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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의 미술읽기 개장


오늘 '광우의 미술읽기'란 방을 하나 만듭니다. 미술을 블로거들에게 보편적인 문화의 하나로 소개하고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술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면서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소위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미술을 이해시키고 가까이 접하게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여 이 방을 개설하는 것입니다. 우선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활동한 에두아르 마네와 클로드 모네를 중심으로 그들과 더불어서 파리 화단을 구성한 르누아르라든가 다양한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을 설명함으로써 블로거들이 미술에 입문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블로거들에게 이런 지식을 심어준 뒤 조금씩 추상화라든가 좀 더 설명이 요구되는 작품으로 옮겨갈 예정이며, 르네상스와 17, 18세기의 서양미술도 다룰 예정입니다. 블로거들이 열심히 따라와 준다면, 20세기 미술을 폭넓게 다룰 것이며, 또한 예술철학도 병행하여 쉽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서두의 이야기가 방대하지요? 그렇지만 공허한 말이 아니라 하려고 합니다. 다만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블로거들의 참여가 실현을 가능하게 해줄 것입니다. 올리는 글에 대한 질문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성의껏 답변해드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술을 가까이하면 삶의 풍요로워진다고 말하고 싶으며, 이 말을 블로거들이 증명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은 첫날, 제목을 ‘에두아르 마네, 부르주아의 아들 화가를 꿈꾸다’로 하겠습니다.
<오귀스트 마네 부부의 초상 Portrait of M. and Mme Auguste Manet>과 <틴토레토의 자화상 모사>를 보면, 마네가 후기르네상스 베네치아 태생의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1518-94, 본명은 Jacopo Robusti)의 양식을 익혀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네가 이십대 후반 화가를 꿈꾸며 그린 습작 정도의 수준의 그림들입니다. 앞으로 자주 언급하겠지만, 마네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노력하는 화가였습니다. 루브르 뮤지엄에 가서 대가들의 양식들을 모사하며 그들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발견한 건 서른을 갓 넘긴 후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할 수 있다고 했는데, 마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10년 이상 열심히 모방한 끝에 대가 양식들의 장점들을 취해 빛이 주는 효과를 회화에 적용했습니다. 틴토레토가 이미 모델의 얼굴에 빛의 효과를 적용할 것을 볼 수 있지요? 중요하지 않은 의상은 어둡게 해서 디테일이 나타나지 않게 하고 관람자의 시선이 모델의 얼굴에 모아지도록 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무대의 장면 같아 보이지요? 화가의 의도가 빛의 사용으로 드러나지요? 빛을 조명으로 사용하니까 모델의 얼굴이 진지하게 보이며 성격이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까?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는 파리 북쪽 교외에서 8대째 지주로 행세한 부유한 집안 출신입니다. 1814년 쉰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클레멘트는 파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지성인으로 고향 제네빌리에에서 존경받던 인물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시장으로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제네빌리에의 거리 명칭을 클레멘트로 붙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오귀스트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대를 졸업하고 한동안 법무부의 고위 공직자로 지내다 나중엔 판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완고하면서도 교양을 갖춘 볼테르주의자로 전제정치와 제국에 대한 혐오감으로 무장한 공화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주아답게 유명한 재단사가 지은 수세기 동안 달라지지 않은 전통 양복을 입었으며, 프랑스인이면 누구나 갈망하는 레종도뇌르 훈장을 상징하는 빨간 리본을 달고 다닌 멋쟁이였습니다. 오귀스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스웨덴 외교관의 딸 이제니 데시레 푸르니에와 1831년 1월 18일에 화촉을 밝혔는데, 그는 서른네 살이었고 신부는 스무 살로 열네 살이나 어렸습니다. 외제니의 아버지 푸르니에는 스톡홀름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스웨덴 왕과 친분이 두터워 외제니는 스웨덴 왕의 대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성악에 재능이 있었고 음악교육도 충분히 받았으므로 특별한 모임이 있을 때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이상은 마네의 할아버지와 부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화단의 총아로 떠오를 에두아르 마네가 태어난 건 1832년 1월 23일이었고, 태어난 곳은 파리의 센 강 남쪽에 위치한 프티소귀스탱, 지금의 보나파르트 가 5번지(사진)입니다. 에두아르 마네가 태어난 4층 건물에는 마네 가족 외에도 어린 에두아르에게 데생을 가르쳐준 외삼촌 에드몽 에두아르 푸르니에도 살고 있었습니다. 1800년에 태어난 에드몽은 에두아르가 태어날 무렵 포병대 장교로 계급이 대위였습니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대부이기도 한 에드몽을 통해 회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드몽은 주말에 에두아르와 에두아르보다 한 살 어린 외젠, 그리고 세 살 어린 귀스타브 삼형제를 미술의 성지 루브르 뮤지엄에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루브르와 뤽상부르 뮤지엄에서는 정부가 구입한 당대 미술가들의 작품이 대중에게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루브르의 푸르탈레 갤러리는 많은 스페인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했기 때문에 파리의 ‘스페인 뮤지엄’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작품들은 스페인이 동란의 소용돌이로 어수선할 때 루이 필립 왕이 스페인 미술전문가 바론 테일러를 고용해 비밀리에 구입한 것들입니다. 테일러는 백만 프랑 이상으로 4백 점 가량 구입했지만, 정작 대가들의 작품은 몇 점 안 되었습니다. 스페인 작품들은 1838년부터 대중에게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1842년에는 영국인 미술품수집가프랭크 홀 스탠디시가 죽으면서 자신이 소장했던 스페인 미술품 5백 점 가량을 프랑스 왕에게 기증했습니다. 그의 기증품에는 고야 8점, 엘 그레코 9점, 리베라 25점, 무릴로 38점을 포함해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대거 포함되었습니다. 따라서 스페인 회화는 자연히 프랑스 회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마네가 훗날 스페인 화풍을 응용해서 그림을 그린 건 당연해 보입니다.
에두아르는 열두 살 때 롤랭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로 5학년부터 가르치는 사립학교였습니다. 학생 4백 명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목요일과 일요일에만 집에 보내졌습니다. 에두아르는 입학하던 해에 5학년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해 낙제했습니다. 아들의 장래에 대한 오귀스트의 걱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두아르는 학교에서 앙토냉 프루스트와 단짝이었는데 그와 평생 우정을 나눴으며, 훗날 문화부 장관이 된 프루스트는 에두아르와의 추억을 『회고록』으로 펴냈습니다. 프루스트는 역사과목 시간에 교사가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저작물인 『백과사전』의 편집장을 맡았던 문필가이자 철학자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1713-84)의 『사교계』를 학생들에게 읽게 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디드로가 동시대 화가들을 향해 어차피 세월이 지나면 유행에 뒤질 모자를 무엇 때문에 그리느냐고 꾸짖는 대목에서 마네가 소리를 질렀다. ‘디드로도 멍청한 놈이었군. 화가는 자신이 산 시대를 증언해야 하는 거야. 유행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기가 본 것을 그려야 해’라고 말했다.”
에두아르가 학교를 졸업한 건 1848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법대에 진학해 가업을 이어주길 바랐지만 법대에 진학할 만한 성적이 못되어 강권할 수 없었습니다.
마네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해군이 될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해군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연령은 16세였습니다. 마네는 1847년 7월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마네는 1848년 12월 군사훈련 목적의 견습용 배에 승선하여 브라질의 수도 리오데자네이로로 갔습니다. 이듬해 4월, 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친 지망생들이 보는 시험에서 다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해군이 될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마네는 해군의 꿈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1849년 가을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1856년까지 6년 넘게 쿠튀르의 화실에서 수학했습니다. 프루스트는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마네는 모델에게 일주일 동안에 취해야 할 제스처를 설명하는 월요일마다 항상 말썽을 일으켰다. ... 하루는 탁자 위에 올라서서 모델들에게 화를 냈다. ‘좀 더 자유로운 포즈를 취할 수 없어요?’ 듣다 못한 한 모델이 ‘너 같은 애송이한테 매번 그런 소릴 듣기란 쉽지 않은 일이군. 그래도 내 덕택에 로마풍의 포즈를 볼 수 있는 것 아네요?’라고 대꾸했다. 마네의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여기는 로마가 아냐! 여긴 파리이고 난 로마에 갈 생각이 없어. 중요한 건 파리라고.’
... 한 번은 마네가 모델에게 일상의 옷을 입힌 채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 그때 쿠튀르 선생이 들어왔다. 선생은 남루한 옷을 걸친 모델 앞에 서서 벌컥 화를 냈다. ‘이게 누구 짓이냐?’ ‘접니다’ 하고 마네가 대답했다. '자낸가? 자넨 결국 도미에밖에는 안 되는 일문이구만’ 하고 말했다.”
쿠튀르는 마네를 풍자 삽화를 그리는 풍자만화가, 화가, 조각가 도미에Honore-Victorin Daumier(1808-79)에 비유해서 사실주의 그림이나 그리는 저급한 화가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도미에는 당대에 살던 프랑스인의 생활을 단순하고 생생한 이미지로 포착하여 기록한 시대의 증언자였습니다. 사실 쿠튀르에게 비난 받을 만큼 저급한 화가 아니라 쿠튀르보다 더 위대한 화가로 미술사에 기록된 화가입니다. 아카데미풍을 배척했다지만, 쿠튀르의 그림을 보면 고대의 역사적 장면을 재현한 것으로 구성이 새롭고 과격적이었지만 낭만주의 회화의 범주를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도미에처럼 있는 그대로의 장면, 또는 과거 화가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의 장면을 그린 건 매우 진보적인 화가의 태도였습니다. 도미의 정치풍자만화는 오늘날 시사만화의 효시입니다. 그는 정치풍자로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쿠튀르는 두 주에 한 번 화실에 와서 제자들과 대화하며 기교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드로잉을 회화의 본질로 여겼습니다. 이는 당시 파리 화단의 거물 외젠 들라크루아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들라크루아는 5층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모습을 스케치할 만한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하면 결코 기념비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쿠튀르는 “대상을 3분 동안 바라본 후에는 그것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고대 조각상을 바라보든 대가의 그림을 바라보든 대상의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 채색에서 색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가능한 한 색을 덜 섞어 사용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마네가 스승으로부터 배운 건 이것들 외에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네는 낮에는 쿠튀르의 화실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쉬스 아카데미Academie Suisse에서 모델을 그리면서 스케치를 익혔습니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문을 연 쉬스 아카데미는 모델로 활동하던 쉬스라는 사람이 문을 연 곳으로 기교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약간의 돈을 받고 모델을 그릴 수 있게 하던 곳이었습니다. 훗날 마네와 더불어 파리 화단의 주역이 될 클로드 모네가 1859년부터 이 아카데미에 왔으며, 미국 남쪽 세인트 토마스에서 파리로 이주해온 유대인 화가 카미유 피사로와 폴 세잔이 이곳에서 모델을 그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한편 마네는 두 살 연상의 피아노 선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피아노 선생 수잔의 어머니 그루테 커크는 홀랜드 남쪽 잘트봄멜 동네에 있는 커다란 고딕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수잔이 어째서 열아홉 살의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파리로 와서 혼자 살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슈만의 곡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수잔의 아파트는 쿠튀르의 화실에서 걸어갈 만한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마네는 시간이 나면 그녀의 아파트로 갔습니다. 파리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수잔이 피아노 교습을 받는 제자와 사랑에 바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수잔은 1852년 1월 29일에 마네의 아들을 낳고 이름을 레옹 에두아르 레엔호프라고 했습니다. 막 스무 살, 정확히는 스무 살하고 엿새 된 마네가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당시 미혼모가 자식을 낳는 건 예사였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구청에 출생신고를 하는 것 또한 보통이었는데, 법으로도 생부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마네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 가족과 함께 지내야 했기 때문에 수잔과 아들에 관해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사실을 안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 뻔했습니다. 수잔은 혼자 힘으로 아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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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정권의 붕괴 원인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장면 정권은 혼란은 일시적인 현상이라면서 좀더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지만 설득력을 잃고 외면당했다.
오히려 언론으로부터 비판과 매질만 당했을 뿐이었다. 정국은 극도의 위기감에 직면했으며 군부 쿠데타 설까지 유포되고 있었지만, 정부는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5·16쿠데타를 당하고 말았다.
실로 어처구니없이 민주당 정권은 단명으로 끝나버렸다.

장면 정권의 실각은 한 정당 혹은 한 개인의 단순한 정치적 실각에 그쳤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정치적 의미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장면 정권 몰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으나 장면 정권 자체의 성격과 정치적 및 경제적 측면 그리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그 원인들을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장면은 사실 정권을 담당할 만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여기서 역사적 배경이란 반식민지 독립운동의 혁혁한 경력을 말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반제국주의 투쟁경력을 가졌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장면은 이 같은 점을 결여하고 있어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을 만한 정신적 권위를 지니지 못했다.


장면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참모진도 대부분 일제하의 관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런 점은 신생국가에 있어 초기 정치 지도층은 반식민 투쟁자들 가운데서 추대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면의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온후하고 신사풍의 인격자였으나, 후진국 혼란기의 정치 지도자로서는 매우 적합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그는 너무 우유부단했고 결단력과 포용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집권 후 민주당 구파의 이탈을 막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도 자파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 원내 안정 세력 확보에 급급했다.
그의 과단성 없는 성격은 위기에 대한 처리나 관리능력에서 거의 무능하게 나타났다.
당시 내각 사무처에서 8개 대학의 3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3.7%만이 장면 정권을 지지했을 뿐 51.5%는 사태를 기다려 보겠다는 태도로 나타났다.
장면 정권은 시민혁명이라는 물굽이에 비해 후속 조치가 미흡했고, 국민의 기대심리에 전혀 부응치 못했다.
왜 국민의 요구가 폭발하는가?
왜 자유가 범람하는가?
왜 혁신계가 도전하고 과격한 학생운동이 일어나는가 하는 데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이에 적당한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장면은 혼란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인식했으며, 야기되는 문제들을 역사적 안목에서 보고 대처해야 했는데 그럴 만한 경륜과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민주당은 훈련과 규율을 통한 정신적 응결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지도체제는 극도로 문란했으며, 분파작용이 심하게 나타나도 이를 통제하고 내부적으로 단결을 공고히 할 만한 지도력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장면 정권의 실체였다. 이런 집단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돌릴 에너지가 나올 리 없었고, 혼란만 거듭하자 종국엔 불명예스런 실격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을 고찰해 보면 첫째, 민주당은 혁명 주체가 아니라 남의 힘을 빌어서 집권했기 때문에 이들은 통치행사에서 혁명세력과 국민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따라서 외압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소신껏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
필요할 때에 강경한 조치를 결행하지 못한 것은 이에 연유된 것이다.
차기벽 교수가 지적했듯이 8·15해방 후의 비극상은 한국을 해방시키는 데 일치하지 못한 데 있었던 것처럼 4·19혁명의 미완성과 민주당 정권 단명의 비극은 혁명세력과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할 세력이 일치하지 못한 데 있었다.


다음에는 이데올로기의 결여를 꼽을 수 있다. 민주당은 반독재 투쟁과 내각책임제 실현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내세워 국민의 포용과 지지를 구해 왔다.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가 실현된 마당에 다음으로 국민에게 제시할 비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면서 다음 단계로 인도해 갈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고, 국민은 이념의 지향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민주당에 대해 기대심리의 좌절을 맛보았다.


집권당이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끌어갈 이데올로기가 빈곤하면 자연 국민의 지지를 잃고 집권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민주당이 집권하게 된 데는 학생들의 세력만이 아니라 교직자를 포함한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 그리고 변화를 원했던 일반 서민들의 지지까지 힘입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 희망적인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혼란만 심화되자 이들은 장면 정권에 등을 돌리고 오히려 비판세력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혹자는 민주당의 경제개발 제일주의를 내세워 변호할는지 모르나, 이 정책 또한 민주당 정권이 의욕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설정했던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서 취해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내각책임제하에서의 행정권 약화도 장면 정권의 몰락의 원인인데, 내각책임제는 본시 입법과 행정의 권력통합과 조화를 그 이상으로 한다. 엄격한 삼권분립에 입각한 대통령 중심제보다도 입법부와 행정부의 유기적인 긴밀한 유대를 바탕으로 효율적인 정책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각이 의회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을 때, 또는 국무총리가 의회를 조종할 때 가능하다.
반대로 국무총리가 자기의 의향대로 의회를 이끌지 못하거나 혹은 내각이 의회의 신임을 받지 못할 때는 행정권은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고 정국은 안정을 잃게 된다.
장면 정권의 경우는 불행하게도 후자에 해당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구파(신민당) 소장파의 도전에 봉착해서 의회 내 안정 세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함으로써 강력한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만일 장면이 대통령 중심제하에서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직에 있었다면 그토록 의회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신경 쓸 것 없이 소신대로 정책을 수행하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민주당은 반독재를 위해 내각책임제를 이상으로 내세웠지만, 혁명 후 폭발하는 난제를 해결해야 할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내각책임제가 과연 적합했느냐 하는 의문마저 제기된다.


아무튼 장면 정권으로서는 내각책임제하에서 일차적으로 의회 내에 안정 세력을 구축하는 데 역점을 둘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는 집권 9개월 동안 세 번이나 개각하게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장면 국무총리가 의회에 안정 세력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고심했던가를 입증해 준다.
2개월 단명의 각료진을 이끌고 어떻게 강력한 행정력을 구사할 수 있으며, 정책의 일관성과 정국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겠는가.
행정력의 약화는 그에 반비례하여 사회혼란을 야기할 뿐이었다.


내각책임제가 권력을 분산시켜 독재와 장기집권을 막고 의회와 내각의 유대로 효율적인 정책수행이 가능한 장점이 있는 반면, 정치수준이 낮고 역사적으로 혼란기를 극복해야 할 상황에서는 자칫 무력하게 허물어지는 최악의 단점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은 내각책임제를 금과옥조로 주장하고 실현시켰지만, 그 제도가 가진 최악의 취약성 때문에 무너지는 결과를 맞아야 했다.


다음으로 장면 정권의 몰락의 원인은 군부에 대한 통솔이 소홀했던 데 있었다.
어떤 형태의 정부이건 새 정부가 수립되어 일차적으로 파악하고 수행할 가장 중요한 업무는 무력을 가진 군부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는 일이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군부와 정보를 교환할 적절한 채널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또한 통제할 만한 기능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국방장관을 임명할 때부터 군부를 장악하고 작전을 수행하는 측면보다는 신파와 구파 그리고 소장파 사이의 각료직 안배의 측면에서 장관직을 배려했다.
장면 정권은 군부 내의 사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다만 각군 참모도 총장에게만 모든 것을 의지했던 형편이었다.


한편 군부는 장면 정권의 감군정책과 군부숙청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감군과 숙청은 하위 장교의 진급과 직결되어 있었다.
장면은 7·29총선 유세 때 병력을 6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감군하겠다고 공약했었다.
병력감축은 장교들이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감축시킴으로써 그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장면 정권의 감군계획은 20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줄여 심각성이 다소 완화되는 듯했으나, 국회에서 군부의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했을 때 군부의 불만은 대단했다.


민주당 정권이 군을 다루는 데 있어 범한 큰 실수는 부패 군부의 숙청을 약속해 놓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던 점이다.
군부숙청 약속은 고위 장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또 한편으로 숙청 약속을 실행하지 않는 사실은 숙청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던 하급 장교들을 실망시켰다.
민주당 정부의 군부숙청 공약에 고무되어 하급 장교들은 상관의 비위사실을 들추어내는 과감한 행동을 취했다.
이것은 하극상의 사건을 빚어냈고 후에 5·16쿠데타와도 연결되었다.
또 군은 장면 정권의 혁신계와 급진 학생들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에 대해 굴종적인 저자세를 취하는 데도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지적해야 할 점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군 장교들과 교류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사회적 출신성분과 교육배경에 있어 양자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상류계급의 출신이 많았다.
장면 정권의 주요 멤버들의 58%가 해외에서 교육을 받았고 41%가 지주의 자제들이었다.
이에 반해 군 장교들은 대체로 농민의 자제들이었고, 5·16쿠데타 후 군정 참여자의 71%가 농촌출신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국내에서 중등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군 장교들은 능률 우선주의의 훈련을 받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명쾌한 대답과 분명한 행동을 요구받는 생활습성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를 놓고 입씨름이나 벌이는 정치인들의 비능률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일단 군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하면 그들은 정부에 대한 충성심의 갈등 같은 것은 느끼지 않게 된다.


경찰의 사기저하도 장면 정권의 몰락에 원인이 되었는데,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 자유당 정권에 협조했거나 대중의 지탄을 받던 경찰관 4,500명을 숙청했고, 2,524명의 공민권도 제한했다.
따라서 경찰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으며, 자연히 직무에 회의를 느끼고 사명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경찰은 민주당 정부에 충성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경찰은 데모 진압에 적극성을 나타내지 않았고, 시위 군중으로부터 지목받을 가능성과 정부로부터 해고당할 가능성 사이에서 적당한 처신을 취했을 뿐이었다.
1945년 미군정 때 일본 경찰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조병옥 경무부장에 의해 보호되었기 때문에 훗날 정부를 보호하고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장면 정권은 경찰의 사기와 효율성을 회복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따라서 정권을 보호하는 데 경찰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시위 군중은 이 같은 경찰의 소극적인 자세를 충분히 읽고 있었다.


또한 장면 정권 실각의 경제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민주당이 선거구호로 내걸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국민의 흉금을 울렸고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국민은 민주당이 집권하면 경제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집권 후 경제사정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부정축재에 대한 처벌 가능성에 따르는 조바심과 공포감으로 인해 대부분의 기업들은 새로운 투자를 꺼려했고 따라서 경제운용도 위축되었다.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은 만성적 실업문제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특히 고등인력의 실업문제는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4·19혁명 이후 관영요금의 인상으로 시중물가가 크게 올랐고, 이에 따라 민중들은 기아와 빈궁으로 고통을 받았다.
경제지표상의 거의 모든 지표가 1960년, 1961년 두 해에 최하를 기록했다.
물가는 1961년 1, 2개월 동안에 15%나 뛰었고, 1960년의 실업률은 24%에 달했다.


장면 정권의 경제시책들 가운데 국민의 신망을 잃게 한 것은 환율변경과 미국 원조의 사용에 대한 감독과 검사를 받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500 대 1의 환율이 650 대 1로 변경되었으며, 1,000 대 1로 바뀌었다가 한 달 만에 1,300 대 1로 평가 절하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면 정권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남한의 민중들과 혁신세력들은 남북의 경제 합작과 문화교류, 나아가 민족의 통일에 의해서만이 남한에서의 민족경제와 민족문화를 복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큰 폭의 환율변경은 한국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환율 현실화의 압력이 있었으나 이를 묵살해 왔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제공한 원조자금의 지출에 대한 감독도 거부했었다.
이에 비해 장면 정권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승낙했다.
당시 미국의 원조는 한국 정부 예산의 52%나 되었다.
그러므로 원조액 지출의 감독은 한국 정부 예산지출의 52%에 대한 미국의 감독과 검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국민은 장면 정권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데 대한 불만이 컸다.
이를 장면 정권의 허약성으로 생각하고 비판을 퍼부었다.
혁신계와 극렬 학생들은 장면 정권의 굴복을 ‘국가적 수치’, ‘반동 정치인의 민족배신 행위’, ‘한국의 미국 시장화’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장면 정권을 공격했다.


또 한 가지 민주당 정부의 경제시책을 어렵게 만든 것이 식량문제였다.
1961년 봄에 접어들면서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보릿고개를 넘어가기까지에는 약 130만 가구가 정부의 구호미를 필요로 했다.
장면 정권에게는 어느 하나라도 난제가 아닌 것이 없었다.


민주당 정부는 1961년 2월 종합적인 경제 타개책의 하나로 유효수요를 늘여 경기를 활성화시키려고 이른바 미국의 뉴딜정책과 같은 국토개발사업의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안은 총 연인원 4천5백만 명에 3천만 달러를 투입하여 관개시설, 토목공사, 조림, 댐 건설 등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5·16쿠데타로 중단되었으며 5개년 경제개발 계획도 불발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1962년 군사정부에 의한 5개년 계획의 근간이 되었다.


여하간 만성적인 경기침체, 실업률의 증가, 환율변경, 식량기근, 정치자금과 관련된 경제운용 등은 “못살겠다 갈아보자” 하던 민주당 정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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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을 잘 분산하여 멀티태스킹을 하면

『아이브레인 iBrain』(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오늘날 뇌를 혹사시킬 만큼 빠르게 쏟아지는 정보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조차 어렵게 하고 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아나운서들은 방송 시간에 맞춘 압축된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노트북, 팩스, 메신저는 정확하고 세밀하기보다는 빨리 반응하도록 압박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깊이 있고 치밀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빠르게만 반응하면서 피상적으로 사실들을 다루게 된다. 또한 지속적인 방해와 소음, 혼란은 이런 산만한 인지 스타일을 조장하고 있다.

집중력을 잘 분산하여 멀티태스킹을 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더 효율적이지 못하다. 한 가지 과제를 수행하면서 다른 과제를 번갈아 처리할 때, 뇌신경회로는 중간에 잠시 멈추게 된다. 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끄고 다른 프로그램을 작동시킬 때 시간이 약간 걸리는 것처럼 시간을 지체시켜 효율성을 떨어뜨리게 한다. 집중 대상이 바뀔 때마다 전두엽의 실행센터는 필요한 다른 신경회로를 활성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 하던 일을 바꾸어 다른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경우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것에 비해 시간이 더 걸렸고 정확성도 떨어졌다. 메모를 하면서 답메일을 쓰는 것처럼 두 가지 일을 번갈아 처리하는 건 한 가지 일을 완전히 끝내고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것에 비해 능률이 50%나 떨어졌다.

멀티태스킹의 성별 차이에 대한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여성이 언어적 과제(좌뇌)를 더 잘 처하는 데 반해, 남성이 공간적 과제(우뇌)를 더 잘 수행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성별 외에도 작업 유형이나 작업의 난이도 등 여러 다른 요인들도 멀티태스킹 능력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어떤 작업들은 서로 잘 조합하면 작업의 능률이 높아진다. 예를 들면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하는 건 인지능력을 향상시킨다. 신경과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어떤 외과 의사들은 수술할 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하면 더 빠르고 정확하게 업무를 수행한다고 한다. 음악은 특히 손을 많이 쓰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능률을 높인다. 왜냐면 음악으로 인해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손을 사용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멀티태스킹은 전혀 다른 뇌 영역들이 활성화될 때 능률적일 수 있다. 그러나 싫어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한다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멀티태스킹의 능률은 감소할 것이다.

멀티태스킹은 현대인의 삶에서 필수적인 기술이 되었지만,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이 작업을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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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쌓여가며

『아동 미술치료 Child Art Therapy』, 주디스 아론 루빈(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신뢰trusting를 쌓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떤 아이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다.

신뢰 구축과 관련해 미술치료사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바로 인내심이다.

치료 시간, 규칙에서 사용하는 재료, 공간,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치료사가 분명하고 일관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형성된 안정감은 계속적인 미술치료를 위한 명료하고 견고한 틀을 제공해줄 것이다.

미술치료는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실시하는 것이 좋다.

또한 아이가 원하는 재료나 도구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물품 또한 동일한 장소에 정리해두어야 한다.

매 치료 시간마다 환영 인사하고, 마무리하며, 작별 인사를 나눌 때에도 아이가 늘 진행 과정을 예측할 수 있도록 정해진 방식을 따르는 것이 좋다.

미술치료를 받으러 온 아이는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이미 고통 받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관성 없는 행동으로 아동의 불확실성이나 불안을 공연히 더해줄 필요는 없다.

또한 미술치료를 실시하는 동안에 불필요한 외부의 개입이나 방해에 노출되지 않도록 아이를 보호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치료 시간과 공간을 오롯이 아이만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또한 미술치료 중간 중간 메모하는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도 아이에게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자신이 표현한 속마음이나 행동을 누군가 그 메모를 읽고 알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할 수 있다.

치료사는 아이가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의 사적인 정부를 부모, 학교를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공개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털어놓은 비밀을 치료와 관련 없는 사람에게 언급하는 행위는 비윤리적이며 전문적이지 못한 처사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치료사와 나눈 이야기가 비밀에 부쳐질 것이 믿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치료사는 정보 노출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또한 아이가 어떤 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지 늘 신경 쓰고 보듬어주어야 한다.

학생 수련 등의 목적으로 미술치료 과정에 누군가를 참관시키고 싶다면, 반드시 아이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아이가 알지 못하게 외부에서 아이를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만 이는 결코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신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쌓여가며,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는 일시적으로 퇴보할 수도 있다.

신뢰 형성 여부는 아이의 행동과 치료사와의 상호작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이가 마음 놓고 속마음을 말하는 건 신뢰가 쌓였다는 증거이다.

아이의 마음속 깊이 감춰두었던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는 과정은 더딜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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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로의 사의적·서예적 추상

이응로는 1976년 서울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카탈로그에 적었다.

"내가 그림을 시작한 것이 벌써 70년이 되었다. 그 지나온 70년을 되돌아보니 소년기의 자유자재했던시절을 제하고 약 10년을 주기로 하여 여섯 번으로 나뉘어 변화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20대를 우리나라 전통의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시기라 하면, 30대를 자연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시대, 40대를 반추상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자연사실에 대한 사의적 표현, 그리고 50대에 유럽에 와서 추상화가 시작된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다시 나누어 전기 10년을 ‘사의적 추상’이라 하면 후기 10년을 ‘서예적 추상’이라 이름지어 보겠다.”

그때로부터 1989년 86세로 타계할 때까지 한 차례 더 창작에 변화가 생겼으므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친 변화이다. 40대의 반추상에서부터 이응로의 감정 표현과 조절이 회화적 장점으로 나타났으며 오브제를 사의적으로 표현하고 자연의 기운을 역동적으로 다룬 점이 주목할 만하다. <분출>(1950)과 <산>(1954)은 자연의 기운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고 조절해 회화적 균형 혹은 구성을 창작한 것들로 장차 그릴 일련의 <문자추상>과 미학적 공통성이 있다.

그는 1958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프랑스로 향했으며 환경의 변화가 그로 하여금 창작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다. 유럽 미술의 본고장에서 종이콜라주paper collages와 앵포르멜Informel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종이콜라주는 조르주 브라크가 1912년 처음 발견한 방법으로 우연히 벽지를 파는 상점 앞을 지나다가 나무결처럼 생긴 벽지를 잘라 붙이면 환상의 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이콜라주는 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이며 브라크는 자신과 더불어 입체주의를 창안한 피카소와 함께 이 기교를 회화에 이용해 환상적 삼차원의 효과를 한층 높였다. 앵포르멜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가 1940년대와 50년대 유럽 주요 화가들의 즉흥적 완전추상화에 붙인 명칭으로 영어로는 ‘형식이 없는 without form’이란 뜻이며 비형식주의Informailsm란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앵포르멜은 단순히 형식을 무시한다는 의미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로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을 말하며, 가벼운 붓질로 색을 칠해 불규칙한 얼룩을 남긴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 타시즘Tachisme(프랑스어 타시tache는 얼룩blotch이란 뜻이다)과 동일한 양식이다. 특정한 주제가 없이 화면 전체를 하나의 구성으로 하는 올-오버 회화all-over painting를 <분출>을 통해 실험한 적이 있고, 또한 감정 표현과 조절을 통해 서정적 반추상을 추구해온 이응로에게 당시 유행한 앵포르멜 양식은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1960년에 여러 점의 <문자추상>을 그렸으며 한동안 이 주제에 집착했다. 캔버스에 종이를 잘라 구긴 다음 풀로 붙이고 그 위에 색을 칠한 것들로 대부분의 작품에 문자를 유추할 만한 형상이 없어 제목에서 문자란 말을 빼고 추상 혹은 구상으로 불러야 타당하다. 종이콜라주가 주는 입체감과 오십 후반에 이르도록 훈련해온 채색기술 그리고 올-오버 구성이 한데 어우러져 유행에 있어 프랑스 주요 화가들의 작품에 뒤지지 않았다. 종이콜라주의 부드러운 질적 장점을 십분 활용해 부조와 같은 입체감을 한껏 드러낸 완전추상 작품으로 1961~81년작 <문자추상>을 꼽을 수 있다.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이것은 <도시>(1970)와 <태양>(1972)과 관련 있으며 회화의 평면성에 갑갑함을 느끼고 좀더 자유로운 삼차원의 표현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이정표가 된다. 그는 결국 입체적 표현을 위해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세 얼굴>(1964)과 <토템>(1964)은 이그러진 얼굴 그리고 풍상에 깍여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원시적 형태를 주제로 한 것이다. 창작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며 사람은 그의 작품에서 다양한 형상들도 나타나다가 60년대 후반부터는 군상으로 큰 무리를 이룬다. 조각의 재료로 흙과 나무를 주로 사용했는데, 서정성을 나타내기에 매우 효과적인 재료이다. 이런 재료는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물질이라서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람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응로의 감정 표현은 발산적이라서 다분히 서양적이지만 조절 방식은 부드러워 동양적이어서 과격하게 치우치지 않고 절제된다. 감정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절제하여 서정성이 떨어지고 진부한 조형에 머물고 만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일관성을 유지하며 그가 추구하려고 한 점은 젊었을 때부터 창안한 사의적·서예적 추상이며, 이는 이응로 미학의 근간을 이룬다. <문자추상>이란 제목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는데 문자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화에서만 가능한 조형문법이며 이를 감정 표현의 수단으로 삼아 이응로 고유의 추상문법이 되게 했다. 그의 문법이란 다름 아닌 사의적·서예적 추상을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문자를 구상적 인간의 형상으로 변형시켜서 궁극적으로 인간 자체를 모티프로 삼은 점이다. 이렇게 하게 된 동기로 그는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꼽았다.

1967년 ‘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룬 적이 있는 그에게 민중운동은 감동을 주었고 77살의 노화가에게 마지막 창작 동기를 주었다. 그는 <군상>이란 제목으로 민중의 힘을 여러 점으로 표현했는데, 그의 역사관·정치관과 관련이 있다. 그는 1986년 동경도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었을 때 말했다.

“나의 그림은 추상적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있은 뒤로 좀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백 호의 화면에 수천 명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데모라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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