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선재 강의 노트 2


 

 

 

 

개념미술Conceptual art

조지프 코수스는 논문 「철학 이후의 미술」(1969)에서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외관’에서 ‘개념’으로 이행하는 혁명을 이룬 것으로, 결국 “현대 미술의 출발이자 개념미술의 시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에게 예술가가 된다는 건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념미술의 선구자는 특유의 말장난을 즐긴 뒤샹이었습니다. 해학은 그에게 중요했는데,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1911)를 예로 들면 그렇게 제목을 붙인 이유로 그는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하고 과거의 작품들을 집대성한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1915~23)는 특유의 말장난이었습니다.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 관해 “사람들은 <그녀의 독신남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때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even’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회화와 무관하다. ... 좀 더 벌거벗길 수 있는 가능성들 모두란 뜻은 당치도 않다”고 했습니다.

뒤샹의 말장난은 1912년에 그린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에서도 나타났으며, 이런 식의 유머는 평생 지속되었습니다.

뒤샹은 예술가가 지식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불쾌해했습니다. ‘화가처럼 멍청하다’는 프랑스 속담을 언급하면서 그는 사람들이 화가는 사교계의 신사보다 덜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가 망막적 회화를 비난한 것은 화가의 수공적 예속에 반대하고 지적 입장을 취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회화는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으로서 오로지 시각적이거나 망막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거 예외적이었던 유머, 조롱, 혹은 패러디, 즉 풍자적 개작은 시각예술에서 유례없는 중요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개념미술은 사상이나 개념을 미술품의 본질적 구성요소로 간주하며 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개념미술이 처음 표명된 것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통해서였습니다. 1940년대에 그는 25년 전 자신이 레디메이드로 의도했던 것은 감각에 얽매인 미술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미술을 지적 행위로 돌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개념미술이 직접적으로 미니멀아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특히 미국에서는 공공연하게 논의되어 왔습니다. 미니멀리즘은 분명히 미술을 제작하고 경험하는 데서 고도로 개념화된 방식이었습니다.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은 작품의 의미보다는 물성 자체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면서 관람자가 보고 있는 것이 표현이나 상징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임을 주지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최소한의 것이라고 해도 작품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마이클 애셔는 1974년 로스앤젤레스의 클레어 코플리 갤러리에 아무것도 전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통상적으로 갤러리 사무실과 대중의 관람공간을 구별하던 칸막이도 치워버렸습니다. 전시된 것은 전시 기획자와 그녀의 책상, 갤러리의 재고품들이었으며, 누군가가 볼 일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면 그 또한 전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팝 아트Pop art

미국 팝 아트의 특징은 표면상의 냉정함으로 인해 주제에 대한 참여의식이 결여되어 보이는 점입니다. 일견 거기에는 다다의 기교와 다다의 수법이 재생된 듯 보이나 그 이면에서 다다의 정신을 발견하기란 어려운데, 아티스트들이 반미술을 표방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 새로운 미술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표면상의 경박함을 보고 팝 아트를 비지성적인 것으로 판단하거나 표면상의 초탈함을 보고 참여의식의 결여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팝 아트는 고도의 자의식 운동이었으며, 과거의 미술 개념이 아티스트들에 의해 해체되었습니다. 앤디 워홀은 미술품이 수공의 산물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많은 그의 작품들이 형판 인쇄를 통해 캔버스에 직접 옮겨졌습니다.



아상블라주Assemblage와 정크 아트Junk art

아상블라주란 명칭은 1961년 뉴욕 모마에서 개최한 ‘아상블라주’ 전시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아상블라주와 정크 아트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데, 정크 아티스트들은 종종 산업쓰레기들을 조립하여 표현적 구성물을 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상블라주는 표현적 목적을 위해 비미술의 재료를 조각적 구성물 안에 모으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들을 위한 용어이므로 팝 아트, 표현주의 미술, 정크 아트, 혹은 펑크 아트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으며,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실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장르에 이미지의 범람으로 관람자의 정신을 분산시켜 명상적 분위기를 야기해야 한다는 존 케이지John Cage(1912~92)의 기본 사상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체론적 구성all-over을 예로 들면 하나 혹은 둘의 주제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미지들의 나열로 우리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전체의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상황 미술Situation art과 설치Installation art

상황 미술은 관람자를 단순한 외부 관찰자에 머무르지 않게 하나의 사건, 혹은 상황 속으로 개입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해프닝과 그 목적이 같습니다. 상황 미술은 곧 설치입니다. 일종의 무대장치입니다. 시각뿐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이 동원됩니다.



펑크 아트Punk art

펑크 아트는 1960년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아티스트 그룹이 시작한 것으로 천박하고 기분 나쁜 주제를 의도적으로 불쾌하게 다룬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시크 아트Sick art로도 불립니다. 불쾌감을 유발하고자 하는 욕구와 병적 자기 현시욕을 다다, 팝 아트와 결합시킨 것입니다. 펑크 아트의 특징은 감정이 배제된 비인간적인 순수성에 반발해 혼합물, 병적인 것, 싸구려, 기이한 것, 모조품, 사악한 것,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성적인 점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펑크와 ‘냄새나는’, 혹은 ‘더러운’이란 뜻의 펑키라는 용어는 재즈 용어에서 온 것으로 모순되고 이상야릇한 것에 대한 집착을 암시합니다.



비디오 아트Video art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창출하는 비디오 아트는 반문화, 특히 1960년대 초 일부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의 작업 중에 생겨난 해악적 상업 TV에 반대하는 경향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해프닝Happening

1960년대에 새로운 미술 형태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해프닝은 1959년 앨런 캐프로Allan Kaprow(1927~)가 창안해낸 것입니다. 이는 천재를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관람자, 혹은 참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려는 아티스트들이 선택한 방식이었습니다. 캐프로는 해프닝에서 참여자로서의 관람자는 오브제나 회화와 같으며 도구와 지침서는 캔버스의 천과 같다고 했습니다. 관람자는 사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적극적인 참여는 정신적인 수준에서 요구되었습니다. 캐프로는 해프닝의 가능성을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에서 발견했습니다. 캐프로는 해프닝을 궁극의 실존적 참여라는 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세로 보았습니다.

존 케이지는 예술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이론을 펼쳤는데, 그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해프닝은 ‘자발적이며 줄거리가 없는 연극적 이벤트’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해프닝의 개념에는 화가들이 화랑과 미술관과 같은 엘리트 의식으로 뭉친 세계에서 탈피하여 거리나 시장으로 뛰쳐나와 한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 명칭은 요제프 보이즈가 벌인 많은 해프닝들과 같이 정치-사회적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시위나 기존의 도덕 체계에 충격을 가하기 위한 표현을 다루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퍼포먼스 아트Performance art

해프닝과 관련 있지만 보다 철저하게 계획되며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 퍼포먼스 아트의 전통은 자신들의 작품이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익살스럽거나 도발적인 이벤트를 무대에 올린 미래주의자, 다다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1950년대에 관람자 앞에서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마티외나 1960년대 초 물감을 몸에 바른 누드모델들을 지휘한 이브 클랭의 작업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퍼포먼스 아트가 그 자체로서 미술의 한 범주로 인식되게 된 건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였습니다. 해프닝이 의도적으로 내건 것과는 달리 퍼포먼스는 관객과의 즉흥적 협동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퍼포먼스는 ‘재연’, ‘구경거리’를 의미합니다. 이벤트도 퍼포먼스의 한 형태이며, 신체적 출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바디 아트Body art

사람의 몸을 재료로 이용하는 바디 아트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신체를 사용합니다. 처음 몇몇 작품의 경우 이벤트나 퍼포먼스 아트에 가까웠고 1950년대 말부터 여러 해프닝 속에 바디 아트의 일종이랄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바디 아트는 독립적 장르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개념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 아트는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노선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디 아트 작품은 아티스트의 감정이나 개인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후기 회화적 추상이나 미니멀 아트만큼 비개성적입니다. 윌러비 샤프가 말한 대로 바디 아트는 대체로 신체에 관한 진술입니다. “그것은 자전적인 예술이라기보다 신체의 사용과 관련된 예술이다.”



프로세스아트Process Art

작품에서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관심을 돌림으로써 다양한 유형의 비자연주의 미술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형식주의formalism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프로세스아트입니다.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루미니즘Luminism

윌러비 샤프는 1967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워커아트센터에서 열린 ‘광선, 운동, 공간’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처음 루미니즘이란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루미아Lumia란 용어를 덴마크계 미국의 실험예술가 토머스 윌프리드가 20세기 전반에 자신의 광선 구조물을 설명하며 이미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덴마크, 런던, 소르본대학에서 음악과 미술을 공부한 뒤 1916년 미국에 정착 윌프리드는 광선주의에 관심이 많았고, 빛의 패턴을 음악작품의 울림이나 해석으로 여기지 않고 빛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미술의 매체로 간주한 최초의 예술가였습니다.

광선을 미적으로 사용한 또 다른 방식은 광선 스펙터클로 이는 광선 환경에 포함됩니다. 광선 스펙터클의 원형은 베를린의 건축물에 조명을 비추는 것을 내용으로 한 나움 가보의 <광선 축제>(1929)였습니다. 가보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나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1938년에 <빛의 대성당>을 제작하면서 가보의 아이디어를 이용했습니다. 이 작품은 근대의 ‘소리와 광선’ 퍼포먼스의 효시가 됩니다. 2차 세계대전 후 광선 환경과 광선 스펙터클은 일본, 유럽,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실험예술가들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루초 폰타나와 브루노 무나리가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독일에서는 제로 그룹으로, 특히 오토 피네, 하인츠 마크, 귄터 위케르 등이 광선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고밀도의 강력한 광선 빔을 산출하는 레이저를 사용함으로써 광선 환경은 더욱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레이저LASER라는 말은 방사의 유도방출에 의한 빛의 증폭light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의 머릿글자의 집합에 의한 합성어입니다. 레이저의 중요한 성질은 간섭성을 가지며 단색성을 나타내고, 강력한 가는 빛을 방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레이저빔은 처음에는 군대에서 사용되었으나, 농축된 가는 빛으로 흩어지지 않고 곧게 나가는 특성 때문에 예술가들이 재료로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레이저빔이 처음 사용된 때는 1965년이었고, 그때부터 설치, 거대한 규모의 환경미술, 그리고 홀로그래피라는 특수한 영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독특한 영상을 생성하는 기술로서의 홀로그래피는 레이저 입체영상으로 불리며, 사물을 깊이, 관점, 시차적 영상의 재현, 모양, 크기 컬러 안에서 실물과 똑같이 그려내는 첨단 영상매체로서 레이저 개발과 더불어서 실물을 재생산하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발명되었습니다. 레이저를 포함한 입체영상의 발명은 현대의 테크놀로지 분야에 그 사용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의 표현방식을 넓혀주는, 표현 가능성을 무한정 확장시켜주는 적극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옵아트Optical art

광학, 혹은 망막에 기반을 두는 옵아트는 옵티컬 아트를 줄인 용어로 1965년 뉴욕의 모마에서 열린 ‘감응하는 눈’ 전시회에 관한 『타임』지의 비평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평행선이나 바둑판무늬, 동심원 같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명도가 같은 보색을 병렬시켜 색채의 긴장상태를 유발했습니다. 그 결과 관람자는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고 한 부분을 오래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옵아트는 지각적 모호함과 최소한의 시각적 장치를 이용해 시각에 충격과 혼란을 줌으로써 작품이 진동하거나 점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환각적 운동을 창출하는 기하학적 추상의 한 갈래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옵아트의 목적은 망막에 매우 강력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관람자의 생리적 시각반응을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팝아트의 상업주의와 지나친 상징성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등장한 옵아트 대부분의 작품은 지각 심리학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잘 알려진 착시현상이나 시각적 놀이에 바탕을 둔 것들입니다. 옵아트 예술가들은 화면이 진동하거나 뒤틀리는 듯한 착시현상을 유발하기 위해 크기, 형태, 방향, 명암, 많은 연속 단위들 등을 체계적으로 변형시키기도 하고, 화면의 팽창과 확대 등과 같은 착시현상을 야기하기 위해 주기적 패턴 체계 속에서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확대, 혹은 축소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과 그 밖의 또 다른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게 조작된 패턴들은 움직이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켜 모호하고 대립적인 착시를 유발하는 걸 목적으로 개발된 것들입니다. 패턴이 전면에 걸쳐 그려진 화면에서 형태들은 흔들리거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무한히 후퇴하는 듯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종종 가상의 비현실적 공간을 창출하기도 합니다.



키네틱아트Kinetic art

그리스어 키네시스kinesis(운동성), 키네티코스kinetikos(움직임)에서 유래한 키네틱아트란 운동을 수반하는 미술을 말합니다. 키네틱아트는 운동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 즉 작품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로서의 운동을 나타내는 미술로 미술품 자체가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키네틱아트 특유의 효과는 작품 앞에서 움직이는 관람자에 의해서, 혹은 작품에 손을 대거나 조작하는 관람자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키네틱아트라는 명칭이 비평적 분류 기준으로서 첨가되고 승인된 것은 1950년대였습니다. 그때부터 이 명칭은 광범위한 양식과 기법을 망라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을 처음 사용한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등받이 없는 걸상에 자전거 바퀴를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전거 바퀴>는 반미술의 원칙을 보여주기 위한 레디메이드 중 하나였습니다. 뒤샹은 또한 1920년대 초 뉴욕에서 <회전 부조>와 <회전 반구>를 제작했으며, 그것들은 회전할 때 양감의 환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동심원들이 그려진 평편한 원반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입체적 외형을 띤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아르테 포베라 작품은 자의적으로 보잘것없고 진부한 재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개 환경미술의 성격을 띠고 종종 강하게 극적인 요소를 지녔습니다. 아르테 포베라의 첫 전시회가 1967년 9월에 열렸습니다. 포베라는 이탈리아어로 ‘가난한’이란 뜻입니다. 아르테 포베라의 특징은 미국 미니멀리즘 조형물의 기본 방향, 혹은 제작방식을 테크놀로지로 잘못 이해했으므로 반테크놀로지의 자세를 표방한 것입니다. 1970년 6월 첼란트가 기획한 토리노 시립미술관에서의 전시회 ‘개념미술, 아르테 포베라, 대지미술’에는 코수스, 웨이너 같은 언어 중심의 개념미술 예술가들과 마리아 스미스슨 같은 대지미술 예술가들 그리고 피스톨레토와 쿠넬리스 같은 아르테 포베라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경향은 상호배타적이기보다는 중첩되면서 전시되었습니다. 만초니와 클랭의 작품이 포함된 것은 특별히 후대 작품들에 대한 유럽의 계보를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첼란트는 전시회 카탈로그에 "아르테 포베라는 주로 매체의 물질적 속성 및 재료의 변하기 쉬운 성질과 관련이 있는, 근본적으로 반상업적이고, 불안정하며, 평범하고, 반형식의 미술을 표방한다. 이는 실제 재료와 전체 현실에 대한 미술가들의 참여를 중시하며, 또 그런 현실을 비록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민감하고 지적이며 교묘하고도 사적인 강렬한 방식으로 해석해내려는 미술가들의 시도를 강조한다"고 적었습니다.

만초니는 1960년대 초에 긴 종이에 붓질을 끊어뜨리지 않고 한 번에 길게 긋는 그림을 그렸으며, 그 길이가 명시되지 않은 것도 있고 명확한 길이로 된 것도 있습니다. 뉴욕의 모마가 소장하고 있는 <선 1천 미터>는 만초니가 1961년 6월 24일에 제작한 것으로 그 길이가 1천 미터에 달합니다. 그는 이런 작품을 돌돌 말아 판지로 만든 통에 넣어 보관했습니다. 이런 작품은 미니멀아트에 대한 충동을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미니멀아트에 대한 장난기 어린 풍자로 보였습니다. 자신의 배설물을 담은 깡통에 서명하고 표시해놓은 <예술가의 똥> 연작은 현대 미술의 개성 예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깡통에는 ‘예술가의 똥, 내용물, 30g, 신선하게 보존됨, 1961년 5월에 생산되고 저장됨’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클랭과 마찬가지로 만초니는 다다에서 취한 개개의 개념들을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철저한 미학적 허무주의도 소생시켰습니다. 그는 클랭보다 더 조야한 유머 감각과 아이러니한 것을 즐길 줄 알았습니다.



대지미술Land art(Earth art, 혹은 Earthworks)

대지미술은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예술가마다 사용한 기법과 내세운 의도가 현저히 다를 뿐만 아니라 작품도 매우 다양합니다. 건물을 반쯤 허물기, 바윗덩어리와 수 톤에 이르는 흙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구덩이, 전망대,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경사로 만들기, 단층을 파헤치기, 산허리를 절단하기, 화산을 구획하기, 사막의 바닥에 드로잉하기, 눈 위에 자취 새기기, 돌개바람 추적하기, 염분이 높은 호수 위에 번개 부르기, 공공쓰레기장에 아스팔트 붓기, 커튼으로 계곡 막기 등 다양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비용이 많이 들어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월터 드 마리아는 대지미술을 고립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고립을 타파해야 하고 사진은 이런 시도에서 주요한 매체였습니다. 대지미술의 대부분 예술가들이 의식적으로 사진매체의 가능성을 활용했습니다. 그들은 공간감과 거대한 크기를 복구시키려고 화면 구성을 연구했습니다. 이러한 사진은 책과 잡지로 유포되는 단순한 기록, 작품과 그 과정을 이해시키려는 교육적 몽타주의 요소, 전시 대용품, 혹은 상시적이거나 지속 가능한 설치일 경우 그 현장을 방문하도록 자극하는 것 등 다양한 기능을 띱니다. 대지미술품에 접근하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마이클 하이저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구의 반대편, 이집트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러갈 수 없다고 불평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가세오, 가서 보면 될 것 아닙니까.

미니멀아트에서 비롯된 대지미술의 초기 양상인 극도로 단순한 점은 미니멀아트를 단지 거대한 규모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작품은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으며 미니멀아트 외에도 다양한 경향의 미술과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재료를 사용한 점에서는 아르테 포베라와 관련지을 수 있으며, 작품이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면 해프닝이나 퍼포먼스아트와 관련지을 수 있고, 거창한 작업에 관한 계획안은 단지 계획으로만 존재하므로 개념미술과도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또한 도시문화의 세련된 기술에 대한 혐오를 반영한 히피문화의 자연 회귀 정신의 한 부분으로서 선사시대의 흙무더기와 목초지 경계선에 대한 연구에 열광했던 당시의 상황과 관련되는 점도 있습니다. 전통 엘리트 미술과 상업성을 지향하는 갤러리 중심의 미술계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또한 현대의 전형적 모습 중 하나였지만, 사실 거대한 대지작품은 막대한 경비를 필요로 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외진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 대중적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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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선재 강의(2011 5-3)



오늘날의 미술은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채 정체상태이다




 

(경주에 있는 아트 선재에 가서 강의했습니다. 다음은 제 강의 노트입니다.)



1960년대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의 미술을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오늘날의 미술은 1960년대에 발생한 다양한 장르들이 반복적으로 답습되고 있으며,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채 정체상태입니다. 매우 지루한 현상입니다.



 


개념과 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

1965년경 미니멀아트 예술가들은 곧 개념미술 예술가들로 불리게 될 예술가들과 뉴욕의 막스의 캔자스시티 주점에서 종종 만나 토론했습니다. 대학을 막 졸업한 그들은 그린버그에 의해서 주도되어온 형식주의를 해체하고자 했으므로 그들의 토론은 매우 이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토론했으며, 미술에서의 개념의 성격이 열띤 논쟁과 토론이 되었습니다. 미술은 침대나 의자처럼 명확하게 한정된 사물의 물리적 유형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우리는 작품의 순수한 시각적 측면보다는 그 작품이 지닌 정서적, 역사적, 문화적 측면을 더 깊게 음미해야 합니다. 회화를 통해서 단지 그림만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은 물론 그 화가가 감정과 희망 그리고 사상까지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시각적 감상이 즐거운 것이 되려면 정신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줍니다. 심미적 경험은 반드시 시각을 통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사고능력에 도전하는 정보로 생깁니다.

악보 읽는 기술이 매우 뛰어난 사람은 연주를 들을 필요가 없으며, 듣는 것보다 오히려 교향곡 악보를 읽는 걸 더 좋아합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음이 실제 연주보다 훨씬 더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비물질적인 개념미술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고능력에 도전하는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미술에서 우리는 아마추어이며 애호가다

아마추어amateur와 애호가dilettante(딜레탕트)는 전문가의 수준에 다소 미치지 못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의미하는 것처럼 와전되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아마추어란 말은 라틴어의 아마레amare, 즉 ‘사랑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말로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애호가도 ‘~에서 즐거워하다’라는 라틴어 델렉따레delectare가 어원으로 특정 활동을 즐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두 단어의 본래의 뜻은 성취보다는 경험에 좀 더 비중을 두는 것이었으며, 얼마나 많은 성취를 하는가보다는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주관적 보상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만큼 경험 자체의 소중함에 대한 우리의 태도 변화를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건 없습니다. 아마추어가 되는 건 그 분야에서 전문가들과 경쟁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징적 훈련을 통해서 정신적 기술을 발전시키고 의식을 정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수준에서 아마추어적 학식은 나름대로의 기반을 갖게 되는 것이며, 때로는 전문적 학식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사람 莊子(장자)가 말한 逍遙遊(소요유)에서 遊(유)는 유람하다wandering(or flowing)는 뜻입니다. 소요유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유람한다는 말입니다. 장자는 유가 올바른 삶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외적 보상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발적이며, 완전한 헌신의 삶, 즉 완전한 자기 목적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아마추어와 애호가가 바로 이런 자기 목적적인 경험, 즉 플로우경험 혹은 최적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작품만을 감상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화가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은 물론 그 화가가 감정과 희망 그리고 사상까지도 볼 수 있으려면 독서를 통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16세기 북유럽 화가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르네상스와 종교혁명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이 왜 그런 작품을 제작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프랑스 혁명을 알아야 합니다. 모던 회화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지 알려면 회화 양식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다다를 이해하려면 1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알아야 하고,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를 이해하려면 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심미적 경험은 상당 부분 이러한 정보로 생깁니다. 독서는 집중과 몰두가 요구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얻는 피드백의 만족감으로 플로우경험을 얻게 됩니다. 플로우경험이 곧 행복입니다.

우리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일 때 대중적인 여가, 대중문화, 심지어 고급문화까지도 우리의 정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심리적 에너지만을 흡수할 뿐이며, 그 대가로 어떤 실재적인 힘도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지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어줄 뿐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행복의 원천이 ‘사랑과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루의 생활에서 유쾌한 활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이 ‘행복해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내가 하는 말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 ‘친구와 함께 있는 것’, ‘성적 매력이 주목받는 것’ 등입니다. 우울하고 불행해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위와 같은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지옥이다’라고 우리에게 경고하는 오래된 금언도 있습니다. 힌두교의 현자들과 기독교의 은자들은 광란의 속세를 멀리 벗어난 고요함을 추구했습니다. 사람들이 겪은 가장 부정적인 경험에 관한 조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공정하지 못한 상사나 무례한 사람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가정에서는 무책임한 배우자, 고마워할 줄 모르는 자녀,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척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깨어 있는 시간의 3분의 1을 혼자서 보내게 됩니다. 혼자 있게 되면 곧 우울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면한 도전도 없고 별다른 할 일도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고독감으로 인해 심하지는 않지만 감각을 못 느끼는 증세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참아내고 더 나아가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어떤 임무도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홀로 있는 시간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합니다. 텔레비전이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깜박이는 화면이 의식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회복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 눈에 익은 주인공들, 심지어는 반복되는 광고까지도 일종의 안심을 주는 자극이 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과 상호작용을 하는 동안 우리의 머릿속에 개인의 걱정거리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가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불쾌한 걱정들을 차단시켜줍니다. 이런 식으로 우울함을 떨쳐버리는 건 주의의 낭비입니다. 크게 얻는 것도 없이 많은 양의 주의력을 소모해버리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건 시간을 때우는 한 방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큐멘터리라든가 좋은 영화를 감상하는 건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마약도 우울한 생각을 떨쳐버리게 해줍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마약을 복용하고 신비로운 작품을 만들어보지만, 그들은 결국 창작을 위해서는 맑은 정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약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좋은 작품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복합성이 떨어져서 너무나 명백하고 자아도취적인 경향을 띠게 됩니다. 화학물질에 힘입어 예민해진 의식은, 나중에 작가가 명료한 정신으로 돌아와 사용할 수 있는 색다른 이미지나 생각, 감정 등을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정신을 점차 화학물질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은 스스로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위험이 따르게 됩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는 결국 마약 복용으로 죽었습니다.

경험의 질을 통제할 능력이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주의력을 조직해줄 만한 외적 요구 없이 혼자 있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의 여부입니다. 친구를 만나고 극장이나 연주장에 가는 건 쉬운 일입니다. 집중이 필요하고 기술을 증진시켜주며 자아를 성장시켜주는 독서를 하며 여가를 보내는 것과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고독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야수나 신, 둘 중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신까지는 아니더라도 텔레비전, 극장, 레스토랑, 음악회 등 문명생활의 도움 없이도 플로우경험을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정신적 일과를 설정하는 건 중요합니다. 고독을 하나의 기회로 보지 않고 피해야만 하는 조건으로 보는 사람은 그런 상황에 처하면 당황하기 일쑤입니다. 자아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분전환에만 의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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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



11월 17일 청담동에 있는 오페라 갤러리에서 강의했습니다. 강의 제목이 <폴록과 친구들>이었습니다. 큐레이터가 저의 책 제목을 강의 제목으로 한 것입니다. 강의는 ‘잭슨 폴록과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폴록이 추상표현주의의 간판스타였으니까 그와 동시대 화가들의 다양한 회화세계를 조명한 것입니다.

다음은 수강자들에게 나눠준 글입니다.


1.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는 미국의 고유한 양식이지만, 공통의 양식이 아니라 유행이다. 소위 말하는 뉴욕파New York School를 지칭한 말이며,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뉴욕화단의 간판스타는 잭슨 폴록이었다.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으로 그 양식이 규정된 폴록의 회화세계를 알아보고 동시대에 활약한 예술가들은 무엇을 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2.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을 모마Museum of Modern Art(MoMA)의 초대 관장이자 미술사학자 알프레드 H. 바 주니어Alfred H. Barr, Jr(1902~81)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의 초기 유동적 작품에 대해서 형식적으로는 추상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표현주의라는 의미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바의 견해에는 타당성이 있었는데, 칸딘스키는 색채 대비에 대한, 그리고 추상에 여러 해 동안 자취가 남아 있던 유동적 몸짓에 대한 취향을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과 공유했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미국 미술운동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추상이 어떻게 진전되어 왔고, 표현주의는 또 어떻게 진전되어 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추상표현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해도 구한다.


3. 전후 유럽에서는 타시즘Tachism과 앵포르멜Informel이 유행했는데, 미국식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유럽식 표현방법들이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거칠고 실험적인 카우보이 스타일이었던 데 비해 유럽의 타시즘과 앵포르멜은 매우 서정적이고 기교면에서 뛰어났다. 1945년경부터 10여 년 동안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상응하여 유럽에서 전개된 앵포르멜은 1950년 프랑스의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1909~87)가 창안한 용어로 입체주의에서 나온 어느 정도 엄격한 추상 경향이나 네덜란드 화가 피트 몬드리안과 데 스테일 화가들이 보여준 것 같은 다양한 기하학적 추상 형식과는 대조적으로 잠재의식의 환상을 직접 표현해내는 ‘서정적 추상’ 작품에 일괄적으로 적용되었다. 앵포르멜의 개념과 거의 동일하며 정확히 구별되지 않은 채 혼용되기도 하는 것으로 타시즘이 있다. 타시즘은 ‘얼룩’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Tache에서 파생되었다. 타시즘은 색채의 조화에 대한 의식적인 조직보다는 화가의 감정적 상태를 표현하는 ‘기호’와 ‘제스처’로서의 얼룩과 색면들의 자발적인 상호작용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한편 앵포르멜은 무의식적 서예의 형태로서의 추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타시즘은 주제와 관계없이 색의 얼룩을 응용한 것을 가리킨다.

추상표현주의와 타시즘, 앵포르멜의 차이는 추상표현주의가 초현실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구상적 요소가 두드러졌으며 미국인의 자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 서양미술의 중심은 뉴욕이었고, 따라서 추상표현주의가 강세를 띠었다. 대전을 종식시킨 후 미국의 이미지는 전 세계에 경제적·정치적 그리고 예술에서 강국으로 부상되었고, 많은 나라가 미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유럽은 전후 세계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했으며 파리는 더 이상 미술의 중심이 못되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창조적 미술이 억압받고 있었다. 전후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의 고유한 양식으로 등장하자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4. 추상표현주의가 서양미술 전반에 끼친 영향을 알아본다. 해프닝의 선구자 앨런 캐프로Allan Kaprow는 ‘액션 페인팅’에서 영감을 받아 해프닝Happening을 창안했다고 말했다. 행위 자체가 모티프가 된 건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회화가 끼친 영향이다. 해프닝이 새로운 장르로 등장함으로써 퍼포먼스와 바디아트가 자연스럽게 진전된 형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양식면에 있어서 추상표현주의가 끼친 영향은 전체론적all-over 구성이다.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부분들을 조화롭게 배치해 하나의 전체로 통일시키는 전통 구성과는 대조적인 전체론적 구성에는 분리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고, 일정한 체계가 없는 회화 공간 속에 단일한 이미지만 있다. 전체론적 구성과 더불어서 자동주의 기법도 특기할 만하다. 자동주의는 무의식의 심상을 묘사하는 데 매우 적절한 기법이었다. 오늘날에도 전체론적 구성에 자동주의 기법을 사용한 추상표현주의 회화가 건재하고 있으며,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1929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토머스 하트 벤턴으로부터 회화를 배운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은 1930년대에 지방주의 양식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멕시코 벽화가들의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43년 뉴욕의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곧 그 화랑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1940년대 중반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 양식으로 그렸으며, ‘뿌리고 튀기는’ 기법은 1947년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새로운 회화 공간을 도입했는데, 서예적, 혹은 갈겨 쓴 염료 기호들이 화면에 매우 얕은 깊이를 창출했다.

추상표현주의에서 특별히 잭슨 폴록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해럴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1906~78)는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이란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다. 로젠버그는 1952년 12월호 『아트 뉴스Art News』지에 기고한 시각예술에 관한 첫 중요한 글 ‘미국 액션페인팅 화가들 The American Action Painters’에서 처음 이 용어를 사용했다. 로젠버그가 회화작품에 대한 해석으로 중요하게 여긴 건 화가의 창조행위였다. 화가의 충동적 창조력에 자유로운 표현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액션페인팅을 정의한 그는 그리는 행위 자체를 완성된 작품보다 더 중시했다. 그는 일부 화가들, 특히 폴록이 캔버스를 창조행위를 위한 투기장으로 삼은 데서 화면에서 발생하는 것이 회화가 아니라 이벤트임을 발견했다. 그가 폴록의 작품을 이벤트로 해석한 건 적중했는데 그 밖에 달리 설명할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젠버그와 달리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유럽 전통 미학 이론에 근거하여 추상표현주의를 해석하려고 했다. 그는 창조행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작품의 완성도에 중점을 두었다.

폴록은 서예적 글쓰기로 자동주의 기법을 능가했는데, 유럽 화가들의 기법은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지만 폴록의 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전적으로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이런 효과를 붓을 사용하지 않고 깡통에 구멍을 내어 흘리거나 붓에 물감을 묻혀 붓을 흔들어 물감이 캔버스에 떨어지게 하는 ‘뿌리고 튀기는 drip and splash’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뿌리고 튀기는’ 기법은 1947년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폴록은 이젤을 사용하는 전통 방법 대신에 캔버스를 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키고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그런 뒤 붓이 아니라 막대기,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뤘고 때로는 모래, 유리조형물, 혹은 이물질을 혼합하여 임파스토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방법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와 공통점이 있다.

‘뿌리고 튀기는’ 기법으로 폴록은 ‘전체론적’ 구성 회화를 창안해낸 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회화는 캔버스의 형태와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된 작품을 보면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라져 있다. 이후 이런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 회화적 추상 화가들이 캔버스의 형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전체론적 구성 양식의 영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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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학의 정준영의 북 카페에 출연하여 한 이야기입니다

1.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과학자였는가 하는 시각에 대해서?
<모나리자>의 미소에 대한 수수께끼만큼이나 레오나르도가 수수께끼의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 진상을 밝히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최후의 만찬>은 구설수에 오른 작품으로 그 작품의 이면에는 숨겨둔 진실이 있다는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많은 가설들은 가설들로만 존재할 뿐 레오나르도를 설명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고 그가 천재였다는 점만을 부각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로서 그가 발명한 것들이 너무 방대하고 엄청나서 혹시 가짜일 수도 있다는 의심에서 그 내용을 증명해 보이는 과정에서 그의 참모습이 밝혀진 것이라고 봅니다. 결과는 과연 그는 위대한 과학자였구나 하는 것입니다.

2.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동시대 인물과 비교하면?
레오나르도를 이해하기 위한 동시대 인물로는 미켈란젤로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레오나르도만큼 큰 인물을 그에 버금가는 큰 인물과 비교해야지 그보다 못한 많은 사람들을 언급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두 거봉입니다. 이 산에서 보면 저 산이 커 보이고 저 산에서 보면 이 산이 커 보이지만, 과학을 제외한 미술에서 보면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높이가 같은 두 산입니다. 다만 미켈란젤로가 더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그가 당대에 인기 있는 작가였던 반면 레오나르도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돌이켜보면 레오나르도가 미술가로서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이 그로 하여금 방향을 돌려 과학에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오늘 방송대학에서도 그를 과학자로 조명하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날의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손수 악기를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는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으며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겼는데, 이는 과학자의 태도에 합당하다고 봅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중세의 어두운 도덕관에 젖어 있었고, 명성이 레오나르도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아 많은 돈을 벌었지만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에 빠지는 것을 죄라고 여겨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던 던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했기 때문에 일찍이 자신이 속했던 상류사회를 벗어났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기독교관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는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스스로 염세주의의 짐을 졌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도 같았습니다.

두 사람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레오나르도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이었고, 미켈란젤로는 변혁을 두려워한 과거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해나갔습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발명가로서 분주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체를 기계에 비유해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많은 글로 남겼습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의 사상에 심취해서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업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업에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늘 작품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습니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 것은 어쩌면 당연해보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닫힌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생활상은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많은 편지와 시를 남겼어도 그것들이 철학적인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을 아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레오나르도가 미켈란젤로보다 나이가 23살이나 많다보니 레오나르도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 미켈란젤로는 아직 미술계에 발을 내딛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피렌체에서 인정받지 못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피렌체에 돌아와 잠시 머문 적은 있지만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그곳에 뼈를 묻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와 로마에서 주로 활약했으므로 두 사람의 삶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겹치는 때가 별로 없어 두 사람을 한 환경 안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공존하여 유럽 전역에 두 개의 산자락으로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독보적인 존재로 한 사람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두 거인이 함께 존재한 것은 역사에 유익합니다. 두 사람은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되어 500년을 존속했습니다. 과거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경외하는 미켈란젤로의 진지함이 레오나르도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과학에 근거해서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려 한 레오나르도의 행위가 미켈란젤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줍니다. 근대가 요구한 것은 둘 모두였습니다. 두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물질문명의 발전만이 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성찰하고 부덕한 행동을 금하는 데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오늘날의 미술에도 이런 보완이 필요합니다.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하는 유물론적 경향에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사변적인 점이 결여되어 있고, 반면 지나치게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에는 물질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르네상스 패러다임은 이제 와서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패러다임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활약을 통해서 르네상스의 교훈을 얻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입니다.

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공학자가 되 계기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레오나르도가 빈치의 작은 마을에서 번화한 도시 피렌체로 간 것은 18살 경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그가 받은 교육은 읽고 쓰기, 문법과 셈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교육은 동네 성당의 신부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철자가 불규칙해 읽기에 서툴렀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고전을 읽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마흔이 넘어서야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도나텔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도제생활을 시작했는데 큰 작업장을 갖고 있던 베로키오는 회화, 조각 외에도 싼 것 비싼 것 가리지 않고 모든 장식품의 주문을 받았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배우고 조수로 활동한 기간은 12년이나 됩니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수학한 미술가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보티첼리도 포함됩니다. 레오나르도는 서른 살에 도제생활을 마치고 마스터로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감이 없어 여전히 베로키오의 조수로 그를 도왔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를 통해 수도회의 주문을 받아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는데, 거의 2.5m의 정사각형 크기로 수십 명이 등장하는 스케일이 큰 그림이었다. 화가들이 성모 마리아를 그릴 때 다리를 벌린 자세로 옥좌에 앉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는 두 무릎을 모은 채 섬세하고도 여성적인 자세로 표현했으며 이는 후대 화가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제단화를 2-3년 사이에 그려주고 돈 대신에 땅을 받기로 했지만 미완성으로 남겼습니다. 전통 도상을 따르지 않은 미완성의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성모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주변의 공간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은 장면으로 보이며, 불필요한 상황의 세밀한 묘사를 생략했고 세 가지 예물 중 유황과 몰약을 바치는 것으로 제한했습니다. 이것 외에 성서가 언급한 내용에 관한 상징물이 이 작품에는 없습니다. 교회를 장식하는 종교화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서의 내용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레오나르도가 그런 목적으로 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 대한 그의 해석은 교회의 입장과 사뭇 달랐습니다. 화면 상단에 말 탄 사람들이 서로 살상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어 고대세계의 혼돈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기를란다요와 보티첼리가 감동을 받았고 특히 라파엘로가 영감을 받아 이런 요소를 프레스코화를 그릴 때 응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거의 완성단계에까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완성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 바사리는 그가 “변덕스럽고 불안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신학적으로 문제가 너무 난해하여 자신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레오나르도가 공학자 또는 우리가 아는 과학자의 길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은 서른한 살 때에 밀라노로 가면서 부터였습니다. 피렌체에서 화가로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만약을 가정해본다면, 그가 피렌체에서 회화에 대한 일감을 많이 받았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과학자로서의 그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밀라노는 터키족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침략을 받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무기를 개발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군수사업은 오랫동안 밀라노의 주력 산업이었으므로 그가 밀라노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한 것은 당연해보입니다. 밀라노 거리에는 수십 개의 무기판매점이 있었으나 이웃나라들과 터키에 비하면 무기사업은 열등한 편이었습니다.

밀라노로 갈 때 레오나르도는 최고 권력자에게 줄 편지를 소지했는데, 12개의 항목으로 된 편지에는
1. 공격뿐 아니라 화력에도 방어가 되는 운반 가능한 다리.
2.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물을 말리는 방법, 다리 외에도 도로포장, 사다리 올리기 등 다양한 기계.
3. 제방이 높고 장소나 지역이 험준해 기존의 방법으로 폭격이 가능하지 않을 때 폭격하는 새로운 방법.
4. 돌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박격포.
5. 전투가 바다에서 벌어질 경우에 대비해서 강한 대포, 발연, 화약을 물리칠 수 있는 배.
6. 소리를 내지 않고 통로와 비밀 지하터널을 파고, 강 밑으로도 터널을 파는 방법.
7. 약점이 없는 덮개가 있는 수송수단.
8. 대규모의 사석포, 박격포, 불덩이를 투사하는 기구.
9. 사석포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대형 투석기 외에도 공격, 방어용의 다양한 기구.
10. 평화로운 시기에 물을 이동하는 방법.
11. 대리석, 청동, 테라코타를 이용하여 어떤 인물이라도 조각으로 제작할 수 있다.
12. 군주의 부친을 기념하여 말탄 모습을 대규모의 청동 말로 제작할 수 있다.

그의 편지가 군주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과학에 근거하여 각종 무기와 공격과 방어를 겸하는 기구들을 무수히 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군부의 공학자처럼 이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동갑내기로 밀라노 군주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13년 혹은 14년 섬기게 됩니다. 레오나르도가 루도비코와 가까워진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한 여인 세실리아 갈레라니의 초상을 그린 뒤부터였습니다.

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학문적 관심에 관해 말씀해주십시오.
레오나르도에게는 유머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왜 아이들이 못생겼는데 네 그림에서는 아름답게 묘사되었느냐고 묻자 “그림은 낮에 그렸지만 아이들은 밤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는 그가 사고에 있어 매우 융통성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기타와 비슷한 14-17세기의 현악기 류트lute를 배웠는데, 파티를 좋아하고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류트와 비슷한 악기를 은으로 제작했는데, 말 머리의 형상이었고 강력한 하모니와 완전한 음을 냈습니다. 발명가 외에도 음악에 재능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류트를 노래 반주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악기는 후세 화가들에 의해서 천사가 사용하는 악기로 그림에 등장합니다. 그는 그 밖에도 아쿠스틱 악기들을 발명했으며, 비올라, 녹음기, 북과 키보드가 있는 종을 발명했고, 바이올린도 발명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악보를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악보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했습니다. 그가 쓴 악보는 현존하지 않지만 즉흥적 작곡가였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최초로 옵스쿠라를 이용하여 드로잉한 것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옵스쿠라는 어두운 방이나 상자의 벽에 작은 구멍을 내 빛을 통해 바깥 이미지를 벽에 거구로 투시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레오나르도가 이런 장치를 발명하여 드로잉에 이용했는데 이는 카메라의 원리로 훗날 카메라의 발명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과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베로키오의 문하에 있을 때부터였습니다. 당시에 도제들에게 손으로 하는 일과 병행해서 기하학, 원근법, 해부학의 초보적인 지식이 교수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이 명장이고 군인을 훈련시킨다”고 보았고 “훈련에만 집착하고 과학이 없으면 조종 장치나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선원과도 같아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결코 알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정밀한 자연과학으로 보고 또한 모든 학문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학문은 비인격적인 데 반해 회화는 개인 및 개인의 타고난 재능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화가에게는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시인의 천재성에 필적할 만한 재능까지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로 전해온 “회화는 말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회화”라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예술 사이의 서열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회화의 결점이라면 시 역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점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의 노트북을 보면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데,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가운데 의사이면서 철학자, 지리학자, 수학자인 파올로 델 포조 토스카넬 리가 적혀 있고, 피렌체에서 산수를 가르치는 베네데토의 이름도 있어 그가 그들의 강의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심이 다양했고, 과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강둑을 따라 정돈된 이상적인 도시로 구상했는데, 노트북에 의하면 도시를 5천 채의 집이 있는 마을 다섯 개로 구획하고 각 마을에 3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도시를 계획했습니다. 그는 수로에 의한 십자형의 도시로 구상하면서 수로가 운하 역할을 하고, 정원에 물을 대며, 풍차칸과 수문으로 거리의 먼지를 닦아내게 했습니다. 건물의 외관을 높이고 거리의 폭을 넓게 해서 가능한 한 많은 빛이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며 굴뚝을 지붕보다 높게 만들어서 연기가 위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로를 따라서 하수도를 만들어 사용한 물이 주거지역에서 흘러나가게 했습니다. 노트북에는 건물 내부에 화장실이 넉넉해야 하고, 걸터앉는 시트를 현대화하여 회전문처럼 360도 회전해야 하며, 천장에 많은 구멍을 내 환기가 잘 되게 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5.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체를 해부했다더군요.
레오나르도가 해부학적 드로잉을 처음 그린 것이 1490년경 그가 38살 때였습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건축에 관한 책을 읽고 나름대로 공부해온 그는 건축물을 유기체에 비유하여 잘못된 부분을 병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만의 표현이 아니라 비트루비우스가 건축물을 의인화한 이래 일부 건축가들이 건축물 기둥을 사람의 갈비뼈, 좌우익부를 팔에, 앱스(건물의 끝)를 머리에 비유했습니다. 그가 건축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에 해부학적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일찍이 해부학에 관심을 기울여 그가 남긴 드로잉들을 보면 남자누드를 그린 데서 인체의 모든 부분을 관찰했음을 알 수 있고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 구조를 상세하게 묘사했음을 봅니다. 그러나 해부학적 드로잉이 38살 때에 그려진 것으로 봐서 건축물에 대한 연구가 인체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인간이 세계의 모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체의 기하를 우주의 일체와 완전함에 적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점차 대지 자체가 인간의 이미지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6.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science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철학, 종교, 예술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과학은 어떤 가정 하에서 일정한 인식목적과 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지식을 체계화하는 것 아닙니까? 지식이란 knowledge로서 knowing하는 것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란 호기심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에게는 호기심이 있었고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알려고 했으며 그런 것들을 노트북에 기록했습니다. 이는 과학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레오나르도에게 자연은 실험실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 바라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과학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는 퇴적작용으로 생긴 산에서 조개껍질과 해초화석을 발견하고 바다가 한때 대지를 덮은 적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작은 구멍을 낸 종이를 벽에 대고 광선의 경로를 시위했으며, 어둠 속에서 횃불을 빠르게 움직여 불의 선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류트의 줄이 진동할 때는 이중으로 보이는 것이나 탁상에 칼을 꽂아놓고 탁상에 진동이 생기게 하여 칼이 두 개로 보이는 환영을 보여주면서 눈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대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함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눈을 ‘영혼의 창문’으로 보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눈에서 발하는 미립자들에 의해 영상이 생긴다고 보았지만 레오나르도는 눈이 발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광선을 받아들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눈을 관찰한 그는 렌즈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눈이 이미지를 거꾸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입체영상의 원리, 즉 3차원 입체의 지각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한 순간에 빛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된다고 믿었지만 그는 빛이 지나간다고 보고 빛의 속도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으며 빛이 어떻게 발산하는가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진동을 떨림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보다 한 세기 이전에 이런 근본적인 법칙을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해 “모든 자연적 현상은 가장 짧은 가능한 수단에 의해 나타난다”고 적었습니다. 당시 레오나르도가 과학에서 거둔 결실은 컸습니다. 그는 과거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들에 호기심을 갖고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레오나르도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이라면 현존하는 방대한 양의 그에 관한 책과 그에 대한 연구이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를 화제로 나누는 이야기가 바로 유산입니다. 왜 우리가 그의 생애를 기억하고 분석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인데, 한 마디로 실용주의 태도입니다. 앞서 언급한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기존의 교리에 동조하지 않음으로써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그 그림이 미완성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여 인류에게 유익한 환경에 되게 했습니다. 인체의 해부를 통해 질병을 알아내고 질병을 방지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 이 모든 것에는 실용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인류의 안녕과 번영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의 모든 과학적 업적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인물이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뼈를 묻고 오늘날 무덤조차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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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MBC-TV 문화산책에서 다룬 주제입니다.
그동안 다섯 차례 집으로 와서 녹화했는데, 오늘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성관’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녹화는 다섯 번 했지만 낮 3시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이라서 한 번도 본 적은 없습니다. 시청자들의 미술 이해에 도움이 되기 위해 PD가 집으로 오면 기꺼이 응해주고 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성관
1. 상징으로서의 누드
클림트는 누드를 인생을 표현하는 고상한 상징물로 보았다.
1916년작 <죽음과 삶>에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의 누드가 밀집하게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삶의 상징한다.
이에 반해 왼편에 해골은 죽음의 상징물로 대조가 된다.
죽음과 삶 사이에 공간이 있지만 죽음은 삶 가까이에 있다.
1903년작 <희망 I>에서는 임산부 누드와 해골을 병치함으로써 탄생과 고통, 번뇌, 그리고 죽음을 상징했다.
새 생명의 잉태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곧 죽음의 위협을 받고 죽음과 연결됨을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곧 사망했으므로 그런 주제의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1905년작 <여자의 세 시기>를 예로 들면 그는 여자의 일생을 아이, 그 아이를 낳은 젊은 여인, 그리고 바짝 마르고 축 늘어진 모습의 늙은이로 연령으로 셋으로 상징했다.
관능적인 매력이 있는 젊은 여자와 대조되게 늙은이는 절망적인 모습이며 몸을 옆으로 돌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수치심마저 느끼는 모습이다.
늙은이는 그의 작품에서 고독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에게 누드는 자유와 평화의 여신을 의미했고 무엇보다도 에로스 자체였다.
그에게 누드는 성적 대상이면서 또한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상징주의 요소가 농후한 건 인체를 표현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889년작 <흐르는 물>을 예로 들면 여성의 누드를 활처럼 휘어지게 그렸는데, 중력에 의해 우주 공간에 떠있는 모습니다.
그는 누드를 흐르는 물로 상징했다.
<행복의 열망>과 <망자들의 행렬>에서도 보듯 그는 여성의 누드를 허공에 헤엄치듯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으며 이런 식으로 누드를 공간에 구성한 화가가 과거에 없었다.
무중력 공간을 떠다니는 여성 누드들은 고통 받는 나약한 인류가 구원을 염원하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여성 누드에 대한 다양한 상징은 1902년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베토벤 프리즈>에 잘 나타나 있다.
아르누보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벽화에서 클림트는 여성의 누드를 통해 질병, 광기, 죽음, 정욕, 음탕, 무절제를 상징했다.
이 작품에서 여성은 추하고 공격적이며 냉정하다.
여성에게 위협적 특성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클림트에게 여성은 변신을 꾀하는 신화적인 인물이며, 마녀이고, 인어이며, 선녀 같은 동물이고, 또한 세련된 아름다움을 갖춘 여인이다.
이에 비해 남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려는 도덕적인 순례자의 모습이며 구원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받기를 바라는 존재이다.

2. 남성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로서의 여성
클림트는 여성을 남성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이성으로 보았다.
처녀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꿈과 환상에 도취된 감성적으로 민감한 존재인 동시에, 요염한 제스처로 남성의 정신에 깊게 파고드는 동물적 감각이 농후한 존재였다.
클림트는 성적 충동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여성을 묘사했으며, 자위행위에 가까운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것은 마치 몰래 훔쳐보는 장면처럼 관람자에게 호기심에 대한 만족과 성적 자극을 제공한다.

클림트는 남성과 여성을 서로 즐거움을 나누는 성적 파트너로 묘사했다.
행위에 대한 묘사가 노골적이지만 사랑에 도취된 남성과 여성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의 유명한 1907-08년작 <키스>는 사랑을 이상화한 가장 우아하고 화려하며 애욕주의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그는 금을 사용하여 종교화의 성상과도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다.
아르누보의 장식적 요소가 <키스>를 더욱 미화시킨다.
남성의 의상에는 네모난 장식으로 여성의 의상에는 타원형 장식을 사용하면서 두 의상이 한데 어우러지게 하여 남성과 여성이 하나의 몸으로 융합되었다.
오른팔로 남성의 목을 감은 여성의 손가락의 구부러짐, 여성의 머리와 턱을 쥔 남성의 손가락에 나타난 선은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아르누보의 특징이다.
캐리커처를 그릴 때의 힘찬 선의 효과가 <키스>에서 두드러진 요소로 작용한다.
캐리커처는 과장하다는 뜻으로 특징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데 적절한 방법이다.

3. 클림트의 초상화는 당시 빈의 남성과 여성이 요구하는 미의 구현이다.
1900년 전후에 빈의 부유층은 자신들의 초상화를 거실에 거는 것이 유행이었다.
사실주의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클림트는 실제 묘사에 충실하면서도 모델의 성격을 얼굴 표정에서 강력하게 드러낸다.
물감을 엷게 사용하는 건 캔버스에 물감이 촉촉이 젖어드는 데서 감성적 느낌이 생기기 때문이다.
배경은 주로 장식적이며 모델을 미화하는 데 보조적인 역할을 하지만 개성을 강렬하게 드러낼 때는 배경을 단색으로 처리했다.
배경과 모델의 극적인 색의 대조를 통해 관람자의 시선이 모델에 모아지게 한 것이다.
여인의 오만함을 강조할 때는 실제 인물의 크기로 그리면서 모델이 관람자를 비스듬히 바라보도록 구성했다.
여성의 의상의 가장자리를 명환한 선으로 처리하지 않고 색을 문질러서 불분명하게 한 것은 꿈속의 이미지처럼 황홀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현란한 장식과 색채는 빈 여성들의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욕망을 채워주기 위함이고 이는 또한 빈 남성들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점이기도 하다.
1907년에 그린 <아델레의 초상>에는 아르누보 특유의 곡선, 삼각형, 사각형, 눈동자 문양 등 다양한 패턴이 나타나 있다.
그가 비잔틴 황금모자이크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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