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





금세공사이자 동판조각가의 아들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는 빈에서 태어났고 14살 때에 이미 재능을 보여 빈의 공예미술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정도였다.
여기서 7년 동안 공부하고 동생 에른스트Ernst와 동료 미술가 프란츠 마치와 함께 미술가회사를 만들었다.
세 사람은 1883년에 벽화와 천장화 등 큰 주문을 받았다.
1886년에는 빈의 시민극장의 계단부에 프레스코 작업을 시작했으며 1891년에 마카르트Makart(1840-88)가 시작한 예술역사 박물관 계단부를 마무리한 것이 성공을 거두었다.
에른스트가 타계한 1892년 이후 클림트는 아카데미의 회화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을 발견했다.
1897년 50명의 젊고 비판적인 미술가 그룹이 미술가 카페 그린슈테들에서 오스트리아의 조형예술가 연합인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클림트가 대변인이자 회장이 되었다.

클림트가 제1회 빈 분리파전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에는 제도권을 탈퇴함으로써 미술의 정통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분리파의 행동이 반영되어 있다.
클림트는 이런 반항을 아테네 젊은이들을 해방하기 위해 포스터 상단에 머리는 소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를 살해하는 테세우스Theseus를 극적으로 묘사했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Aigeus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 아이트라Aithra의 고향인 트로이젠Troezen에서 성장하고 청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일러주는 대로 큰 바위를 들어 올려 그 밑에 부왕 아이게우스가 숨겨둔 왕가의 검과 샌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가지고 아테네로 향해 길을 떠났다.
그는 아테네인이 크레타Creta 왕에게 보내도록 강요받고 있던 젊은 남녀 각 7명 가운데 끼여 크레타 섬으로 갔다.
그들은 섬의 미궁 속에 사는 미노타우로스의 밥이 될 운명이었는데, 크레타의 왕녀 아리아드네Ariadne는 테세우스를 사랑하여 그에게 검과 실을 주었다.
이 실의 끝을 미궁의 입구에 매어놓음으로써 그는 길을 잃지 않고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한 뒤 무사히 밖으로 나와, 다른 아테네인과 함께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섬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 그리스의 키클라데스 제도 가운데 가장 큰 낙소스Naxos 섬에 아리아드네를 혼자 떼어놓았으며, 아테네 항구 가까이 배가 이르렀을 때 무사함의 표시로 흰 돛을 달기로 한 약속을 잊었기 때문에 부왕 아이게우스는 비탄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빈 분리파의 멤버 칼 쇼르스케Carl Schorske는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의 격렬한 싸움을 예술의 자유를 구가하는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정치적 행위라고까지 주장했다.
또한 클림트는 폴리스Polis, 즉 국가도시의 보호자이자 오스트리아 의회의 공식상징인 아테나Athena 여신이 이 장면을 통과하게 했다.
여기서 클림트가 19세기의 역사주의적 고전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과 저항을 위해 전용하고 있음을 본다.
반항에 대한 선언서로서의 포스터는 아이러니하게도 빈의 검열관이 클림트에게 테세우스의 알몸을 덮도록 강요함으로써 훼손되고 말았다.
후에 찍은 포스터에서는 영웅의 생식기가 부조화로운 나무줄기로 가려졌다.

클림트는 동시대인들을 당혹하게 한 에로티시즘Eroticism 그리고 죽음의 문제들을 주로 다뤘다.
그러나 미적 양식화와 풍부한 장식의 이용이 그 충격을 완화시켰다.
이런 경향은 클림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와 같은 젊은 분리파 화가의 경향과는 대조되었다.
실레의 뒤틀린 인물은 관람자에게 섹스와 관능성을 직접 대면하게 했다.
클림트는 8년 동안 23회의 분리파전을 이끌면서 일본미술 전시회, 인상주의 전시회 등 훌륭한 외국작품들을 소개하여 빈을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고,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미술의 씨를 뿌리는 데 기여했다.
그중에서도 1902년에 개최된 제14회 분리파전은 분리파 사상 가장 중요한 전시회로 기록되었다.
21명의 예술가가 참여하고 관람자의 수가 5만8천 명으로 여태까지의 분리파전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
한 전시회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방문한 건 빈 분리파의 위상, 나아가서는 클림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전시장 내부 디자인을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다.

분리파 건물 중앙 전시장에 라이프치히Leipzig의 상징주의 조각가, 판화가 막스 클링거Max Klinger(1857-1920)가 작곡가로서의 베토벤의 위대함을 나타낸 조각 <베토벤 Beethoven>(1902)이 놓여졌다.
악성 베토벤의 얼굴은 근심에 차 있고 무엇인가에 몰두해 있는 모습이다.
상아와 보석으로 장식된 이 작품은 고전주의의 엄격함과 낭만주의의 자유를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분리파전의 하이라이트는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 Beethoven Frieze>였다.
<베토벤 프리즈>는 전시가 끝나면 지워 없애기로 한 벽화였으므로 클림트는 싼 재료를 사용했다.
그는 격자로 된 나무 위에 바른 플래스터에 그리면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석 도금한 압정, 거울조각, 색유리단추와 가짜보석 등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분리파전의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정되면서 이를 재현하고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197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구입하여 많은 경비와 시간을 들여 복원하고 1984년 <빈 1870-1930, 꿈과 실재 Vienna 1870-1930, Dream and Reality>란 전시를 통해 처음 소개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정부는 원작 크기의 복제화들을 제작하여 여러 전시회를 통해 소개했으며 원화는 현재 분리파 건물 지하전시장에 있다.
1984년 한스 홀라인Hans Hollein(1934-) 교수에 의해 복원된 <베토벤 프리즈>는 클림트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며 아르누보 상징주의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관람자가 바라보는 정면 벽에 인간의 <행복의 열망 The Yearning for Happiness>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나약한 인류의 고통>, <고통 받는 나약한 인류는 강하고 잘 무장한 외부인에게 행복을 간청한다.
그의 강력한 무기와 내면에 있는 연민과 야망은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원동력이 된다> 등을 표현했으며, 측면 벽에는 투쟁의 결과를 나타냈는데 다음과 같다.
<행복에 대한 열망은 시에서 달성된다 The Yearning for Happiness Finds Fulfillment in Poetry>, <예술은 우리 스스로 순수 기쁨과 순수 행복 그리고 순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이상적 영역으로 인도한다>, <파라다이스의 천사들의 합창, ‘기쁨, 가장 순수한 활기의 거룩한 당신’, ‘전 세계에 대한 키스’>. 정면 벽과 측면 벽 사이에 이 주제들과 연계해서 다음과 같은 <적대적인 힘 Hostile Force>이 묘사되었다.

세기말의 감각적 에로티시즘이 넘쳐흐르는 <베토벤 프리즈>에 대해 전시 카탈로그는 19세기 독일 미술과 철학의 중심주제 가운데 하나인, 악과 부도덕에 대항하는 영웅적인 투쟁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다는 낭만주의적 서사로 설명하고 있다.
베토벤의 창조성을 기리는 것이 주제인 프리즈는 추상적인 디자인이란 점에서, 디자인의 단순성이란 점에서, 그리고 응용미술의 극치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사고는 19세기 응용미술에서 잘 나타났고,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의 응용미술은 이런 점에서 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클림트는 호프만이 설계한 실업가 아돌프 슈토클레트Adolph Stoclet 저택에 일련의 벽화를 제작했는데 <슈토클레트 프리즈 Stoclet Frieze>이다.
이 작품들은 아르누보와 그의 관계를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력에서의 이정표이다.
절충적이며 장식적인 이 작품들은 매우 다양한 비유럽 미술인 비잔티움과 이집트의 고대미술 그리고 일본화에 토대를 두고 있다.
<베토벤 프리즈>에 나타난 강인한 유겐트슈틸 인물이 아닌 평면적이고 양식화된 인물을 보여준다. 마주 보는 벽면에 장식된 벽화는 반쯤 옆으로 선 젊은 여성의 모습 <기대 Expectation>와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키스 The Kiss>에 다시 등장하는, 포옹하고 있는 한 쌍의 <충만 Fulfillment>이다.
열정적인 포옹 속에 한 쌍의 연인이 서로 얽혀 있는 <키스>는 금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종교화의 성상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남녀의 사랑을 미화시킨 것이다.
남자 의상에 나타난 추상적 무늬의 네모난 장식과 여자 의상의 타원형 장식이 성별처럼 조화를 이루어 에로스가 제공하는 환희를 더욱 고조시킨 작품이다.
소용돌이를 이루며 가지를 펼친 ‘생명의 나무’가 묘사된, 입구 양쪽 벽의 패널화에는 베른하르트 판코크Bernhard Pankok(1872-1943)와 같은, 뮌헨의 유겐트슈틸 미술가들에게 퍼져 있던 일원론적 사상이 엿보인다.
‘생명의 나무’는 식당의 정사각형 체크무늬 대리석 바닥과 대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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