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神社參拜와 국어상용國語常用

 

 

주기철朱基徹(1897~1944) 목사는 춘원 이광수와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초등교육을 마친 1912년 이광수가 웅천에 내려와 오산학교의 학생 모집과 학교 후원을 위한 강연할 때 강연에 감동을 받아 이광수가 교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로 진학할 결심을 했습니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로 이광수, 유영모, 조만식 등 민족의식이 강한 교사진이 포진하던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계 사립학교였습니다. 주기철은 1913년 봄 사촌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3월 제7회 졸업생으로 졸업했습니다. 오산학교에 재학할 무렵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다가 1915년 2월에야 풀려나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이광수가 대리 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광수와 유영모는 주기철이 입학하던 해 가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조만식이 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기철은 이광수와 유영모의 영향을 주로 받았고, 조만식과 이승훈의 직접적인 훈도를 받았습니다.

주기철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4월, 신설학교로서 아직 총독부의 설립인가도 나지 않은 서울의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 상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1년도 다니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앓았던 안질이 이유였다고 하지만,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하고 진로에 대한 회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1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한 주기철은 그 해 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로 부임하고, 경남성경학원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습니다. 1931년 9월 마산 문창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 저명한 목사로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건 1936년 여름이었고, 그 교회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 유계준, 오윤선 등이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교회당 건축에 착수하여 1938년 3월 헌당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로 헌당식 직전에 경찰에 검속되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그가 평양에 부임하기 1년 전부터 평양교회와 신학교를 괴롭혔고, 결국 평양의 숭실학교나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각각 폐쇄되었습니다. 신사참배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그는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가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최후로 교인들에게 전했습니다.

농우회사건이란 1938년 6월 의성의 경찰이 의성읍 교회 목사로, 농우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유재기를 비롯하여 반일사상을 지닌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한 사건입니다. 농우회란 1930년대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각자의 고향에서 조직한 농촌계몽조직입니다. 농우회를 중심으로 농촌의 기독교 청년들이 협동조합을 만들고, 야학을 열어 글을 가르치고, 농사법의 개량을 도모하는 등 농촌사회를 보다 잘 살게 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여기에 주기철을 포함하여 뜻있는 기독교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주기철은 마지막 설교 사건으로 이틀 후 경찰에 검거되었고, 그때 산정현교회 목사직을 파면당했습니다. 파면은 평양노회의 결의형식이었습니다. 산정현교회도 폐쇄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5년 동안 고생하다가 1944년 4월 13일 병감病監으로 옮겨지고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뒤 4월 21일 감옥에서 병사했습니다.

총독 미나 미지로는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신사참배 외에도 국어상용國語常用을 강요했습니다. 국어상용이란 것은 관공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인끼리의 공식 회합에도 한국어 사용을 금하고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본어를 알 만한 한국인끼리 한국어를 사용했다 하여 간리나 교원이 면직되었고, 초등학교 아동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큰 죄여서 이 때문에 타살당한 사람조차 있었습니다. 정학과 제명은 항다반사恒茶飯事였습니다.

1919년 5월 말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의 취학률이 91%인 데 비해 한국인 자녀의 취학률은 37%에 불과했으며,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입학률은 일본인 거주민이 1만 명당 113명인 데 비하여 한국인은 1만 명당 1명이었습니다.

1922년 2월 제정 공포된 ‘개정조선교육령’에서는 일본인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정책의 완화, 언어정책의 완화, 실과교육의 강화, 제한된 고등교육 기회의 부여 등에 있음을 강조했지만, 이는 허울 좋은 말뿐인 유화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2차 교육령에 나타난 중등교육정책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을 위한 교육제도와 조선인을 위한 교육제도를 따로 마련한 것으로 전자는 일본어를 상용하는 자를 위한 교육제도라 하고, 후자를 일본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를 위한 교육제도라 했습니다. 이는 국어상용國語常用이란 말을 써서, 일본인과 한국인을 차별 대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한 교묘한 수법이었습니다. 일제의 의도는, 동일한 교육제도와 교육기간을 확충함으로써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여 한민족의 사상을 일본화 내지 말살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38년 3월 3차 ‘조선교육령’이 제정, 공포되었는데, 총독 미나 미지로에 의한 3대 교육강령의 결과였습니다. 그것은 신동아건설新東亞建設의 길은 교육에 있어서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을 철저히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어를 상용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별을 철폐하고 내선인內鮮人이 모두 같은 법규 밑에서 교육을 받는 길을 열게 된다고 강변했습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4월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는 또다시 중학교 및 고등여학교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총독 미나 미지로의 정책은 한국 민족을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쇄물에서 한국의 역사는 물론 민족적 위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퇴계와 이율곡 같은 학자의 사진까지도 학교에서 철거를 명했습니다. 일제는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말살하고 경술 합병시에 비로소 생긴 민족처럼 취급하려고 했습니다. 초등, 중등학교에서 한국어가 전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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