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기로에 선 과학: 불교의 명상 전통

 

저는 뇌과학자, 심리학자들과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정서의 성격과 역할, 주의력, 심상과 더불어 뇌의 유연성에 관해 대화함으로써 많은 통찰을 얻었습니다. 뇌과학과 의학 연구에 의해 단순한 물리적 접촉이 출생한 지 몇 주 되지 않은 아기의 뇌 성장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증거가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연민과 인간의 행복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이 강력하게 증명된 셈입니다.

 

과학의 급성장
지난 수십 년 동안 과학이 크게 진보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뇌와 신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생물 유기체의 작용을 다루는 유전학, 뇌과학(신경과학) 분야의 신지식이 출현하면서 개인의 상세한 유전자 정보까지 파악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예기치도 않게 생명의 암호를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이 생겨났고, 따라서 인류의 현실이 완전히 새롭게 전개될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오늘날 과학과 인간의 연결점을 확대시키는 문제는 이제 더 이상 학문적인 관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 존재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이 절박하게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대화의 필요성
그래서 저는 뇌과학과 사회 간의 대화는 대단히 유익하리라고 봅니다. 그로 인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지각 있는 중생과 공유하는 자연계에 대한 책임감이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가운 소식이 있는데, 이러한 연결점을 확대하는 가운데 일부 뇌과학자들이 불교의 명상 수련에 큰 관심을 갖고 우리와 깊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에 대한 관심 증대
과학에 대한 저의 관심은 티베트에서 성장한 장난꾸러기 소년의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현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기술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구체적인 과학 사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을 통해 새롭게 발전한 인간의 지식과 기술을 더욱더 널리 활용하는 방법도 탐구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아원자 물리학, 우주학, 생물학, 생리학의 영역을 탐구했습니다. 저에게 너그럽게 시간을 내준 카를 프리드리히 프라이헤어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Freiherr von Weizsacker(1912~2007)와 데이드 조셉 봄David Joseph Bohm(1917~1992)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두 분 모두 양자역학의 스승들이었고 생물학 분야, 특히 뇌과학은 고인이 되신 로버트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e과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로부터 배웠습니다. 또한 영광스럽게도 마음과 삶 협회Mind and Life Institute가 후원한 콘퍼런스에 참여해 이야기를 나눈 수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이 협회는 1987년 제가 거주하는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마음과 삶 콘퍼런스’를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콘퍼런스는 수년 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불교 수행승이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다음과 같이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불교 수행승이 과학에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뭡니까?” “불교, 고대 인도의 철학, 정신적 전통, 현대 과학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뇌과학과 같은 과학 지식과 불교의 전통 명상 수련을 접목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요?”

 

불교의 명상 전통
불교의 명상 전통과 현대 과학은 서로 다른 역사적, 지적, 문화적 바탕에서 발전했지만, 내심 저는 이 두 전통이, 특히 기본 철학관과 방법론에서 공통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인 면에서 불교와 현대 과학 모두 절대적인 개념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초월적 존재이든 영혼이나 현실의 기초적인 기층과 같은 영원하고 불변한 원리이든 간에 말입니다. 불교와 뇌과학은 진화와 우주의 탄생을 인과의 자연법칙에 의한 복잡한 상호관계로서 설명하기를 좋아합니다. 방법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두 전통은 경험론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의 탐구 전통에서는 지식의 근원을 ①경험, ②이성, ③증거라고 인식합니다. 그중 경험을 가장 우선시하며 그 다음이 이유, 증거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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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神社參拜와 국어상용國語常用

 

 

주기철朱基徹(1897~1944) 목사는 춘원 이광수와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초등교육을 마친 1912년 이광수가 웅천에 내려와 오산학교의 학생 모집과 학교 후원을 위한 강연할 때 강연에 감동을 받아 이광수가 교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로 진학할 결심을 했습니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로 이광수, 유영모, 조만식 등 민족의식이 강한 교사진이 포진하던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계 사립학교였습니다. 주기철은 1913년 봄 사촌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3월 제7회 졸업생으로 졸업했습니다. 오산학교에 재학할 무렵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다가 1915년 2월에야 풀려나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이광수가 대리 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광수와 유영모는 주기철이 입학하던 해 가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조만식이 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기철은 이광수와 유영모의 영향을 주로 받았고, 조만식과 이승훈의 직접적인 훈도를 받았습니다.

주기철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4월, 신설학교로서 아직 총독부의 설립인가도 나지 않은 서울의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 상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1년도 다니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앓았던 안질이 이유였다고 하지만,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하고 진로에 대한 회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1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한 주기철은 그 해 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로 부임하고, 경남성경학원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습니다. 1931년 9월 마산 문창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 저명한 목사로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건 1936년 여름이었고, 그 교회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 유계준, 오윤선 등이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교회당 건축에 착수하여 1938년 3월 헌당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로 헌당식 직전에 경찰에 검속되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그가 평양에 부임하기 1년 전부터 평양교회와 신학교를 괴롭혔고, 결국 평양의 숭실학교나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각각 폐쇄되었습니다. 신사참배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그는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가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최후로 교인들에게 전했습니다.

농우회사건이란 1938년 6월 의성의 경찰이 의성읍 교회 목사로, 농우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유재기를 비롯하여 반일사상을 지닌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한 사건입니다. 농우회란 1930년대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각자의 고향에서 조직한 농촌계몽조직입니다. 농우회를 중심으로 농촌의 기독교 청년들이 협동조합을 만들고, 야학을 열어 글을 가르치고, 농사법의 개량을 도모하는 등 농촌사회를 보다 잘 살게 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여기에 주기철을 포함하여 뜻있는 기독교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주기철은 마지막 설교 사건으로 이틀 후 경찰에 검거되었고, 그때 산정현교회 목사직을 파면당했습니다. 파면은 평양노회의 결의형식이었습니다. 산정현교회도 폐쇄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5년 동안 고생하다가 1944년 4월 13일 병감病監으로 옮겨지고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뒤 4월 21일 감옥에서 병사했습니다.

총독 미나 미지로는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신사참배 외에도 국어상용國語常用을 강요했습니다. 국어상용이란 것은 관공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인끼리의 공식 회합에도 한국어 사용을 금하고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본어를 알 만한 한국인끼리 한국어를 사용했다 하여 간리나 교원이 면직되었고, 초등학교 아동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큰 죄여서 이 때문에 타살당한 사람조차 있었습니다. 정학과 제명은 항다반사恒茶飯事였습니다.

1919년 5월 말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의 취학률이 91%인 데 비해 한국인 자녀의 취학률은 37%에 불과했으며,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입학률은 일본인 거주민이 1만 명당 113명인 데 비하여 한국인은 1만 명당 1명이었습니다.

1922년 2월 제정 공포된 ‘개정조선교육령’에서는 일본인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정책의 완화, 언어정책의 완화, 실과교육의 강화, 제한된 고등교육 기회의 부여 등에 있음을 강조했지만, 이는 허울 좋은 말뿐인 유화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2차 교육령에 나타난 중등교육정책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을 위한 교육제도와 조선인을 위한 교육제도를 따로 마련한 것으로 전자는 일본어를 상용하는 자를 위한 교육제도라 하고, 후자를 일본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를 위한 교육제도라 했습니다. 이는 국어상용國語常用이란 말을 써서, 일본인과 한국인을 차별 대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한 교묘한 수법이었습니다. 일제의 의도는, 동일한 교육제도와 교육기간을 확충함으로써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여 한민족의 사상을 일본화 내지 말살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38년 3월 3차 ‘조선교육령’이 제정, 공포되었는데, 총독 미나 미지로에 의한 3대 교육강령의 결과였습니다. 그것은 신동아건설新東亞建設의 길은 교육에 있어서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을 철저히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어를 상용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별을 철폐하고 내선인內鮮人이 모두 같은 법규 밑에서 교육을 받는 길을 열게 된다고 강변했습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4월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는 또다시 중학교 및 고등여학교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총독 미나 미지로의 정책은 한국 민족을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쇄물에서 한국의 역사는 물론 민족적 위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퇴계와 이율곡 같은 학자의 사진까지도 학교에서 철거를 명했습니다. 일제는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말살하고 경술 합병시에 비로소 생긴 민족처럼 취급하려고 했습니다. 초등, 중등학교에서 한국어가 전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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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막염uveitis이 무엇입니까?

 

 

포도막uvea이란 안구의 외막外膜인 각막, 공막(흰자위)의 속에 있는 ‘중간 막'으로 안구를 구성하는 세 개의 층인 안구 섬유층, 안구 혈관층, 안구속층 중 중간층인 안구혈관층에 있는 홍채iris, 수정체lens를 받쳐주는 모양체, 그리고 안구벽의 중간층을 형성하는 막으로서 혈관과 멜라닌세포가 많이 분포하며 외부에서 들어온 빛이 분산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맥락막choroid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홍채는 눈을 앞에서 보았을 때 검은자로 불리는 각막 안쪽의 갈색 조직을 말합니다. 포도막염uveitis은 이들 부위에 발생한 염증을 총칭하여 부르는 말이고, 침범된 부위에 따라 홍채염, 모양체염, 맥락막염이라고도 부릅니다. 포도막은 혈관이 풍부하고 결합조직이 많아 염증이 생기기 쉬우며, 홍채, 모양체, 맥락막에 각각 따로 염증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홍채모양체염과 같이 동시에 발생하기도 합니다. 포도막염은 주로 포도막 혈관계의 염증에 의해 발생하거나 인접조직인 망막, 유리체, 공막, 각막의 염증에 의해 2차적으로 염증이 파급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포도막염은 대부분 염증이 반복적,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심각한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포도막염의 발생 원인으로는 바이러스, 박테리아, 진균 등에 의한 감염성 원인과 외상, 수술, 종양, 변성조직에 의한 면역반응 등의 비감염성 원인, 그 외 원인미상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포도막염은 다양한 원인과 염증 정도에 따라서 증상도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대표적인 증상으로 시력저하, 비문증vitreous floaters(혹은 날파리증), 통증, 충혈, 눈물흘림, 눈부심 등이 있습니다. 비문증은 눈앞에 먼지나 벌레 같은 뭔가가 떠다니는 것처럼 느끼는 증상으로,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점이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위를 보면 위에 있고, 우측을 보면 우측에 있는 등 시선의 방향을 바꾸면 이물질의 위치도 따라서 함께 변하는 특성을 지닙니다. 비문증은 대부분 연령의 증가에 따른 유리체의 변화에 의해서 생깁니다. 유리체는 눈 속을 채우는 투명한 겔 같은 물질인데, 나이가 들수록 액체로 변하게 되며, 시신경과 단단히 붙어 있는 부분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이를 후유리체박리posterior vitreous detachment라 합니다. 이렇게 떨어진 부분은 투명하지 않고 혼탁해지므로 눈으로 들어가는 빛의 일부분을 가리게 되어 환자 스스로 본인의 시야에 검은 점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눈의 충혈, 눈부심, 눈꼽이 끼는 전포도막염(안구의 앞쪽 포도막에 생긴 염증, 홍채모양체염이라고도 함)일 때에는 시력장애보다는 충혈과 눈부심, 통증이 심하고, 급격한 시력저하와 함께 사물이 일그러져 보이고 작게 보이는 후포도막염(안구의 뒤쪽 포도막에 생긴 염증)일 때에는 시력저하와 비문증이 주 증상으로 눈부심, 사물이 일그러져 보이는 현상인 변시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치료방법은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근본적으로 치료가 되지 않으므로 적절한 시기에 증상에 다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치료로는 급성의 염증이 발생한 경우에는 국소적인 스테로이드 점안과 함께 조절마비제를 점안하여 치료하며, 이때 조절마비제로 인해 눈이 부시고 가까운 글씨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또한 염증이 심한 경우에는 전신적인 스테로이드 투여가 필요하며 치료시기와 투여량은 안과의사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만성적 질환의 경우, 예를 들면 베체트병Behcet's disease의 경우 면역억제제인 사이클로스포린 혹은 특수항암제의 투여가 필요할 때도 있으며, 이런 경우에는 혈액검사의 주기적인 관찰이 필요합니다.

베체트병은 구강 궤양, 음부 궤양, 안구 증상 외에도 피부, 혈관, 위장관, 중추신경계, 심장 및 폐 등 여러 장기를 침범할 수 있는 만성 염증성 질환으로 각 증상의 기본적인 특징은 혈관에 염증이 생기는 혈관염vasculitis입니다. 베체트병은 20대와 30대에 처음 시작되는 경향이 있고, 발병 후 시간이 지나면서 질병의 활성도가 점차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발병 연령이 늦고 여자에게 보다 많이 발병하며 질병의 중증도가 비교적 덜한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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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우리 모두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갑시다!

 

 

어제는 지인이 잡채랑 맛난 것들을 가지고 방문하여 함께 즐거운 저녁식사를 하며 담소했습니다. 부부가 교사라서 모범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변화를 모르고 늘 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살아온 부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식탁에서 내가 한 말이기도 하지만, 개미처럼 땅속에 깊게 길을 내며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직업에 충실히 살다보면 개미처럼 매우 편협하고 작은 그러나 깊게 굴을 파고 들어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지하에도 세계는 넓건만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소통이 필요한 건 자신의 작은 세계를 확인하고 더 넓은 세계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넓은 것은 인생이 아주 많은 데서 확인됩니다. 저마다 깊게 판 땅굴을 보면 인생의 가능성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누구의 인생이 특별히 더 낫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창의적인 삶이란 다양한 가능성을 아는 데서 발견됩니다. 선택은 하나일 수밖에 없지만 다양한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고 선택하는 것과 유일한 것으로 알고 선택하는 것은 다릅니다.

옛날에도 현인이라면 더 넓은 세계를 다녀온 사람들을 말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른 지역에 가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돌아오면 자신의 문화에 갇혀 사는 사람들에게 현인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융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보는 시각도 해결하는 시각도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인생을 경험하면 융통성이 생기고 현명해집니다. 소통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경험을 나누면서 다른 인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세상이 매우 넓다는 것을 절로 알게 됩니다.

우리는 가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넓은 세상의 존재를 확인해야 합니다. 인생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스스로를 밀폐된 공간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 모두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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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동우회와 내선일체內鮮一體

 

 

이광수는 1937년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때는 미나 미지로南次郞가 총독으로 한국에 와서 국체명징國體明徵이란 것을 내걸고,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여 이 정책에 응하지 않는 조선인에 대하여는 단호히 가한다는 것을, 혹은 유고諭告로, 혹은 지사, 결찰 부장, 사법관회의에서 누누이 성언하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신사참배, 선교사 배척을 강요하고, 기타 제등문화정책齊藤文化政策으로 하용되었던 약간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정책을 고쳐서 일체의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적 경향을 말살하는 강압 공작에 착수하였다. 이대에 수양동우회가 문제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싶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에서 내內라 함은 일본 제국이 그들의 해외식민지를 외지外地라 부른 데 대한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내지內地의 첫 자字이며, 선鮮이란 조선朝鮮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미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만일체日滿一體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1937년 일본이 중국 침공을 개시하자, 조선총독 미나미지로는 대륙 침공에 조선을 전적으로 동원, 이용하기 위한 강압정책으로 내선일체라는 기치를 들고 나섰습니다. 한민족의 저항을 초기부터 말살, 차단하려는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이었습니다.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라는 미명 아래 일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구호를 집회 때마다 제창하는 것을 비롯하여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했으며, 1938년에는 지원병제도로 강제 출병시켰고, 조선어 교육 폐지 및 일본어 상용常用, 1940년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까지 강요했으며, 더욱이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내선동조동근론內鮮同祖同根論을 주장하며 그들의 조상이라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신위를 가정마다 모셔야 한다는 주장으로 한민족말살정책을 폈습니다.

당시의 수양동우회 입장에 관해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애초에 수양동우회는 정치적이 아닌 인격수양 단체로 사이토 총독 시대에 일본 관헌의 양해를 얻었던 것이다. 그 후 수양동우회는 일절 정치적 행동에 참가하지 아니하였다. 신간회新幹會 결성 당시에도 수양동우회의 태도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인격수양이야말로 우리 민족에 있어서는 만사의 기초라 하는 견지에서 신간회 가입을 거절하고 그 대신 수양동우회 회원 개인으로서 정치단체 참가는 관계 없다 하여 조병옥 등이 개인의 자격으로 신간회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수양동우회가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이란 점에서는 일본 관헌도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관헌은 수양동우회 회원 대부분이 배일적이며, 독립을 원하고, 또한 독립 운동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헌이 수양동우회를 묵인 한 데 대해서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첫째로, 미나 미지로가 총독으로 오기 전까지는 일본은 조선인을 한 민족 단위로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동아일보>가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이라 하는 사시社是를 공공연히 언명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또 신간회의 조직을 허락한 것 등이다. 미나 미지로가 오기까지는 조선 민족이 조선어를 배우는 것을 학교 제도에서도 허락하였고, 따라서 조선 민족이 조선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는 것도 인정하였다. 일본은 조선 민족을 일본 민족으로 화하려는 어리석은 일을 아직 시작하지 아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양동우회가 민족정신을 보유하는 것을 해괴하게 생각할 것이 없었다.

둘째로,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의 중축을 삼은 것은 조선 내의 치안유지였다. 3.1운동 직후의 조선 민심을 일본은 휴화산休火山으로 보았다. 때때로 일어나는 폭탄사건은 일본 관헌의 신경을 과민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주권을 행위로써 반항하지 아니하는 한에는 비록 민족주의자요, 또 독립 운동을 몸소 하던 자라도 잠자코 있기만 하면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서서히 조선이 일본에서 분리될 수 없도록 각종의 정치, 경제 공작을 하려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서 <동아일보>, 기타의 민족주의적 일간 신문이 묵인되는 모양으로 수양동우회도 두고 하는 양을 보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국체명징이란 간판을 걸고 등장한 미나 미지로 총독은 이광수가 위에서 말한 종래의 정책을 폐기하고 우리 민족을 일본화하려고 본격적으로 정책을 폈습니다. 이런 복적을 실현하기 위해 총독은 일본의 신토神道 신앙을 바탕으로 만든 종교시설 신사神社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인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우선 강요했습니다. 신사참배란 의식을 치르기 전에 왼손, 오른손, 입 순으로 씻어내고 양치질을 하며, 옷차림을 가다듬은 뒤 신사에 따라 정해진 숫자와 순서대로 절, 손뼉치기를 반복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신사참배가 논란이 된 건 우리나라에 신사를 세워 조선인에게 참배를 강요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신토가 우상숭배를 금했기 때문에 기독교 등과 충돌이 발생했고, 1944년에 장로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주기철이 옥중에서 별세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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