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동우회와 내선일체內鮮一體
이광수는 1937년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때는 미나 미지로南次郞가 총독으로 한국에 와서 국체명징國體明徵이란 것을 내걸고,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여 이 정책에 응하지 않는 조선인에 대하여는 단호히 가한다는 것을, 혹은 유고諭告로, 혹은 지사, 결찰 부장, 사법관회의에서 누누이 성언하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신사참배, 선교사 배척을 강요하고, 기타 제등문화정책齊藤文化政策으로 하용되었던 약간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정책을 고쳐서 일체의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적 경향을 말살하는 강압 공작에 착수하였다. 이대에 수양동우회가 문제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싶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에서 내內라 함은 일본 제국이 그들의 해외식민지를 외지外地라 부른 데 대한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내지內地의 첫 자字이며, 선鮮이란 조선朝鮮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미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만일체日滿一體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1937년 일본이 중국 침공을 개시하자, 조선총독 미나미지로는 대륙 침공에 조선을 전적으로 동원, 이용하기 위한 강압정책으로 내선일체라는 기치를 들고 나섰습니다. 한민족의 저항을 초기부터 말살, 차단하려는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이었습니다.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라는 미명 아래 일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구호를 집회 때마다 제창하는 것을 비롯하여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했으며, 1938년에는 지원병제도로 강제 출병시켰고, 조선어 교육 폐지 및 일본어 상용常用, 1940년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까지 강요했으며, 더욱이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내선동조동근론內鮮同祖同根論을 주장하며 그들의 조상이라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신위를 가정마다 모셔야 한다는 주장으로 한민족말살정책을 폈습니다.
당시의 수양동우회 입장에 관해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애초에 수양동우회는 정치적이 아닌 인격수양 단체로 사이토 총독 시대에 일본 관헌의 양해를 얻었던 것이다. 그 후 수양동우회는 일절 정치적 행동에 참가하지 아니하였다. 신간회新幹會 결성 당시에도 수양동우회의 태도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인격수양이야말로 우리 민족에 있어서는 만사의 기초라 하는 견지에서 신간회 가입을 거절하고 그 대신 수양동우회 회원 개인으로서 정치단체 참가는 관계 없다 하여 조병옥 등이 개인의 자격으로 신간회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수양동우회가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이란 점에서는 일본 관헌도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관헌은 수양동우회 회원 대부분이 배일적이며, 독립을 원하고, 또한 독립 운동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헌이 수양동우회를 묵인 한 데 대해서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첫째로, 미나 미지로가 총독으로 오기 전까지는 일본은 조선인을 한 민족 단위로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동아일보>가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이라 하는 사시社是를 공공연히 언명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또 신간회의 조직을 허락한 것 등이다. 미나 미지로가 오기까지는 조선 민족이 조선어를 배우는 것을 학교 제도에서도 허락하였고, 따라서 조선 민족이 조선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는 것도 인정하였다. 일본은 조선 민족을 일본 민족으로 화하려는 어리석은 일을 아직 시작하지 아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양동우회가 민족정신을 보유하는 것을 해괴하게 생각할 것이 없었다.
둘째로,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의 중축을 삼은 것은 조선 내의 치안유지였다. 3.1운동 직후의 조선 민심을 일본은 휴화산休火山으로 보았다. 때때로 일어나는 폭탄사건은 일본 관헌의 신경을 과민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주권을 행위로써 반항하지 아니하는 한에는 비록 민족주의자요, 또 독립 운동을 몸소 하던 자라도 잠자코 있기만 하면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서서히 조선이 일본에서 분리될 수 없도록 각종의 정치, 경제 공작을 하려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서 <동아일보>, 기타의 민족주의적 일간 신문이 묵인되는 모양으로 수양동우회도 두고 하는 양을 보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국체명징이란 간판을 걸고 등장한 미나 미지로 총독은 이광수가 위에서 말한 종래의 정책을 폐기하고 우리 민족을 일본화하려고 본격적으로 정책을 폈습니다. 이런 복적을 실현하기 위해 총독은 일본의 신토神道 신앙을 바탕으로 만든 종교시설 신사神社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인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우선 강요했습니다. 신사참배란 의식을 치르기 전에 왼손, 오른손, 입 순으로 씻어내고 양치질을 하며, 옷차림을 가다듬은 뒤 신사에 따라 정해진 숫자와 순서대로 절, 손뼉치기를 반복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신사참배가 논란이 된 건 우리나라에 신사를 세워 조선인에게 참배를 강요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신토가 우상숭배를 금했기 때문에 기독교 등과 충돌이 발생했고, 1944년에 장로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주기철이 옥중에서 별세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