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철학>




아인슈타인은 초기에 데이비드 흄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상대성이론은 그 자체로 실증주의를 의미한다. 그런 사고방식은 나의 노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마르가 그랬고, 흄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나는 상대성이론을 발견하기 직전에 흄의 『인성론』을 감탄하면서 열심히 읽었다.

흄은 자신의 회의적인 엄격함을 시간의 개념에 적용했다.
그는 시간이 우리가 움직임으로부터 시간을 정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관찰할 수 있는 물체와 무관한 절대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디어와 느낌의 연속으로부터 시간의 아이디어를 형성한다. 시간 자체가 홀로 형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절대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는 훗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도 등장한다.
시간에 대한 흄의 구체적인 생각보다는 인식과 관찰에 의해 정의할 수 없는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그의 일반적인 통찰이 아인슈타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아인슈타인은 “칸트는 흄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가 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고 했다.
“이성 그 자체를 근거”로 하는 “명백하게 확실한 지식”의 범주에 포함되는 진리도 있다.
이는 분석적 명제analytical proposition로 예를 들면 모든 총각은 미혼이라거나 2 더라기 2는 4라거나 삼각형의 합은 항상 180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훗날 칸트의 분석적 명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삼각형의 합은 180도이다”처럼 순수하게 분석적인 것으로 보이는 명제도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일반상대성이론에서처럼) 굽은 공간에서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훗날 그는 기하학과 인고상의 개념에 대해 말했듯이 “물론 오늘날 앞에서 이야기한 개념들에는 칸트가 그런 개념의 탓이라고 했던 확실성이나 고유한 필요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에른스트 마흐 덕분에 한 단계 더 발전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마흐의 천재성이 부분적으로 그의 “절대 변하지 않는 회의주의와 독립성”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설명에 따르면 마흐 철학의 핵심 “개념은 우리가 그것이 뜻하는 대상과 그것이 그런 대상에게 부여하는 법칙을 정의할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개념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에 대한 현실적인 정의, 즉 그런 개념이 작동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주는 정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철학은 몇 년 후 아인슈타인과 미셸 베소Michele Besso가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개념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관찰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유용했다.

마흐가 아인슈타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뉴턴의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 공간에 대한 개념에 그런 접근법을 적용하도록 한 것이다.
마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관찰을 근거로 그런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마흐는 뉴턴의 절대적 공간의 개념적 기괴함을 비웃었다.
그는 그것을 “경험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순전한 상상의 것”이라고 했다.

바루흐 스피노자가 아인슈타인에게 준 영향은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 합리성 그리고 자연법칙의 통일성에 반영되는 무정형의 신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보상하고, 벌을 주며, 간섭하는 개인적인 신은 믿지 않았다.
더욱이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로부터 자연법칙은 우리가 이해하기만 하면 불변의 원인과 결과를 결정하고, 신은 어떤 사건이 무작위적이나 비결정론적으로 일어나도록 해주는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결정론에 대한 믿음을 이어받았다.
스피노자는 “모든 것은 성스러운 자연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며, 양자역학이 그런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을 때도 아인슈타인은 확고하게 그런 주장이 옳다고 믿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Joseph Maria Olbrich(1867-1908)>





폴란드와의 국경 근처 오파바Opava(독일어로는 트로파우Troppau) 강이 흐르는 평야 중심에 위치한 오파바 태생의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1867-1908)는 1882년부터 1886년까지 빈의 주립상업학교를 다녔고 그 뒤 4년 동안 고향에서 건축가와 현장감독으로 일했다.
1890년 이후 그는 빈의 조형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893년 로마상을 수상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북아프리카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올브리히는 1897년에 빈 분리파의 창립멤버가 되었으며 그가 1897년에 디자인한 빈 분리파 건물이 이듬해에 개관되자 분리파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구조물 장식에서 분리파가 응용미술에 역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부터 오토 바그너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2년 뒤 수석조수가 된 올브리히에게 최초의 공적인 아르누보 설계가 맡겨진 것이다.
빈의 세기말 건축에서 차지하는 고전주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엄격한 입방체 형태의 이 건물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프랑크푸르트와 비스바덴을 품고 있는 헤센Hessen의 에른스트 루트비히 폰Ernst Ludwig von 대공의 마음에도 들었다.
빅토리아 여왕(1837-1901년 재위)의 손자인 대공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영국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으며,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의 저서를 읽고 영국에서 일어난 공예부흥에 큰 감명을 받았다.
대공이 다른 것들에서 느낄 수 없는 감흥을 주는 건물이라고 극찬한 이 건물은 분리파 미술가들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설계되었다.
흰색으로 채색된 기하학적인 건물은 양식화된 상징적 장식으로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소용돌이 형태의 잎 장식으로 얽힌 둥근 금동지붕이 올려졌다.
클림트의 스케치가 남아 있어 그의 아이디어가 건물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민들은 익숙지 않은 분리파 건물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사실 그 건물은 고전주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올브리히에 의하면 이 건물은 “미술애호가에게 조용하고 세련된 피난처를 제공하는 미술의 사원”으로 디자인되었다.
돔 모양의 둥근 지붕과 간결한 기하학적 정면은 신고전주의적인 사원이나 영묘Mausoleum, 혹은 18세기 영국 귀족이 조경 정원에 꾸며놓은 웅장한 은신처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런 효과는 장식패널로 천장을 꾸민 높은 현관, 육중한 계단식 프리즈, 그리고 둥근 지붕 주위의 석재기부基部에 있는 세로로 홈이 파인 패널로 인해 강조되었다.
1899년 11월 건물 개관과 함께 제2회 빈 분리파전이 이 건물에서 열렸다.
빈 분리파는 클림트의 지휘 하에 젊고 재능 있는 화가들을 발굴하여 전시기회를 제공하고 빈 모던아트의 선두집단이 되었다.

올브리히는 1899년 헤센의 대공의 부름을 받고 19세기 조용한 요새에서 화학, 공학 그리고 제조업을 갖춘 도시로 발전한 다름슈타트Darmstadt로 가서 예술가 마을에 일련의 주택, 스튜디오, 갤러리 등을 디자인했으며, 마틸덴회어Mathildenhohe의 전시관 대부분을 건축했다.
예술가 마을이 건설된 뒤 6년 만에 올브리히는 눈에 띄는 높은 건물 ‘결혼 기념탑’을 디자인했는데, 다름슈타트 도시기금으로 엘레오노레 폰 졸름스 호헨졸름스 리히와 대공의 두 번째 결혼에 즈음해서 설립한 것이며 중세 후기고딕의 성문을 연상시킨다.
성곽의 다섯 개 흉벽은 선서하는 오른손처럼 마틸덴 언덕 위에 솟아올라 있다.
중심에 있는 ‘에른스트 루트비히 하우스’로 명명된 갤러리 건물은 블록 형태의 기능적인 건물로서 대공이 칭찬한 정교함, 가벼움, 취향이라는 덕목들을 결합한 것이다.
갤러리와 주변에 띄엄띄엄 정렬된 일곱 채의 예술가 주택 대부분이 올브리히에 의해서 설계되었다.
예술가 마을은 대공이 1899년에 세운 것이다. 대공은 1897년에 찰스 로버트 애슈비와 켄트Kent 태생의 맥케이 휴 베일리-스콧Mackay Hugh Baillie-Scott(1865-1945)에게 다름슈타트에 있는 자신의 궁전의 방들을 장식할 것을 의뢰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후원은 2년 후에 설립한 예술가 마을이었다.
올브리히를 포함하여 대공이 초대한 일곱 명의 미술가들에게는 3년 동안 연금이 지급되었다.
예술가 마을은 올브리히가 설계한 작업실 주변에 세워졌다.
작업실은 거대한 입구 측면에 서로를 응시하듯 서 있는 기념비적 인물상으로 인해 지나치게 웅장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인물상은 1901년 루트비히 하비흐Ludwig Habich가 힘strength과 미beauty를 상징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대공의 실현 불가능한 미적 환상은 1904년 두 번째 다름슈타트 전시회를 위해 올브리히가 설계한 세 채의 집에서 나타났다.
이는 대공의 주문에 따라 “적당한 재산을 가진 시민을 위한 개인주택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블루하우스와 그레이하우스는 왕실의 교회 목사를 위한 관저로 설계되었으며 근대 양식의 변덕스러움을 보여준다.
전시회가 끝난 뒤 매물로 나온 블루하우스와 핀란드 건축의 낭만적 소박함을 보여준 코너하우스는 “적당한 재산을 가진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블루하우스는 상업고문관의 아내인 뇌켈 부인Frau Knockel이 구입했고, 코너하우스는 대공 휘하의 뷔딩겐 백작Court Budingen에게 팔렸다.

올브리히가 다름슈타트에 지은 전시관(1905-08)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는 수많은 공공건물, 교외의 빌라를 비롯한 주거건물, 철도역, 현대적인 뒤셀도르프 백화점(1907-08)을 남겼는데, 이런 건물들은 우아한 장식에서 좀 더 기능적인 양식으로 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





금세공사이자 동판조각가의 아들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는 빈에서 태어났고 14살 때에 이미 재능을 보여 빈의 공예미술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정도였다.
여기서 7년 동안 공부하고 동생 에른스트Ernst와 동료 미술가 프란츠 마치와 함께 미술가회사를 만들었다.
세 사람은 1883년에 벽화와 천장화 등 큰 주문을 받았다.
1886년에는 빈의 시민극장의 계단부에 프레스코 작업을 시작했으며 1891년에 마카르트Makart(1840-88)가 시작한 예술역사 박물관 계단부를 마무리한 것이 성공을 거두었다.
에른스트가 타계한 1892년 이후 클림트는 아카데미의 회화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을 발견했다.
1897년 50명의 젊고 비판적인 미술가 그룹이 미술가 카페 그린슈테들에서 오스트리아의 조형예술가 연합인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클림트가 대변인이자 회장이 되었다.

클림트가 제1회 빈 분리파전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에는 제도권을 탈퇴함으로써 미술의 정통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분리파의 행동이 반영되어 있다.
클림트는 이런 반항을 아테네 젊은이들을 해방하기 위해 포스터 상단에 머리는 소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를 살해하는 테세우스Theseus를 극적으로 묘사했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Aigeus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 아이트라Aithra의 고향인 트로이젠Troezen에서 성장하고 청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일러주는 대로 큰 바위를 들어 올려 그 밑에 부왕 아이게우스가 숨겨둔 왕가의 검과 샌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가지고 아테네로 향해 길을 떠났다.
그는 아테네인이 크레타Creta 왕에게 보내도록 강요받고 있던 젊은 남녀 각 7명 가운데 끼여 크레타 섬으로 갔다.
그들은 섬의 미궁 속에 사는 미노타우로스의 밥이 될 운명이었는데, 크레타의 왕녀 아리아드네Ariadne는 테세우스를 사랑하여 그에게 검과 실을 주었다.
이 실의 끝을 미궁의 입구에 매어놓음으로써 그는 길을 잃지 않고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한 뒤 무사히 밖으로 나와, 다른 아테네인과 함께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섬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 그리스의 키클라데스 제도 가운데 가장 큰 낙소스Naxos 섬에 아리아드네를 혼자 떼어놓았으며, 아테네 항구 가까이 배가 이르렀을 때 무사함의 표시로 흰 돛을 달기로 한 약속을 잊었기 때문에 부왕 아이게우스는 비탄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빈 분리파의 멤버 칼 쇼르스케Carl Schorske는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의 격렬한 싸움을 예술의 자유를 구가하는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정치적 행위라고까지 주장했다.
또한 클림트는 폴리스Polis, 즉 국가도시의 보호자이자 오스트리아 의회의 공식상징인 아테나Athena 여신이 이 장면을 통과하게 했다.
여기서 클림트가 19세기의 역사주의적 고전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과 저항을 위해 전용하고 있음을 본다.
반항에 대한 선언서로서의 포스터는 아이러니하게도 빈의 검열관이 클림트에게 테세우스의 알몸을 덮도록 강요함으로써 훼손되고 말았다.
후에 찍은 포스터에서는 영웅의 생식기가 부조화로운 나무줄기로 가려졌다.

클림트는 동시대인들을 당혹하게 한 에로티시즘Eroticism 그리고 죽음의 문제들을 주로 다뤘다.
그러나 미적 양식화와 풍부한 장식의 이용이 그 충격을 완화시켰다.
이런 경향은 클림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와 같은 젊은 분리파 화가의 경향과는 대조되었다.
실레의 뒤틀린 인물은 관람자에게 섹스와 관능성을 직접 대면하게 했다.
클림트는 8년 동안 23회의 분리파전을 이끌면서 일본미술 전시회, 인상주의 전시회 등 훌륭한 외국작품들을 소개하여 빈을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고,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미술의 씨를 뿌리는 데 기여했다.
그중에서도 1902년에 개최된 제14회 분리파전은 분리파 사상 가장 중요한 전시회로 기록되었다.
21명의 예술가가 참여하고 관람자의 수가 5만8천 명으로 여태까지의 분리파전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
한 전시회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방문한 건 빈 분리파의 위상, 나아가서는 클림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전시장 내부 디자인을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다.

분리파 건물 중앙 전시장에 라이프치히Leipzig의 상징주의 조각가, 판화가 막스 클링거Max Klinger(1857-1920)가 작곡가로서의 베토벤의 위대함을 나타낸 조각 <베토벤 Beethoven>(1902)이 놓여졌다.
악성 베토벤의 얼굴은 근심에 차 있고 무엇인가에 몰두해 있는 모습이다.
상아와 보석으로 장식된 이 작품은 고전주의의 엄격함과 낭만주의의 자유를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분리파전의 하이라이트는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 Beethoven Frieze>였다.
<베토벤 프리즈>는 전시가 끝나면 지워 없애기로 한 벽화였으므로 클림트는 싼 재료를 사용했다.
그는 격자로 된 나무 위에 바른 플래스터에 그리면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석 도금한 압정, 거울조각, 색유리단추와 가짜보석 등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분리파전의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정되면서 이를 재현하고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197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구입하여 많은 경비와 시간을 들여 복원하고 1984년 <빈 1870-1930, 꿈과 실재 Vienna 1870-1930, Dream and Reality>란 전시를 통해 처음 소개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정부는 원작 크기의 복제화들을 제작하여 여러 전시회를 통해 소개했으며 원화는 현재 분리파 건물 지하전시장에 있다.
1984년 한스 홀라인Hans Hollein(1934-) 교수에 의해 복원된 <베토벤 프리즈>는 클림트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며 아르누보 상징주의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관람자가 바라보는 정면 벽에 인간의 <행복의 열망 The Yearning for Happiness>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나약한 인류의 고통>, <고통 받는 나약한 인류는 강하고 잘 무장한 외부인에게 행복을 간청한다.
그의 강력한 무기와 내면에 있는 연민과 야망은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원동력이 된다> 등을 표현했으며, 측면 벽에는 투쟁의 결과를 나타냈는데 다음과 같다.
<행복에 대한 열망은 시에서 달성된다 The Yearning for Happiness Finds Fulfillment in Poetry>, <예술은 우리 스스로 순수 기쁨과 순수 행복 그리고 순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이상적 영역으로 인도한다>, <파라다이스의 천사들의 합창, ‘기쁨, 가장 순수한 활기의 거룩한 당신’, ‘전 세계에 대한 키스’>. 정면 벽과 측면 벽 사이에 이 주제들과 연계해서 다음과 같은 <적대적인 힘 Hostile Force>이 묘사되었다.

세기말의 감각적 에로티시즘이 넘쳐흐르는 <베토벤 프리즈>에 대해 전시 카탈로그는 19세기 독일 미술과 철학의 중심주제 가운데 하나인, 악과 부도덕에 대항하는 영웅적인 투쟁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다는 낭만주의적 서사로 설명하고 있다.
베토벤의 창조성을 기리는 것이 주제인 프리즈는 추상적인 디자인이란 점에서, 디자인의 단순성이란 점에서, 그리고 응용미술의 극치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사고는 19세기 응용미술에서 잘 나타났고,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의 응용미술은 이런 점에서 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클림트는 호프만이 설계한 실업가 아돌프 슈토클레트Adolph Stoclet 저택에 일련의 벽화를 제작했는데 <슈토클레트 프리즈 Stoclet Frieze>이다.
이 작품들은 아르누보와 그의 관계를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력에서의 이정표이다.
절충적이며 장식적인 이 작품들은 매우 다양한 비유럽 미술인 비잔티움과 이집트의 고대미술 그리고 일본화에 토대를 두고 있다.
<베토벤 프리즈>에 나타난 강인한 유겐트슈틸 인물이 아닌 평면적이고 양식화된 인물을 보여준다. 마주 보는 벽면에 장식된 벽화는 반쯤 옆으로 선 젊은 여성의 모습 <기대 Expectation>와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키스 The Kiss>에 다시 등장하는, 포옹하고 있는 한 쌍의 <충만 Fulfillment>이다.
열정적인 포옹 속에 한 쌍의 연인이 서로 얽혀 있는 <키스>는 금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종교화의 성상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남녀의 사랑을 미화시킨 것이다.
남자 의상에 나타난 추상적 무늬의 네모난 장식과 여자 의상의 타원형 장식이 성별처럼 조화를 이루어 에로스가 제공하는 환희를 더욱 고조시킨 작품이다.
소용돌이를 이루며 가지를 펼친 ‘생명의 나무’가 묘사된, 입구 양쪽 벽의 패널화에는 베른하르트 판코크Bernhard Pankok(1872-1943)와 같은, 뮌헨의 유겐트슈틸 미술가들에게 퍼져 있던 일원론적 사상이 엿보인다.
‘생명의 나무’는 식당의 정사각형 체크무늬 대리석 바닥과 대조를 이루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스코틀랜드 아르누보>




클라이드Clyde 강변에 위치한 글래스고는 19세기 말에 산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30km가 넘는 자연발생적 포구를 통해 부흥한 글래스고Glasgow는 켈트어로 Glas Ghu로 ‘푸른 골짜기’란 뜻이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석탄광업, 제철업, 화학공업, 조선업 등이 시작되었고 특히 조선업은 19세기 초에 번영했다.
이곳에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들어섰다. 한때 담배와 솜 가공지였던 이 도시는 거대한 철광석 및 석탄매장지가 발견됨으로써 철강생산지로 변모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이 도시는 제국 내에서 런던 다음가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빈처럼 이 도시에도 강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조장한 강력한 시행정부가 존재했다.
이런 팽창의 결과로 빈처럼 이 도시에도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이 생겨났으며 그들 가운데 몇몇은 아르누보의 후원자가 되었다.
부유한 계층은 민족적 자긍심과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에 자극을 받아 점차적으로 문화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일본에서는 목판화를 들여왔다.
켈빈 그로브Kelvin Grove에는 시립미술관이 건립되었으며, 1891년에는 아르누보의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인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자포니즘 양식의 유화를 사들여 소장했다.
이 미술관을 위해 휘슬러는 자신의 사후에 아틀리에에 남아 있는 작품 모두를 글래스고에 보내도록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찰스 레니 매킨토시>




글래스고 태생의 스코틀랜드 건축가, 화가, 디자이너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1868~1928)는 1868년 글래스고에서 경찰공무원의 열두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소아마비와 근시로 인해 약간의 장애를 가졌던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재능을 보였으며 열여섯 살 때 존 허친슨John Hutchinson의 건축사무실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 밖에도 그는 나중에 글래스고 미술학교가 된 공예학교 야간반 강의를 들었다.
매킨토시는 1888년 글래스고의 건축가 두 사람이 설립한 허니맨앤드케피에Honeyman & Keppie 회사에 제도사로 취직했고, 그곳에서 미술학교 동창인 허버트 맥네어Herbert McNair(1868-1955)를 만났다.
매킨토시는 1896년에 맥네어 그리고 맥도널드 자매 마거릿 맥도널드Margaret MacDonald(1865~1933), 프랜시스Frances MacDonald(1873-1921)와 함께 ‘4인 그룹 The Four’을 결성했다.
그래픽 디자이너와 가구 및 공예 디자이너였던 맥도널드 자매는 글래스고 미술학교에서 금속공예, 금세공 및 자수를 공부했다.
이들은 그곳에서 결혼하게 될 매킨토시와 맥네어를 알게 되었다.
맥네어는 1899년에 프랜시스와 결혼했고 매킨토시는 1900년에 마거릿 맥도널드와 결혼했다.
매킨토시 부부는 아틀리에와 전시공간을 겸한 집에서 살았다.
4인 그룹은 켈트 미술과 라파엘전파의 작품을 전범으로 삼았으며, 그 밖에 신비학과 벨기에 사징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미술공예운동의 슬로건에 충실해 식사도구에서 커튼에 이르기까지 세부 실내장식 하나하나를 직접 디자인했다.
그러나 4인 그룹의 수명은 짧았다. 주요 작품들은 1897년과 1905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뿐이다. 작업을 단순화하기 위해 장식은 맥도널드 자매가 담당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구상과 공간 배치를 맡았고 공간에서 여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직선과 곡선을 골고루 사용했으며 사각형과 장미꽃 모양의 장식, 흰색과 검정색을 두루 사용했다.
미술잡지들이 이들의 활동을 지지했으며, 그들은 런던, 파리, 뮌헨, 빈, 토리노 등지의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다.

매킨토시는 상징주의 느낌이 나는 개성적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는 1891년에 이탈리아를 여러 차례 여행하고 1894년에는 잉글랜드 남부로 열네 번의 스케치여행을 떠났다.
그는 1894년에 맥네어와 마거릿 그리고 그녀의 자매인 프랜시스와 함께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글래고스 미술학교Glasgow School of Art(1896년에 설립 시작)와 캐서린 크랜스턴Catherine Cranston의 찻집과 같은 1895년 이후의 작품으로 가장 잘 알려졌다.
두 시기에 걸쳐서 건립된 글래고스 미술학교는 글래고스의 강력한 산업적, 자치적 전통을 결합시킨 것으로 양식상의 발전을 보여주므로 그의 작품 연구에 출발점이 된다.
마거릿과 프랜시스 맥도널드의 작품을 환기시키는 학교의 본관은 시가 개최한 공모전에 출품된 작품을 토대로 1896년에 설계되어 그 후 3년 동안 건축되었다.
정문 위의 카메오Cameo 조각을 프랜시스가 1896년경에 제작한 주석거울 <정직 Honesty>과 비교하면 매킨토시와 그녀의 작품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술학교 건축물은 훗날 걸작으로 인정받았지만 당시의 반응은 냉담했으며, 건물의 수수하고 공리적 성격은 아무런 반발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미술학교 디자인에서 매킨토시는 이국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많은 선례들에 의존했다.
건물 외관에서 19세기 글래스고 건축에 보이는 간결한 석재의 엄숙함이 엿보인다.
세부장식에서는 상징주의의 영향이 발견되는데 북쪽 벽면의 창문을 따라 배열된 장미 모양의 철제장식은 1890년대 중반 매킨토시의 수채화 속의 선적인 꽃을 닮았다.
1896년에 그린 수채화 <보인 부분, 상상된 부분 Part Seen Imagined Part>에는 후광을 두르고 공중에 떠 있는 여성이 식물줄기에 감겨 있으며, 여러 개화단계의 양식화된 장미꽃이 머리 위에 얹혀 있다.

캐서린 크랜스턴Catherine Cranston은 1896년에 매킨토시에게 아가일Angyle 가 114번지에 소재하는 자신의 찻집을 포함해서 여러 찻집에 일부 또는 전체 실내장식을 할 것을 의뢰했다.
캐서린은 1875년에 글래스고에 처음으로 찻집을 연 성공한 차 수입상의 딸로, 그녀의 아버지는 크랜스턴 찻집회사Cranston's Tea Rooms Ltd는 1905년경에 25만 파운드의 무상환 사채를 발행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캐서린은 1878년에 아버지로부터 독립했다.
매킨토시가 캐서린을 위해 한 첫 작업은 부캐넌Buchanen 가에 있는 찻집을 위한 상징주의적 벽면 장식이었고, 2년 뒤 아가일 가 찻집의 내부수리 때 가구와 조명설비의 디자인을 맡았다.
1903년에 내부를 장식한 소시홀 가에 소재한 윌로 찻집Willow Tea Rooms은 더 큰 규모였다.
윌로 찻집이 개점하자 평론가들은 매킨토시의 독창성이 절정이 이르렀다고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윌로 찻집의 가구는 근대적이었다.
매킨토시와 마거릿은 기하학적 형태와 범상치 않은 가구의 스케일, 대담한 조명, 종업원의 유니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총체적 시각 경험에 이바지하도록 설계했다.
여러 층에 걸쳐 작은 방들로 나뉜 공간의 규모와 분리는 아늑한 느낌을 주며, 높은 등받이의자로 둘러싸인 각 테이블에 보이는 사적 공간의 자유는 그런 효과를 가중시켰다.
웅장한 육면체 모양의 의자는 윌로 찻집의 여주인 캐서린을 위해 제작된 살롱의 전면과 후면 사이에 배치되어 서로 다른 공간을 분할하는 건축적 기능을 수행했다.
근대성이 부각된 브뤼셀의 백화점 그리고 아늑하고 혁신적인 도시의 은신처인 글래스고 찻집에서 아르누보 양식은 성공적인 상업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제8회 빈 분리파전이 1900년에 성대하게 열렸을 때 매킨토시는 아내 마거릿, 프랜시스, 멕네어와 함께 출품했다.
전시회에는 찰스 로버트 애슈비와 그의 수공업길드의 작품들도 대거 소개되었다. 제8회 빈 분리파전에 매킨토시가 초대된 것은 그가 열성적인 호프만과, 친영주의자인 빈 공방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베른도르퍼와 접촉한 뒤의 일이었다.
매킨토시와 마거릿은 전시회에서 ‘스코틀랜드 방’을 선보임으로써 평론가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스코틀랜드 방’은 그와 그의 아내가 합께 작업하던 글래스고의 잉그램Ingram 가 찻집에 걸기로 예정된 마거릿의 패널화 <5월의 여왕 May Queen>과 1900년에 공사 중이던 그들의 메인스Mains 가 아파트에서 가져온 흰색 전신거울 등으로 장식되었다.
같은 해 발간된 <베르 사크룸> 특별호에서 매킨토시 부부의 작품이 특집으로 다루어졌다.
매킨토시 부부는 과로를 핑계로 정중히 거절했지만 1902년의 보석 전시회에 초대받았고, 같은 해에 베른도르퍼는 매킨토시에게 자신의 새 저택 음악실 설계를 의뢰했다.
매킨토시는 종종 마거릿과 가구디자인과 실내장식을 공동으로 작업했는데 그의 작업은 아르누보의 독특한 작풍을 확립하고 매너리즘 작가의 곡선미를 특징으로 보여주었으나 이 양식과 관련된 꽃 장식은 피했다.

건축가로서 매킨토시는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절충적인 아카데미즘과 “과거 역사물의 재유행”에 강력히 반대했다.
반면에 건축설계에서는 기능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개척했다.
그는 공간을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교묘하게 다루었는데, 이런 점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로스, 독일 건축가들 페테르 베렌스Peter Behrens(1868~1940)와 한스 &#54344;치히Hans Poelzig(1869~1936) 등과 같은 순수주의자의 작업을 예기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의 그의 건축 활동은 1899~1910년에 글래스고 근처에 일련의 주택을 지음으로써 전개되었다.
외관의 몇몇 세부적인 면들은 17세기 스코틀랜드 건축과 유사하지만 반면에 절제되고 역동적인 구조는 20세기 전반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데 스테일De Stijl 양식을 예견했다.
데 스테일운동은 회화와 가구 디자인 등의 장식미술, 인쇄술, 건축 등에 영향을 끼쳤지만 이 그룹이 추구한 양식과 그것이 목표로 한 여러 양식의 긴밀한 공동 작업을 실현한 것은 주로 건축에서였다.
후크 반 홀란트에 있는 근로자 주택단지(1924-27)는 야코뷔스 요하네스 피테르 오우트Jacobus Johannes Pieter Oud(1890-1963)가 설계한 것으로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 신조형주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명쾌함과 엄격함 및 질서정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데 스테일 운동에 참여하여 구성적인 건축을 발표한 오우트는 암스테르담 공예학교와 델프트Delft 공과대학에서 수학했다.

매킨토시 부부의 가장 유명한 주택 힐하우스Hill House는 1902년과 1904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글래스고 미술학교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 주제의 대비를 좀 더 명료하게 보여준다.
글래스고 외곽에 있는 헬렌스버그Helensburgh의 부촌에 소재한 힐하우스는 글래스고의 부유한 출판업자 월터 블래키Walter Blackie(1860-1953)를 위해 디자인되었다.
스코틀랜드 지방 고유의 의미가 담긴 외관의 삭막한 회반죽 처리는 내부의 호화스럽고 세련된 실내와 대조를 이루었다.
실내장식은 색채에 있어 남성적, 여성적 성격을 부여하는 상징주의 개념에 기초했으며, 특히 서재와 침실이 가장 남성적이고 여성적이었다.
전통적으로 남성 전용클럽이나 웅장한 저택의 총기실과 같이 남성적 환경이 특징인 각진 형태의 서재의 어두운 색채는 침실의 부드러운 아이보리색과 대조를 이루었다.
벽은 양식화된 핑크색 장미로 장식되었는데, 이는 마거릿의 채색 석고 패널화에 보이는 여성의 성 및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궁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장미의 심장 The Heart of the Rose>은 힐하우스가 설계되기 한 해 전인 1902년 제1회 토리노 국제근대장식미술전International Exposition of Modern Decorative Art에 출품되었다.

매킨토시는 1902년 맨체스터의 북부미술가조합Northern Artworker’s Guild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자신의 목표가 “아무리 하찮더라도 모든 것을 위한 적합한 형태, 장식, 디자인의 선택에서 세심한 분별”의 산물인 “무수한 세부의 종합이나 통합”이라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