시차적 영상의 재현, 모양, 크기 컬러 안에서 실물과 똑같이 그려내는 첨단 영상매체로서 레이저 개발과 더불어서 실물을 재생산하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발명되었습니다. 레이저를 포함한 입체영상의 발명은 현대의 테크놀로지 분야에 그 사용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의 표현방식을 넓혀주는, 표현 가능성을 무한정 확장시켜주는 적극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옵아트Optical art
광학, 혹은 망막에 기반을 두는 옵아트는 옵티컬 아트를 줄인 용어로 1965년 뉴욕의 모마에서 열린 ‘감응하는 눈’ 전시회에 관한 『타임』지의 비평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평행선이나 바둑판무늬, 동심원 같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명도가 같은 보색을 병렬시켜 색채의 긴장상태를 유발했습니다. 그 결과 관람자는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고 한 부분을 오래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옵아트는 지각적 모호함과 최소한의 시각적 장치를 이용해 시각에 충격과 혼란을 줌으로써 작품이 진동하거나 점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환각적 운동을 창출하는 기하학적 추상의 한 갈래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옵아트의 목적은 망막에 매우 강력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관람자의 생리적 시각반응을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팝아트의 상업주의와 지나친 상징성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등장한 옵아트 대부분의 작품은 지각 심리학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잘 알려진 착시현상이나 시각적 놀이에 바탕을 둔 것들입니다. 옵아트 예술가들은 화면이 진동하거나 뒤틀리는 듯한 착시현상을 유발하기 위해 크기, 형태, 방향, 명암, 많은 연속 단위들 등을 체계적으로 변형시키기도 하고, 화면의 팽창과 확대 등과 같은 착시현상을 야기하기 위해 주기적 패턴 체계 속에서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확대, 혹은 축소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과 그 밖의 또 다른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게 조작된 패턴들은 움직이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켜 모호하고 대립적인 착시를 유발하는 걸 목적으로 개발된 것들입니다. 패턴이 전면에 걸쳐 그려진 화면에서 형태들은 흔들리거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무한히 후퇴하는 듯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종종 가상의 비현실적 공간을 창출하기도 합니다.
키네틱아트Kinetic art
그리스어 키네시스kinesis(운동성), 키네티코스kinetikos(움직임)에서 유래한 키네틱아트란 운동을 수반하는 미술을 말합니다. 키네틱아트는 운동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 즉 작품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로서의 운동을 나타내는 미술로 미술품 자체가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키네틱아트 특유의 효과는 작품 앞에서 움직이는 관람자에 의해서, 혹은 작품에 손을 대거나 조작하는 관람자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키네틱아트라는 명칭이 비평적 분류 기준으로서 첨가되고 승인된 것은 1950년대였습니다. 그때부터 이 명칭은 광범위한 양식과 기법을 망라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을 처음 사용한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등받이 없는 걸상에 자전거 바퀴를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전거 바퀴>는 반미술의 원칙을 보여주기 위한 레디메이드 중 하나였습니다. 뒤샹은 또한 1920년대 초 뉴욕에서 <회전 부조>와 <회전 반구>를 제작했으며, 그것들은 회전할 때 양감의 환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동심원들이 그려진 평편한 원반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입체적 외형을 띤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아르테 포베라 작품은 자의적으로 보잘것없고 진부한 재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개 환경미술의 성격을 띠고 종종 강하게 극적인 요소를 지녔습니다. 아르테 포베라의 첫 전시회가 1967년 9월에 열렸습니다. 포베라는 이탈리아어로 ‘가난한’이란 뜻입니다. 아르테 포베라의 특징은 미국 미니멀리즘 조형물의 기본 방향, 혹은 제작방식을 테크놀로지로 잘못 이해했으므로 반테크놀로지의 자세를 표방한 것입니다. 1970년 6월 첼란트가 기획한 토리노 시립미술관에서의 전시회 ‘개념미술, 아르테 포베라, 대지미술’에는 코수스, 웨이너 같은 언어 중심의 개념미술 예술가들과 마리아 스미스슨 같은 대지미술 예술가들 그리고 피스톨레토와 쿠넬리스 같은 아르테 포베라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경향은 상호배타적이기보다는 중첩되면서 전시되었습니다. 만초니와 클랭의 작품이 포함된 것은 특별히 후대 작품들에 대한 유럽의 계보를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첼란트는 전시회 카탈로그에 "아르테 포베라는 주로 매체의 물질적 속성 및 재료의 변하기 쉬운 성질과 관련이 있는, 근본적으로 반상업적이고, 불안정하며, 평범하고, 반형식의 미술을 표방한다. 이는 실제 재료와 전체 현실에 대한 미술가들의 참여를 중시하며, 또 그런 현실을 비록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민감하고 지적이며 교묘하고도 사적인 강렬한 방식으로 해석해내려는 미술가들의 시도를 강조한다"고 적었습니다.
만초니는 1960년대 초에 긴 종이에 붓질을 끊어뜨리지 않고 한 번에 길게 긋는 그림을 그렸으며, 그 길이가 명시되지 않은 것도 있고 명확한 길이로 된 것도 있습니다. 뉴욕의 모마가 소장하고 있는 <선 1천 미터>는 만초니가 1961년 6월 24일에 제작한 것으로 그 길이가 1천 미터에 달합니다. 그는 이런 작품을 돌돌 말아 판지로 만든 통에 넣어 보관했습니다. 이런 작품은 미니멀아트에 대한 충동을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미니멀아트에 대한 장난기 어린 풍자로 보였습니다. 자신의 배설물을 담은 깡통에 서명하고 표시해놓은 <예술가의 똥> 연작은 현대 미술의 개성 예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깡통에는 ‘예술가의 똥, 내용물, 30g, 신선하게 보존됨, 1961년 5월에 생산되고 저장됨’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클랭과 마찬가지로 만초니는 다다에서 취한 개개의 개념들을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철저한 미학적 허무주의도 소생시켰습니다. 그는 클랭보다 더 조야한 유머 감각과 아이러니한 것을 즐길 줄 알았습니다.
대지미술Land art(Earth art, 혹은 Earthworks)
대지미술은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예술가마다 사용한 기법과 내세운 의도가 현저히 다를 뿐만 아니라 작품도 매우 다양합니다. 건물을 반쯤 허물기, 바윗덩어리와 수 톤에 이르는 흙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구덩이, 전망대,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경사로 만들기, 단층을 파헤치기, 산허리를 절단하기, 화산을 구획하기, 사막의 바닥에 드로잉하기, 눈 위에 자취 새기기, 돌개바람 추적하기, 염분이 높은 호수 위에 번개 부르기, 공공쓰레기장에 아스팔트 붓기, 커튼으로 계곡 막기 등 다양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비용이 많이 들어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월터 드 마리아는 대지미술을 고립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고립을 타파해야 하고 사진은 이런 시도에서 주요한 매체였습니다. 대지미술의 대부분 예술가들이 의식적으로 사진매체의 가능성을 활용했습니다. 그들은 공간감과 거대한 크기를 복구시키려고 화면 구성을 연구했습니다. 이러한 사진은 책과 잡지로 유포되는 단순한 기록, 작품과 그 과정을 이해시키려는 교육적 몽타주의 요소, 전시 대용품, 혹은 상시적이거나 지속 가능한 설치일 경우 그 현장을 방문하도록 자극하는 것 등 다양한 기능을 띱니다. 대지미술품에 접근하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마이클 하이저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구의 반대편, 이집트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러갈 수 없다고 불평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가세오, 가서 보면 될 것 아닙니까.”
미니멀아트에서 비롯된 대지미술의 초기 양상인 극도로 단순한 점은 미니멀아트를 단지 거대한 규모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작품은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으며 미니멀아트 외에도 다양한 경향의 미술과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재료를 사용한 점에서는 아르테 포베라와 관련지을 수 있으며, 작품이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면 해프닝이나 퍼포먼스아트와 관련지을 수 있고, 거창한 작업에 관한 계획안은 단지 계획으로만 존재하므로 개념미술과도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또한 도시문화의 세련된 기술에 대한 혐오를 반영한 히피문화의 자연 회귀 정신의 한 부분으로서 선사시대의 흙무더기와 목초지 경계선에 대한 연구에 열광했던 당시의 상황과 관련되는 점도 있습니다. 전통 엘리트 미술과 상업성을 지향하는 갤러리 중심의 미술계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또한 현대의 전형적 모습 중 하나였지만, 사실 거대한 대지작품은 막대한 경비를 필요로 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외진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 대중적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